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춤이다
김선우 지음 / 실천문학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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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춤꾼 최승희의 이야기이면서 최승희의 여러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최승희. 그녀는 멀리 있지 않은 사람이다. 최근 확인된 바에 의하면 그녀의 사망일은 1969년 8월 8일이다. 최후 정황은 여전히 안개 속이지만,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내가 태어나기 한 해 전에 그녀는 죽었다.

  너무 일찍 세상에 오는 사람들이 있다. ‘적당히 일찍’ 올 수 있다면 예술가로서의 운명치곤 퍽 행운인 것인데, ‘너무 일찍’ 와버려 불행했던 사람들, 최승희 그녀도 너무 일찍 왔다. 아니, 그녀가 너무 일찍 왔다기보다, 그녀의 존재를 받아내기에 우리의 근현대가 너무도 불우하게 기우뚱거렸던 탓도 있으리라. 기획된 근대의 전근대적 옹벽 앞에 내던져진 현대의 예술가. 그녀는 21세기 감각으로 20세기를 살았다. 불우는 당연했다. 1911년 출생. 일제 강점기의 식민지 조선. 한국전쟁. 분단. 우리 근현대사의 혹독한 상처들을 고스란히 통과한 그녀는 8.15이후 북쪽 사람으로 살다가 숙청당했다. 당내 정치적 역학 관계에 의해 남편 안막이 숙청된 후 그녀도 곧 숙청당했지만, 남편의 숙청이 아니었어도 그녀는 북한이라는 닫힌 체제 속에서 살아남기 힘든 사람이었다.

  나는 느낀다. 검은 불꽃, 강력한 죽음의 느낌, 초혼과 위령의 흐느낌이 그녀에게 묻어 있다. 이글거리는 빨강, 죽음만큼 강력한 삶의 느낌, 현실의 경계를 솟구쳐 가로지르는 담대한 탈주의 스케일이 그녀의 그림자에 어른거린다. 예술가로서 그녀가 싸우다 간 것은 인간의 조건이었다. 예술은 그녀를 노마드로 만들었고 그녀는 너무도 일찍 코스모폴리탄이 되었다.

  쿨하기엔 너무 뜨거운 심장을 가진 그녀가 기우뚱한 간극에서 도약하는 것을 바라본다. 불우와 찬란함의 공존, 화려한 외양속의 극한의 고독, 그녀에게 합당한 수식어가 있다면 그것은 ‘자유에의 갈망’일 것이다.

그녀는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에 자신의 예술-언어를 구속시키지 않았다. 무용가로서의 자존의 핵심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했던 예술가. 자신의 몸, 자신의 춤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던 에고이스트. 전근대에서 근대로, 근대에서 현대로 탈주하는 최승희가 바람처럼 속삭인다. 자유인 춤. 자유인 예술. 자유인 영혼!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춤이다’가 김선우 시인이 쓴 첫 장편소설인 줄로만 알았지 무용가 최승희를 모델로 삼은 줄은 몰랐다. 조선 최고의 춤꾼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최승희라는 이름도 알게 된 것이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이사도라 던컨은 아주 오래전에 알았으면서.

  이것이 내 개인의 한계인지, 평범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의 한계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단 거다. 비단 그뿐이겠는가. 어쩌면 아우슈비츠에 관해서보다 만주에 대해서, 아니 수용소의 유대인들의 죽음보다, 만주 항쟁이나 시베리아에서 죽어간 우리 혁명자들에 대해, 제주에서 이름 없이 죽어 간 무고한 4.3의 희생자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죽음의 비중을 논하자는 것은 아니고 세계사에는 그럭저럭 아는 척할 만큼은 알면서도 정작 우리의 근현대사에는 무지한 자신이 한심하고도 한심했던 것이다. 우리는 알지도, 알려 하지도 않는 사이에 그렇게 잊혀지고, 묻혀 버린 숱한 ‘너무 일찍’ 세상에 와버린 이들께 숙연한 마음이 들게 한 책이다. 하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다. 최승희라는 큰 나무의 가닥만 있을 뿐, 많은 부분 허구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시절을 살아 간 사람들의 척박한 생이 밟혀왔기 때문이다.

