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올 사랑 - 디스토피아 시대의 열 가지 사랑 이야기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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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카메라의 파노라마와 와이드앵글이 있다. 우선 외롭고 척박한 계곡이 있다. 틀림없이 햇살이 머리통 위로 인정사정없이 내리쬐는 곳일 것이다. 그곳에서 오래 일하려면 꼭 모자를 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독수리가 나는 하늘 아래로 서늘한 오두막이 있고 두 남자와 개 두 마리가 있다. 독수리는 영감을 주지만 먹을 것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 개는 밖에 잘 있다. 시간은 평범하게 흘러간다. 이제 일을 하러 가거나 낮잠을 자러 가면 된다. 그런데 안토닌은 가지 않고 서서 꼬박 10분간을 망설인다. 10분이 중요하다. 짧지 않은 시간이다. 10분은 이제 막 사형대에 올라 총살을 기다리던 도스토예프스키에게 황제의 칙사가 뛰어와서 총살이 취소되었음을 알릴 때까지 걸린 시간이다. 10분간 도스토예프스키는 임사 체험을 했다. 그렇다면 10분 동안 안토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돈을 지불하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 그의 손을 움직여 돈을 꺼내게 만들었을까? 그냥 밥 한 끼 나눠 먹었을 뿐인데. 토니오 입장에선 돈을 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안토닌은 이런 식사는 평생 처음이었다고 말한다. 고급 레스토랑에 간 것 같다고. 어쩌면 안토닌은 고급 레스토랑에 가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안토닌이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왜 울지? 그제야 나는 안토닌이 두 세트의 나이프와 유리잔을 어떻게 바라보았을지. 식후의 포도주와 대화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느끼게 된다. 눈물은 외로운 계곡에 외롭게 사는 소몰이꾼이라는 삶의 '조건'이 이끌어낸 거의 무의식적인 반응이란 것을 이해하게 된다.

      토니오도 나와 같은 것을 보았다. 토니오도 안토닌이 살아온 '시간'과 그의 삶의 '조건'을 봤다. 혼자서 대충 때운 수없이 많은 식사를 봤고, 대화 상대 없이 혼자 일하고 혼자 잠들던 많은 시간을 봤다. 그의 삶이 그에게 준 쓰라림을 봤다. 그 삶이 어떤 것이었을지 이해했다. 그리고 그의 노동과 외로움을 깊이 존중했다. 토니오도 울었다.

이렇게 해서 공간은 시간이 되었다. 수많은 시간이 하나의 순간으로 모였다. 고독한 노동의 한가운데에 있는, 삶이 준 쓰라림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함께 있는 것의 온기를 잠시나마 맛볼 수 있는, 어떤 조건도 없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그냥 그렇게 있었던 순간이다. 순수한 순간이다.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순간이다. 안토닌에게만 좋은 순간이 아니고 서로 좋은 순간이다. 두 사람은 안았고 나는 두 사람이 느꼈을 감정의 승화 같은 것을 함께 느낀다. 오두막에선 이 모든 일이 말없이 진행되었다. "자네 애쓰고 살았네" 같은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오두막의 침묵 속에서는 수많은 말이 오갔다. 가장 좋은 대화는 말없이도 수많은 대화가 오가는 대화고, 라디오로 치면 말이 아니라 말의 뉘앙스와 음색, 침묵을 알아듣는 것과 같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헤아리고 상상한다. 연결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많은 말을 하고도 고독한 이유다. 우리는 침묵 속의 상상을 팽개쳤다. 타인을 빠른 속도로 규정하거나 평가하고 있을 뿐이다. 어깨 한번 으쓱하고 털어낼 존재처럼.

      왼손에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들고, 오른손에 모자를 들고(그는 어쩌면 왼손잡이일 수도 있다) 두 세트의 식기와 두 개의 잔과 포도주 병이 놓여 있는 테이블 앞에 소똥 묻은 샌들을 신고 다리를 벌리고 서서 눈물을 흘리는 안토닌의 모습은, 다른 사람의 삶이 아닌 오로지 안토닌의 삶에서만 나올 수 있는 모습이다. 고독했지만 이해와 존중을 받는, 지상에서 그 몸짓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 안토닌. 우리는 안토닌을 영원히 이 모습으로 기억할 것이다.

