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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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바로 지금

알라딘에서 책이 일주일 만에 배송되었다.

노란 세월호 1주기 키링을 들여다 보고

펴든 이문재시인의 신작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십 년만에 상재한 시집답게 첫 편 '사막에'부터 뭉클하다.

'어떤 경우'에서 무릎을 꺾는다.

바로 옮겨 적고 싶게 만든다.

하여~ 마음이 바쁜 영업 시간중에 농땡이질이다.

이런 시집을 읽고 시치미 떼는 것은 도리가 아닐 것이라 애써 변명하면서.

 

 

사막에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어떤 경우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오래된 기도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보름

 

보름달은 온몸으로

태양을 정면한다.

자기를 가장 크게 하고

해를 쏘아본다.

등 돌리지 않고

어둠 한 가운데서

어둠의 한 가운데가 된다.

 

 

봄날

 

대학 본관 앞

부아앙 좌회전하던 철가방이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저런 오토바이가 넘어질 뻔했다.

청년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막 벙글기 시작한 목련꽃을 찍는다.

 

아예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아래에서 찰칵 옆에서 찰칵

두어걸음 뒤로 물러나 찰칵찰칵

백목련 사진을 급히 배달할 데가 있을 것이다.

부아앙 철가방이 정문쪽으로 튀어나간다. 

 

계란탕처럼 순한

봄날 이른 저녁이다.

 

 

봄 편지

 

사월의 귀밑머리가 젖어 있다.

밤새 봄비가 다녀가신 모양이다.

연한 초록

잠깐 당신을 생각했다.

 

떨어지는 꽃잎과

새로 나오는 이파리가

비교적 잘 헤어지고 있다.

 

접이우산 접고 

정오를 건너가는데 

봄비 그친 세상 속으로 

라일락 향기가 한 칸 더 밝아진다.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으려다 말았다.

 

미간이 순해진다.

멀리 있던 것들이  

어느새 가까이 와 있다.

 

저녁까지 혼자 걸어도

유월의 맨 앞까지 혼자 걸어도

오른켠이 허전하지 않을 것 같다.

 

당신의 오른켠도 연일 안녕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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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나무 정류장 창비시선 338
박성우 지음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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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           박성우

 

괜찮아, 바닥을 보여줘도 괜찮아

나도 그대에게 바닥을 보여줄게, 악수

우린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위로하고 위로받았던가

그대의 바닥과 나의 바닥, 손바닥

괜찮아, 처음엔 다 서툴고 떨려

처음이 아니어서 능숙해도 괜찮아

그대와 나는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핥았던가

아, 달콤한 바닥이여, 혓바닥

괜찮아, 냄새가 나면 좀 어때

그대 바닥을 내밀어봐,

냄새나는 바닥을 내가 닦아줄게

그대와 내가 마주앉아 씻어주던 바닥, 발바닥

그래, 우리 몸엔 세 개의 바닥이 있지 

손바닥과 혓바닥과 발바닥,

이 세 바닥을 죄 보여주고 감쌀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겠지 

                  시집[자두나무 정류장(창비2011)] 중에서

손바닥, 혓바닥과 발바닥.

우리는 바닥을 가졌군요.

가진지도 모른 채, 무심코 끌고 다닌 바닥들이

위 로, 위로만 향하던 마음들을 일시에 물립니다.

바닥을 쳐보아야 다시 올라갈 힘을 얻는다 했던가요?

다시, 올라가야겠지요.

꽃들,

저 홀로 피었다 홀로 스러지는,

환장하게 아름다워서 서러운 봄 날,

깊고 깊은 바닥의 금들을 봅니다.

괜찮아, 괜찮아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의 위로가 다정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괜.

찮.

다.

당신께도 엎드려 절!!!

