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렘 셔플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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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슨 화이트헤드의 책은 처음이다. 전작인 [니클의 소년들]이 워낙 떠들썩해서 알게 된 작가의 신작이라 망설임 없이 선택했는데, [니클의 소년들]만은 못하다는 평들이 눈에 띄어서 ‘안 읽은‘으로 분류되는 책 무더기 속에 한참 놓여있었다. ‘올해는 제발 쌓인 책 무더기를 줄이자‘로 비장하게 각오하고 출발한 새해라 역시 아직까지는 장바구니를 비워두고 있다. 새해 목표를 ‘책 사는 걸 참자‘라니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내년이면 지금보다 작은 평수로 입주해야 하는데 문제는 책이다. 책들을 정리하고 ‘안 읽은‘ 책 무더기를 해결해야 한다.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올해의 목표다. 얼마쯤 지킬 수 있을지는 스스로도 자신이 없지만.

  시작은 더뎠다. 읽으려고 가지고 다녔지만 첫 페이지만 열어둔 채 펼쳐 볼 짬도 없이 하루가 지나기 일쑤였다. 생각보다 업무량은 많았고 팀이 바뀐 탓에 미묘한 신경전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숲길에 서있는 기분으로 만들어버리곤 해서 정서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럴수록 책을 한 줄이라도 읽으며 숨 쉴 여유를 만들어야 하는데 책을 펼치면 눈이 뻑뻑해지고 졸음이 먼저 찾는다. 그런 고비를 지나야 한다. 호흡이 긴 책을 읽을 때는 매번 한 번씩 졸음이 고개를 숙이게 만드니까. 우선 네이버한테 [셔플]을 물어보았다. 뉴욕의 할렘가는 알지만 셔플은 뭘까? 카드놀이에서, 카드를 잘 섞어 그 순서를 바꾸는 일이란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알 듯, 알 듯도 하다. 결론적으로 읽기를 마치고 나니 [할렘 셔플]이 왜 [할렘 셔플]인지 알 것 같았다.
  1960년대의 뉴욕 할렘가 127번지에 사는 ‘레이 카니‘의 이야기는 내가 좋아했던 영화 [대부] 시리즈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나 [언터처블], [좋은 친구들]같은 갱스터 영화의 흑인 판 버전이리라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내 생각은 틀렸다. [할렘 셔플]은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버전의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사는 이야기이고 인종과 차별, 사회문제까지 포함한 묵직하고 하울링 깊은 울림을 주는 책이었다. 콜슨 화이트헤드가 두 번의 퓰리처상을 받았다는 걸 간과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언터처블 1%의 우정]에 나왔던 배우 ‘오마 사이‘나 흑인 배우의 대표 명사인 ‘모건 프리먼‘, ‘윌 스미스‘등으로 카니나, 페퍼, 프레디의 이미지가 자꾸 겹쳐졌다. 영화를 읽고 있는 듯했다. 영화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주변에서 만나는 나이 드신 분들은 삶을 얘기할 때 소설책 한 권이거나 대하소설이라거나 영화 한 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만큼 스스로가 스토리가 있고 희로애락의 한가운데를 질러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의 삶을 들어보면 일일드라마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1960년대 뉴욕 할렘가 127번지‘ 지명만으로 그림이 그려지는 소설이 나오겠고, 흑인 ‘레이 카니‘의 삶은 각색 없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시절의 1960년대처럼 그쪽도 파란만장한 과거를 가졌다. 그 과거에서 얼마나 멀리 왔을까. 우리나 그들이나. 글쎄, 눈으로 보이는 것들은 변화했겠지만 궁극적인 삶의 질이나 차별의 급이 크게 달라졌을까. 유색인종을 향한 차별과 분노들이 만들어내는 테러들을 여전히 뉴스에서 접하는데, 흑인들의 지역 ‘할렘가‘의 ‘흑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저 영화나 소설 속에나 있으면 좋겠지만 진행형의 일상일 것이다. 나 자신부터 동시에 세 사람의 외국인을 만났는데 피부색이 다르다면 이미지나 호감도가 편견 없이 작용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이미 가지고 있는 편견들이 나를 차별의 가해자로 만들기도 하고 피해자로 만들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모든 차별의 문제를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자기의 솔직한 검증.


