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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올 사랑 - 디스토피아 시대의 열 가지 사랑 이야기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0년 12월
평점 :
이 글에는 카메라의 파노라마와 와이드앵글이 있다. 우선 외롭고 척박한 계곡이 있다. 틀림없이 햇살이 머리통 위로 인정사정없이 내리쬐는 곳일 것이다. 그곳에서 오래 일하려면 꼭 모자를 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독수리가 나는 하늘 아래로 서늘한 오두막이 있고 두 남자와 개 두 마리가 있다. 독수리는 영감을 주지만 먹을 것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 개는 밖에 잘 있다. 시간은 평범하게 흘러간다. 이제 일을 하러 가거나 낮잠을 자러 가면 된다. 그런데 안토닌은 가지 않고 서서 꼬박 10분간을 망설인다. 10분이 중요하다. 짧지 않은 시간이다. 10분은 이제 막 사형대에 올라 총살을 기다리던 도스토예프스키에게 황제의 칙사가 뛰어와서 총살이 취소되었음을 알릴 때까지 걸린 시간이다. 그 10분간 도스토예프스키는 임사 체험을 했다. 그렇다면 10분 동안 안토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돈을 지불하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 그의 손을 움직여 돈을 꺼내게 만들었을까? 그냥 밥 한 끼 나눠 먹었을 뿐인데. 토니오 입장에선 돈을 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안토닌은 이런 식사는 평생 처음이었다고 말한다. 고급 레스토랑에 간 것 같다고. 어쩌면 안토닌은 고급 레스토랑에 가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안토닌이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왜 울지? 그제야 나는 안토닌이 두 세트의 나이프와 유리잔을 어떻게 바라보았을지. 식후의 포도주와 대화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느끼게 된다. 눈물은 외로운 계곡에 외롭게 사는 소몰이꾼이라는 삶의 '조건'이 이끌어낸 거의 무의식적인 반응이란 것을 이해하게 된다.
토니오도 나와 같은 것을 보았다. 토니오도 안토닌이 살아온 '시간'과 그의 삶의 '조건'을 봤다. 혼자서 대충 때운 수없이 많은 식사를 봤고, 대화 상대 없이 혼자 일하고 혼자 잠들던 많은 시간을 봤다. 그의 삶이 그에게 준 쓰라림을 봤다. 그 삶이 어떤 것이었을지 이해했다. 그리고 그의 노동과 외로움을 깊이 존중했다. 토니오도 울었다.
이렇게 해서 공간은 시간이 되었다. 수많은 시간이 하나의 순간으로 모였다. 고독한 노동의 한가운데에 있는, 삶이 준 쓰라림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함께 있는 것의 온기를 잠시나마 맛볼 수 있는, 어떤 조건도 없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그냥 그렇게 있었던 순간이다. 순수한 순간이다.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순간이다. 안토닌에게만 좋은 순간이 아니고 서로 좋은 순간이다. 두 사람은 안았고 나는 두 사람이 느꼈을 감정의 승화 같은 것을 함께 느낀다. 오두막에선 이 모든 일이 말없이 진행되었다. "자네 애쓰고 살았네" 같은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오두막의 침묵 속에서는 수많은 말이 오갔다. 가장 좋은 대화는 말없이도 수많은 대화가 오가는 대화고, 라디오로 치면 말이 아니라 말의 뉘앙스와 음색, 침묵을 알아듣는 것과 같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헤아리고 상상한다. 연결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많은 말을 하고도 고독한 이유다. 우리는 침묵 속의 상상을 팽개쳤다. 타인을 빠른 속도로 규정하거나 평가하고 있을 뿐이다. 어깨 한번 으쓱하고 털어낼 존재처럼.
왼손에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들고, 오른손에 모자를 들고(그는 어쩌면 왼손잡이일 수도 있다) 두 세트의 식기와 두 개의 잔과 포도주 병이 놓여 있는 테이블 앞에 소똥 묻은 샌들을 신고 다리를 벌리고 서서 눈물을 흘리는 안토닌의 모습은, 다른 사람의 삶이 아닌 오로지 안토닌의 삶에서만 나올 수 있는 모습이다. 고독했지만 이해와 존중을 받는, 지상에서 그 몸짓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 안토닌. 우리는 안토닌을 영원히 이 모습으로 기억할 것이다.