  역사 소설에서 특정 인물을 다룬다는 것은 자칫 실제보다 부풀릴 수도 있고 그 사람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기 때문에 객관화 되지 않으면 정형화된 모델로 만들어 버리기 쉬울 텐데 감성적이고 단단한 문장들은 여리고 예민하고 꿋꿋한 예술가의 표상을 잘 그려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반전처럼 드리운 최승희의 그림자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끌고 나가는 힘이 되었다. 읽을 때는 몰랐는데 책을 덮고 나니 말줄임표들이 유독 많았다는 생각이 났다. 나 또한 습관적으로 말줄임표를 많이 쓰는 편이다. 그런데 장편소설을 읽고 나서 문장은 기억이 남질 않고 말줄임표들이 떠오른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다행이 여운을 남기는 문장들이 시어처럼 가득했다.

 

  숨이 소진되면서 가슴이 꽉 차는 느낌. 내가 이편에 없는 순간 저 편에 있게 될 거라는 확신 같은 게 불현듯 들곤 해. 죽음과 삶의 경계가 아주 흐릿하고 심지어 뒤섞여 있다고 느끼게도 돼. 육체를 한계상황에 밀어 넣을 때 삶과 죽음의 경계는 덧없어지지 그래서 나는 춤에 미친 건지도 몰라.p56

 

  그 꽃이 얼마나 깊은 관능으로 흐드러지는지 옥수숫대를 잡아당기며 놀아본 이들은 안다. 있는 듯 없는 듯 피어 난분분 자욱한 냄새의 열락을 만드는 옥수수밭. 옥수숫대는 온몸으로 꽃냄새를 풍겼다.p64

 

  여자 몸속의 뼈들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와 박혔다. 발바닥과 연습실 바닥 사이가 엄청난 간격으로 느껴졌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감각. 그것은 낯설고 두려운 것이었지만, 열여섯 살의 여자를 기묘한 방식으로 자극했다. 바닥을 잘 느껴라. 움직이는 바닥이, 지구가, 이시이 선생이, 여자에게 요구했다. 바닥을 잘 느껴라. 그것은 춤에서만이 아니라 삶에서도 기본이 되는 것이었다. 바닥을 딛고, 바닥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살아간다. 여자의 이마와 등에서 땀이 솟았다. 결국 여자가 휘청, 주저앉았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여자가 열 개의 발톱으로 처음으로 바닥을 움켜쥐었다.p81

 

  눈뭉치가 떨어지며 파아, 하고 가루눈이 되어 바람 속으로 흩어졌어.p88

 

  이런 독기, 여자가 계속 이시이 문하에 있었다면 품을 수 없었을 이 실패의 독기가 여자를 일본 최고의 무용가가 아니라 세계의 무용가로 이끌 힘이 될 것이다. 여자의 독기와 고독, 나는 그것에 패를 걸기로 한다. 지금 내개 필요한 것은 일본 최고의 무엇이 아니다. 조선의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무기, 그것도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매혹을 가진 무기를 나는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그것은 꽃이다.

  여자가 나를 날카롭게 일별했다. 나는 그 눈길을 칼자국처럼 예민하게 느낀다. 여자를 얻기 위해 여자의 감도에 나를 맞춰야 한다.p114

 

  그녀의 유행혐오증이 생래적인 것이듯 그녀는 계급적인 각성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 그녀는 오직 최고의 춤만 생각하는 예술가일 뿐이다. 그런데 그녀 속에 있는 자유에의 갈망, 이것이 이념적인 것과 그다지 멀리 있지 않음을 나는 느낀다.p120

 

  아름다운 것은 치명적인 것과 함께 온다.p125

 

  사랑의 모순처럼 인생은 어떤 지점에서 바라보든 모순으로 가득했다. 여자는 힘을 원했다. 예술, 명예, 돈, 모든 면에서. 그런데 자꾸 여리고 약한 것들을 향해 여자의 마음이 움직였다. 힘을 원하는데 힘이 결핍된 것들을 향해서 마음이 움직이는 모순. 여자는 보살핌 받기를 원했다. 누군가 자신을 안전하고 강건하게 보살펴주기를. 그런데 자꾸 보살펴주어야 할 것 같은 이들에게 마음이 가닿곤 했다.p130

