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石詩全集
백석 지음, 이동순 엮음 / 창비 / 198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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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 羅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모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 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적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

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히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섰다가 쉬

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三 千 浦

  

졸레졸레 도야지새끼들이 간다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잿더미에 까치 오르고 아이 오르고 아지랑이 오르고

  

해바라기 하기 좋을 볏곡간 마당에

볏짚같이 누우란 사람들이 물러서서

어늬 눈오신 날 눈을 츠고 생긴 듯한 말다툼소리도 누우라니

  

소는 기르메 지고 조은다

 

아 모도들 따사로히 가난하니 

 

 

 

바 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는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故 鄕

  

나는 北關에 혼자 앓어 누어서

어늬 아침 醫員을 뵈이었다

醫員은 如來 같은 상을 하고 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넷적 어늬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드니

문득 물어 故鄕이 어데냐한다

平安道 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氏  故鄕이란다

그러면 아무개氏ㄹ 아느냐 한즉 

醫員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醫員은 또 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어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故鄕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

이를 매고 고흔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

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늬 가

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꼬 들려오는 탓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탸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아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

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

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

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리하듯이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白石詩全集( 창비, 이동순編) 중에서  

 

 

종일 비는 나리고 기분은 빗물을 타고 흐르다 어느쯤에선 가라앉는다.

명절을 앞둔 탓일까?

일찍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다 白石을 읽는다.

白石은 그럴 때면 읽게된다.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바라다보듯 마음이 반듯해진다.

그러고 말거였는데

한참동안 '눈이 푹푹 나려서' 다시 白石을 만난다.

오늘은 '아름다운 나타샤'를 만날지도

'어데서 흰당나귀가 응앙응앙' 울지도 모르겠다.

자~ 점심이 시작됐다. 하루를 시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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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7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18 01:44   좋아요 0 | URL
오후부터는 바람이 차졌어요.
겨울 다운 맵짜한 추위는 없는 겨울이지만 명절을 앞둔 추위는
쓸쓸한 사람들의 기분을 더 심란하게 만들 거예요.
딱히 그리움이 있는 건 아니지만
좀 쓸쓸해져요. 명절은...그죠.ㅎ
그러시구나!
`따뜻한 밥`
참 좋은 말이고 훈훈해지는 단어예요.
그분도 따뜻하실 거예요.
그 마음이 짚어져서 깊게 숨 한 번 쉬어봅니다.
내내 무탈하셔요.
고맙습니다^^
 
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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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 목말라 하던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전통 있는 학교답게 도서관이 꽤 잘 되어 있었고 읽을 책도 많았다. 그마저도 육학년에 올라갈 무렵엔 다 읽고 말았지만, 중학교에서는 빈곤했다. 1학년 봄, 따끔따끔 보리가시에 찔리면서 보리 베기 동원을 나갔다. 우리 반에 배정된 수입으로 담임은 삼중당 문고판 씨리즈를 사자고 제안했고 서른 권짜리던가 이광수의 대표작품등이 있는 글씨가 깨알 같던 세로쓰기 그 책들을 기억한다. 그렇게 문학전집을 접하고 좀 살던 친구들 집이면 으레 한질 씩 놓여있던 세계문학전집등 갖가지 장식용 양장 판형의 전집들을 접수해서 읽어 치웠다. 내용도 모르고 뜻도 모르면서 화장실에 앞 뒷장이 다 찢겨 나간 책들까지....... 아마도 활자중독증 이었던 듯싶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렇게 읽은 책 중에는 '데미안', '25시',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등이 있었다. 처음엔 처음인 듯 몰입하다가 어느 부분부터 익숙해지는 책들은 대개 그렇게 첫 만남을 했던 것이다.

 

 

  열일곱, 고등학교 입학식을 앞두고 상경해서 처음 들어간 곳이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바꿈 한 방직공장이었다. 고작 6개월인가를 채우고 그만 두었지만 첫 월급을 타서 내 자신을 위해 한 첫 번째 일이 월부로 들여 놓은 근현대사 한국문학전집 20권짜리 한 질이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황홀한 기쁨은 두툼한 양장본 표지의 책을 한 권 한 권 다 꺼내 읽을 때까지 새롭게 차오르고는 했다. 20여 년 전 까지 가지고 있다가 책 좋아하는 큰 언니가 가져갔는데 이제 그 집에서도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때 만났다. 선우 휘, 홍성원, 박경리, 이청준, 김승옥, 윤흥길, 김원일. 서정인, 박범신, 한승원, 송기원등의 쟁쟁한 작가들의 작품을. 그렇게 몇 년을 소설 속에 빠져 있다가 같이 공부하던 선배 언니한테 푸념한 한 대목은 어제 나눈 대화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국전쟁과 분단 상황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작가들은 대체 뭘 썼을까'였다. 그랬다. 그때의 내가 만난 책들은 대다수 전쟁 상황이었고 분단으로 인해 파탄과 결핍의 위기에 놓인 주인공들이었다. 아류들에 좀 질렸을 것이다. 내 자신의 하루하루의 삶도 어둡고 무거운데 대체로 소설 속 주인공들도 그러했으니.

 

 

  그런 시절을 지나가고 있었다. 포스가 장난이 아닌 왕고참 언니의 '야 깽깽아' 소리만 빼면 제법 직장에도 익숙해져서 충실했고 나름 미래의 꿈에 발을 내밀기 시작한 1980년이 되었다. 친구들은 고2가 되었고 그 해 봄, 산업체 고등학교에 진학하라는 상사의 말에 잠깐 고민도 했지만 그랬으면 작년에 고향에서 상고를 장학생으로 갔을 거라고 오만은 하늘을 찌르면서 이제 막 시작한 스무 권짜리 '대망'에 코를 박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보다 '오다 노부나가'가 내겐 더 매력적인 인물로 읽히더라는 편지에 친구는 재미있는 역사 소설인데 번역이 너무 형편없더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녀의 대학생 언니, 오빠들의 영향이었을 테지만 유일하게 편지로나마 소통하던 친구였기에 그 파장은 쳐들고 다니던 고개를 땅으로 처박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해 4월, 꽤 열심히 준비한 고졸검정고시를 치루지 못하고 말았다. 졸업증명서가 필요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진학으로 표기 되어 서류를 안 해 준 것이다. 절차는 절차여서 이유나 사정은 설득되지 않았다. 많은 길들을 발끝만 내려다보고 걷게 되었다. 쉬는 날이면 주머니에 돌아 올 차비만 남겨두고 갈 수 있는 곳까지 차를 타고 떠나서 낯선 동네, 비슷비슷한 골목들을 헤매다 돌아오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되었다. 그래보았자 전철의 끝, 인천의 어느 동네이거나 근교 시외버스가 다니는 곳들에 한정되었지만 익명이 보장되는 길에서 만나는 바람이 좋았다. 낮선 들판 미루나무 아래 볕 바라기가 자울자울 좋았다. 이렇게 한 세상을 살아도 괜찮겠네였다.

