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시선 237
김태정 지음 / 창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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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드들강

                                 김태정

울어매 생전의 소원처럼 새가 되었을까
새라도 깨끗한 물가에 사는 물새가

물새가 울음을 떨어뜨리며 날아가자
바람 불고 강물에 잔주름 진다
슬픔은 한 빛으로 날아오르는 거
그래, 가끔은 강물도 흔들리는 어깨를
보일 때가 있지
오늘같이 춥고 떨리는 저녁이면
딸꾹질을 하듯 꾹꾹 슬픔을 씹어 삼키는,
울음은 속울음이어야 하지 울어매처럼
저 홀로 듣는 저의 울음소린
바흐의 무반주첼로곡만큼 낮고 고독한 거
아니아니 뒤란에서 저 홀로 익어가는
간장맨치로 된장맨치로 톱톱하니
은근하니 맛깔스러운 거

강 건너 들판에서 매포한 연기 건너온다
이맘때쯤 눈물은
뜨락에 널어놓은 태양초처럼
매움하니 알큰하니 빠알가니
한세상 슬픔의 속내, 도란도란 익어가는데
강은 얼마나 많은 울음소릴 감추고 있는지
저 춥고 떨리는 물무늬 다 헤아릴 길 없는데
출렁이는 어깨 다독여주듯
두터워지는 산그늘이나 한자락
기일게 끌어당겨 덮어주고는
나도 그만 강 건너 불빛 속으로 돌아가야 할까부다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 2004)]중에서

 

 

 

 

 

 

 

 

 

 

강...
드들강.
태풍이 지나간,
유년의 강변에서 촉촉한 비를 맞았다.
사라지고 없는 것들.
.

.

.

오래 오래 들여다 보고
찬찬히 걸었던 시간...

출렁출렁 흘러간다.

흘러서 흘러서 간다.
그렇게 가을을 향해간다.
지구의 시간도
생의 시간도 

                                   이천십사년 팔월 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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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8-06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들강이 어딘지는 몰라도, 시인이 강물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들은 금새라도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지네요.
비가 내리는 강과 그 주변의 들판길들도 시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듯해요...

마치 제가 살았던 고향의 그 익숙한 강변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들구요..
(제가 태어나서 군대에 입대할 때까지 살았던 고향집은 1984년에 부모님께서 서울로 이사하시면서 팔았는데, 지금도 그 때 집을 샀던 가족들이 옛 집을 고스란히 보존한 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답니다. 덕분에 해마다 두세 번씩 고향에 갈 때마다 그 옛날 살던 고향집은 꼭 둘러보고 오지요...)

2014-08-07 00:24   좋아요 0 | URL
오렌님~! 저의 드들강은 영산강 유역인데 능주, 도곡을 지나 남평의 중심을 흐르고 영산포로 향하지요.
그 강변 곁에서 살았고 많은 시간을 그 뚝길에서 보냈어요.
ㅎ~저를 키운 팔할은 드들강과 뚝길이라지요.

김태정시인은 단 한 권의 시집만을 남기고 2011년 49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답니다.
시인의 애틋한 삶도 애절한 시도 그 곳에 서면 저를 추억에 잠기게 만들어요.
이번에 갔더니 옛집이 없어져버렸더군요. 갈 때마다 주변이 많이 변하기는 했어도.
쓸쓸함이라니~
돌아오는 길이 그래서 발걸음 무거웠지만...
세월이 그렇지요.
광주의 위성도시가 되어가는 중이니 점점 모습을 잃어가겠지요.

오렌님의 고향행은 정겹겠어요.^^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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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늦은 저녁 나는

                                  한강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 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시집[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중에서


한강의 소설들을 읽다가
문득 시집을 읽는다
누가 그랬던가
한강은 소설만 썼으면한다고
격하게 동감! !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단 말이지
그래도
그래도 좋다

오늘 하늘은 종일 예술이었다
그 절정을 오롯하게 즐겼다
충분하다
이소라의 눈썹달을 종일들었다
넘치게 좋다
그것만으로도
땀쯤이야
더위쯤이야
곧 수그러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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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남자의 책’

  달달한 연애 소설이려니 했다. 마침 달달한 책이 읽고 싶었고.

