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박준


눈을 감고 앓다보면
오래전 살다 온 추운 집이

이불 속에 함께 들어와
떨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저는 한 번 잃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앞으로 만날
악연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시령이나 구룡령, 큰새이령 같은
높은 고개들의 이름을 소리내보거나

역을 가진 도시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면
얼마 못 가 그 수첩을 잃어버릴 거라는
이상한 예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넣어 하나하나 반찬을 물으면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손을 빗처럼 말아 머리를 빗고
좁은 길을 나서면

어지러운 저녁들이
제가 모르는 기척들을

오래된 동네의 창마다
새겨넣고 있었습니다

시집[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2012)]중에서

눈을 감고 그려보아도
눈을 뜨고 읽어보아도
참 쓸쓸한 시,
허나 쓸쓸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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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를 잃고 산벚나무에 기대어 울었네
 산벚은 더이상 위로가 아니어서 울었네

 나뭇잎 사이로 실종되던 노을도
 붉은 나비에게서 나던 막걸리 냄새도
 더이상 위로가 아니어서 울었네
          [산벚을 잃고]중에서

두고 간 글들.
다시, 찬찬히 읽겠습니다.
나의 시인이여.....
아픔 없는 곳에서 부디 평온하소서.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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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문지 시선은 이성복, 황지우, 황인숙, 이병률등을 시인으로 만나는 통로였고 그 분들의 시집은 여러권이 상재되었다. 최근에는 김소연, 이수명시인의 시 속에서 지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 기형도시인. ‘입 속의 검은 잎‘은 김현선생의 해설과 61편의 시로 지금도 내 가방에 찬밥처럼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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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는 아무것도

 

 

 폐품 리어카 위 바랜 통기타 한 채 실려간다

 

 한시절 누군가의 노래

 심장 가까운 곳을 맴돌던 말

 

 아랑곳없이 바퀴는 구른다

 길이 덜컹일 때마다 악보에 없는 엇박의 탄식이 새어나온다

 

 노래는 구원이 아니어라

 영원이 아니어라

 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어라

 

 다만 흉터였으니

 어설픈 흉터를 후벼대는 무딘 칼이었으니

 

 칼이 실려간다 버려진 것들의 리어카 위에

 나를 실어보낸 당신이 오래오래 아프면 좋겠다

                            박소란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 중에서

 

 

 박소란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남 마산에서 자랐다.

 동국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2009[문학수첩]으로 등단했다.

 

 박...

 처음 만나는 그녀의 시를 창비 시선 386으로 읽는다.

 이 땅에서, 창비에서 시집을 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검증의 절차를 거쳐 왔다는 것이리라.

 내게만 생소한 이름이지 그쪽 세계에서는 이미 오래된 시인일지도 모른다. 등단 6년만의 첫 시집의 연륜을 통기타 한채라는 표현에서 읽는다.

 한 시절 누군가의 집이었고 심장 가까운 곳에서 한과 정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했지만 이제는 버려진 통기타, 흉터로 남은, 칼로 남은 한 시절의 상징...... 버려지는 것이 어디 통기타뿐이겠는가.

 누군가에게나 한채였을 노래들, 이제는 치기어린 시절의 쓸데없는 짓이 되어버린 쓸모없는 엇박의 탄식들, 그녀를 통해 만난다.

 ‘나를 실어보낸 당신이 오래오래 아프면 좋겠다

 이 마지막 행은 시집을 세상에 내보내는 시인이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 같아서 쉰 두 편의 시들 중 꽤 많은 시들은 오래오래 아프다. 이를테면

 

 삼양동 시절 내내 삼계탕집 인부로 지낸 어머니

 

 아궁이 불길처럼 뜨겁던 어느 여름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까무룩 꺼져가는 숨을 가누며 남긴

 마지막 말

 얘야 뚝배기가, 뚝배기가 너무 무겁구나

 

 그후로 종종 아무 삼계탕집에 앉아 끼니를 맞을 때

 펄펄한 뚝배기 안을 들여다볼 때면

 오오 어머니

 거기서 무얼 하세요 도대체

 

 자그마한 몸에 웬 얄궂은 것들을 그리도 가득 싣고서

 눈빛도 표정도 없이 아무런 소식도 없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느른히 익은 살점은 마냥 먹음직스러워

 대책 없이 나는 살이 오를 듯한데

 