 

 

  [1980년 5월, 광주]는 그렇게 내게 왔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 따위는 없던 내게 고참 언니는 언제나처럼 '니네 깽깽이들이 기어이 일을 내 버렸다'고 내가 가해자고 당신이 피해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다구 칠 때에서야. 내가 좋아하는 '밤을 잊은 그대에게' 소수옥dj가 있는 광주mbc 사옥이 불타고 있는 뉴스를 보았다. '폭도'가 점령한 무법의 도시가 되어버렸다는 보도들만 무성한, 고향으로의 소식은 두절된 상태로 애간장을 끓였다. 고립 되어버린 도시에 누가 폭도이고 누가 간첩들이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안위를 알지 못하는 가족들의 생사여부가 전부였다. 전화국 시외전화박스를 날마다 들락거린 끝에 모두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무사하고 다행히 내가 아는 사람중 다친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해 추석, 고향에 가서야 알았다. 언론과 정권이 지목하는 폭도들이 바로 그 도시에 속해있는 우리 가족, 내 친구들, 선배들, 이웃들이었다는 사실을. 그 도시에 연관이 있는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그 '폭도'들의 배후 세력이기도 하다는 것을. '깽깽이'가 왜 생겼는지도 모르는 내게 그렇게 부르는 고참 언니의 호칭도 왜 가해자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도 그때서야 비로소 짐작되었다.

  미안했다. 내가 사랑한 도시, '광주'에게 미안하다. 내가 많이 걸어 다녔던 '충장로'에 '금남로'에 '무등산'에 심지어 호기심을 자극하던 유흥가 골목 '황금동'에 까지 미안하고 미안했다. 하물며 죽어 간 사람들한테 부채감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특히 부러워하던 교복을 입은 또래의 소녀들에게, 그 선택할 길 없는 공포의 상황에 놓인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아직도 같은 무게로 남아있다. 모른다는 것, 몰랐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피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광주'는 단지 지명만이 아니고 '80년 5월'은 시간의 단위만이 아니다. 많은 누군가에게 피 맺힌 고유명사다.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창비)]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런 통과의례를 거친다. [소년이 온다]는 그런 '광주' 다. 소설이면서 소설이 아닌, 소년이면서 소년이 아닌, 우리들의 사과문이고 기록문이고 픽션이고 논픽션의 경계에 서있다는 느낌이 강렬했다. 더불어 작가가 이 글을 쓸 수 있을 때까지 오래 힘들었겠구나, 이제 홀가분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에 사설이 길었다.

  마르시아 심, 지금은 심상대의 [망월]도 그렇고, 박상률의 [너는 스무 살, 아니 만 열아홉 살]도 한창훈의 [꽃의 나라]를 읽을 때도 그랬다. 한명 한명이 나였다가, 너였다가 우리들 모습으로 읽힌다. 시체들 더미 속에서 썩어가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있는'정대'이기도 하고 검열관에게 일곱 대의 뺨을 맞는 '은숙'이 되어 뺨을 부풀린 채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기도 한다. '동호'를 찾아, 당시의 '동호'의 행적을 찾아. '동호'를 찾는'동호 가족'을 따라가는 여정은 육십갑자를 넘고도 넘는 먼 여정이면서 동시에 단숨에 우리를 세월, 팔십년 오월 광주의 세월로 끌고 갔다가, 진도 앞바다 '세월'로 데려 갔다가 용산의 망루로 대추리로 우리를 내다 꽂는다. 어쩌면 '정미'일 수도 있는 내 그림자는 공포로 일그러진다.

 

 

 

  "너무 험하지 않게만 대강 수습해놓은 시신을, 유족들은 목화솜으로 코와 귀를 막아주고 깨끗하고 좋은 옷으로 갈아 입혔다. 그렇게 간단한 염과 입관을 마친 사람들이 상무관으로 옮겨지는 걸 장부에 기록하는 까지가 너의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애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조심스럽게 네가 물었을 때, 은숙 누나는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대답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p17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랏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p114

 

  "그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가전에서 희생되었는지 난 알지 못합니다. 기억하는 건 다음 날 아침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 있던 병원들의 입구, 피 묻은 흰 가운에 들것을 들고 폐허 같은 거리를 빠르게 걷던 의사와 간호사들, 내가 탄 트럭 위로 김에 싼 주먹밥과 물과 딸기를 올려주던 여자들, 함께 목청껏 부르던 애국가와 아리랑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게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P116

 

  "다음의 일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 기억하라고 나에게 말할 권한은 이제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선생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건 겁니다." p117

  

   "군인들의 명령대로 이층 복도에 머리를 박고 있던 우리들이 도청 마당으로 끌려 내려간 건 동틀 무렵이었습니다. 뒤로 손이 묶인 채 마당 가장자리에 일렬로 무릎 끓고 앉은 우리들에게 한 장교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흥분해 있었습니다. 한사람씩 군화로 등을 밟아 흙바닥에 머리를 박게 하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씨팔, 내가 월남 갔다 온 사람이야. 내 손으로 죽인 베트콩 새끼들이 서른 명도 넘는다. 더러운 빨갱이 새끼들. 그때 김진수는 내 옆에 있었습니다. 장교가 김진수의 등을 밟자, 하필 자갈에 찧은 이마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다섯 명의 어린 학생들이 이층에서 두 손을 들고 내려온 것은 그때였습니다. 계엄군이 대낮같이 조명탄을 밝히며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소회의실 캐비닛에 숨으라고 명령했던 네 명의 고등학생과, 소파에서 김진수와 짧은 실랑이를 벌였던 중학생이었습니다. 더 이상 총소리가 들리지 않자 김진수의 말대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러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저 새끼들 봐라, 김진수의 등을 밟고 있던 장교가 여전히 흥분한 채 소리쳤습니다. 씨팔 빨갱이들, 항복이다 이거냐? 목숨은 아깝다 이거냐? 한 발을 여전히 김진수의 등에 올린 채 그는 M16을 들어 조준했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학생들에게 총을 갈겼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봤습니다. 씨팔, 존나 영화 같지 않냐. 치열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그가 부하를 향해 말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진에서 이 아이들이 나란히 누워 있는 건, 이렇게 가지런히 옮겨놓은 게 아닙니다. 한 줄로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시킨 대로 두 팔을 들고,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p133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부마항쟁에 공수부대로 투입됐던 사람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내 이력을 듣고 자신의 이력을 고백하더군요. 가능한 한 과격하게 진압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그가 말했습니다. 특별히 잔인하게 행동한 군인들에게는 상부에서 몇십만원씩 포상금이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중략)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유전자에 새겨진 듯 동일한 잔인성으로.

