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초엽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2019)]

   일 년 전, 2019년의 겨울은 평온했다.

   그렇게 적는다. 적는 순간, 일 년의 일들이 오래된 앨범의 빛바랜 사진들처럼 아련하게 지나간다.

   며칠 예정된 가게의 휴업이 갑작스럽게 폐업으로 결정되자 졸지에 실직자가 되었다. 건물을 새로 증축해서 open한다지만 그 시기가 언제일지, 얼마나 걸릴지는 오리무중이었다.

   가게를 접은 지 이년 사이에 다시 구직을 하려니 마음이 쓰라렸다. 별로 춥지 않은 겨울 날씨였음에도 시린 바람에 어깨를 웅크리고 다녔다. 뭘 해도 마음은 뒤숭숭하고 자존감은 떨어졌다. 자꾸만 안으로 안으로 파고드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습관적으로 날마다 몇 시간씩 산길을 헤매고 다녔고, 많은 책들이 배달되어왔다.

그중에 한 권, 이 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문을 한 것도 나고, 읽은 것도 나인데 왜 선택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한국소설은 매번 선택하는 분야이지만 작가도 낯설고 더더군다나 과학도가 쓴 sf 물의 소설을.(함께 불려온 작가 군을 보면 전혀 예상 못 할 이유도 없다. 한동안 소홀했던 소설 읽기를 실업의 시간 동안 해보자는 의욕으로 젊은 작가들의 책을 일주일 단위로 뭉텅뭉텅 들이던 시절이었다. 읽어치운 책들도 뭉텅뭉텅 책상 위에 쌓여있다)

   그 시간이 일 년이 된 것이다.

   나아지겠지, 나아질 거야, 주문만 걸고 지나온 일 년이다.

   많은 삶들이 피폐해지고 많은 일상들이 박탈당했지만 그동안 쉽게 누린 그저 그런 하루하루의 일상들이 얼마나 소중했던 것인지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다. 있을 때 고마움을 모르고 내 노력으로 얻은 것인 줄 알았던 당연한 것들의 부재 앞에서 지난겨울의 막막함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특별한 2020년을 보내고 나니 지난겨울은 얼마나 평온하고 여유가 넘쳤던 가 싶다. 그렇게 단 한 발자국 앞도 알지 못하는 미래, 상상하지 못한 미래의 다양한 사람들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속에 있었다. 책을 다시 소환해본다. 우리들의 시절도 그렇게 소환된다면 좋을 텐데,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믿어본다.

   순례자들은 누구를 사랑했을까. 그들은 남미에, 서부 미국에, 인도에, 모두 흩어져서 살겠지. 그들은 아주 다채로운 모습으로 여러 방식의 삶을 살겠지. 하지만 그들이 어떤 모습이건 순례자들은 그들에게서 단 하나의, 사랑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찾아냈겠지.

   그리고 그들이 맞서는 세계를 보겠지. 우리의 원죄. 우리를 너무 사랑했던 릴리가 만든 또 다른 세계. 가장 아름다운 마을과 가장 비참한 시초지의 간극. 그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면 누군가와 함께 완전한 행복을 찾을 수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순례자들은 알게 되겠지.

  지구에 남는 이유는 단 한 사람으로 충분했을 거야.

   편지를 쓰는 지금도 나는 계속 생각해. 우리 이전의 순례자들은 지구를 조금이라도 바꾸어놓았을까? 그곳은 올리브가 갔던 수백 년 전만큼이나 여전히 비탄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을까? 분명 세계 곳곳에는 순례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을 텐데, 그들은, 릴리와 올리브의 후손들은 세계를 바꾸기 위해 무엇을 했을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직접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어. 궁금해서 더 기다릴 수가 없었지. [p53]

   일곱 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로 시작된다.(순례자 하면 산티아고 순례길이 떠오르고 파울로코엘리의 순례자 이미지가 중첩된다)

   릴리와 올리브의 후손인 데이지는 자신이 속한 마을에서는 자각하지 못하고 살 수 있었던 유전적 장애를 지구에 와서 사람들의 차별적 시선으로 알아차리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의 마무리는 저렇다. "그때 나는 알았어.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우리는 말한다. 장애와 다름은 죄가 아니라고, 그러기에 차별은 부당하다고. 과연 그런가, 내 안에 내게 묻는다. 연민에 기대는 동정심은 아닌가. 장애인 누구거나, 장애우 누구가 아닌 사람 친구 데이지가 행복한 세상은 내가 행복하기도 한 세상이다. 똑. 같. 다.

   '스펙트럼'

   

  내가 아는 그 스펙트럼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네이버 국어사전을 검색했더니 [1, 가시광선, 자외선, 적외선 따위가 분광기로 분해되었을 때의 성분. 파장에 따라 굴절률이 다르므로 분산을 일으키는데, 이것들은 파장의 순서로 배열된다. 스펙트럼 띠의 상태에 따라 연속ㆍ휘선(輝線) ㆍ 대상(帶狀) 스펙트럼으로, 또는 방출ㆍ흡수 스펙트럼으로 분류한다. 여러 가지 원자나 분자에서 나오는 빛이나 엑스선... 2, 조성(組成)이 복잡한 현상이나 물질을 단순 성분으로 분해하고, 성질을 특징짓는 양의 크고 작은 순으로 배열한 성분. 음향 스펙트럼, 자기 스펙트럼, 질량 스펙트럼, 에너지 스펙트럼 따위가 있다. 3, 한 함수를 합(合) 또는 적분의 형으로 분해한 것. 또는 선형 연산자의 고유치.]라 뜬다.

   벌써, 어질어질하다.

   마지막 탈출 때 할머니가 협곡에서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 뭉치의 종이뿐이었다. 할머니의 말대로 종이 위의 색채들은 마치 누군가 수백 종의 물감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다채로웠다.

