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불빛 한점

                                        김태정

세상에 보태줄 것 없어
마음만 숨가쁘던 그대 언덕길
기름때 먼지 속에서도
봉숭아는 이쁘게만 피었더랬습니다
우리 너무 젊어 차라리 어리숙하던 시절
괜시레 발그레 귓불 붉히며
돌멩이나 툭툭 차보기도 하고
공장 앞 전봇대 뒤에 숨어서
땀에 전 작업복의 그대를
말없이 바라보기나 할 뿐
긴긴 여름해도 저물어
늦은 땟거리 사들고 허위허위
비탈길 올라가는 아줌마들을 지나
공사장 옆 건널목으로 이어지던 기다림 끝엔
언제나 그대가 있었습니다
먼 데 손수레 덜덜 구르는 소리
막 잔업 들어간 길갓집 미싱 소리
한나절 땀으로 얼룩진 소리들과 더불어
숨가쁜 비탈길 올라가던 그대
넘어질 듯 넘어질 듯 허방을 짚는 손에
야트막한 지붕들은 덩달아 기우뚱거렸댔습니다​
​그대 이 언덕길 다할 때까지
넘어지지 말기를
휘청거리지 말기를
마음은 저물도록 발길만 흩뜨리고
그대 사라진 언덕길 꼭대기에는
그제 막 보태진 세상의 불빛 한점이
어둠속에서 참 따뜻했더랬습니다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 창비2004 )

훅~가을이 깊어버린 오늘,
2017년 9월6일
김태정시인을 읽습니다.
2011년 9월 6일 해남에서
세상을 떠난
시인의 시편들이 물푸레나무처럼
가슴을
물들이는 까닭이지요.

시인을 다시 읽습니다.
아니, 시인의 시를
다시 읽는 밤입니다.
2017년 구월의 밤입니다.
그녀,
아마도
땅끝 아름다운 절, 미황사에
동백꽃 피는 해우소 같은
집,
마당에서 환히 웃고 있겠지요.
부디
그러시기를.
부.
디.
여.
여.
하시기를.
바래보는 쓸쓸하고 고즈녘한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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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피는 해우소
                   김태정

나에게도 집이란 것이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돌아
무명저고리에 행주치마 같은
두 칸짜리 해우소
꼭 고만한 집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방에도 창문이 있다면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그리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 얼굴로
버티고 앉아
저 알 수 없는 바닥의 깊이를 헤아려보기도 하면서
똥 누는 일, 그 삶의 즐거운 안간힘 다음에
바라보는 해우소 나무쪽창 같은
꼭 고만한 나무쪽창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마당에 나무가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나지막한 세계를 내려서듯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지나 두 칸짜리 해우소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슬픔도 기쁨도 다만
두 발로 지그시 누르고 버티고 앉아
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에 바라보는 쪽창 너머
환하게 안겨오는 애기동백꽃,
꼭 고만한 나무 한그루였으면 좋겠다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
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중에서



김사인시인의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의
시를 읽는 바람 차운 밤,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슬픔도 기쁨도 다만

/ 두 발로 지그시 누르고 버티고 앉아/ 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에 바라보는 쪽창 너머

/ 환하게 안겨오는 애기동백꽃, 꼭 고만한 나무 한그루..,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 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
봄은 이미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봄,
봄이 오고 있습니다.
여기 콩콩두부家의 해우소에서 모든 근심은 다 털어버리고 ……^^
이 봄,

부디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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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산


한시절 붉고노란 단풍으로
내마음 끝없이 일렁이게 하더니
끝없이 일렁여 솔미치광이버섯처럼
내가 네속을 헤매며
네가 내속을 할퀴며 피
흘리게 하더니
이제 산은 겨울산이다
너는 먼빛으로도 겨울산이다

어느결에 소스라치게 단풍들어
네 피에 내가 취해 가을이 가고
풍성했던 열애가 가고
이제 우린 겨울산이다
마침내 헐벗은 사랑이다
추운 애인아
누더기라도 벗어주랴
목도리라도 둘러주랴

쌀한줌 두부 한모 사들고 돌아오는 저녁
내 야트막한 골목길에 멈춰서서 바라보면
배고픈 애인아
따뜻한 저녁 한끼 지어주랴
너도 삶이 만만치 않았으리니
내 슬픔에 네가 기대어
네 고독에 내가 기대어
겨울을 살자
이 겨울을 살자


김태정[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중에서


다시, 김태정이다
마음이 시리면 김태정이다
역시, 김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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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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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
               이시가키 린

안 먹고는 살 수가 없다.
밥을
푸성귀를
고기를
공기를
빛을
물을
부모를
형제를
스승을
돈도 마음도
안 먹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부풀어 오른 배를 안고
입을 닦으면
주방에 널려 있는
당근 꼬리
닭 뼈다귀
아버지 창자
마흔 살 해질녘
내 눈에 처음으로 넘치는 짐승의 눈물.


서경식의 책 [시의 힘]의 마지막에 수록된 시
그는 또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이 사회에 소외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시인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 지금 이 시대가 시인들에게 새로운 노래를 요구하고 있다.˝ P155

묵직하지만 역시 서경식..좋네
다 읽고 혼자 뿌듯한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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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30일.

엄청 힘든 유월이었다.

장마라는데 비는 오지 않아 마르고 칙칙한 개울 청소하러 내려갔다가 무리지어 핀 망초꽃에 마음이 흔들렸다.

백만년전 어디쯤에 단편을 하나 썼는데 제목이 "개망초꽃" 이었다.

내용은 가물가물한데 안도현의 시 "개망초꽃"을 인용한 기억은 오롯하다.

그래서였을까?

안 하던 짓, 꽃을 한아름 꽂아두고

오래 비워둔 서재에 카스에 숨겨둔 글 하나 옮겨 본다.

칠월엔 이 슬럼프가 극복되려나?

드디어 비가 오신다.

후덥지근, 더운 여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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