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내가 눈을 치우는 게 아니라
눈사람이 눈을 치우는 거다
눈을 치우는 줄도 모르고
눈을 치워주는 눈사람
택배 오토바이도 가고
폐지 수레도 가고
빙판이 아찔한 구두들도
지나가라고
내가 눈을 뭉치는 게 아니라
눈사람이 나를 뭉치는 거다

눈을 쓴다

오늘은 빗자루가 펜
백지를 넘긴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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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태어나기전 두 분이 함께 있을 때부터 두 사람이 함께 늙어가며 계속 살아가는 상상의 미래까지 이어지는 연대기다. 현실에서 제이비의 어머니는 여전히 살아 있고 이모들도 살아 있지만, 이 그림들 속에는 서른여섯 살 때 돌아가신 제이비의 아버지도 있다. 연작은 열여섯 점이고, 그중 다수는 제이비의 전작들보다 크기가 작다. 그는 제이비의 스튜디오에 걸린 이 가족 판타지 장면들 -사과 씨를 파내고 있는 예순 살의 아버지와 샌드위치를 만드는 어머니,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는 일흔 살의 아버지와 그뒤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다리만 보이는 어머니- 을 보면서 자기의 삶 역시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떤 모습일 수 있었는지를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윌럼과 살던 시절에서 가장 그리운 순간이 바로 그런 장면들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같은,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순간들이지만, 도저히 메워지지 않는 부재의 순간들.
- P364

초상화 사이사이에는 제이비 부모님의 생활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물건들을 그린 정물화들이 있었다. 침대 위의 베개 두개. 베개들은 숟가락 뒷면으로 굳은 아이스크림 위를 꾹꾹 누르면서 지나간 것처럼 살짝 눌려 있다. 커피잔 두 개. 그중 한 개의 가장자리에는 분홍색 립스틱 자국이 연하게 묻어 있다. 10대의 제이비와 아버지 사진이 들어 있는 사진 액자 하나. 제이비가 등장하는 유일한 그림이다. 이 그림들을 보면 그는 제이비가 함께하는 생활을, 윌럼과 함께한 그의 생활을 얼마나 완벽하게 이해했는지에 생각이 미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의 아파트에 있는 모든 물건들 아직도 세탁 바구니 테두리에 걸쳐져 있는 윌럼의 바지, 욕실 세면대 위 유리잔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윌럼의 칫솔, 사고 때 유리가 깨어진 채로 손도 안 대고 협탁 위에 - P364

올려둔 윌럼의 시계은 그만이 읽을 수 있는 룬 문자로 이루어진 토템이 됐다. 랜턴 하우스의 침대 옆 윌럼의 협탁은 의도치 않게 윌럼에게 바치는 일종의 사당이 됐다. 그 위에는 윌럼이 마지막으로 물을 마신 컵과 최근 쓰기 시작한 검은 테 안경이 고스란히 있고, 읽고 있던 책이 여전히 그가 두고 간 모양 그대로 거꾸로 펼쳐져 있다.
"아, 제이비." 그는 한숨을 쉬었고, 뭐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제이비는 그래도 고맙다고 했다.
이제 그들은 같이 있을 때 별로 말이 없었다. 제이비 자체가 변한 건지, 아니면 그와 함께 있을 때 모습이 변한 건지 그는 알수가 없었다. - P365

그는 윌럼이 해석한 자신을 절대 진심으로 믿을 수 없었다. 윌럼은 그가 용감하고 재주 있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월럼에게 사기라도 치고 있는 것처럼 부끄러웠다. 윌럼이 묘사하고 있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심지어 그의 고백조차 윌럼의 인식을 바꿔놓지 못했다. 사실 그 고백은 그에 대한 윌럼의 존경심을 더 높여준 것 같았고, 그건 절대 이해할 수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위로는 됐다. 납득은 못 해도 누군가그를 가치 있는 사람으로, 그의 인생을 의미 있는 걸로 봐준다는 건 어쩐지 힘이 됐다.
윌럼이 죽기 전 봄, 그들은 몇몇 사람들-그냥 그들 넷과 리처드, 아시안 헨리 영을 불러 저녁 모임을 가졌다. 맬컴과 소피는 아이를 갖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맬컴은 가끔씩 후회에 시달렸고, 그러면 다들 그들은 애초부터 아이를 원하지 않았었다고 상기시켜주었다. 그날은 맬컴이 그런 후회에 빠져 있던 때였다. "난 궁금해. 아이들이 없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 다들 그런 걱정 안 돼? 우리 인생이 의미 있다는 걸 어떻게 아는거지?" - P381

