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정윤조 옮김 / 문학수첩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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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플래너리 오코너 소설  정윤조옮김 [문학수첩(2014)]

 

 

   '전미도서상 수상', '오헨리단편소설상 수상', '미국예술학회 수상', ' 미국대학위원회SAT 추천도서'

  "고딕문학의 거장 플래너리 오코너 대표작 국내최초출간!"

 

 

  내게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는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인가와 동일한 질문이 된다. 책 한 권은 한 사람의 생애와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하찮은 삶에도 (하찮은 삶은 누가 판단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접어두고라도) 기승전결의 희로애락이 있기에 누구도 함부로 타인의 생애를 예단하지 않아야 하며, 아무리 형편없는 글에도(마찬가지로 형편없다는 결정은 누가 내린 것인가의 의문은 접어두고) 그 글을 쓴 사람의 철학과 삶이 반영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읽는 동안 실망스럽더라도 칼을 들지는 않으려고 한다. 글 또한 음식과 같아서 기호에 따라 호불호가 다를 수 있고 각각의 스타일이 있기에 선택하는 자신의 책임도 일정 부분 기여한다. 자신이 쓴 글에 대한 평가의 말이나 글은 칼날과 같아서 받아들이는 상대는 돌이킬 수 없는 창상(創傷)을 입을 수 있다. 나도 마찬가지고 쓰는 이의 유, 무명을 떠나서 똑같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줄의 댓글도, 서평도 조심스럽다. 쉽게 튀어나간 말이나 잘난 척한 신랄한 한 줄이 상처로 남게 되지 않게 조심하는 편이다. 요즘처럼 독후감을 많이 쓴 적도 없는 데다 온라인상에 떠도는 타인의 소설 한 편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 때문에 갑자기 걱정이 들끓는다. 50년간의 계통 없는 독서가 남긴 기억들이 책 속의 문장을 내가 쓴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끔은 의심스럽다. 물론 작정하고 표절한 이들은 다른 문제다. 소설 표절이 드러나자 그 사람 자체가 표절은 아닌가 싶게 전방위적으로 많이도 해왔던 데. 그것이 가능한 제도적 한계의 헛점은 더 큰 문제다.( 한 줄짜리 검색으로도 드러났을 문제인데 이제 와서 허둥지둥하는 주최 측들은 무슨 염치가 있을까) 무엇보다 원작자의 고통이 가장 크겠다. 내가 아는 한정된 세계관이, 내가 가진 부족함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다면 용서하시라. 이 책 표지띠의 화려한 수식어들 덕분에 그런 생각이 깊어졌다. 수식어의 화려함에 쉽게 경도되어 이 책을 구입했을 것인데 문제의 표절 때문에 이렇게 시작한다.

 

 

 

  첫 번째 단편이자 표제작인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는 놀라운 흡입력으로 단숨에 읽게 했는데,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가고 등허리가 뻐근하다. 당연히 '플래너리 오코너'는 처음이다. ('오코너', 이 익숙한 느낌은 싱어송라이터 '시네이드 오코너' 덕이다. 박박민머리를 유지하면서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바로 그 '시네이드 오코너'만큼이나 '플래너리 오코너'와의 첫 만남도 강렬하다.) 모르는 작가이기에 역자의 말이 있나 찾아보니 없다. 날개에 붙은 작가에 대한 설명문을 읽고 '고딕문학'을 네이버에 검색해봤더니, 이 서늘함이 어디서 오는지 어렴풋이 알겠다.

   [미국 조지아 주 출생의 여성 소설가. 아일랜드계 가톨릭 가문에서 자랐고, 아이오와 주립여자대학과 아이오와 대학에서 수학했다. 25세에 홍반성 낭창이라는 불치병에 걸려오랜 세월 투병 생활을 한끝에 1964년 3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장편소설 2편과 단편소설 32편, 여러 권의 평론집과 에세이를 남겼다.

  오코너는 미국 남부의 고딕문학 계열의 작가로 분류되며, 종교적 색채가 짙은 소설을 주로 썼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종교 이론에 정통했으며, 거의 모든 작품에서 '인간과 죄악의 구원'이라는 주제를 다양한 형식으로 변주하는 일관된 주제의식을 보였다. 형식적인 면으로는 치밀한 이야기 구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상징, 사실적인 묘사가 단연 돋보인다. 부조리한 상황이 초래하는 블랙 유머와 선악의 경계가 모호한 인물 설정, 인간 본성과 종교적 신념의 시험대 역할을 하는 폭력적인 상황은 작가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만하다.

  작가의 단편 작품들은 특히 높은 평가를 받아서,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영문학과 커리큘럼에서 플래너리 오코너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1950, 60년대에 출간된 두 권의 단편집은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50년 이상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모든 글은 글쓴이 자신이다'라는 정희진의 말에 동의한다. 소설의 형식을 빌렸지만 오코너의 가치관과 사상, 생활태도는 각각의 소설 속에서 여실하게 만날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작가의 약력을 살펴보기 전에는 1950~60년대의 소설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젊은 우리 작가, 강화길의 '괜찮은 사람'에서도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행동이나 사고들이 관찰된다면 순전히 내 관점과 생각일 뿐이리라. 어쩌면 2014년의 번역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쉬움은 해설이나, 옮긴이의 말이 없는 것과 더불어 원제도 표기되지 않았다는 점은 원어에 관심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는 안타까웠다. 어떤 책들은 주석이 많이 달려서 읽는데 방해되기도 하지만 전혀 없는 것도 읽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각각의 열 편의 단편들은 연작인 것처럼 읽힌다. 장소도 주인공도 다른 데 연작처럼 읽히는 이유는 뭘까. 우선 뛰어난 가독성이 일관성을 유지하기에 쭈욱 단숨에 읽어버려서 일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패턴의 다양한 인물에 있다. 이름이나 호칭은 다르지만 거의 매 편 등장하는 수다스럽고(영화 속이면 어떤 차림새를 했을지 그려지는) 귀부인스러움을 유지하는 여인들이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의 할머니, [강]의 코닌 부인, [당신을 구하는 생명은]의 노파, [뜻밖의 재산]의 루비, [성령이 깃든 사도]의 어머니, [검둥이 인형]의 할아버지 헤드, [불속의 원] 코프 부인과 프리처드 부인, [적과의 뒤늦은 조우] 샐리 포커 새시, [선한 시골 사람들]의 호프웰 부인과 프리먼 부인, [망명자]의 매킨타이어 부인과 쇼틀리 부인이 그렇다. 이들은 나쁜 사람은 아니다. 남이 보는 내 모습을 더욱 중요시하고 사회적 관점이나 사회적 잣대로,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재단할 뿐이다. 그들에게는 정당한 이유가 있고 공명정대한 이성에 근거한 지극히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들이다. 반대로 악으로 내몰리는 인물 군도 반드시 등장한다. 세상이 그렇지 않은가.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쁜 사람도 있는 것이니까. 여기서 나쁜 사람일 수도 있는 가정하에 존재하는 나쁜 사람은, 사회적으로 이미 범죄자로 지목된 '미스핏'을 제외한 이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얼굴과 차림새를 갖추고 있다. 아무 짓도 안 했지만 그저 검은 얼굴의 검둥이 일 수도 있고, 표정을 알 수 없는 늙은이 일 수도 있으며, 살아온 삶을 예측할 수 없는 이방인 즉, 망명자이기도 하고, 무리 지어 다니는 위악적인 아이들이거나 성경을 팔러 다니는 세일즈맨이기도 하다. 표제작에서 이미 알아채야 했을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는 나와 내 가족을 제외한 사람들 중에는 '좋은 사람은'없다,는 항변을 책 전체에서 확인해가는 과정이었다. 나와, 내 가족과 다르면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잠재적 인식은 멀쩡한 사람도 나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고, 조금 나쁜 생각을 가진 사람을 사회 부적응자로 만들어 버린다.