  ......

  날마다 이 손의 흉터를 들여다봅니다. 뼈가 드러났던 이 자리, 날마다 희끗한 ​진물을 뱉으며 썩어들어갔던 자리를 쓸어봅니다. 평범한 모나미 검정 볼펜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숨을 죽이고 기다립니다.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p135

 

  “너는 도청 안마당에 모로 누워 있었어. 총격의 반동으로 팔다리가 엇갈려 길게 뻗어가 있었어. 얼굴과 가슴은 하늘을, 두 다리는 벌어진 채 땅을 향하고 있었어. 옆구리가 뒤틀린 그 자세가 마지막 순간의 고통을 증거하고 있었어.

  숨을 쉴 수 없었어.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어.

  그러니까 그 여름에 넌 죽어 있었어. 내 몸이 끝없이 피를 쏟아낼 때, 네 몸은 땅속에서 맹렬하게 썩어가고 있었어.

  그 순간 네가 날 살렸어. 삽시간에 내 피를 끓게 해 펄펄 되살게 했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의 힘, 분노의 힘으로.” p173

 

 

  열다섯 살 ‘동호’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소년에게 총을 쏘라 명령한 자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인구 40만의 도시에 군인들에게 지급된 실탄은 80만발이었다는 나라. 이것이 우리의 나라일 수는 없다. 그들의 그들만을 위한 나라에 우리는 산다. 전쟁의 여파를 그린 작품들처럼 ‘광주’도 좀 지겹게 느껴지도록 글로 만나질까. 여전히 빈곤한 문학, 4.3처럼 그렇게 ‘세월’과 함께 특정지역의 특정인들의 한풀이로 매도되어 버릴까봐 두려운 마음이다. 내게도 내재된 성향이 다분히 ‘폭도의 배후세력’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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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사지 못했지만 욕심은 나는, 그런데도 선뜻 지를 수 없는 한국 명단편집.

 이미 단행본으로 가지고 있는 책들과 거의 중복이라는 것이다.

 작가로서 황석영을 좋아하고 그의 안목을 존중하기에 그가 선한 101편의 묶음 집에는 끌리지만 포화상태인 책장에 모양이 그럴싸하고 진열하기 좋은 이 전집을 구입하기엔 뭔가 걸림이 있다.

 그래도 내가 선택하는 102번째의 단편이라, 고민했다.

 [젤리 피쉬]의 헤이수 단편들도 좋았고, [폭식]의 김재영의 단편들도 아쉽다.

 그런 고민을 그도 했겠지.

 그렇지만 한국 명단편에 이름 할, 그런 단편이라면 정지아 소설집[숲의 대화]속의 ˝목욕 가는 날˝ 정도여야 하지 않을까. [봄빛]의 단편들도 잔잔하게 따뜻했지만 [숲의 대화]속의 정지아는 담담해졌다. 상처를 딛고, 상처속으로 걸어 본 사람만이 가질 포용성이 여유롭게 읽혔다. 60대 무렵의 박완서 작가의 글을 40대의 시선으로 쓴 듯한 단단한 필력이, 관찰자의 시선이 정지아답게 그려져 있다.

  독자인 나를 소설속으로 끌어당기는 글을 좋아한다. 흡입력과 공감이 가독성을 높혀주는 유형에 속하는 것이다. 그 어떤 사랑에도 누추함은 없다. 당사자들에겐 고귀하고 가슴 저릿하다. 일회적인 것들이 판치는 현대 사회에서 고집스럽게 낡고 누추하고 가난하고 못 생긴 것들에 생명을 넣어 주는 작가의 일관됨이 자랑스럽다. 그것은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 할 수 없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니까.

  전작을 가지고 있고 전작을 완독한 작가 중에 유일하게 101편에 속하지 못한 그녀의 작품, `목욕 가는 날`을 감히 102번째 한국의 명단편으로 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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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경의 경주산책
강석경 지음, 김호연 그림 / 열림원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봄의 입구인 입춘의 아침이다.

  먹먹하고 화도 나고 답답하고, 이렇게 잊어가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자신이 한없이 미안하기도 한 [눈 먼 자들의 국가]를 내려놓았으니 오늘은 뭘 챙겨 가 볼까? 책상 위 아직 읽지 않은 책을 들여다보다가 오후에 제주로 떠나는 현주 생각이 나서 잡은 책이 [강석경의 경주 산책] 이다. 제주를 다녀온 지가 일 년이 훌쩍 지나 그리움은 오름처럼 부풀어 오르는데 능이라도 만나볼까 싶다. 제주든 경주든 나를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 곳이기도 하고.

  책이 출간되었을 때가 2004년, 그 당시라면 이년 여, 꽤 경주를 들락거렸던 시절이다. 폐허의 황룡사지에서 해가 저물고 저녁이 내리는 모습을 만난 이후 몸살을 앓듯 그리워하다가 다녀오면 다시 살아갈 힘이 생기고는 했다. 남산을 비롯해서 능원 사이를 한없이 걷고 또 걷고 자전거를 타고 신라 속을 다니던 그 시절의 내가 산문집 안에 있었다. 감실부처를 만나러 가던 길, 신선마애불을 만나던 그 순간의 느낌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특히 잊을 수 없는 풍경이 하나 있다. 사천왕사지에서 호젓한 오솔길을 누군가 공들여 비질한 흔적을 따라 가다가 만난 선덕여왕의 능, 상석에 놓여있던 꽃다발. 소나무들이 호위하는 소박한 왕릉에서 만나는 꽃다발은 150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지귀처럼, 처용처럼 경이롭고 뭉클했다. 그런 뭉클함이 책 곳곳에서 살아난다. 거기다 더해서 이런 횡재를 하다니. 흠집 하나 없는 새 책 그대로의 모습에다가 김호연 화백의 정겨운 그림이 덤으로 담긴 이 책을 이렇게 싸게 결국은 만나버리다니 감동이 두 배다.