 

 

배꼽

​              

살구꽃 자리에는 살구꽃비

자두꽃 자리에는 자두꽃비

복사꽃 자리에는 복사꽃비

아그배꽃 자리에는 아그배꽃비 온다

분홍 하양 분홍 하양 하냥다짐 온다

살구꽃비는 살구배꼽

자두꽃비는 자두배꼽

복사꽃비는 복숭배꼽

아그배꽃비는 아기배꼽 달고 간다

아내랑 아기랑

배꼽마당에 나와 배꼽비 본다

꽃비 배꼽 본다​

​                                      

 

목젖

평소엔 그냥 목젖이었다가

내가 목놓아 울 때​

나에게 젖을 물려주는 젖

젖도 안 나오는 젖

같은 젖,

허나 쪽쪽 빨다보면

울음이 죄 삼켜지는 젖

무에 그리 슬프더냐, 나중에

나중에 내가

가장 깊고 긴 잠에 들어야 할 때

꼬옥 물고 자장자장 잠들라고

엄마가 진즉에 물려준 젖

 

     

 

 

이번 달은 박성우시인.

그런데

 [가뜬한 잠]을 찾다, 찾다 못 찾아서

결국은 

[자두나무 정류장]이 되었는데

그 시집은 어디로 갔을까?

누구에게 선물한 것 같지도 않고

어디로 가버린 걸까? 

사라진 [가뜬한 잠]

때문에 잠이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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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2014. 04. 16.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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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월의 시를 준비하면서 나희덕시인의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과 이영광시인의 [나무는 간다]를 펼쳤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매달 화장실에 시를 붙이는 일은 고르기부터 공력을 들여야 한다. 계절을 생각해야하고, 대중적으로 무난하게 읽혀야하고, 길어도 안 되고, 덧붙이는 말을 일순 떠올려야하고, 너무 흔하고 쉬운 시는 쉬이 식상해져서 내 스스로 마음에 안 들어서 빼게 되고 두고두고 읽어보아도 감칠 맛 나는 시를 택하게 된다. 준비하기 전에 '이번엔 이 시다'하고 생각한 바대로 쉽게 쓸 때도 있고 도무지 마땅한 시를 찾지 못해 빈약한 시집꽂이의  시의 집들이 몽땅 펄럭거리게 될 때도 있다. 삼월은 후자에 속했다. 시인과 시집을 택했는데 도무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두 시인의 시집을 모두 다시 읽었다.

  봄비 내리는 날, 가지 끝에 맺힌 물방울을 보면서 맨 처음 마음에 두었던  나희덕시인의 어떤 나무의 말

                  

제 마른 가지 끝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

 ​

제게 입김을 불어 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관(棺)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부디 저를 다시 꽃피우지는 마십시오.

​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지성사 2014)-중에서]

  그냥 읽을 땐 몰랐는데 적고 보니 완곡한 어법에도 불구하고 무겁다는 느낌이 든다. 봄인데, 삼월인데.......​ 하여 패스되고. ​

뿌리로 부터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 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 부터 달아나는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 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잇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 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 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시인의 '뿌리에게'를 기억하고 있어서인지 이 시의 여운이 남는다. 우리는 뿌리로 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 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나무의 가지 끝에서 뿌리를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아, 매력적인데 내가 쓰기엔 너무 길다. 서체와 글자 크기까지 고려해서 A4 용지 안에 맞춰 넣어야 한다.

다시, 다시는​

문을 뜯고 네가 살던 집에 들어갔다​

문을 열어줄 네가 없기에

네 삶의 비밀번호는 무엇이었을까

더 이상 세상에 세 들어 살지 않는 너는 대답이 없고

열쇠공의 손을 빌려 너의 집에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걸어 나갈 것 같은 신발들

식탁 위에 흩어져 있는 접시들

건조대에 널려 있는 빨래들

화분 속에 말라버린 화초들

책상 위에 놓인 책과 노트들

다시 더러워질 수도 깨끗해질 수도 없는,

무릎 꿇고 있는 물건들

다시, 너를 앉힐 수 없는 의자

다시, 너를 눕힐 수 없는 침대

다시, 너를 덮힐 수 없는담요

다시, 너를 비출 수 없는거울

다시, 너를 가둘 수 없는 열쇠

다시, 우체통에 던질 수 없는, 쓰다만 편지

다시, 다시는, 이 말만이 무력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무엇보다도 네가 없는 이 일요일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저 말라버린 화초가 다시, 꽃을 피운다 해도