 

 

 

  『두 사람은 어떤 거대한 수수께끼를 마주한 듯한, 또는 두 사람 모두에게 패배를 안긴 누군가의 승전 기념물 앞에 선 듯한 얼굴로 흑인 인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들은 누군가 자비를 베풀기라도 한 듯 둘 사이의 불화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늘 바르게 살아온 헤드씨는 다른 사람의 자비를 구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자비를 입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넬슨을 보며, 자신이 아직도 현명하다는 사실을 드러낼 말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를 보는 아이의 눈빛은 그런 확신을 갈구하고 있었다. 넬슨의 눈은 그가 수수께끼 같은 존재의 신비를 확실히 설명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헤드씨는 무언가 고상한 말을 하려고 입술을 뗐고 그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이곳은 진짜 검둥이가 부족한 거야. 하는 수없이 검둥이 인형을 대신 갖다 놓은 거지."

  잠시 뒤 아이는 입 주변을 묘하게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길을 잃기 전에 얼른 집으로 돌아가요." 』[p202. 203]

 

 

   [검둥이 인형] 속의 한 대목이다. 조숙한 손자에게 번잡한 도시를 보여주는 헤드씨는 갑자기 닥친 어려움 앞에서 손자를 부인하는 것으로 사태를 해결했다. 둘 사이의 거리는 협곡만큼 깊어졌으나 길바닥에서 마주친 낡은 검둥이 인형 하나에 저렇듯 극적 자비를 이끌어 낸 것이다. 나는 저 인용 부분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고 생각되었다. 우리의 세계관은 인형 하나로 바뀔 수 있다. '검둥이 인형'의 상징성은 반세기 이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우리 주변에서 비일 비재한 여성을 향한, 장애인을 향한, 인종을 향한, 이방인을 향한 극단적 혐오와 차별의 논란은 저 때보다 더욱 깊어졌을 뿐이다. 세상의 누군가를 향해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관용'이나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온전한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생각의 전환, 거기서부터 차별은 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를 생각하게 만든 책이다. 이래서 독서를 해야 하는구나라는 깨달음은 덤으로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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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나무 정류장 창비시선 338
박성우 지음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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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닥

​              박성우

 

괜찮아, 바닥을 보여줘도 괜찮아

나도 그대에게 바닥을 보여줄게, 악수

우린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위로하고 위로받았던가

그대의 바닥과 나의 바닥, 손바닥

괜찮아, 처음엔 다 서툴고 떨려

처음이 아니어서 능숙해도 괜찮아

그대와 나는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핥았던가

아, 달콤한 바닥이여, 혓바닥

괜찮아, 냄새가 나면 좀 어때

그대 바닥을 내밀어봐,

냄새나는 바닥을 내가 닦아줄게

그대와 내가 마주앉아 씻어주던 바닥, 발바닥

그래, 우리 몸엔 세 개의 바닥이 있지

손바닥과 혓바닥과 발바닥,

이 세 바닥을 죄 보여주고 감쌀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겠지

 

 

 자두나무 정류장 

 

외딴 강마을

자두나무 정류장에

 

비가 와서 내린다

눈이 와서 내린다

달이 와서 내린다

별이 와서 내린다

 

나는 자주자주

자두나무 정류장에 간다

 

비가 와도 가고

눈이 와도 가고

달이 와도 가고

별이 와도 간다

 

덜커덩덜커덩 왔는데

두근두근 바짝 왔는데

암도 없으면 서운하니까

 

비가 오면 비마중

눈이 오면 눈마중

달이 오면 달마중

별이 오면 별마중 간다

 

온다는 기별도 없이

 

비가 와서 후다닥 내린다

눈이 와서 휘이잉 내린다

달이 와서 찰바당찰바당 내린다

뭇별이 우르르 몰려와서 와르르 내린다

 

북적북적한 자두나무 정류장에는

왕왕, 장에 갔던 할매도 허청허청 섞여 내린다

 

 

 나흘 폭설 

 

폭설이다

버스는 나흘째 오지 않고

자두나무 정류장에 나온 이는 자두나무뿐이다

 

산마을은 발 동동거릴 일 없이 느긋하다

 

간혹 빈 비닐하우스를 들여다보던 발길도

점방에 담배 사러 나가던 발길도

이장선거 끝난 마을회관에 신발 한 켤레씩을 보탠다

무를 쳐 넣고 끓이는 닭국 냄새 가득한 방에는

벌써 윷판이 벌어졌고 이른 낮술도 한자리 차고앉았다

 

허나, 절절 끓는 마을회관 방엔 먼 또래도 없어

잠깐 끼어보는 것조차 머쓱하고 어렵다 나는

젖은 털신을 탈탈 털어 신고 다시 빈집에 든다

 

아까 낸 눈길조차 금시 지워지는 마당,

동치미 국물을 마시다 쓸고 치직거리는

라디오를 물리게 듣다가 쓴다 이따금

눈보라가 몰려와 한바탕씩 거들고 간다

 

한시도 쉬지 않고 눈을 쓸어내던

싸리나무와 조릿대와 조무래기 뽕나무는

되레 눈썹머리까지 폭설을 당겨 덮고 누웠다

 