 

  모든 돌연한 말들이 한 줄로 꿰어지는 듯한 느낌, 살아온 날의 마디들이 공중에 흩뿌려 놓은 점들 같다가 느닷없이 한 줄로 꿰어지면서 손목이나 목 언저리에 감겨 오는 듯한 느낌.p142

 

  단지 소름 끼치는 정체감, 오래도록 고여 있어 심장이 썩어 들어가고 있는 듯한 정체감을 견디기 힘들었다. 몸을 움직여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일이 멎어버리는 순간, 그것이 곧 몸의 타락임을 여자는 그때 알았다. 몸의 타락은 마음의 타락으로 이어진다. 현상은 본질을 반영한다고 하던가.p144

 

  배롱나무 꽃 타래가 흔들리는 소리까지 다 들릴 듯했어요.158

 

  최승희. 그녀가 왔다. 두 눈에 가득 불을 품고 왔다. 기묘한 광기와 외로움이 흐르는 눈빛이었다.p209

 

  아름다운 것들은 기록하고 싶어지죠. 세상이 미쳐가서 아름다운 것이 드물 땐 더욱.p210

 

  우리는 살아 있고, 살아 있는 한 꿈꾸고, 욕망하고 움직이고, 흔들리며 달릴 것이다.p216

 

  해탈한 마음이 해탈하지 못한 중생들을 아파하며 함께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보살도라 하였어요. 그래서일까요. 당신의 보살춤을 보는 일은 황홀하고 고통스러워요. 어머니를 보는 일처럼 힘들고 아파요. 세상의 모든 고통을 듣는다는 관음보살의 얼굴을 상상해요. 관음의 자비. 관음의 슬픔. 아름답고 아프고 고요해요.p256

 

  이성과 감성, 두뇌와 심장, 자아와 초자아 사이에 위태로운 다리처럼 걸쳐져 있는 목. 그리고 목의 뒤편. 가장 명랑한 무용도 노출한 목을 통해 감정의 균형을 무언으로 조절한다. 무용가의 목선은 그래서 중요하다. 기쁨 배면의 슬픔, 슬픔 배면의 쓸쓸함, 쓸쓸함 배면의 자존감, 이런 이중적인 감정을 존재 자체로 표현하는 것이 인간의 목이다.p267

 

  여자가 떠난 빈방 어디서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창 아래 나란히 놓인 다섯 개의 둥근 등에 기타로가 천천히 불을 붙였다. 세상에 온 첫 번째 바람을 밟듯이 나비가 가만히 눈을 떴다. 빈방 한가운데로 나비가 떠올랐다. 빛의 나비와 검은 나비 그림자. 그러니까, 몸을 버리는 순간 몸이 얻어지는 거야. 고치에서 춤을 꺼내듯, 이 순간의 몸과, 다음 순간의 몸이 그렇게 연결되는 거야p285

 

  마지막 구절처럼 춤은 몸의 예술이다. 몸을 오래토록 등한시해왔다. 또한 몸의 말에도 그랬다. 소설은 몸의 말이기도 하고 머리의 말이기도 한 것은 아닐까, 둥근 등에서 날아오르는 나비가 장자의 꿈이기도 하고 최승희의 꿈이기도 하듯이.

  몸의 말을 받아 적는 일에 김선우시인은 탁월하다. 그녀를 통해 여자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관능의 언어로 몸의 말을 듣는 것은, 무대 위 여자의 보살춤을 보고 있는 듯 했다. 시에서와는 다른 환상으로 황홀한 경험이었다. 그녀의 두 번째 소설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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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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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9 인민

  이는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 전까지 나는 빛이 사람의 목소리보다 더 멀리 전달된다고, 또 사람의 목소리는 사람의 몸보다 에너지를 더 멀리 전달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스물아홉 살이던 그 밤에 나는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민이 단결할 때 그들의 목소리는 빛보다 더 멀리 전달되고 그들 몸의 에너지가 그들의 목소리 보다 더 멀리 전달되는 것이다. 마침내 나는 ‘인민’ 이라는 단어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p69 영수