  “그날, 나는 그 남자의 책을 훔쳤다.” 로 시작되는 첫 문장부터 앤디 워홀의 표지 그림도 그 기대치를 배가 시켜주었다. 오랫동안 나에게 함정임은 작가 개인으로보다는 김소진의 그녀로 박제화 되어있었다. 그 동년배의 작가들, 특히 여류라 호칭할 작가군단의 글들을 거의 섭렵했음에도 그녀를 아직 만나지 못한 이유는 그러함일 것이다. 분명 소설가로 알고 있기는 한데 작년 겨울에 제주 여행길에서 읽은 ‘소설가의 여행법’이 그녀의 첫 책이었다.

  김화영이 ‘여름의 묘약’이나 ‘행복의 충격’에서 이미 시도한 여행 방식이기는 하지만 한번쯤 해보고 싶은 근사한 여정들이었고 그녀의 해박함과 소설 속의 주인공을 찾아서 작가의 행적을 따라가는 그녀의 글들은 좋았다. 그런 글은 워낙 내 취향이기도 했고 짧지 않은 분량임에도 좁은 가방에 며칠 들고 다녀서 오래된 책 꼴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두 번째인 ‘내 남자의 책’.

  뿔(웅진출판사)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정가 12,000원 짜리 단행본을 3,600원 하기에 냉큼 사고 작가에게, 출판사에게 많이 미안해서 부지런히 읽었다. 알라딘에서 대폭할인 중인 많은 책들이 웅진이거나 뿔인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중고보다 더 헐한 값으로 사서 무슨 횡재라도 한 것처럼 좋기도 하지만 뒤통수가 따갑고 찜찜한 것은 무슨 심리인지 잘 모르겠다. 암튼 출판계의 불황이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잘 극복해 나갔으면 좋겠다. 결국은 많은 책을 사야 한다는 말이지만 안 읽고 쌓인 책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각설하고, 소설은 무겁고 복잡하고 난해했다.

  그날, 그 남자의 책이 내 마음을 훔쳐 달아났다! 존재자체가 예술이 된 잔혹극 창시자 ‘앙토냉 아르토’, 그의 광기를 좇는 ‘나’와 ‘동주’ 지금 살아 숨 쉬는 또 다른 예술가들 …, 광기 어린 우리들 삶을 ‘소설’로 끌어안은 영화 같은 이야기. 라고 뒤표지는 말하고 있고 호기심은 증폭 되었으나 200페이지 남짓의 책을 덮고 났을 때는 머릿속이 뒤죽박죽 했다.

  ‘앙토냉 아르토’에서 시작한 인물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장 뤽 고다르’, ‘베케트’, ‘오스카 와일드’, ‘반 고흐’, ‘제임스 조이스’, ‘로버트 플래허티’, ‘디카프리오’, ‘타이타닉호의 마지막 생존자’, ‘예이츠’, ‘유진 오닐’, ‘마르그리트 뒤라스’, ‘오르한 파묵’, ‘장 주네’, ‘사르트르’, ‘폴 테브냉’, ‘자크 데리다’, ‘아르토 파실린나’, ‘릴케’, ‘마르셀 뒤샹’, ‘로뎅’, ‘발자크’, ‘에드워드 호퍼’, ‘로스코’, ‘백남준’, ‘수전 손택’, ‘폴 오스터’, ‘9·11’, ‘조너선 사포란’, ‘비틀즈’, ‘랭보’, ‘짐 모리슨’ ‘루벤스의 한국 남자’, ‘이오네스코’, ‘김지하’까지다. 더러 빼먹은 몇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장소들이라니. ‘소설가의 여행법’ 속의 작가들과 그 장소들이 대거 등장했고 옮겨 다녔다. ‘앙토냉 아르토’라는 노마드족인 인물의 행적을 좇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전체적으로 산만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소설가의 여행법’ 속에다 몇 몇 주인공을 섞어 놓은 듯 했다. 물론 그렇다고 잡탕은 아니다. 논픽션을 가장한 픽션 같은, 주인공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보이는 풍경들이다. 그런데 임현준의 목소리나 시선이 아니라 함정임의 시선으로 읽힌다는 것이 소설에 몰입하는데 내내 방해가 된다. 정작 소설의 주인공들은 좀 우물쭈물 마무리 된 듯도 하다. 끝까지 남는 물음, 그녀의 첫 사랑 경후는 어쩌다 세상을 떠난 것일까? 소설 속에서 꽤 중요하고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인데 도무지 유추해낼 수가 없다. 미치지 않았다는 아버지 임인영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미궁으로 몰고 가기엔 서사가 약하다. 아니면 읽어 낼 눈을 갖지 못한 탓일 게다. ‘존재자체가 예술이 된’을 읽어 내지 못하는.

