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시선 446
안희연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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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있었다

 

                             안희연

 

그는 날이 제법 차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조금 외롭다고도

 

오늘은 불을 피워야지

그는 마른 장작을 모아다 불을 피웠다

 

불아 피어나라 불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누구도 해치지 않는 불을

꿈꾸었다

 

삼키는 불이 아니라 쬘 수 있는 불

태우는 불이 아니라 쬘 수 있는 불

 

이런 곳에도 집이 있었군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호주머니 속 언 손을 꺼내면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

손금이 뒤섞이는 줄도 모르고

 

해와 달이 애틋하게 서로를 배웅하고

울타리 너머 잡풀이 자라고

떠돌이 개가 제 영혼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가

내 안에서 죽은 나를 도닥이다 잠드는

 

불이 꺼진 지 오래이건만

끝나지 않는 것들이 있어

불은 조금도 꺼지지 않고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여름 언덕' 이 주는 생명력에 끌려서 구입한 시집이다.

   '여름 언덕'하면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다. 광교수원지의 언덕이 그러한데 온갖 종류의 무수한 풀과 꽃들이 하루하루 다르게 자라는 모습은 매번 새롭고도 신비해서 삐질삐질 한 걸음걸이도 가끔은 빠릿하게 만드는 곳이다. 그들의 생명력이 워낙 치열해서 조금 무섭다 싶으면 향긋한 풀냄새를 남기고 사라진다. 아쉽다 싶으면 불과 며칠 만에 (정말 며칠 만일까. 느낌이 그렇겠지 아마도.) 다시 쌩쌩해지는 언덕, 그 여름 언덕. 그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생명의 순환이다. 하나로는 나약한 한 뿌리의 풀들의 맹렬한 결속을 매해 새롭게 배우고 감탄한다.

  안. 희. 연.

  처음 만나는 시인인데 시집의 제호에 매혹당했다면 그건 편집자의 의도에 말린 건가 ㅎ 여하튼 세상에도, 마음에도 찬바람 휭휭한 계절에 만난 '여름'은 『불이 있었다』 로 시작된다. 여름에서 단숨에 겨울로 건너왔는데 "삼키는 불이 아니라 쬘 수 있는 불/ 태우는 불이 아니라 쬘 수 있는 불" 이 "누구도 해치지 않"는 불이, "호주머니 속 언 손" 을 덥히는 따뜻한 불이, 오래 멍하게 불멍을 때리게 한다.

 

 

 

소동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어제는 우산을 가방에 숨긴 채 비를 맞았지

빗속에서도 뭉개지거나 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퉁퉁 부은 발이 장화 밖으로 흘러넘쳐도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비밀을 들키기 위해 버스에 노트를 두고 내린 날

초인종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정 넘어 벽에 못을 박던 날에도

 

시소는 기울어져 있다

혼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지워진 사람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기침할 때마다 흰 가루가 폴폴 날린다

이것 봐요 내 영혼의 색깔과 감촉

만질 수 있어요 여기 있어요

 

긴 정적만이 다정하다

다 그만둬버릴까? 중얼거리자

젖은 개가 눈앞에서 몸을 턴다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물방울들

 

저 개는 살아 있다고 말하기 위해

제 발로 흙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길 즐긴다

 

 

   

  불을 쬐고 있어도, 아무리 이불을 여러 겹 덮어도 등이 휘게 시리고 춥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애초에 왔던 곳으로 돌아가면 이 먹먹한 추위와 외로움이 전달될까? 단지 "나는 지워진 사람" 이다. 아마도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그래서 더욱 아프게 인정해야 하는 천형,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슬픔이다.

  이 시에는 누군가의 간절한 부름을 외면하면 안 되겠다는 결의가 생기는 힘이 있다. 누군가 단 한 사람이 손만 내밀어 주어도 자살을 예방할 수 있다는 호소가 떠오른다. 시인은 "제 발로 흙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 슬픔에서 빠져나왔을 것이다,.

