임경선서울에서 태어나 요코하마, 리스본, 산과 울부, 오사카, 뉴다. 도쿄에서 성장했다. 2005년부터 글을 쓴 이래, 신문 『엄마와 연애할때』 『나라는 여자』 『태도에 관하여『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자유로울 것』『교토에 다녀왔습니다』, 소설 『어떤 날 그녀들이』 『기억해줘』 『나의 남자』 『곁에 남아 있는 사람』 등을 펴냈다. 네이버 오디오클립 요조와 임경선의 교환일기‘를 진행 중이다.

지난 늦여름, 아빠를 엄마 곁으로 보내드리고 나는 상실의 슬픔과 사후의 현실적인 문제들로 마음이 더 깊이 지쳤다. 때로는 인간에 대한 절망과 환멸의 감정이 나를 압도했다. 그즈음 이었다. 내 곁의 딸을 보면서 아. 내가 지금 이 나이였을때 그곳에 있었지. 깨닫고 미소 짓게 된 것은, 그렇게 기억속에 묻어두었던 리스본의 존재가 내 안에서 점점 커져갔다.
문득 그 시절 내가 보고 만지고 느낀 경험들을 딸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 싶었다. 다시 갈 수 있을 거라고는 그런 생각도.
로 해보던 리스본이 갈수록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지었다. 리스본은 뭐랄까, 당시 같이 살았던 유일한 자식으로서, 부모님에 관한 가장 농축된 기억이 서려 있는 장소였다. 리스본에 가면 감정적으로 완전히 무너질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러다가도 마음이 차분해지면, 그들이 가장 생생하게 삶을 살았던 공간에서 그들을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곳에서 환하게 웃던, 갓 마흔 살 눈부신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영원히 각인하고 싶었다. 생의 마지막 날들의 고통스럽고 쓸쓸한 모습으로 간직하기에는 내마음이 너무 아팠다.
- P11

리스본에 가기로 마음을 먹자 거짓말처럼 나는 평론해.
고, 그 평온함은 이내 상상치도 못한 설렘의 감정으로 변해 내안에서 부풀어 올랐다. 결심했다. 딸아이를 데리고 리스본에가자고,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많이 쉬고 많이 자자고, 내키는 대로 걸어 다니고,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하면 그곳에서 아낌없이 시간을 보내자고, 가끔은 과거의 장소들이 궁금하겠지만 지나치게 감상적이 될 것 같으면 무리하진 말자고,
그래도 느끼는 감정 모두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딸에게서 내모습이 겹쳐 보일 때마다 그 아이를 품에 안아주자고, 그렇게앞으로의 날들을 살아가게 해줄 힘을 얻으러 가자고,
- P12

이 이상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까. 이미 이것으로 너무나충분한 것을,
그러니까 윤서야.
이제는 너의 시대야.
인생의 모든 눈부신 것들을 다 너에게 넘길게.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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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구원
임경선 지음 / 미디어창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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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경선 작가의 이름을 들은 건 "어떤 날에 그녀들이" 책 광고에서 처음이다. 그리고 "태도에 관하여"라는 궁금했지만 온라인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건 "다정한 구원"이었다. 제목에서 끌렸다. "구원"도 좋은데 "다정"하기까지 하다니 완벽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산문집이려니 했는데 뜻밖에도 리스본 여행기다. 리. 스. 본.

 

  세상이 온통 회색빛이기만 하던 때였을 것이다. 특별하게 무엇을 주신 적은 없지만 거기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던 엄마가 세상을 떠나신 뒤 부엌을 같이 쓰는 방을 얻어 동생과 둘이 지냈다. 많이 다르고 많이 닮기도 한 여동생과는 떨어져 있을 땐 그리운 존재였으나 함께하면서 우리는 애증의 절벽에서 서로에게 창을 겨누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둘 다 고아처럼 의지가지없이 지내온 세월의 보호색이 되어준 뾰족한 창이 정작 고아가 되어버렸을 때는 상대를 향해 겨누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휴전의 시간은 한수산 소설을 읽으며 같은 페이지에 눈물 자국을 남기거나 라디오를 같이 들을 때뿐이었다. 그렇게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검은 돛배"를 들었다.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는 외로움의 방에 갇힌 우리를 거센 파도가 청청한 해변으로 데려다주었다. 가슴을 두드리는 전주와 애절한 목소리는 아직도 피를 철철 흘리는 상처에 연고처럼 스며들어 딱지를 만들어주었다. 창이 무뎌진 것은 아니지만 창을 내려놓은 순간들이 늘어났다. 파두를 그렇게 만났고 파두의 본고장 리스본을 알게 되었다. 내게 리스본은 파두와 동의어다. 아련하고 먹먹하게 그립고도 머나먼 곳. 혹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20대 같은.