 어찌 된 일인가요

 삼키고 또 삼켜도 질긴 허기는 가시질 않는데

                                     배가 고파요-전문

 

 직업상 이러저러한 뚝배기들과 함께하는 일상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가스 불 위에서 쩍 갈라지는 낭패의 연속이다 '배가 고파요'는 열두 화구에서 맹렬한 기세로 끓고 있는 뚝배기를 옮기다 팔을 스친 것 같다. 강렬한 뜨거움 다음에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쓰라림이다, 흉터다. '삼키고 또 삼켜도 질긴 허기는 가시질 않는데'

 

 

 불현듯 슬프다

 너무 오래 울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곳 어느 때 아주 사소한 흐느낌조차

 

 울기 위해 집으로 달려간, 그때는 스무살

 수업을 마치고 과제를 제출하고 사려 깊은 학생이 되어

 조금씩 꼬깃해져가는 표정을 가방 깊숙이 밀어넣고 가까스로

 열어젖힌 싸구려 자취방은 더없이 고요해

 너무 낮고 너무 어두워 울음은

 다름 아닌 거기에 살고 있음을 알았다

 

 마음이 타들어갈 때마다 기꺼이 방문을 열어준

 나의 울음, 엄마가 죽던 밤에도

 사랑이 더운 손을 뿌리치던 마지막 순간에도 나는

 그 방에 있었다 볕이 들지 않는 방

 아릿한 곰팡내가 명치를 꾹꾹 누르는 방

 울음의 방으로 숨어들수록 울음은 아프고

 어찌 된 영문인지

 도무지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증발하는 물기처럼 어느새 울음은

 

 거기에 살 수 없음을 알았다

 한마디 인사도 없이 떠나갔음을

 어디로 갔나 울음은

 울음의 빈자리를 몹시 뒤척이던 나는

 

 후미진 골목 끝

 자취방은 헐리고 추진 스무살도 멀리 달아났으니

 어디로, 말수가 적어 겉돌기만 하던 나의 울음은

                                  울음의 방-전문

 

 내 집은 왜 종점에 있나

 

 

 

 안간힘으로

 바퀴를 굴려야 겨우 가닿는 꼭대기

 

 그러니 모두

 내게서 서둘러 하차하고 만 게 아닌가

                                    주소-전문

 

 시인은 지금은 어디에 주소를 두고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종점 곁에 산다. 이 도시에 올라왔을 때 살기 시작했던 곳으로 그때도 종점이었는데 여전히 종점인 이곳으로 돌고 돌아서 제자리로 왔다. 지금은 아파트도 여러 개 있고 공원도 여러 개나 있는 그럴싸한 중산층의 동네처럼 화장을 했지만 여전히 숨차게 퍽퍽한 깔끄막 길들은 울음의 방마다 후미진 골목으로 놓여있고 새벽마다 허둥지둥 뛰어 올라탔던 버스들은 부릉부릉 매연을 쏟아놓아 미세먼지 농도에도 아랑곳 않는 꼬깃꼬깃해져가는 동네다. 나처럼 뒤척이는 사람들이 고만고만한 하루를, 고단한 하루를 각자의 울음의 방으로 돌아가 마감한다. 이제는 울지 않을지라도 늘 안간힘으로 바퀴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하루의 끝마다 이제 서른 몇 해를 산 젊은 시인에게서 위로와 놀람을 동시에 받는다.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 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

 길가 백반집에선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가 함께 밥을 먹자고

 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나는 들길을 걸어 보자고 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 선 나를 끌어다 앉혔지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

 길을 헤매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보다 먼저 다음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다음에-전문

 

 

 따뜻하고 쓸쓸한,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일일연속극같은, 그러나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같은 맛있는 시집이다. 길어도 읽기를 중간에 멈출 수 없는 매력있는 시편들이 가득하다.

 여기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필사하면서 읽었던,  '너무 깊은 오해', '나의 고양이가 되어주렴', '감', '참 따뜻한 주머니', '노인', '화장실이 없는 집', '통속적 하루', '망명', '지익' 등등.

 그리고 지금 우리들의 정서적 주소지를 묻는 시가 있다. 눈으로 몇 번을 읽고 어디서 끊어야 할지 가늠한 다음에 소리내어 읽으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우리가 자주, 꼭 읽어야 할 한 편, "심장에 가까운 말" 이 시집은 이 한 편의 시로도 충분한 값어치가 있다고 어설픈 나도 감히 말하고 싶어지는 '용산을 추억함'. 역설적이게도 악몽 같은 이 사건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라도 기억해야 하는데 잊고 산다. 2009년 1월 20일의 용산을. 

