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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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구월의 마지막 날,

지난 봄....... 의 기억이 아릿하다.

허수경시인의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두 계절 내내 (2019년 겨울, 2020년 봄) 끌고 다녔다. 그 결과 겉표지가 살짝 찢어지는 부상을 당해 시집을 볼 때마다 속상하다. 산문집 [가기전에 쓰는 글들],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등을 포함해 지난 일년, 시인과 함께 [너 없이 걸었다]의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가을이 왔다.

가,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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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시간
                    윤동주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呼吸)이 남아 있소.
한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
나를 부르지마오.
                        1941. 2. 7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時]중에서


이번 팬텀싱어 3에서 만나게 된 시입니다.
노래를 듣는 동안 소름이 돋습니다.
들어보셔야만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좋은 시가 좋은 곡을 만나고 화음으로 얹히니
그 폭발적인 감동의 크기는 가늠하실 테지요.
저는 한동안 이 노래, 아니 이 時와 함께 지낼 것 같은데…… 왜, 무서운 시간이 무서운지
노래로 만나보세요.
윤동주 시인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 바로 우리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팬텀싱어 3가 끝이 났네요.
  제가 응원한 라포엠팀이 우승했습니다^^˝무서운 시간˝을 불렀던 주축 멤버는 레비던스팀에 있었지만 음악이 아름답다는 시각적 효과를 보여준 라포엠을 응원했던 것이지요. 사실 어느 팀이 우승을 했어도 이상 할 것 없는 수준이었다 생각합니다. 시즌 내내 감동을 주었으니까요.
  이어서 시청한 프로그램은 ‘유희열의 스케치북‘ 이었는데 게스트가 자우림이었어요. ‘자줏빛 비가 내리는 숲‘이라는 팀명만으로도 자우림을 좋아하지만 싱어송라이터 ‘김윤아‘ 때문에 좋아하는 그룹입니다. 그들이 벌써 데뷔 24년이라네요. 혼성그룹으로 24년, 그 세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로선 짐작도 못하겠습니다. 그들의 승승장구를 기원합니다.
저는 거의 김윤아 홀릭입니다. 자우림으로도, 김윤아로도 발표된 모든 곡들을 좋아합니다. 지난번 라포엠의 경연곡 ‘샤이닝‘ 이 자우림 곡이었다는 이 우연 아닌 우연도, 샤이닝을 처음 들었을 때 이 시보다 더 시적인 가사는 뭐냐?라고 했던 말들이 생각났지요. 음악이 없다면, 시가 없다면 우리는 이렇게 막막한 시절들을 어찌 살았을까요?
  덕분에 시집을 펼쳐본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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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이별 문학과지성 시인선 489
류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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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위사

                                       

                                    류근

  강진 차밭 지나다

  푸른 절 배롱나무 아래서

  또 우는 내 옛날을 보았다

  지는 꽃 흔들리는 바람에 들어

  높이 자란 등뼈 쓰다듬는 일로

  하루를 다 보냈다

  이윽고 저녁이 왔을 때

  다행히 길은 멎고 다행히 해는 져서

  모든 슬픔이

  홀연 낮은 별 아래서 더 빛나는 섭리를

  우물처럼 바라봤다

  아주 지는 꽃

  끄트머리처럼 내 그늘이 밝았다

                                   시집 [어떻게든 이별] 중에서

   아, 무위사.

   너른들에 홀로 우뚝한 월출산 옆 자락에 숨은 듯, 없는 듯,

   무위사(無爲寺)는 거기 천오백년 전부터 있지요.

   한번이라도 그토록 소박한 극락보전을 보았다면

   평생 잊을 수 없지 싶은,

   지금 배롱나무가 하늘하늘 할 그 곳,

   무위사는 옛날을 만나고 슬픔의 등뼈를 쓰다듬는 곳인가요.

   우리도 홀로 삭여내고 비워 낼 그런 장소, 그런 하루,

   각자의 무위사를 하나씩 가졌으면 좋겠지요.