 

  여행을 다녀온 적이 언제인가 돌아본다. 짧게 든 길게 든, 가깝게 든 멀리든, 혼자든 여럿이든... 오래되었다. 코로나가 성행하기 이전 겨울이었나 싶다. 천만 년 전 일처럼 아득하다. 그런데 리스본, 아직 직항로도 없는 심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머나먼 곳 리스본에 가볼 수 있을까? 나지막한 천정의 식당에 앉아 파두를 듣게 될 수 있을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리스본을 작가를 통해 만난다. 그에게 리스본은 열 살 때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곳이고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상실감에 허우적거릴 때 열 살의 딸아이를 데리고 열 살의 자신을 찾아서, 그 시절을 함께한 부모님을 찾아서 그렇게 만나는 리스본이다. 여느 여행기와도 달랐고 기대했던 "구원"을 내게 주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에게는 "구원"이었겠기에 부러운 시선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추억을 가지고 있는 작가에게 부러웠고 그런 추억을 가질 열 살 윤서(딸)도 부러웠다. 열 살, 열한 살 내 인생에서도 가장 따뜻한 유년이었을 그 나이. 아직 아버지가 계시던 집안은 평화로웠다. 쑥불이 타는 마당의 평상에 누워서 탱자나무 가시로 다슬기를 빼내먹으면 별들이 얼굴 위로 우수수 쏟아져 내리고는 했다. 다음 날 아침에 보면 별 대신 다슬기 껍데기가 가득했다. 어느 날 엄마는 키우던 닭을 잡아서 쫄깃한 살이 씹히던 닭죽을 끓여주셨고, 어떤 날은 팥을 삶고 칼국수를 밀어 팥칼국수를 만들어 주시곤 했다. 나는 그 이후로 그 팥칼국수보다 맛있는 팥칼국수를 먹지 못했고 그 여름밤의 별 보다 더 많은 별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아니,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이다. 같은 분위기, 같은 사람들은 없으니까. 양수장 집 마당의 평상이 나에겐 리스본이었고 드들강이 테주강이었구나 싶다.

 

  책을 덮고 오랜만에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파두들을 들었다. 여러 버전의 "검은 돛배(Barco Negro)"를 찾아들었다. 여전하다. 파두, 진실은 심금을 울린다. 그런데 달라진 것이 있다. "어두운 숙명(Maldcao)"이 더 좋았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른다. 그래도 꿈꾼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도시 리스본을 만나게 될 어느 때를. 그 오래된 골목의 오래된 식당에서 식당만큼 나이 든 의자에 앉아 파두를 듣게 될 자유로운 어느 때를. 우리에게 "다정한 구원"은 그 어느 때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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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보면 너나없이 아프다. 마음이 아픈 사람 천지다. 근래에 조용하고 빠르게 확산하는 현상 중 하나가 공황장애, 공황발작이다. 의료 관련 통계를 들먹이지 않아도 주변에 공황발작을겪는 사람이 급격하게 늘고 있다는 걸 피부로 실감한다.
공황발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느낌이 망치처럼 날아오는 증상이다. 그 순간 당사자는 죽을 것 같은공포를 생생하게 감각한다. 그런 현상이 몇 분간 지속된다. 인간이경험할 수 있는 최극단의 공포다. 그런 경험을 한두 번 하면 일상 전체가 두려움에 휩싸인다. 언제 어디서 그 광폭한 불안이 자신을 쓰나미처럼 덮칠지 알 수 없다. 예측할 수 없으니 대비할 수 없고 대비할 수 없으니 불안은 더욱 증폭된다.
- P35

정상급 연예인 중에서 공황장애를 고백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팬들에게 그들은 선망의 대상이자 품을 이룬 사람들이다. 안티팬도 있겠지만 그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호감들의 관심과 애정을 받고 있으니 대중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연예인으로서는 최종 목표를 달성한 거나 마찬가지다. 정상에 올라 맛보는개인적 성취감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주머니까지 두둑하다.
애정 과임이 골치 아프지 결핍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사람들이왜 공황장애 행렬의 맨 앞줄을 차지하고 있는 걸까.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의 좌절은 이해할 수 있지만 꿈을 이룬 사람의 좌절은 도대체 무엇일까. 꿈을 이뤄도 좌절하고 못 이뤄도 좌절을 피할 수 없다.
면 꿈의 실현 여부와 좌절은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 P36