  아직 내게는 김소진의 그녀를 뛰어 넘을 뭔가는 부족하다. 그녀의 다른 소설을 한 번 더 읽어야할 듯싶다.

 

 

  ...항구도시 피레에프스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났다. 나는 그때 항구에서 크레타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바다, 가을의 따사로움, 빛에 씻긴 섬, 영원한 나신裸身 그리스 위에 투명한 너울처럼 내리는 상쾌한 비. 나는 생각했다. 죽기 전에 에게해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죽기 전에는 읽으리라 마음먹은 소설들이 있다. 너무 유명해서 읽기도 전에 내용을 거의 알아버린 소설들, 예를 들면 호메로스의 거대 서사시 <오딧세이아>,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과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스탕달의 <적과 흑>, 귀스타브 플로베리의 <마담 보바리>,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 그리고 니코스 카잔차치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우리는 호메로스에 의해 고대 그리스와 그 사람들을, 보카치오와 단테에 의해 14세기 이탈리와 그 사람들을, 스탕달과 플로베르에 의해 19세기 중반 프랑스와 그 사람들을,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19세기 말 러시아와 러시아 사람들을, 그리고 카잔차키스를 통해 20세기 그리스와 그리스 사람들을 비로소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그리스란, 20세기를 거쳐 현대의 그리스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러니까 그 주인공 조르바를 통하지 않고는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조르바란 누구인가.   ...함정임, 소설가의 여행법 p53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들이 내려와 산다…….” 세계적인 알베르 카뮈 전공자 김화영은 이 한 문장에 매료되어 카뮈 연구를 시작했음을 토로하지 않았던가. 진정 나는 확인하고 싶었다. 신들이 내려와 사는 곳, 그곳은 도대체 어떤 형상일까. 부르조아 계층의 사르트르와는 달리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극빈층 출신인 카뮈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린 것은 그가 유년기를 보낸 알제리 타파사의 바람과 태양과 돌과 꽃, 루르마랭에 가면 타파사를 느낄 수 있을까. 내 눈은 드넓은 고원의 올리브 나무 군락과 사이프러스 나무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훑고 지나갔다. 로리 마을을 지나자 도로 표지판에 루르마랭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그 순간 나는 마치 카뮈의 모습이라도 본 듯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태양을 좇아 달려온 길, 나는 뛰는 가슴을 누그러뜨리며 카뮈의 문학을 키워준 팔 할, 그의 고향 예찬 <티파사에서의 봄>을 나직이 읊조렸다.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덩이 속에서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어떤 시간에는 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두 눈으로 그 무엇인가를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이란 속눈썹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뿐이다.       ....알베르 카뮈, <티파사에서의 결혼>

  이보다 더 아름다운 문장을 앞으로 나는 만날 수 있을까. 작가는 글을 쓰는 것을 천직이자 업으로 살아가지만, 모든 작가가 미문을 구사하는 것은 아니다. 미문, 즉 아름다운 산문을 쓰는 작가로 한국의 이효석과 프랑스의 알베르 카뮈를 꼽는데,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과 카뮈의 <결혼> 연작을 읽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한 작가의 혼이 깃든 문장은 마음을 부드럽게 순화해주는 보편적인 힘을 지닌 동시에 심미안을 열어주는 충격을 던진다. ‘어떤 시간에는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이 카뮈의 문장으로 나는 자연의 이치와 세상의 겉과 속을 보다 명료하게 볼 수 있었는데, 현현顯現의 세계가 그것이다. 너무 강한 빛 속에, 또는 너무 깜깜한 어둠 속에 들어가면, 분간할 수 없이 먹먹해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사물의 형체가 명료하게 눈에 잡히는 순간이 온다. 복잡하게 얽힌 사태의 핵심이 오롯이 잡히는 순간, 또는 한 편의 작품이 거느린 상이 문득 파악되는 순간이 그것이다.   ...함정임, 소설가의 여행법 p146~149

 

 

  이것은 라틴아메리카의 특수한 사회, 역사, 문화적인 성격을 전제하지 않았을 때 도출되는 자연스러운 반응들이다. 실패한 혁명가의 은둔지로서의 페루(<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수백 명의 총을 든 유럽 제국주의자들(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 수많은 원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내어주어야 했던 라틴아메리카의 비참한 현실(페루,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등의 20여 개의 국가들), 이질적인 세계(가톨릭)를 강제로 몸과 영혼 속 깊이 받아들이며 살아남은 사람들의 비현실적 사고 체계와 삶의 양상…….