인생이 가치 있는지 없는지를 놓고 안달복달하지 않았지만, 왜 자기가, 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살아가는지는 늘 궁금했다. 때로는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수많은 사람들, 수백만, 수십억의 사람들이 가늠할 수 없는 비참 속에서, 터무니없이 극단적인 궁핍과 질병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다들 그래도 꾸역꾸역 살아간다. 그러니 삶을 계속 살아나가는 결의는 선택이 아니라 진화적 완성이 아닐까? 마음 그 자체에 힘줄처럼 질기고 상처투성이인 뉴런 무리가 있어서 논리가 그렇게 자주 주장하는 바를 실행하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본능이 절대 틀리지 않는 건 아니다. 그는 한 번 본능을 극복한 적있다. 하지만 그 후 그 본능은 어떻게 되었을까? 약해졌을까, 아니면 더 유연해졌을까? 계속 살기를 선택할 정도로 그의 삶이 자기 것일까? - P383

이제 그는 그들을 위해 살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고, 그 드문 이타심이야말로 결국 그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이었다. 그들이 왜 자기가 살아 있기를 원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그렇다는 것만 알았고,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결국에는 만족을, 심지어 즐거움까지 재발견하게 됐다. 하지만 그게 시작은 아니었다.
이제 다시 한 번 사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매일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불가능해진다. 그의 나날 속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시커멓게 죽어가는 그 나무에는 가지 하나가 허수아비의 유일한 의족처럼 오른쪽으로 튀어나와 있고, 그는 그가지에 매달려 있다. 머리 위에서는 비가 늘 안개처럼 흩뿌리고있어서 가지가 미끄럽다. 피곤해 죽을 지경이지만, 아래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구멍이 나 있어서 그는 매달려 있다. 손을 놓으면 그 구멍 안으로 떨어질 테니까 뻣뻣하게 굳은채 매달려 있지만, 결국에는 손을 놓을 거라는 걸 안다. 놓아야한다는 걸 안다. 너무 고단하다. 한 주, 한 주가 지날 때마다 손아귀 힘이 조금, 아주 조금씩 약해진다. - P384

적어도 거짓말 하나는 진실이다. 정말로 일이 너무 많다. 한달 뒤 항소심이 있고, 그는 로젠 프리처드에서, 이제껏 어떤 나쁜 일도 벌어진 적 없는 로젠 프리처드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어 안도한다. 그곳에서는 심지어 윌럼마저 그 예측 불가능한 출현으로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다. 어느 날 밤에는 산제이가 그의 사무실 앞을 황급히 지나가며 혼자 중얼거려서ㅡ "젠장, 그 여자가 날 죽일 거야" ㅡ 고개를 들어보니 밤이 아니라 벌써 낮이고, 허드슨 강이 끈적끈적한 오렌지색으로 변하고 있다. 그걸 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서는 그의 인생이 정지된다. 여기서는 누구도 될 수 있고, 어디든갈 수 있다. 원하는 만큼 늦게까지 있을 수 있다. 누구도 그를기다리지 않고, 그가 전화하지 않아도 누구도 실망하지 않고, 집에 가지 않아도 누구도 화내지 않을 것이다. - P385

이번에는, 처음으로 정말로 로이만 박사와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의 질문들에 답하고, 정직하게 답하려고 애쓴다. 전에 딱 한 번만 했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너무 힘들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이야기할 때마다 윌럼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지난번 이 이야기를 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애너처럼 그를 바라봐준 사람, 그를 직시하면서도 그걸 넘어서 봐준 사람, 그러면서도 자신을 완전히 봐준 사람과 있었다. 그러자 숨이 가쁘고 기분이 엉망진창이 되어그는 휠체어 ㅡ다시 의족을 차고 걸으려면 아직 2, 3킬로그램이 모자란다ㅡ를 휙 돌리고는 실례한다고 말한 후 로이만의 진찰실에서 나가 복도를 달려 화장실로 간다. 그리고 문을 잠그고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손바닥으로 심장을 달래려는 듯이 가슴을 문지른다.  - P401

루크 수사를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트레일러 박사에게 잡혀가지 않았다면. 케일럽을 집 안으로 들이지 않았더라면. 애너 말을 좀 더 들었더라면.
그는 계속한다. 머릿속에서 비난이 규칙적으로 울린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윌럼을 절대 만나지 못했더라면. 해럴드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줄리아나 앤디나 맬컴이나 제이비나 리처드나 루시엔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로즈와 - P401