 

 

 

 

 

 

 

 

 

 

  '천년이 지난 고분은 내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는 스산한 유택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류의 흔적이다.

​  근원적인 것을 보여주기에 능이 있는 고도의 풍경은 아름답다. 산 자와 죽은 자,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경주는 늘 나를 매료시키고, 내게 영감을 준다. 환상과 영감의 샘물인 경주와의 조우는 작가로서 행운이지만 정신의 ​고향을 갖게 되었으므로 한 자연인으로서도 행복한 일이다. 누구와의 만남이 내 인생에서 필연이었는지는 말하기 힘들지만 경주와의 만남은 그래서 필연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p21 (황룡사지에서)

 

 

  경주와의 만남이 필연이라고 말하고 경주에서 살아가는 작가가 진정으로 부럽다.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선택을 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결정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주변의 여건도 삶의 무게도 무시할 수는 없는 우리는 지극히 소심한 시민으로 살아가니까. 경주를 고향으로 두고 서라벌 여고를 다니고 여전히 신라가시내로 살고 있는 친구를 부러워했다. 능들 사이를 산책하고 분황사에서 지극 정성을 모아 절을 올리고 황룡사지를 걷는 그 친구의 걸음, 걸음에서 역사를 보았던 것이다. 동류의 부러움을 작가에게서도 느낀다.

 

   '신라의 북방문화로도 알 수 있듯이 경주는 지금의 한국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개방적이었던 것 같다. 중세 아라비아 사학가이며 지리학자인 알 마크디시는 966년에 펴낸 [창세와 역사서]에서 신라에 들어간 사람은 그곳의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주민의 성격이 양순하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고 기록했다. 신라인들은 실크로드의 당사자답게 이국 정취에 남다른 감각이 있었다고 말하는 미술 사학자도 있지만 이러한 개방성이 경주를 국제도시로 만들었고 오늘날에도 관광도시로 만든 것이 아닌가.

  언젠가부터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것을 내세우지만 단일이라는 것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냄새를 풍긴다. 몇 년 전 46개 국가를 대상으로 다른 문화에 대한 적응력을 조사한 결과 한국이 최하위였다는 놀라운(?) 보고가 있었다.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력과 포용력의 결여이다. 가족 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등 한국사회의 부정적 단면도 여기서 자생하는 것이 아닌가. 문화는 섞이면서 진보하고 다양성과 포용성을 갖게 된다. 인도가 자랑하는 타지마할은 무슬림 통치자가 세운 것이고 음악으로도 잘 알려진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은 스페인을 보다 신비스럽게, 이국적으로 다가서게 한다. 19세기의 천재 안토니오 가우디의 환상적인 건축도 아랍문화가 섞인 그들 역사의 바탕에서 창조된 것이 아닌가.' p 25 (괘릉에서)

 

 

  괘릉의 무인상을 보고 느낀 소회인데 생소하다. 괘릉을 가보지 못한 것이다. ​작가의 의견에 공감한다. 지금의 경주도 배타적인 대표도시가 되어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언제고 괘릉을 간다면 작가의 시선이 얹혀 질 것이다. 그때 보는 풍경은 풍경으로만 그치지 않을 테고. 아는 것은 그런 것이다.

  괘릉, 사변이지만 블로그 이웃인 '밥'이 아주 오래 전에 올린 글로 인상적인 지명이기도 하다. 어릴 때 그 곳 소나무 숲을 무서워하던 생생하게 살아있던 글, 그 친구의 글빨은 블로그에서 만날 수 없는데도 이렇듯 살아있는데 아이 키우느라 기진맥진인지 토옹 타전이 없다. 언젠가 그 친구의 글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체홉을 좋아하는, 신랑을 따라 영덕에 살고 있는 개구리밥의 괘릉.

 

 

  '이제는 훌훌 털어버릴 준비를 해야 하건만 나는 왜 들 수도 없는 돌짐을 들여온​ 것일까.

  비어 있음은 빈곤이 아니라 풍요이며 근원에 다가가는 계단이다. 가득 찬 것은 혼란스럽다. 영혼을 탁하게 한다. 집에 가득 찬 물질에서는 부패의 냄새가 나고. 가슴에 가득 찬 욕망에선 ​폐수의 냄새가 난다. 그릇을 보면서 그릇처럼 비우라. 집착도 분노도 비우고 새로 태어나 듯 공으로 돌아가라. 인연도 비우고 겸허하게 기다리라. 잎을 떨구고 늦가을 숲처럼 나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기 위해.

  넉넉한 모양새가 자유로운 분청 그릇을 바라보며 언제 저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꿈꾸어본다. 맑고 고결한 백자 잔을 바라보며 백자 잔 같은 친구를 그리워한다.'  p53​(박물관에서- 그릇에 대하여)

 

 

  찔끔했다. 무엇이든 잘 ​버리지 못하는 성정이 스스로 딱하기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번 이사를 앞두고도 어찌나 한심하던지. 이십여 년 전의 낡은 노트들과 별 소소한 것들을 끄적거려둔 매해의 다이어리들, 등산화사이에 끼어 온 첫 한라산 산행의 화산석 조각들,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각가지 기념품들, 하나하나 사연이 있다고 버리지 못한 필기구들, 고르고 골라 버리면서도 다시 남겨지는 것들, 읽지도 않고 계속 사들이는 이 책들을 생각하면 중증이다. 언제나 이런 집착에서 벗어날 것인가 싶다. 한심하다. 비워야 할, 버릴 줄 아는 나이임에도 채우려고만 하고 있으니. ‘인연도 비우고 겸허하게 기다리라’는 구절을 오래 만져본다. 온기가 느껴지도록.