  한마디로 라틴아메리카적인 특성은 외압에 무너진 슬픈 역사가 빚어낸 ‘이질혼종’의 난투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질혼종이 소설과 만나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이 탄생하고, 요사의 총체적 환상이 펼쳐지며 코엘료의 빛나는 연금술이 생성된 것이다. 21세기의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방위적인 혼종성hybrism(또는 convergence)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고 있음은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문학의, 나아가 인류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지금, 그 중심에 요사가 있고, 소설의 다른 이름으로 ‘페루’가 새롭게 호명되고 있는 것이다. ...함정임, 소설가의 여행법 p175

 

 

  에르노는, 내가 아는 한, 사랑의 상실을 폭력으로 여기며 그 폭력과의 싸움을 글쓰기, 혹은 소설로 영원화하는 최초의 작가이다. 이 때 에르노의 사랑은 단순히 개인사적 기록이 아닌 ‘에르노적 글쓰기’라는 독자적인 영역에서 다시 태어난다.

  세상에 질투 없는 사랑, 죄(의식) 없는 사랑, 두려움 없는 사랑, 번민 없는 사랑, 상처 없는 사랑, 이별 없는 사랑, 절망 없는 사랑이 있겠는가. 보통 사람들이 친구를 붙잡고 답답한 사랑, 쓰라린 마음을 고백하고 용기를 얻고 포기하고 위로받는다면, 나는 서가든 묘지든, 작가들을 찾는다. 체험적 글쓰기, 특히 사랑을 소설화하기에 용감했던 뒤라스와 에르노를 찾곤 한다. 뒤라스와 에르노, 그들은 사랑에서 욕망에서 고통에서 쾌락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글쓰기에서 작가의 한계치를 넓힌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글쓰기의 영역을 확장시킨 사랑의 전사戰士들이기 때문에       ...함정임, 소설가의 여행법 p351

 

 

  국내에 출판 되어 있는 ‘아니 에르노’의 전작을 봄에 읽었다. 독특하고 강렬했다. 그녀의 책들을 묶어 따로 페이퍼를 써야지 써야지하고 미뤄두고 있는데 소설가의 여행법에서 마지막을 장식한 이 글을 옮기고 보니 다시 의욕이 생긴다. 조만간에 시작해야겠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책상에 쌓인 읽고 싶은 책들이 발목을 잡고 있기는 하지만. 아, 그녀의 ‘탐닉’은 못 읽었다.

  글을 옮겨 적느라 소설가의 여행법의 접힌 부분들을 펼치면서 자신의 글을 인용한 대목들도 있었다. 그때는 왜 그걸 몰랐지. 그 부분들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 그녀의 소설은 그녀가 찾아 갔던 길을 다시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그녀는 2011년 말에 ‘내 남자의 책’을 출간했고 2012년 초에 ‘소설가의 여행법’을 출간했으니 비슷한 기간, 비슷한 간극사이에 읽은 내 느낌도 무리는 아니구나 싶다.

  특히 그와의 관계를 지속시켜주는 아르토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만남과 헤어짐이 매번 가슴 떨림으로 이루어지는 열차 역이라는 공간의 특수성 또한 한몫하고 있었다. 서영은 나의 이런 상태를 중독이라 부르며 언제까지 길 위의 연인처럼 살 수는 없을 거라고 보다 현실적인 관계를 권유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거리가 주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오히려 나를 그에게 묶어주었고, 그가 부산에 떨어져 있는 것이 특별한 배려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경후처럼 존재 자체가 이 지구에서 아예 사라져버리지만 않는다면, 형식이야 어떻든 괜찮았다.

  삶에는 작지만 중요한 순간들이 있었다. 워즈워스는 그것을 시간의 점이라고 말했고, 나는 초고속 열차를 통해 그 시간, 아니 속도의 점을 삶의 중요한 순간으로 사용했다. 나는 서울역에서, 그는 부산역에서 출발해 우리는 천안역, 대전역, 동대구역은 물론 심지어 부산 직전의 밀양역과 구포역에서 만나는 짜릿함을 기꺼이 즐기고 있었다. 서로 출발할 수 있는 시간에 열차를 타서는 어느 역이 되든 만나는 지점에 잠시 내려 한 두시간 함께 있다가 그는 부산으로 나는 서울로 향하기도 했다. ...함정임의 ‘내 남자의 책' p92 부분을 읽으면 내가 왜 작가와 소설 속 주인공의 시선을 혼동하는지 알 수 있을 만큼 둘은 뼛속까지 유목민인 것이다. 함정임은 임현준이고 임현준은 함정임인 소설로 이해하니 비로소 윤곽이 또렷해진다. 달달하지는 않지만 연애 소설의 매개체가 된 많은 이들의 거론이 유쾌하다. 그 또한 내 오역誤譯이더라도.