   내 옛날을 돌아보고 슬픔을 달래고, 피고지고 피고 지는

   작은 꽃 배롱나무에 경배할 그런 하루, 그런 장소.

   다행히 길은 멎고 다행히 이 뜨겁고 긴 여름도 끝나겠지요.

   당신의 생애는 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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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초록 - 어쩌면 나의 40대에 대한 이야기
노석미 지음 / 난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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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을 이것저것 심었더니 나비가 많다. 나비. 벌레인데 무척 아름답다. 시끄럽지도 않다. 봄날, 장자의 나비 이야기에 빚지지 않아도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나비'라고 답하겠다. 내가 나비는 정말 예쁜 것 같아,라고 밭일을 하러 오신 엄마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엄마는 넌 벌레는 싫어하면서 나비는 좋아하는구나 하셨다. 나비도 벌레인 건 알지? 음······ 그렇구나. 나비도 벌레긴 하지. 근데 나비는 왜 예쁠까? 생각해보니 나비가 가진 그 화려하거나 소박하거나 알록달록하거나 따스한 색이나 그 외양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나비의 그 움직임, 팔랑팔랑······이라고 쓰지만 실제론 소리가 나지 않는다. 소리가 진짜 안 나는 걸까. 가까이에서 들어보지만 인간의 청력으론 들을 수 없다. 신비롭다. 나비를 가까이에서 보면 사실 징그럽게 생기기도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자세히 보면 다 낯설고 이상하게 생겼다. 누군가의 말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상한 것인가. 이상하게 생긴 나비는 아름답다. 꽃 역시 마찬가지,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를 지녔지만 자세히 보면 이상하게 생겼다. 이상하고 낯선 구조를 가진 꽃들도 많다. 꽃과 나비가 만나는 일은 세상의 어떤 완벽한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완벽을 넘어서는 장면 같다. 아름다운 날갯짓을 하는 나비의 수명은 보통 2주 정도라고 한다.

   어둠이 내려앉으면 불 밝힌 창문으로 찾아오는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나방들을 만난다. 나비와 다르게 취급받고 있는 나방은 내게는 좀 측은하게 여겨지는 존재들이다. 마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같다고나 할까. 나는 굳이 나방을 죽이지 않는다. 어쩌다 실내에 들어오게 된 녀석들은 생포해서 내보낸다. 다음날 아침이면 창가에서 여러 마리가 간밤인지 새벽에 돌아가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생을 다한 것일 거라고, 그들의 짧은 생에 대해 잠깐 묵도를 보낸다. 132, 133쪽

   언제나 살리에리를 생각한다. 평범한 재능을 가진 그가 비범한 재능의 모차르트를 맞서는 방식과 열등감을. '나비와 나방의' 관계도 그럴 수 있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끄덕. 이런 시선에 찬탄한다. 그래도 여전히 벌레는 싫다. 특히 모기는 나에게 천적이다. 벌써 모기에 물리며 살고 있다. 모기, 생각만으로도 여기저기 가렵다.

   햇살이 바람을 담고 초록색이 갈색과 혼색이 되기 시작할 무렵 보았다.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고 있는 것을. 먹는 사마귀는 나뭇잎색 연두색, 먹히고 있는 사마귀는 낙엽색 갈색이다. 마치 그 둘은 여름과 가을의 색과도 같다. 양손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안고 있는 듯한 포즈로 머리부터 차근히 먹어 나간다. 이미 머리가 없는 먹히는 놈의 발이 까닥하고 움찔한다. 먹고 있는 사마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나 자신을 원경에서 발견한다. 원경에 놓인 나는 두 마리 사마귀의 삶과 죽음과 본능의 한 순간을 염탐하고 있다.