      정혜윤의 [앞으로 올 사랑]중에서 『아홉째 날, 좋아하는 이야기』부분 p 253~255

          

 

      이 이야기는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중에서 『바위 아래 개 두 마리』의 부분을 옮기고 덧붙여둔 글이다. '존 버거'의 글은 오래전에 읽었다. '열화당'에서 나온 책인데 '알라딘'에서 구입할 때 할인이 1도 없어서 의아했던 책이다. '글로 쓴 사진'이란 제목이 무얼 뜻하는지 읽으면서 정확하게 이해했다. 그리고 잊었다. '정혜윤'을 통해 다시 읽는다. 그리고 다시 파노라마와 와이드 앵글에 잡힌 사진을 본다. 그리고 느리게 흘러가는 10분을 카메라를 통해 응시한다. "왼손에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들고, 오른손에 모자를 들고 두 세트의 식기와 두 개의 잔과 포도주 병이 놓여 있는 테이블 앞에 소똥 묻은 샌들을 신고 다리를 벌리고 서서 눈물을 흘리는 안토닌"과 토니오를. 그리고 그전의 안토닌과 토니오의 시간을, 또 그전의 두 사람의 시간을, 그 전전의, 전 전 전의 시간을 생각한다. 어떤 일이 생기기까지 거기에 축적된 시간의 역사를 비로소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이 책에서 정혜윤은 그 이야기를 반복하고 반복한다. 그냥 죽어버린 1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았던 시간, 그 사람의 주변, 그 사람의 세계가 함께 죽어가는 것이라고, 한 사람의 역사로서 호명되기를 바라는 간절함 들을 읽는다. 그래서 이 책을 쉽게 읽을 수가 없다. 하루하루의 날들을 하나씩 떼어서 거기에 나오는 책들의 세계에 다시 발을 디디면서 계단을 오르듯 읽게 된다. 이 아홉째 날의 챕터는 '사랑하는 00과 함께 살기'다. 그리고 인용한 글은 『바위 아래 개 두 마리』인데 그 개들은 소를 치며 사는 안토닌의 개들이다. 안토닌의 24시간을 함께 하는 개들은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안토닌의 마음을 읽었을 것이고 두 사람의 저녁식사와 안토닌의 침묵 속에 담긴 무수한 언어들을 듣는다. 개들의 시선을 그저 받아 적은 것처럼 존 버거는 담아냈다. 그렇게 담아내는 작가와 그 시선을 풀어쓰는 작가 사이에서 글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바라본다. 원래 그랬던 건지 그 옷을 입혀서 달라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새삼 놀랍다.

     이 아홉째 날의 마지막 이야기는 경북 칠곡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하던 대구에 사는 스물일곱 살의 청년 장덕준씨다. 그는 하루 5만 보를 걸었다 한다. 일을 하면서 5만 보라~! 세상에, 그 걸음수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루 열세 시간 달려 다니면서 음식을 날라도 2만 몇 천보다. 그 걸음에도 절인 배추처럼 녹초가 되곤 하는데 물류센터에서 5만 보의 걸음은 충분히 가늠된다. 산길을 걷고, 들길을 걷는 5만 보와는 차원이 다른 살인 무기로 변하는 걸음이다. 그런 걸음들이 계속된다면 몸의 기능들은 지쳐 떨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고 착했던, 부모님께는 친구 같고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여동생에게 애틋한 오빠였던 그도 한 가지 사안만큼은 아버지와 자주 싸우곤 했다 한다. 세월호였다. 아버지는 아이들 죽었으면 이제 그만하고 돈 받고 합의하고 말지 왜 저렇게 하느냐고 유족들을 비난했다. 아들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 내가 죽어도 그렇게 말할 거예요?", "아버지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렇게 말하던 아들이 죽어버렸다. 이제 아버지는 아들의 그 질문, "아버지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장덕준씨가 어떻게 일하고, 어쩌다 죽음에 이르렀는지 동료들의 증언과 도움이 필요했지만 밥줄이 달린 동료들은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희망은 다른 데서 왔다. 같이 아파하는 시만들과 아버지와 함께 세월호를 비난했던 아버지 친구들이 아버지와 함께 국회에 가고 쿠팡에 진실을 요구하는 길을 함께했다.