하얀 어둠도 눈 발 따라 푹푹 쌓이는 저녁

이번엔 내가 먼저, 긴긴 폭설 밤을 산마을에 가둔다

흰 무채처럼 쏟아지는 찬 외로움도 예외일 순 없다

 

 

 배꼽

​ ​

살구꽃 자리에는 살구꽃비

자두꽃 자리에는 자두꽃비

복사꽃 자리에는 복사꽃비

아그배꽃 자리에는 아그배꽃비 온다

분홍 하양 분홍 하양 하냥다짐 온다

살구꽃비는 살구배꼽

자두꽃비는 자두배꼽

복사꽃비는 복숭배꼽

아그배꽃비는 아기배꼽 달고 간다

아내랑 아기랑

배꼽마당에 나와 배꼽비 본다

꽃비 배꼽 본다​

​ ​

 

살구나무 변소

 

부안 감다리집 마당에는

살구나무 변소가 있는데요

 

볼일 보러 변소로 가면

살구나무가 치마 내리는 것을 훔쳐보다가는요

엉덩이 까고 후딱 앉으면요 후딱

시치미 떼고 서 있는 엉큼한 살구나무가

한눈에 들어오는 변소가 있는데요

안 쳐다본 척하다가는요

볼일 다 보고 치마 올리고 일어서는 순간에요

후딱 변소 안을 들여다보는 엉큼한 살구나무가 있는데요

 

네 칸 널판지 조각을 대어 변소 문짝을 만들었다가는요

뜬금없이 위쪽 한 칸을 떼어내고는

오살헐 살구나무 풍경을 덧대놓은 것이 문제는 문제이겠지만요

 

그보담은 오살헐 살구나무와 은근한 뭣을 즐기기라도 하듯

살구나무 변소를 찾는 사람도 문제는 문제인데요

 

그니깐, 죽으면 죽었지 살구나무 변소에는

얼씬도 못할 줄 알았던 서울내기 제 색시가요

구린내 나는 살구나무 변소를 갔다 오더니만요

살구나무 변소 참 좋다, 하는 것도 문제는 큰 문제이겠지요

 

알고 보면, 살구나무 변소는요

부안 감다리 사는 울 어머니 작품이기도 하지요

 

 

목젖

평소엔 그냥 목젖이었다가

내가 목놓아 울 때​

나에게 젖을 물려주는 젖

젖도 안 나오는 젖

같은 젖,

허나 쪽쪽 빨다보면

울음이 죄 삼켜지는 젖

무에 그리 슬프더냐, 나중에

나중에 내가

가장 깊고 긴 잠에 들어야 할 때

꼬옥 물고 자장자장 잠들라고

엄마가 진즉에 물려준 젖​

 

   시집 [자두나무 정류장(창비2011) 중에서

 

 

   그의 시는 바쁜 도시의 일상을 잠시 접어둔 채 무작정 찾아가 보고 싶은 내면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자본과 문명의 근대적 삶을 무조건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 해도,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맹목적인 변화의 속도를 조금은 늦추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 시는 '의미의 소통'보다는 '감각의 촉발'을 지향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생활과 현실의 상처와 고통은 커져가는데, 시는 이러한 현실을 감싸 안는 공동체의 가치를 보여주기보다는 철저하게 개인화된 내면의 감각으로 점점 더 숨어들고 있다.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가장 감성적인 소통의 도구인 시조차 이제는 지식인의 산물로 변질되어 버린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쩌면 박성우의 시는 조금은 상투적이고 진부한 발상과 어법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본과 문명의 속도를 따라잡기에 분주한 우리 시단의 과잉 언어에도 불구하고 생활과 현실을 중심에 놓고 사유하고 실천하는 일관된 그의 시 세계는, 낡고 오래되었지만 오히려 가장 미래지향적인 역설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작 자기가/ 이 동네 마지막 일소인 줄도 모르고/ 황순이 앞세워 느릿느릿 비탈밭을 간다"라는 "늙다리 금수 양반"(「일소」)처럼 조금은 어리석고 무심해도 충분히 살아갈만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박성우의 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의 모습이다. "별말 없이"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계, 아마도 지금 시란 무엇인가 혹은 시는 어떠해야 하는가와 같은 근본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이러한 마음과 생각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해설 "별말 없이"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 문학평론가 하상일

 

 

 

시인의 말

어떤 금기처럼

내 방에 들이지 않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거울이다.

 

나를 온전히 비춰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쓴 시뿐이므로.

          2011년 11월

          박성우

 

   이 시집의 시들은 아름답다. 투명하고 정갈하기 짝이 없는 이 시들은 가녀린 듯하면서도 강인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시들이 시인의 성품을 닮았다. 살짝 스치는 미풍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금선(琴線)의 울음처럼 여리면서도 강하다. 슬프고 쓸쓸해 보이지만, 결코 애상(哀傷)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이 시집에서 자주 익살을 부리는데, 너무 우습고, 너무 착하고 순수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남도 말맛을 사용한 그의 익살은 우리가 흔히 보아온 걸직한 입담과는 전혀 다른 진경을 보여주는데, 구수하면서도 사뭇 고상한 품격을 지니고 있다. 투명하고 정갈한 아름다움. 조용하게 던지는 그의 말들이 이러한 아름다움을 담는 그릇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새로운 언어의 발견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현기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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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김보라 쓰고 엮음, 김원영, 남다은, 정희진, 최은영, 앨리슨 벡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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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벌새

   김보라 쓰고 엮음 최은영, 남다은, 김원영, 정희진, 그리고 앨리스 벡델 [아르테(2019)]

 

 

 

   2020년 시월의 마지막 날 아주대 병원 침상에 누워있었다.

  옆 침대 환자와 보호자는 밤만 되면 부스럭거리고,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고, 급기야는 내 침대를 건드리는 통에 며칠째 옅은 잠은 통증으로 예민해진 신경을 더욱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위중 환자가 대부분인 병실은 무겁고 낮은 고통 속에 신음을 채우고 용도를 파악할 수 없는 장비들에서 나는 기계 소리는 불길하기도 했다. 모두 잠들어야 하는 밤, 멀리 도망간 의식을 붙잡고 침묵 속에 누운 맞은편 건너 환자의 위기 상태가 병실을 긴장으로 훑고 지나간 다음이다. 오늘 밤도 잠은 다 잤다. 병원에서 병을 더 얻을 지경이다.