  “이건 루이가 나를 기록하고 관찰한 일기였어. 일종의 연구노트라고나 할까. 내가 그들을 관찰하고 탐색한 것처럼 루이에게도 나는 연구 대상이었던 셈이지. 어쩌면 그들은 내가 아주 먼 곳에서 온, 도구가 없어 무력한 학자임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할머니는 나에게 루이가 쓴 기록의 내용을 읽어주셨다. 지구에 돌아온 이후로 할머니는 여생을 색채 언어의 해석에만 몰두했다. 내용의 대부분은 그렇게까지 시간을 들여가며 알아낼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평범한 관찰 기록이었다. 그러나 그중 잊히지 않는 한 문장만큼은 지금도 떠오른다.

  “이렇게 쓰여 있구나.”

  할머니는 그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p95~96]

 

 

   놀랍게도 '스펙트럼'은 색채 언어였다. 60년 가까이 입으로 쓰는 우리말도 몇 가지에 불과한 내 언어영역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노래를 못하면 음치, 박자를 못 맞추면 박치, 길을 못 찾으면 길치, 방향을 못 찾으면 방향치, 색채 감각이 없으면 색치인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을 못하는 똥손에다 저 모든 것들의 치의 합인 몸치癡인 나는.

    '공생 가설'

   

  수만 년 전부터 인류와 공생해온 어떤 이질적인 존재들이 있다고 말이다.

  미토콘드리아가 세포 내로 들어와 핵과 별도로 DNA를 가진 채로 수십억 년의 공생을 시작한 것처럼, 별개로 출발한 두 종이 서로의 이득을 위해 공생하는 일은 흔하다. 인간은 수많은 체내 미생물과도 공생한다. 사람들은 외부에서 유래한 그들을 이질적 타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인간의 일부이다.

   하지만 만약 공생의 대상이 지구상의 생물이 아니라면 어떻까? 지구에서도 유래하지 않은 것, 수만 년 전,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전에 지구 밖의 어느 행성에서 온 것이라면, 그것이 우리의 뇌에 자리 잡았고, 우리의 유년기를 지배했고, 우리를 윤리적 주체로 가르쳐왔다면, 인간을 비 인간 동물과 구분하는 명백한 특질들이 사실은 인간 밖에서 온 것들이라면.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실은 외계성이었군요.”

   수빈의 가설을 들은 연구팀장이 말했다.[p128~129]

   사람들은 왜 그렇게 류드밀라의 세계에 열광하고 환호했을까. 왜 사람들은 루드밀라의 세계를 보며 눈물을 흘렸을까. 왜 사람들은 그녀의 그림에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세계에 대한 향수를, 오래된 그리움을 느꼈을까. 인류 역사상 수많은 가상 세계가 창조되었지만 왜 오직 류드밀라의 행성만이 독보적이고 강렬한 흔적을 세계 곳곳에 남겼을까.

   “우리에게 그들이 머물렀기 때문이겠죠.”

   한나가 말했다.

   수빈은 그것이 그들의 존재에 대한 결정적 증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뇌에 자리 잡은 그들의 흔적, 막연한고 추상적이지만 끝내 지워버릴 수 없는 기억, 우리를 가르치고 돌보았던 존재들에 관한 희미한 그리움.

류드밀라의 행성을 보며 사람들이 그리워한 것은 행성 그 자체가 아니라 유년기에 우리를 떠난 그들의 존재일지도 모른다.[p140~141]

 

 

   '공생 가설'은 이해할 수 없는 과학적 용어들 덕분에 영화 한 편을 보는 듯 흥미진진했다. 7살 이전의 기억이 사라지는 상상력이 만들어 내는 가설, 첫 기억이 돌 무렵이라고 생각하는 내 기억은 조작된 것인가ㅎ 그럴지도. 나중에 어른들의 얘기로 상상하기를 좋아하던 어린아이가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가 창의적이다. 작가는 그런 루드밀라의 세계를 확장해서 단지 '가설'일 뿐인 하나의 상상력을 한 편의 소설로 완성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인류가 고작해야 달이나 화성에 발을 내디디고 태양계 밖으로는 무인 탐사선만 날려 보내던 시기를 지나, 진정한 의미에서 우주 곳곳을 개척하게 된 계기가 바로 워프 항법의 발명이었다.

   우주선은 비록 빛의 속도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이동하는 우주선을 둘러싼 공간을 왜곡하는 워프 버블을 만들어서 빛보다 빠르게 다른 은하로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지구에서 가까운 항성계의 자원이 많거나 지구와 비슷한 환경의 행성들부터 개척이 시작되었다.

   “딥프리징은 인류의 우주 개척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기술이었어. 아무리 공간 왜곡을 통해서 성간 거리를 줄이더라도 우주선이 지구에서 출발해 다른 항성계에 도달하는 데는 여전히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 가까운 항성계는 수 광년에 불과하다지만 그런 곳엔 인류에게 유용한 행성이 얼마 없었고, 먼 곳은 수백 광년부터 수만 광년이나 떨어져 있었으니 워프 항법을 이용해도 몇 년이 넘게 걸렸지. 굳이 그 시간을 다 버티자면 못할 것도 없었겠지만, 창밖 풍경이라곤 삭막한 검은 우주뿐이고 즐길 거리 하나도 없는 우주선에서 멀쩡하게 정신을 유지할 수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겠나? 그래서 아주 진보한 인체 동결 수면 기술이 요구되었던 거라네. 잠든 채로 우주의 곳곳에 많은 사람을 보낼 수 있도록.[p156~157]

   “이제 상황 판단이 안 되는 거라네. 내가 여전히 동결 중인지. 사실 이 모든 것이 몹시 추운 곳에서 꾸는 꿈은 아닌지. 내가 사랑했던 이들이 정말로 나를 영원히 떠난 게 맞는지. 그들이 떠난 이후로 100년이 넘게 흘렀다면 어째서 나는 아직도 동결과 각성을 반복할 수 있는지. 왜 매번 죽지 않고 다시 깨어나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고, 얼마나 많이 세상이 변했는지. 그렇다면 내가 그들을 다시 만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지. 그럼에도 잠들어 있는 동안에 왜 누구도 나를 찾지 않고, 왜 나는 여전히 떠날 수 없는지······.”

   안나가 빙긋 웃었다.

