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사람
                   김행숙

  강변에 서 있었네
  얼굴이 바뀐 사람처럼 서 있었네
  우리는 점점 모르는 사람이 되고

  친절해지네
  손님처럼
  여행자처럼
  강변에 서 있었네
  강물이 흐르고
  피부가 약간 얼얼했을 뿐
  숫자로 헤아려지지 않는 표정들이 부드럽게 찢어지고 빠르게 흩어질 때마다
  모르는 얼굴들이 태어났네
  물결처럼, 아는 이름을 부룰 수 없네
  피부가 펄럭거리고

  빗방울을 삼키는 얼굴들
  강변에 서 있었네
  아무도 같은 얼굴로 오래 서 있지 않네

                    시집 [이별의 능력] 중에서



  직장을 옮긴지 한 달이 되었다. 이 일을 시작한지 이제 오 개월차, 어리버리 초보딱지도 떼지 못한채 새로운 곳에서는 뭘해도 어설프기만하다. 손끝이 야무진 베테랑들 사이에서 좌충우돌, 엉거주춤, 걸치적거리며 일을 배우고있다. 유치원생이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뒷꿈치를 들고 따라다니는 모양과 같다. 세상이 인정하든 말든 자기 일에 최고인 고수들이 즐비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요즘이다. 살면서 만나는 모든 이가 스승이요, 도반이다.


  ˝답사에 연륜이 생기면서 나도 모르게 문득 떠오른 경구는‘인생도처유상수‘였다. 하나의 명작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무수한 상수들의 노력이 있었고, 그것의 가치를 밝혀낸 이들도 내가 따라가기 힘든 상수들이었으며, 세상이 알아주든 말든 묵묵히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필부 또한 인생의 상수들이었다.˝[나의 문화유산 답사기6권]
  선배들의 말처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잘하게될까 의심스럽긴하지만 이 일이 주는 재미와 감동은 매일매일 더해간다. ˝숫자로 헤아려지지 않는 표정˝을 이해하려 진땀을 흘리고,˝빗방울을 삼키는 얼굴들˝을 찾아내고, ˝아무도 같은 얼굴˝이 없는 이 곳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날들이다. 바닥에서 바닥으로 옮겨온 거지만 옮겨오길 잘했다싶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들은 모두 바닥에 머문다. 바닥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허공에서 부유할 뿐,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깨달음도 최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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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 창비시선 456
이상국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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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후에 대하여

                             이상국


   나는 나의 뒷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래도 거기까지가 나의 밖이다.

   나의 등에는 은유가 없다.

   손으로 악수를 꺼낸다든가

   안면을 집어넣거나 하는 그늘이나

   은신처도 없지만

   나의 등은 나의 오래된 배후다.

   제삿날 절하는 아버지처럼

   구부정하고 쓸쓸한 힘이다.

            시집[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중에서

 

   ˝나의 등은 나의 오래된 배후다.˝
   나도 배후가 있었구나. 끄덕끄덕! (어쩐지 가끔은 배짱두둑해지더라니... )

   내가 나를 믿고, 내 배후를 믿고 살아봐야겠다.

   ˝구부정하고 쓸쓸한 힘˝도 가끔은 절실해지는 때, 나도 배후가 있다니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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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의 넓이 창비시선 459
이문재 지음 / 창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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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업

                 이문재


   한여름 땡볕
   양짓말 삼촌은
   비닐하우스 안에서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홀아비살림 이십년 만에
   적도 부근에서 데려온
   까무잡잡 키 작은 어린 아내
   집 나간지 이태째

   도망치듯
   비닐하우스에서 나와
   장화를 벗으면
   주르륵 물이 흘러나왔다
   삼촌이 흘린 땀이었다

   상추 쪽파 부추 얼갈이
   그해 봄에서 여름까지
   비닐하우스 갈아엎기를 네댓번
   몇년 새 쌓인 빚이
   집채보다 높아졌다

   그해 여름
   폭염주의보가 경보로 바뀐 날
   양짓말 늙은 삼촌은
   비닐하우스에서 나오자마자
   제초제를 병째 들이켰다고 한다
   벌컥벌컥 들이마셨다고 한다

                   시집[혼자의 넓이]중에서





   새벽에 출근하는데 벌써 후끈후끈하다.
   폭염경보의 나날이다.
   그래도 이천십팔년 여름이 더 지독했다는 생각이 바뀌지않는다. 저 사진 속의 날들, 속수무책 쏟아지는 땡볕 아래로 점심 피크타임이 지나면 어김없이 나섰던 그해 여름의 시간이 지금을 견디게한다, 고 생각하는 요 며칠, 이문재시인의 농업을 읽는다. 생각이 많아지게 만드는 시다.
   모자를 눌러써도, 얼음봉지를 목에 둘러도 무차별로 쏟아지는 볕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또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은 뜨거운 물에 담그고 있는듯 장화마저 낭창낭창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하루중에 고작 몇시간을 밭에서 보냈던 내가 농업에 대해 시적 은유와 현실의 행간을 어찌 읽어내야할지 아득하다. 다만 아무리 더워도 해야하는 일들과 그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있다는 것을 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냥 한다. 해야하는 일이니까 하고 그것으로 살아가니까 한다. 거기엔 생각이라는 게 필요없다. 그것이 삶이다.
   뜨거운 불 앞에서 종일 냉면을 삶고 손목뼈가 돌아가도록 마는 친구는 땡볕에서 일하는 현장 사람들을 걱정한다. 뜨거움을 견디는 일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방호복으로 중무장을 갖추고 코로나 방역현장의 일선에 서있는 이들의 숨소리는 어쩔것인가. 그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고 아무리 말해도 부족하기만 하다.