 

 

  책속에 등장하는 ‘아르토 파실린나’의 [기발한 자살 여행]을 읽었다. 이 책 또한 한비야의 추천으로 꽤 오래 묵혀 두었는데, 몇 번 시작하다가 말다가 결국 이번에 마쳤다. 이렇게 기발하고 유머러스하고 희열이 차오르는 책을 그토록 오래 방기했다는 사실이 스스로에게 한심 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얼마나 편협한 독서를 하고 있는 것이냐, 넌? 이런 물음이 끝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핀란드 사람들의 가장 고약한 적은 우울증이다. 비애, 한없는 무관심, 우울증이 이 불행한 민족을 짓누른다. 천 년의 세월동안 이 땅의 사람들은 우울증에 굴복당했으며, 그들의 영혼은 음울하고 진지하다. 그 결과는 아주 파괴적이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곤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죽음뿐이라고 생각한다. 암울한 마음은 과거의 소련연방보다도 더 심각한 적이다. 그러나 핀란드인들은 투사의 종족이다. 절대로 굴복하는 법이 없으며, 끝까지 폭군에 저항한다. 로 시작되는 이 책 한 권을 통해 핀란드라는 머나먼 나라와 연결 되었으며 알지 못하는 우울한 그들과 화주 한 병을 나눌 수 있을 것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소설의 힘인지 문화의 힘인지, 단순히 작가의 힘인지 모르겠지만 관심사를 공유한다는 것이 아마도 그렇게 만들 것이다. ‘아르토 파실린나’는 1942년 핀란드 북부의 라플란드 키틸래에서 태어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키틸래 마을을 지나는 트럭 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독일군을 피해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거쳐 라플란드로 도망치던 중이었다. (나는 유년기 초기에 네 나라를 경험했다. 도망은 늘 내 글에 등장하는 소재이다-아르토 파실린나). 경찰관이었던 아버지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어머니는 허름한 농장에 여덟 자녀와 홀로 남았다. 핀란드어로 ‘돌로 세운 요새’라는 뜻을 지닌 ‘파실린나’라는 이름은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것이다.

  처음에는 벌목 인부로, 그 후 신문기자로 활동하다 작가가 된 파실린나는 열다섯 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지금까지 40여 권의 책을 출간했다. 어려서부터 벌목일이나 농사를 포함해 여러 직업을 전전한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숲에서 일하면서 땅을 일구고, 나무를 자르고, 고기를 잡고, 사냥을 했다. 그때의 경험들이 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러다 신문기자가 되면서 도시로 나와 살게 되었다. 신문기자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주제의 수많은 기사들을 작성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글쓰기 훈련의 시기였던 것 같다.”

  책 날개에서 작가 소개를 옮겨 적는다. 이 내용만 보아도 ‘파실린나’라는 작가의 면모를 알 수 있다.

  바람 한 점 없는 한 밤중에 혼자 앉아서 낄낄대다가 울컥하는 마음으로 책을 내려놓는다. 이런 여행이라면 자살단 일원이 되어 유럽 대륙을 누비고 싶다는 소망이 생긴다. 켐파이넨 대령과 온니 렐로넨은 전 세계인을 상대로 그런 자살단을 꾸릴 생각은 없는 것일까? 얼른 지원할 텐데. 삶의 소중함을 알아 버렸으니 그럴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란 사실이 못내 아쉽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때로는 삐딱하지만 거침없는 파실린나의 문장들이 삶의 희망를 다시금 부여한다. 우리에게도 지금, 바로 지금 꼭 필요한 책이다.  책 속으로, 저자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만큼 현실 도피는 없는 것 같다. 더위도, 살아가는 일의 고민 따위도 별 거 아닌 것처럼 시시하게 느껴진다. 잠시 세상으로부터, 자신으로부터, 또 그 무엇인가로부터 홀가분하게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쉼이 책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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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 전차 창비시선 264
손택수 지음 / 창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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放心

                               손택수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
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시집[목련 전차(창비2006)]중에서