 

불투명한 유리벽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찰칵,

네 얼굴이 켜졌어

누가 기억의 스위치를 누른 것일까

그러나 이내 네 얼굴은 꺼지고

깨진 유리조각들이 사방에서 모여 들었지

네가 쓰다 만 페이지,

자동차 바퀴가 멈춘 곳에서 유리벽은 자라나

점점 불투명해지고 단단해졌어

새소리가 나를 일으키지 못하고

눈부신 햇살도 유리벽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지금 여기는 어디일까

난파된 배처럼 가라앉는 방

거기 춥지 않아?...... 어둡지 않아?...... 무섭지 않아?

성에 낀 유리벽을 향해 하염없이 중얼거렸어

까마득한 곁에 누운 너를 향해

감긴 네 눈을 감겨주고

닫힌 네 입술을 어루만져주고

굳은 네 손과 발을 쓸어주고

식은 네 가슴에 흰 꽃을 놓아주고

그렇게 몇 시간을 누워 있었을까

간신히 몸을 일으켜 욕실로 갔어

물을 틀었어

뜨거운 물이 몸 위로 흘러내리고

불투명한 ​유리벽이 천천히 녹아내렸어

네 얼굴처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속의 곳곳에서 상처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특히 이 두편의 시는 아직 남겨진 자의 슬픈 피눈물이 철철 흐르고 있다. 정도상작가의 '낙타'를 읽고 있는 것처럼 저릿저릿하고 묵직하다. 모든 것을 방기해버리고 싶은 순간에도 글의 동앗줄을 잡고 있는 이에게 글은 구원일까? 업일까? 당신들은 스스로에게 징그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독자의 눈에는 존경이 담기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픔의 무게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아픔의 강도는 누구랄 것 없이 고르게 느껴질 터인데 글로, 시로 풀기까지 스스로를 얼마나 담금질 했을까. 다시, 다시는 으로 반복되는 운율 속에. 거기 춥지 않아 등의 물음 속에 울음이 뜨거운 깊은 울음이 담겨 있다. 이제는 부재를 인정해야 하는데 인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그 마음이 드러난다. 그런데 나의 오독일까? 분명 세월호 이전 출간된 시집인데 나는 자꾸만 세월호 속 아이들에게 거기 춥지 않아?...... 어둡지 않아?...... 무섭지 않아? 묻고 싶어지는 것일까? 지금 여기는 어디일까 지옥의 모습이 이렇지는 않을까. 다시, 다시는, 이 말만이 무력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거리에서 돌아갈 수 없는 부모들의 마음이 짚어져 온다. 이 무책임한 정부의 꿍꿍이는 무엇일까? 이러고도 우리가 대한민국의 국민인 것일까? 그들만의 나라에서 그들만의 리그를 치루는 그들에게 우리가 국민인 때는 선거용뿐이겠지만.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창비2001)]-중에서

​ 

  이번에 새롭게 읽힌 시다. 마음의 빚, 원주에서 복숭아 농장을 하시는 별밭농부님께 안부도 여쭙지 못하는 세월이 여러 해다. 그분을 떠올리면 또 다른 무거운 얼굴을 떠올리게 되고 그렇게,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처연해지는 심사가 빚으로 남아있는데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가서 그저 가만히 앉아있다 오고 싶어진다.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 망연히 바라보기만 하고 싶다.

푸른 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길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목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문학동네 2004)​]-중에서

​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때문에 오래 가슴에 묻어둔 시편이다. 처음으로 나희덕의 시집으로 장만한 것이 [그곳이 멀지 않다] 이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시집 속의 시들을 오래 끌어안고 다녔다. 언제고 한번은 써먹고 싶은 시의 목록에 속해있다.

연두에 울다

떨리는 손으로 풀죽은 김밥을

입에 쑤셔넣고 있는 동안에도

기차는 여름들판을 내 눈에 밀어넣었다​.