  영수가 서거했다는 소식에 우리는 미친 듯이 눈물을 쏟았다. 천여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내는 울음소리 속에서 나도 울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숨이 끊어질 듯 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곧 숨이 막혀 죽을 것처럼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우는 소리도 들렸다. 문득 나의 사유가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비통함이 나를 어쩌지는 못했다. 이상한 울음소리가 나를 이끌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이 소리 내어 울고 있을 때, 내가 느꼈던 것은 틀림없는 슬픔이었다. 하지만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대한 공간에서 한꺼번에 울부짖을 때, 내가 느낀 것은 유머였다. 나는 이처럼 풍부하고 다채로운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전 세계 모든 품종의 동물들이 자신들의 대표를 보내 경연을 벌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p104 독서

  나는 매번 위대한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 작품을 따라 어디론가 갔다. 겁 많은 아이처럼 조심스럽게 그 작품의 옷깃을 붙잡고 그 발걸음을 흉내 내면서 시간의 긴 강물 속을 천천히 걸어갔다. 아주 따스하고 만감이 교차하는 여정이었다. 위대한 작품들은 나를 어느 정도 이끌어준 다음, 나로 하여금 혼자 걸어가게 했다. 제자리로 돌아오고 나서야 나는 그 작품들이 이미 영원히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108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죽음은 서늘한 밤이다”라는 하이네의 시구를 읽게 되었다. 그러자 오래전에 사라진 유년의 기억이 내 전율하는 마음속에서 순간적으로 되살아났다. 방금 목욕을 한 것처럼 맑고 뚜렷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 기억이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만일 문학에 신비한 힘이 존재한다면 나는 아마도 이런 것이 그 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독자로 하여금 다른 시대,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언어, 다른 문화에 속한 작가의 작품 속에서 자신의 느낌을 읽을 수 있게 하는 힘 말이다. 하이네가 쓴 시가 바로 내가 유년 시절 영안실에서 낮잠을 잘 때의 느낌이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문학이다.”

 

 

 

 

p137 글쓰기

  여러 해가 지나 중국의 비평가들은 나의 언어 서술이 매우 간결하다고 칭찬하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건 내가 아는 한자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나의 작품이 영어로 번역, 출판되자 미국의 한 문학교수는 영어로 번역된 나의 언어가 마치 헤밍웨이의 언어 같다고 말했다. 나는 내 농담을 미국으로 수출하여 이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헤밍웨이도 아는 단어가 그리 많지 않았나보군요.”

  농담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이었다. 인생은 종종 이렇다. 때로는 단점에서 출발한 것이 갈수록 장점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장점에서 출발한 것이 갈수록 단점이 되기도 한다. 마오쩌둥의 말을 빌리자면 “좋은 일이 변해 나쁜 일이 되고‘ 나쁜 일이 변해 좋은 일이 된다.”라고 할 수 있다.

  ...........

  “어떻게 해서 유명한 작가가 될 수 있었나요?”

  나의 대답은 하나이다. 바로 ‘글쓰기’ 덕분이었다. 글쓰기는 경험과 같다. 마찬가지로 직접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p147

  지금의 나는 이미 27년이라는 글쓰기 경력을 갖고 있고 이제는 ‘나는 글쓰기를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구나 일생을 통틀어 표현 하고 싶은 무수한 욕망과 감정을 품게 된다. 하지만 실제 현실과 개인의 이성과 지혜가 이를 억누르고 만다. 하지만 글쓰기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억압된 욕망과 감정을 충분히 표출할 수 있다. 나는 글쓰기가 사람의 심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되고 인생을 더욱더 완전하게 만들어 준다고 믿는다. 또는 글쓰기가 사람들에게 두 갈래 인생의 길을 갈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도 있다. 하나는 현실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허구의 길이다. 이 두 가지 길은 건강과 질병의 관계와 같아서 하나가 강대해지면 다른 하나가 필연적으로 쇠약해진다. 내 현실에서의 삶의 길이 갈수록 평범해지는 것은 허구에서의 내 삶의 길이 갈수록 풍부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p148

