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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렘 셔플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10월
평점 :
콜슨 화이트헤드의 책은 처음이다. 전작인 [니클의 소년들]이 워낙 떠들썩해서 알게 된 작가의 신작이라 망설임 없이 선택했는데, [니클의 소년들]만은 못하다는 평들이 눈에 띄어서 ‘안 읽은‘으로 분류되는 책 무더기 속에 한참 놓여있었다. ‘올해는 제발 쌓인 책 무더기를 줄이자‘로 비장하게 각오하고 출발한 새해라 역시 아직까지는 장바구니를 비워두고 있다. 새해 목표를 ‘책 사는 걸 참자‘라니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내년이면 지금보다 작은 평수로 입주해야 하는데 문제는 책이다. 책들을 정리하고 ‘안 읽은‘ 책 무더기를 해결해야 한다.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올해의 목표다. 얼마쯤 지킬 수 있을지는 스스로도 자신이 없지만.
시작은 더뎠다. 읽으려고 가지고 다녔지만 첫 페이지만 열어둔 채 펼쳐 볼 짬도 없이 하루가 지나기 일쑤였다. 생각보다 업무량은 많았고 팀이 바뀐 탓에 미묘한 신경전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숲길에 서있는 기분으로 만들어버리곤 해서 정서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럴수록 책을 한 줄이라도 읽으며 숨 쉴 여유를 만들어야 하는데 책을 펼치면 눈이 뻑뻑해지고 졸음이 먼저 찾는다. 그런 고비를 지나야 한다. 호흡이 긴 책을 읽을 때는 매번 한 번씩 졸음이 고개를 숙이게 만드니까. 우선 네이버한테 [셔플]을 물어보았다. 뉴욕의 할렘가는 알지만 셔플은 뭘까? 카드놀이에서, 카드를 잘 섞어 그 순서를 바꾸는 일이란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알 듯, 알 듯도 하다. 결론적으로 읽기를 마치고 나니 [할렘 셔플]이 왜 [할렘 셔플]인지 알 것 같았다.
1960년대의 뉴욕 할렘가 127번지에 사는 ‘레이 카니‘의 이야기는 내가 좋아했던 영화 [대부] 시리즈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나 [언터처블], [좋은 친구들]같은 갱스터 영화의 흑인 판 버전이리라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내 생각은 틀렸다. [할렘 셔플]은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버전의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사는 이야기이고 인종과 차별, 사회문제까지 포함한 묵직하고 하울링 깊은 울림을 주는 책이었다. 콜슨 화이트헤드가 두 번의 퓰리처상을 받았다는 걸 간과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언터처블 1%의 우정]에 나왔던 배우 ‘오마 사이‘나 흑인 배우의 대표 명사인 ‘모건 프리먼‘, ‘윌 스미스‘등으로 카니나, 페퍼, 프레디의 이미지가 자꾸 겹쳐졌다. 영화를 읽고 있는 듯했다. 영화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주변에서 만나는 나이 드신 분들은 삶을 얘기할 때 소설책 한 권이거나 대하소설이라거나 영화 한 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만큼 스스로가 스토리가 있고 희로애락의 한가운데를 질러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의 삶을 들어보면 일일드라마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1960년대 뉴욕 할렘가 127번지‘ 지명만으로 그림이 그려지는 소설이 나오겠고, 흑인 ‘레이 카니‘의 삶은 각색 없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시절의 1960년대처럼 그쪽도 파란만장한 과거를 가졌다. 그 과거에서 얼마나 멀리 왔을까. 우리나 그들이나. 글쎄, 눈으로 보이는 것들은 변화했겠지만 궁극적인 삶의 질이나 차별의 급이 크게 달라졌을까. 유색인종을 향한 차별과 분노들이 만들어내는 테러들을 여전히 뉴스에서 접하는데, 흑인들의 지역 ‘할렘가‘의 ‘흑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저 영화나 소설 속에나 있으면 좋겠지만 진행형의 일상일 것이다. 나 자신부터 동시에 세 사람의 외국인을 만났는데 피부색이 다르다면 이미지나 호감도가 편견 없이 작용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이미 가지고 있는 편견들이 나를 차별의 가해자로 만들기도 하고 피해자로 만들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모든 차별의 문제를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자기의 솔직한 검증.