연둣빛 벼들이 눈동자를 찔렀다​.

들판은 왜 저리도 푸른가

아니다. 푸르다는 말은 적당치 않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연두는 내게 좀 다른 종족으로 여겨진다.

거기엔 아직 고개 숙이지 않은

출렁거림, 또는 수런거림 같은 게 ​남아 있다.

저 순연한 벼포기들.

그런데 내 안은 왜 이리 어두운가.

나를 빛바래게 하려고 쏟아지는 저 햇빛도

결국 어두워지면 빛바랠 거라고 중얼거리며

김밥을 네 개째 삼키는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것이 마치

감정이 몸에 돌기 위한 최소 조건이라도 되는 듯.

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

그래. 저 빛에 나도 두고 온 게 있지.

기차는 여름 들판 사이로 오후를 달린다.

               시집 [사라진 손바닥(문학과지​성사 2004)]-중에서

 

 연두, 몇 해 전부터 자꾸만 연두가 눈에 밟힌다. 여린 새순에서도 나무들의 가지 끝에서도, 징글징글 올라오는 풀에서조차  연두를 발견하고는 뭉클해진다. 아마도 저 표현​ 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한점 배후도 없이 나무는

                         이영광

주먹 쥔 손을 ​내밀고 나무는

자욱이, 서 있다​

힘없이 멈춰 있다

싸우지 않는 싸움꾼처럼 ​

잔매가 쌓이듯 마른 몸에 내리는 눈발을

삭풍이 달궈놓은 팔뚝으로 받는다

싸움꾼은 저렇게 무방비 상태로 설 수 있어야 한다

저렇게, 싸우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저렇게 싸워야 한다 ​

내릴 수 없는 백기를 들고​

나무는 빈 들판에 서 있다

대지를 섬광처럼 한바퀴​ 돌고와서 고요하다

뿌리째 떠돌아도 제자리에서

터질 듯, 가만히 숨 쉰다

나무의 적은 얼굴을 드러낸 적 없는 세력

빈 들은 이글거리는 뿌리들을 비끄러맨다

바람은 잡념의 가지들을 ​조각조각 부러뜨린다

나무의 정권들이 나무 속으로 들어간다

나무는, 오직 나무로 지워진다

한점​ 배후도 없이 나무는

삭풍과 눈보라와 흙먼지의 백만 대군을,

백만 대군을 호령하는 무한의 지평선을

한그루 장창으로 막아선다

                     시집 [나무는 간다(창비2014)]-중에서​

​ 

  '딱 이시다'하고 시작한 삼월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덧붙일 말이 써지지 않는 거다. 며칠 시만 들여다보고, 들여다보고 그러다가 놓았지만 아쉬움은 여전하다 나무는, 오직 나무로 지워진다/ 한점​ 배후도 없이 나무는/ 삭풍과 눈보라와 흙먼지의 백만 대군을,/ 백만 대군을 호령하는 무한의 지평선을/ 한그루 장창으로 막아선다 나무에게서 배운다 외에는 여전히 덧붙일 말이 궁하다. 산수유 광고처럼 참 좋은데, 참 좋은데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슬픔이 하는일

슬픔은 도적처럼 다녀간다

잡을 수가 없다

몸이 끓인 불,

울음이 몸을 꽉 눌러 터뜨리려 하면

어디론가 빠져 달아나버린다

뒤늦은 몸이 한참을 젖다 시든다

슬픔은 눈에 비친 것보다는 늘

더 가까이 있지만,

깨질 듯 오래 웃고 난 다음이나

까맣게 저를 잊은 어느 황혼,

방심한 고요의 끝물에도

눈가에 슬쩍 눈물을 묻혀두고는

어느 결에 사라지고 없다

슬픔이 와서 하는일이란 겨우

울음에서 소리를 훔쳐내는 일​

​ 

천국

 

봄꽃 그늘 지날 때

먼 것들, 모두 지척에서 숨 쉬고

숨 거둔 것들은 돌아와 심장에.