  시트를 뒤집어쓰고 폰에 매달려서 '지구의 하루'를 보기 시작했다. 장엄한 태양과 함께 깨어나는 지구의 아침은 암울한 병실 상황을 잊어도 좋게 부산스럽고 신비했으며, 나름의 규칙으로 질서정연한 엄숙함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때 오르내리며 꽃에 부리를 박고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 벌새를 보았다. 영화'벌새'의 그 벌새다.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다른 동물들처럼 그저 심상하게 보았을 것이다. 버석거리는 신경증과 뻑뻑한 눈, 집요하게 파고드는 통증의 깊이는 화면을 보고 있어도 집중을 방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벌의 공격에도 생명이 위태롭고 빗방울의 무게에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 다 자라야 5센티 정도이고 1초에 90번까지 날갯짓을 할 수 있단다. 세상에, 일초에 90번을……. 거기다 끊임없이 꿀을 먹어야 살 수 있는 벌새의 현란한 날갯짓이 아름답기보다는 안타까운 마음 쪽으로 날아왔다. 사는 건 누구에게나 무엇에게나 녹록하지 않은 모양이다. 벌새를 본 것으로 통증은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이 벌새의 상징성이 영화가 의도한 것이구나, 깨달았다. 영화로 이미 만났지만 거기 담긴 중의적인 표현들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영화는 잔잔하고 담담하게 나를 이끌었지만 몰입되지는 않았다. 중학생 은희의 성장 영화였다. 화려한 수상 소식들과 독립 영화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보기는 했는데 젊은 감독이 섬세하게 잘 만든 영화구나, 이상의 특별함은 남지 않았다.

  우선은 서울의 강남이라는 장소가 갖고 있는 상징성에 다른 것들을 놓쳤다. 평생을 변두리의 바깥에서 헐떡헐떡 살았던 경험들은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 특별시에서, 그것도 강남이라는 공간 자체가 예전에는 어떠했는지를 잊게 만드는 지금의 상징성이 다른 여지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1994년, 성수대교 붕괴도 놀랍기는 했지만 나는 나대로 그 시절을 살아내느라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겨우겨우 책방을 꾸려가면서 결제 대금을 밀리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던 탓에, 어떻게든 자식들에게 평범 이상의 조건을 제공하고자 고군분투하는 부부의 부지런함이 더 눈에 들어왔다. 가족을 위해 노동하는 아버지는 나와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다. 내가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세계의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으로만 인식되고는 한다. 경제적으로 무능해도 가장의 권위는 늘 펄펄 살아있어 무섭고 멀었던 가장들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술에 취해 갑자기 찾아온 오빠로 인해 남편의 눈치를 보던 엄마의 모습은 어쩐지 익숙했다. 은희에게 언어와 몸의 폭력을 행사하는 오빠는 더더구나 익숙해서 놀랍기까지 했다.

  퇴원과 함께 책상에 쌓인 책 무더기에서 '벌새'의 대본집을 읽었다. 굳이 대본집까지 읽을 필요가 있을까 망설이는 마음은 한창 빠져있는 최은영의 글과, 애정 하는 정희진의 글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서다. 대본집을 읽고 나니 <벌새>를 몇 번이고 되돌려본 느낌이 든다. 영지의 옆얼굴도 선명해지고 은희네 가족이 식탁에 있던 모습도 생생하다. 대본집은 책이 아니라 영화를 읽는 일이었다. 이미지를 읽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녀는 은희에게 그런 순간들과 맞서 싸우라고, 긍정적으로 살라고 함부로 충고하지 않는다. 자신에게도 힘들고 우울한 순간이 있다고,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을 때가 있다고 고백할 뿐이다. 영화에서는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영지 선생님 또한 깊이 상처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표정을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영지 선생님이 깊이 상처받은 사람이어서 은희의 상처를 볼 수 있었던 걸까. 그러나 나는 깊이 상처받은 사람만이 상처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은 신기한 존재여서 같은 상처를 받은 사람이 오히려 타인의 상처에 무감하고 더 잔인해질 수도 있는 법이니까.

  한국 사회에는 상처를 미화하는 문화가 있다.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를 '극복'하고 강해지는 서사를 환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상처는 언제나 사람에게 좋은가. 사람으로 살면서 받을 수밖에 없는 상처가 있겠지만, 받지 않아도 될 상처는 최대한 받지 않는 편이 더 좋지 않나. 상처를 미화하는 문화는 가해자에게 언제나 얼마간의 정당성을 주는 것 같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그런 거야. 정말 그런가. 인간은 상처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만 성장한다. 사랑은 상처가 상처로만 머물게 하지 않고, 인간을 상처 속에 매몰되어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무감한 사람으로 변하도록 두지 않는다. 은희는 영지 선생님과의 만남을 통과하며 사랑받아 성장했다. 함부로 대우받아 성장한 것이 아니라. p213 [그때의 은희들에게 _최은영]중에서

 

 

   우리가 타자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순간 그 타자는 나의 일부와 연결될 것인데, 그에게서 언젠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면 우리는 그의 모습을 미래의 나에게 투영한다. 그 미래가 도래하여 현재가 되면, 이제 우리는 과거의 나를 찾아간다. 기억 속의 바로 그 타자, '영지'의 모습으로 과거의 시간을 방문해 어린 나(은희)를 만나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꿈을 꾸고 어떤 꿈에 복무해야 할지 우리 중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며 삶이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이렇게 타인을 동해 미래의 자신을 형성하고, 과거의 자신을 돌보면서, 여러 사람의 존재를 품고 한 사람의 성인이 되어 갈 것이다.

   '한강의 기적'을 모두가 믿던 집합적 몽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나 한국 사회는 세월호 참사가 보여 주듯 여전히 94년의 지배적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죽음 앞에서 애도는 불가능했다. 사람들은 불안하고 우울하다. 집단의 꿈과 질서로부터 독립한 개인이면서, 타인을 쉽게 동정하지 않으며, 작고 약한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고, 절대로 부당한 것에는 맞서라고 용기를 주는 사람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존재해야만 우리는 그 사람의 존재를 통해 미래의 우리를 꿈꾸고, 과거의 우리를 돌보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p235 [붕괴하는 꿈속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이별한다는 것 _ 김원영]중에서

 

 

   여성의 계급은 나이와 외모다. 나이 든 여성이나 장애 여성, 이주 여성이 겪는 세계는 젠더로 환원되지 않는다. 한국의 기혼 중년 여성은 무엇으로 사는가. 남편이 출세하고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 '완벽한 가정' 은 드물다. 아니, 무엇보다 그것은 남편과 자녀들 분인이 할 수 있는 일이지, 타인이 대신할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이다. 엄마는 비난만 받을 뿐이다. 여성이 나이가 들면 전업주부든 여배우든 경력 단절 여성이든,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이들을 돕는 인프라가 전혀 없다.

