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은 힘이 세다.


사람들이 부르는 별칭 중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전 치유자‘라는 말이다. 어깨가 무거운 별이지만 그것이 내가 하고 있는 일의 거의 전부이기도 하다. 현장 지유자로서 내가 가진 결정적 무기를 딱 하나만 꼽으라고 하면, 공감이다.
공감은 힘이 세다. 강한 위력을 지냈다. 쓰러진 수도 일으켜 세운다는 낙지 같은 힘을 가졌다. 공감은 돌처럼 꿈쩍 않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경각에 달린 목숨을 살리는 결정적인 힘도 가졌다. 치유의 알파와 오메가가 공감이라고 나는 믿는다. 삶의 생생한 저자거리에서 상처받은 사람들과 마음을 섞고 감정을 공유한 끝에 얻은깨달음이다.
- P115

공감에 대한 오해나 편견은 셀 수 없이 많다. 시간을 아주 많이다면 공감의 극적인 효과를 혹시 볼지도 모르겠지만 하루하루고 여유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공감 같은 일대일 아날로 그 소동은 적절한가 과연 그만큼 효과가 있을까, 그보다는 좀더 최적인 소통 방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조바심이 생길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상처 입은 마음을치유하는 힘 중 가장 강력하고 실용적인 힘이 공감이다. 가장 빠르고 정확하고 효율적이다. 공감은 수십 년간 천문학적인 연구비를 투입하여 최첨단 의학, 약학, 뇌과학, 생리학, 유전학, 생물학 등의 연구방법론을 통해 개발된 어떤 항우울제보다 탁월하다. 동시에 그런 약물과 다르게 부작용이 전혀 없다. 압도적인 효과가 있는데 부작용도없으니 비교가 무의미하다.
비유적으로, 항우울제 등의 약물이 극심한 갈증으로 고통받는 사람의 동네 어귀에 살수차가 와서 물을 쏟아 놓고 가는 것이라면, 잘버려지고 정확한 공감은 목이 타는 사람에게 다가와서 나뭇잎 띄운물 한잔을 직접 건네는 일이다.
- P116

공감은 내 등골을 배가며 누군가를 부축하는 일이 아니다. 그 방식으론 상대를 끝까지 부축해 낼 수 없다. 둘 다 늪에 빠진다. 공감은너를 공감하기 위해 나를 소홀히 하거나 억압하지 않아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누군가를 공감한다는 건 자신까지 무겁고 복잡해지다가마침내 둘 다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너를 공감하다 보면 내 상처가 드러나서 아프기도 하지만 그것은동시에 나도 공감받고 나도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공감하는사람이 받게 되는 특별한 선물이다.
- P121

공감은 다정한 시선으로 사람 마음을 구석구석, 찬찬히, 환하게볼 수 있을 때 닿을 수 있는 어떤 상태다. 사람의 내면을 한 조각, 한조각 보다가 점차로 그 마음의 전체 모습이 보이면서 도달하는 깊은이해의 단계가 공감이다. 상황을, 그 사람을 더 자세히 알면 알수록상대를 더 이해하게 되고 더 많이 이해할수록 공감은 깊어진다. 그래서 공감은 타고나는 성품이 아니라 내 걸음으로 한발 한발 내딛으며얻게 되는 무엇이다.
- P125

공감의 원리도 같다. 질문을 통해서 상대의 상황과 마음이 거울에비춘 듯 또렷하게 보이면 공감은 절로 일어난다. 공감을 받은 이의속마음은 더 열리고 자기 기억이나 자기에 대한 느낌들을 더 잘 떠올리고 말하게 된다.
구석구석 비춰주는 거울처럼, 구석구석 빼놓지 않고 나를 담고 있는 누드 사진처럼 거부감 들지 않고 다정하게, 그러나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공감 유발자다. 자세히 알아야 이해하고 이해해야 공감할 수 있다. 공감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히는 습관이다.
- P129