  박물관을 좋아하는데 특히 국립 경주 박물관은 볼거리로도 규모로도 상징성으로도 압도하면서 유혹하는 곳이기도 하다. 어느 비 오는 오후 내내 거기 머물던 시간이 에밀레 종소리처럼 아슴아슴하다. 뒤뜰에 고선사지 탑이 장대비에 젖고 있던.

 

 

  '천오백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이 된 고분이 예술과는 또 다른 감동을 준다. 예술은 사물의 본질을 모방하지만 자연은 모든 본성을 포괄하기에 완벽하다고 하지 않는가. 예술을 모르고 살기는 해도 자연 없이는 살 수 ​없다. 인간이 무의식중 자연을 갈구하는 것은 그것이 생명의 본성이기 때문이리라. 생명의 모태인 자연.

  부드러운 능선이 가슴을 열게​ 하니 여름의 대지에 엎드리고 싶다. 능역을 산책하고 한 친구는 "여기서 죽고 싶다"고 취한 듯 말했지. 자연만이 주는 절대 평화가 죽음까지도 포용하게 하나보다. 인생의 유연함을 생각하면 권력도 명성도 덧없는 것. 이곳에 묻혔다고 추정되는 법흥, 진흥 두 왕은 불교를 일으키고 비약적인 국가발전을 이루었지만 말년엔 승려가 되었다. 영화의 헛됨을 알았기에 역사에 좋은 통치자로 기록될 수 있었으리라. 삶의 신고처럼 열기가 후끈 끼쳐오지만 형제처럼 정답게 솟아 있는 고분의 그늘 아래 걸어가니 몸도 마음도 허허롭다.' p78 ( 무열왕릉에서)

 

 

  스스로 잘 했다고​ '대통령의 시간' 운운하는 통치자를 가졌고, 스스로 잘하고 있으니 징징대지 좀 말라고 질책하는 통치자 아래에서 '눈 먼 자' 인 채로 살고 있어 부끄럽다. '가만히 있으라' 하니 가만히 살아가고 '귀 막으라' 하니 못 들은 척 살아가는 이런 어른이 되어 버린 무능이 부끄럽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처럼 보이던 구조를 간절함으로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그렇게 잠겨버린 배 안에서 죽음이 다가오는 걸 기다린 그들에게 단 하나의 기적이라도 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숨죽이며 ‘세월’을 바라 본 눈 뜬 장님의 시간들이 부끄럽고 통치자인 그들을 기록할 역사에서 지나가는 행인1도 못되는 역할이겠지만 역사 속에 남을 그 상황들의 증인으로서 부끄러운 날들이다. 선거로도 이론으로도 엄중히 대처하지 못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1인으로 부끄럽다. 존경할 어른을 갖지 못한 불행한 시절, 어쩌면 그 책임은 우리들에게 있을 것이다. 청산해야 할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고 살아온 그 나날들이 결국은 이런 풍토를 만들어 버렸을 테니까. 이제 골프나 배우고 골프 치러 파르라니 다듬어진 잔디밭으로 나가는 것이 이 나라를 위하는 길일지 모르겠다.

 

 

  '목책엔 갖가지 색깔의 깃발이 꽂혀 있고 조련사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말을 타고 있는데, 몽고의 겔 같은 둥근 비치 양산 아래 빨간 모자와 조끼를 입은 조련사들이 앉아 있었다. 폐허의 미를 느껴야 할 신라 궁터에 깃발이 꽂힌 목책이라니​. 몽고에 온 것 같았다. 역사의 유적지를 관광이라는 경제논리로 유료 말 체험장을 만들고 유원지화 하다니. 이런 의욕과잉이 지방자치제의 살아남기 행정일까.

  경주는 짓고 세울 ​것이 아니라 수도승처럼 비우고 비워야 할 도시가 아닐까. 고도의 환상을 깨트리는 고층 아파트는 하나 둘, 외곽으로 나가고 전선주조차 땅 밑으로 묻고 능원의 담도 허물어 방문객들이 천오백 년 전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폐허의 황룡사지와 계림 숲을 거닐며 자신의 원형을 발견하고, 달팽이집 같은 일상에서 비켜나 근원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맞도록. 그것이 민족의 고향으로서 경주가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 p97 (서천에서)

 

 

  첨성대 앞에서 계림으로, 반월성으로 오가는 마차를 본 것 같다. 그 이후 그쪽으로 걸음하지 않았지만.

  문화의 보존과 개발은 양날의 검처럼 예민한 사항이지만 세계문화유산의 도시에서 살아가는 나로서도 안타까운 일이 많다.지난 가을, 감은사지에서도 그런 징후를 보았다. 구불구불 추령재를 지나며 토함산을 일별하고 나면 가슴이 뚫리는 너른 들판과 대종천이 나오고 그 길 끝에 훤훤장부 같이 잘생긴 감은사탑을 만나는 설렘을 누릴 수 없었다. 도로는 이쪽저쪽으로 생기고 온통 공사현장만 있을 뿐이었다. 거기다 외길의 끝에 가서야 탑을 볼 수 있게 도로는 바뀌는중이었다. 봉길리 앞바다의 집채만한 파도가 아니었다면 점심으로 먹은 전복순두부는 쳇증으로 얹힐 뻔 했다. 고유섭선생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봉길리 앞바다의 파도와 갈매기들만이 여전히 반갑게 맞아주었다. 위대한 자연에 무릎 꿇는 순간이 바로 그런 때일 것이다. 오래오래 거친 바람을 맞았다. 다음 번에 찾을 때에도 그 바다가 여전했으면 싶은 간절함을 지극정성으로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들의 등에 얹어두고 돌아오는 추령재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친구며 연인을 추구하는 것도 닮은​꼴인 영혼의 유전인자를 찾기 위해서이고, 위대한 작가의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것도 예술을 통해 내 영혼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서이다. 어느 때는 길을 잘못 들어 고통을 받기도 하지만 경험은 어리석은 자도 깨우쳐주어 결국은 제 길을 찾아가도록 해준다. 정신만 치열하다면 말이다.

  사람도 거리도 복잡한 서울에서 보름 만에 돌아와 금빛 능을 바라보니 경주와의 만남에 새삼​ 감사하게 된다. 경주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아직도 무국적자로 세상을 떠돌아다닐 것만 같다. 내면의 부름이 있었는지 필연같이 경주를 찾아오면서 나의 긴 방황도 매듭지어졌는데 이 땅의 무엇이 내 영혼을 강하게 붙드는 것일까.