  남성 중심 사회란, 공적 영역의 권력을 남성(남성 연대)이 독점하는 구조를 말한다. 이때 여성의 '가치'는 남성 네트워크의 접근 가능성 혹은 자원 있는 개별 남성과의 관계 여부에 의해 정해진다. 남편이든 아버지든 애인이든 권력 있는 남성의 무한 사랑을 받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동화(신화)에서나 가능하다. 가부장제는 보호해야 할 여성, 그렇지 않은 여성, 그렇지 않아도 되는 여성을 구분하는 권력이다. 여성의 지위는 개인의 능력에 의해 정해지기보다는, 권력 있는 '아버지의 딸(박근혜)'일 때 결정적이다. '아버지의 딸, 공주'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기득권 중 최고의 지위다. 남편과 아들의 보호는 보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폭력과 노동이 따른다. 사회적, 심리적 안정을 성취한 여성들은 아버지가 조건 없는 사랑으로 딸을 응원하는 경우다. 그렇지 않은 여성들은 매일매일 긴장하고 싸워야 한다. p245 [지금, 여기의 프리퀄 <벌새> _ 정희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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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 제3의 詩 6
강연호 지음 / 문학세계사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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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 별빛

                              강연호

 

 

그리움도 버릇이다 치통처럼 깨어나는 밤

욱신거리는 한밤중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

필경 지친다 더 이상 감추어둔 패가 없어

자리 털고 일어선 노름꾼처럼

막막히 오줌을 누면 내 삶도 이렇게 방뇨되어

어디론가 흘러갈 만큼만 흐를 것이다

흐르다 말라붙을 것이다 덕지덕지 얼룩진

세월이라기에 옷섶 채 여미기도 전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 필경 구겨버릴 테지만

지금은 삼류 주간지에서도 쓰지 않는 말

넘지 못할 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너에게

가고 싶다 빨래집게로 꾹꾹 눌러놓은

어둠의 둘레 어디쯤 너는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마음은 늘 송사리 떼처럼 몰려다니다가

문득 일행을 놓치고 하염없이 두리번거리는 것

 

저 별빛 새벽까지 욱신거릴 것이다

 

 

 

 

가슴이 저릿한 '저 별빛'이다.

치통처럼,

노름꾼처럼,

넘지 못할 선, 넘지 말아야 할 선,

언제나 경계들은 현실을 막고 선다.

먹먹한 삶의 반성과 두터운 회한의 그리움이

쓰지 못하는 너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새벽까지 욱신거릴 것이다.

 

 

 

먼 길

 

 

먼 길이 그를 규정한다

미친 세월이라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억새 무늬에 밀려 여기까지 왔어도

여전히 먼 길, 혼자서는 갈 수 없어서

누군가 잡아 주길 기다려 남겨둔 그의 빈손은

아직도 텅 비어 허공만 움켜쥐고

혼자서는 갈 수 없어서

동행 찾아 헤맨 발걸음이 그를 이끌어

올 데까지 왔어도 여전히 먼 길

혼자서는 갈 수 없어서 결국 혼자 가는

먼 길이 그를 규정한다

먼 길은 그의 유일한 존재 증명이다

 

 

 

 

'먼 길'은 서럽다.

그의 유일한 존재 증명이어서 라기보다는

그것만이 유일한 존재 증명이 될 수밖에 없는

길.

멀고 먼 길.

부득이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이 생애의 고단함이 …….

 

 

 

월식月蝕

 

 

오랜 세월 헤매 다녔지요

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그대 찾아

부르튼 생애가 그믐인 듯 저물었지요

누가 그대 가려 놓았는지 야속해서

허구한 날 투정만 늘었답니다

상처는 늘 혼자 처매어야 했기에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흐느낌

내가 우는 울음인 줄 알았구요

 

어찌 짐작이나 했겠어요

그대 가린 건 바로 내 그림자였다니요

그대 언제나 내 뒤에서 울고 있었다니요

 

시집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문학세계사1995)]

 

 

 

 

날이 흐리다.

 

'별빛'도 '달'도 가려진 저녁.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데,

길은 잘못 들고

지도는 없구나.

내 그림자에 가려진 길

'먼 길'

칠흑의 어둠에도 찾아 나서야겠지.

 

 

 

 

自序

 

  날이 갈수록 삶은 누추하다. 세상에 비 오고 눈 내릴 때마다 나는 깨끗이 닦인 칠판처럼 내 발자국도 지워지길 원했다. 처음부터 다시 걷고 싶은데 별은 새벽까지 욱신거리고 갈 길은 여전히 멀다.

모두 세 묶음으로 나누었고 별다른 의미는 없다. 마지막 묶음은 첫 시집에 빚진다.

1995년 6월

강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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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문학동네(2003)]

 

   몇 년 동안 책꽂이를 장식하고 있는 배수아의 책, 세 권중의 하나다. 어느 해인가 이제 배수아를 읽어야지 하고 들여놓고 팽개쳐두었을 것이다. 작년부터 이어진 책꽂이 파먹기의 일환으로 올해의 시작에서 과감하게 뽑았다. 책은 단단하고 반짝이고 손에 잡히는 사이즈여서 제본이나 판형이 마음에 쏙 들었다. 지금까지 산문집이리라 생각했던 책은 소설이었다. 표지에도 분명히 '배수아 장편 소설'이라 적혀있는데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라는 제목만 읽고 그리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읽은 지 몇 분 만에 소설인 거야, 에세이 같은데 했다. 산문이든 소설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안 읽혔다. '더 많은 음악, 하고 목소리가 말했다.' 에서부터 읽는 스텝은 꼬였다. 얼굴 없는 기사단장이 목소리만으로 음악을 표현하고 있는 듯 글이 눈으로 들어오지 않고 귀에 꽂혔다. 단어들이 붕붕 날아서 제멋대로 귀에 들어오는 바람에 한참만에 낱말은 문장이 되어 뇌에 전달되었다. 50페이지쯤에서 읽기를 멈추고 싶었다. 포기할까?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타고난 성실함이 이겼다.