  ˝올리버와 그의 무리는 카니의 옷에 있는 얼룩을 놀리고, 옷이 제대로 맞지 않는 걸 또 놀리고, 그에게서 쓰레기차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그 시절에 그가 어떤 아이였더라? 비쩍 마르고 수줍음이 많았으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의 절반은 더듬거림이었다. 그는 졸업반 때 키가 15센티미터나 자랐다. 성인으로서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서 어서 커야 한다는 걸 그의 몸이 알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이다. 엄마는 없고 아빠는 뒷골목을 돌아다니거나 늘어져 자고 있는, 127번가 오래된 아파트의 카니. 아침에 학교에 갈 때면 그는 빈집 문을 닫으며 그 바깥에 있는 것들에 대비해 마음을 다잡곤 했다. 하지만 올리버가 사탕 가게 앞에서, 학교 뒤쪽 계단통에서 그를 놀리던 시절에는 이미 얼룩을 말끔히 빼고, 바짓단을 올리고, 학교에 오기 전에 샤워를 제대로 하는 법을 다 익힌 상태였다. 올리버는 자기 앞가림을 제대로 하기 전, 과거의 그를 놀린 것이었다.
  그걸 끝내게 만든 건 올리버의 얼굴을 철제 파이프로 후려친 사건이었다. 세면대 아래서 빼 온 것처럼 U자형으로 생긴 파이프였다. 암스테르담가와 135번가 모퉁이의 공터에서 그 애들이 그를 둘러쌌을 때, 파이프는 카니의 손에 저절로 나타난 것만 같았다. 그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너한테 지랄하는 놈팡이를 처리하는 방법이지. 학교에서 얼굴이 퉁퉁 붓고 슬금슬금 숨어 다니는 올리버를 보자 그는 기분이 안 좋아졌다. 나중에야 그의 아버지가 훔친 타이어로 올리버의 아버지에게 사기를 쳐서 돈을 뜯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그 모든 일은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때가 그가 폭력을 쓴 마지막 순간이었다. 카니가 보기에 인생은 지금껏 배웠던 방식대로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 같았다. 온 곳은 정해져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어디로 갈지 결정하는 것이다.
  루비는 새로운 도시로 가기로 결정했고 카니는 가구업계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했다. 어린 시절 그가 알던 것과 반대이면 다 좋아 보였다.˝ - P23, 24


  ˝인생은 지금껏 배웠던 방식대로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 같았다. 온 곳은 정해져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어디로 갈지 결정하는 것이다.˝ 찬물에 세수를 하는 듯한 문장이다. 알고는 있지만 생의 어떤 날에 저런 깨달음을 갖기는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제 이만큼 살아보니 알겠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장석주의 시‘대추‘)‘처럼 주변의 시선과 질곡의 나날들이 만들어 낸 깨달음인 것이다. ‘빈집 문을 닫으며 그 바깥에 있는 것들에 대비해 마음을 다잡곤‘하는 흑인 소년의 가슴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숨이 보일 것 같다. 아무것에도 기대지 못하고 홀로 서야만 하는 어린아이가 살아내는 하루는 어른들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공포와 두려움이 숨을 참게 만드는 하루다. 그런 하루들을 딛고 카니는 ˝어린 시절 그가 알던 것과 반대‘로 살기 위해 대학을 가고 정상적인 가구 판매상이 되어 살게 된다. 사랑하는 아내 엘리자베스와 딸 메이가 있고 아내는 둘째를 가졌다. 그러나 좀 더 나은 삶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가진 게 없고 출신 성분이 빈약하다고 계속 무시하는 장인 장모가 보란 듯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하고 필요악처럼 가끔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일감을 가져다주기도 하는 사촌 프레디가 있다. 아버지가 버리고 떠난 카니를 거둬 준 이모의 아들 프레디와 카니가 함께한 시절은 둘이었기에 가능했던 많은 일들의 경험의 순간이었다. 카니는 프레디의 세계와 엘리자베스의 세계 사이에서 한 발씩 걸치고 살고 있다. 그 균형은 잠시만 삐끗해도 생애 전부를 뒤집을 수 있다. 초인적인 힘으로 그 균형을 끌고 가는 카니에게서 본인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토록 증오하고 거부하던 아버지의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아버지의 트럭과 아버지와의 인연으로 끝까지 도움을 주는 페퍼가 있고 페퍼도 인정하는 아버지를 닮은 끈기를 가진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더 합법적인 카드를 섞어 합법을 가장하고 범죄의 온상이 되는 듀크에게 복수할 수 있었다. 복수 과정은 스릴 넘치고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영화 장면이었다. 아무래도 근래 넷플릭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모양이다. 삶은 계속되고 영화는 끝이 났다. 자러 가야 한다. 새벽에 출근하려면.