  나는 종종 인류의 과제, 생활하는 자인지 말하는 자인지, 혹은 정말 실존하는 자인지 멍하게 생각해보곤 한다. 삶을 즐긴다, 라고들 표현하곤 하는데 정말 즐긴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느 시인, 시구가 너무 다 착해서 모두가 사랑하는 그의 한 시구가 귀에서 가슴으로 흐르듯이······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여름이 끝났다. 165,166쪽

   화가이기에 이런 색깔들을 문장으로 풀어 놓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책, 전반에 걸쳐 이런 표현들은 너무 탁월해서 감탄했다. '햇살이 바람을 담고 초록색이 갈색과 혼색이 되기 시작할 무렵', '나뭇잎색 연두색', '낙엽색 갈색'

그의 그림처럼, 집처럼, 문장도 관찰자의 시선이 간명하게 소박하지만 깊이가 있다. 저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오래 지켜보지 못하겠던데, 징그럽다거나 그런 관점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눈을 감아 버리고 싶은 정경이었다. 관찰자의 시선이 탁월하다.

   "네. 고양이나 개나 비슷해요. 반려동물로 사는 개, 고양이들은 보통 15~20세까지 살아요."

   아직도 사람과 친근한 개, 고양이의 평균 수명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관심이 없어서일 테고 다 알 필요도 없다. 그들에게 개나 고양이나 소나 돼지나 닭이나 밖에 놓인 나무 한 그루나 뭐가 다를까 싶다.

애묘인, 애견인이란 표현을 쓰면서 특별한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은 꽤나 불편하다. 무언가를 사랑할지 말지는 각자 알아서 하는 일이다. 사랑의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관심 없다는 것, 그것은 괜찮다. 그저 사람이 뭐에든 우선이라는 식의 생각이 난 별로다. 그들(동물이건 식물이건)은 사람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170. 171쪽

   뜨끔하다. 이 구절은 내게 해당된다. 그러나 '무언가를 사랑할지 말지는 각자 알아서 하는 일이다. 사랑의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는 100% 동의한다.

   사람마다 힘들어서 쓰러지는 포인트가 다 다르다고. 그래서 교집합이 있기야 하겠지만, 나의 포인트와 상대의 포인트가 동일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라 그 다름을 깨달을 때 관계의 틈이 생긴다고. 사연을 알게 될 만큼 서로가 친해지면 아마도 이해하기가 쉬워지고 그 교집합의 범위가 넓어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상대의 포인트를 어찌 간파할 수 있을까. 각자의 다른 사연을 친밀하게 느끼는 것이 친하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아침, 나는 문득 친밀하게 느끼지 못해 저질렀던 일들에 대해, 그래서 섭섭함을 느꼈을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그리고 외로운 기분이 든다. 위로가 필요한 우리들에겐 늘 외로운 마음이 항상 더 가깝다. 좀 쓸쓸하지만 위로라는 건 어떤 찰나, 한 줄의 문장, 혹은 많지 않은 몇 컷의 이미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이상은 위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철벅철벅한 삶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타인이 주는 위로라는 건 그와 내가 주고받은 대화 속에서 서로의 상태가 일치할 때 또는 허황되게도 일치가 일어났다고 상상에 빠졌을 때만 가능할 뿐이다. 어쩌면 위로라는 감정 혹은 행위는 일상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잊고 있다가 아주 가끔 창문을 열면 만나는 저쪽 세계에 속하는 시원한 바람 같은 위로와 함께 일상은 냉정하거나 권태롭게 천천히 척척척 레일 위를 그저 달려간다. 그 창문은 조금 있다가 다시 닫아야 한다. 185, 186쪽

   위로랍시고 던지는 말들이 폭력이 되는 과정을 얼마나 많이 목도했던가. 내가 쉽게 건넨 말들에 위로가 아니라 상처를 받고 섭섭했을 이들 또한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해보면 아득해진다. 점점 말 앞에서 조심스럽다. ​

   나는 늘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고 지낸다고 스스로를 탓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별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당황했고 무서웠다. '나'라고 규정된 것들에 포함된 것들, 나의 가족, 친구, 가까운 사람들, 그리고 반려동물들, 그 외의 여러 가지 것들을 통해서 나란 인간을 확인하곤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가까이의 존재들이 사라진다. 이별하게 된다. 나라고 규정된 것에 구멍이 생긴다. 그 상실에 대한 두려움, 그 두려움이 기도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그 두려움과의 사투, 일지도 모른다. 그 상실감, 그 여백에 내가 원치도 않았고 내겐 생경한 것, 그리움이 채워진다. 194쪽