 

 

   "그곳은 병원에서도 중환자들이 오는 곳이었어. 아니, 중환자가 아니라, 의사가 더 이상은 치료해봤자 소용없다고 판단한 사람들 말이야. 병이 위독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나이가 너무 많아서 질병이나 그것을 위한 치료 과정을 감당할 수 없게 쇠약하기 때문이지. 혹은 별로 그럴 필요가 없거나 말이야. 그러면 그대로 끝이야. 그냥 침대에 누워서, 죽는 날만을 기다리는 거라구. 나이가 많기 때문에,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아무도 없어. 거기서 난 매일 아침 수십 명의 나이 든 여자들의 배설물로 더럽혀진 아랫도리를 씻어내줘야 했다구. 상상할 수 있어? 그런 기분 말이야. 단지 기분뿐이 아니고 그 아랫도리 모양하고 냄새란 정말 실제적이지. 게다가 그걸 봐야 한다구. 그냥 샤워기로 대충 씻어내는 것이 아니고 손을 이용해서, 왜 화장실 변기 솔을 사용하면 안 되는 건지 모르겠어. 깨끗하게 씻어내도록 교육받은 거야. 난 지금도 모르겠어. 나이 든 여자들의 성기가 왜 그렇게 큰지 말이야. 탄력은 하나도 없게 말라붙어서 쭈글쭈글 한데 씻어도 씻어도 끝이 없게 커다란 거야. 거짓말 보태지 않고, 거인의 덧신처럼 시커멓고 크다구. 남자는 거의 없어. 대부분 여자들이야. 아마 여자들 평균수명이 길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운이 없게도 죽는 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모르지? 뭐, 육체적인 고통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런 취급을 받고 살아가야 하니, 누군들 괴롭지 않겠어? 그러나 물체처럼 가만히 있는 것 말고 그들이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그러니 누군가 그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반드시 도와줘야 해. 그러나 일단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끽, 간단하게 끝나는 거야. 약 먹은 벌레보다 더 쉬워.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사회봉사 요원들이 뛰어들어가서 농담을 하면서, 그 구역질 나는 자리를 치우고 나면 다시 새로운 환자가 들어오는 거야. 이 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은 그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역시 젊은이에게는 역겨운 일이었어, 우웩."[p67.68]

   주인공 화자가 잠시 머물고 있는 집 주인 요아힘은 사회봉사 요원으로 군 복무를 대신할 때 양로원에 소속된 노인 병동의 경험을 저렇게 풀어놓고 있다. 헉~! 우웩이다.

   "너 혹시 그 책을 알고 있니? 엄청나게 길고, 지루하기는 라틴어보다 더한데 분명히 다 읽은 다음에도 무슨 말인지 전혀 생각나지 않고 이해되지도 않는 그런 내용이지. 그런 작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따로 있는 것이 분명해. 교묘한 속임수를 써가지고서는 돈을 벌어들이지. 그렇지 않고서는 분명히 같은 독일어인데 이렇게 순식간에 까맣게 잊어버리게 한다든지 의미가 모호한 말들만 사용하는 그런 책을 쓸 필요도 없을 거야. 뭐가 뭔지 모르게 하려는 수작이 분명해. 왜 엔지니어가 되려는데 그런 책을 읽어야 한다는 건지 모르겠어. 일단 작가들에게 돈을 벌게 해주려는 속셈이 아닐까. 그것 말고는 이유가 전혀 없잖아." [p66]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을 요하임은 이렇게 평했으니 그가 어떤 감수성을 가졌는지는 짐작했어도 스무 살이 갓 넘은 청년의 시선으로 만나는 나이 든 사람, 아니 의사도 포기한 늙은 여자 사람을 객관화시킨 신랄하고 역겨운 표현들은 적나라해서 섬뜩하다. "진지한 시선이 결여된 정신은 부패하는 고기보다 나을 것이 없다"라고 요아힘을 평하는 M의 의견을 참고해도 우리 주변의 무수한 요아힘들 생각에 두렵다. 늙은 사람뿐만 아니라, 화풀이 대상으로 학대받는 아이들, 사람은 아니고 여자로만 취급받는 여자 사람들, 이 혹독한 추위에 비닐하우스 안에서 몸을 접고 눕히는 많은 이주민 노동자들과 출근은 했는데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많은 이들은 불시에 저런 말들로 공격하는 요아힘을 만나고, 숨어서 관찰하는 요아힘을 만나고 있다. 사고력의 단순성과 협소한 지평, 왜곡되고 편향된 인식의 틀에 갇힌 세계관을 진리처럼 설파하는. 도처에 공포가 포진한 세상을 살고 있다.

   여기서부터 진도를 쭉쭉 나간다. 역시 포기하지 않기를 잘했다.

 

   "아름답고도 낯선 문장들이 책 속에서 차례로 나타났다가 보이지 않게 창밖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문장들은 아름다우나 간단하지가 않았고 나로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단어들도 빈번하게 사용했기 때문에, 여러 개의 부속 절을 포함하고 있는 문장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모르는 단어들을 문맥 안에서 추측하기 위해서, 나는 한 문장 한 문장 집중해서 몇 번이고 읽어야 했다. 그렇게 집중하면서 점점 책 속에, 정확히 말하면 그 문장들 속으로 빠져들어갈수록 나는 더듬거리면서 나도 모르게 어느 정도 소리를 내어 읽기도 했다. 나는 내가 읽으면서도 동시에 듣고 싶기도 했다."[p81]

   [책 읽어주는 사람]을 읽는 장면이다. 아직 독일어에 서투른 주인공에게 요아힘은 독일어 선생으로 M을 소개해 준다. M은 요아힘의 설명에 따르면 음악에 미친 언어학자다. 독일어 선생인 M은 예상과는 다르게 첫 만남부터 책을 아무 곳이나 읽어보라는 것으로 수업을 시작한다. 처음으로 독일어 책을 만나서 더듬더듬 읽어도 개의치 않고 계속 읽을 것을 요구하는 선생 앞에서 당황했던 책 읽기를 혼자 읽으면서 이해하고 납득하는 부분은 어쩐지 알 듯도 했다. [책 읽어주는 사람]이 내가 영화로 본 [더 리더]와 동일한 책인지는 끝까지 알 수 없었다.