  ˝힘든 삶이었다. 하지만 더 힘들게 산 사람들도 있다.
수년 동안, 바로 이 식탁에 둘러앉아서 보내는 이런 밤에 카니는 그 시절 이야기를 했다. 그건 진실이고 그의 일부였고, 이제 이 사람들이 가족이니까. 뒤늦게 그는 자신을 너무 많이 드러냈다는걸, 누군가가 쇳조각을 박을 수 있는 약한 부분을 드러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이야기는 장인 장모의 오락거리이자 유랑극이었다. 그래, 어느 크리스마스 날 일어나 보니 그와 아버지에게 파삭파삭한 고구마 한 개밖에 없어서 그걸 반으로 잘라 접시 두 개에 올리고 나눠 먹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추운 아침에 난방이 또 끊겨서 하얀 입김이 나오는 게 보였고, 아버지는 그날 정오에 집을 나가서 일주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뭐, 돌이켜보면 그 이야기에 파란만장하고 장엄한 데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의 인생에서 그 부분을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할 필요는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존스 부부는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미소를 짓거나 가끔은 깔깔 웃었다. 사실 비참한 방식으로 웃기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아니면 그가 이야기하는 방식이 재미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하곤 했었다. 그건 오래전 일이었다. 요즘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하면서 느끼는 건 이런 시기를 살아남았다는 데에서 오는 자부심이었고, 릴런드와 앨마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즐거워하는 건 그가 지금 인생에서 가진 것들과 비교하면 별것 아니었다. 그에게는 엘리자베스와 메이가 있었고, 만약 어떤 문제가 있는지 따져보고 싶다면 그에게는 수년 전의 우울한 크리스마스 아침보다 훨씬 다급한 문제가 있었다.˝- P108


  ˝내가 가끔 돈은 없어도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아.˝
  카니는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고 인정해야 했다.˝ - P160


  ˝망할. 그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은 게 실수였다. 그를 만들어낸 환경이 상관없다고 믿은 게, 혹은 그 환경을 넘어서는 게 더 나은 건물로 이사 가거나 똑바로 말하는 걸 배우는 것만큼 쉽다고 여긴 게 실수였다.‘- P184


  ˝사촌은 그와 다른 길을 택했다. 그들의 어머니가 자매였으니까 그들은 어느 정도 같은 바탕을 갖고 있는 셈이지만, 세월이 흐르며 서로 다른 길로 나뉘었다. 길 건너편에 나란히 서 있는 건물들처럼. 다른 사람들과 세월이 그들을 원래의 모양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었다. 도시는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전부 다 여기저기로 보냈다. 어떤 방향으로 갈지는 자신이 어느 정도 결정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겠다.˝ - P197


  ˝어쩌면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건 봉투가 아니라 원한과 보복일지도 모른다.˝ - P275

  ​
  ˝폭동에 대해서, 핵심이 뭐냐고 그랬었잖아요. 모든 게 계속 그대로 흘러갈 거니까 모든 저항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요.˝
  ˝거기에 대해선 내가 옳았잖아. 대배심은 그 경찰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 했어. 안 그래? 그놈은 여전히 경찰 일을 하고 있고, 맞지? 하지만 내가 그놈들을 쏜 것에 관해서 적용해 보자면 ……. 소박하게 시작해서 점점 위로 올라가는 것도 괜찮겠지.˝ - P453