  지나치게 많은 답변은 답변하지 않은 것과 같다는 사실을 그간의 경험이 내게 말해 주었다. 진정한 답은 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 가운데 하나만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진정한 대답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제 나는 또다시 얘기를 하고자 한다. 이것이 나의 강점이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한 가지 생각을 고집스럽게 믿어왔다. 한 사람이 성장해 온 과정이 그의 일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가장 기본적인 그림이 바로 이때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새겨져 마치 복사기처럼 한 장 또 한 장 개인의 성장에 계속 복사되는 것이다. 그가 자라 성인이 된 뒤 성공한 사람이 되었건 실패한 사람이 되었건, 위대한 사람이 되었건 평범한 사람이 되었건, 그가 행하는 모든 것들은 이 가장 기본적인 그림을 부분적으로 수정한 데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그림 전체는 변하지 않는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 그림을 많이 바꾸고 어떤 사람들은 조금 밖에 바꾸지 못한다.

 

 

 

 

p202 차이

  사회형태의 각도에서 볼 때, 문화대혁명 시기는 아주 단순한 시대였던 데 비해 오늘날은 대단히 혼란스럽고 복잡한 시대이다. 마오쩌둥이 말한 “우리는 적이 반대하는 것을 옹호해야 하고 적이 옹호하는 것을 반대해야 한다.”라는 한마디로 문화대혁명 시대의 기본적인 특징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대혁명 시기는 이처럼 흑백이 분명한 시대였다. 적은 영원히 착오를 범하고 우리는 영원히 정확하다는 것이 그 시대의 인식이었다. 그 누구도 감히 적이 정확할 때가 있고 우리도 틀릴 때가 있지 않을까 하고 물을 수 없었다. 마오쩌둥 이후에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훌륭한 고양이다.”라고 한 덩샤오핑의 말이 오늘날 변화한 시대의 기본적 특징을 잘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덩샤오핑의 이 한마디는 마오쩌둥의 사회 가치관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중국 사회에 아주 오랫동안 존재해온 사실, 즉 잘못된 것과 정확한 것은 항상 같은 사물 안에 존재하며 서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동시에 이 한마디는 중국의 경제발전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논쟁을 종식시켜주기도 했다. 이리하여 중국은 정치가 모든 것을 주도하는 마오쩌둥의 흑백시대에서 덩샤오핑의 경제지상주의 컬러 시대로 접어들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우리는 항상 “사회주의의 풀을 뜯어 먹을지언정 자본주의의 싹은 먹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오늘날의 중국에서 우리는 이미 어떤 것이 사회주의이고 어떤 것이 자본주의인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의 중국에서는 풀과 싹 둘 다 똑같은 식물일 뿐이다.

  때로는 하나의 단어가 갖고 있는 함의가 단순한 상태에서 복잡한 상태로 변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회 변화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차이’가 바로 그런 단어다.

 

 

 

 

p353 후기

  이런 느낌은 내 뼛속 깊이 새겨졌고, 그 뒤로 내 글쓰기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고통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쉽게 소통하도록 해주는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이 소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사람들이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나는 중국의 고통을 쓰는 동시에 나 자신의 고통을 함께 썼다. 중국의 고통은 나 개인의 고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화, 그의 작품은 ‘허삼관 매혈기’만 읽어보았다. 그 책은 소재의 강렬함은 두고라도 읽는 동안 몰입했고, 아주 오래전임에도 가끔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형제’는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미뤄둔 소설인데 엉뚱하게도 산문집을 택하게 된 것이다. 우선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제목에 끌렸고 (편집자는 성공했다.) 중국이라는 다 알 것 같기도, 전혀 모를 것 같기도 한 나라의 잘나가는 동시대의 작가가 쓰는 현대 중국의 모습이 궁금했고 노란색 표지가 이 산문집을 선뜻 고르게 했다. (나는 왜 노란색이면 홀려들 듯이 혹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책 읽기를 마친 지금, 최근 다시 읽은 루쉰의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와 김산. 님웨일즈의 ‘아리랑’과 함께 읽으면서 비슷한 시절의 중국, 조선, 일본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시절뿐 아니라 21세기의 중국을, 젊은 중국을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가 ‘독서’에서 쓴 그대로 그는 책을 읽는 동안은 물론이고 읽고 난 여운이 남은 지금도 나를 중국으로 이끌고 갔던 것이다. ‘문화 대혁명’의 격변을 딛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근세를 살아가는 모습은 그곳이나 우리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삶은 민족이나 국가의 다름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한 사람이 성장해온 과정이 그의 일생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제는 같이 일하는 조선족들에게서 보는 뜨악하게 만드는 행동들을 약간은 이해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시절을 살아남은 이들의 처세술이 아닐까? 특히 위화조차 짐작하지 못한 소수민족으로 살아남기 위한.