 

      같이 아파하는 사람들과 그 슬픔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없다면 부모들은 한시도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죽은 자식을 둔 부모들이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것은 편안한 숨이다. 그들에게 가볍고 상쾌하고 부드러운 숨은 없다. 앞으로도 그런 날은 드물 것이다. 숨 쉴 때마다 가슴 한쪽이 시리고 찔리고 아리고 결국은 찢어질 테니까.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곳은 이해와 연민 어린 마음이 모이는 곳, 함께 울고 슬퍼하고 저항하고 목소리를 높여 싸워주는 곳 - 피난처뿐이다. p264

 

      이 부분을 읽는데 마음이 미어진다. 더 이상 가볍고 상쾌하고 부드러운 숨을 쉴 수 없는 부모님들의 사진이 파노라마로 보인다. 아직도 진행형인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출근했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사진도 덩달아 주말의 명화의 영상처럼 보이는 것이다. 사랑은 같이 싸워주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엔딩 자막으로 올라간다. 사랑한다면 같이 무기를 들고 싸워주는 것, 함께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말이겠다. 여운이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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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시인선 151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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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시의 잎이 11시의 잎에게

                     이규리

     깜빡 눈감을 때 연두와 눈뜰 때 연두가 같지 않고

     조금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지 않음을

     어떻게 설명할까

     내가 있었음과 당신의 없었음은

     또 어떻게 말할까

     늦은 오후에 후둑 비 떨어진다

     비와 비

     그 사이가 바로 연두

     말하려다 만다

     연두를 설명할 수 없었던 일처럼

     사랑도 그러했는데

     다 듣고는 믿지 않을 거면서

     당신들은 말하라 말하라 다그친다

     설명하라 한다

     할수록 점점 다른 뜻이 되어가는

     절망 배신 희생 죽음 따위와 뭐가 달라

     그들 생애엔 순간을 포함하지 않았으리

     비루하지도 않았으리

     연두가 어떻게 제 변화를 설명할 수 있겠는지

     10시의 잎이 11시의 잎에게

     마음이 있어도 마음이 영 옮기지 못하는

     그 결별들을 다 어떻게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중에서

      만원 버스 안에서 흔들리다가 겨우 자리 잡고 앉아서 만나게 된 연두~

      10시의 내가 11시의 나에게,

      달라지고 있고 달라져 가고 있다고

      봄이 오고 있다고

      경칩인 아침, 속닥속닥한다.

      산수유, 수줍게 고개를 내민다.

      마음이 있어도 마음이 영 옮기지 못하는

      바람, 살랑살랑한 저녁이다.

      2021년 3월 5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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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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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설가는 표용적인 인종인가

   소설이라는 건 누가 뭐라고 하든 의심할 여지없이 매우 폭이 넓은 표현 형태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 폭넓음이야말로 소설이 가진 소박하고도 위대한 에너지의 원천의 중요한 일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쓸 수 있다'는 건 내가 보기에는 소설에게는 비방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입니다. [p16]

   대답은 단 한 가지, 실제로 물에 뛰어들어 과연 떠오르는지 가라앉는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난폭한 말이지만, 인생이란 원래 그런 식으로 생겨먹은 모양이에요. 게다가 애초에 소설 같은 건 쓰지 않아도 (혹은 오히려 쓰지 않는 편이) 인생은 얼마든지 총명하게 유효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쓰고 싶다,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라는 사람이 소설을 씁니다. 그리고 또한 지속적으로 소설을 씁니다. [p29]

   2, 소설가가 된 무렵

   삼십여 년 전 봄날 오후에 진구 구장 외야석에서 내 손에 하늘하늘 떨어져 내려온 것의 감촉을 나는 아직 또렷이 기억하고 있고, 그 일 년 뒤의 봄날 오후에 센다가야 초등학교 옆에서 주운 상처 입은 비둘기의 온기를 똑같이 내 손바닥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소설 쓰기'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항상 그 감촉을 다시 떠올립니다. 그런 기억이 의미하는 것은 내 안에 있을 터인 뭔가를 믿는 것이고, 그것이 키워낼 가능성을 꿈꾸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감촉이 나의 내부에 아직껏 남아 있다는 것은 정말로 멋진 일입니다.