‘나‘가 흐려지면 사람은 반드시 병든다. 마음의 영역에선 그게 팩트다. 공황발작은 자기 소멸의 비랑 끝에 몰린 사람이 버둥거리며 보내는 모르스 부호 같은 급전(完)이다. "내가 희미해지고 있어요. 기의 다 지워진 것 같아요"라는 단말마다. 공황발작의 원인을 생물학적 요인 중심으로 판단하면 증상을 없애기 위해 약물치료에 보다 치중하겠지만, 그러다 보면 공황발작이 의미하는 개인의 심리적 상태에 대한 집중과 해결은 놓지기 쉽다.
사람은 나를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에게 끌린다. 사람이 가장 매력적인 순간은 거침없이 나를 표현할 때다. 모든 아기가 아름다운 것도 그 때문이다.
- P39

공황발작은 곧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지만 절대 멎지 않으며, 죽을것 같은 느낌이 생생하지만 물리적으론 절대 죽지 않는 병이다. 공황발작 자체로 사람이 죽지는 않지만 자기 소멸의 끝에서 탈진한 사람이 스스로 자기 삶을 거둬들이는 경우는 꽤 있다. 심장이 약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워가며 살던 삶의 끝자락에서 더없이 기진맥진해져서 생 전체에서 마침내 손을 놓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내 삶이 나와 멀어질수록 위험해진다.
- P41

부산에 도착한 희망버스를 막무가내로 세우고 버스에 올라 젊은여성들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폭력을 휘두른 사람들도 노인이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아이를 잃고 거리를 떠돌 때 그들에게 면전에서폭언을 퍼부은 이들도 대개는 노인들이었다. 어버이연합에서 태극기집회로 이어지는 동안 젊은이들에게 노인의 존재는 고약함 그 자체로 자리 잡은 느낌이다.
- P43

모든 아이가 다 다르듯 모든 노인도 당연히 다 다르다. 개별적 존재들이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은 노인을 노인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이 전부인 존재로 바라본다. 노인이 아닌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런 시선은 그 존재에 대한 폭력이다. 누군가와 생생한 관계를맺고 있는 유기체가 아닌 ‘노인 일반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 존재에대한 무례다. 그 시선은 그의 개별성을 몽땅 휘발시킨다.
- P44

그런데 노인이 그 당당한 폭력을 후회한 것도 자기 존재에 주목해주고 자기 삶에 귀 기울여준 사람(나)을 만나서였다. 변하지 않을 것같은 사람도 예외 없이 변하게 하는 그 지점이 바로 ‘자기‘다. 사람은자기에 공감해 주는 사람에게 반드시 반응한다. 사람은 본래 그런존재다.
노인만 그런 게 아니다. 학교나 부모에게 주목받지 못하는 청소년들, 좋은 대학을 못 다니고 변변한 직장이 없다는 이유로 형제나 또래 중에서 제대로 눈길 한번 받지 못하는 청년들의 삶도 한 개별적존재로서 인정받고 주목받지 못한다는 점에선 노인의 삶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 P47

젊든 늙든 우리가 왜 이렇게 아픈지 이젠 알 것 같다. 자기 존재에주목을 받은 이후부터가 제대로 된 내 삶의 시작이다. 거기서부터건강한 일상이 시작된다. 노인도 그렇고 청년이나 아이들도 그렇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 P47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는 옳다‘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다. ‘너는 옳다‘는 존재에 대한 수용을 건너뛴 객관적인 조언이나 도움은 산소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에게 요리를 해주는 일처럼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저 사람은 지금 내가 산소가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시키는 인증 작업일 뿐이다.
- P50

‘네가 옳다는 확인을 받으면 "집을 나가겠다, 죽겠다. 죽이겠다"는따위의 말들은 이내 아침 이슬이 된다. ‘당신이 옳다‘는 말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으면 아침 이슬과 먹살잡이하는 허무한 일을 더 이상하지 않게 된다.
"당신이 옳다."
온 체중을 실은 그 짧은 문장만큼 누군가를 강력하게 변화시키는말은 세상에 또 없다.
- P53

심리적으로 벼랑 끝에 있으면서도 낌새조차 내보이지 않고 소리없이 스러지고 있는 사람이 많은 현실이라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
라는 질문 하나가 예상치 않게 심리적 심폐소생술(CPR)을 시작하게만들기도 한다. 이 질문은 심장 충격기 같은 정도의 힘을 발휘한다.
간단한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은 초등학생이 거리에서 갑자기 쓰러진 성인의 목숨을 구했다는 실화처럼 심리적 CPR 또한 마찬가지다.
심리적 CPR은 꼭 배워야 한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살리게 된다.
- P58

의사의 얘기를 들으며 엄마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습을 아이가 봤던 모양이다. 그걸 보고 아이는 ‘아, 우리 엄마가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구나라는 걸 느끼며 안심했다고 한다. 자기가 엄마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었다는 확인이 뿌리 같은 안정감을 준 것이다. 약물과 상담 치료를 다 거부했지만 아이는 엄마의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고 편안해졌다. 아이의 그 말(느낌)을 내게 전하며 엄마는 강물처럼 울었다.
- P72