 

 


갑자기 손택수가 읽고 싶었어요

며칠 딱딱한 책들만 읽은 탓인지,
오랫만인데 좋으네요
숨구멍을 확 열어젖히 듯
어쩐일인지 근간인 나무의 수사학 보다 목련 전차를 더 자주 펴게 되네요
방심의 시간이 흘러 가고 있어요
나쁘지 않아요^^
근데 그 많던 제비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가끔, 어쩌다 한 번이라도 사라져 버린 것들에 대해 골똘해 보겠다고
세월호 이후 마음먹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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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루츠 판 다이크 지음, 데니스 도에 타마클로에 그림, 안인희 옮김

웅진 지식하우스(2009)

 

인간은 우리의 첫 번째 조건이다. 인간이 우리의 척도를 결정한다. 

…….

자기 역사와의 만남을 거부하거나 독자적인 것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민족, 그런 나라는 이미 끝장난 것이고 박물관에나 들어가야 한다.

아프리카 남자와 여자는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보고 벌써 끝장나지는 않는다. 그들이

말하게 해보라. 무엇보다도 그들이 행동하게 해보라. 효모가 작용하는 것처럼,

그들이 자신들의 메시지를 갖고서 우주의 문명을 만드는 것에 동참하게 해보라.

세네갈이 독립하기 1년 전인 1959년에 세네갈의 초대

대통령이 된 시인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 (1906~2001)

 

  이 책을 추천한 이가 한비야 선생이었을까. 월드비전 난민캠프 지도자 생활을 진행하면서 했던 지식인의 서재로. 탁월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정말 아프리카를 알고 있었을까? 적어도 나는 아프리카를 몰랐다. 알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우리와는 너무나 먼 대륙은 그저 단편적인 지식과 언론에 기대어 아는 정보들. 아마존 밀림이나 케냐의 동물보호구역, 헤밍웨이와 칼리만자로, 체의 평전으로 알게 된 각각의 나라이름들, 내전과 가뭄에 의한 오랜 굶주림, 소년병들의 참혹함정도.

  좋아하는 배우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나온 아름다운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낭만과 배경으로서의 아프리카, 아저씨 필이 나기 시작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나온 ‘블러드 다이아몬드’에서 시에라리온의 소년병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르완다 내전을 다룬 ‘호텔 르완다’를 통해 만난 것들, 넬슨 만델라로 대표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이웃이 낸 책 ‘블랙 러브’로, 일 때문에 일 년의 반을 거기서 지내는 민희를 제주 올레에서 만난 이후로 더욱 친근한 나라가 되었지만 그 정도가 내가 아는 아프리카였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여전히 전체 역사를 알지는 못해도 나처럼 무지한 사람에게도, 그곳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 사는 대륙이란 것을, 그들이 가진 무한한 자원은 재앙이 되어버려 사람으로 살기는커녕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가는 것만도 어렵게 되어 버린 아프리카를 만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죽여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우린 오래 거기에 길들여져 왔다는 생각이 든다.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요즈음에 읽은 일련의 책들에서 더욱 골똘해지는 명제다. 자존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내가 속한 곳을 제대로 읽어낼 줄 아는 깊은 눈을 가져야 가능한 것이다. 태어난 곳을 선택할 수는 없으니 주어진 생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아프리카를 수박 겉핥기로 지나가는 것 같지만 그들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을 가진 작가의 마음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특히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 나오는 매력적인 인물 부르키나파소의 초대 대통령 ‘토마 상카라’를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고 그의 죽음이 그때보다 더욱 안타깝게 다가왔다. 한 사람의 뛰어난 지도자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혜택인지를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다시 그들에게, 아프리카 대륙에 토마 상카라나 넬슨 만델라 같은 지도자가 나타나주었으면 좋겠다.

 

 

 

 

 

 

 

 

 

 

 

 

 

 