   “한번 생각해 보게. 완벽해 보이는 딥프리징조차 실제로는 완벽한 게 아니었어. 나조차도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몰랐지. 우리는 심지어, 아직 빛의 속도에는 도달하지 못했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우리가 마치 이 우주를 정복하기라도 한 것마냥 군단 말일세. 우주가 우리에게 허락해 준 공간은 고작해야 웜홀 통로로 갈 수 있는 아주 작은 일부분인데도 말이야. 한순간 웜홀 통로들이 나타나고 워프 항법이 폐기된 것처럼 또다시 웜홀이 사라진다면? 그러면 우리는 더 많은 인류를 우주 저 밖에 남기게 될까?”

   "안나 씨"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끄셔도 소용은"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p180~182]

   안나는 곧 파편이 없는 공간으로 들어섰다. 이제 그녀를 방해하는 것은 없었다. 안나의 셔틀은 점점 속도를 높이며 지구로부터 멀어져 갔다. 남자는 조종실 버튼에서 손을 놓았다. 문득 남자는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먼 곳의 별들은 마치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그 사이에서 작고 오래된 셔틀 하나만이 멈춘 공간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 정말로 슬렌포니아에 도착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끝에.

   남자는 노인이 마지막 여정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p187~188]

   표제작이기도 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일 년 전의 문장들이 낯설어져서 이번에 다시 읽었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자신이 갈 곳을 정확히 알고 그 길을 가려는 의지는 부럽다. 누구든 그럴 것이다. 우린 늘 불확실한 미래에 가여운 존재로 흔들리고 흔들리지 않은가.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끝에' 도착할지도 모를 목적지를 가진 사람만이 저런 결연함을 갖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 결정에 도달하기까지의 긴 시간의 족적이 남긴 결과인지도.

   이번에 읽으면서 영화로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미 시도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그토록 시각적 이미지가 뚜렷한 작품이었다. '안나'역은 세상의 풍파를 겪어서 점점 아름다워지는 배우 윤여정씨가 맡으면 어떨까 싶은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이미지로 읽었다.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인데 내게 세상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으로 읽혀서 혼자서 실소를 깨물곤 했다. 그렇게 빨리, 휙~ 지나가서 무얼 만나게 될까.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그 길을 걷는 나를 만나게 될까?

    '감정의 물성'

 

   “널 이해 못 하겠어.”

   보현은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발목이 잡혀 있었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녀를 억압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런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건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우울체’가 그녀의 슬픔을 어떻게 해결해 주는가?

   “물론 모르겠지, 정하야. 너는 이 속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

테이블 위의 휴대폰이 울렸다. 보현은 말을 이어갔다.

   “어떤 문제들은 피할 수가 없어, 고체보다는 기체에 가깝지. 무정형의 공기 속에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짓눌려. 나는 감정에 통제받는 존재일까? 아니면 지배하는 존재일까? 나는 허공중에 존재하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해. 그래. 네 말대로 이것들은 그냥 플라시보이거나, 집단 환각일 거야. 나도 알아.”

   보현은 우울체를 손으로 한 번 쥐었다가 탁자에 놓았다. 우울체는 단단하고 푸르며 묘한 향기가 나는,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동그랗고 작은 물체였다.

   “하지만 고통의 입자들은 산산이 흩어져 내 폐 속으로 들어오겠지. 이 환각이 끝나면.”

   우울체 하나가 탁자 위를 굴러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게 더 나은 결론일까.”

   나는 시선을 피했고 그 순간 보현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어지는 진동 소리가 짧은 비명 같았다. 잠시 뒤 그녀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달칵 닫혔다. 휴대폰의 진동이 멈췄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 허공을 가득 채운 침묵이 느껴졌다.

   보현을 무슨 말로 위로해야 했을까? 나는 순간 보현을 위로할 수 있는 어떤 언어도 나에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가슴속에서 빠져나가버린 듯 싸늘했고, 나는 그게 생각이나 관념이 아닌 실재하는 감각임을 알았다.

   그제야 어설프게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잠시 머물렀다 사라져버린 향수의 냄새. 무겁게 가라앉는 공기,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흐느끼는 소리. 오래된 벽지의 얼룩. 탁자의 뒤틀린 나뭇결. 현관문의 차가운 질감. 바닥을 구르다 멈춰버린 푸른색의 자갈. 그리고 다시, 정적.

  물성은 어떻게 사람을 사로잡는가.

  나는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 시선을 떨구었다.(p.216~218)

    '관내분실'

 

   엄마는 지민을 출산한 이후에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많은 산모들이 출산 직후에 산후우울증을 경험한다고 한다. 대개는 일시적인 현상이다. 아이가 자라고 손이 덜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때로는 약물 처방과 상담을 통해 해결된다. 그러나 엄마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엄마를 방치했다. 원래부터 예민한 성격이었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엄마의 병은 점차 심각해졌다. 지민과의 관계를 완전히 돌이킬 수 없게 된 건 어느 시점부터였을까. 지민은 엄마의 집착이 싫었고 자신을 소유물처럼 통제하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엄마의 병이 원인이었는지 아니면 틀어진 두 사람의 관계가 엄마를 더 약하게 만들었는지, 무엇이 선행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은하와 지민이 어느 날부터 서로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p240]

   스무 살의 엄마, 세계 한가운데에 있었을 엄마, 이야기의 화자이자 주인공이었을 엄마. 인덱스를 가진 엄마. 쏟아지는 조명 속에서 춤을 추고, 선과 선 사이에 존재하는 이름과 목소리와 형상을 가진 엄마.

지민은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는 지민을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도 아이를 가져서 두려웠을까. 그렇지만 사랑하겠다고 결심했을까. 그렇게 지민 엄마라는 이름을 얻은 엄마. 원래의 이름을 잃어버린 엄마. 세계 속에서 분실된 엄마. 그러나 한때는, 누구보다도 선명하고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이 세계에 존재했을 김은하씨. 지민은 본 적 없는 그녀의 과거를 이제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녀를 용서하거나 그녀에게 용서를 구할 생각은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 한때 그녀가 누구였건, 지민과 관계 맺었던 엄마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준 적이 없는 형편없는 엄마였다. 살아 있는 동안 너무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p266, 267]

   어떤 사람들은 마인드가 정말로 살아 있는 정신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건 단지 재현된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말한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그건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느 쪽을 믿고 싶은 걸까?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게 진짜로 엄마의 지난 삶을 위로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지민은 한 발짝 다가섰다. 시선을 비스듬히 피하던 은하가 마침내 지민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지민은 알 수 있었다.