상처를 덧나게 하는 질문이 따로 있다기보다 상대방에게 던진 질문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거나 오해를 하고 있다는 증거나 나를 비난하는 의도를 품고 있다고 느껴졌을 때 사람은상처를 받는다. 그러니 그런 마음이 전혀 아니라는 내 입장을 먼저알려주고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걱정 없이 물어볼 수 있다.
- P128

공감은 그저 들어주는 것,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정확하게 듣는 일이다. 정확하게라는 말은 대화의 과녁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공감에는 과녁이 있다. 과녁에서 멀어지는 대화는지리멸렬해진다.
모임에서 자기만 깊이 관심을 가진 주제를 꺼내서 장황하게 얘기를 시작한 그에게 나는 첫 질문부터 "역사는 됐고, 너는?"이라고 내질문의 최종 목표를 분명히 했다. 과녁을 분명히 정하고 말한 거다.
역사는 중요한 것이냐 아니나, 지금 그 얘기를 할 자리냐 아니냐, 그게 의미가 있냐 없냐는 논쟁은 내 관심 밖이었다.  - P132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과 공감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성취에 대한 인정과 주목을 존제에 대한 주목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에매달리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먹어도 기대만큼 포만감이 없다.
물론 존재 자체에 대한 공감도 없고, 오른 석차에 대한 반응도 없는무관심보다는 낫다. 하지만 밥 없이 반찬으로만 배를 채운 사람처럼아무리 많이 먹어도 편안한 포만감이나 포만감으로 인한 안정감이없다. 반찬으로만 채운 배는 한계가 있다.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과 공감은 갓 지은 밥 같은 것이다. 잘 지은밥이 있으면 간장 하나만 가지고도 든든한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
밥이 기본이라서다.
- P142

그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면 사람은 그런 외형에 덜 휘둘리며 살 수 있게 된다. 공감은 쓰러지는 사람을 일으켜 세울 만큼 큰힘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힘은 그가 고요하게 가만히 있어도,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자기 자신만으로도 초조하지 않을수 있는 차돌 같은 안정감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공감의 힘은 그렇게 입체적이다.
- P143

공감은 상처를 더 드러낼 수 있게 만들고 제대로 드러난 상처 위에서 녹아드는 연고다. 상처 위에 바로 스민다. 상처 부위를 덮고 있는 겉옷 위에 뿌리는 분무제가 아니라 옷을 젖히고 상처 난 바로 그부위 맨살에 바르는 약이다. 정확하고 집중력 있는 공감은 문제 해결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책임진다. 공감은 치유의 처음부터 끝까지를관장하는 강력한 치유제다.
- P158

사람의 감정은 항상 옳다. 사람을 죽이거나 부수고 싶어도 그 마좋은 옳다. 그 마음이 옳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주기만 하면 부술 마도 죽이고 싶은 마음도 없어진다. 비로소 분노의 지옥에서 빠져나온다.
- P167

공감자는 모든 사람과 원만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니다. 너도 많이 있지만 나도 마음이 있다는 점, 너와 나는 동시에 존중받고 공감받아야 마땅한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면 관계를 끊을 수 있는 힘도 공감적 관계의 중요한 한 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것이다. 관계를 끊는 것이 너와 나를 동시에 보호하는 불가피한 선택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울며 겨자먹기로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나에게는 파괴적인 행위고 상대에게는 자기 행동에 대해 성찰할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양쪽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결국 또다른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모든 사람과 원만하게 지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에게 공감적인 사람도 불가능하다. - P170

그러나 성인 간의 관계는 다르다.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있지만나만 잘한다고 되지 않는다. 상대가 감당해야 할 몫도 있다. 그것까지 내가 짊어질 이유는 없다.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 어떤 관계에서든 납득할 수 없는 심리적 갑을 관계가 일방적이고 극단적으로 계속된다면 이런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것이 더 건강하다. 우선 내 건강성을 지켜야만 나중을 기약할 수도 있다.
공감자는 모두와 원만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니다. 큰오빠를 보지않겠다고 한 동생의 마음도 옳다.
- P171