   "M이 나에게 가르쳐주려고 한 것은 단어가 아니라 그 단어의 절대 보편적인 개념, 이 세상의 수없이 많은 자국어로 다르게 불리는 정수의 개념, 그런 것이었다. 그것은 국적이 없으며, 나라를 만들지 않고 핵심에 가까운 만큼 분화되어 있지 않고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가 지극히 포괄적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며 그리하여 방대한 표현을 사용하는 대신에 간단하게 몇 가지로 만족하므로 표면적으로는 미개해 보일 수 있으므로 M은 그것을 '야만인의 언어'라고 불렀다. 언어를 알게 된다는 것은 결국은 자국어의 경계를 넘어서서 사고하는 일이며 (외국어를 배운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성장한다는 것은 단지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것은 단지 언어만이 사고(소통이 아니라)의 명확한 도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p87]

   언어를 알게 된다는 것은 그렇게나 사고를 확장시키고 경계를 허무는 일이다. 책 속 화자가 작문을 하고 싶었던 이유도 그것이었을 거고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로 책을 펴낸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언어를 매개체로 사랑에 빠진다.

 

   "사랑은 쉽게 부정되고 그 정의는 항상 애매모호함 속에 갇혀 있고 천박하고 상스러우며 무책임하고 뻔뻔스러우며 변명을 좋아하고 천천히 사라진 다음에도 끈질기게 발언의 기회를 노리면서 모양새를 망가뜨리고 히죽거리고 킬킬거리고 새끼 밴 암컷보다 더 배타적이며 게다가 장황한 목소리가 부끄럽게도 한창때의 장미꽃보다 더 빠르게 잊혀지고 만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고 지나간 다음에는 더더욱 아무것도 아니었다. M의 가슴 위에 고개를 대고 비가 내리는 들판 저 너머로부터 들려오던 차갑고도 차가운 비의 발소리를 듣는다. 소리를 내는 마른 풀들, 키 작은 덤불들, 지평선으로 보이는 보랏빛 숲의 그림자, 짐승의 발자국들, 가지를 베어내고 남은 자리들, 추위 때문에 금방 푸르게 변한 맨발들, M의 젖은 눈썹, 해독할 수 없는 지도,"[P113]

   '사랑은 쉽게 부정되고'로 시작하는 저 긴 문장은 다음 문장들을 시적 언어로 치환하는 역할을 한다. 조금 지루하다 싶은 호흡이 긴 문장을 쓰는 일도 놀라운데 다음 문장들의 시적 감각이라니 그저 감탄한다. '차갑고도 차가운 비의 발소리를 듣는' 것은 들판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노래 같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했지만 이별의 예감에 행복하기보다는 초조한 사랑에 빠진 이들의 박자로 부르는 노래가 들려온다. 초조와 조급함은 파멸을 부른다.

 

 

   "음악회가 끝난 후, 슈베르트 애호가는 우리들에게 말했다.

   ' 프란츠 슈베르트가 다른 예술가들의 삶과 객관적으로 비교해봐도 짧고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평생 동안 가난했으며 무명이었고 무엇보다도 키가 작고 뚱뚱했다. 남아 있는 그의 초상화를 보면 그가 단지 미남이 아니라는 것뿐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둔하고 우수꽝스럽게 보이기조차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아노를 연주한 음악가 답지 않게 손가락은 '짧고 굵었'으며 심한 근시인데다 과음 때문에 원래 뚱뚱했던 몸은 점점 더 볼품 없어져갔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는 전혀 여자들의 마음을 끌지 못했다. 그가 성병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었다는 기록도 있다. 가곡 <겨울 나그네>가 최초로 불려졌을 때조차도 별 볼일 없는 것으로 평을 받았으나 그는 자신이 그 작품을 다른 어느 것보다도 사랑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그들도 좋아하게 될 거야, 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평생 무시당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고 단 한 명의 후원자도 갖지 못했고, 혹은 원하지도 않았다고 하며 죽고 난 뒤 남긴 것은 초라하고 낡은 옷가지와 이불이 전부인 그런 인생을 가질 수 있었을 뿐이다. 그는 타고난 독학자였고 감성적이었으며 억제하는 낭만주의자였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는 단지 수줍고 뚱뚱하고 키가 작으며 근시인, 음악적인 격정에 사무칠 때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는 사람처럼 떨면서 키득거리거나 시력이 나빠 자신 없게 움츠러들기나 하는 가난한 젊은이를 만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들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며, 단지 우리가 추구하는 것만이 우리의 전부라고 하는 휠덜린의 말처럼, 우리가 들은 그의 음악은 그의 전부이며, 그것을 사랑하는 나의 전부이고 온 영혼으로 말하는 쾌락이고 창세기와 묵시록,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다.'

   슈베르트 애호가는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말했다. 슈베르트의 음악을 진정으로 발견하게 된 팔 년 전 어느 날 이후 그는 사랑하는 것, 그 마음의 행위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으며 시간의 풍경 위에 그대로 허공에서 멈추어버린 노란 비단 의상을 입은 니진스키가 별들이 되었으며 하늘에서 빛나는 그 별빛들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 빛을 따라서 그 자신도 마침내 아무도 찾을 수없는 머나먼 우주의 먼지 속으로 흘러가버렸다고."[p128~130]

   여러 음악가들이 나오고 더불어 음악에 관한 이야기들을 텍스트로 차용하지만 슈베르트, 이 부분이 인상 깊었다. 어떤 이야기든 사람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생의 어떤 시절을 어떻게 살았는지, 그가 어떤 대접을 받으며 어떤 자세로 살았는지가 나에겐 무엇보다 중요하다. 요아힘의 늙은이를 향한 능욕에 가까운 말들이 더욱 참혹한 것은 그들의 삶 전체를 부정하는 말 때문이다. 음악을 모르고 슈베르트도 모르지만 어떤 음악이든 듣는 것으로 하루를 채우는 라디오 키드이기도 하다, 나는.

 