질병이 아닌 일상의 영역에선 사람에 대한 자연스럽고 상식적인반응이 때로 가장 효과적인 치유다. 그것이 사람 마음에 더 빠르게스미고 와닿는다. 그런 일의 위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탁월한치유자가 된다. 어떤 고통을 당한 사람에게라도 그 고통스러운 마음에 눈을 맞추고 그의 마음이 어떤지 피하지 않고 물어봐줄 수 있고,
그걸 들으면서 이해하고, 이해되는 만큼만 공감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도움이 되는 도움이다.
- P76


이 땅에서 사는 일은 죽음 충동을 특별한 질병의 징후라고 여길수 없을 만큼 일상적이지도 평화롭지도 않다. 모든 게 전투적이다.
불행이 이웃처럼 가깝다. 지난 십여 년간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세계최고 수준이다. 주위에 자살이나 비극적 사고로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지인이 한두 명쯤은 있다.
- P77

비상 상황이지만 내용을 미리 잘 알아서 일상 속으로 끌어들이면내 일상을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고도 대처가 가능하다. 오히려 그게더 안전할 수 있다.
일상의 외주화로 인한 결과는 어떤 모습일까. 예를 들어 내 삶의고통과 외로움이 우울증이라는 의사의 진단 영역으로 한계가 지어지는 순간 나의 존재 자세는 다시 소외되고 우울증 환자 일반으로대상화되기 쉽다. 고통으로 피폐해졌을 때 사람은 무엇보다 정서적공급이 시급한데, 그런 순간에 결정적으로 정서적 소외가 일어나는것이다.  - P81

감정도 그렇다. 슬픔이나 무기력, 외로움 같은 감정도 날씨와 비슷하다. 감정은 병의 증상이 아니라 내 삶이나 존재의 내면을 알려주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우울은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높고단단한 벽 앞에 섰을 때 인간이 느끼는 감정 반응이다. 인간의 삶은죽음이라는 벽, 하루는 24시간뿐이라는 시간의 절대적 한계라는 벽앞에 있다. 인간의 삶은 벽 그 자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우울한 존재다.
- P86

대기업 CEO였다가 은퇴한 남자가 있다. 퇴직 후 몸이 가라앉고 쉽게 화가 났다. 본인도 감지할 만큼 피해 의식이 생기고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졌다. 무력감을 떨쳐보려고 운동도 시작하고 중국어 학원에도 등록했다. 다음날 특별한 약속이 없어도 현역 시절처럼 기상알람을 새벽 5시에 맞추고 잠자리에 든다. 긴장이 풀어질까 봐 그런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은퇴 후에 우울중으로 고생한다"고귀띔한다.
그의 무기력은 은퇴 후 우울증이라는 병인가. 해결하고 극복해야할 과제인가. 아니다.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순하게 수용해야 할 삶의 중요한 감정이다. 그의 무력감은 은퇴 이후의 생활에 제대로 적용하지 못해서 생긴 병적인 감정이 아니다.
은퇴 후에 이런 감정이 없다면 그게 외려 정상적이지 않은 것이다.
퇴직 후에도 여전히 의욕과 활력이 넘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를걱정스럽게 바라보게 될 것이다. 방부제를 많이 넣어서 썩지 않는 햄버거처럼 퇴직이라는 삶의 자연적인 흐름을 무언가로 계속 막다 보면 결국에는 터진다 - P87

죄의식과 무력감은 겉보기엔 자신만 갉아먹는 아무짝에도 쓸모..
는 감정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유사 이래 가장 강한 위력을내포한 사회적 힘을 이끌어냈다. 죄의식과 무력감의 연대가 해낸 일이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감정들은 삶의 나침반이다. 약으로 함부로 없앨 하찮은 것이 아니다. 약으로 무조건 눌러버리면 내 삶의 나침반과 등대도 함께 사라진다. 감정은 내 존재의 핵이다.
- P92