모든 인간은 상황에 따라 움직이고 적응하는 독립적이고 개별적 존재다. 그 사실을 믿으면 함께 울며 고통을 나누면서도 서로의 경계를인정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살아갈 힘과 근원이 된다. 눈에 보이지는않지만 존재들이 지닌 경계를 인식해야만 모두가 각각 위엄 있는 개별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 P186

내 상처가 공감 받고 치유받지 못했던 시간 동안 내 직업은 발을빼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큰 고통이었다. 선배 의사에게 정신분석상담을 받았던 몇 년의 시간이 도움이 됐지만 더 결정적인 건 상당실 카우치 위가 아닌 내 일상에서 그 시간의 백 배도 넘는 시간 동안 나의 스승이자 연인, 도반이고 반려인 남편에게 남김없이 공감받은 경험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조금씩, 천천히, 끝까지, 모든 게 바뀌었다. 나를 더충분하게 드러내고 깊이 공감받고 이해받았던 시간, 그리고 깊이 사랑받았던 시간을 거치며 내 직업은 고통이 아닌 희열로 바뀌었다. 그때부터는 누군가의 고통에 기꺼이 심리적 참전을 할 수 있다는 게축복이 되었다.
- P188

어떤 기간 동안, 어떤 특정 맥락과 상황 속에서는 내가 참고 견딜수도 있지만 나는 항상 그래야 하는 존재,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는 자기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어야 공감자가 될 수 있다. 나와 너를 동시에 공감하는 일은 양립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나와 너 모두에 대한 공감‘의 줄임말이 공감이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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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고통과 상처, 갈등을 이야기할 때는 ‘충고나 조언, 평가나,판단 (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대화가 시작된.
다. 충조평판은 고통에 빠진 사람의 상황에서 고통은 소거하고, 상황만 인식할 때 나오는 말이다. 고통 속 상황에서 고통을 소거하면 그상황에 대한 팩트 대부분이 유실된다. 그건 이미 팩트가 아니다. 모르고 하는 말이 도움이 될리 없다. 알지 못하는 사림이 안다고 확신하며 기어이 던지는 말은 비수일 뿐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일상의 언어 대부분은 충조평판이다.
- P106

고통을 마주할 때 우리의 언어는 거기서 벼랑 처럼 품어진다. 길을잃는다. 그 이상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 노느니 장독 낀다고 충조평판이라도 날려보는 것이다. 그러니 끼니처럼 찾아오는 일상의 갈등과 상처가 치유될 리 만무하다. 덧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건이 풀리지 않을 때 현장을 다시 찾는 수사관처럼 내 언어가끊어진 벼랑으로 돌아가 보자, 현장에 가는 이유는 그곳에 해결의실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 선 사람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해줘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해줄 말이 별로 필요치 않다.
그때 필요한 건 내 말이 아니라 그의 말이다. 그의 존재, 그의 고통에 눈을 포개고 그의 말이 나올 수 있도록 내가 그에게 물어줘야 한다. 무언가 해줘야 한다는 조바심을 내려놓고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떤지 물어봐야 한다. 사실 지금 그의 상태를 내가 잘 모르지 않는가.
물어보는 게 당연하다. 내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인정한다면 그에게 물어볼 말이 자연히 떠오른다.
- P107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앓다.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있으면 사람은 산다.
- P109

한 사람의 힘이 그렇게 강력한 것은 한 사람이 한 우주라서 그럴것이다. 근사한 수식이나 관념적인 언어가 아니라 마음에 관한 신비한 팩트다. 사람은 그 한 사람‘이라는 존재의 개별성 끝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은 세상의 전부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그래서 누구든 결정적인 치유자가 될수 있다.
‘나‘ 이야기, 내 존재 자체에 대한 이야기의 불씨가 지펴지면 희미하던 생명의 박동이 쿵쾅쿵쾅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 이야기에 정확하게 두 손을 대고 있는 한 사람은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심리적 CPR을 하는 사람이다. 사람 목숨을 구하는 사람이다. 두손을 그의 나‘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한 존재와 이어진 것이다. 존재와 존재의 연결이 사람에게 생명을 부여한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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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매 할머니의 시
           김승희