나는, 나는 저 흰 꽃의 깨끗한 흰 빛이

참 마음에 드네

신은 아무래도 이곳을

천국으로 지은 것 같으다.

사람이 낳는 괴로움이 아니라면

고통은 받아들일 수 있네.

사람이 짓는 괴로움도 칼 받듯 하얗게

봄날엔 받을 수 있네.

우주는 다 하늘이고

지구는 하늘의 작은 별나.

꽃 피듯 생이 제 혼몽을 젖히고

죽은 것들 꽃 향기에 받아 적시는  ​

반갑고 서러운 해후가 있어,

그늘이 희게 살찌는 날​.

아무래도 신은 이곳을 ​

천국으로 지은 것만 같으다.

아이 손에 부서지는 장난감처럼

천국은 오래 천국을 망치는 손안에 있었지만

하얀 그늘 하얗게 지고 나면

이곳은 또 천국의 지옥일 테지만.

​ 

  [나무는 간다]를 새로 읽으면서 시인께서 병중이 아닐까 하는 기미를 여러 군데서 발견했다. 프로필의 사진으로는 머리도 부스스 소도둑처럼 우락부락한 이미지가 강한데 어찌 저리 여리고 섬세한 시어를 구사하는 것일까. 이래서 세상의 시름에 아픈 건 아닐까 싶었다. [천국]을 찜했는데 [두부]를 발견하는 바람에 밀리고 말았다. 슬픔이 와서 하는일이란 겨우/ 울음에서 소리를 훔쳐내는 일​/ 이라든가 그늘이 희게 살찌는 날​./ 이런 표현에 압도당한다.

저 나무

저 나뭇잎들 만원권 ​지폐거나

로또였으면, 하는 마음들이

석 달 열흘 지나갔는데

절대로 집구석엔 들어가지 않겠다,

허망과 오기로 떠들며 견디던

국밥집의 사내들도 취해 돌아갔는데

소주 이빠이 들어간 빈속처럼

뒤틀린 언덕길

그늘을 다 나눠준 누드

저 나무, 불 끄듯 언 손을 더듬어

마지막 한 잎을 떨군다

어둠이 한번​ 받았다가 내려주는

추운 땅

변두리에서의 오랜 공덕,

아무도 지갑에 넣어가지 않는

복권을 다 파셨다

한 점의 후회도 없으시다

​                     시집[아픈 천국(창비 2010)]-중에서

나팔꽃

  가시 난 대추나무를 친친 감고 올라간 나팔꽃 줄기, 그대를 망설이면서도

징하게 ​닿고 싶던 그날의 몸살 같아 끝까지 올라 갈 수 없어 그만 자기의

끝에서 망울지는 꽃봉오리, 사랑이란 가시나무 한그루를 ​알몸으로 품는 일

아니겠느냐 입을 활짝 벌린 침묵 아니겠느냐​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창비2003)]- 중에서