엄밀히 말하면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맞고 살아온 사람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내밀한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존재 자체에대한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부모에게 맞던 그 아이가 느꼈던 무력감이나 수치심에 대한 이야기가 그의 존재 자체에 더 가까운 이야기다. 가정 폭력에 시달린 아이가 느끼는 감정은 자라면서 분노나 무감각 등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다. 그런 감정들을 떠올리고 얘기할수 있다면 그것이 존재 자체에 대한 얘기다. 내 상지의 내용보다 내상처에 대한 내 태도와 느낌이 내 존재의 이야기다. 내 상처가 나가아니라 내 상처에 대한 나의 느낌과 태도가 더 ‘나‘라는 말이다.
내 느낌이나 감정은 내 존재로 들어가는 문이다. 느낌을 통해 사람은 진솔한 자기 존재를 만날 수 있다. 느낌을 통해 사람은 자기 존재에 더 밀착할 수 있다. 느낌에 민감해지면 액세서리나 스펙 차원의
‘나‘가 아니라 존재 차원의 ‘나‘를 더 수월하게 만날 수 있다. ‘나‘가 또렷해져야 그 다음부터 비로소 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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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는 정혜신이다. 그녀와 나는 일년 363일(이들 땐 거 맞다.)24시간 함께 있다. 무엇보다 연인이고 같은 일을 하는 도반이었으며서로에게 스승이었고 특별하게는 전우였다. 심리적 참전의 현장에서그녀는 치유자로 나는 심리 기획자로 서로를 보호하는 전우로 함께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심리적 침전의 현장은 참혹했다. 국가 폭력이든 가정사든 불행한 사고든 트라우마 피해자들의 고통은 상상을초월한다. 집단적 고통처럼 보이는 일도 한 개인에 이르면 각자가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개별적 고통이 된다.
- P5

실제로 얼굴빛이 달라진다. 밤새 끔찍한 생각을 하거나 심하게 싸우고 아침에 거울을 보니 얼굴이 악마처럼 변해 있었다는 고백을많이 들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그러니 얼굴빛이 바뀐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누구라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비유적으로, 어떤 이는 들것에실려 상담실에 들어갔고 어떤 이는 성난 코뿔소처럼 펄펄 뛰며 들어갔다. 그런 이가 비포애프터처럼 으스러진 뼈를 추슬러 걸어 나왔고 사슴 같은 눈으로 순하게 나왔다.
- P6

이 책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치유자 정혜신의 현장 경힘과 내공을 집대성해 놓은, 쉽고 전문 지인 책이다. 읽는 제이 아니라 행하는재이다. 심폐소생술(CPR)은 내용보다 내용을 정확하게 몸에 익히는게 중요하다. 그래야 위급한 상황에서 사람을 구한다. 이 책은 심리적CPR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그냥 책이라기보다 행동 지침서다.
이해하고 알아야 행동할 수 있으니 읽는다고 표현하지만 궁극은
‘공감‘ 행동 지침서다. 세상에 무수한 사랑이 있어도 누구의 사랑이냐에 따라 전혀 다르듯 그 흔하디 흔한 공감이 무슨 새로운 원리냐고 따져 묻는다면 정혜신의 공감‘이라고 도를 달아야겠다.
이해가 쉽도록 ‘적정심리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성혜신의공감‘을 얹었다. 이론 정립과 검중에 3년쯤 걸렸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정신과 의사라는 전통적인 틀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자격증이있어야 치유자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게 치유자라는 생각이 확고하다. 정신의학 쪽이나 관련 자격증을 가진 전문가들은 불편할 수도있다. 예를 들어 우울증 진단 등과 관련한 부분 등은 도발적이다 못해 전투적이다.
- P7

정혜신의 공감이 심리치유의 모든 것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심리치유의 베이스캠프는 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오랜 경험을 가진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검증도 했다.
상담가, 목사, 학교 선생님, 신부, 수녀, 직장인 멘토 등 심리적으로누군가를 도와주려는 이들이 보면 좋겠다. 상처 입은 가까운 사람을연민하고 보호해 주려는 사람이 보면 좋겠다. 일반인들에게, 엄마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다는 책 「삐뽀삐뽀 119소아과처럼 상비 치유지침서쯤을 예상했다. 몇 번 읽었다고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지 말고필요할 때마다 펼쳐 읽고 되새김질하면 결정적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나 같은 심리 전문가도 그러고 있고 그때마다 도움을 받는다.
- P8

엄마는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지. 선생님도.
혼내서 얼마나 속상했는데 엄마는 나를 위로해 줘야지. 그 애가 먼저 나에게 시비를 걸었고 내가 얼마나 참다가 때렸는데, 엄마도 나보고 잘못했다고 하면 안 되지."
아아, 아이의 그 말 엄마는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내 편이어야지.
내게 물어봐야지어린이 집에서 왕따 경험을 한 여섯 살 아이가 오랜 시간에 걸쳐엄마의 세심하고 과감한 지지를 받은 후 홀가분한 표정으로 했다.
는 말.
"엄마, 고마워. 나는 이제 자유야."
그게 이 책의 전부다. 정혜신의 공감‘의 핵심이다.
- P10

