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는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한 신체 기관인 심장에도 지력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이마의 주름과 턱의 힘을 풀고 팔다리를 가법게 흔들 수만 있다면 심장의 지력에 닿을 수 있음을 알았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으스대고 뻐기며 걷지만, 혼자있을 때는 그러지 않는다. 으스대며 걷는 것은 사회적 제스처다.
가장 느린 이동 형태인 걷기는 더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우리는 아마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을오래전에 잃어버린 낙원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걸을 수는 있다. 결어서 출근할 수 있다. 걸어서 딸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줄 수 있다. 산들바람이 부는 상쾌한 가을날 오후, 특별한 목적지없이 혼자 걸을 수 있다.
우리는 잊기 위해 걷는다. 짜증내는 상사, 배우자와의 말다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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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는 이렇게 적었다. "관찰이 흥미로워지려면, 즉 중요한 의미를 가지려면, 반드시 주관적이어야 한다."
아름다움을 개인적으로 판단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핏빛 노을, 수많은 별들이 수놓인 잉크처럼 새까만 밤하늘, 전부 개인적의견이다. 철학자 로저 스크러튼이 말했듯, "그런 아름다움을 위한 공간이 있는 세상에 당신을 위한 공간도 있다."
소로에게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소로는 느끼지 않고는 보지 못했다. 어떻게 느끼느냐가 어떻게 보느냐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도 결정했다. 소로에게 보는 것은 감정적일 뿐만 아니라 상호적인 행위였다. 예를 들어 장미를 보면소로는 장미와 대화를 주고받았고, 어떤 면에서는 협력하기도 했다. 이상하게 들린다는 것, 다소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 안다.
하지만 많은 예술가들이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이들은 어떤대상을 볼 때 그 대상도 자신을 쳐다본다고 느낀다. 이들 모두가미친 것일 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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