   "이제······.”

   단 한마디를 전하고 싶어서 그녀를 만나러 왔다.

   "엄마를 이해해요."

   정적이 흘렀다. 은하의 눈가에 물기가 고였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지민의 손끝을 잡았다. [p271]

   얼마 전에 티브이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게 되었다. 지금은 떠나고 없는 그룹 '거북이'의 '터틀맨'을 AI로 복원시켜 완전체 그룹 '거북이'의 재현 무대를. 노래를 듣는 동안 다시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었던 어머니와 형님의 눈물 앞에서 덩달아 속수무책으로 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노래를 좋아했고 황망한 그의 죽음이 안타까웠기에 감정이 고양되었는지도 모른다.

   죽은 사람들의 생애 정보를 데이터로 이식한 '마인드'를 수집한 도서관이 있다. (그거 괜찮네.) 마인드와 접속하면 떠난 이의 영혼과 교류할 수 있는데 엄마의 인덱스가 도서관 내에서 분실되어 엄마의 마인드는 만날 수가 없다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단편은 묵직한 감동이었다. 애증이 교차하는 엄마를 향한 화해와 이해는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아무리 첨단화된 우주의 세계에도 진행형의 감동을 전할 것 같다. 노래하는 터틀맨을 다시 만나는 것처럼. 그렇다면 나는 엄마를, 아버지를, 둘째 오빠를 만나고 싶을까? 그들을 만날 수 있을 만큼의 그들의 생애를 기억하고 있는 것인가.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

 

   그날 밤 가윤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생각했다. 재경 이모는 심해에서, 마침내 자신이 찾아 헤매던 목적지에 도달했을까.

   심해를 유유자적 유영하는 재경 이모를 상상하는 것은 우주에 있는 이모를 상상하는 것보다 차라리 쉬웠다. 심해로 내려간 재경 이모. 그건 너무 아득하고 비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아무렇게나 그려도 될 것 같은 그림이었다. 이모는 새로 단 아가미로 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따라 헤엄치겠지. 그러면서 지상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한심한 일들을 마음껏 비웃고 있을 것이다. 가윤은 그곳의 깊은 어둠이 우주와도 닮아 있으리라고, 그래서 이모는 망설임 없이 바닷속으로 떠났으리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가윤은 아직 한 가지가 궁금했다. 이모는, 우주의 저편을 보지 못한 것을 그래도 조금은 아쉬워할까?(P.313~314)

   캡슐을 조망 모드로 전환하자 격벽이 걷히고 캡슐 끝 구역의 조망대가 드러났다. 검은 육각 프레임 너머로 새로운 우주가 보였다. 터널 너머의 우주였다. 가윤은 휘청거리며 벽면의 손잡이를 잡았다. 벽을 밀며 조망대로 다가갔다.

   별들과 뿌옇게 흩어진 성운이 보였다. 더 많은 별이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수도 없이 보았던 저쪽 우주와 별다를 바도 없었다.

   재경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 굳이 거기까지 가서 볼 필요는 없다니까. 재경의 말이 맞았다. 솔직히 목숨을 걸고 올 만큼 대단한 광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윤은 이 우주에 와야만 했다. 이 우주를 보고 싶었다. 가윤은 조망대에 서서 시간이 허락하는 한까지 천천히 우주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언젠가 자신의 우주 영웅을 다시 만난다면, 그에게 우주 저편의 풍경이 꽤 멋졌다고 말해줄 것이다.(P.318~319)

   내게 영웅은 누구일까? 영웅은 없었지만 다양한 분야의 롤모델은 있다. 경험상 롤모델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전환점이나 고비가 왔을 때 그를 보며 방향을 찾을 수 있고. 다시 걸을 힘을 얻기도 하니까. 그러나 그들도 사람이기에 어느 순간, 실망하기도 한다. 롤모델의 잘못은 아니다. 상대방은 자신이 롤모델로 선택되기를 원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냥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 목표를 정할 때 닮고 싶은 특정인을 지정하는 것이다. 우주인이라는 설정이 다르긴 하지만 닮고 싶었던 '덕후'에 관한 이야기다. 결국 사람이었다.

   

  여기 실린 일곱 편 전체가 SF 소설이지만, 주인공들은 낯설지 않다. 그들은 우리가 영화에서 보던 주인공들처럼 힘이 세거나, 특출나거나 비범하지도 않다. 장애를 가진 소녀였고, 외로운 할머니였고, 과학자였고, 비혼모다. 그들은 바로 우리였다. 이렇게 길게 끄적거리고, 옮기고, 공을 들이는 이유도 그 안에 내가 있고,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작가를 롤 모델로 삼을 많은 우리들 때문이다.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 어떤 상상력의 결정체를 만나게 될지 기대된다. '감정의 물성'도 놀라운데 그보다 확장 시킨 상상력이라니.

   아, 무엇보다 빛보다 빠르게 이 바이러스의 시절이 지나가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누스 푸디카 창비시선 410
박연준 지음 / 창비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연준 시인의 시집 [베누스 푸디카]는 첫 번째로 실린 시이기도 하다. "Venus Pudica 비너스 상이 취하고 있는 정숙한 자세를 뜻하는 미술 용어. 한 손으로는 가슴을, 다른 손으로는 음부를 가리는 자세를 뜻함."이라는 설명이 각주로 붙어있다. '정숙한 자세', '정숙' 여학생 교실에만 붙어있던 액자 속의 글씨처럼 또렷하게 각인되는 '정숙'. 그래서 1부의 제목을 '정숙한 자세'라고 했구나. 저 행간 사이가 아득하다.