   이별에 익숙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있다면 그런 척 위장하거나 스스로를 숨기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 익숙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우리의 삶이 죽음을 향해가는 행로이지만 죽을 생각을 안 하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통한 이별을 포함한 모든 이별 앞에서 그럴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런 두려움이 관계 맺기에 여러 가지 유형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산다는 것은 그 두려움과의 사투, 일지도 모른다. 그 상실감, 그 여백에 내가 원치도 않았고 내겐 생경한 것, 그리움이 채워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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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초록 - 어쩌면 나의 40대에 대한 이야기
노석미 지음 / 난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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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월에는 [매우 초록- 노석미 산문집(난다, 2019)]를 읽어야 할 것 같은데 이 책을 지난겨울 속에서 읽으며 봄을 기다렸다. 부제가 [어쩌면 나의 40대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쩌면 사십대를 나는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생각하지 않으면서 읽었다면 거짓말이다. 오십대도 끝나가는 마당에 사십대를 생각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얼마나 쓸데없는 짓에 많은 시간을 보냈던가를 돌아보면 씁쓸하다. 여전히 그런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 알겠는가, 순간순간 최선이라고 살았던 순간이 어느 순간 쓸데없는 열정 소모였다는 것을. 나름 그 시간이 그때는 열정이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그런 순간들이 모여 한 사람의 인생이 되겠지. 누군가는 성공하는 삶으로, 누군가는 실패하는 삶으로 살았다고는 타인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생은 자신의 몫이고 그 결론도 자신의 몫이 아닐까.

   표지의 그림부터, 제목으로도 초록을 참 좋아하는 화가구나 싶다. 그 초록의 색감만으로 읽기도 전에 책의 내용보다도, 그림보다도, 이미 한가득 기대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 알라딘은 표지는 찢기고 묶음의 맨 위 책이었지 싶게 찌그러지고 긁히고 끈에 뭉개진 흔적 가득한 책을 보내서 맘 상하게 했다. 요즘에는 그렇게 책에 상처가 나게 묶지는 않을 텐데 이 책은 고생을 엄청 심하게 한 상태로 내게 온 것이다. 안쓰럽고 서운한 마음 가득해지며 최근에 [난다]의 책들을 많이 사들이고 읽는다는 생각을 했다. 황현산 선생님 책들, 허수경 시인의 책들, 걸어본다 시리즈 등 최근은 확실하게 [난다] 홀릭이다. 책의 상태와는 별개로 작가가 땅을 구입하고 집을 짓는 과정과 그 집에서의 생활, 풍경이 책에 담겨있어서 그렇게 살고 싶은 로망이 있는 나를 읽는 내내 설레게 했다. 책을 읽다 말고 같이 담겨온 그림들을 몇 번이고 다시 펼쳐봤다. 책을 읽으면서 옆집에 이사 온 '화가 노석미'를 만났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생활이 궁금하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한데 들여다보면 허당인 이웃이다. 담백하고 유쾌한 이웃이 옆집으로 이사 와서 삶이 풍성해졌다. 그렇게 생활인 '노석미'를, 화가 '노석미'를, 초보 시골살이 '노석미' 를 알 게 해준 책이다.

   건축 현장을 찾아간 어느 날, 그날은 벽체가 올라가고 있었다. 창을 낼 구멍을 제외하고 벽체가 만들어졌다. 아직은 지붕이 없는 집 내부로 들어섰다. (이제 내부라는 게 생긴 것이다.) 남향으로 커다란 창을 내기로 했고, 아직 창호를 달지 않았지만 그 창 자리로 켜켜이 놓인 앞산이 보였다. (이제 앞산이 생긴 것이다.) 그때 나는 아, 드디어 집이로구나, 하며 스스로 감동에 젖었다. 집이 없을 때 보았던 풍경과 네모난 프레임을 통해서 보는 풍경의 느낌은 달랐다. 이제 내가 실내에서 소유하게 될 풍경이었다. 그때 느꼈던 만족감은 잊을 수가 없다. 땅을 소유하고 집을 소유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감동이 밀려왔다. 37쪽

  

  이 감동이 그대로 전이된다. 처음으로 내 방 한 칸을 세 얻었을 때, 그쪽 창 앞에서 느낀 감동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조금 더 큰 방을 얻었을 때 방 크기에 비례해 창들도 조금씩 커질 때마다 세상을 딛고 있는 두 발이 더 단단해지는 감동이 밀려왔었다.