어떤 단어가 사냥매처럼 마음속에 내리꽂히거나 저녁 강물처럼흘러 들어올 때가 있다. 적정기술‘이란 단어가 그랬다. 이런 사람 살리는 개념이라니. 심플하고 아름다웠다. 매혹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프리카 어느 마을 식수가 부족해 아이들은 아침 일찍 물동이를지고 물을 길러 나선다. 몇 시간을 걸어가서 물을 길어 이고 지고 되돌아오는데, 아이들의 불완전한 걸음과 부실한 물동이 때문에 절반은 돌아오는 동안 흘러서 사라진다. 그 딱한 사정을 접한 디자이너가 사람들과 힘을 합쳐 큰 공(드럼통) 모양의 물통을 만들었다.
그후 아이들의 삶은 달라졌다. 아이들은 물을 꽉 채운 물동이를놀이하듯 굴리며 돌아온다.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양의 물을 운반 - P11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저장도 가능하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의 삶도달라졌다. 아이들은 물 긷느라 갈 수 없었던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아주 간단한 물통 디자인 하나가 바꿔놓은 일상의 기적이다.
흔하디 흔한 적정기술의 한 사례다.
적정기술은 화성 이주를 꿈꿀 정도로 환상적인 과학기술이 넘치나는 시대에 간단하고 일상적인 기술의 결핍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주목에서 비롯한 개념이다. 전 지구적으로는 식량이 넘쳐나는데 굶어 죽는 사람이 그토록 많은 이유를 따져묻는 것과 비슷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윤택한 삶이 최종 목표인 과학, 그것도 과학만능주의 시대에 여유롭고 행복한 사람이 넘쳐나지 않는 건 이상하다. 어떤 이들은 그 이유를 우리에게 최첨단 과학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일상에 필요한 적정기술과 그것의 적정한 분배가 이뤄지지 않아서라고,
요약했다. 소박하지만 위대한 성찰이다. 그래서 적정기술의 개념과적용 사례를 처음 접했을 때 흥분했다.
- P12

최근 15년을 1970~80년대의 고문 생존자와 자살이 이어지던 해고 노동자 집단, 세월호 유가족 등 여러 형태의 국가 폭력 피해자들과함께 있었다. 현장에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생생하게 들었고 회복이불가능할 것 같은 그들의 내상을 목격했다. 트라우마 현장에선 심리치유 관련 전문가 자격중이 무용지물이라는 걸 숱하게 목격했다.
사회적 재난 현장에는 심리치유 전문가들뿐 아니라 시민운동가.
일반 자원활동가 등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그런데 초기 몇 개월이지나면 (치유 관련) 자격증을 가진 전문가들은 현장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오랜 세월 각기 다른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접한 일이다.  - P13

세월호 참사 때도 마찬가지였다. 초기에 많은 (심리치유) 전문가들..
이 현장에 왔지만 이내 거의 사라졌다. 대신 집에 앉아만 있을 수없어서 무작정 왔다‘는 자원활동가들의 숫자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들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며 울면서 무슨 일이는 했다. 피해자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했으며 한없이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슬픔과 분노, 무력감을호소하면서도 유가족들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
그들의 이런 마음과 태도는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일들이다. 그들의 행동과 눈빛은 트라우마를 받은 이후 세상과 사람을 통째로 불신하게 된 피해자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결정적인 위로다.
아무 자격증 없는 자원활동가들은 현장에서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찾고 역할은 해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정부와 정치권력은 상처힙은 피해자들을 길바닥에 패대기치고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하지만 자원활동가들의 한결같은 일상적 활동과 그들의 공통 정서인 슬품과 무기력이 만들어낸 ‘슬픔과 무기력의 거대한 연대‘는 피해자들을 구하는 동아줄이 되었다.
- P14

다른 많은 트라우마 현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일반 자워활동가들은 처음엔 혼돈 속에서 갈광질팡하더라도 마침내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하지만 자격증이 있는 사람들은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처음엔 전문 분야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뚜렷하게뭔가 치유를 하겠다며 나서지만 곧 존재감을 잃는 경우가 적지 않다. 생업이 바빠서 자신의 일터로 돌아간 경우보다 피해자들이 더이상 그들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거나 심지어 거부를 당해서 현장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왜 그럴까. 왜 심리치유 전문가일수록 현장에서 실패하는가. 사람목숨이 경각에 달린 현장에서 전문가가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많은 경우 그렇다면 그때의 자격증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있는가.
내가 관련 자격증을 가졌으니 오해를 무릅쓰고 정신의학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정신의학은 신경증, 정신 질환 등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기 위한 임상적, 학문적 틀 위에 세워진 의학의 한 분야다.
- P15