  저기 파출소가 있네
  잘 외워둬야지
  나를 분실할까 두려워
  외출할 땐 주민등록증을 손에 꼭 쥐고
  내 신체의 일부에 아이들 외국 전화번호를 새겨둬야 하는데
  팔에 새겨둘까 다리에 새겨둘까
  가슴에 새겨둘까
  유방 위부터 쇄골 있는 곳까지 거기 가운데가 좋겠어?
  아니면 둥글넓적한 복부 한가운데

  잊어야 좋은 것들
  잊으면 안 되는 것들 사이사이로
  백발에 맨발로 거리를 배회하다가
  착한 경찰관 아저씨의 안내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면
  아무도 없는 집
  할머니, 집에 아무도 없어요? 자제분들 안 계세요?

  그러면 바지를 내리고
  복부 한가운데 새겨둔 아이들 이름과 전화번호를 보여줘야 해?
  신이 말했잖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그러므로 나의 배에다 이름과 전화번호를 새겨놔야 해?
  아 그건 좀 아무래도......
  그러면 가슴 한복판, 양쪽 유방 위 쇄골의 영역에다 새겨서
  옷을 올리고 보여줘야 해? 하하, 그래도 그게 좀 낫겠다

  인생은 다 재미있어,
  똥오줌 그게 문젠데
  너무 제정신으로 똑 부러지게 인생을 살 필요는 없어
  초월을 못하잖아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중에서


  픽~ 웃음이 나는 시다. 웃기지만 슬프다. 요즘 말로 웃픈, 시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치매‘라는 단어만 들어도 두려움이 슬금슬금 파고든다. 치매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고,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을 시인도 알고 있다. 한때는 머리를 쓰지 않으면 치매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해서 어른들 사이에 고스톱 치는 게 유행이기도 했다. 고스톱은 점수를 계산해야 하고 상대방이 가진 패를 짐작해야 하고 손을 움직이는 운동이 계속되기 때문에 치매 예방에 좋다는 썰이 떠돌던 시절이었다.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맞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유가 깊은 시인의 치매에 대한 근심은 그저 기우이기만 한 것은 아님 또한 알고 있다. 저렇게 자연스럽고 적나라한 감정 변화와 걱정들이라니 시인의 의식은 명료하다. 혼자 지내기에 더욱 걱정의 종류는 많아질 것이다. 어디다가 연락할 곳을 적어두지, 하루하루 달라지는 기억력은 몸의 어느 부분에 문신처럼 새겨놓아야 할까? 이 현실적인 고민들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노인을 본다. 노인, 쉬운 단어이면서 어려운 단어이기도 하다. 누구도 노인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노인이 되는 것도 순식간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늙으니까. 영원히 나이들 것 같지 않았지만 지금 내 나이 또한 노인을 향해 성큼 다가가고 있다. 치매도, 노인도, 그 사람이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언제나 하고 있다. 어쩌면 죽음보다 ‘치매‘와 ‘노인‘이 더 심각한 걱정거리다. 그러나 걱정한다고 뭐가 달라지랴~! ˝인생은 다 재미있어˝ 앞서서 걱정하지 말고 오늘을 재미있게 살자고 시인은 결론 내린다. ˝너무 제정신으로 똑 부러지게 인생을 살 필요는 없어˝


