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는 서고 싶다 창비시선 209
박영희 지음 / 창비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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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기로 한다

                         박영희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

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하찮은 종이 한장일지라도

접어야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두 번을 접고 또 두 번을 더 접어야

종이비행기는 날지 않던가

살다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순간,

햇살에 배겨나지 못하는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반에 반만 접어보기로 한다

나는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들지 않던가

                                              시집[팽이는 서고 싶다(창비 2001)]중에서

 

 

             

 

2014년이 접히는 유월,

세상사 온갖 시름을 체념하듯 혹은 달관하듯 초연하게

접어서 종이배로 강물에 띄워 보내 버릴까요?

종이비행기로 저 하늘에 날려버릴까요?

이럴까? 저럴까? 복잡한 궁리와 생각들,

접기로 합니다.

욕심에서 비롯된 집착, 터무니없는 오해와 편견,

접기로 합니다.

그대여, 세상 어디에서든 근심을 접고 둥지에 들 듯 평온과 사랑으로 가득한 시간이길 바래봅니다.

                                                    **농원 식구들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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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견딜 수 없을 만큼 피로해지기 위해 걷는다. 이제 돌아가야 할 집의 정적을 느낄 수 없게 될 때까지, 검은 나무들과 검은 커튼과 검은 소파, 검은 레고 박스들에 눈길을 던질 힘이 남지 않을 때까지 걷는다. 격렬한 졸음에 취해, 씻지도 이불을 덮지도 않고 소파에 모로 누워 잠들 수 있을 때까지 걷는다. 설령 악몽을 꾸더라도 중간에 잠에서 깨지 않기 위해,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해 새벽까지 뜬눈으로 뒤척이지 않기 위해 걷는다. 그 생생한 새벽시간, 사금파리 같은 기억들을 끈덕지게 되불러 모으지 않기 위해 걷는다.

                                                                         p90

                                                                      

그런 기억이 있다.

지치도록 걷고

또 걷고

걸었던 길들에서의 시간의 기억을 희랍어 시간에서 확인했다.

가슴, 서늘하게.

한강의 글들은 늘 그렇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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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6-03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걷고 나면 슬픔이 무디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픔의 창이 가슴을 덜 깊숙이 찌르는 듯한 착각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얼음물에 발을 담구어 그 순간만은 감각을 무디어지게 했던 어느날 처럼 적어도 걷는 시간, 오로지 걷는 것에 미치는 시간은 조금은 나았던 것 같아요. 환청과 환각같은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

하지만 그렇게 걷고도 악몽은 꾸어졌던 것 같고, 기억들은 어느 틈에선가 다시 침범해버리곤 했지만.. 그래도..

살 것 같았나? 라고 물으면
살 것 같지 못해 걸었다. 그 뿐.. 모르겠어요..



걷고 또 걷고..
그래요. 산님...........




2014-07-07 23:42   좋아요 0 | URL
새벽숲 님
답이 많이 늦었네요. 한달이 지나 버렸으니...ㅠ,
정신 없는 유월이었답니다.
차차 옮겨 보도록하지요. ^^

걷고 또 걷고
그렇게 지냅니다.
일할 때 걷고, 산책 삼아 운동 삼아 또 걷고...

먼 곳에서 잘 지내시는지요?
 
사랑을 놓치다 문학동네 시집 57
윤제림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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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젖다 2

                        윤제림

 

봄이 오는 강변, 빗속에

의자 하나 앉아 있습니다.

의자의 무릎 위엔 젖은 손수건이 한 장.

가까운 사이인 듯, 고개 숙인 나무 한 그루가

의자의 어깨를 짚고 서 있지만,

의자는 강물만 바라보고 앉아 있습니다.

영 끝나버린 사랑은 아닌 것 같은데

의자는 자꾸만 울고,

나무는 그냥 듣고만 있습니다.

언제나 그칠까요.

와락, 나무가 의자를 껴안는 광경까지

보고 싶은데.

 

손수건이 많이 젖었습니다.

그새.

                           시집 [사랑을 놓치다]중에서

 

 

봄이 오는 강변,

빗속에 우산을 들고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이 정경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 물씬합니다.

봄비는 종아리까지 속수무책 튀어 오르고

몰래 지켜보던 시선 홀로 들켜버리면

꿈이 깨듯 사라지고 말 풍경이, 마음 길이,

쓸쓸해서 함께 젖습니다.

.......

봄이 점점 짧아집니다.

짧아서 더 사무치게 아름다운 이 봄.

가문 세상을 촉촉하게 적시는 봄비, 화안한 꽃비 내리는

그대 생애 최고의 봄날이

여기서 머문 바로 오늘이면 좋겠습니다.

^_^;;

            

 

 

지난 사월에 화장실에 걸었던 시인데 갑작스럽게 다가온 황망한 소식에 차마 올릴 수 없었어요.

누구에게랄 것 없이 화가 나고

무기력하게 슬프기만 했던.

아침이면 저수지에 나가 아름다운 봄 풍경 앞에서 '이것도 사치다. 사치다'하면서

커피를 마시고

강허달림의 노래들에 홀려 있다가

바람이를 달려 일터를 달려가고는 했던 고단한 시간이 이어졌어요.