  천오백 년 전 거대고분의 주인공들인 신라인의 기상, 자유로움과 미에 대한 찬사​, 대의를 위해 몸을 던지는 올곧은 충정과 바위마다 부처를 새긴 종교심은 늘 나를 고양시킨다. 내가 경주에 이토록 친화력을 느끼는 것은 내 영혼의 유전인자가 신라혼의 DNA와 같기 때문이고, 내가 경주로 돌아온 것도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온 회귀인 것만 같다.

  또 한해가 강물처럼 흘러간다. 숫자란 그저 하나의 매듭일 뿐이지만 우리는 자신의 근원을 찾아 오늘도 흘러간다. p107 (세모의 거리에서)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을 읽고 이스탄불은 그런 작가를 가져서 얼마나 행운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작가가 근원 회귀의 고향으로 경주를 가졌으니 이제 경주도 행운을 가진 셈이다. 아니 이미 가졌는데 이제야 내가 알게 된 것인가. 언젠가 다시 경주를 산책한다면 이전에 만났던 경주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천오백 년 전의 신라인들은 이제 그들의 본향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주는 여전히 慶州이리라. 금빛 능이 거기있고 그곳을 사랑하는 영혼들이 서로를 찾으면서 만나는 순간들이 교차하고 있는 이상 우리들의 아름다운 고도는 古都로 남아있으리라 믿는다.

 

           -경주남산-

                         정일근


마음이 길을 만드네
그리움의 마음 없다면
누가 길을 만들고
그길 지도위에 새겨 놓으리
보름달 뜨는 저녁
마음의 눈도 함께 떠
경주남산 냉골 암봉 바윗길따라
돌속에 숨은 내사랑 찾아 가노라면
산은 사람들에게 풀어놓은 실타래 같은길은
달빛 아니라도 환한길
눈을 감고서도 찾아갈 수 있는 길
사랑아 너는 어디에 숨어 나를 부르는지
마음이 앞서서 길을 만드네
그길따라 내가 가네

  그랬다.
눈을 감고서도 환한길. 이미 마음으로 다니고 보았던 길이요, 소나무였다. 
  그 속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냉골 암봉 바윗길 따라.

  경주 남산을 처음 만나고 인용했던 시와 적었던 부분이다. 그런 감동의 순간을 기억하는 한 언제까지나 경주는 경주로 남아있겠지.

  곧 봄이다. 모든 사람을 무장해제 시킬 봄.

  꽃구름 속의 불국사, 온통 꽃 물결 사람 물결이 될 경주,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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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9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10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름날

                          김사인

 

풀들이 시드렁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개인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중에서

 

 

‘풀들은 시드렁거드렁 자라’지 않지요.

미친 듯이 죽기 살기로 자랍니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가물어도, 장마 빗속에도,

어떤 장애에도 꿈쩍 않고 그저 자라기만 합니다.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보고 있다가는

여름 내내 풀 속에 갇혀 지내야할지 모릅니다. ^.^;;

그런데도 곡식은 호미소리만 들어도 자란답니다.

풀은 그래 더욱 절박하게 자랄까요? 결국 지고 말더라도.

시인의 여유로운 시선이 더불어 유쾌합니다.

웃음이 날 듯 미소가 입술에 걸리는 리듬이 상쾌하지요.

더위에 지친 당신께, 이 시 한 편으로

감나무 그늘 밑 평상에 누운 듯 달콤한 휴식시간을

따블로, 아니 따따블로 보냅니다. 건강하세요.

 

  팔월, 화장실에 걸린 두 편 중 한 편의 시는 알게 된 뒤로 여름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여름날]이었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는 구월에야 비로소 올린다.

  이미 화장실에는 구월의 시편으로 바뀐 지금에서야.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 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노숙]전문

  김사인시인을 처음 만난 건 2005년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노숙]으로다. 함부로 부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서늘한 시인의 눈과 마음이 읽혀 여운이 오래 남았다. 몸을 함부로하고 살아온 축에 속하는 스스로의 시선까지 얹혀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2006년, [가만히 좋아하는]이 나와서 좋았다. 주변의 꽤 많은 이들도 소장하고 있을 텐데 읽었을지는 글쎄, 모르겠다. 2006년 출간된 손세실리아 선생님의 [기차를 놓치다]와 함께 일 년여, 선택할 고민이 없는 선물이 되어 주었다. 알라딘 주문을 하면 이미 구입했다고 주루룩 올라가는 제목이기도 하니까.

  여기까지 쓰고 고향에 다녀왔다.

  팔월 초에 이어 두 번째 예상치 않은 방문이었다. 한 달에 두 번씩의 방문은 고향을 떠나온 35년 동안 엄마가 돌아가신 그때 이후 처음이었다. 마지막이 멀지 않았다는 소식으로 남은 가족들이 모였고 이번엔 그의 부음을 전해 받고 다녀왔다.

  가족의 부음, 벌써 몇 번째여서 익숙해진 걸음이어서만은 아닌 황망함과 부재의 설움 보다는 그동안의 회한들이 밀려왔다.

 

  새벽별처럼 아름다웠던 젊은 날에도/ 내 어깨 위엔/ 언제나 조그만 황혼이 걸려 있었다/ 향기로운 독버섯 냄새를 풍기며/ 속으로 나를 흔드는 바람이 있었다// 머리칼 사이로/ 무수히 빠져 나가는/ 은비늘 같은 시간들// 모든 이름이 덧없음을/ 그때 벌써 알고 있었다// 아! 젊음은/ 그 지느러미 속을 헤엄치는/ 짧은 감탄사였다// 온몸에 감탄사가 붙어/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른 잎사귀였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는/ 광풍의 거리/ 꿈과 멸망이 함께 출렁이는/ 젊음은 한 장의 프래카아드였다// 그리하여/ 나는 어서 너와 함께/ 낡은 어둠이 되고 싶었다// 촛불 밖에 스러지는/ 하얀 적막이 되고 싶었다

                                문정희시인의 시집 [어린 사랑에게]중에서 [젊은 날]전문

 

  인생의 빛나는 시간이라는 이십 대의 시절, 나는 문정희시인의 젊은 날 속의 마른 잎사귀였다.