   집은 남쪽을 바라보게 지었고 남향으로 창을 크게 내었다. 땅을 구하려고 돌아다니던 오래전부터 여러 사람에게서 남향집에 사는 것은 축복이라는 얘기를 들어왔다. 남향집은 난방비도 많이 들지 않는다. 추운 겨울날이더라도 햇살이 좋은 날에 실내의 온도는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다. 또 건축할 때 다른 비용은 다 아껴도 창호에 드는 비용은 아끼지 말라는 충고도 잘 새겨들었다. 남향의 커다랗고 견고한 유리창으로 차가운 바람은 빼고 따스한 햇살만 들어온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거나 음울하게 어두운 날이 아니고는 남향집은 톡톡히 제 역할을 한다. 추운 날들엔 햇살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를 알게 해준다.

   남향으로 난 커다란 창으로 밭, 논, 집 등을 지나 멀리 있는 산이 보인다. 내가 사는 곳을 기준으로(우주는 나를 중심으로 돌기도 하므로) 사방이 산이지만 남쪽 방향으로는 산이 멀리 보인다. 강원도의 설악산처럼 수려하지 않은 산, 크지 않고 둥글둥글 소박한 산이다. 가끔 그 소박한 산이 내겐 갓 구운 빵처럼 보인다. 나는 이곳에 와서 '멀리 있는 산' 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꽤 그렸다.

   '멀리 있는 산, 빛나는 얼굴'

  이라는 명제를 한동안 품고 지냈다. 49, 50쪽

   남향집······ 충고, 잘 새겨두었다.

   나의 장작난로는 비록 중고(실로 난로는 구멍이 뚫리지 않은 이상 중고여도 아무 상관이 없다)였으나 10년이 넘도록 여전히 처음 살 때와 똑같은 모양새로 잘 쓰고 있다. 이 난로에서 고구마, 감자, 고기, 생선, 떡 등 뭐든지 구워 먹는다. 특히 평소에 생선구이는 실내에서 절대 요리해 먹을 생각을 해보지 못했는데 난로를 피우는 겨울철에는 생선을 구워 먹게 되었다. 고구마용, 생선용, 고기용 등 따로 쓸 요량으로 다양한 모양과 재질의 석쇠를 구비했다. 심지어 참나무 장작이 적당히 달아올라 희고도 붉은 숯이 되었을 때 그 불에 커피 로스팅 하는 요령까지 생겼다. 커피 로스팅용 석쇠도 따로 장만했다. 석쇠 부자가 되었다.

 

 ······ (중략)

 

   이렇게 주문할 수가 있는데 나무를 장작에 가까운 모양으로 만드는 수고가 더해질수록 가격이 비싸진다. 그래서 나는 중간 단계인 절단목을 주문해서 도끼로 직접 쪼갬목을 만들어 쓰고 있다. 도끼질은 장작을 배달해주는 사람에게서 배웠다. 처음에는 장작을 패는 일이 무척 곤혹스러웠다. 도낏자루에 휘둘린다는 표현이 딱이다. 장작 배달 해주는 이는 당시 내가 쓰던 도끼보다 더 무겁고 큰 도끼로 바꿀 것을 충고했다. 이것도 무거운데 더 무거운 것으로요? 황당해하는 내게 장작은 도끼가 패는 것이지 네가 패는 게 아니라는 당시로서는 당최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이제는 장작을 팬지 수년이 흘러 경력자가 되어간다. 흠. 그의 충고가 어떤 이야긴지 알게 되었다. 도끼를 들 기운만 있으면 되었다. 이제는 어지간한 남자(장작을 패본 적이 별로 없는데 남자라는 이유로 잘난 척을 하며 팔을 걷어붙이는 그런 유의 남자)보다 장작을 잘 팬다고 자부한다. 한번은 나의 집을 방문한 한 지인(남자)이 내가 장작 패는 모습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도끼를 든 나의 초상을 집 대문에 커다랗게 붙여놓을 것을 권했다. 가끔 해장국집이나 토종닭집 입구에 퉁퉁한 아주머니 또는 털보 아저씨의 커다랗고, 심하게 미화되지 않은, 리얼한, 무표정의 초상을 내건 음식점들을 연상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 혼자 사는 여성이라고 얕잡아보기는커녕 근처에 아무도 얼씬도 하지 않을 거라나. 54~56쪽