   폭염경보의 세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엄숙하고도 피할 수 없는 진실,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제초제를 병째 들이켰다고 한다/ 벌컥벌컥 들이마셨다고 한다˝ 그런 심정으로 견디는 것이다. 곧 팔월이다. 삼년 전의 여름이 지독했다고 말하는 지금처럼 곧 옛말하게 되리라. 보름쯤 지나면 아침, 저녁 서늘함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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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408
안미옥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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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의 발원

                  안미옥

  한여름에 강으로 가

  언 강을 기억해내는 일을 매일 하고 있다

  강이 얼었더라면, 길이 막혔더라면

  만약으로 이루어진 세계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아주 작은 사람이 더 작은 사람이 된다

  구름은 회색이고 소란스러운 마음

  너의 얼굴은 구름과 같은 색을 하고 있다

  닫힌 입술과 닫힌 눈동자에 갇힌 사람

  다 타버린 자리에도 무언가 남아 있는 것이 있다고

  쭈그리고 앉아 막대기로 바닥을 뒤적일 때

  벗어났다고 생각했다면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한쪽이 끊어진 그네에 온몸으로 매달려 있어도

  네가 네 기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시집 [온]중에서

 

 

 

        

    

  일하다 올려다 본 하늘이 엄청나다. 폭염 속의 하늘이 '저래도 되나'싶게 비현실적으로 투명하고 환한 데다 구름의 조화는 훈훈하고 감동적이다. 불과 이틀 전 형제봉에서 바라본 하늘도 환상이었다. 이 숨 막히는 더위에도 저런 하늘을 볼 수 있다면 또 나름 살만하지 않냐고 스스로 위로를 한다. 날마다 조금씩 부당하고 크고 작은 모멸감에 부대끼면서 자존감은 하락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나만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그럭저럭 살아간다.

  "한여름에 강으로 가/ 언 강을 기억해 내는"일이 필요하다. "만약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다면 삶의 질이 달라질까. "벗어났다고 생각했다면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읽을수록 감칠맛이 더해지는 시집이다. "네가 네 기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시집을 읽는 일, 하루에 한 번이라도 하늘을 바라보는 일,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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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창비시선 219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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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찜통

              박성우

  내가 조교로 있는 대학의 청소부인 어머니는

  청소를 하시다가 사고로

  오른발 아킬레스건이 끊어지셨다

  넘실대는 요강 들고 옆집 할머니 오신다

  화기 뺄 땐 오줌을 끓여

  사나흘 푹 담그는 것이 제일이란다

  이틀 전에 깁스를 푸신 어머니,

  할머니께 보리차 한통 내미신다

  호박넝쿨 밑으로 절뚝절뚝 걸어가신다

  요강이 없는 어머니

  주름치마 걷어올리고 양은 찜통에 오줌 누신다

  찜통목 짚고 있는 양팔을 배려하기라도 하듯

  한숨 같은 오줌발이 금시 그친다

  야외용 가스렌지로 오줌을 끓인다

  찜통에서 나온 훈기가 말복 더위와 엉킨다

  마당 가득 고인 지린내

  집밖으로 나가면 욕먹으므로

  바람은 애써 불지 않는다

  오줌이 미지근해지기를 기다린 어머니

  발을 찜통에 담그신다 지린내가 싫은 별들

  저만치 비켜 뜬다

  찜통더위는 언제쯤이나 꺾일런지

  찜통에 오줌 싸는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는 홀어머니

  소일거리 삼아 물을 들이키신다

  막둥아, 맥주 한 잔 헐텨?

  다음주까정 핵교 청소일 못 나가먼 모가지라는디

                                 시집 《거미》중에서

   서울대 청소노동자의 죽음을 만나면서 내내 『찜통』이다. 날씨도 『찜통』, 이놈의 세상도 『찜통』, 내 속도 『찜통』이다.

   마지막으로 까부라지는 몸을 부린 휴게실, 어떡허든 기운을 차려보겠다고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이 된 컵라면 생각을 하면 계속되는 『찜통』더위 속에서 천불이 난다. 대한민국의 최고 대학에서, 비록 청소 일이지만 최고의 일원이 되어 자랑스러웠을까? 그걸 영어로 쓰는 일이 뿌듯했을까? 개뿔~! 세상이 갑자기 와글와글 시끄러워졌다. 여전히 바닥을 쓸고, 여전히 땀으로 걸레질을 하고, 여전히 쓰레기봉투를 낑낑대고 끌어내리고, 여전히 저 휴게실에 몸을 눕혀야 하는 동료들은 어떨까? 바글바글 들락거리는 사람들은 며칠이나 이어질까? 다시 자리는 채워지고 우리나라 최고의 학생들은 음식을 주문해먹고 쓰레기를 버리고, 더 나은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 갈지를 토론하겠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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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6 0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17 11:40   좋아요 1 | URL
잘 참는 사람인데 가끔은 울분을 토로하고 싶어져요. 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