퇴근길에는 그 길을 한 시간씩 걸으면서 몸을 혹사시켜 보아도 마음이 달래지지가 않았는데.

오월이 되면서는 도무지 걷고 싶지가 않아

유혹하는 수변 산책로를 외면하고 바람이로 쌩하고 달려옵니다.

이 무슨 변덕인지.  

데크 한 켠에 점점 길어지는 노란 포스트잇의 기원들이 먹먹하게 만들었는데

그마저도 사라져버린 허망함 탓일 겁니다.

이놈의 나라에서 도무지 희망이라는 것이 보이질 않아서 일 겁니다.

그래도 다시 

마음을 다 잡고 

시를 붙입니다.

어쩌면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설령, 내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함께 젖다

                      윤제림

 

공양간 앞 나무백일홍과,

우산도 없이 심검당 섬돌을 내려서는

여남은 명의 비구니들과,

언제 끝날꼬 중창불사

기왓장들과,

거기 쓰인 희끗한 이름들과

석재들과 그 틈에 돋아나는

이끼들과,

삐죽삐죽 이마빡을 내미는

잡풀꽃들과,

 

목숨들과

목숨도 아닌 것들과.

                     시집 [사랑을 놓치다]중에서

 

서산 개심사(開心寺)에 가 보셨나요?

이 시에는 자분자분 비 내리는 개심사 경내가 보입니다.

나무백일홍도, 비구니들도, 기왓장에 쓰인 희끗한 이름들도, 이끼들과 촉촉하게 함께 젖고 있는 풍경으로.

물론 시인께서 그런 개심사를 보았을지는…… 모르지요.

그곳이 어디든‘목숨들과 목숨도 아닌 것들과’

함께 젖고, 함께 피어나고, 함께 지는 슬픈 봄,

채 피워보지도 못하고 스러져버린 어린 목숨들이 아파서 함께 젖어보는 오월입니다.

2014년 4월 16일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우리가 함께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고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다짐한 그 시간들과 그 사람들을.

다시는 이런 참담한 사건 앞에서 무기력하지 않을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잊지 말아야합니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명복과 유가족들의 안녕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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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잔칫날처럼 - 고은 대표시선집
고은 지음, 백낙청 외 엮음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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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

 

비록 우리가 몇가지 가진 것 없어도

바람 한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의 모습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의 소리 들을 일이다.

우리가 기역 니은 아는 것 없어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고군산(古群山)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다 가지겠는가

또 무엇을 생이지지(生而知之)로 안다 하겠는가.

잎새 나서 지고 물도 차면 기우므로

우리도 그것들이 우리 따르듯 따라서

무정(無情)한 것 아닌 몸으로 살다 갈 일이다.

        

                           고은 시선집 [마치 잔칫날처럼] 중에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슬퍼하지 말라’로 기억되는 푸쉬킨의 시를 떠올리게 되는데

아주 오래 된 고은선생의 시집에서 이 시, ‘삶’을 읽던 때를 기억합니다. 가난한 시절이어서 그랬을까요?

설움이 투두둑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지요.

생이지지(生而知之),

태어날 때부터 알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슬프게도 곤이지지(困而知之),

곤경을 겪고 나서야 깨닫는 능력은 가졌습니다.ㅠ,ㅠ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다 가지겠는가’

여운 진한 이 구절처럼......

아픈 시절, 많은 사람들이 떠난 오월,

시 한편의 위로를 ** 농원에서 당신께 보냅니다.

부디, 부디~ 여여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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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0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21 0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 하나
                        도종환

흐린 차창 밖으로 별 하나가 따라온다
참 오래되었다 저 별이 내 주위를 맴돈 지
돌아보면 문득 저 별이 있다
내가 별을 떠날 때가 있어도
별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저 별처럼 있고 싶다
상처받고 돌아오는 밤길
돌아보면 문득 거기 있는 별 하나
괜찮다고 나는 네 편이라고
이마를 씻어주는 별 하나
이만치의 거리에서 손 흔들어주는
따뜻한 눈빛으로 있고 싶다

                  시집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중에서

 

          

 

비 오시는 밤,
엄마 기일이 지나가는 밤,
마지막으로 엄마의 이마를 쓸어 내렸던
촉감을 소스라치게 기억 하는 밤,
이 시각에도 가슴에 짜락짜락 비가 내리고 있을 이들을 생각하는 밤,
심한 목감기에 이틀째 말문을 닫아 걸고
묵언정진 하는 밤,
'나는 세상으로 돌아가 다시 내 인생을 상대할 수 있을까.
어떤 목소리가 답해왔다.
죽는 날까지.'

라고 작가 정유정은 히말라야 환상방황에서

 


내 심장을 쏴라 속 승민의 목소리로 쓰고있다.
죽는 날까지.
.......
죽는 날까지.
.......
엄마가 가신 나이에서 십년을 남겨두고 있구나.
오늘은 이 책을 다 읽어야 잠들겠구나.
히말라야를 그녀를 따라 걷는다.
고산병에 시달리면서
이 악물고 통증을 감내하면서.
잔인한 사월이
아픈 사월이
이렇게 가고 있다.
눈물이 비 되어 내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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