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빗방울이 흩뿌린 탓일까?

이른 시각, 단체 예약 손님을 ​치르고 나서는 종일 조용한 토요일이다.

구불구불, 좁은도로도 오늘은 휑하다.

다들 어디로 달려갔을까​?

캠핑장을 향해,

족구장을 향해,

가족들과의 저녁을 향해,

줄줄줄 달려가던 이들의 행방이 궁금하다. ​

서창으로 우거진 나뭇잎​들 사이로 기운을 잃어가는 햇살만 무성한 저녁

어쩌다 한번씩 펴들어도 흡족해지는

김사인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에 코를 박는다.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한 서민의 [집 나간 책]은 점점 흥미진진한데

아끼고 싶어 한 꼭지씩 읽는다.

여운이 강렬한 책이다. ​

<무지에서 살아남기>가 아니라

<무지에서 깨우치기>중이라 숨고르기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자고로 리​뷰는 이 정도래야 리뷰지,

혼자 끄덕끄덕.

흔적도 없이 드나드는 몇몇 서재의 알라디너들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고 있다.

무서울만큼 예리하고 소박할만큼 따스한 시선들,

아직 세상이 살만한 이유는 이런 빛나는 존재들 때문이리라.

마지막 페이지까지 실망시키지 않으리란 예감에 더욱 ​든든하다.

<선운사 풍천장어집>을 유월의 시로 찜하고

<중과부적>에서 이미 무거운 몸무게에 무게를 더하고

<무릎 꿇다>에 무릎이 꿇린다.​

이렇게

한 세상을​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조용한 토요일 저녁이다.

'저무는 일의 저 무욕​

고개 숙이는 능선과 풀잎들 곁에서​

별빛 총총해질​ 때까지'

 

 

무릎 꿇다

​               김사인

 

뭔가 잃은 듯 허전한 계절입니다.

나무와 흙과 바람이 잘 말라 까슬합니다.

죽기 좋은 날이구나

옛 어른들처럼 찬탄하고 싶습니다.

방천에 넌 광목처럼

못다 한 욕망들도 잘 바래겠습니다.

고요한 곳으로 가

무릎 꿇고 싶습니다.

흘러온 철부지의 삶을 뉘우치고

마른 나뭇잎 곁에서

죄 되지 않는 무엇으로 있고 싶습니다

저무는 일의 저 무욕

고개 숙이는 능선과 풀잎들 곁에서.

별빛 총총해질 때까지

 

 

중과부적​(重寡不敵)

조카 학비 몇푼 거드니 아이들 등록금이 빠듯하다.

마을금고 이자는 이쪽 카드로 빌려 내고

이쪽은 저쪽 카드로 돌려 막는다. 막자

시골 노인들 팔순 오고 며칠 지나

관절염으로 장모 입원하신다. 다시

자동차세와 통신요금 내고

은행카드 대출할부굼 막고 있는데

오래 고생하던 고모 부고 온다. 문상

마치고 막 들어서자

처남 부도나서 집 넘어갔다고

아내 운다.

'젓가락은 두자루, 펜은 한자루 ​...... 중과부적!'*

이라 적고 마치려는데,

다시 주차공간미확보 과태료 날아오고

치과 다녀온 딸아이가 이를 세개나 빼야 한다며 울상이다.

철렁하여 또 얼마냐 물으니

제가 어떻게 아느냐고 성을 낸다.

*미루야마 모보루 [루쉰(魯迅)​]에서 빌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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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꽃
               나희덕

꽃만 따먹으며 왔다

또옥, 또옥, 손으로 훑은 꽃들도
광주리를 채우고, 사흘도
가지 못할 향기에 취해 여기까지 왔다

치명적으로 다치지 않고
허기도 없이 말의 꽃을 꺾었다

시든 나무들은 말한다
어떤 황홀함도, 어떤 비참함도
다시 불러올 수 없다고

뿌리를 드러낸 나무 앞에
며칠째 앉아 있다
헛뿌리처럼 남아 있는 몇 마디가 웅성거리고
그 앞을 지나는 발바닥이 아프다
어떤 새도 저 나무에 앉지 않는다​
                         시집[야생사과 (창비2009)]중에서​



꽃은 나무의 존재증명이라는 생각을
꽃 핀 나무를 보면서 하게 됩니다.
잎만 무성하거나 비어있을 때의 나무에게는
이름이 궁금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말의 꽃’은 말의 존재증명이 되는 건가요.
달콤한 말의 향기에 취해 또옥, 또옥, 말을 따먹으며 살다가
시인은 문득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고 말았군요.
‘헛뿌리처럼 남아 있는 몇 마디가 웅성거리고

/그 앞을 지나는 발바닥이 아프다/어떤 새도 저 나무에 앉지 않는다’
마지막 연에서 주춤주춤, 독자인 저는 반성합니다.
`어떤 새도 저 나무에 앉지 않는다`니
오래 뿌리를 드러 낸 나무 앞에서 서성이는 기분이 드는 것이​
저 또한 구업(口業​)을 많이 쌓은 듯 합니다.
‘치명적으로 다치지 않고/허기도 없이 말의 꽃을 꺾’은
상처받은 누군가 있다면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말은 곧 그 사람의 존재증명이네요.
상대에게 꽃으로 피어나는 말을 많이 해야 스스로 꽃이 되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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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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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우
                    이문재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2014)] 중에서

짧은 시 한 편에 순간, 찌릿~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누구랄 것 없이 어떤 경우 속의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그대는 지금, 어떤 경우를 지나는지요?​
또 저는 지금
어떤 경우를 지나가고 있을까요?
?
? ​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
이라는 사실에 살풋 위로가 됩니다.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제가 바로 한 세상이라는 것을.
여기 `콩콩두부家`에 머무시는 그대,
부디 잊지 마십시오.
당신은 이세상의 주인공이고
온 우주의 중심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어떤 경우’에도 콩콩두부家, 저희는 처음의 마음,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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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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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바로 지금

알라딘에서 책이 일주일 만에 배송되었다.

