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시선 237
김태정 지음 / 창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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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마이카상

                     김태정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네가 낡아서가 아니야

싫증 나서는 더더욱 아니야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해온

네가 이젠 무서워졌다

무서워졌다 나의 무표정까지도 거뜬히

읽어낼 줄 아는 네가,

반질반질 닮아버린 귀퉁이만큼 노련해진 네가.

너를 펼쳐놓는 순간부터

시를 쓸지 책을 읽을지

아니면 밥을 차려 먹을지

내 행동을 점칠 줄 아는 네가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네 앞에선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이 무서워졌다

이십년 전이나 이십년 후나

변함없이 궁핍한 끼니를 네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불편해졌다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는 네 앞에서

시도 되지 못하고 밥도 되지 못하는

나의 현재가 문득 초라해졌다

시가 밥을 속이는지

밥이 시를 속이는지

죽도 밥도 아닌 세월이 문득 쓸쓸해졌다

이 초라함이,

이 쓸쓸함이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발바닥이 되어버린 자존심

아무래도 이 시시한 자존심 때문에

너를 버려야 할까보다

그래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중에서

  다시 그녀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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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밤에 꿈꾸다 창비시선 431
정희성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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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

                      정희성

봄도 봄이지만

영산홍은 말고

진달래 꽃빛까지만

진달래꽃 진 자리

어린잎 돋듯

거기까지만

아쉽기는 해도

더 짙어지기 전에

사랑도

거기까지만

섭섭하기는 해도 나의 봄은

거기까지만

 

                                  시집 [흰 밤에 꿈꾸다]중에서

 

 

진달래꽃빛,

해 질 녘에 짙어진다는 걸

어둠이 내리는 산길에서

처음 알았다.

꽃이 지는 자리에 잎이 돋는 것도 보았다.

그렇게 진달래꽃 지나는 자리에

진달래인 줄 알던 여린 나무들

연두 잎이 돋고

철쭉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어릴 때 구분하던, 참꽃 개꽃의 자리 변화

눈 크게 뜨지 않았으면 놓칠 뻔,

이 아이들은 누가 보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

그렇게 자리를 이어받고 세월을 이어받고

봄 계주는 진행형,

참꽃 지는 산야에 개꽃이 피어나는 시절이 온 것이다.

나의 봄은

거기까지만

섭섭하기는 해도

거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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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진다고,

꽃이 핀다고,

그렇게 세월이 지나간다고,

그날 아침의

참담함을

세월이라는 이름을

그냥

바라보기만했던

간절함을

잊지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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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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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편지

                         이문재

사월의 귀밑머리가 젖어 있다.

밤새 봄비가 다녀가신 모양이다.

연한 초록

잠깐 당신을 생각했다.

떨어지는 꽃잎과

새로 나오는 이파리가

비교적 잘 헤어지고 있다.

접이우산 접고

정오를 건너가는데

봄비 그친 세상 속으로

라일락 향기가 한 칸 더 밝아진다.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으려다 말았다.

미간이 순해진다.

멀리 있던 것들이

어느새 가까이 와 있다.

저녁까지 혼자 걸어도

유월의 맨 앞까지 혼자 걸어도

오른켠이 허전하지 않을 것 같다.

당신의 오른켠도 연일 안녕하실 것이다.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중에서

 

가문 땅에 봄비 내리신다.                           

자분자분,

촉촉하게 스며들때까지

내리면 좋겠다.

고, 거기까지 썼는데

날이 개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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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달

                                 손택수

  스무살 무렵 나 안마시술소에서 일할 때, 현관 보이로

어서 옵쇼, 손님들 구두닦이로 밥 먹고 살 때

  맹인 안마사들도 아가씨들도 다 비번을 내서 고향에

가고, 그날은 나와 새로 온 김양 누나만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런 날도 손님이 있겠어 누나 간판불 끄고 탕수육이

나 시켜먹자, 그렇게 재차 졸라대고만 있었는데

  그 말이 무슨 화근이라도 되었던가 그날따라 웬 손님

이 그렇게나 많았는지, 상한 구두코에 광을 내는 동안

퉤, 퉤 신세 한탄을 하며 구두를닦는 동안

  누나는 술 취한 사내들을 혼자서 다 받아내었습니다

전표에 찍힌 스물셋 어디로도 귀향하지 못한 철새들을

하룻밤에 혼자서 다 받아주었습니다

  날이 샜을 무렵엔 비틀비틀 분화장 범벅이 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대어 흐느껴 울던 추석달

                                                 시집 [목련전차]중에서

 

 

 

 

 

 

 

 

 

 추석이면 어김없이 추석달의 시구들이 떠오르고 나는 이보다 더 서글퍼지는 명절의 시를 알지 못한다.

 이천십구년 구월 십삼일 모처럼 맑은 날의 추석에 일몰과 월출을 동시에 만났다.

 아니, 만나기를 기다렸다. 광교산 형제봉에서.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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