시티즌과 페드라와 일라이저를 헨리 영들과 산제이를. 가장 끔찍한 ‘만약‘들은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다. 모든 좋은 ‘만약‘들도 마찬가지다.
드디어 그는 마음을 진정하고 화장실에서 나온다. 떠나도 된다는 건 안다. 엘리베이터는 저기 있다. 아메드 씨를 보내 코트를 가져오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대신 방향을 바꿔 진찰실로 돌아간다. 로이만 박사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주드." 로이만 박사가 말한다. "돌아왔군요."
그는 심호흡을 한다. "네, 있기로 했어요." - P402

때로는 우리가 관계를 거꾸로 살고 있는 것 같았어. 난 점점걱정을 덜 하는 게 아니라, 점점 더 많이 주드 걱정을 하고 있었어. 해가 갈 때마다 주드의 허약함이 더 의식됐고, 내 능력에 확신이 없어졌어. 제이컵이 아기였을 때는, 걔가 한 달 더 살 때마다 더 확신이 들었어. 이 세상에서 더 오래 살수록 삶에 더 깊이닻을 내릴 것 같았지. 마치 살아 있다는 것으로 삶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어. 물론 이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고,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틀렸다는 게 증명되었지만. 하지만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어. 삶이 삶을 구속한다는 거 말이야. 하지만 어느 시점 시점을 잡아야 한다면 케일럽 이후부터 난주드가 꼭 열기구를 타고 있는 것 같았어. 긴 밧줄로 땅에 고정되어 있는 열기구 말이야. 하지만 해가 갈수록 그 기구가 하늘로 날아가려고 해서 그 줄이 점점 더 팽팽해지는 거지. 아래에서는 우리가 기구를 다시 땅으로 잡아당기려고, 다시 안전한 곳으로 가져오려고 기를 쓰고 있고, 그래서 난 늘 주드 때문에 겁이 났고, 주드가 늘 겁이 났어. - P409

무서워하는 사람과 진짜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 물론 넌 할수 있어. 하지만 난 여전히 주드가 무섭다. 힘을 가진 사람이 주드고, 난 없으니까, 주드가 죽어버린다면, 자의로 내게서 떠나버린다면, 살기야 하겠지. 하지만 그런 생존은 지루한 일일 뿐일 거야. 그러고 나면 난 영원히 설명을 찾아 헤맬 테고, 과거를이 잡듯이 뒤지며 내 실수를 검사하게 되겠지. 물론 주드가 너무나 그리울 거야. 영원히 떠나버리기 전 그걸 위한 시운전 시도들이 있었지만, 난 그 상황들을 다루는 데 결코 더 능숙해지지 않았고, 절대로 거기 익숙해질 수 없었어. - P409

주드는 널 그리워했어. 나도 네가 그리웠다. 우리 다 그랬어. 이건 알아줘, 네가 주드를 더 좋게 만들었기 때문에 네가 그리웠던 게 아니야. 그냥 네가 보고 싶었어. 네가 좋아하는 일들을하던 걸 즐겁게 봤던 게 그리웠어. 음식을 먹던 모습, 테니스공을 치려고 쫓아가던 모습, 수영장에 뛰어들던 모습, 다. 너와 이야기하던 게 그리웠어. 네가 방 안을 돌아다니던 모습이, 로런스의 증손자들한테 깔려 잔디밭에 누운 채 무거워서 못 일어나는 척하던 게 그리웠어. (그날 로런스의 막내 증손자, 널 짝사랑했던 애가 민들레를 엮어 팔찌를 만들어줬는데, 넌 고맙다며 그걸 하루 종일 차고 다녔고, 네 손목에 걸린 팔찌를 볼 때마다 그애는 달려가 아빠 등에 얼굴을 묻었지. 그것도 그립구나.) 하지만 무엇보다 너희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게 그리웠어. 네가 주드를 보고, 주드가 널 보던 모습이. 서로를 늘 배려해주던모습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진심으로 다정하던 그 모습이 서로의 이야기를 너무나 열심히 경청하던 모습이 너무 그리웠어. 제이비의 그림 <주드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윌럼>은 정말 진짜였어. 딱 그 표정이었지. 제목을 보기도 전에 난 그림 속에서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어. - P413

주드가 내게 어떤 존재가 될지는 절대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만 날 어떻게 떠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 내 모든 희망과 애원과 암시와 위협과 마법 같은 생각들에도 불구하고, 난 알고 있었어. 5개월 후인 6월 12일, 어떤 기념일과도 관계없는 아무것도 아닌 날, 주드는 떠났어. 전화가 울렸고, 불길한 밤 시간도 아니었는데, 나중에 전조로 돌이켜볼 어떤 일도 없었는데,
난 알았어. 전화기 너머에서는 제이비가 폭발하듯 가쁘게, 이상하게 숨을 쉬고 있었고, 그가 말도 하기 전에 난 알았지. 주드는쉰셋이었어. 쉰셋이 된 지 2개월도 되지 않았지. 동맥에 공기를주사해서 뇌졸중을 일으켰다더군. 앤디는 빠르고 고통 없는 죽음이었을 거라고 말했지만, 나중에 온라인에서 찾아보니 거짓말이었어. 벌새 부리 정도는 되는 굵기의 바늘로 적어도 두 번은 찔러야 하는 거였어. 엄청나게 괴로웠을 거야. - P422