   "실제로 음악이 생생하게 연주되는 연주회장에 가는 것은 두근거리고 신비하며 특별하고도 뛰어난 경험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불안과 가슴이 조여드는 초조함과 마지막 순간까지 결정을 망설이게 되는 팽팽히 당겨지는 신경증을 동반하기도 한다. 모든 연주회는 예외 없이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큰 극장에서 열리는 유명하고 이름 있는 연주자의 그것과 무명이고 아직 확증 받지 못한 실력을 갖춘 연주자의 것이다. 음악의 극치감을 만나는 기회는 전자의 경우에 더욱 확실하지만, 그것은 유감스럽게 더욱 큰 인파의 속성과 부딪힌다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기침, 인내심 없이 줄기차게 부스럭대는 소리, 조심성 없는 단체 관람객, 대개 한 번 정도는 울리는 전화벨 소리, 조바심치는 몸짓들, 만원인 카페테리아, 예매의 어려움, 연주자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에서 머물다가 이윽고 건반을 떠난 다음에도 마치 마법처럼 오래 계속되는 그 진동과 여운 속에서 숨을 멈추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언제 그 화려하고도 고독한 극치감이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소음으로 방해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는 것, 그 두려움 때문이다. 게다가 소리에 대한 신경질적인 예민함은 스스로 증폭되면서, 관중들의 소음뿐 아니라 극장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서 듣는 소리와 그렇지 못한 경우를 비교하게 되고, 무엇이 더 좋은지에 대한 분명한 결론을 알지도 못한 채 극장의 구조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게 되며 객석의 위치는 이런 각도의 위치가 좋은지 아니면 다른 각도를 시도해보아야 하는지 초조해지기도 하고 피아노나 음향장치, 진동, 연주자를 판정하게 되는 태도, 이런저런 헐뜯음, 시시콜콜한 비교, 어느 연주자의 연주가 다른 연주자의 연주보다 좋았다든지 그렇지 못했다든지 혹은 이런 점에서는 이 연주자가 뛰어나다고 보여지나 다른 점에서는 저 연주자가 더 우수하다든지 하는 취향에 관련된 적의 섞인 악담이나 단지 비평자 스스로를 과시하기 위한 수많은 비판들 그리고 최종적으로 어떤 속물적인 오만함에 가득 찬 음향학이나 구조학에 관한 평가들까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실상은 음악을 가장 잘 듣기 위해서였을 이런 모든 노력들이 아마추어의 마음을 가진 소심하고 은밀하게 사랑하는 구애자들이 역설적으로 연주회장으로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주저하게 만들게 된다. 물론 운이 좋아 순수하게 비밀스러운 희열만을 간작한 채 연주회장을 빠져나오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명성이 드높은 연주가일수록, 매스미디어의 애호를 받는 연주가일수록, 수식어가 많은 연주가일수록, 수상 경력이 화려한 연주가일수록, 연주 자체의 평가와 큰 상관없는 외적 요인들로 인한 불쾌감을 가질 확률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에 책임을 가진 연주자들, 명성에 충분히 어울리는 연주자들을 만나는 것은 기쁨 중의 기쁨이다. 또한 그런 식으로 나는 연주자들뿐만 아니라 잘 모르고 있던, 잘 알지 못하여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음악가들과 연주회장에서 불현듯 재회하기도 한다. 이것이 여러 가지 거북함에도 불구하고 직접 연주회장을 찾는 가장 큰 이유이다. 이런 식으로 나는 어린 시절부터 큰 감흥 없이 들었던 리스트와 쇼팽을 새롭게 만났던 눈부신 경험을 가지고 있다. 벨라 바르토크와 베른트 알로이스 침머만도 마찬가지이다. 그것과는 반대로 소박한 연주회에는 또 다른 소박한 기쁨이 있다. 거대한 인파를 움직이는 장력에 의하지 않고 자신만의 자유로운 산책으로 느끼면서 연주회장을 찾는 것이다. 그런 곳에서 만나는 연주가 고급 귀를 가진 사람들을 언제나 만족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새로운 음악가를 새로운 방법으로 만나게 될 가능성도 낮다. 그러나 깊은 가을 저녁에 교회의 바흐 음악회, 극장의 소강당에서 열리는 첼로 독주회, 피아노 오중주, 컴퓨터와 두 대의 바이올린에 의한 지극히 실험적이며 완벽하게 선율을 배제한 음악학교 졸업생의 작품, 열망하고 있는 젊은 연주가들,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 극장에서 쇼스타코비치를 멋지게 연주했던 현악 사중주단을 만나는 우연한 즐거움은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충분했다. 그것은 낙엽을 밟으며 하는 저녁 산책과 마찬가지로 너그럽고 여유 있으며 이름과 날카로운 독설에서 해방되어 있으며 자신과 세계를 돌아보고 정신의 어두운 곳에 도사린 비평가의 까다로움과 불안을 잊게 해주었다."[p160~163]

   이 부분은 온전히 에세이로 읽혔다. 연주회장을 찾아가는 머나먼 여정을 함께 하는 듯 생생한 증언들이다. 책을 빠르게 읽는 편인 나는 이런 식으로 끄적거리고 옮겨 적으면서 몇 가지 달라진 점을 스스로 깨달았다. 그중 하나는 전보다 확실하게 천천히 읽으면서 옮길 구절이 있는지 살피게 되고 이렇게 옮겨 적으면서(독수리로 까닥까닥 일일이 타이핑을 하면서)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다른 이해로 읽히기도 하고 행간 사이의 내용을 새로이 알게 되기도 한다. 두 번째로는 책 내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거나 재미없을 때의 경우를 제외하곤 책 뒤편의 해설을 대충 넘겼는데 지금은 꼼꼼하게 읽는다는 것이다. 또한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쓸까를 궁리하면서 책의 표지 디자인과 작업자의 이름까지 살펴본다. 결국 전에는 작가 한 사람의 작업으로 이해했다면 이제는 이 책 한 권에 담긴 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나무의 목숨이 지나온 여정까지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옮겨 적은 이 부분도 그렇다. 어느새 연주회장 안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언제까지 지킬 수 있는 스스로의 약속일지는 모르겠으나 지켜가고 싶은 좋은 영향력이다. 한 문장 한 문장 집중해서 아름답고도 낯선 문장들을 만나는 일이 이제 비로소 독서를 시작한 듯 새롭다. 이런 작업이 아니었다면 내게 이 책의 비중이 이렇지 않았을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내가 M에게 무엇인가 쓸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내 책상은 그것이 어디에 있든 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장소가 되었다. 동시에 나는 이미 나와 M 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분명한 사실을 글을 쓰고 있을 때는 마치 전혀 모르는 듯이 행동했기 때문에, 그곳은 망각을 망각함으로써 위안을 얻는 장소이기도 했다. 나는 슬픔을 잊기 위해서, 더 이상 슬프지 않다는 그 사실을 잊었다.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 나는 오후의 긴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처럼 허망함과 무기력함, 그리고 상실감을 동시에 갖는다. 불이 켜지지 않은 빈 방과 창가에 존재하는 부드럽고 먼 저녁 빛, 딱딱한 나무의자와 책상, 아무도 없는 방, 나는 책상으로 다가간다. 잠에서 깨어나 이미 잊었으나, 그토록 자신을 고백하는 꿈들은 아직 나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하늘에는 불타는 석양, 그리고 지상의 어둠, 그것의 시간이다. 그때 사물은 각자의 목소리를 가지고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녁 하늘의 마지막 빛에 의지해서 나는 쓰기 시작한다."[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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