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창비시선 457
김승희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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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틀거리다

              김승희

   꿈틀거리다

   꿈이 있으면 꿈틀거린다

   꿈틀거린다,라는 말 안에

   토마토 어금니를 꽉 깨물고

   꿈이라는 말이 의젓하게 먼저 와 있지 않은가

   소금 맞은 지렁이같이 꿈틀꿈틀

   매미도 껍질을 찢고 꿈틀꿈틀 생살로 나오는데

   어느 아픈 날 밤중에

   가슴에서 심장이 꿈틀꿈틀할 때도

   괜찮아

   꿈이 있으니까 꿈틀꿈틀하는 거야

   꿈꾸는 것은 아픈 것

   토마토 어금니를 꽉 깨물고

   꿈틀꿈틀

   바닥을 네발로 기어가는 인간의 마지막 마음

          시집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중에서

 

   김승희 시인께 경도되던 시절이 있었다. 88년 "33세의 팡세"를 읽고 혹해서 당시에 출간되어 있던 시인의 시집, 산문집을 모조리 독파했고, 신간 소식이 들리면 부지런히 구입해서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시집이 5권, 산문집이 4권이다. 거의 초기에 해당하는 시절의 작품집들인데 이제 70이 된 시인의 열한 번째 신간 시집 앞에서 약간 망설였다. 오래 뵙지 못한 스승을 만나러 가는 기분 같은 것이다. 그렇게 만난 시인의 첫 번째 시가 『꿈틀거리다』이다. 이 시를 읽을 때 곁에는 늦은 시각임에도 잠들지 못하고 계속 침대에서 내려오려는, 자주 속을 썩이고 힘들게는 하지만 결코 밉지는 않은 어르신이 있었다. 옆에서 끊임없이 뽀스락거리는 어르신 때문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읽어드렸다. 집중하고 귀를 기울여서 듣는다. "꿈틀거리다/ 꿈이 있으면 꿈틀거린다/ 꿈틀거린다,라는 말 안에/ 토마토 어금니를 꽉 깨물고/ 꿈이라는 말이 의젓하게 먼저 와 있지 않은가" 이상했다. 눈으로 읽을 때는 지치고 무거웠던 마음이 소리 내어 읽어보니 가벼워진다. 꿈틀꿈틀, 꿈의 형상이 그려지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괜찮아/ 꿈이 있으니까 꿈틀꿈틀하는 거야/꿈꾸는 것은 아픈 것"까지 읽는데 망연히 듣고 있는 어르신이 내 등을 토닥거리며 '괜찮아, 괜찮아' 해주는 느낌이 들었다면 너무 과한 설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마음이 따뜻하게 덥혀졌다. 시 한 편을 사이에 둔 어르신과 나의 잠깐의 교감, 다시 한번 읽어드릴게요, 했더니 시집 한 번 나 한 번 쳐다보신다. "소금 맞은 지렁이같이 꿈틀꿈틀"에 어르신은 벌써 딴 세계로 넘어가셨다. 눈을 끔벅끔벅, 누가 돈을 훔쳐 갔다고 딴 말씀을 중얼중얼 하신다.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에 발을 걸치고 사시는 어르신의 저쪽 세계가 어딘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루 중에 몇 시간은 저쪽 세계에 안부를 묻듯 다니러 가실 때 바짝 긴장해야 한다. 꿈틀꿈틀, 어르신의 저쪽 세계, 어느 꿈속에서 서성서성 헤매고 있을지 모르기에 잠드실 때까지 잠깐의 방심도 금물이다. 자태도 곱고, 손짓, 발짓이 고와서 재주 많았을 이 분이 지나온 시절을 그려본다. 지금, 이 분의 꿈은 무엇일까? "꿈틀꿈틀/ 바닥을 네발로 기어가는 인간의 마지막 마음" 마지막 연이 숙연하다. "토마토 어금니를 꽉 깨"문다. "가슴에서 심장이 꿈틀꿈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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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에 달하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192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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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리고 돌아오다

               김소연

 

 

   지루한 글이었다 진전 없는 반복, 한 사람의 생 읽어내느라 소모된 시간들, 나는 비로소 문장 속으로 스며서, 이 골목 저 골목을 흡흡, 냄새 맡고 때론 휘젓고 다니며, 만져보고 안아보았다, 지루했지만 살을 핥는 문장들, 군데군데 마지막이라 믿었던 시작들, 전부가 중간 없는 시작과 마지막의 고리 같았다, 길을 잃을 때까지 돌아다니도록 배려된 시간이, 너무 많았다, 자라나는 욕망을 죄는 압박붕대가 너무, 헐거웠다, 그러나 이상하다, 너를 버리고 돌아와 나는 쓰고 있다, 손이 쉽고 머리가 맑다, 첫 페이지를 열 때 예감했던 두꺼운 책에 대한 무거움들, 딱딱한 뒷표지를 덮고 나니 증발되고 있다, 숙면에서 깬 듯 육체가 개운하다, 이상하다, 내가 가벼울 수 있을까, 무겁고 질긴 문장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시집[극에 달하다]중에서