   첫 소설을 쓸 때 느꼈던, 문장을 만드는 일의 '기분 좋음' '즐거움'은 지금도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습니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주방에서 커피를 데워 큼직한 머그잔에 따르고 그 잔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켭니다 (이따금 원고지와 오래도록 애용해온 몽블랑 굵은 만년필이 그리워지지만). 그리고 '자 이제부터 뭘 써볼까' 하고 생각을 굴립니다. 그때는 정말로 행복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뭔가 써내는 것이 고통이라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소설이 안 써져서 고생했다는 경험도 (감사하게도) 없습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내 생각에는, 만일 즐겁지 않다면 애초에 소설을 쓰는 의미 따위는 없습니다. 고역苦役으로서 소설을 쓴다는 사고방식에 나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소설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퐁퐁 샘솟듯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57]

   3, 문학상에 대해서

   레이먼드 챈들러는 한 편지에서 노벨 문학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대작가가 되고 싶을까? 내가 노벨 문학상을 타고 싶을까? 노벨 문학상이 대체 뭔데? 너무나 많은 이류 작가에게 이 상이 주어지고 있다. 읽을 마음도 나지 않는 그런 작가들에게. 애초에 이 상을 타려면 스톡홀름까지 찾아가 정장을 차려입고 연설을 해야 한다. 노벨 문학상이 그런 수고를 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단연코 노다.'[p72]

   문학상에 대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지금까지 나는 되도록 언급하지 않으려고 해왔습니다. 상을 타고 타지 않고는 작품의 내용과는 많은 경우, 기본적으로 관련이 없는 문제고 그러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상당히 자극적인 화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처음에 말했던 대로 우연히 문예지에 실린 아쿠타가와상에 대한 그 작은 칼럼을 보고, 이제 슬슬 문학상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바를 한번 얘기해둘 적당한 때인지도 모른다,라고 문득 마음먹었습니다. 계속 얘기하지 않고 있으면 묘한 오해를 살 가능성도 있고, 그걸 어느 정도 올바르게 정정해두지 않으면 그 오해가 '견해'로 정착될 우려도 있으니까.

   그렇기는 하나 그런 사안에 대해 (그냥 속물적인 사안이라고 할까요) 생각하는 바를 얘기하기가 상당히 어렵군요. 경우에 따라서는 솔직하게 말할수록 더 거짓말 같고, 또한 오만하게 비칠지도 모릅니다. 던진 돌멩이가 더 강하게 내게로 되돌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최종적으로 가장 득책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분도 분명 어딘가에 계실 것이다, 하고.

   내가 여기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건 작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격'이라는 점입니다. 상은 어디까지나 그 자격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작가가 행해온 작업의 성과도 아니고 보상도 아닙니다. 하물며 결론 같은 것도 아니에요. 어떤 상이 그 자격을 어떤 형태로든 보강해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작가에게는 '좋은 상'이라는 얘기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혹은 도리어 방해물이 되고 성가심의 원인이 된다면, 그것은 유감스럽지만 '좋은 상'이라고 할 수 없다,라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올그런은 메달을 휙 내던져버리고 챈들러는 스톡홀름행을 아마도 거부할 것입니다.- 물론 그가 그런 입장에 처했다면 실제로 어떻게 했을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처럼 문학상의 가치는 사람 사람마다 각각 달라집니다. 거기에는 개인의 입장이 있고 개인의 사정이 있고 개인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한 묶음으로 취급해 논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문학상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도 단지 그것뿐입니다.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일률적으로 논하지 않았으면 한다. [p82~84]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에세이

 

 

  그가 어떤 소설가인지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내공이 탄탄한 작가였다는데 새삼 감탄한다.

