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공원에서 창비시선 354
고영민 지음 / 창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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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등
               고영민

 

울고 싶을 때 울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어떤 미동으로 꽃은 피었느니
곡진하게
피었다 졌느니
꽃은 당신이 쥐고 있다 놓아버린 모든 것
울고 싶을 때 울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마음이 불러
둥근 알뿌리를 인 채
듣는
저녁 빗소리

 

 

모래
                고영민

 

봄녘,
보도블록을 새로 깐 자리에
인부들이 모래를
흩뿌려놓았다

틈을 메운다는 것은 저런 것일까

그냥 가만히
흩뿌려놓고
가는

 

 

벽돌 한장
                고영민

 

변기 물통에 벽돌 한장을 넣어두었다

네 안에도 몰래
벽돌 한장 넣어두고 싶다
내 심장 같은

물을 내리고
다시 새 물이 차오를 때
고여있던 물이 어느 저녁으로 급히 빠져나갈 때

벽돌 한장의 부피만큼
더 빨리
네 숨이 나를 향해
차오른다

 


 

시집 한 권에 8000원,

통상적인 밥 한 그릇의 가격이다.

아니, 커피 한 잔의 가격이다. 
이런 시편들을 만날 수 있는데 밥 한 그릇의 값이고

커피 한 잔의 값이라니......

어쩐지 시인들께 죄송하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한 그릇의 밥이

한 잔의 커피가 소중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래도
시인의 심장을, 시인의 가슴을 통째로 가질 수 있는데...

시집을 사는 일은

내 속에 

벽돌 한장을 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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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 오늘의 작가 총서 27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27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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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 어둡고 쓸쓸한 날들의 평화

  늦가을의 바람이 제법 찼고, 해뜨기 전의 구름들은 파란 잉크가 번진 솜뭉치 같았다. 비가 한 차례 내리면 곧 이어 지상엔 영하의 날씨들이 닥칠 거였다. 겨울, 만물이 어둠 속의 흐느낌처럼 가냘 퍼지는 겨울.

 

 

p25

  언뜻 그런 우스갯소리들이 엉터리인 것 같지만, 사실 전쟁터에서도 사람이 늘 찡그리고만 사는 건 아니거든, 사람들은 우울한 환경 속에서도 해학을 수신할 수 있는 안테나를 제공받게 마련이지. 생존하려고 말이야. 웃음은 폭풍이 몰아치는 인생의 강을 건너게 해주는 배와도 같아.

 

 

 

 

p47 이제 나무묘지로 간다

  고풍스런 옛 관공서 건물에는, 지난여름 약진하는 군대와도 같이 벽을 타고 기어오르던 담쟁이덩굴의 손자국들이 역력했다. 무성하고자했던 것들, 번식하고자했던 것들의 상흔. 나는 어느새 손톱이 다 부러져 나간 것을, 내 추억의 검은 피가 딱딱하게 맺혀버린 자리를 보고 있었다.

 

 

p52

  터무니없는 고요라는 것, 나는 폐 속에 갑갑하게 차있는 그 고요함으로 인해 지독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다.p

 

p53

  거기엔 어김없이 그 혼령의 옷자락 같은 파란 안개가 있었다. 나는 내 영혼이 색맹이기를 바랬다. 세상의 안개들은 워낙 우윳빛일 뿐, 저 안개가 자꾸 파란색으로 느껴지는 것은 내 눈이 이상해서라고 .......

  풍경은 그것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향해 날카롭고 가느다란 음각의 판화를 새기고 있었다.

  ........ 아무런 언어 없이 서로의 세계를 주고받는 모습을.

 

 

p62

  물이 끓는 난로에 올려놓은 겨울 귤껍질처럼, 서서히 내 몸에서 추억의 냄새가 우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

땅에 묻히기를 거부하는 상처받은 영혼들이 교감하는 어떤 장소에서, 나무만큼 영원한 모습으로 마주치리라는 것을.

  ....... 손끝에서 별빛 같은 아픔이 반짝였다.

  별빛 같은 아픔이.

 

 

 

 

p67 그녀에게 경배하시오

  바람이 생선처럼 식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p101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병원이라는 곳은 환자복만 입히고서도 모든 사람들을 죽음에 가깝게 만드는 묘한 마력을 지닌 곳이었다. 생의 체념과 연민의 범벅이 표현하기 힘든 모양으로 흘러내리는 그런 곳이었다.

 

 

p109

  추억에도 속도라는 것이 있다. 나는 아주 드물게 그 속도를 감지하곤 한다. 나는 내 그림 속의 인물과 사물들이 그 추억의 속도로 움직이길 원했고, 그 그림들에서 지나간 내 모습들을 반추할 수 있기를 추구했다.