  ˝그리고 별을 보고 카니는 작아졌다든지 사소해진 기분이 들지 않았다. 별을 보면 그가 인정받는 기분이 들었다. 별에겐 별의 자리가 있고 그에겐 그의 자리가 있다. 우리 모두 삶에서 우리 위치가 있다. 사람도, 별도, 도시도. 설령 아무도 카니를 보살펴주지 않고 아무도 그가 딱히 대단한 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그는 자신을 그럴듯한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트럭은 업타운으로 덜컹거리며 달렸다. 이제 그를 보라. 마천루에 달린 청동 명패는 아니지만, 모두가 125번가와 모닝사이드 모퉁이가 그의 것이라는 걸 알고, 거기에 그의 이름, ‘카니‘가 대낮처럼 훤하게 붙어 있다.˝ - P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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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박소란

바닥에 놓인 가방을 보았다
어쩌다 가방을 보게 된 건지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오 가방일 뿐이니, 말하는 가방을 보았다

여기까지 오는동안 점차 무거워진 가방을

무엇이 든 건지 알 수 없었다
큰일을 앞두고 돌아누운 이의 뒷모습처럼
묵묵한, 자세히 보면 신음도 없이 들썩이는 어깨가 먹먹한

정말 필요한 건 가방 속에 없다오
아무 것도 없다오
눈을 감는 가방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언젠가 가방을 끌어안고 달린 적이 있었다고
숨이, 아니 끈이 끊이질 듯 위태롭던 어느 밤의 가방을

가방이란 으레 그런 것이라오

가방을 되찾을 수 없었다 그 하나의 가방을

어디로 떠날 참인가요?
물어도 대답이 없는 가방을
어느 틈엔가 나타나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한 사람을 보았다

황급히 문을 여는 사람은
어떤 무게로 인해 잠시 휘청거리고, 나는 보았다
가서는 다시 오지 않을 가방을

시집 [있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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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박소란

옷장 속 가장 어두운색을 고른다
무표정한 얼굴로
숨어서, 때때로 완벽히 숨겨진 채로

나는 있다

멈춰 서 있다 사거리 횡단보도 앞
휴대폰을 만지작대며, 만지작대는 척하며 미간을 슬쩍 찌푸렸을 뿐인데
너는 그대로 나를 지나친다
휴대폰을 만지작대며

깜박이는 신호등
그늘을 펼친 가로수 아래 황급히 들어서면
겹겹의 잎으로 싸인 길을 뜻 없이 걷다 보면
또한 뜻 없는 저녁은 오고

무시로 두리번거린다
무엇을 찾듯이 어떤 우연을 바라듯이

불분명한, 나조차 나를 알 수 없는
사람이란 으레 그런 것일까

때가 되면 출근을 하고 구석 자리에 얌전히 앉아 서류철을 매만지면서
어쩌다 가끔은 아니지 이게 아니다 하는 심정이 되어 창 너머 뜨거운 시선을 부려놓기도 하는 것, 그럴 때마다
네게로 곧장 달려갈 듯이, 그럴 때마다
더욱 고요히 뭉뚱그려진 채로

나는 있다

이런 나를 뭐라고 부를까 너는

시집[있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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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는 술을 마시고, 낚시를 하고, 투우를 보러 갔면 자신의 경험에 플롯을 더해서 독자의 마음속에 떠오르는의문이 각 장면을 지배하도록 만든다. 당신이 소설을 쓰고싶지만 아침 식사를 하고, 출근을 하고, 점심 식사를 하고,아이들을 돌보는 본인의 하루밖에 떠오르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한 장면에 어떤 의문이나 불확실함을 포개어놓으면 평범한 일상에 어떤 요점과 방향이 생긴다.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아직 어린 당신의 아이가 시리얼을 바닥에 쏟고, 바로 그때 전화가 울린다. 동료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다. 그런 다음 통근 열차에서 회사 회계사를 만나는데, 그녀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재무 기록이 필요하다고말한다. 당신은 열차 밖 풍경을 감상하려고 하지만 회계사의 요청 때문에 초조해진다.  - P231