​문

가지 말아야 했던 곳

범접해선 안되었던 숱한 내부들

사람의 집 사랑의 집 세월의 집

더렵혀진 발길이 함부로 밟고 들어가

지나보면 다 바깥이었다

날 허락하지 않는 어떤 내부가 있다는 사실,

그러므로 한번도 받아들여진 적 없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서 나는 지금

무엇보다도, 그대의 텅 빈 바깥에 있다

가을 바람 은행잎의 비 맞으며 

더이상 들어갈 수 없는 곳에 닿아서야

그곳에 단정히 여민 문이 있었음을 안다

단풍​ 

산들도 제 고통을 치장한다​

저 단풍 빛으로 내게 왔던 것

저 단풍 ​빛으로 날 살려냈던 것

열려버린 마음을 얼마나

들키고 싶었던가

사랑의 벗은 몸에 둘러주고 싶었던가

불난 집처럼 불난 집처럼 끓어

마침내 잿더미로 멸한다 해도​

​  이 네 편의 시를 새롭게 찜해둔다. 계절에 맞게 언제 써먹어야지 하는 것이다. 삼월은 시편을 준비 하는데는 힘들었지만 시인별로 몇 권의 시집을 다시 읽으면서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롭게 읽히는 시를 여럿 만나는 행운을 안겨주었다.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좋은 것이 꼭 다 좋은 것은 아니고, 나쁜 것이 꼭 다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평범한 교훈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는 경우에 속한다. 시를 읽지 않고 산다면 얼마나 황폐할 것인가. 아찔하다. 내가 이런 자잘한 노력을 하는 것은 누군가도 나처럼 시에서 잠시 위안을 얻었으면 하는 것이고 이렇게 준비하는 시간동안 나름 시의 이마를 만지면서 사유가 깊어지는 나를 만나게 되는 즐거움 때문이다.

  사월에는 쪼들린 시간 때문이었지 비교적 쉽게 시를 고른 달이기도 하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가게 앞 목련은 기대했던 대로 장하다. 아무리 좋은 것도, 아무리 멋진 것도 보지 않고 느끼지 않으면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목련을 보면서 새로이 한다. 목련이 이렇듯 시리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목련을 가진 마당을 부러워하기만 하고 살아온 것이다.

  봄바람, 봄 햇살, 봄꽃 조화롭게 아름다운 사월이다. 거기에 잠시 의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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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30
김수열 지음 / 실천문학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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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시

                김수열

바람붓으로

노랫말을 지으면

나무는 새순 틔워

한 소절 한 소절 받아 적는다 ​

바람 끝이 바뀔 때마다

행을 가르고

계절이 꺾일 때마다

연을 가른다

이른 아침

새가 노래한다는 건

잠에서 깬 나무가

별의 시를 쓴다는 것

지상의 모든 나무는

해마다 한 편의 시를 쓴다

​                   시집 [빙의(실천문학사2015)] 중에서

김수열시인의 신작 시집에서 고른 시입니다.

시인에게 새 시집은 이렇듯 나무의 시를 받아 적는 걸까요? 갑자기 그런 의문이 생기네요.

옮겨 적고 싶은 시가 너무 많아서요. ㅎ~

연두, 물이 올라오는 나무를 보는 일은 요즈음,

사월의 봄에만 누릴 수 있는 새롭고도 경이로운 발견이요,

즐거움인데 우리는 사는데 바쁘다고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계절은 지나갑니다.

세월호의 4월도……. 그렇지요.

벌써 1년이네요.

일 년……. ㅠ.ㅠ

이래서 시를 읽어야하는 것 아닐까요? 삶에 지친 우리를 위로하는 시를.

읽어주세요.

“ 바람 끝이 바뀔 때마다// 행을 가르고// 계절이 꺾일 때마다// 연을 가른다 ”

당신의 나무는 어떤지요? 어떤 시어로 읊나요?

들려주세요.

세상의 낮은 목소리, 수줍은 당신만의 詩를.

들어주세요.

이 봄의 찬가, 지구의 아름다운 사월의 詩를.

 

 

            

 

 

파문

하늘에서 내려오실 때

비는

잊지 않고

웬만한 것들을 손수 가지고 오신다

이렇게 사는 거라고

사는 게 이런 거라고 ​

지상의 못난 것들에게

비는

한 번도

모난 걸 보여준 적이 없으시다

 

            

 

 

 

흔적

푸드덕

산비둘기​

물 마시다 날아간 자리

팔랑

팔랑​

팔랑

깃털 하나 날고 있다

날아간 듯

안 날아간 듯

있는 듯

없는 듯​


 

빙의를 읽는데

자꾸​

​세상을 받들 듯 굳건히 서서 제 자리를 지키는 큰 나무 같은 지도자가 그리워지는 걸까?

어쩐지

.

.

.​

나의 대통령,

우리들의 대통령,

당신이 그리운 봄 밤이다.

그쪽 세상에서 물 속에서 죽어간 어린 영혼들의 ​ 친구가 되어주시겠지.

아직

부모에게 오지 못한 ​

그들을 도와주시겠지.

꽃 몸살을 앓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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