 

 

p114

  지독한 불면의 밤 홀로 천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그 방이 활활 타오르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내가 외로움이라는 도가니 속에 들어가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귓속으로 마치 수돗물이 욕조를 채우듯 올라오는 느낌, 내 삶의 대부분은 그런 쓸쓸함과의 싸움이었다고 장정이 멋진 공책에 쓰면, 그것이 바로 내 자서전이다. 삶에 관한 주의; 부작용인 것이다.

 

 

 

 

p121 레몬트리

  다만 멀리 존재함으로 환상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별들의 세계가 그러하다. 초저녁 서쪽 하늘의 고혹스런 비너스는, 너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자주 그러하듯 쉽사리 사라지고 만다. 곧이어 화성의 붉은 사막이 남서쪽 처녀자리 일등성 스피카 곁을 산책하고, 목성은 길잡이별 거문고자리 직녀의 밝기를 무시하며 제 고뇌를 빛낸다.

  ....... 만일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 주질 않는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결국 그가 아무것도 아님을 뜻하기에.

 

 

 

 

p153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

  지나치게 소심한 배려는 가장 육중한 비판에 다름 아니라는 걸 왜 모르고 있을까, 그대는.

  내가 쓴 소설을 언제나 처음 읽던 여자. 그녀가 쓴 시를 항상 외우고 있던 나. 두 사람 모두 이젠 내게서 떠나라. 내 사랑의 추억, 기다림이 닿을 수 없는 아주 먼 곳으로, 윤회의 혹독한 끈마저 끊어지도록 매서운 속도로.

 

 

p161

  먼저 된 자가 나중이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두려운 가르침. 진리의 명제 그 역도 참일진대, 훗날 시작된 방황이 저렇듯 끝을 모르고 먼 곳으로 진행될 때, 우린 무작정 미래가 궁금해지고 만다. 종교 없이도 운명을 믿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고는 있지만, 결코 영원히 사랑한 수는 없다는 서글픈 확신.

 

 

p170

  문이 존재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삶은 깜깜한 복도 정도가 아니야. 미로조차도 아니고. 하지만 어찌 어두운 실 없이 양탄자의 아름다운 무늬를 짤 수 있겠냔 말이지. 보다 포괄적이고 따뜻한 비유를 찾아 헤매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네.

 

 

p172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바쁘고 정교한 노동인 줄 아나? 가구는 없고 전화만 딸랑 놓인 방에서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다가도,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운명을 바꿔놓을 만한 소식이 끊기곤 하는 게 세월이지.

  ....... 도시에서의 마흔과 이런 시골에서의 마흔은 다르지. 여기선 세월이 은은하고 선명한 탓에, 시간은 속도가 아니라 얕고 깊음이라는 걸 금방 알게 된다네.

 

 

 

 

 

 

이응준은 처음 만나는 작가다.

오래 전에 구입했는데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좋다.

야~ 좋다, 하면서 읽었다.

왜 그동안 밀어두었는지......

긴 제목이 어색해서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거라고 읽으면서 실소를 깨물었다.

전체적으로 긴 제목이 많다.

제목을 정하는 작가의 취향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짧은 제목이 강렬한 함축의 의미를 담는다면

긴 제목은 낭만적 상상력으로 호기심을 갖게 해준다.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이 특히 그러했다.

이 작가는 시를 쓰고 소설을 짓고 영화를 만든다.

그래서일까?

감각적인 문장이 많고 시적 은유를 가진 행간에 자꾸 발목이 잡혔다.

 

최근에 몰입하는 작가 중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

헤르타 뮐러의 ‘저지대’에서.

긴 호흡의 문장에서도 강력하게 끌리는 시적 운율을 만난다.

책 耽(탐)이 그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밑줄 긋는 횟수가 점점 늘고 있다.

가을에 읽은 책을 이제야 쓴다.

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바야흐로 12월이고 겨울이다.

어쩐지 길 것 같고 추울 것 같은 겨울

살아보자.

"겨울, 만물이 어둠 속의 흐느낌처럼 가냘 퍼지는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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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시선 204
장석남 지음 / 창비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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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水墨) 정원 1

- 江(강)

                                장석남

 

먼길을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강가에 이르렀다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버드나무 곁에서 살았다

겨울이 되자 물이 얼었다

언 물을 건너갔다

다 건너자 물이 녹았다

되돌아보니 찬란한 햇빛 속에

두고 온 것이 있었다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다시 버드나무 곁에서 살았다

아이가 벌써 둘이라고 했다

                       

                          시집[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중에서

  

 

       

 

 

수묵(水墨)은 번짐,

여백이 가득한 아슴아슴한 번짐.......

산에 들에 어둠이 내리는 풍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지금은 강가에 이르는 계절, 십일월.

강을 건넌다는 것은 지금 속해 있는 세상를 떠난다는 것

‘되돌아보니 찬란한 햇빛 속에 두고 온 것’은.......