그로부터 몇 주는 더 지나고서야 난 마침내 식탁 위에 남겨둔 우리 몫의 편지를 읽을 수 있었어. 그전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어. 지금도 과연 감당할 수 있을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읽었어. 루크 수사에 대해, 트레일러 박사에 대해, 주드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타이핑한 여덟 페이지짜리 고백이었지. 우리가 그 편지를 다 읽는 데는 여러 날이 걸렸어. 짧았지만 끝없는 이야기였고, 우린 읽다가 편지를 놓고 어디 멀리 갔다가,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며 ㅡ준비됐어?ㅡ 다시 앉아 읽었어.
"미안해요." 그 글은 그렇게 시작됐지. "부디 용서해줘요. 절대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아직도 그 편지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도 그 편지를 생각조차 할 수 없어. 난 주드가 누구며 왜 주드인지에 대해 그 모든 대답들을 원했지만, 이제 그 대답들은 오로지 고통스럽기만 하다. 주드가 그렇게 혼자서 죽었다는 걸 생각 - P425

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데, 주드가 우리에게 사과해야 한다고생각하며 죽었다는 생각을 하면 미칠 것만 같아. 주드가-너를만나고, 나를 만나고, 그를 사랑한 우리 모두를 만나고도-자신에게 가르친 그 모든 것들을 여전히 철썩같이 믿으며 죽었다는 생각을 하면 내 인생도 결국 실패였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로 중요한 한 가지에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럴 때면 난늦은 밤 아래층에 내려가 <주드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윌럼> 앞에 서서 너한테 이야기하지. "윌럼." 난 네게 물어. "너도 이런기분이니? 주드가 나와 행복했다고 생각해?" 주드는 행복할 자격이 있었어. 행복을 보장받는 사람은 없지. 모두 다 그래. 하지만드는 행복할 자격이 있었어. 하지만 넌 내게가 아니라 내뒤의 누군가에게 미소를 지을 뿐이고 아무 대답도 들려주지 않아. 그럴 때면 내세 같은 걸 믿고 싶어져.  - P426

우리한테 다리가 아니라 꼬리가 있어서 바다표범처럼 대기 속을 헤엄쳐 다니는, 공기자체가 무수한 단백질과 설탕 분자로 이루어진 자양물이어서그저 입만 벌리고 흡입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조그만 빨간행성 같은 곳, 다른 우주. 너희 둘은 거기서 함께 대기 속을 떠다니고 있을 거야. 아니면 주드는 더 가까이 있을지도 모르지. 요새 우리 옆집 바깥에 앉아 내가 손을 뻗으면 가르랑거리는 저회색 고양이일지도, 어쩌면 다른 이웃이 잡고 있는 저 강아지일지도, 몇 달 전 뒤에서 뭐라 하며 쫓아오는 부모님은 아랑곳 않은 채 기쁨에 겨워 깩깩거리며 광장을 뛰어다니던 그 걸음마쟁이일지도 모르지. 어쩌면 오래전에 죽었다고 생각한 저 철쭉 덤불에 갑자기 피어난 꽃일지도, 저 구름, 저 파도, 저비, 저 안개일지도 몰라. 주드가 죽었다거나 어떻게 죽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무엇을 믿으며 죽었는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 그래서 - P426

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게 친절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모든것들에서 주드를 봐.
하지만 그때, 리스페너드 스트리트에 서 있을 때는 이런 걸 몰랐어. 그때 우린 그냥 서서 그 붉은 벽돌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난 주드 때문에 두려워해야 할 필요 없는 척하고 있었고, 그는 그런 척하는 나를 봐주고 있었지. 주드가 저지를 수 있었던 그 모든 위험한 일들, 내 가슴을 찢어놓을 수도 있었던 그온갖 방법들은 이야깃거리인 과거 속에 있었고, 우리 뒤에 놓인 시간은 무서웠지만 우리 앞에 놓인 시간은 그렇지 않았어.
"옥상에서 뛰어내렸다고?" 난 주드 말을 되풀이했어. "도대체 그런 짓을 왜 했는데?"
"긴 이야기예요." 그는 심지어 싱긋 웃으며 말했어. "이야기해드릴게요."
"그러렴." 난 말했어.
그리고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어. - P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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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이유미 박사


생물다양성의 보고로 알려진 경기도 포천 광릉 숲에 자리한 국립수목원의 연구관으로 생물표본연구실장을 맡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6.25동란 이후 십수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온 나라의산이 붉은 민둥산 투성이이던 시절 서울에서 태어났다.