  이스마엘 베아(그도 이젠 벌써 34살이 되었나, 1980년에 태어났으니)가 쓴 ‘집으로 가는 길’을 읽었을 때의 충격이 떠오른다. 그때는 감정적으로 읽혔던 내용들이 구체화되어 현실로 읽힌다. 현재 진행형인 소년병들, 우리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이야기 한다. 한 순간의 아픈 기억들도 일생동안 따라다니는 트라우마가 되는 것인데 그들의 상처는 가히 짐작조차 못하겠다.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상처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의 한심한 국가는 그 상처에 굵은 소금이나 뿌리고 있으니. 그것도 국산 천일염도 아니고 값싼 수입 소금으로 말이지. 어찌됐든 유병언은 죽었고, 아무런 권한도 없어 보이는 유대균은 잡혔는데 실권자들은 다 어디로 간 거지? 과연 유병언의 사체가 맞다 믿는 사람은 유능한 정부의 유능한 관리들 말고 또 누가 있을까? 또한 장정일식으로 말하자면 이쯤에서 그 사고에 관련된 책이 수십 종은 쏟아져 나와야 했을 터인데 우리가 가진 문화의 자산도 참으로 빈약하긴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다. 아, 옆길로 빠져서 신랄해지지 말자. 가만히 있으란 말이지.

 

 

  전 세계적으로 어른의 전쟁에서 희생되는 민간인 희생자 중에서 어린이와 청소년 희생자가 약 절반에 이른다. 아프리카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어린이 병사의 문제가 여기 덧붙여진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가장 어릴 경우 일곱 살이나 여덟 살까지 포함되는 전 세계 30만 명의 어린이 병사 중 약 12만 명이 아프리카에서 싸우고 있다. 어린이 병사 문제로 국제적으로 가장 심힌 비난을 받는 다섯 나라 중 네 나라가 아프리카에 있다.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콩고 민주 공화국, 부룬디 등이다. (2003년 통계)

  어린이들이 언제나 싸우도록 강요를 받는 것만은 아니다. 부모가 죽거나 실종된 다음, 아니면 자기들 눈에는 강하게 보이는 사회에서 더 나은 미래를 얻으려고 군대에 자원하는 어린이들도 적지 않다. 이들 ‘람보 키즈’ 상당수는 기습 공격에서 특히 더 잔인하게 행동한다. AK 47 기관총을 겨우 들 수 있는 정도의 아이들이 기술적으로 무기를 다루는 법을 배우면서 개인적인 감정이나 어린 영혼에 대한 동경이 맨 먼저 파괴된다. 전쟁에서 살아남아 회복 프로그램 과정을 거치는 어린이들에게 장래 가장 큰 소망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이 소박한 답변을 한다. “직장, 일자리, 먹을 것……. (p260)

  이제 좀 아프리카 역사인식에 가닥이 잡힌다.

  어느 역사에서든 특히 핍박받는 모든 역사에서 한 사람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파리 목숨 같은 것인지, 대의를 위해 소의는 어떻게 유린 되는지……, 쓰라리게도 인정해야만 하는 삶의 엄정함이다.

  남아프리카의 에이즈 환자 정치 조직체 ‘치료 활동 캠페인(TAC)의 공동 설립자인 자키 아크마트(1962~)는 2002년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세계 에이즈총회에 보낸 메시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가난하기 때문에, 우리가 검기 때문에, 우리가 여러분에게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 생명의 가치가 더 낮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p269)

  여전히 어느 곳인가 내전 중인 불행한 대륙, 불행한 아이들, 에이즈로 위태롭게 지나가는 목숨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징후는 곳곳에서 보인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길을 가고 있다. 책을 덮고 나니 그 희망에 기운이 난다.

  아프리카는 유럽의 문명보다 훨씬 더 먼저 존재했던 자기들의 문명의 기원을 자신감을 가지고 바라볼 이유가 충분하다. 유럽은 인류의 문화 발전이 이집트 이후 그리스와 로마 사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작된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늘날 이쪽 아니면 저쪽이 더 낫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오랫동안 유보되었던 진실을 위해서다. 가능한 한 과거를 완전히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대화에도 좋은 일이다. (p58)

 

  유럽 사람들은 자주 가장 부패한 아프리카 정치가들이 권좌에 오르도록 도움을 주었다. 겉으로는 ‘독립’이라는 깃발을 내걸었지만, 유럽 열강이나 그사이 끼어든 미국과 소련이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도록 꼭두각시 정권을 만드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런 다음에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일을 처리할’ 능력이 얼마나 적은지 실컷 조롱하였다. 이런 신제국주의 놀음을 꿰뚫어보고, 제국주의에서 공식적으로 해방된 이·후 외부에서 들어오는 경제적·정치적 영향에 항거한 사람들은 여러 번이나 체계적으로 억압을 당했고, 그것이 먹히지 않으면 자주 냉혹하게 살해되었다.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를 짓밟기 시작한 것은 500년도 더 전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서부 아프리카에 도착하면서 부터였다. (p106)

 

  위대한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지나갔다. 그리고 그것이 좋다. 여기서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저기서도 작동할 것이다. 아마도 당신이 귀를 기울이고 함께 생각할 경우에 말이다.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무조건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작은 문제를 위한 해결책을 찾는다면, 그래야만 당신은 강해지고 더 큰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 그 반대는 아니다.