  시인께서도 그런 힘든 시간이 있었다는 시어들이 내게 보내주는 따뜻한 위로 같아서 노트에 적어 놓고 가끔 소리 내서 읽어보고는 했다. 시들만이, 책들만이, 영화들만이 고단한 현실을 떠나 잠시나마 숨 쉬게 하는 쉼터였고 피난처였다.

  한 해가 멀다 하고 황망한 걸음을 떼야했던 가족 중 누군가의 부음과 사고 소식들과 그 뒤치다꺼리는 남은자의 몫이어서 더 이상 무너질 것도, 버릴 것도 없어 꿈도 희망마저도 버려야 하던 그때의 내게 젊음은 특권이 아니라 벗어 날 수 없는 무서운 올가미로 목을 조여 오는 의무였다. 세월아 빨리 지나 가 버려라. 어서 빨리 늙어 버리고 싶었다.

  먹기 보다는 굶기를 더 많이 했고 차를 타기보다는 걷기를 더 많이 했던 춥고 배고프던 이십대 시절들의 아픈 기억에서 대미를 장식한 것은 산에서 낙상사고, 나는 내 몸뚱이에게 여섯 번의 수술과 험한 흉터를 선물한 셈이었기에 [노숙]의 구절들이 더 서늘하게 읽힌다.

 

   세상은 그에게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맨발로 세상을 떠돌아다닌 그에게/ 검은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부산역 광장 앞/ 낮술에 취해/ 술병처럼 쓰러져/ 잠이 든 사내//맨발이 캉가루 구두약을 칠한 듯 반들거리고 있네/ 세상의 온갖 흙먼지와 기름때를 입혀 광을 내고 있네// 벗겨지지 않는 구두,/ 그 누구도/ 벗겨갈 수 없는/ 맞춤구두 한 켤레/ 죽음만이 벗겨줄 수 있네/ 죽음까지 껴 신고 가야 한다네

                                 손택수 시집 [목련 전차]중에서 [살가죽구두]전문

 

  같은 부모의 핏줄이라는 공통점으로 모두를 참담하게 만들 권리를 가진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우리는 각자의 회한과 각자의 설움으로 침묵했다. 혹여라도 그가 일어날까봐 조마조마하기도 하는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떠났다. 정말 떠났다. 염을 지켜보는 내내 손택수시인의 [살가죽구두]가 떠다녔다.

  엄마는 장남이 잘 되어야 집안이 일어선다며 우리들 모두에게 양보를 구했고 우리는 엄마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엄마의 바람이나 헌신적인 희생에도 불구하고 온갖 패악으로 자신 뿐 아니라 엄마를 비롯한 우리 모두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거듭 된 노름으로 가계는 파산했고 언제나 모든 책임은 자신의 발목을 잡은 엄마와 우리 때문이라며 분노에 겨워 스스로 지칠 때까지 투우처럼 돌진하고 날 뛰고 옹색한 세간들과 함께 부유했다.

  올해로 사십년, 아버지 돌아가신 그 여름에서 사십 년이 지났는데 아버지의 부재는 그에겐 책임감보다는 우리에게 권리를 행사할 구실이 되었을까? 집에 돈이 있는 기색은 귀신 같이 알아냈고 울며 매달리는 엄마를 밀치고 쌀 한 톨 없는 집을 떠나 빈털터리가 되면 돌아오고는 했다. 술이 취해 들어오는 저녁마다 잠에 떨어질 때까지 몇 시간이고 무릎 꿇고 앉아서 들어야했던 말의 잔치들은 기억이 없고, 저려서 감각이 없어지던 다리와 발가락들과 팔이 저릴 때까지 동생하고 둘에게 안마를 시키던 폭군의 기억은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걸 지켜보면서 안절부절, 울다가 혼내다가 부탁하는 엄마가 지칠 때까지 멈추지 않던 그의 광기를 바로 위 오빠와 나와 동생은 그 모든 것을 겪어야했다. 유일한 탈출구는 집을 떠나는 방법 뿐, 처음엔 바로 위 오빠가, 그 다음엔 내가 그렇게 도망치듯이 떠나왔지만 내게는 늘 설운 이름으로 남은 동생, 막내는 그 뒤로도 오랜 시간 엄마 곁에 남아서 엄마 임종을 지켰다. 그것이 늘 미안하다. 엄마의 떠남으로 보고 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엄마가 남기고 간 유일한 유산이 되었다.

  덜 보았거나 더 보았다 해도 우리 가족 모두는 그의 패악질로 각자의 생을 난도질당했다. 우리 모두의 불행의 시작이자 고향으로부터 도망치게 만든 지긋지긋한 애증의 혈육, 보고 살았던 시간보다 안 보고 살았던 시간이 길었지만 체증처럼 얹혀있던 징글징글한 혈육, 그도 결국은 한 줌의 재가 되어 살가죽구두를 벗고 떠났다. 잘 가라. 남들에겐 한없이 너그러웠지만 가까운 가족에겐 평생토록 모진 말과 패악으로 일삼던 그도 이유와 회한은 있을 테지만 용서할 수는 없다. 그 어떤 이유가 있다 했어도 용서하고 싶지 않다. 용서되지는 않기에 그냥 보낸다.

  가라, 잘 가라. 가서 다시는, 다시는 세상으로 오지 마라.

  남은 우리는 상처도, 절망도, 툭툭 털고 새롭게 시작하리니. 입 안에 고소한 여운을 남기는 우리 콩 두부처럼 살아가리니.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풍경의 깊이- 전문

 

  그렇게 팔월은 갔다. 구월이다. 여름이 간 것이다.

  고향에 머무는 내내 비는 오락가락했는데 돌아오는 길, 정읍을 지나니 쾌청하고 맑은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 부음을 받고 각자 회한으로 출발했던 길을 함께 돌아오는 우리 자매들은 환하게 벗겨진 하늘을 남은 우리 생의 환한 희망으로 받아들였다. 이천 십사 년 이 여름은 강렬한 흔적을 남기고 갔다.