헤밍웨이의 소설처럼 이 이야기는 대체로 당신의를 설명하지만 그 위에 포개진 및 단어에 불과한 위기의당신의 행동을 전경에서 배경으로 밀어내고, 점심 식사는
갑자기 미식가의 일기에서 절제되고 긴장감 넘치는 장면의로 바뀌며, 이 장면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는 거의 언급되지도 않는다. 장편소설을 이런 식으로 쓰려면 보리에 보리를 무는 사건들을 만들어 내야 하지만, 그러한 사건들이주목을 충분히 끈다면 평범한 일상도 많이 넣을 수 있다. 대부분의 내러티브에는 디너파티에 참석하거나 자동차를 타고 갈 뿐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는 긴 장면이 등장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연한 만남이나 걸려 온 전화, 뜻밖의 문자메시지, 우회로, 방심의 순간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거나, 미스터리가 시작되거나,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진다.  - P232

어떻게 하면 삶의 무작위성에 충실하면서도 짜임새있는 책을 쓸 수 있을까? 충분한 이야기가 본능적으로 떠오르지 않는다면 잠시 멈추고 인물들의 감정과 성격의 구체적결과이자 다른 사건에 영향을 끼치게 될 행위를 떠올리 보자(닥쳐오는 마감 기한과 금전적인 문제가 사건의 좋은 원전임을 잊지 말자). 인물들의 실수로 후회와 논쟁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구체적인 문제가 생기게 하자.  - P248

마음속에 계획대략적인 계획, 또는 가장 중요한 순간 네다섯 가지 —— 이 있으면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향해 나아가기 때문에 소설을 쓰기가 더 쉽다. 지금부터 다음 50쪽까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50쪽이 끝났을 때 누군가가 다른 인물이 원하는 것을 거절하거나, 누군가 사랑에 빠지거나,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는사실은 알고 있다. 결국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으므로그 일이 벌어질 때까지의 장면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장편소설(또는 책 한 권 분량의 회고록)을 쓰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장편소설을 한 권의 책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면서 독자를 함께 데리고 가는 이야기로 생각하는 것이다.
- P249

글을 몰랐던 할머니를 떠올리면 가슴이 무척 아프다. 글쓰기, 특히 여성의 글쓰기가 행운이자 축복처럼 마음이 가는 것은 아마도 할머니 때문일 것이다. 글쓰기는 온갖 장애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존재한다. 문화적으로 강제된 문맹, 정부의 검열, 또는 지인과 친인척의 비공식적 검열처럼 명백한 것들 외에 글쓰기를 가로막는 또한 가지는 자기검열이다. 나는 여러 해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고, 친구들을 관찰하고, 나 자신을 관찰하면서 특히 여성은 아예 글을 쓰지 않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독자가 알아내지 못하도록 글을 씀으로써 자기 글을 검열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남성의 글(특히 전통적으로 침묵을 강요당해 온 집단에 속한 남성의 글) 역시 장애물을 극복해야 하지만 자기검열, 즉 말하거나 글을 쓸 수 없다는 느낌은 여성이더 자주 느껴 온 문제라고 생각한다(그리고 써 왔던 문제이기도 하다. 여성이 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여성이 말하지 못하고
쓰지 못하고, 설명하지 못한다) - P254


우리는 글쓰기가 적어도 처음에는 방종임을 안다. 글쓰기가 기쁨을 전혀 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책을 읽고 있지않을 것이다. 우리가 글을 쓰기 시작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할 글을 쓰게 될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사실밖에 없다. 그러나 글쓰기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기꺼이 노력하고, 수정하고, 비판을 받아들이고, 폭넓게 읽을 준비가 되면) 우리의 목표는 당장은 아니라도 조만간 독자들이 읽고 싶은 글을 쓰는 것, 본인만이 아니라 남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된다.  - P255