  활동을 위한 시간이 있다면 게으름을 피우기 위한 시간도 있다. 카이로스다. 우리 문화는 후자가 아닌 전자만 중요시한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왕성하게 활동한 작가였지만 가끔은 모든 일을 멈추고 쉬기도 했다. 두 사람이 로마에서 보낸 여름들은 무無를 확장하는 시간이었다. 보부아르는 자신의 여러 프로젝트와 끝없는 분투를 잠시 옆에 치워두고 로마에 ˝몸을 담갔다.˝ 비버는 쉬고 있었다.
  ‘수용‘은 보부아르가 자주 쓴 단어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수용과 유사한 무언가를 이뤄냈다. 일흔다섯 번째 생일을 하루 앞둔 날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했다. ˝나이 드는 데에도 장점이 있다.˝ 니체처럼 보부아르도 지난 삶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최대한 많이, 최대한 오랫동안 즐겼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p 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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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서울에서 태어나 요코하마, 리스본, 산과 울부, 오사카, 뉴다. 도쿄에서 성장했다. 2005년부터 글을 쓴 이래, 신문 『엄마와 연애할때』 『나라는 여자』 『태도에 관하여『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자유로울 것』『교토에 다녀왔습니다』, 소설 『어떤 날 그녀들이』 『기억해줘』 『나의 남자』 『곁에 남아 있는 사람』 등을 펴냈다. 네이버 오디오클립 요조와 임경선의 교환일기‘를 진행 중이다.

지난 늦여름, 아빠를 엄마 곁으로 보내드리고 나는 상실의 슬픔과 사후의 현실적인 문제들로 마음이 더 깊이 지쳤다. 때로는 인간에 대한 절망과 환멸의 감정이 나를 압도했다. 그즈음 이었다. 내 곁의 딸을 보면서 아. 내가 지금 이 나이였을때 그곳에 있었지. 깨닫고 미소 짓게 된 것은, 그렇게 기억속에 묻어두었던 리스본의 존재가 내 안에서 점점 커져갔다.
문득 그 시절 내가 보고 만지고 느낀 경험들을 딸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 싶었다. 다시 갈 수 있을 거라고는 그런 생각도.
로 해보던 리스본이 갈수록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지었다. 리스본은 뭐랄까, 당시 같이 살았던 유일한 자식으로서, 부모님에 관한 가장 농축된 기억이 서려 있는 장소였다. 리스본에 가면 감정적으로 완전히 무너질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러다가도 마음이 차분해지면, 그들이 가장 생생하게 삶을 살았던 공간에서 그들을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곳에서 환하게 웃던, 갓 마흔 살 눈부신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영원히 각인하고 싶었다. 생의 마지막 날들의 고통스럽고 쓸쓸한 모습으로 간직하기에는 내마음이 너무 아팠다.
- P11

리스본에 가기로 마음을 먹자 거짓말처럼 나는 평론해.
고, 그 평온함은 이내 상상치도 못한 설렘의 감정으로 변해 내안에서 부풀어 올랐다. 결심했다. 딸아이를 데리고 리스본에가자고,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많이 쉬고 많이 자자고, 내키는 대로 걸어 다니고,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하면 그곳에서 아낌없이 시간을 보내자고, 가끔은 과거의 장소들이 궁금하겠지만 지나치게 감상적이 될 것 같으면 무리하진 말자고,
그래도 느끼는 감정 모두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딸에게서 내모습이 겹쳐 보일 때마다 그 아이를 품에 안아주자고, 그렇게앞으로의 날들을 살아가게 해줄 힘을 얻으러 가자고,
- P12

이 이상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까. 이미 이것으로 너무나충분한 것을,
그러니까 윤서야.
이제는 너의 시대야.
인생의 모든 눈부신 것들을 다 너에게 넘길게.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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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구원
임경선 지음 / 미디어창비 / 2019년 5월
평점 :
일시품절


 

  임경선 작가의 이름을 들은 건 "어떤 날에 그녀들이" 책 광고에서 처음이다. 그리고 "태도에 관하여"라는 궁금했지만 온라인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건 "다정한 구원"이었다. 제목에서 끌렸다. "구원"도 좋은데 "다정"하기까지 하다니 완벽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산문집이려니 했는데 뜻밖에도 리스본 여행기다. 리. 스. 본.