 

용산을 추억함

 

  폐수종의 애인을 사랑했네 중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용산 우체국까지 대설주의보가 발효된 한강로 거리를 쿨럭이며 걸었네 재개발지구 언저리 함부로 사생된 먼지처럼 풀풀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도시의 몸 구석구석에선 고질의 수포음이 새어나왔네 엑스선이 짙게 드리워진 마천루 사이 위태롭게 선 담벼락들은 저마다 붉은 객담을 쏟아내고 그 아래 무거운 날개를 들썩이던 익명의 새들은 남김없이 철거되었네 핏기 없는 몇그루 은행나무만이 간신히 버텨 서 있었네 지난 계절 채 여물지 못한 은행알들이 대진여관 냉골에 앉아 깔깔거리던 우리의 얼굴들이 보도블록 위로 황망히 으깨어져갔네 빈 거리를 머리에 이고 잠든 밤이면 자주 가위에 눌렸네 홀로 남겨진 애인이 흉만(胸滿)의 몸을 이끌고 남일당 망루에 올라 오 기어이 날개를 빼앗긴 한 마리 새처럼 찬 아스팔트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꿈이 머릿속을 낭자하게 물들였네 상복을 입은 먹구름떼가 순식간에 몰려들었네 깨진 유리창 너머 파편 같은 눈발이 점점이 가슴팍에 박혀왔네 한숨으로 피워낸 시간 앞에 제를 올리듯 길고 긴 편지를 썼으나 아무도 돌아올 줄 모르고 봄은 답장이 없었네 애인을, 잃어버린 애인만을 나는 사랑했네

 

 

 오늘은 5.1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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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성찬

                      김태정

축하한다
생애에 축하할 일이 하도 없어서
생애에 그다지 기쁜 일이 많지 않아서
생일이나마 축하한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남은 것을 축하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남아서 한살 더 먹게 된 것을 축하한다

흰 쌀밥과 미역국
이 단순한 흑과 백의 영토 안에서
일시에 모든 계급적 경계를 허무는
또한 모든 계급적 경계를 낳는
‘해피벌스데이투유‘ 그 경쾌한 전지구적 진혼가는
차라리 포스트모던한 야유에 가깝다

아무려나 생일상 앞에서만큼은
보수도 진보도 따로 없으려니
자본이든 노동이든
철조망이든 비무장지대든
칠공년대든 팔공년대든
오일팔 육이구 국가보안법 남북정상회담 월드컵.......
그리고 요강, 망건, 장죽, 장전, 구리개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등 무수한 반동들까지
그 모든 한국적 영광과 한국적 비애는
다만 한그릇 미역국에서 태어나
다시 다국적 밥상으로 마주할 뿐
뒤집어진 야유가 오늘의 축가를 은유할지언정
너와 나는
살아남은 값으로 최초의 성찬과 대면하리니
열화우라늄탄이 바그다드를 겨냥한다 해도
한반도의 밥상은 튼튼하고 안전할지니
축하한다 이 세상에 태어남을

*김수영의 시[거대한 뿌리]에서 인용.



**야!
이렇게 살다 간
생일조차도 가난하고...
막무가내로 착한 시인도 있었다
생각하믄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엄청난 축복이라는 걸
이 시를 읽을 때마다 하게된다
이런 시인을 가진 적 있어
내 삶이 이나마라도
빛이 되는 순간을 만나는 거라고...
그 빛을 나누는
나의 동행
**
너의 생일을 축하한다
아직 오지 않은 많은 날들
함께 걷자
좀 힘에 부치더라도
가끔은
지겹더라도
찬란한 햇살 아래 어느 날을
기억하면서...
축하해^^
.
.
.
라고 낮에는 써서 보냈고


당신의 이마에 손을 얹었을 때가 벌써 36년전,
오늘 아침 일처럼 손바닥에 차가움 그대로 남아있는데...
김판득여사, 엄마,
엄마 불러봅니다.

라고 적었는데 보낼 곳이 없던 어제
음력 3월 29일
**의 생일이고 엄마의 기일.
김태정시인의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과 함께했다.
시인의 ‘가을 드들강‘을 엄마가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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