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여름이면 국제교류재단에서는 외국의 박물관 큐레이터들이 참여하는 한국미술사 워크숍이 열린다. 이 프로그램에 줄곧 참여해온 서양의 한 여성 큐레이터에게 한국의 이미지에 대해 물으니 그녀는 단숨에 정자(亭子)를 꼽았다. 한국의 산천은 부드러운 곡선의 산자락이나 유유히 흘러가는 강변 한쪽에 정자가 하나있음으로 해서 자연풍광의 문화적 가치가 살아난다며 이처럼 자연과 친숙하게 어울리는 문화적 경관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한국의 표정이라고 했다.
정자는 도자기와 마찬가지로 한·중·일 동양 3국의 공통된 건축문화인데 이 또한 3국의 특질이 다르다. 중국의 정자는 유럽의 성채처럼 위풍당당하여 대단히 권위적이고, 일본의 정자는 정원의 - P88

다실로서 건축적 장식성이 강한 데에 반하여 한국의 정자는 생활속의 공간으로 자연풍광의 문화적 액센트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정자는 생김새보다 자리앉음새가 중요하다. 특히 강변에 세운 정자에 명작이 많다.
정자는 누마루가 있는 열린 공간으로 이층이면 누각, 단층이면정자라 불리며 이를 합쳐 누정이라 하고 흔히는 정자로 통한다.
정자는 사찰, 서원, 저택, 마을마다 세워졌지만 그중에서도 관아에서 고을의 랜드마크로 세운 것이 규모도 제법 당당하고 생기기도 잘생겼다.
남한의 3대 정자로는 진주 남강변의 촉석루, 밀양 낙동강변의영남루, 제천 청풍 남한강변의 한벽루를 꼽고 있다. 북한에선 평양 대동강의 부벽루와 연광정, 안주 청천강의 백상루, 의주 압록강의 통군정 등이 예부터 이름 높다. - P89

정자를 세우는 것은 다만 놀고 구경하자는 뜻만이 아니다.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들판을 바라보면서 농사의 어려움을생각해보게 하고, 민가를 바라보면서는 민생의 고통을 알게 하고, 나루터와 다리를 보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내를 잘 건너갈 수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 곤궁한 백성들의 생업이 한두 가지가아님을 여기서 보면서 죽은 자를 애도하고 추운 자를 따스하게 해줄 것을 생각하게 한다. (...) 이는 멀리 있는 사물에서 얻어낸 것을정자에 모으고, 정자에서 모은 바를 다시 마음에 모아서, 내 마음이항상 주인이 되게 한다면 이 정자를 취원루라고 이름 지은 참뜻에 가까울 것이다. - P91

정자는 고을 사람들의 만남과 휴식의 공간이면서 나그네의 쉼터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정자는 여기에 오른 문인묵객들이 읊은 좋은 시들을 현판으로 새겨 걸어놓고 그 연륜과 명성을 자랑한다. 이를 국문학에서는 ‘누정문학‘이라고 부른다.
특히 청풍 한벽루에는 유명한 문인들이 남긴 시가 많다. 퇴계이황, 서애 유성룡, 고산 윤선도, 다산 정약용 등이 모두 한벽루를다녀가며 시를 남겼다. 이는 옛날에 서울에서 경상좌도로 갈 때죽령을 넘어가자면 남한강 뱃길을 타고 올라와 청풍에서 하루를묵어가곤 했기 때문이다. 그중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서애유성룡이 임진왜란이 잠시 소강상태로 들어갔을 때 고향 안동으 - P91

로 가는 길에 지은 시다.


지는 달은 희미하게 먼 마을로 넘어가는데
까마귀 다 날아가고 가을 강만 푸르네
누각에 머무는 나그네는 잠 못 이루고
밤서리 바람에 낙엽 소리만 들리네


과연 『징비록(懲毖錄)』의 저자다운 시다. 그러나 누구나가 다 서애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국토의 어디로 떠나든 차창 밖으로는 문득 저 멀리 정자가 나타날지니 그러면 고려시대 박윤문(朴允文)이 단양을 지나다가 취운루(翠雲樓)라는 정자를 바라보면서 읊은 시에 공감을 보내게 될 것이다. - P92

관동으로 가는 길목, 저 멀리 보이는 정자 하나
십리 소나무 그늘은 참으로 그윽하구나


정자는 너무도 흔하고 친숙한 것이기에 지나쳐 왔던 것이지만바로 그 점 때문에 ‘한국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내세워도 한 점 모자람이 없다.
이 누정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일어나면서 2023년 12월, 삼척죽서루와 밀양 영남루가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 마침 그즈음 밀양에 문상 갈 일이 있어 일부러 시간을 내어 영남루에 들러 - P92