 

  세상이 온통 회색빛이기만 하던 때였을 것이다. 특별하게 무엇을 주신 적은 없지만 거기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던 엄마가 세상을 떠나신 뒤 부엌을 같이 쓰는 방을 얻어 동생과 둘이 지냈다. 많이 다르고 많이 닮기도 한 여동생과는 떨어져 있을 땐 그리운 존재였으나 함께하면서 우리는 애증의 절벽에서 서로에게 창을 겨누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둘 다 고아처럼 의지가지없이 지내온 세월의 보호색이 되어준 뾰족한 창이 정작 고아가 되어버렸을 때는 상대를 향해 겨누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휴전의 시간은 한수산 소설을 읽으며 같은 페이지에 눈물 자국을 남기거나 라디오를 같이 들을 때뿐이었다. 그렇게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검은 돛배"를 들었다.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는 외로움의 방에 갇힌 우리를 거센 파도가 청청한 해변으로 데려다주었다. 가슴을 두드리는 전주와 애절한 목소리는 아직도 피를 철철 흘리는 상처에 연고처럼 스며들어 딱지를 만들어주었다. 창이 무뎌진 것은 아니지만 창을 내려놓은 순간들이 늘어났다. 파두를 그렇게 만났고 파두의 본고장 리스본을 알게 되었다. 내게 리스본은 파두와 동의어다. 아련하고 먹먹하게 그립고도 머나먼 곳. 혹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20대 같은.

 

  여행을 다녀온 적이 언제인가 돌아본다. 짧게 든 길게 든, 가깝게 든 멀리든, 혼자든 여럿이든... 오래되었다. 코로나가 성행하기 이전 겨울이었나 싶다. 천만 년 전 일처럼 아득하다. 그런데 리스본, 아직 직항로도 없는 심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머나먼 곳 리스본에 가볼 수 있을까? 나지막한 천정의 식당에 앉아 파두를 듣게 될 수 있을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리스본을 작가를 통해 만난다. 그에게 리스본은 열 살 때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곳이고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상실감에 허우적거릴 때 열 살의 딸아이를 데리고 열 살의 자신을 찾아서, 그 시절을 함께한 부모님을 찾아서 그렇게 만나는 리스본이다. 여느 여행기와도 달랐고 기대했던 "구원"을 내게 주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에게는 "구원"이었겠기에 부러운 시선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추억을 가지고 있는 작가에게 부러웠고 그런 추억을 가질 열 살 윤서(딸)도 부러웠다. 열 살, 열한 살 내 인생에서도 가장 따뜻한 유년이었을 그 나이. 아직 아버지가 계시던 집안은 평화로웠다. 쑥불이 타는 마당의 평상에 누워서 탱자나무 가시로 다슬기를 빼내먹으면 별들이 얼굴 위로 우수수 쏟아져 내리고는 했다. 다음 날 아침에 보면 별 대신 다슬기 껍데기가 가득했다. 어느 날 엄마는 키우던 닭을 잡아서 쫄깃한 살이 씹히던 닭죽을 끓여주셨고, 어떤 날은 팥을 삶고 칼국수를 밀어 팥칼국수를 만들어 주시곤 했다. 나는 그 이후로 그 팥칼국수보다 맛있는 팥칼국수를 먹지 못했고 그 여름밤의 별 보다 더 많은 별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아니,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이다. 같은 분위기, 같은 사람들은 없으니까. 양수장 집 마당의 평상이 나에겐 리스본이었고 드들강이 테주강이었구나 싶다.

 

  책을 덮고 오랜만에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파두들을 들었다. 여러 버전의 "검은 돛배(Barco Negro)"를 찾아들었다. 여전하다. 파두, 진실은 심금을 울린다. 그런데 달라진 것이 있다. "어두운 숙명(Maldcao)"이 더 좋았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른다. 그래도 꿈꾼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도시 리스본을 만나게 될 어느 때를. 그 오래된 골목의 오래된 식당에서 식당만큼 나이 든 의자에 앉아 파두를 듣게 될 자유로운 어느 때를. 우리에게 "다정한 구원"은 그 어느 때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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