˝올리버와 그의 무리는 카니의 옷에 있는 얼룩을 놀리고, 옷이 제대로 맞지 않는 걸 또 놀리고, 그에게서 쓰레기차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그 시절에 그가 어떤 아이였더라? 비쩍 마르고 수줍음이 많았으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의 절반은 더듬거림이었다. 그는 졸업반 때 키가 15센티미터나 자랐다. 성인으로서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서 어서 커야 한다는 걸 그의 몸이 알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이다. 엄마는 없고 아빠는 뒷골목을 돌아다니거나 늘어져 자고 있는, 127번가 오래된 아파트의 카니. 아침에 학교에 갈 때면 그는 빈집 문을 닫으며 그 바깥에 있는 것들에 대비해 마음을 다잡곤 했다. 하지만 올리버가 사탕 가게 앞에서, 학교 뒤쪽 계단통에서 그를 놀리던 시절에는 이미 얼룩을 말끔히 빼고, 바짓단을 올리고, 학교에 오기 전에 샤워를 제대로 하는 법을 다 익힌 상태였다. 올리버는 자기 앞가림을 제대로 하기 전, 과거의 그를 놀린 것이었다.
그걸 끝내게 만든 건 올리버의 얼굴을 철제 파이프로 후려친 사건이었다. 세면대 아래서 빼 온 것처럼 U자형으로 생긴 파이프였다. 암스테르담가와 135번가 모퉁이의 공터에서 그 애들이 그를 둘러쌌을 때, 파이프는 카니의 손에 저절로 나타난 것만 같았다. 그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너한테 지랄하는 놈팡이를 처리하는 방법이지. 학교에서 얼굴이 퉁퉁 붓고 슬금슬금 숨어 다니는 올리버를 보자 그는 기분이 안 좋아졌다. 나중에야 그의 아버지가 훔친 타이어로 올리버의 아버지에게 사기를 쳐서 돈을 뜯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그 모든 일은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때가 그가 폭력을 쓴 마지막 순간이었다. 카니가 보기에 인생은 지금껏 배웠던 방식대로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 같았다. 온 곳은 정해져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어디로 갈지 결정하는 것이다.
루비는 새로운 도시로 가기로 결정했고 카니는 가구업계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했다. 어린 시절 그가 알던 것과 반대이면 다 좋아 보였다.˝ - P23, 24
˝인생은 지금껏 배웠던 방식대로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 같았다. 온 곳은 정해져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어디로 갈지 결정하는 것이다.˝ 찬물에 세수를 하는 듯한 문장이다. 알고는 있지만 생의 어떤 날에 저런 깨달음을 갖기는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제 이만큼 살아보니 알겠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장석주의 시‘대추‘)‘처럼 주변의 시선과 질곡의 나날들이 만들어 낸 깨달음인 것이다. ‘빈집 문을 닫으며 그 바깥에 있는 것들에 대비해 마음을 다잡곤‘하는 흑인 소년의 가슴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숨이 보일 것 같다. 아무것에도 기대지 못하고 홀로 서야만 하는 어린아이가 살아내는 하루는 어른들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공포와 두려움이 숨을 참게 만드는 하루다. 그런 하루들을 딛고 카니는 ˝어린 시절 그가 알던 것과 반대‘로 살기 위해 대학을 가고 정상적인 가구 판매상이 되어 살게 된다. 사랑하는 아내 엘리자베스와 딸 메이가 있고 아내는 둘째를 가졌다. 그러나 좀 더 나은 삶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가진 게 없고 출신 성분이 빈약하다고 계속 무시하는 장인 장모가 보란 듯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하고 필요악처럼 가끔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일감을 가져다주기도 하는 사촌 프레디가 있다. 아버지가 버리고 떠난 카니를 거둬 준 이모의 아들 프레디와 카니가 함께한 시절은 둘이었기에 가능했던 많은 일들의 경험의 순간이었다. 카니는 프레디의 세계와 엘리자베스의 세계 사이에서 한 발씩 걸치고 살고 있다. 그 균형은 잠시만 삐끗해도 생애 전부를 뒤집을 수 있다. 초인적인 힘으로 그 균형을 끌고 가는 카니에게서 본인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토록 증오하고 거부하던 아버지의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아버지의 트럭과 아버지와의 인연으로 끝까지 도움을 주는 페퍼가 있고 페퍼도 인정하는 아버지를 닮은 끈기를 가진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더 합법적인 카드를 섞어 합법을 가장하고 범죄의 온상이 되는 듀크에게 복수할 수 있었다. 복수 과정은 스릴 넘치고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영화 장면이었다. 아무래도 근래 넷플릭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모양이다. 삶은 계속되고 영화는 끝이 났다. 자러 가야 한다. 새벽에 출근하려면.
