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밤에 꿈꾸다 창비시선 431
정희성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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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을은 얼마나 황홀한가

황홀 속에 맞는 가을은

잔고가 빈 통장처럼

또한 얼마나 쓸쓸한가

평생 달려왔지만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못하였네

가여운 내 사람아

이 황홀과 쓸쓸함 속에

그대와 나는 얼마나 오래

세상에 머물 수 있을까

정희성 시집 [흰 밤에 꿈꾸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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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 시인선 437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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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김소연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시집[수학자의 아침]

일 년 내내 냉장고 문에 적혀있는 시의 구절은

"벚나무는 천 개의 눈을 뜨네

눈동자도 없이

눈꺼풀도 없이"

다.

시보다 산문으로 먼저 만난 그녀의 시들은 어느새 생활 속에 있다.

여전히 코로나가 진행중인 가난하고 가여운 우리의 추석,

저 하늘이 주는 위로로 하루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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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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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구월의 마지막 날,

지난 봄....... 의 기억이 아릿하다.

허수경시인의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두 계절 내내 (2019년 겨울, 2020년 봄) 끌고 다녔다. 그 결과 겉표지가 살짝 찢어지는 부상을 당해 시집을 볼 때마다 속상하다. 산문집 [가기전에 쓰는 글들],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등을 포함해 지난 일년, 시인과 함께 [너 없이 걸었다]의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가을이 왔다.

가,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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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시간
                    윤동주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呼吸)이 남아 있소.
한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
나를 부르지마오.
                        1941. 2. 7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時]중에서


이번 팬텀싱어 3에서 만나게 된 시입니다.
노래를 듣는 동안 소름이 돋습니다.
들어보셔야만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좋은 시가 좋은 곡을 만나고 화음으로 얹히니
그 폭발적인 감동의 크기는 가늠하실 테지요.
저는 한동안 이 노래, 아니 이 時와 함께 지낼 것 같은데…… 왜, 무서운 시간이 무서운지
노래로 만나보세요.
윤동주 시인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 바로 우리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팬텀싱어 3가 끝이 났네요.
  제가 응원한 라포엠팀이 우승했습니다^^˝무서운 시간˝을 불렀던 주축 멤버는 레비던스팀에 있었지만 음악이 아름답다는 시각적 효과를 보여준 라포엠을 응원했던 것이지요. 사실 어느 팀이 우승을 했어도 이상 할 것 없는 수준이었다 생각합니다. 시즌 내내 감동을 주었으니까요.
  이어서 시청한 프로그램은 ‘유희열의 스케치북‘ 이었는데 게스트가 자우림이었어요. ‘자줏빛 비가 내리는 숲‘이라는 팀명만으로도 자우림을 좋아하지만 싱어송라이터 ‘김윤아‘ 때문에 좋아하는 그룹입니다. 그들이 벌써 데뷔 24년이라네요. 혼성그룹으로 24년, 그 세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로선 짐작도 못하겠습니다. 그들의 승승장구를 기원합니다.
저는 거의 김윤아 홀릭입니다. 자우림으로도, 김윤아로도 발표된 모든 곡들을 좋아합니다. 지난번 라포엠의 경연곡 ‘샤이닝‘ 이 자우림 곡이었다는 이 우연 아닌 우연도, 샤이닝을 처음 들었을 때 이 시보다 더 시적인 가사는 뭐냐?라고 했던 말들이 생각났지요. 음악이 없다면, 시가 없다면 우리는 이렇게 막막한 시절들을 어찌 살았을까요?
  덕분에 시집을 펼쳐본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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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이별 문학과지성 시인선 489
류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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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위사

                                       

                                    류근

  강진 차밭 지나다

  푸른 절 배롱나무 아래서

  또 우는 내 옛날을 보았다

  지는 꽃 흔들리는 바람에 들어

  높이 자란 등뼈 쓰다듬는 일로

  하루를 다 보냈다

  이윽고 저녁이 왔을 때

  다행히 길은 멎고 다행히 해는 져서

  모든 슬픔이

  홀연 낮은 별 아래서 더 빛나는 섭리를

  우물처럼 바라봤다

  아주 지는 꽃

  끄트머리처럼 내 그늘이 밝았다

                                   시집 [어떻게든 이별] 중에서

   아, 무위사.

   너른들에 홀로 우뚝한 월출산 옆 자락에 숨은 듯, 없는 듯,

   무위사(無爲寺)는 거기 천오백년 전부터 있지요.

   한번이라도 그토록 소박한 극락보전을 보았다면

   평생 잊을 수 없지 싶은,

   지금 배롱나무가 하늘하늘 할 그 곳,

   무위사는 옛날을 만나고 슬픔의 등뼈를 쓰다듬는 곳인가요.

   우리도 홀로 삭여내고 비워 낼 그런 장소, 그런 하루,

   각자의 무위사를 하나씩 가졌으면 좋겠지요.

   내 옛날을 돌아보고 슬픔을 달래고, 피고지고 피고 지는

   작은 꽃 배롱나무에 경배할 그런 하루, 그런 장소.

   다행히 길은 멎고 다행히 이 뜨겁고 긴 여름도 끝나겠지요.

   당신의 생애는 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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