정혜윤의 [앞으로 올 사랑]중에서 『아홉째 날, 좋아하는 이야기』부분 p 253~255
이 이야기는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중에서 『바위 아래 개 두 마리』의 부분을 옮기고 덧붙여둔 글이다. '존 버거'의 글은 오래전에 읽었다. '열화당'에서 나온 책인데 '알라딘'에서 구입할 때 할인이 1도 없어서 의아했던 책이다. '글로 쓴 사진'이란 제목이 무얼 뜻하는지 읽으면서 정확하게 이해했다. 그리고 잊었다. '정혜윤'을 통해 다시 읽는다. 그리고 다시 파노라마와 와이드 앵글에 잡힌 사진을 본다. 그리고 느리게 흘러가는 10분을 카메라를 통해 응시한다. "왼손에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들고, 오른손에 모자를 들고 두 세트의 식기와 두 개의 잔과 포도주 병이 놓여 있는 테이블 앞에 소똥 묻은 샌들을 신고 다리를 벌리고 서서 눈물을 흘리는 안토닌"과 토니오를. 그리고 그전의 안토닌과 토니오의 시간을, 또 그전의 두 사람의 시간을, 그 전전의, 전 전 전의 시간을 생각한다. 어떤 일이 생기기까지 거기에 축적된 시간의 역사를 비로소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이 책에서 정혜윤은 그 이야기를 반복하고 반복한다. 그냥 죽어버린 1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았던 시간, 그 사람의 주변, 그 사람의 세계가 함께 죽어가는 것이라고, 한 사람의 역사로서 호명되기를 바라는 간절함 들을 읽는다. 그래서 이 책을 쉽게 읽을 수가 없다. 하루하루의 날들을 하나씩 떼어서 거기에 나오는 책들의 세계에 다시 발을 디디면서 계단을 오르듯 읽게 된다. 이 아홉째 날의 챕터는 '사랑하는 00과 함께 살기'다. 그리고 인용한 글은 『바위 아래 개 두 마리』인데 그 개들은 소를 치며 사는 안토닌의 개들이다. 안토닌의 24시간을 함께 하는 개들은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안토닌의 마음을 읽었을 것이고 두 사람의 저녁식사와 안토닌의 침묵 속에 담긴 무수한 언어들을 듣는다. 개들의 시선을 그저 받아 적은 것처럼 존 버거는 담아냈다. 그렇게 담아내는 작가와 그 시선을 풀어쓰는 작가 사이에서 글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바라본다. 원래 그랬던 건지 그 옷을 입혀서 달라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새삼 놀랍다.
이 아홉째 날의 마지막 이야기는 경북 칠곡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하던 대구에 사는 스물일곱 살의 청년 장덕준씨다. 그는 하루 5만 보를 걸었다 한다. 일을 하면서 5만 보라~! 세상에, 그 걸음수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루 열세 시간 달려 다니면서 음식을 날라도 2만 몇 천보다. 그 걸음에도 절인 배추처럼 녹초가 되곤 하는데 물류센터에서 5만 보의 걸음은 충분히 가늠된다. 산길을 걷고, 들길을 걷는 5만 보와는 차원이 다른 살인 무기로 변하는 걸음이다. 그런 걸음들이 계속된다면 몸의 기능들은 지쳐 떨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고 착했던, 부모님께는 친구 같고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여동생에게 애틋한 오빠였던 그도 한 가지 사안만큼은 아버지와 자주 싸우곤 했다 한다. 세월호였다. 아버지는 아이들 죽었으면 이제 그만하고 돈 받고 합의하고 말지 왜 저렇게 하느냐고 유족들을 비난했다. 아들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 내가 죽어도 그렇게 말할 거예요?", "아버지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렇게 말하던 아들이 죽어버렸다. 이제 아버지는 아들의 그 질문, "아버지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장덕준씨가 어떻게 일하고, 어쩌다 죽음에 이르렀는지 동료들의 증언과 도움이 필요했지만 밥줄이 달린 동료들은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희망은 다른 데서 왔다. 같이 아파하는 시만들과 아버지와 함께 세월호를 비난했던 아버지 친구들이 아버지와 함께 국회에 가고 쿠팡에 진실을 요구하는 길을 함께했다.
같이 아파하는 사람들과 그 슬픔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없다면 부모들은 한시도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죽은 자식을 둔 부모들이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것은 편안한 숨이다. 그들에게 가볍고 상쾌하고 부드러운 숨은 없다. 앞으로도 그런 날은 드물 것이다. 숨 쉴 때마다 가슴 한쪽이 시리고 찔리고 아리고 결국은 찢어질 테니까.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곳은 이해와 연민 어린 마음이 모이는 곳, 함께 울고 슬퍼하고 저항하고 목소리를 높여 싸워주는 곳 - 피난처뿐이다. p264
이 부분을 읽는데 마음이 미어진다. 더 이상 가볍고 상쾌하고 부드러운 숨을 쉴 수 없는 부모님들의 사진이 파노라마로 보인다. 아직도 진행형인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출근했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사진도 덩달아 주말의 명화의 영상처럼 보이는 것이다. 사랑은 같이 싸워주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엔딩 자막으로 올라간다. 사랑한다면 같이 무기를 들고 싸워주는 것, 함께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말이겠다. 여운이 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