˝힘든 삶이었다. 하지만 더 힘들게 산 사람들도 있다.
수년 동안, 바로 이 식탁에 둘러앉아서 보내는 이런 밤에 카니는 그 시절 이야기를 했다. 그건 진실이고 그의 일부였고, 이제 이 사람들이 가족이니까. 뒤늦게 그는 자신을 너무 많이 드러냈다는걸, 누군가가 쇳조각을 박을 수 있는 약한 부분을 드러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이야기는 장인 장모의 오락거리이자 유랑극이었다. 그래, 어느 크리스마스 날 일어나 보니 그와 아버지에게 파삭파삭한 고구마 한 개밖에 없어서 그걸 반으로 잘라 접시 두 개에 올리고 나눠 먹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추운 아침에 난방이 또 끊겨서 하얀 입김이 나오는 게 보였고, 아버지는 그날 정오에 집을 나가서 일주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뭐, 돌이켜보면 그 이야기에 파란만장하고 장엄한 데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의 인생에서 그 부분을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할 필요는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존스 부부는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미소를 짓거나 가끔은 깔깔 웃었다. 사실 비참한 방식으로 웃기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아니면 그가 이야기하는 방식이 재미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하곤 했었다. 그건 오래전 일이었다. 요즘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하면서 느끼는 건 이런 시기를 살아남았다는 데에서 오는 자부심이었고, 릴런드와 앨마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즐거워하는 건 그가 지금 인생에서 가진 것들과 비교하면 별것 아니었다. 그에게는 엘리자베스와 메이가 있었고, 만약 어떤 문제가 있는지 따져보고 싶다면 그에게는 수년 전의 우울한 크리스마스 아침보다 훨씬 다급한 문제가 있었다.˝- P108
˝내가 가끔 돈은 없어도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아.˝
카니는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고 인정해야 했다.˝ - P160
˝망할. 그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은 게 실수였다. 그를 만들어낸 환경이 상관없다고 믿은 게, 혹은 그 환경을 넘어서는 게 더 나은 건물로 이사 가거나 똑바로 말하는 걸 배우는 것만큼 쉽다고 여긴 게 실수였다.‘- P184
˝사촌은 그와 다른 길을 택했다. 그들의 어머니가 자매였으니까 그들은 어느 정도 같은 바탕을 갖고 있는 셈이지만, 세월이 흐르며 서로 다른 길로 나뉘었다. 길 건너편에 나란히 서 있는 건물들처럼. 다른 사람들과 세월이 그들을 원래의 모양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었다. 도시는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전부 다 여기저기로 보냈다. 어떤 방향으로 갈지는 자신이 어느 정도 결정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르겠다.˝ - P197
˝어쩌면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건 봉투가 아니라 원한과 보복일지도 모른다.˝ - P275
˝폭동에 대해서, 핵심이 뭐냐고 그랬었잖아요. 모든 게 계속 그대로 흘러갈 거니까 모든 저항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요.˝
˝거기에 대해선 내가 옳았잖아. 대배심은 그 경찰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 했어. 안 그래? 그놈은 여전히 경찰 일을 하고 있고, 맞지? 하지만 내가 그놈들을 쏜 것에 관해서 적용해 보자면 ……. 소박하게 시작해서 점점 위로 올라가는 것도 괜찮겠지.˝ - P453
˝그리고 별을 보고 카니는 작아졌다든지 사소해진 기분이 들지 않았다. 별을 보면 그가 인정받는 기분이 들었다. 별에겐 별의 자리가 있고 그에겐 그의 자리가 있다. 우리 모두 삶에서 우리 위치가 있다. 사람도, 별도, 도시도. 설령 아무도 카니를 보살펴주지 않고 아무도 그가 딱히 대단한 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그는 자신을 그럴듯한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트럭은 업타운으로 덜컹거리며 달렸다. 이제 그를 보라. 마천루에 달린 청동 명패는 아니지만, 모두가 125번가와 모닝사이드 모퉁이가 그의 것이라는 걸 알고, 거기에 그의 이름, ‘카니‘가 대낮처럼 훤하게 붙어 있다.˝ - P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