트라우마 현장에서 피해자가 전문가에게 도움이 되는 도움을라고 절규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의 실체는무엇인가 ‘도움이 되는 도움은 왜 도움이 되고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은 무엇 때문에 도움이 안 되는가.
정신과 의사들은 트라우마 현장에서도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충분히 듣기 전에 약물 처방전을 꺼내는 경우가 많다. 이는 피해자의고통을 증상을 중심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며 중상은 질병의 근거가된다. 우울증의 원인을 생물학적 기전으로 설명하며 약물로 증상을줄여주는 일은 의사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하고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 P18

그 기저에는 무엇보다 자신의 아픈 몸을 아무것도 아닌 듯이 가게 여기지 않길 바라는 속마음이 있다. 자신의 고통을 진지하게대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몸이 건강할 때도 인간의 그런 바람이나 욕구는 거의 본능적이다. 하물며 몸이 아플 때야 더 말해 무엇까.
그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고통을 호소하는 상대의 말을 질병 중심으로 생각했다. 의학적으로 질병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모든 상태는 상이며, 정상인 경우라면 의사인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믿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냉정한 의학 기능공인 셈이었다.
- P21

진료실이 아닌 곳에서 사람들의 속마음을 접하며 나는 알게 됐다.
이곳에선 심리적 진검 승부가 필요하구나, 그들은 자신을 환자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나도 당연히 그들을 환자로 생각하지 않왔다.
그동안 진료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환자로 규정하고 의사라는우월적 위치에 대한 자각 없이 살았던 것이다. 진료실 밖에서 휘 가운이라는 보호막 없이 그들의 속마음을 들으며 그 사실을 확실히알았다. ‘환자‘라는 틀로만 바라봐도 괜찮은 사람이란 세상에 없다.
그런 시각은 옳지도 않지만 맞지도 않는 말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처가 있다. 남보다 특별하게 예민한 구석도있다. 거기에서 예외인 사람은 없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 P22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사람들을 통해서 경험한, 내가 생각하는 치유의 핵심 원리와 구조를 내 시선으로 말할 것이다. 숨쉬고 살아가는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들 삶의 속살을 바탕으로 ‘도움이 되는 도움을 제공할 수 있었으면 한다. 내 삶은 물론 내 옆 사람을 도울 수있고 때론 나도 모르게 내가 내 이웃을 살릴 수도 있는 실제적인 치유 념을 그간의 내 경험을 중심으로 얘기할 것이다.
적정한 기술이 사람의 삶을 바꾸듯 적정한 심리학 이야기도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론이 아닌 실생활에서 실질적인 위력을 갖는실용적인 심리학 정도로 바꾸어 설명할 수도 있겠다. 나와 내 옆 사람의 속마음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소박한 심리학을 나는 ‘적정심리학‘이라 이름 붙였다.
만약 조리사 자격중을 가진 사람만 음식을 할 수 있다는 법이 있다면 우리 일상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허기를 면하려면 조리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의 식당 앞에서 하루 두세 번씩 긴 줄을 서야 할 것이다.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그렇게 해소하며 살아야 한다면 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감을 유지하고 살기 어렵다.
- P25

물리적 허기만큼 수시로 찾아오는 문제가 인간관계의 관중과 고로 인한 불편함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매번 자격중을 가진 의사나 상담사를 찾을 수는 없다. 끼니 때마다 찾아오는 허기만품이나잦은 문제라서 그때마다 전문가를 찾아야 한다면 일상이 불가능해진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집밥 같은 심리학이 필요한 이유다.
일상에서 배고픔이 해결되지 않으면 짜증이 많아지거나 폭력적으로 변하거나 무기력해진다. 마찬가지로 삶의 바탕인 인간관계의 갈등들이 해결되지 않고 쌓이면 마음도 엇나가고 삶도 뒤틀린다. 안정적인 일상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집밥 같은 치유다. 집밥 같은 치유의 다른 이름이 적정심리학이다.
- P26