  나의 주관만으로 누군가를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생각한다. 소통되지 않는 편협한 판단으로 누구를 평가하는 일이 마오의 사상과 다를 게 없다는 섬뜩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책을 읽는 것은 생각의 확장이고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가깝게 만나는 일이다.

 

  열 개의 단어는 인민人民, 영수領袖, 독서閱讀, 글쓰기寪作, 루쉰魯迅, 차이差異, 혁명革命, 풀뿌리草根, 산채山寨, 홀유忽悠다.

  열 개의 단어로 현재의 중국을 다 알 수는 없을 테지만 특별하지는 않아도 이런 시도는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타고난 이야기꾼이 풀어나가는 글이었기에 가능했을 음험하고, 동굴 속 같이 큼큼해서 도저히 다가서지지 않던 중국이라는 나라를, 아니, 중국 사람들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위화는 탁월했다.

  이런 시대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김수영도 그런 글을 썼는데. 아름다운 우리 말 열 개던가, 그랬던 거 같다. 열 개의 단어, 그가 얘기한대로 직접 써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니 문득 써보고 싶어진다. 나한테는 어떤 열 개의 단어가 생겨 나올까? 궁금해지기도 하고.

  오래 읽힌 (진도가 안 나가는) 무거운 주제들이 나중엔 쉬워졌다. 그 변화의 계기가 무엇이었나? ‘아리랑’의 영향이었다.

 

  제주에서도 남이섬에서도 화성에서도 나는 언제부터인지 어린아이부터 노인들에 이르는 전방위 계층의 중국 사람들의 소란 속에 묻혀있어야 했다. 그들 사이에 서서 무섭게 몰려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시끄러워서만은 아닌 당당한 저들의 행보에서, 일방적인 방공식별구역 선포를 하는 중국 정부의 모습이 보이는 듯도 해서다. 그들을 알고 그들을 읽어야겠다. 이제 그 첫걸음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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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대화
정지아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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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작가의 책들을 좋아한다. 소설집 [봄빛]에서 시작된 끌림이 [행복], [빨치산의 딸1~3],에 이어 [숲의 대화]까지 오는 동안 여여하다. 작가의 철학이, 삶이, 세계관이 시종일관 감동시키고 소소한 일상들이 공감의 세계로 이끈다. 우리 시대의 주인공들은 그런 서민적인 풍경 속에 존재하리란 기대감이 그녀를 주목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잔잔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그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면서 많은 독자들이 [숲의 대화]를 읽어 줬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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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땅에 펀드 - 땅, 농부, 이야기에 투자하는 발칙한 펀드
권산 지음 / 반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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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번이 투자에 실패했다.

  지난해에도 은행원의 권유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결국은 터무니없을 만큼 낮은 이자율에 혹시나 하고 선택했다가 역시나 실패했다.

  아무 생각 없이 길게 묻어두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당연하다는 듯 쓸 곳은 생겼고 처분하자니 어김없이 마이너스였다. 그래도 해지 할 밖에...

  다시는, 다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펀드따위는 내 사전에 없다고 작심했다. 

  그런데 [맨땅에 펀드]란다.

  '쳇~! 뭔 놈의 펀드를 땅에다가... 쳇, 쳇, 쳇~' 했다.

  또 다시 실패할 게 뻔한 투자 위험 등급 1등급, 이라는 문구 때문에 투자를 안 한 것은 아니다. 단언컨대! 가뭄에 콩 나듯 밥을 해먹는 내가 배당 되는 농산물을 소화할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책이란다.