 

 

 

 

굴뚝의 기분

 

 

너는 꽃병을 집어 던진다

그것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네 삶이라는 듯이

 

정오

너는 주저앉고

보란 듯이 태양은 타오른다

 

너는 모든 것이 너를 조롱하고 있다고 느낀다

의자가 놓여 있는 방식

달력의 속도

못 하나를 잘못 박아서 벽 전체가 엉망이 됐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너의 늙은 개는 집요하게 벽을 긁고 있어

 

거긴 아무것도 없어

칼을 깎는 사과는 없어

찌르면 찌르는 대로

도려내면 도려내는 대로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얼굴은 빗금투성이가 되겠지

돌이켜보면 주저앉는 것도 지겨워서

 

너는 어둠 위에 어둠을 껴입고

괜찮아 괜찮아, 늙은 개를 타일러

새 꽃병을 사러 간다

 

깨어진 꽃병이 가장 찬란했다는 것을 모르고

심장에 기억의 파편이

빼곡히 박힌 줄도 모르고

 

 

    

  이 '여름 언덕'에서 나는 무수한 슬픔들과 외로움을 조우하겠구나. 겨우 세 번째에 실린 시인데 평생을 읽은 것처럼 시간이 흘러간다. "괜찮아 괜찮아" 시는 등을 토닥인다.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여름 언덕을 오르면 선선한 바람이 불고 머리칼이 흩날린단다. 이 언덕엔 마음을 기댈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없지만 그래도 우린 충분히 흔들릴 수 있지.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동안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고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도 같다. 울지 않았는데도 언덕을 내려왔을 땐 충분히 운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이 시집이 당신에게도 그런 언덕이 되어주기를.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 2020년 7월 안희연" --시인의 말-- 중에서

 

   기대해본다. "박소란" 시인을 만나게 해준 창비시선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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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한계선
              박정대

풍경들을 지나서 왔지
지나온 풍경들이 기억의 선반 위에
하나둘 얹힐 때
생은 풍경을 기억하지 못해도
풍경은 삶을 고스란히 기억하지
아주 머나먼 곳에 당도했어도
끝끝내 당도할 수 없었던 풍경은
무엇이었을까
그리운 풍경들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네
풍경의 건반 위에
그대로 남아
풍경처럼 울리며
풍경처럼 살아
풍경, 풍경
생을 노래하지

                          시집[삶이라는 직업] 중에서

 

 

이천이십년 십이월 십삼일.

코로나 확진자가 천명이 넘었다.

눈이,

눈이 내린다.

흑백의 풍경 위에 펑펑 내린다.

이 암울한 세상의 먼지처럼

펑펑~

내린다가 아니라 내렸다.

녹아 버렸다.

찰나에 가까울 시간의 변화에 느린 눈을 끔벅한다.

내일부터는 영하 15도의 한파라는데,

벌써 춥다.

"그리운 풍경들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네

풍경의 건반 위에

그대로 남아"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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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창비시선 440
손택수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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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곳이 있는 사람

                           손택수

걷는 사람은 먼 곳이 있는 사람

잃어버린 먼 곳을 다시 찾아낸 사람

걷는 것도 끊는 거니까

차를 끊고 돈을 끊고

이런저런 습관을 끊어보는 거니까

묵언도 단식도 없이 마침내

수행에 드는 사람

걷는 사람은 그리하여 길을 묻던 기억을 회복하는 사람

길을 찾는 핑계로 사람을 찾아가는 사람

모처럼 큰맘 먹고 찾아가던 경포호가

언제든 갈 수 있는 집 근처

호수공원이 되어버렸을 때를 무던히

가슴 아파 하는 사람

올림픽 덕분에 케이티엑스 덕분에

더 멀어지고 만 동해를 그리워하는 사람

강릉에서 올라온 벗과 통음을 하며

밤을 새우던 일도 옛일이 돼버리고 말았으니

올라오면 내려가기 바쁜

자꾸만 연락 두절이 되어가는

영 너머 먼 데를 잃고 더 쓸쓸해져버린 사람

나는 가야겠네 걷는 사람으로

먼 곳을 먼 곳으로 있게 하는 사람에게로

먼 곳이 있어 아득해진 사람에게로

 

 

                  시집[붉은빛이 여전합니까]중에서

 

 

걷.고.싶.다.

먼 곳이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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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밤에 꿈꾸다 창비시선 431
정희성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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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을은 얼마나 황홀한가

황홀 속에 맞는 가을은

잔고가 빈 통장처럼

또한 얼마나 쓸쓸한가

평생 달려왔지만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못하였네

가여운 내 사람아

이 황홀과 쓸쓸함 속에

그대와 나는 얼마나 오래

세상에 머물 수 있을까

정희성 시집 [흰 밤에 꿈꾸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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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 시인선 437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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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김소연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시집[수학자의 아침]

일 년 내내 냉장고 문에 적혀있는 시의 구절은

"벚나무는 천 개의 눈을 뜨네

눈동자도 없이

눈꺼풀도 없이"

다.

시보다 산문으로 먼저 만난 그녀의 시들은 어느새 생활 속에 있다.

여전히 코로나가 진행중인 가난하고 가여운 우리의 추석,

저 하늘이 주는 위로로 하루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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