녹화사업과 나무심기운동으로 우리 숲이 조금씩 제 모습을 찾아갈무렵 서울대학교 산림자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식물분류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숲은 제 모습을 찾아가지만 일반인의 숲에 대한 인식이 지금처럼 폭넓지 않았을때부터 우리나라의 산과 들, 도서벽지를 찾아다니며 나무와 풀에 관한 연구를 했다.

특히 사라져가는 식물의 보전 같은 식물분류학을 기반으로 하되 국가적으로 필요한 연구에 주력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자 많은 글과 책을 써냈다. 또한 봄철 우리 땅에 자라는 키작은 풀처럼 차분히 겨울을 준비하는 키 큰 나무처럼 나직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강의와 글로도 많은 아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나무 백가지<한국의 야생화> <우리는 숲으로 간다>가 있으며 산림생태학을 전공한 부군 서민환 박사와 함께 쓴 <어린이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풀 백과사전> <어린이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나무 백과사전<쉽게 찾는 우리 나무> <한국의 천연기념물>이 있다.

철철이 피고 지는 식물들. 그리고 그 속에 감추어진 식물들의 이야기를 엮어보자고했습니다. 그냥 문화적인 이야기나 식물학적인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늘 곁에 있어사소하거나 흔하지만, 씩씩하게 살아가는 식물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마음을 열고귀 기울이다 보면 저절로 그 속에 숨어있는 과학과 삶의 진실을 발견하는 이야기.
그래서 이야기의 끝머리에서 "아하! 그렇구나"하는 새삼스런 발견의 즐거움을 알려주는 그런 이야기 말입니다.
오랫동안 식물공부를 해왔지만 어느 누구 친절하게 이러한 이야기를 알려준 사람이 없었던 까닭에 책이나 인터넷을 뒤져보아도 속 시원하게 혹은 내 입맛에 맞는 정•보는 찾아내기 어려운 까닭에 이러한 시도는 참 벅찬 일이다 싶기는 합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제비꽃의 작은 꽃잎 속에,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의 솜털달린 씨앗 속에 감추어진, 우주처럼 다양하고 재미난 세상을 알았으면 했습니다. 그래야 관심도 갖고, 사랑도 하고, 과학도, 자연사랑도, 아름다운 시와 노래도 나올수 있을 테니까요.
부족한 글머리를 열며 너무 거창한 마음을 품었나 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아우르는 제목을 생각하면서 자꾸만 꽃과 나무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꽃과 나무는

너무 흔히 쓰는 말이기에 다른 어떤 말도 이보다 자연스럽지는 않지요. 하지만 우리가 이토록 당연하게 쓰고 있는 꽃과 나무는 모순이 있는 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아는 꽃이라는 단어 속에 포함된 이미지는 풀입니다. 그상대어로 나무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나무의 상대어는 꽃이 아니고 풀입니다. 또 꽃은 나무든 풀이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달리는, 후손을 퍼뜨리기 위해몸부림치는 식물의 생식기관입니다.
벚나무나 산수유, 소나무들은 분명 나무이지만 꽃이 피구요. 민들레나 제비꽃은꽃이 피는 풀일 뿐입니다.
소나무에 꽃이 피냐구요? 물론입니다. 꽃이 피니까 솔방울 같은 열매도 맺지요. 소나무는 겉씨식물로 화려한 꽃잎을 가지고 있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을 뿐입니다. 꽃이 없다는 뜻을 가진 무화과나무도 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숨어 있어 눈에잘 띄지 않는 것입니다.
앞으로 ‘꽃과 나무‘가 아닌 ‘풀과 나무‘, 즉 식물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이들을구성하고 있는 꽃, 열매, 혹은 잎들의 변화무쌍한 세계를 함께 풀어갑니다. 주변에살고 있는 풀과 나무의 종류를 함께 배우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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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망자가 으레 그러하듯 고인 역시 죽은 사람답게 각별하게 묵직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뻣뻣하게 굳은 팔다리는천에 감긴 채 관속에 푹 잠겨 있었고, 영원히 들지 못할 머리는 베개에 뉘여 있었다. 훤하게 드러난 누런 밀랍빛 이마와 움푹 꺼진 관자놀이, 윗입술을 내리누를 듯이 위로우뚝 솟아오른 코 역시 죽은 사람다웠다. 바싹 야윈 고인의 외관은 뾰뜨르 이바노비치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많이 달라 보였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얼굴이 으레 그러하듯 이반 일리치의 얼굴은 살아 있을 때보다 한결 잘생겨보였고 무엇보다도 훨씬 더 의미심장해 보였다. 그의 얼굴은 마치 해야 할 일을 다 했고 또 제대로 했다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표정에는 산자를 향한 모종의 비난과 경고까지 담겨 있었다. 뾰뜨르 이바노비치에게는 그러한 경고가 부적절한 것으로, 적어도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 P13