 

   며칠 전, 상자를 정리하느라 하루를 온통 소비했다. 내게는 스스로 보물 상자라 칭하는 상자가 네 개 있는데(명품 가게 앞에 내놓은 것을 새벽 귀갓길에 주워온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명품 쇼핑백이나 명품의 빈 상자조차도 꽤 고가에 거래되기도 한단다. 내 성향에 굳이 돈을 지불하고 살 것 같지는 않지만 **리 문장이 찍힌 단단하고 예쁜 색감의 상자였다. **리를 비롯해 명품으로 불리는 물건들을 짝퉁조차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상자는 아주 흡족했다.) 이십여 년의 시간이 지나서 색도 바래고 몇 번의 이사로 옆은 찢어져서 다른 맞춤한 상자가 생기면 바꿔야지 마음먹고 있었던 참이다. 동생이 가져다준 와인이 담긴 상자가 색감도 좋고 단단하고 크기도 알맞아서 그 상자 하나와 가지고 있던 빈 상자 하나, 두 개에 정리하기로 했다.

   옮겨 담기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분량이 많아서 넘쳤다. 버릴 것은 버려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일이 밥 먹는 일도 잊게 하고 커피도 잊은 채 종일 매달리다가 나이트 출근 시간이 촉박해져 대충 마무리하고 상자를 닫았다. 편지들이다. 버리려니 읽어 보고 추려야 했던 것이다. 상자에는 꾸깃꾸깃 구겨지고 접히고 봉투째 담긴 내 이십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루한 글이었다 진전 없는 반복, 한 사람의 생 읽어내느라 소모된 시간들, 나는 비로소 문장 속으로 스며서" 지금은 이름조차 희미한 이들의 편지를 읽으면서 이만큼의 답장이 있기까지 내가 써보냈을 무수한 안부와 문장들은 "길을 잃을 때까지 돌아다니도록 배려된 시간이"얼마나 많았을까 싶어서 아득해졌다. 얼마나 많은 밤의 시간을 할애해서 메아리도 없는 헛짓을 했는지가 한 통의 답장 안에 증명되기도 했다. 안쓰럽고 짠한 내가 여전히 안부를 묻고, 대답 없는 안녕을 빌고 있었다. 딱했다.

   "첫 페이지를 열 때 예감했던 두꺼운 책에 대한 무거움들, 딱딱한 뒷표지를 덮고 나니 증발되고" 시작은 그러했으나 정리되는 세월의 흔적은 나를 가볍게 했다. 그 20대가 있어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버리고 돌아오"는 과정의 연속성이 생애를 결정한다. 나는 너무 줄레줄레 달고 있었다. 가뜩이나 무거운 몸이 그래서 더 무거웠던 것이다. 언제 또 시간을 내서 버려야 한다. 비워야 한다. "내가 가벼울 수 있을까, 무겁고 질긴 문장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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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408
안미옥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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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안미옥

    내가 맛보는 물은 바닷물처럼 따스하고 짜며,

건강처럼 머나먼 나라에서 오는군요.

-실비아 플라스 『튤립』

 

 

  굴레도 감옥도 아니다

  구원도 아니다

 

  목수가 나무를 알아볼 때의 눈빛으로

  재단할 수 없는 날씨처럼

 

  앉아서

 

  튤립, 튤립

  하고 말하고 나면

 

  다 말한 것 같다

 

  뾰족하고 뾰족하다

 

  편하게 쓰는 법을 몰랐다

  편하게 사는 법을 모르는 것처럼

 

  기대하는 모든 것을

  배반해버리는 곳으로 가려고

 

  멀고 추운

  나라에서 입김을 불고 있는 너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건 정말일까

  한겨울을 날아가는 벌을 보게 될 때

 

  투명한 날갯짓일까

  그렇다면

 

  끔찍하구나

  이게 전부 마음의 일이라니

 

         시집[온]중에서

 

 

  "그럼에도 계속 쓰는 사람이었던 것은, 내가 매 순간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하니 선택의 순간이 많았다. 그때마다 나를 붙들어준 문장과 사람들의 말이 있었다. 결국엔 함께하는 일. 나는 함께 살고 싶다"

     ---시인의 말 중에서

 

 