  다 읽고 나면 소설을 쓰는 쪽에 가까워지려나하고 시작했는데, 웬걸 더 멀어졌을 뿐이다. 필사하듯 밑줄 긋고 옮겨 적는 부분만 한 가득이다. 역시 소설보다는 잘 읽히는 하루키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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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시인선 151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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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첫눈입니까

                   이규리

   누구인가 스쳐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낱낱이 드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햇살을 우울이라 할 때도

   구름을 오해라 해야 할 때도

   그리고 어둠을 어둡지 않다 말할 때도

   첫눈이었다

   그걸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허공이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당신은 첫눈입니까

            시집[당신은 첫눈입니까]중에서

 

   

 

​   우리가 통화하는 동안 눈은 조용히 쌓이고 있었다.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는 동안 눈은 조용조용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는 그 마음에 대해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풀풀 날리는 공중'조차 가진 적 없는 우리의 지난한 날들을 "흩날리는 부질없음'의 소멸들을 나누는 중에도 눈은 내리고 있었다. 봄의 시작이라 믿고 싶은 순간에도 내리는 눈은 아름답다. 어제는 나뭇가지에 눈을 띄운 아가들을 보고 경이로워했는데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지는 마음 기울기를 찬찬한 눈으로 보고 있다.

   이 겨울 제대로 된 눈을 본 적이 없다는, 당신은 첫눈입니까

 

   

 

 

 

   해 질 무렵이면 끌리듯 나서는 산책길은 춥고 조심스럽게 미끄러웠어.

   그래도 뽀득뽀득한 눈길 밟는 소리는 느낌이 좋았어.

   라디오에서는 경주에 첫눈이 온다던데, 당신은 첫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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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시인선 135
이원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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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슬픈 날이야, 오죽하면 신발에 달팽이가 붙을까

​                              이원하

​ 

  하도리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슬슬 나가자

  울기 좋은 때다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밭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혼자 울기 좋은 때다

  위로의 말은 없고 이해만 해주는

  바람의 목소리

  고인 눈물 부지런하라고 떠미는

  이 바람과 진동으로 나는 울 수 있다

  기분과의 타협 끝에 오 분이면 걸어갈 거리를

  좁은 보폭으로 아껴가며 걷는다

  세상이 내 기분대로 흘러간다면 내일쯤

  이런 거, 저런 거 모두 데리고 비를 떠밀 것이다

  걷다가

  밭을 지키는 하얀 흔적과 같은 개에게

  엄살만 담긴 지갑을 줘버린다

  엄살로 한 끼 정도는 사먹을 수 있으니까

  한 끼쯤 남에게 양보해도 내 허기는 괜찮으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검은 돌들이 듬성한 골목

  골목이 기우는 대로 나는 흐른다

  골목 끝에 다다르면 대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거미가 해놓은 첫 줄을 검사하다가

  바쁘게 빠져나가듯 집 안으로 들어간다

               시집[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중에서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은 노을이 지는 시간일 것이다. 그 시간은 "울기 좋은 때" 맞다.

  약간은 센치해지는 설날 오후,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을 읽는다.

  제주 올레 초기가 주로 서귀포 쪽 바다였다면 함덕 쪽 바다들은 2015년 이후에 만나기 시작했다. 특히 상대적으로 조용한 하도리 바다와 길, "위로의 말은 없고 이해만 해주는 바다의 목소리"에 빠져 "하늘에 이불이 덮이"는 길 위를 서성였다. 허기와 쓸쓸함과 종일 끌고 다닌 발이 무거울 때쯤이면 어김없이 전화는 울린다. '어디야? 얼릉 와. 저녁 먹어야지' 내 제주의 거점은 매번 성산포다. "세상이 내 기분대로 흘러간다면 내일쯤" 찾아가고 싶은 다정한 주인이 기다리고 있는 성산포 성산리의 민박집. "한 끼쯤 남에게 양보해도 내 허기는 괜찮으니까 집으로 돌아가" 듯 반짝거리는 마당을 지나 이층 데크에서 매번 "혼자 울기 좋은 때"임을 알려주는 식산봉 위로 저녁이 가볍게 내려앉는다. 내가 오늘 찾아간 길들과 풍경과 말들을 조잘조잘 대면서 또 한 명의 산 언니네 부부와 '냉장고 안 들어간 오리지널 한라산 한 잔'을 콜콜콜 따른다. 식탁에는 숨비소리 거칠게 공수해온 '참소라'와 함께 걷던 친구들의 이름이 그득할 것이다. 그립다. 안녕하신지 전화만으로 안부를 묻기에는 허허롭다. 하여 여기에 숨겨둔다. 무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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