이반 일리치의 가족은 모두 건강했다. 이따금 이반 일리치가 입에서 이상한 맛이 느껴지고 왼쪽 옆구리가 왠지 좀불편한 것 같다고 말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걸 병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거북한 느낌은 점점 심해졌다. 통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옆구리가 묵직해진 느낌이 사라지지 않아 여간불쾌한 게 아니었다. 이반 일리치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 골로빈 가족이 즐기던 편안하고 유쾌하며 고상한 삶의 분위기를 망치기 시작했다. 남편과 아내는 더 자주 다투기 시작했고, 곧 이들 가족이 누리던 가벼움과 유쾌함은사라지고 품위만 간신히 유지되었다. 예전 같은 장면들이다시 반복되었다. 남편과 아내가 폭발하지 않고 잠시 쉬어갈수 있는 작은 섬들이 다시 떠오르곤 했지만 그 섬의 수는 아주 적었다. - P51

 맹장이 낫고 있었다. 흡입 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묵직하면서도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 저 익숙하고 오래되고집요하고 조용하고 지독한 통증이 찾아왔다. 입안에서는예의 그 익숙한 역겨운 맛이 다시 느껴졌다. 심장이 조여들고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오, 맙소사, 하느님, 맙소사!>그는 중얼거렸다. 또, 또 시작이야, 절대로 끝나지 않을 거야. 그러자 갑자기 문제가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맹장? 신장?> 그는 혼잣말을 했다. <이건 맹장문제도 아니고 신장 문제도 아니야. 이건 삶, 그리고...... 죽음의 문제야. 그래, 삶이 바로 여기에 있었는데 자꾸만 도망가고있어. 나는 그걸 붙잡아둘 수가 없어. 그래. 뭣 하러나를 속여? 나만 빼고 모두들 내가 죽어 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남은 시간이 몇 주냐, 며칠이냐, 그것만이 문제야.
어쩌면 지금 당장일 수도 있어. 빛이 있었지만 이제 캄캄 - P69

한 어둠뿐이야. 나도 여기 있었지만, 곧 그리로 가겠지! 그런데 그게 어디지?>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고 숨이 멎었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소리만 들렸다.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지? 아무것도 없다는 건가? 내가 없어진다면 나는 어디에 있게되는 거지? 정말 죽는 걸까? 안 돼, 싫어.> 그는 벌떡 일어나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여기저기 더듬으며 초를 찾다가 초와 촛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는 다시 베게 위로벌렁 드러누웠다. <불은 켜면 뭐해? 다 마찬가진걸> 두눈을 부릅뜨고 어둠을 응시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죽음, 그래, 죽음, 저들은 아무도 몰라. 알고 싶어 하지도않아. 날 불쌍하게 여기지도 않아. 그냥 놀 따름이야(깔깔거리는 소리와 음악 소리가 문 너머에서 어렴풋이 들려왔다). 저들도 똑같아, 똑같이 죽게 될 거라고, 멍청이들, 내가 조금 먼저 가고, 저들은 조금 늦게 갈 뿐, 결국엔 다 마찬가지야. 그런데도 저렇게 좋을까, 짐승 같은 것들!> 울화가치밀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참을 수 없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세상 모든 인간이 이토록 끔찍한 공포를 겪어야하는 운명을 타고났을 턱이 없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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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잘 모르겠는데, 주드." 해럴드가 걱정스럽게 말한다.
"그냥 가요, 해럴드." 그가 말한다. "첫 번째 벤치까지만요"
맬컴은 집 뒤까지 숲을 터서 낸 길을 따라 벤치 세 개를 설치했다. 첫 번째는 호수를 끼고 도는 길 3분의 1지점에 있고, 두 번째는 딱 중간에, 세 번째는 3분의 2 지점에 있다. "천천히 가요.
지팡이도 가지고 가고요." 지팡이를 쓸 필요가 없어진 지는 수년이 흘렀지만 ㅡ10대 시절 이후로는 안 썼다 ㅡ이제는 50미터만 넘어도 지팡이가 필요하다. 결국 해럴드도 그러자고 하고, 그는 해럴드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스카프와 코트를 쥔다.
바깥에 나가자, 행복감이 더 고취된다. 그는 이 집이 좋다. 집의 모양이, 고요함이, 무엇보다 자기와 윌럼의 집이라는 게 좋다.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로 리스페너드 스트리트에서 멀어졌지만, 그 집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의 집, 함께 만들었고 함께 사는 집이다. 두 번째 다른 숲을 바라보고 있는 그 집은 일련의 유 - P248