간절한 그리움이고 회한이겠지요.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가슴을 친 들

지나간 오늘이 다시 올까요?

??

?

 

오늘, 날마다 오늘

생애에서 최고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

**농원에서 머문 시간을 포함해서

그대 생의 가장 빛나는 오늘을 응원합니다.
                                        **
농원 식구들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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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리 시편 - 심호택 유고시집
심호택 지음 / 창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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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봉선이

                         심호택

 

싸가지 없는 아무개놈

속으로 욕하며 걷는 산길

바보여뀌 널려 있고

물봉선이 피어 있네

나밖에 볼 사람도 없는걸

시월이면 지고 말걸

빨간 물봉선이는, 아니

보라색 물봉선이는 뭐하러

저리도 곱게 피어 있나

여뀌는 또 무엇이 즐거워

저리도 깨가 쏟아지나

                      시집 [원수리 시편] 중에서

                      심호택 시인은 1947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1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빈자의 개] 등

                      8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하늘밥도둑] [최대의 풍경] [미주리의 봄]

                      [자몽의 추억]이 있다.

                      원광대 불문과 교수를 지냈으며

                      2010년 1월 교통사고로 타계했다.

 

 

읽고 나면 피식~ 웃음이 나는 시입니다.

시는, 어렵기만 하고 모르는 얘기만 하는 것은 아닌가봅니다.

저 혼자 곱게 피어나고 저 혼자 맵씨를 뽐내는 꽃이 시인에게 지청구를 듣는 오소록한 산길이 그려집니다.

그러나 어느새 십일월,

바보여뀌도 물봉선이도 슬그머니 지고 없겠네요.

가을은

소박하게 왔던 것들이 올 때처럼

조용히 물러나는 시간.

우리도 그들처럼 언젠가 그러하겠지요.

빨간 물봉선이처럼 아니 보라색 물봉선이처럼

누가 알아봐주지 않아도 각자의 생에서 주인공인 그대.

이 아름다운 지구의 가을, 행복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여기 머문 시간이

광교산의 단풍처럼 아름다운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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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色 시작시인선 42
정진규 지음 / 천년의시작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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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정진규

 

  새벽 공기를 빠듯이 뚫고 지나와야 하루가 안심이 된

다 새벽 공기의 내음을 아니? 그만한 향수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노인인 내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고 젊은

너를 내게 쏠리게 하는 그 비방을 비로소 고백한다 오늘

도 화계사 솔숲을 지나왔다 눈이 내려서 새벽 정신 더욱

깔끔했다 하루를 너끈히 견딜만했다

 

                                                     

 

 

 

淸洌

                                정진규

 

   이 겨울 내내 내가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은 동상 걸린

내 발가락들 사이 사이 깊게 박힌 서릿발들, 날카롭게 반

짝거렸다 해동 무렵에야 그게 무에라는 걸 겨우 터득했

다 만져지는 빛, 삼십 년만의 추위가 있던 날 어둠 하늘

에서 내 몸에 避接된 별들의 눈물, 이런 降神도 있다 차

가운

 

 

 

 

봄비 

                               정진규

 

   미리 젖어 있는 몸들을 아니? 네가 이윽고 적시기 시작

하면 한 번 더 젖는 몸들을 아니? 마지막 물기까지 뽑아

올려 마중하는 것들 용쓰는 것 아니? 비 내리기 직전 가

문날 나뭇가지들 끝엔 물방울들이 맺혀 있다 지리산 고

로쇠나무들이 그걸 제일 잘 한다 미리 젖어 있어야 더 잘

젖을 수 있다 새들도  그걸 몸으로 알고 둥지에 스며들어

날개를 접는다 가지를 스치지 않는다 그 참에 알을 품는

 

   봄비 내린다

   저도 젖은 제 몸을 한 번 더 적신다 

 

 

                                         시집 [본색(천년의 시작 2004)] 중에서   

 

 시인은 1939년 경기 안성 출생,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마른 수수깡의 평화] [들판의 비인 길이로다] [매달려 있음의 세상]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몸詩] [알詩] [도둑이 다녀 가셨다] 외 다수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 현대시학작품상, 공초문학상 등 수상

현재 월간 시 전문지 [현대시학] 주간

 

 

 

 

아침 시간 짬을 내어 [본색]을 다시 읽는다 

하루를 너끈이 견딜만하다

불빛이 음표로 일렁이는 저 곳, 광교 수원지 뚝길 

일 끝나는 저녁마다 어슬렁 거린다

발바닥에 폭신하게 안기는 흙의 느낌이

촉촉하게 스며드는 안개 내음이

내 어린 날의 뚝길

먼 길임에도 꼭 그 길로 집에 가게 만들던 드들강 가는 길 닮았다

아직

내 발가락들 사이 사이 깊게 박힌 서릿발들,

 

봄비 내리신다

저도 젖은 제 몸을 한 번 더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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