노란 세월호 1주기 키링을 들여다 보고

펴든 이문재시인의 신작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십 년만에 상재한 시집답게 첫 편 '사막에'부터 뭉클하다.

'어떤 경우'에서 무릎을 꺾는다.

바로 옮겨 적고 싶게 만든다.

하여~ 마음이 바쁜 영업 시간중에 농땡이질이다.

이런 시집을 읽고 시치미 떼는 것은 도리가 아닐 것이라 애써 변명하면서.

 

 

사막에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어떤 경우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오래된 기도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보름

 

보름달은 온몸으로

태양을 정면한다.

자기를 가장 크게 하고

해를 쏘아본다.

등 돌리지 않고

어둠 한 가운데서

어둠의 한 가운데가 된다.

 

 

봄날

 

대학 본관 앞

부아앙 좌회전하던 철가방이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저런 오토바이가 넘어질 뻔했다.

청년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막 벙글기 시작한 목련꽃을 찍는다.

 

아예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아래에서 찰칵 옆에서 찰칵

두어걸음 뒤로 물러나 찰칵찰칵

백목련 사진을 급히 배달할 데가 있을 것이다.

부아앙 철가방이 정문쪽으로 튀어나간다. 

 

계란탕처럼 순한

봄날 이른 저녁이다.

 

 

봄 편지

 

사월의 귀밑머리가 젖어 있다.

밤새 봄비가 다녀가신 모양이다.

연한 초록

잠깐 당신을 생각했다.

 

떨어지는 꽃잎과

새로 나오는 이파리가

비교적 잘 헤어지고 있다.

 

접이우산 접고 

정오를 건너가는데 

봄비 그친 세상 속으로 

라일락 향기가 한 칸 더 밝아진다.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으려다 말았다.

 

미간이 순해진다.

멀리 있던 것들이  

어느새 가까이 와 있다.

 

저녁까지 혼자 걸어도

유월의 맨 앞까지 혼자 걸어도

오른켠이 허전하지 않을 것 같다.

 

당신의 오른켠도 연일 안녕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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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나무 정류장 창비시선 338
박성우 지음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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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           박성우

 

괜찮아, 바닥을 보여줘도 괜찮아

나도 그대에게 바닥을 보여줄게, 악수

우린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위로하고 위로받았던가

그대의 바닥과 나의 바닥, 손바닥

괜찮아, 처음엔 다 서툴고 떨려

처음이 아니어서 능숙해도 괜찮아

그대와 나는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핥았던가

아, 달콤한 바닥이여, 혓바닥

괜찮아, 냄새가 나면 좀 어때

그대 바닥을 내밀어봐,

냄새나는 바닥을 내가 닦아줄게

그대와 내가 마주앉아 씻어주던 바닥, 발바닥

그래, 우리 몸엔 세 개의 바닥이 있지 

손바닥과 혓바닥과 발바닥,

이 세 바닥을 죄 보여주고 감쌀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겠지 

                  시집[자두나무 정류장(창비2011)] 중에서

손바닥, 혓바닥과 발바닥.

우리는 바닥을 가졌군요.

가진지도 모른 채, 무심코 끌고 다닌 바닥들이

위 로, 위로만 향하던 마음들을 일시에 물립니다.

바닥을 쳐보아야 다시 올라갈 힘을 얻는다 했던가요?

다시, 올라가야겠지요.

꽃들,

저 홀로 피었다 홀로 스러지는,

환장하게 아름다워서 서러운 봄 날,

깊고 깊은 바닥의 금들을 봅니다.

괜찮아, 괜찮아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의 위로가 다정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괜.

찮.

다.

당신께도 엎드려 절!!!

 

 

배꼽

​              

살구꽃 자리에는 살구꽃비

자두꽃 자리에는 자두꽃비

복사꽃 자리에는 복사꽃비

아그배꽃 자리에는 아그배꽃비 온다

분홍 하양 분홍 하양 하냥다짐 온다

살구꽃비는 살구배꼽

자두꽃비는 자두배꼽

복사꽃비는 복숭배꼽

아그배꽃비는 아기배꼽 달고 간다

아내랑 아기랑

배꼽마당에 나와 배꼽비 본다

꽃비 배꼽 본다​

​                                      

 

목젖

평소엔 그냥 목젖이었다가

내가 목놓아 울 때​

나에게 젖을 물려주는 젖

젖도 안 나오는 젖

같은 젖,

허나 쪽쪽 빨다보면

울음이 죄 삼켜지는 젖

무에 그리 슬프더냐, 나중에

나중에 내가

가장 깊고 긴 잠에 들어야 할 때

꼬옥 물고 자장자장 잠들라고

엄마가 진즉에 물려준 젖

 

     

 

 

이번 달은 박성우시인.

그런데

 [가뜬한 잠]을 찾다, 찾다 못 찾아서

결국은 

[자두나무 정류장]이 되었는데

그 시집은 어디로 갔을까?

누구에게 선물한 것 같지도 않고

어디로 가버린 걸까? 

사라진 [가뜬한 잠]

때문에 잠이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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