리 큐브로 이루어져 있고, 그 앞에는 숲을 통과해 지그재그로 들어오는 긴 진입로가 있어서 어떤 각도에서는 일부밖에 보이지 않고 다른 각도에서는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밤에 불을 켜면 온 집이 랜턴처럼 빛나서, 맬컴은 논문에서 이 집을 ‘랜턴 하우스‘라고 명명했다. 집 뒤쪽은 넓은 잔디밭을 내려다보고 있고, 그 너머에는 호수가 있다. 잔디밭 끝에는 슬레이트 판을 붙인수영장이 있어 무덥기 짝이 없는 날에도 물이 늘 시원하고 맑았고, 헛간에는 실내수영장과 거실이 있다. 헛간 벽은 다 들어 올려 치울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실내 전체가 야외로, 봄이면 주위에 온통 피어나는 모란과 라일락 덤불을 향해, 초여름에는 지붕에서 늘어지는 등나무 원추꽃차례를 향해 하나로 연결된다. 집오른편에는 7월이면 양귀비로 온통 빨갛게 물드는 들판이 있고, 왼편에는 윌럼과 함께 코스모스와 데이지, 디기탈리스, 야생당근 등 야생화 씨를 수천 개 뿌려놓은 들판이 있다.  - P249

이사 온직후 어느 주말, 그들은 집 앞과 뒤의 숲을 돌아다니며 참나무와 느릅나무 주위 이끼 낀 둔덕 근처에는 은방울꽃을 심고, 사방에 박하 씨를 뿌렸다. 맬컴은 이런 식의 조경이 감상적이고진부하다고 찬성하지 않았고, 맬컴이 아마 옳을지도 모른다는걸 알았지만,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공기가 향기로운 봄과 여름이면, 그들은 호전적으로 추한 리스페너드 스트리트를 이런곳을 그려볼 시각적 상상력조차 없었던 자신들을 생각한다. 이곳에서 아름다움은 너무 단순하고 너무 명백해서 때로는 환영같았다.
그는 해럴드와 숲을 향해 출발한다. 숲의 험한 산책로는 공사가 시작됐을 때보다 훨씬 더 다니기 편해졌다. 그래도 그는 집중해야 한다.  - P249

뒤이은 침묵 속에서 그는 자기가 해야 하는 말을, 늘 생각했지만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말을 생각하고 있다. "말도 안 되게들리리라는 거 아는데, "그가 입을 열자, 윌럼이 그를 쳐다본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난 여전히 내가불구라는 생각이 안 들어. 그러니까 내 말은, 불구인 건 알아. 그렇다는 건 안다고. 불구가 아니었던 시간보다 불구로 산 게 두 배는 더 되니까. 그게 네가 알아온 내 모습이지. 도움이 필요한 그런 사람으로. 하지만 내 기억 속엔 뛸 수 있었던 사람, 원할 때마다 걸을 수 있었던 사람이었던 내가 있어.
불구가 된 사람들은 다들 뭘 빼앗긴 것같이 생각할 거야. 하지만 난 늘 그랬어. 불구인 걸 인정해버리면, 트레일러 박사에게 패배를 인정하면, 그가 내 삶의 모습을 규정하게 만들어버릴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래서 아닌 척하는 거야. 그 사람을 만나기 전의 나인 척하는 거야. 그게 논리적이지도, 실제적이지도않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게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것도 알아. 미안해. 내가 아닌 척하고 있는 대가를 네가 치르고 있는 걸 알아. 그래서, 그만두려고." 그는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았다 뜬다. "난 불구야." 그는 말한다. "난 장애인이야." 정말 바보 같지만, 울음이 터질 것 같다. 그는 결국 마흔일곱이고, 이걸 스스로 인정하는 데 32년이 걸렸다. - P253