   장작난로, 장작, 도끼의 충고도······ 잘 새겨두었다.

   불 때는 것을 좋아한다. 얼마 전 시골 오빠네 갔을 때도 종일 아궁이 담당을 했다. 불 때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자 올케언니는 만류하면서 잠깐 하는 것과 종일 하는 것은 다르다 했다. 왜 아니겠는가, 사는 것은 취미가 아니다. 생활이다. 고통스러워서 멈추고 싶은 순간에도 멈춰 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이 생활이지 싶다. 새벽부터 일어나 고사리를 꺾고 몇 번씩 삶아 내고, 나물들을 삶아 말리는 반복 과정이 불앞에서 진행됐다. 잘 정리된 장작을 쓰는 지금은 어릴 때 불때기에 비해 쉽다. 불앞에서 잠깐의 한눈팔기도 허용되지 않은 불감들이 대부분이었다. 보릿대, 고춧대, 짚, 쌀겨를 비롯한 농작물의 마른 대들과 소나무 마른 잎, 겨울에는 생솔가지로 고래를 뚫었고 어쩌다 아카시아 장작은 가시에 찔리면서도 오래 태울 수 있어 좋았다. 특히 보릿대를 때는 것을 좋아했다. 거친 보리의 질감과 다르게 보릿대는 보드랍고 불길도 다정했다. 그 짚불에 구워주신 엄마표 갈치 맛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다가 불 줄이기를 놓쳐 밥을 태워먹은 날은 엄마의 잔소리를 한 지게 듣던 그 시절의 그리움에 나는 여전히 불 때기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제 몸을 활활 태우는 모든 불땀들 앞에 겸손해진다. 불 때는 방을 갖고 싶다. 새벽까지 따뜻하게 두꺼운 구들장을 깔고 가마솥을 걸을 것이다. 커피 로스팅도 도전해봐야지.

   나는 이제야, 강가에 서서 아까 흐른 물이 이곳에 없다는 것을 관찰하고, 이것을 자각하고 있는 이 찰나 역시 계속 다른 찰나로 교체된다는 것을 배운다. 곧 과거가 될 지금 또한 나의 과거의 소망이었던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비와 눈과 바람을 막아줄 지붕과 벽이 있고, 소박한 작은 네모난 창이 있는 집안에서 창밖을 바라본다. 작은 새 한 마리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간다. 창밖엔 언제나 생경한, 내 것일 수 없는, 그래서 항상 신비로운 자연이 있다. 초록이 있고, 그것들은 숨을 쉬고 있다. 62쪽

    6월의 장미

 

  화려한 기교는 눈에 금방 띄지만 금방 질린다. 담백함은 계속 생각나게 한다지만 처음에 자신을 소개하기에 쉽지가 않다. 그런데 따져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완성된 것들은 다 화려하기도 담백하기도 하다. 미완의 것들이 이렇다 저렇다 말해질 뿐. 그렇다. 6월이고, 장미가 완벽하게 피어있다.