  풍경들은 스무 살 언저리의 불행의 색깔로 덧칠되어 보이지 않는다. 바닥 중 가장 낮은 바닥으로 가라앉은 것 같던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의 수술이 끝났을 때까지 내 생을 지배한 것은 거듭 된 불행의 기운에 도발하다가 지치고 분노하고 발악하고 포기였다. 그러나 쉬지 않고 질주만 하던 생에서 아픈 시절은 쉼이기도 했다. 쉬는 시간이 늘면서 책을 보는 시간도 길어지고 찬찬하게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도 길어졌다. 화성 주변에 살면서 늘 스치던 화성을 찬찬히 바라보고 그 속에 앉아있으니 절로 보여 지는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되었다. 나쁜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팔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는 다섯 번째의 수술에서 깨어나면서 세상의 끝을 다녀온 듯 했다.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을 처음으로 보고 느꼈을 때 삶은 내게 축복이구나 싶었다. 살아있는 순간, 순간이 새로움이었고 소소한 행복으로 가득해졌다. 아니라고 부정해도 욕심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비어지고 낮은 것, 작은 것, 소소한 것들을 찬찬하게 살펴보면서 살게 된 것이다. 무엇이 되고 싶었던 강렬한 욕망이 스스로를 조급하고 황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무엇이 되려하지 않으니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각자의 몫으로 빛나 보이고 풍경들의 깊이는 마음 안에 마음만이 찾아 가는 길을 놓는다. 세상은 같은 세상인데 다른 세상이 되었다.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꽃- 전문

 

   가족은 내게 상처다. 가정을 이루고 사는 일에 자신이 없었다. 다시 그 불행했던 순간들의 구성원 속으로 복귀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스스로 진단하건데 범생이 기질이 강한 나는 선택한 어떤 일에든 책임지려는 성향이 강하다. 혹여 후회 막심한 선택의 결과에도 끝까지 갈 것이 뻔한 모험을 감행하고 싶지 않았고 더 이상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발목 잡히고 싶지 않았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야 약간 있지만 반대쪽의 가능성을 믿기엔 너무 조심스러운 쪽으로 멀리 와버린 것이다. 그래서 포기한 엄마라는 이름의 꽃, 세상의 모든 엄마들을 존경한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내 가족, 내 새끼, 내 꺼, 내 무엇에만 사랑을 넘어 집착하고 쟁취하려는 부류는(그들의 문제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강변하고 스스로도 철썩 같이 믿는 것이다.) 경멸하지만 본능에 충실한 엄마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오는 나비이네

그 등에 무엇일까

몰라 빈 집 마당켠

기운 한낮의 외로운 그늘 한 뼘일까

아기만 혼자 남아

먹다 흘린 밥알과 김칫국물

비어져나오는 울음일까

나오다 턱에 앞자락에 더께지는

땟국물 같은 울음일까

돌보는 이 없는 대낮을 지고 눈시린 적막 하나 지고

가는데, 대체

어디까지나 가나 나비

 

그 앞에 고요히

무릎 꿇고 싶은 날들 있었다

                    나비- 전문

 

  어릴 때의 나는 고요했다. 내 추억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는 중추신경이 있다면 키가 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배구 선수로 차출 되었던 시절 말고는 대체로 담담하고 조용하고 과묵했다. 집에서 불리 우는 이름만이 세계의 전부이다가 입학했을 때까지 제 이름조차 모르고 열 살이 될 때까지 존재감도 없었던 듯하다. 아홉 살에 도서관 청소를 하러가서 책을 처음 만나 책에 빠지면서 성적이 좋아지게 된 것은 요즘 광고에서 말하는 원리를 알게 된 까닭이었을까? 사학년이 되었을 때 만난 선생님은 내성적인 나에게 발표학습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자신감을 갖게 해줬고 특별활동시간에는 시 공부를 하게 했다. 장자의 호접몽처럼 새롭고도 신비한 시간들이었다. ‘빈 집 마당켠 기운 한낮의 외로운 그늘 한 뼘일까’ 하고 어두운 눈을 뜬 건 그 선생님 덕분이다. 그 이후 한 번도 찾아 뵌 적 없지만 부인 할 수 없는 내 인생의 스승, 김정란 선생님.

  그리고 또 한 분의 선생님, 자꾸만 삐뚤어지고 싶은 무렵에 옆 반 담임이면서도 지켜보아주고 격려해주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세계를 바라보는 수평적 시선을 갖게 만들어준 김복순 선생님.

  시를 알게 하고 삶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어 준 손세실리아 선생님. 그분들과 책에서 만난 무수한 스승들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도록 손잡아 주었다, ‘그 앞에 고요히 무릎 꿇고 싶은 날들 있었다’ 고 생각하면서 살게 되었으니 고맙고도 고마운 일이다.

 

내 하늘 한켠에 오래 머물다

새 하나

떠난다

 

힘없이 구부려 모았을

붉은 발가락들

흰 이마

 

세상 떠난 이가 남기고 간

단정한 글씨 같다

하늘이 휑뎅그렁 비었구나

 

뒤축 무너진 헌 구두나 물고

나는 또 쓸데없이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늙어가겠지

                          때늦은 사랑- 전문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아무리 자주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매번 서투르고 처음처럼 어설프고 황망하고 우왕좌왕이다.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었어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다고 큰 소리쳤어도 달라지진 않았다. 만감이 교차한다는 표현은 이런 때 쓰는 모양이다. 그 여름 이후 여차저차한 일들이 일어났고, 겪었고, 여전히 거쳐가는중이다. 변화는 두렵기도하고 기대되기도 한다. 가끔은 지칠 때도 있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에겐 시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 것이냐. 시가 있어, 지나간 시절을 위로 받고 지나간 시간에서 겸손해지고, 이미 지나버린 사람들이 그리움으로 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혹독한 여름을 어찌 지나나 싶으면 문득 가을이 와 있듯이........ 겨울이 지나고 해가 바뀌고 우린 이렇게 살아간다. 비록 가난하고 힘없어도, 나의 하루, 하루는 거룩한 것이라 믿으면서.

 

사람 사는 일 그러하지요

 

한 세월 저무는 일 그러하지요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못하고

 

저물녘 봄날 골목을

 

빈 손만 부비며 돌아옵니다.

                               춘곤- 전문​

  그런 봄이 머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지금처럼 치열하게 살아 갈 것이다.​ '빈 손만 부비며' 돌아갈지 몰라도 삶은 여전하다. 새 봄의 희망처럼 새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가 다시 곁에 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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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31 20: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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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1 00: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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