그날 밤 야스민이 떠난 후, 그는 정말 오랜만에 팔을 긋는다. 그리고 피가 대리석을 따라 흘러 배수구로 들어가는 걸 지켜본다. 수도 없는 문제를 일으킨 이 다리를, 수많은 시간, 수많은돈, 수많은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이 다리를 그대로 가지고 가려는 게 얼마나 비합리적인 바람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건 그의 다리다. 그 자신이다. 어떻게 자신의 일부를 기꺼이 잘라낼 수 있겠는가? 수년에 걸쳐 이미 수많은 부분을 잘라왔다. 살, 피부, 흉터들을. 하지만 이건 왠지 다르다. 다리를희생하면 트레일러 박사가 이겼다는 걸 인정하는 게 될 것이다. 그에게, 그날 밤 그 들판, 그 차에 굴복하는 게 될 것이다.
이건 다르다. 일단 다리를 잃고 나면 더 이상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다시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언젠가는 더 나아질 거라고 기만할 수 없다. 불구가 아닌 척할 수 없다. 그의 기형쇼 점수는 또 한 번 올라갈 것이다. 언제나, 그 무엇보다도, - P258

자신이 잃은 것으로 정의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친다. 걷는 법을 또 배워야 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빠질 체중을 늘리려고 애쓰고 싶지 않다. 첫 번째 골수염때 빠진 몸무게도 힘들여 되돌려놨더니 두 번째 발병으로 다시다 잃었었다. 병원에 입원하고 싶지 않다.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깨어나고 싶지 않다. 한밤중에 공포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 동료들에게 또 아프다고 설명하고 싶지 않다. 몇 달 동안이나 기운 없이, 평정을 회복하려 애쓰며 살고 싶지 않다. 다리 없는 모습을 윌럼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윌럼이 극복해야 할 또 다른 도전을, 또 다른 기괴함을 주고 싶지 않다. 정상이 되고 싶다. 그저 정상이 되고 싶은 것뿐인데, 그는 해가 갈수록 정상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마음과 몸을 별개로, 서로경쟁하는 존재로 생각하는 게 틀렸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가 없다. 몸이 또 한 번 전투에서 승리하는 게, 자기 대신 결정을 내리는 게, 이런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게 싫다. 윌럼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다. - P259

거의 매해 여름마다 그는 생각한다. 올해 여름이 최고라고. 하지만 이번 여름은 정말로 최고다. 여름뿐만이 아니다. 봄도, 겨울도, 가을도 최고다. 나이가 들면서 그는 인생을 점점 더 일련의 회상들로 바라보게 된다. 계절들이 포도주 제조연도인 것처럼 한 계절이 지나갈 때마다 평가하고, 살아온 세월을 역사적시대로 나눈다. 야심찬 시절. 불안한 시절. 영광의 시절. 미혹의시절. 희망찬 시절.
이 이야기를 해주자 주드는 빙긋 웃었다. "지금 우리는 어느 시절을 살고 있는데?" 그가 묻자, 윌럼도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모르겠어. 아직 이름을 못 붙였거든."
하지만 적어도 끔찍한 시절을 지나왔다는 데는 둘 다 동의했다. 2년 전 바로 이 주말 노동절 주간에 그는 어퍼이스트사이드 병원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옥색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와 잡역부들이 건물 밖에 모여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바로 그 건물 위에 그의 연인을 포함해 죽어가고 있는 온갖사람들이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먹고 담배 피우고 전화 통화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너무 증오심이 치밀어 올라 속이 뒤집히는것 같았다. 그 순간 주드는 불덩어리 같은 몸을 하고 인위적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고, 마지막으로 눈을 뜬 건 수술실에서 나온다음 날인 나흘 전이었다. - P272

아니었다고 할 수는 없지." 그는 주드를 쳐다봤고, 그 순간 주도와 주드의 지난 인생에 대해 정말로 생각할 때 가끔 느끼곤하는 감정을 느꼈다. 슬픔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동정하는 ㅣ슬픔이 아니었다. 그건 더 큰 슬픔이었다. 고군분투하고 있는가엾은 사람들, 자기도 모르는,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을 다 감싸 안는 것 같은 슬픔이었다. 매일매일이 너무나 힘들 때에도, 상황이 너무나 비참할 때도, 사방에서사람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생각하면 느끼게 되는 경탄과 경외심이 뒤섞인 그런 슬픔이었다. 인생이란 너무 슬프구나. 그런 순간이면 그는 생각했다. 너무 슬프지만, 그래도 사람은 다 그렇게 사는 거지. 삶에 매달리고, 위안거리를 찾고.
하지만 물론 이런 말을 하진 않았다. 그는 몸을 일으켜 주드의 얼굴을 잡고 키스한 뒤 다시 베개에 기댔다. "넌 어쩌다 그렇게 똑똑해졌어?" 주드에게 묻자, 그는 빙긋 웃기만 했다. - P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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