 

 

 

  베누스 푸디카

 

  

  옛날, 옛날, 옛날

  (뭐든지 세번을 부르면, 내 앞에 와 있는 느낌)

 

  어둠을 반으로 가르면

  그게 내 일곱살 때 음부 모양

  정확하고 아름다운 반달이 양쪽에 기대어 있고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았지

  아름다운 틈이었으니까

 

  연필을 물고 담배 피우는 흉내를 내다

  등허리를 쩍, 소리 나게 맞았고

  목구멍에 연필이 박혀 죽을 뻔했지 여러번

  살아남은 연필 끝에서 죽은 지렁이들이 튀어나와

  연기처럼 흐르다 박혔고

  그렇게 글자를 배웠지

 

  꿈, 사랑, 희망은 내가 외운 표음문자

  습기, 죄의식, 겨우 되찾은 목소리, 가느다란 시는

  내가 체득한 시간의 성격

  나는 종종 큰 보자기에 싸여 버려졌고

  쉽게 들통났고,

  맹랑했지

  (끝내 버려지는 데 실패했으니까)

 

  어느 여름 옥상에서 어떤 감정을 알게 됐는데

  떠난 사람의 길고, 축축한, 잠옷이

  펄럭이는 걸 보았지

 

  사랑이 길어져 극단까지 밀고 가다

  견디지 못하면

  지구 밖으로 밀려나는구나

  피가 솟구치다 한꺼번에

  증발하는구나

 

  후에 책상 위에서 하는 몽정이 시,라고 생각했다가

  나중엔 그의 얼굴을 감싼 채 그늘로 밀려나는 게

  사랑,이라고 믿었지만

  일곱살 옥상에서 본 펄럭이는 잠옷만큼은

  무엇도 더 슬프진 않았고

 

  그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모든 면에서 가난해졌다

 

 

 

 

  녹

 

 

  이파리로 가득한 숲속에서

  나무는 얼굴이 어디일까 생각한다

 

  바람의 힘으로 사랑에서 떨어질 수 있다면

 

  이파리들은

  나무가 쥐고 있는 작은 칼

  한 시절 사랑하다 지는 연인

 

  누군가 보자기가 되어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일

  떨어지기 위해 물방울이 시작하는 일

 

  두세해 전 얼었던 마음이

  비로소 녹고

 

  어디선가 '남쪽'이라는 꽃이 필 것도 같은

 

 

  

  고요한 싸움

 

  

  버드나무 아래서 기다래지는 생각

  버드나무는 기다리는 사람이

  타는 그네

 

  참새 무덤을 만든 사내가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고

  새가 되려다 실패한 고양이의 눈 속엔

  비밀이 싹튼다

 

  허방과 실패로로부터 도망가는

  지네의 붉은 등

 

  소문이 무성해지는 힘으로 봄은 푸르고

  변심을 위해 반짝이는 잎사귀들이

  버드나무를 무겁게 누르는 오후

 

  여름은 승리가 아니다

 

  흔들리는 것은 죽은 참새와 그네 위

  기다래지는,

  생각

 

  버티어야 할 것은

  버틸 수 없는 것들의 등에 기대어

  살기도 한다

 

 

   '녹'을 옮겨 적다가 '녹綠(푸를 녹)'인 줄 알았더니 '녹錄(기록할 녹)' 이었구나,라고 적어 두었다. 시인이 쓴 '녹'이 '綠'이든 '錄'이든 '鹿'이면 어쩔 것이냐. 읽는 내 마음에 달려있는데 싶다. 그리고 이어서 '고요한 싸움', 필사 후 오래 내 안에서 '고요한 싸움'중이다. 시를 읽는 방법으로 누구나 그러하듯 대부분은 눈으로 읽고, 좋은 시는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어본다. (한번 해보시라, 좋다. 내 목소리로 퍼져서 귀로 되돌아오는 시는 맛이 다르다) 그리고도 여운이 남으면 필사를 한다. 필사는 블로그에 남기기도 하고 sns에 옮겨서 가끔 지인들한테 써먹기도 하지만 가장 즐겨 하는 방법은 노트에 적는 것이다. 그냥 시를 적기도 하지만 몇 줄 단상을 남기기도 한다. 읽을 때, 옮길 때 상황에 따라 늘 달라지는 단상들은 시가 가진 매력 때문이다. 어느 시인의 시들은 매번 다른 노트마다 적혀있기도 하다.

   "버티어야 할 것은/ 버틸 수 없는 것들의 등에 기대어/살기도 한다"라는 마지막 행을 옮기는데 울컥했다. 2020년, 올해를 표현한다면 저 문장 속에 담길 것이다. 무릎이 풀썩 꺾인다. 살아온 어느 해인들 안 그랬을까마는 '버티'느라 힘들었던 모양이다. 시인한테 들켰네.

  전체적으로 '베누스 푸디카'는 슬프다. 아니 슬프다,는 약하다. 오래 통곡을 참느라 심장이 쪼그라드는 통증이 온 옴을 관통한다. 분명 몇 해전 읽었던 시집인데 다시 처음인 슬픔에 창상을 입었다. 이래서 시집을 사들이고 쌓아두는 것일까?

 

 

 

  가라앉은 방

 

  단 하나의 눈동자 단 하나의 입술 단 하나의 얼굴이

  죽어 있는 방

 

  누군가 값진 것들만 훔쳐 달아나고,

  남겨진 방

  텅 비어 가득 찬 방

  부러진 오후처럼 다리 한짝이

  기대서 있는 방

  둥근, 귀, 두조각이

  떨어져 있는 방

  떨어지다 들킨 방

  한없이 더 떨어져야 하는 방

 

  기다릴 수 없는 방 심장이 간지러운 방 손톱이 엉켜 있는 방 머리카락이 끊어진 방 아무것도 견딜 수 없는 방 아무것도 가릴 수 없는 방

  얼굴을 잃은 빗방울들이 모여 문둥이처럼 흐려지는 방

  가닿지 못한 이름들이

  기름처럼 떠 있는 방

  가라앉은

 

  4월, 마이너스 십칠, 1997, 유령, 직각, 2014, 거대한 물살, 스무번도 못 셌어요, 19, 죽어라, 죽는다, 이런 씨발 것들, 죽을까, 죽었잖아, 죽인 걸까, 안 들리나봐, 나는 아냐, 바로 들어, 들고 있어, 조용히 해, 됐다, 아니야, 가만히, 나는 몰라, 가만히 있어, 지나간다, 견뎌, 가만히, 들고 있어, 죽음, 죽음, 죽음을

 