 내가 당신에게 자신감을 줄 수는 없지만, 당신은 자신같이 있는 없는 자신 있게 행동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자신 있다는 듯이 쓰면 된다. 나는 앞서 글을 쓰려면 일반적인용기만이 아니라 특정한 용기도 필요하다고, 단어를 타이핑하는 용기만이 아니라 인물 안으로 들어가서 살 용기, 등장인물이 실수를 저지르고 고통을 겪게 만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8장에서는 또 다른 종류의 용기에 대해서 쓰고싶다. 바로 이야기의 형식을 선택하고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떤 문장으로 전달할지 선택하는 용기이다. 당신은당신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들을 괴롭히는 자신감 부족을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객관적인 선택들로 이야기를 분명하게 전달할 수는 있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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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 일어난 다음에 또 다른 일이 일어나는 이야기를 쓰는 방법은 무척 많다. 전문 작가의 글을 초심자의 작품과 구분하는 것은 종종 "또 다른 일", 주로 3, 4쪽에서 이야기에 침입하는 새로운 무언가인 경우가 많다. 맨 처음에 어떤 문제가 있고, 작가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여기서 또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지? 여기서 또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지?"
라고 생각한 것처럼 새롭고 예상치 못한 사람이나 문제, 복잡성이 등장한다. 어떤 사건또는 사건들이 있고, 그런 다음이야기가 생겼다고 느껴질 만큼 중대한 일이 마침내 벌어진다. 뻔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당신이 이야기는 이야기처럼느껴진다"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생각해 낸 결심과 해결책과 비극과 불확실성이 심리적으로 적절한지 (허구적 진실),
- P177

틸리 올슨의 일생은 슬프다. 그녀는 놀라운 단편소설들과 미완성의 요논디오 뿐만 아니라 『침묵들』(Silences) — 의미심장하게도 여성이 글을 쓰는 것이 왜 어려운지에 대한책이다 ㅡ 이라는 논픽션 저서도 썼고 모범적인 페미니스트가 되었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녀의 젊은 시절 노력이 허사였던 것은 아니다. 1930년대에 윤리적인 젊은 여성이 공산당에 시간을 바치는 것은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었다(불행히도 그녀에 대해서 무척 비판적인 전기 작가는 이를이해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은 비극적이다. 올슨은 소설을 더 많이 썼어야 한다.
- P187

마침내 1870년 12월, 『미들마치』를 쓰기 시작한 지 16개월 후에 엘리엇은 일기에 이렇게 쓴다.

단편소설을 시험 삼아 쓰는 중인데, 길게 써야겠다는 진지한생각 없이 시작했다.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후 앞으로쓸지도 모르는 주제들 중 하나로 정해 놓은 것이지만 전개하는 과정에서 아마 달라질 것이다. 오늘은 44쪽까지 썼다.

12월 31일에는 이렇게 쓴다.
- P196

엘리엇은 지도를 그린 다음 도러시아와 커소번 씨, 리드게이트와 로자먼드 등 발전시킬 관계들 목록을 작성하고 누가 누구를 알아야 하는지를 적는다. 어쩌면 이러한 목록은 플롯상 필요할 때 어떤 인물들이 서로 얽힐 수 있도록그들이 서로를 알게 되는 장면을 미리 써야 함을 알려 주었을지도 모른다. 설령 내가 이 자료집을 읽으면서 소설가로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해도 이 목록만으로도 도움이되었을 것이다.
- P201

엘리엇이 자료집에서 사용하는 방법은 유기적이고 유동적이며, 한꺼번에 책 전체를 구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 이것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철저히 검토하는 방법이다. 즉 연상하고, 아이디어를 얻고, 새롭게 이해하고,  - P205

이것을 자료집이라고 보르는 것은 엘리엇이 원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소재가 들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돈을 하기 위해서 일부러 엉망으로,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거친 땅을 파헤치고 있다.
바위산에서 건물을 지을 석재를 잘라 내는 사람들처럼 그녀는 채석장에서 알맞은 조각을 구해서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정확히 무엇을 찾아야 할지, 또는 어떤 각도에서 접근해야할지 미리 말할 수 없다. 조지 엘리엇은 열심히 생각하고, 자기 생각을 너무 진지하게 여기지 않고, 다시 생각함으로써모든 페이지가 살아 있고 예측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책을쓴다. 이것이 장편소설을 쓰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한가지 방법이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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