   쓰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그 꿈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 없다. 그러나 누구나 시인처럼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정도의 쓰는 사람으로 남는 것 또한 후회하지 않는다. 내게도 항상 '문장과 사람들의 말'이 있었지만 스스로 받아 적기는 버거운 일이었다. 하여 '쓰는 사람'이 받아 적은 것들을 되새김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런 사람도 있는 것이다. "목수가 나무를 알아볼 때의 눈빛"을 갖지 못했기에 '쓰는 사람'이 되지 못한 것 같다. 어쩌면 "편하게 쓰는 법을 몰랐다/ 편하게 사는 법을 모르는 것처럼"그래서인지도 모르겠고. 쓰는 사람만큼이나 읽는 사람도 필요한데 그것이 "쓰는 사람"들의 동력일 텐데, 많은 이들이 쓰고자 하지 읽는 이로 남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중에 포함되는 1인임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소망한다고 누구나 그리될 수는 없다. 과한 욕심들이 무구한 나무의 목숨만 앗을 뿐이다.) 시인은 전부를 다해(온) 쓰는 사람, 즉 시인이 되었는데, 시는, 시집은, 시인에게 "굴레도 감옥도 아니다/ 구원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러나 "마음에서 시작된" 다시는 놓아버릴 수 없는 쓰는 사람의 고통은 "끔찍하구나/ 이게 전부 마음의 일이라니" 다른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거구나.

  그러나 이런 시를 만나고 새로운 시인을 알아가는 하루는, 온전하게 새로운 하루다. 근무가 off인 오늘을 충만함으로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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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1-05-26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는 사람.˝ 아래로 쓰신 첫 세 문장에 완전히 빗장이 열려서 목 아플 때까지 고개 끄덕끄덕하면서 읽었습니다.
그 세 문장에 녹은 마음이 어떤 것인지 감히 조금쯤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21-05-27 15:37   좋아요 0 | URL
목은 괜찮으신거지요^^
그 짐작이 아마도 맞지 싶네요~ ㅎ
syo님 흔적, 고맙습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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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제비

            안도현

 

 

   비 온다

   찬 없다

 

   온다간다 말없다

 

   처마 끝엔 낙숫물

   헛발 짚는 낙숫물

 

   개구리들 밥상가에

   왁자하게 울건 말건

   밀가루반죽 치대는

   조강지처 손바닥

   하얗게 쇠든 말든

 

   섰다 패를 돌리는

   저녁 빗소리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 중에서

 

 

  "비가 쏟아지는 아침이다.

  오월의 잦은 비, 천수답엔 논물 대기 좋겠지만. 다른 작물들은 어떨까? 갑자기 농사꾼의 마음이 헤아려지는 싱숭생숭한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다."라고 쓴 것이 무색하게 햇살 환해진 시간. 마음도 날씨 따라 환해지는 건가, 화~ 안 하다.

  울 집 장남이 '섰다 패를 돌리는'데 정신이 팔렸던 방위 시절.

  지어놓고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장터의 우리 집이 날아가고,

  씨감자를 넣고 재 뿌리고 북해 주느라 허리 휘던 감자 한 차가 사라지고,

  자갈 논에 모심느라 손톱이 꺾어지며 수매한 나락 값이 한입에 없어지던 그해.

  우리는

   오늘은 수제비, 어제는 국수, 내일도 국수, 모레는 수제비를 물수제비뜨듯 뜨던 날들 사이에서도 엄마는

  '조리장사 치겟돈을 내서라도' 시루떡을 앉히던 날이 있다.

  객지 나가있는 언니 오빠들의 생일이었다.

  오늘도 그런 날.

  나를 업어키우고 재우고 보호자 노릇을 하던 여덟 살 위인 둘째 언니의 생일이다.

   "온다 간다 말 없"이 사는 여전한 내 보호자 울 언니,

  축하해 언니, 이제부터라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갑시다.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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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창비시선 455
신미나(싱고)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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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과(破瓜) 1

                      신미나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목사님이 말했는데

   손가락이 하나 없는

   언니의 머리는

   쓰다듬어주지 않았다

   헌금함이 돌아오면

   우리는 헌금하는 시늉을 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말해보라고 했다

   콧등을 내려다봤을 뿐인데

   너희는 착하구나

   부끄러움이 뭔지 아는구나

   해바라기가 해를 원망하며

   비를 기다릴 때

   고사리처럼 몸을 비틀며

   지렁이가 죽어갔다

        시집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중에서

   벌써 네 번째 시집을 펴낸 신미나 시인의 시를 처음 만났다. 시집의 첫 시 『지켜보는 사람』을 읽는데 왜 이제 만났을까 싶다.

   파과, 破瓜.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 "부끄러움이 뭔지" 알기에 착한 자매에게 친절한 어른은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안겼다. 그러나 그 어른은 모두의 존경을 받으며 여전할 것이고 그런 날들을 보낸 부끄러운 자매에게 세상은 "고사리처럼 몸을 비틀"린 세월을 안겼을 것이다. 치민다. 울컥한다. 이것은 폭력의 서사다. 이 현재진행형의 폭력 앞에서 대책 없이 슬프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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