  부러진 시간들이 초로 꽂힌 방

 

  똑똑히 보세요

  우리가 풍경으로 박히는 것을

  찰칵,

 

  문 열 수 없는 방

  나올 수 없는 방

  나는 결코 위로하지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빈 배처럼 텅 비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485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았능가 살았능가

  살았능가 살았능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

  대답하라는 소리

  살았능가 죽었능가

  죽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고

  벽을 두드리는 소리만

  대답하라는 소리만

  살았능가 살았능가

  삶은 무지근한 잠

  오늘도 하늘의 시계는

  흘러가지 않고 있네

 

  오늘 하루 중에

​​

  오늘 하루 중에 네가 한 일이 무엇이냐

  마루 아래 댓돌 위에

  흰 돌 검은 돌

  문득 눈 들어 보니

  푸른 산 흰 하늘

  어디선가 새 한 마리 푸드득 날아오른다

  한 (천년)이 고요히 출렁거린다

                                      최승자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 중에서

 

 

 

  시인의 시를 빌어

  안부를 묻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인의 모자 창비시선 223
임영조 지음 / 창비 / 200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임영조

   푸성귀는 간할수록 기죽고

   생선은 간할수록 뻣뻣해진다

   재앙을 만난 생의 몸부림

   적멸의 행간은 왜 그리 먼가

   여말에 요승이 임금 업고 까불 때

   간 잘 맞춘 임박은 승지가 되고

   간하던 내 선조 임향은 괘씸죄 쓰고

   남포 앞 죽도로 귀양 가 소금이 됐다

   세상에 간 맞추며 사는 일

   세상에 스스로 간이 되는 일

   한 입이 내는 간奸과 간諫 차이

   한 몸속 肝과 幹 사이는 그렇게 먼가

   꼴뚜기는 곰삭으면 무너지지만

   멸치는 무너져도 뼈는 남는다

   꽁치 하나 굽는데도 필요한 소금

   과하면 짜고 모자라면 싱거운

   간이란 그 이름을 세워주는 毒이다

   간이 맞아야 입맛이 도는

   입맛이 돌아야 살맛나는 세상에

   그 어려운 소금맛을 늬들이 알어?

               시집[시인의 모자]중에서

   *간 奸; 간음할 간

   *간 諫; 간할 간

   *간 肝; 간 간

   *간 幹; 줄기 간

   지난겨울, 무등산에 갔다.

   눈이 귀하던 때, 눈이 남아있는 산길은 아이젠도 없는 다리를 긴장케했지만 종일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던 맑은 하늘은 종일 흐린 오늘, 그리운 추억이다. 마스크 없는 시절인 지난겨울의 무등도, 그리움 퐁퐁 솟는 저 장불재도.

   온라인 중고 서점에서 임영조 시인을 모셔왔다.

   오늘에야 책꽂이에 들이면서 옮겨 적었던 시편을 다시 옮겨본다.

   "적멸의 행간은 왜 그리 먼가"

   "한 몸속 肝과 幹사이는 그렇게 먼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라카미 하루끼의 [기사단장 죽이기 1,2(문학동네 2017)]

   '기사단장 죽이기' 2권을 줄기차게 붙잡고 있었다. 줄기차다,는 생각은 이 책을 시작할 때부터 나를 따라다니는 생각이었다. 읽지 않은 채 쌓아둔 책 더미에서 '기사단장 죽이기'를 꺼낸 것도 평소의 나로선 이례적인 빠름에 속했고. (쉽게 펼치기엔 너무 두껍다는 생각이 책을 받는 순간부터 들었다.)

열심이자 위로인 산책도 미루고 앉았다, 누웠다, 엎드렸다 등 온갖 포지션으로 이동하면서 읽기를 마치고 나니 시간은 깊은 밤으로 옮겨 가 있었다. 나로선 참 오랜만의 집중인 셈이다. 다시 '상실의 시대'까지 마치고 나니 일주일이 훌쩍 건너가 버린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 시집 한 권, 에세이집 한 권도 읽었으니 온전히 하루끼에 빠져 지낸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하루끼 소설 중 읽은 것은 '상실의 시대' 와 '스푸트니크의 연인'뿐이었는데 두꺼운 책 세 권을 단숨에 읽었으니 하루끼와 함께였음을 인정해야 한다. 더구나 읽기를 마치고 바로 이렇게 더듬더듬이나마 앞으로 나가려 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하루끼는, 아니 하루끼 소설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일본 작가의 소설을 거의 읽지 않은 것 같다. 일본 작가나 하루끼를 싫어하는가 자문해본다면 그건 또 아니다. 하루끼는 오히려 좋아하는 편에 속한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그의 무수한 책을 많이 접하지는 않았지만 (진짜 많기도 하다. 또한 일본 작가의 책도 엄청나서 나는 어디 가서 책 좀 읽는다는 소리는 입도 떼면 안 되겠더라는.)'먼 북소리' '하루끼 잡문집'은 좋아하고 최근에 읽은 '라오스엔 대체 뭐가 있는데요' 같은 류의 생활과 일상이 있는 글에서 읽히는 담담한 노마드의 정신과 담백한 문장들은 흠모하기까지 한다.

   '호시노 미치오' 의 책은 모두 가지고 있고 [여행하는 나무]의 많은 구절들은 수첩에 적어 놓고 겨울 나무같이 마음이 앙상해지는 일터에서 읽을 때면 다시 뛸 힘이 생기곤 하는 애정하고 위로받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곁가지가 없는 생활 관찰자의 담백한 그의 글을 훔쳐 와서 닮고 싶다는 생각을 읽을 때마다 한다.

   '후지와라 신야'의 책도 거의 읽었고 몇 권은 가지고 있다.

   그런데 소설이라니.

   아직 마음이 닫혀있는 모양이다. 다 잊었다고,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버렸다고 생각해 왔지만 아니었나 보다. 거의 50년이 되어 가는 일인데, 그때의 문장들이 또박또박하다.

그 시절, 고입 연합고사를 치르고 나면 인문계 고등학교는 뺑뺑이로 정해졌는데 원하는 국공립을 다 젖히고 사립 여고에 덜컥 합격해 버렸다. 나름 명문에 속했던지라 교복값에 입학금도 차별이었으니 한숨소리 짙어지는 엄마 몰래 입학식을 포기하고 밤기차를 타고 올라와 버렸다.