보니, 밀양강이 맴돌아 가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그 늠름한 자태는 과연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로 국보답다는 감동이 일어났다. 이제 이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키려면 유적의 보존실태에 대해 심사받을 준비를 하여야 한다. 주변 환경을 재정비하여야 하고 건축, 문학, 역사 등의 학술대회를 열어 인문적 가치를쌓아야 한다. 지금부터 열심히 준비하면 아마도 10년 후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 P93

오늘날 「조선왕조실록』은 인터넷 무료 서비스로 누구든 자유롭게 원문과 번역문을 검색할 수 있다. 역사학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조선의 생활사를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역사의 대중화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데는 수난과 보존, 그리고 활용에 이르는 험난한 여정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기록유산의 나라이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우리나라 기록유산은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 『조선왕조실록』 『훈민정음』 『동학농민혁명기록물』 등 18건이나 된다. 그중 『조선왕조실록』은 총 1,894권 888책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기록물이다. 유교문화를 가진 중국, 일본, 베트남 등도 왕조의 실록 - P94

이 있지만 그 양과 내용의 다양함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기 위해서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Universal Value, OUV)‘를 세계사적 차원에서 인정받아야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은 다음 네 가지가 적시되었다.


1. 『조선왕조실록』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천재지변 등다방면의 자료를 수록한 종합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2. 중국, 일본, 베트남 등 실록이 있는 나라 중 편찬된 실록은 후손왕이 보지 못한다는 원칙을 지킨 나라는 조선왕조뿐이다.
3. 위 원칙의 고수로 『조선왕조실록』은 기록에 대한 왜곡이나고의적인 탈락이 없어 세계 어느 나라 실록보다 내용 면에서 충실하다. 책 권수로 치면 중국 명나라 실록이 2,900권으로 더 많으나실제 지면 글자 수는 1,600만 정도로, 4,965만자인 『조선왕조실록』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4. 중국, 일본, 베트남 등의 다른 나라 실록들은 대부분 원본이 소실되었고 근현대에 만들어진 사본들만 남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왕조 시기의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다. - P95

국보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은『태조실록』부터 『철종실록』까지의 25대 472년의 기록만을 말한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종래의 엄격한 방식이 아니라 소략하게 의례적으로 편찬하였고, 또 일제가 정략적 - P95

의도로 왜곡한 부분이 있어 별도로 취급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여러 판본이 있는데 일찍이 1973년에 정족산사고본(1,187책)이 국보 제151-1호로 지정된 바 있고, 오대산사고본, 적상산사고본, 봉모당본, 낙질 및 산엽본 등이 국보 제151-6호까지 추가로 지정되었다. 이는 그간의 험난했던 이동과 망실의 역사와 피눈물 나는 보존의 의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것이다. - P96

『조선왕조실록』은 국초부터 편찬되기 시작했는데 세종대왕은 역시 선견지명이 있어 만일을 위해 4부씩 만들게 하여 경복궁 춘추관(오늘날 국사편찬위원회), 충청도 충주,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에 분산, 보관시켰다. 이것이 4대 사고의 시작이다. 태조·정종. 태종까지는 필사본으로 제작하였으나 『세종실록』부터 실록이 완성되면 복사본의 오탈자를 막기 위해 활자로 4부를 인쇄해서 한양의 춘추관에 1부를 두고, 나머지 3부는 지방에 사고를 설치하여 보관했다. 3년에 한 번씩 꺼내 볕에 말리는 ‘포쇄‘ 작업으로 곰팡이가 슬거나 좀이 먹는 것을 방지했다고 한다. 중종 33년(1538)11월 6일에 성주 사고에 화재가 발생해 『태조실록』부터 『연산군일기』까지 전소되었으나 다른 사고본을 필사해서 복원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서울, 충주, 성주의 실록이 모두불타버리고 6월에는 하나 남은 전주사고도 풍전등화에 놓여 있었 - P96

다. 전쟁에 정신없는 관리들은 땅에 묻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때 태조 이성계를 모신 사당인 경기전의 참봉 오희길(吳希吉)은 내장산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는데 888책을 모두 담으려면 60여궤짝에 말 20여 필이 필요하였다.
이에 오 참봉은 태인에 살고 있는 선비인 안의(義)와 손홍록(孫弘)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자 이들은 집안사람과 하인등 30여 명을 인솔하고 와서 실록을 내장산 산속 암자로 피란시켰다. 조정에서 실록을 행재소가 있는 해주로 옮기라는 명이 내려온것은 이듬해(1593) 7월이었다. 그때까지 두 사람은 물경 1년 하고도 닷새 동안 내장산에 기거하며 실록을 지켰던 것이다. 그때 안의는 65세, 손홍록은 57세였다. 벼슬도 없는 무명의 선비가 사재를 털어가며 끝내 실록을 지켜낸 것이다. 훗날 이들에게는 별제 - P97