   장미가 좋아 정원에 여러 종류를 사다가 심었다. 장미는 꽃 중의 꽃, 어쩌면 너무 흔한 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원에서 꽃다발로 사는 장미가 아닌 정원에서 장미를 기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려면 꽤나 잘 돌봐주어야 한다. 장미는 벌레도 많이 타고, 퇴비도 많이 필요로 한다. 덩굴장미인 경우 적당히 가지를 정리해주지 않으면 제멋대로 가지가 뻗어나가 정원을 어지럽힌다. 게다가 대개의 장미는 가시를 갖고 있다. 장미 가시에 찔리면 정말이지 오래가는 아픔이 있다. 장미를 손질하다가 가시에 찔리게 되면 장미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는데, 나만의 피해망상증이겠지만 장미가 나를 공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누군가는 장미 가시에 찔려 죽기까지 했다고 하니 무서운 무기를 장착하고 있는 꽃임에 틀림없다.

   화분에 있는 아직은 나무라고 하기엔 크기가 작은 어린 장미를 사다가 땅으로 옮겨심은 초기에는 벌레가 많이 꼬여든다. 벌레들은 여린 잎, 여린 꽃송이들을 아구아구 먹어치운다. 심지어 벌레들의 습격, 혹은 어떤 병으로 어느 날 보면 어? 하고 장미 나무가 아예 사라져있다. 하지만 자리를 잡고 여러 해 묵어 튼튼해진 장미는 더이상 벌레에게 큰 해를 입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작은 장미 나무가 정원 한곳에 정착을 해서 커다란 나무가 될 때까지는 꽤나 정성이 들어간다. 조금만 조건이 맞지 않으면 탐스런 꽃을 피우지 않는다. 장미는 꽃을 보기 위해 심는 것이므로 나는 또 그만 이 아름다운 것들의 노예가 되어 전전긍긍 장미 나무를 보살핀다. 꽃이 다 떨어지고 찬바람이 불고, 서리가 내리고,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어는 기나긴 겨울이 오면 장미 나무는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가 다시 포근한 봄바람이 불고 세상이 연두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죽어있던 메마른 가지가 물을 머금고 슬슬 이파리부터 시작해서 꽃을 작은 크기부터 피워대기 시작한다. 장미가 피기 시작하는 5월, 장미꽃은 마치 색을 가진 빛처럼 반짝반짝 광채가 난다. 더워지기 시작하는 6월이 오면 향기와 크기, 그리고 빛깔이 합쳐져서 그 성숙함이 완벽을 이룬다. 그러고 보니 완벽한 상태로 매우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도달하는 거였다. 문을 열면 장미 향기가 폴폴 나는 6월이다.

   '6월의 장미' 전체를 옮겨 적은 것처럼 챕터 하나하나 길지 않다. 그리고 어려운 문장도 멋부리는 문장도 없다. 오랜 관찰자만이, 체험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장미를 가꿔보지 않은 사람은, 지구에 어둠이 내리는 광경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은 사람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어둠의 농도를 알 수 없듯이 이 산문집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진솔한 몸의 체험이고 간결한 감동들이다. 그런데 장미를 키우게 될 것 같지는 않다. 꽃은 좋아하지만 저 과정을 감당할 만큼은 아니다. 장미꽃은 누군가 선물하면 받는 걸로 대신하겠다. 이왕이면 노란 장미로. 그럴 수 없다면 다른 집이나 화원에서 넘겨다보는 걸로 만족하겠다.

   수확의 계절이라면 가을을 떠올리기가 쉽겠지만 내가 체감하기는 뜨거운 한여름이 피크이다. 아무리 더워도 긴팔, 긴바지에 모자를 눌러쓰고 밭으로 간다. 한여름에 먹거리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수확의 기쁨을 맛보려면 부지런을 떨며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모기에게 헌혈도 해야 한다. 105쪽

  봄이 오면 실내에 앉아 있어도 놀라운 일들이 계속 벌어진다.

자판을 치고 있다 (뭔가 구상중). 간만에 겨우내 꽁꽁 닫아두었던 앉아 있는 의자 바로 옆의 커다란 창문을 열어놨고, 그 창으로 봄 햇살과 살랑대는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기분이 좋아진다. 머리털부터 똥꼬까지 기분이 좋다. 드디어 몸속으로도 봄이 진입한 것이다. 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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