언니네서 멀지 않은 집, 세간살이가 그대로 있는 작은방에 잠만 자기로 세를 얻어 녹음테이프를 만드는 회사에 다녔다. 열두 시간씩의 주야 교대 근무 틈틈이 골목에서 골목으로, 전철에서 전철로 여행을 다녔다. 간이 조금 커져서는 왕복 차비가 허락하는 시외버스를 타고 작은 시골 마을의 들판들, 고만고만한 동네들을 막차 시간까지 기웃거리다 돌아왔다.

   그 방에 있던 책꽂이에서 '대망大望'을 읽었다. 무려 서른두 권짜리 '大望'.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서른두 권의 무게감은 지금 '기사단장 죽이기' 이 두 권의 무게보다 가볍다. 그때의 종이들은 거칠고 두툼했으며 세로줄 쓰기는 불친절했고 여백이 많은 책이었다. 아마 직접 돈을 주고 사지는 않았을 법한 전집이었다. (그 시절에는 책 한 권 사는 일에 엄청나게 공과 시간을 들였다. 그렇게까지 신중하게 선택했던 책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진정으로 궁금하다.) 그 집은 여자아이를 둔 언니보다는 조금 연배가 있으신 부부였는데 그 가족의 구성원 중 아마 남편분의 책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 책꽂이에 다른 책들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단지 '대망'만이 기억을 점유하고 있다. 정녕 '대망'만 읽은 건지, 기억이 소실된 것인지는 영영 알 수 없을 것 같다.

   한번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大望'은 맞춰 두고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교복의 다른 이름이었고, 출근하면 마주치는 순간부터 퇴근 때까지 이름 대신 "깽깽이"라 불러대는 고참 언니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자신의 빠진 눈알을 주워서 삼켜버리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충격적인 카리스마를, 오사카 성의 사쿠라를 굽어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영악스러운 정치적 욕망의 사다리를, 난세를 차근차근 바로잡지만 지루하고 비겁할 만큼 조심성 많은 안전주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릴 때 읽은 위인 전기 속 대통령의 과정을 묘하게 닮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바닥만 촌에서 올라온 얼뜨기에게 어른들 세상의 감춰지고 위장된 욕망의 이면들을 '大望'에서 만났다.

   유일하게 편지를 주고받던 친구에게 그런 '대망' 이야기를 써 보냈던 답장에서 번역이 엉망이어서 읽는 재미를 반감시킨다는 한 줄짜리 평. 내가 서있던 땅이 기우뚱했다. 읽는 재미에 빠져 번역이니 뭐니, 오독이니 뭐니, 생각조차도 안 해본 나는 열등감의 늪에 빠져 허우적 됐다. 책을 읽은 의견을 나누는 것도, 일본 소설을 읽는 것도 그때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는 자각이 든다. 특히 '상실의 시대'를 두 번째 읽은 오늘. 그 친구는 기억도 못 할, 어쩌면 나라는 사람도 기억도 못 할 그렇게 오래전의 그렇게 사소한 일이 나에겐 트라우마로 남았다. 매번 그렇다. 주변의 소중한 이들에게 받는 상처는 깊은 상흔을 남긴다. 얼마간의 열망이 있기는 하지만 독서 후 토론이라든가 독후감이라든가 하는 일에 서투르고 서투른 탓인지 꼭 하려 애쓰지 않는다. 하긴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으니 그럴 기회도, 일도 없다는 편이 솔직한 답일 것이다. 가끔 이렇게 리뷰식으로 끄적거리게 되는데·······. 이제는 나름 열심히 써보기로 계획했다. 그 첫 번째가 이제서라니. '그래도 뭐~! 시작이 어디인가, 써볼까? 하고 읽고 쌓아둔 책에 비하면 이제라도 꾸준히 쓰면 '호시노 미치오'를 발가락만큼은 닮게 될지도 모른다고, 혼자 끙끙거려본다.'

   무수한 책을 접했고 활자화된 거의 모든 책에 중독자처럼 선뜻 다가가지만 내게도 예외는 있다. SF 물이나 추리, 공포, 과학 쪽을 기피한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것 같다. 스티븐 킹, 아가사 크리스트 등 유명하고 방대한 분량을 가진 작가들의 책도 거의 접하지 않았으니 추정이 아닌 결과물로도 분명하다.

   "오늘, 짧은 낮잠에서 깼을 때 '얼굴 없는 남자'가 앞에 있었다. 그는 내가 잠자던 소파 건너편 의자에 걸터앉아, 얼굴 없는 얼굴 위 가상의 두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로 시작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1권, 단 세 줄의 문장을 읽으며 이 두꺼운 책에게 더 두꺼운 두려움이 드리워졌다. 심지어 두 권짜리라니. 느닷없이 하루끼 소설이라니, 왜에 그동안 요리조리 잘 피해온 그를 결국은 선택해서 지르고 만 것인가라는 자책과 회한은 덤이었다. 무거운 양장본 표지를 다시 덮으니 소제목이 '현현하는 이데아'다. 목을 짓누르는 무거움에 책을 밀쳐두고 며칠, 얼굴 없는 얼굴의 눈동자가 쏘아보내는 이데아에 질려서 책을 요리조리 살펴본다. 하루끼 스타일인지 이번 책에서만 그러한지는 모르겠으나 차례에 나오는 제목들이 한 단원의 문장으로 완결된다. '혹시 표면이 뿌옇다면/ 다들 달에 가버릴지도 모른다/ 그저 물리적인 반사일 뿐/ 멀리서는 대부분의 것들이 아름다워 보인다/ 숨이 끊어지고 손발도 차가우니 / 지금으로선 얼굴 없는 의뢰인입니다/ ' 이런 식의 배열은 신선하고 재미있는 발상이 아닐까 싶다. '책이 안 읽히니 별 허튼짓을 다하고 있군!' 그러나 뼛속까지 소설가인 작가가 그냥 그런 배치를 했을 리는 없다. 내가 안 읽고 즐기지 않을 뿐이지 그의 책은 일 년에도 몇 권씩 출간되고 거의 모든 책이 성공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독자들이 선호하는 작가이고 매년 노벨문학상에 그 이름이 오르고 있다.