  책이라면, 그의 책은 손해 보아도 좋은 확실한 투자 이유를 가졌다.

  무조건 담백하고 정갈한 맛의 글을 좋아한다.

  오래 지리산닷껌에서 만난 그의 글은 그렇다. 그래서 질렀다.

  '고뤠! 나도 뭐 그쯤은 치사빤쑤~ 과감하게 [맨땅에 펀드]랑께라우.'

  농사짓지 않고 시골에서 사는 권산의 좌충우돌 구례 생활의 두 번째 이야기이고-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사는 법]- 생산자와 소비자를 잇는 땅의 이야기이다.

  더 이상 무슨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가 있겠나 싶은데, 좀 보탠다.

  작가의 바람대로 이 책이 좀 많이 팔렸으면 싶어서다. 

  거기에 출현한 어르신들의 삶이 공감 백배다.

  호랭이도 안 물어갈 수석 펀드매니저 대평댁을 비롯하여  펀드매니저인 지정댁, 대구댁, 갑동댁, 왕샌등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 오미마을 사람들의 실감나는 현실의 중계 방송이 그렇고 이제는 유명인이 되어버린 듯한 농부 홍순영 형님과 그의 가족들, 오미동의 중심 운조루와 허당 농부 윤정수씨, 손이 먼저 떠오르는 구례 감의 대표주자 김종옥형님, 언제나 부지런하고 야무진 '산에사네' 농장과 카페를 운영하는 지리산 노을언니, 귀촌하여 고생이 이만저만아닌 가운데 인기도가 급 상승중인 '나는 설비다'의 무얼까와 일탈 부부, 아쉽게 떠나버린 박과장과 윤하, 그리고 이 말도 안 되는 펀드의 책임자인 어리버리한 권산의 이야기가 있다.

  그들 속에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그들이 매일 보는 식구들 같은 생활이, 땀이, 웃음이, 징함이 있다.

  우리는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 맘대로 땅으로 맺어진 식구가 되어버렸다.

  안보면 궁금하고 보고 싶고, 보면 짠해지기도 하고 장하기도 해서 징허디 징한 식구들이다.

  계속 실패한다 해도 투자할 이유가 충분한 우리 식구들이 운영하는 맨땅에 해딩하기, 아니 펀드다.

  부디 승승장구하길 바란다.

  땅을 믿는, 땅심을 믿는 이 땅의 모든 농사짓는 바보들과 농사도 모르는 바보들이여,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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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공원에서 창비시선 354
고영민 지음 / 창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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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등
               고영민

 

울고 싶을 때 울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어떤 미동으로 꽃은 피었느니
곡진하게
피었다 졌느니
꽃은 당신이 쥐고 있다 놓아버린 모든 것
울고 싶을 때 울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마음이 불러
둥근 알뿌리를 인 채
듣는
저녁 빗소리

 

 

모래
                고영민

 

봄녘,
보도블록을 새로 깐 자리에
인부들이 모래를
흩뿌려놓았다

틈을 메운다는 것은 저런 것일까

그냥 가만히
흩뿌려놓고
가는

 

 

벽돌 한장
                고영민

 

변기 물통에 벽돌 한장을 넣어두었다

네 안에도 몰래
벽돌 한장 넣어두고 싶다
내 심장 같은

물을 내리고
다시 새 물이 차오를 때
고여있던 물이 어느 저녁으로 급히 빠져나갈 때

벽돌 한장의 부피만큼
더 빨리
네 숨이 나를 향해
차오른다

 


 

시집 한 권에 8000원,

통상적인 밥 한 그릇의 가격이다.

아니, 커피 한 잔의 가격이다. 
이런 시편들을 만날 수 있는데 밥 한 그릇의 값이고

커피 한 잔의 값이라니......

어쩐지 시인들께 죄송하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한 그릇의 밥이

한 잔의 커피가 소중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래도
시인의 심장을, 시인의 가슴을 통째로 가질 수 있는데...

시집을 사는 일은

내 속에 

벽돌 한장을 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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