  다시 안개가 덮이면 인내심을 보일 것. 당신 자신에 대해서(가장 어려운 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다시 안개가 걷히면 그리고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 누가 또는 무엇이 거기에 책임이 있는지를 단신이 이해하게 된다면.

  생각은 독립적일 수 있다. 다르게 되기가 어렵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서로에게서 독립적이고, 또 독립적으로 남는다. 전보다 더욱 많이. 아프리카와 유럽에서, 그리고 온 세계에서.  (p174)

  나는 사람들이 에이즈가 무슨 뜻인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보살펴주고 존중해주면 좋겠어요. 누군가가 병을 가지고 있어도, 그 사람을 건드리고 끌어안고 키스하고 손을 붙잡아주어도 에이즈가 옮지는 않아요.

  우리를 보살펴주고 받아들여주세요. 우리는 모두 인간입니다.

  우리는 아주 정상이에요. 우리는 두 손이 다 있고 두 발도 다 있습니다.

  우리는 걷고 말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똑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를 두려워하지 말아요. 우리도 똑같아요!

                                         2000년 7월 남아프리카 더반 에이즈 총회에서 은코시 존슨(1989~2001) (p273)

 

  지난 500년 동안 아프리카 민족들은 인류 역사에서 유일하다고 할 만한 여러 가지 굴욕을 겪었다. 노예 제도와 식민 지배는 파괴적인 흔적을 남겼다. 신(新)식민주의는 아직도 가장 고약한 황폐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증조할머니처럼 느낀다. 대개는 우리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들어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는 힘들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대화를 시작하는 대신, 우리에게도 중요한 가치를 함부로 옆으로 밀쳐낸다. 그래서 마치 할머니처럼 이따금 우리 입술에 미소가 얼어붙는다. 하지만 그것은 동경에 가득 차서 우리 가슴 속에 계속 살아남는다.

  루츠 판 다이크는 나와 같은 세대에 속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대륙에서 태어났다. 아주 뒷날 우리는 여행을 하고 두 세계를 체험할 특권을 가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가 우리 대륙의 역사를 쓸 권리를 가진단 말인가? 그의 책을 오래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 루츠 판 다이크는 아프리카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아주 조심스럽게 경청하기 때문에 그 권리를 스스로 얻었다고. 그는 이런 일을 정열적으로 행하여 독자들에게 아프리카나 유럽, 혹은 세계 어느 곳에 있든지 상관없이 똑같은 것을 한번 시도해보라고 격려해준다. 처음에 가장 낯설게 들리는 목소리라도 조심스럽게 귀 기울여 들으려는 노력을 더 해보라고 말이다.

  내 소원은 아프리카의 역사가 이 책에 씌이는 것처럼 씌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어려움과 기대가 현실적으로 서술되고 또한 우리의 강점도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프리카에 관한 많은 책들이 이렇게 하지 않는다. 아프리카의 삶을 어떤 식으로도 낭만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고, 또한 아프리카 정부들을 비판 없이는 서술하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루츠 판 다이크가 아프리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유리하다. 아무도 그의 책이 아프리카의 부족함을 사과하려 하는 아프리카 사람의 시도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그를 비난 할 수는 없다.

  우리의 역사는 많은 고통과 슬픔을 지녔다. 그런데도 우리가 언제나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 삶의 기쁨으로 가득 넘쳐서 서로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다른 어떤 역사책에서도 찾아내지 못한, 어떤 내적인 강인함을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아프리카 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 어딘지 이해할 수 없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진기한 특성으로 서술되지 않고 아주 깊이 인간적인 어떤 것, 우리가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내가 다른 사람 몰래 증조할머니에게로 가져갔던 한 줌의 소금처럼 말이다. (p297~298)

 

  마지막으로 인용한 글은 가나의 여성 작가 암마 다르코가 쓴 글이다. 그 어떤 미사여구의 감상평보다 담담하게 담기는 내용이어서 전문을 인용하고 싶었는데 너무 길다. 이제 머나먼 대륙이 조금 가깝게 느껴진다.

 아프리카, 아 아프리카.

 선함이 있기를. 부디 찬란함을 잊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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