거의 모든 심리적 어려움의 원인을 뇌에서 찾고 있는 이 시대에 나는 공 모양의 물통처럼 소박하지만 강력한 위력을 지닌 심리적 힘을말하고자 한다. 그 힘은 즉시 작동한다. 약물치료 보다 더 빠르게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다. 삶의 고통에 실질적으로 대처하는 실용적인 힘이다. 그 힘의 중심이 공감‘이다.
내가 말하는 공감은 경계를 인식하는 공감이다. 본문에서 자세히밝힐 예정이다.
‘경계를 품은 공감, 그 입체적인 공감은 집밥 같은 치유, 적정심리학의 핵이다. 잘 모르고 보면 "어, 저걸 가지고 필 할 수 있단 말이야"
라고 할 수도 있지만 공감의 위력은 어떤 힘보다 강하다.
이것은 부유하는 가난하든, 강자는 약자든, 많이 배웠든 못 배웠든, 노인이든 아이는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공감이 뭔지 제대로 알게되면 종이로 접은 새가 비둘기가 되어 날아가는 마술을 마음에서경험하게 될 것이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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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과거가 아니다. 현재이고 미래다.‘
아니 에르노의 말을 곱씹으며 그들의 지나간 사랑의 흔적들을 본다. 쓰러진 하이힐, 뒤집어진 니트, 바닥에 버려진바지, 브래지어를 밟고 있는 남성용 부츠, 어쩌면 거기에는사랑의 행위에 대한 기억이 아닌, 육체가 빠져나간 부재의자리가 쓰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지난밤을 빌려 오늘을 이야기했고, 욕망이 끝나고 남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흔적들 사이에서 상실의 전조를 예감하고 있었다.
이 사진들이 찍힌 시기에 아니 에르노는 유방암을 앓았다. 자신의 경험을 이용하여 ‘삶‘을 쓴다는 이 작가는 몇 개월 동안 폭력적인 작업들이 벌어졌던 자신의 몸을(그녀의말처럼 지어내거나, 미화하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옮겼다.
종양이 자란 한쪽 가슴, 한 움큼씩 빠져나간 머리카락, 항암제를 부착하고 있는 체모가 없는 몸까지. 그곳에는 편재하 - P176

는 다음과 그것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있고, 작가는 그것을 육체의 ‘부재‘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서술한다. 거기놓여 있는 지극히 물질적인(옷, 가구, 주방, 문 등등) 요소들은 형체가 없어 손에 쥐기 힘든 모든 것들(사랑, 죽음, 욕망,
부재까지도)의 유일한 증거들이다.
나는 그녀와 그가 남겨놓은 이 사건의 현장에서 수사가나아가야 할 방향을 여러 번 잃었다. 이곳에서 사라진 것은육체인가, 사랑인가, 욕망인가. 여기에 남은 것은 부재인가죽음인가. 무엇을 증명하고,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생(生)을 위해 싸워나가는 사람(아니 에르노), 연인이 치러내는 전투를 통해 죽음을 배우는 사람(마크 마리), 우리는그들이 무음으로 주고받은 대화를, 비밀스러운 몸짓들을,
어느 날 아침, 행위가 지나가고 폐허처럼 남겨진 것들을 담은 사진 속에서 알아차린다. 이곳에서 지난밤의 사랑과 욕망은 중요치 않다. 결국에는 사라지고 말 모든 것들을 최선을 다해 붙잡는 그들의 ‘시도만이 의미를 갖게 될 뿐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그들의 계획에동참하고 만다. 육체가 빠져나간 이 에로틱한 공연의 관객으로서, 글로 쓰인 사진을 눈과 손으로 더듬으면서, 살과 뼈가 없이 이뤄지는 에로스를 받아들이면서, 단 한 번도 이겨 - P177

본 적 없는 시간을,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사진으로, 글로 뛰어넘기를 어느덧 소망하게 된다.
어느 폭염에 그들이 즐겨 듣던 음악과 풀밭 위에서의 식사, 브뤼셀의 호텔과 당신을 베니스로 데려가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죽음과 함께 사는 여자의 미래가 온통 내 것이 되는 순간이 있다.
타인의 흔적은 그렇게 나의 현재가 됐다. 나는 그곳에 적힌 생을 오늘의 내 것처럼 산다. 그리고 오늘, 그들의 생을살아 버린 나의 미래를 어렴풋이 예감한다. 어쩌면 도처에널린 죽음의 신호가, 욕망과 열정의 부재가 나를 기다리고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녀처럼, 혹은 그처럼 그 삶을 배우고,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 책의 번역을 마치면서, 이 사진의 용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두 작가에게 이런 답을 전해 주고 싶었다.
그것은 언젠가 사라져야 하는, 유한한 운명을 지닌 모든것들의 가능성이라고, 하나의 순간에 갇혀 버린 상(像)이 언젠가 점과 선의 연속으로 이뤄진 시간을 탈출하여 무한히팽창해 나가는 꿈을 꾸게 만드는 희망이라고.
‘그러나 삶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을 - P178

지 않는다. 그것은 소리가 없으며, 형태도 없다.
- 삶을 쓰다‘ (아니 에르노) 서문 中에서글을 쓰는 일을, 소리도 없고 형태도 없는 삶에게 자신의 인생을 빌려주는 일이라고 말하는 작가가 건네는 이 가능성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유용한 무언가가 되기를,
우리의 언어로 옮겨진 이 책의 용도가 그것이 되기를 꿈꿔본다.
2018년 9월, 클레르몽페랑에서신유진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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