   이 작가의 의도, 신선하군. 글은 바로 글을 쓴 그 사람이다, 라고 생각한다. 글의 종류와 상관없이 글 속에는 그 사람의 철학과 일상이 담긴다고 믿고 있고 그것이 바로 글이라 생각한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이 글조차 내 삶을 대변하는 내 문장이고 바로 나다. 오래전 [상실의 시대]를 읽던 나에서 지금의 하루끼는 소설 속에서도, 산문집의 그였다. 그 비밀 아닌 비밀을 알아버린 두근거림이 그의 소설을 새롭게 했다. 그가 좋아하는 음악과 그림이 있고, 여러 종류의 자동차에 관한 해박한 지식들과 문장들이 담겨있었다. 단지 보여주기식 독서를 하던, '大望'을 읽던 잡식의 시절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일본을 새롭게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멀고도 가까운 나라 일본의 지리와 환경, 역사들을 대충은 알고 읽는 '기사단장 죽이기' 는 소설 두 권의 느낌에서 멈추기 않았다. 늘 모호하게 따라다니던 경계의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 초상화가 그려지는 과정을 직접 보고 있는 듯 재미가 보태졌다. 이렇게 독서는 내 세계를 확장시킨다. 혼자 고요히 뿌듯했다. 이제는 친구도, 그 친구의 편지도 내용조차 아슴아슴한 '大望'처럼 옛날 옛날에~로 시작되는 옛이야기처럼 과거형이 되었다. 더러 나쁜 기억들은 유실되어도 좋다.

   "그래도 역시 유즈 아버지의 저주는 여전히 내 머리 위를 떠나지 않은 듯했다. 그 막연한 기척과 은근한 무게가 지금도 느껴졌다. 그리고 스스로는 인정하기 싫지만, 내 마음은 생각보다 깊은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마다 도모히코의 그림 속, 검에 꿰뚫린 기사단장의 심장처럼.

   이윽고 가을의 짧은 낮 시간이 지나고 해 질 녘이 찾아왔다. 하늘이 순식간에 어둑해지고 칠흑처럼 매끄러운 까마귀들이 요란하게 우짖으며 골짜기 상공을 가로질러 잠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테라스에 나가 난간에 기대어 골짜기 맞은편 멘시키의 집을 바라보았다. 정원의 수은등에 벌써 불이 들어와 어둠 속에서 새하얀 외벽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 테라스에서 고성능 망원경으로 밤마다 남몰래 아키가와 마리에의 모습을 찾아보는 멘시키를 떠올렸다. 그는 그 행위를 가능하게 하고자, 오로지 그 한 가지 목적만으로, 무리한 수단을 써서 저 하얀 집을 손에 넣었다. 거금을 지불하고 번거롭게 품을 들여, 너무 클뿐더러 취향에 맞다고도 하기 힘든 저택을.

   그리고 신기하게도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언젠가부터 나는 멘시키라는 사람에 대해 지금껏 다른 이에게는 느껴본 적 없는 친밀함을 품게 되었다. 친근감, 아니 연대감이라 해도 좋을지 모른다. 우리는 어찌 보면 닮은 꼴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손에 쥐고 있는 것, 혹은 장차 손에 넣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린 것, 지금은 손에 없는 것을 동력 삼아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행위를 내가 납득할 수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명백히 내 이해력의 범위를 넘어선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동기는 이해할 수는 있었다.

나는 부엌에서 아마다 마사히코가 주고 간 싱글 몰트로 온더록스를 만들고, 거실 소파에 앉아 아마다 도모히코의 레코드 컬렉션에서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곡을 골라 턴테이블에 올렸다. 일명 〈로자문데〉 라는 작품이다. 멘시키의 집 서재에서 들었던 음악이었다. 그 음악을 들으면서 이따금 얼음이 든 유리잔을 흔들었다.

   그날 기사단장은 끝내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수리부엉이와 함께 천장 위에서 조용히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데아에게도 역시 휴일은 필요하다. 나도 그날은 한 번도 캔버스를 마주하지 않았다. 나에게도 역시 휴일은 필요하다.

   기사단장을 위해 나는 홀로 술잔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1권, p483~484]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가장 '하루키'스러운, '하루키' 다운 문장이라 생각되어 옮겨보았다. 읽다 보니 그간 지레짐작으로 멀리하던 '하루키' 소설의 건조함이나 모호함은 지나친 기우에 불과했다.

아내와 이혼을 진행 중인 초상화가 화자가 친구의 아버지 집에서 만나게 된 그림 속, 기사단장. 또 맞은편 대 저택에 사는 밤이면 망원경으로 다른 집을 살피는 의문 부호로 가득 찬 남자 멘시키. 그로부터 초상화 의뢰를 받고 일어나는 좌충우돌의 상황과 복잡한 관계들 사이에서 자신과 아내, 자신과 그림, 친구 아버지의 역사가 겹치고 얽히면서 소설은 진행된다. 기사단장을 둘러싼 미스터리들이 순간순간 책을 놓게 만들기는 했지만, 저런 문장들을 만나는 느슨함이 좋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 만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그가 말하는 '오리지낼리티'의 신선함을 느꼈다. 동시대에 이런 담백한 소설가를 가져서 다행이다.

 

  "오리지낼리티란 무엇인가, 그것을 말로 정의하기는 몹시 어렵지만 그것이 몰고 오는 심적인 상태를 묘사하고 재현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나는 가능하다면 소설을 쓰는 일로 그러한 '심적인 상태'를 내 안에서 다시 일으켜보고 싶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로 멋진 기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라는 날 속에 또 다른 새로운 날이 생겨난 것 같은, 그런 상쾌한 기분입니다.

   그리고 만일 가능하다면 내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그것과 똑같은 기분을 맛보게 하고 싶다. 사람들의 마음의 벽에 새로운 창을 내고 그곳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고 싶다. 그것이 소설을 쓰면서 항상 내가 생각하는 것이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이론 따위는 빼고, 그냥 단순하게."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P-1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