(6품) 벼슬이 내려졌다. 안의와 손홍록은 의병(義兵) 못지않은 의인)이자 애국자이고 문화유산지킴이의 상징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실록은 새로 4부를 복간하여 춘추관에 1부, 강화 마니산(후에 정족산으로 옮김),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후에 무주 적상산으로 옮김)에 4대 사고를 지어 보관하였다. 그리고 이들 사고의 관리는 사고가 소재한 산의 사찰에 있는 승려들이 맡았다. 정족산의 전등사, 오대산의 월정사, 태백산의 각화사, 적상산의안국사가 이러한 역할을 맡아 유사시 승군으로서 동원되는 승려들이 사고 관리 및 보존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묘향산 사고본을 무주 적상산으로 옮긴 것은 청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안전하게 남쪽으로 옮긴 것이었다. 왕조 말기까지 『조선왕조실록』은 춘추관과 4대 사고에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다. - P98

반세기 전, 1인당 국민소득 몇 백 달러밖에 안 되던 시절에 제정된 호화주택·별장 • 농가주택에 대한 규제를, 3만 달러가 넘는 지금이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마치 인구는 줄어드는데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던 것과 똑같은 우를 범하는 것이다.
부동산 파동의 근본 요인 중 하나는 아파트가 현찰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택에는 그런 환금성이 없다. 그렇다면규제를 풀어 주택건설 경기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아파트값 파동을 막는 첩경일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 진정 국토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인지 원점에서 생각하고 과감하게 바꿀 때가 되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집의 본원적 기능을 회복하는 길이며, 무엇보다도 우리네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 P105

한자를 알면 우리가 쓰고 있는 단어의 의미와 유래를 명확히 알수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마치 베트남처럼 자신들 언어의 뜻은다 잊어먹고 발음만 남는 상태로 된다. 베트남의 명소 할롱베이는하룡만(下), 즉 용이 내려온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베트남사람 중에는 그 뜻을 모르는 이가 많다. 남의 소리가 아니다. 한 학생이 "삼국시대가 무슨 뜻인가 했더니 세 나라가 있었던 시대군요"라고 했다는 것이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한자를 가르치고, 중고등학교에서는 한문을 가르치고, 대학에서도 한문을 교양필수 과목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외워서 익힐 것은 어려서부터 해야 한다. 26세가 넘으면 외우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그러지 않으면 나처럼 ‘그놈의‘ 한문 공부 때문에 평생을 학생으로 살게 된다. 한자교육은 요즘 말하는 인문학의 기초 체력을 기르는 필수과목인 것이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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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가의 필적은 물론이고 책을 조사하다 그림 화(畵)자만 나오면 내게 편지를 보내곤 하셨다. 당신은 노년에 귀가 어두워 보청기를 끼셨기 때문에 전화는 하지 않으셨다. 한번은 영남대 교수시절 선생에게 편지를 받았는데 핑크빛 딱지가 아롱거리는 예쁜꽃편지지에 옛사람의 글투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일주일이면 한 번, 못 돼도 한 달에 한 번은 뵙던 얼굴인데, 이 봄이 다 가도록 만날 수 없었으니, 저술에 전념함이 깊으신 것인지 영남의 꽃이 좋아 아니 올라오심인지. 다름 아니오라 책을 정리하다가 우리 회화사 연구에 도움이 될 듯한 자료가 나와 한부 복사하여동봉하오니 잘 엮어서 좋은 작품을 만드심이 어떠하실지. 부처님 얼굴 살찌고 아니고는 석수장이 손에 달렸다고 합니다.
하하하, 이만 총총.


당신이 80세일 때 내 나이 40세로 나이를 반으로 꺾어야만 동갑이 되는 젊은이에게 그런 애정을 베푸셨다. 선생은 또 대단히 정확한 분이셨다.  - P53

미소를 머금은 동안(童顔)과 걸음걸이가 이겸로 선생을 빼닮은 백발 어른이 내게로 다가와서는 "내가 통문관 셋째요"라는 것이었다. 고려대 중문학과의 이동향 명예교수이셨다. 이 교수는 요즘 선친 유품을 정리하다 이게 나왔다며얇은 서첩 두 권을 내게 건네주었다.
표지를 보니 한 권은 이광직이라는 문인이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 대하여 쓴 『단원화평」이고, 또 하나는 그림과 글씨의 기원에 관해 쓴 『서화연원』이라는 필사본이었다. 책장을 넘기자 표지 안쪽에는 안국동우체국 수령증이 붙어 있는데 놀랍게도 ‘수취인 유홍 - P56

준‘으로 쓰여 있었다. 깜박 잊고 부치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그 책갈피에는 이동향 교수가 소동파(蘇東坡)의 「전 적벽부(前赤壁賦)」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여 내게 쓴 한문 편지가 들어 있었다. 번역하면 이렇다.


모든 물건에는 주인이 있는 법인데, 이제 이 소책자가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이 또한 선친의 뜻입니다. 청컨대 웃으면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物各有主今此小冊子歸於主此亦先考之意也請笑納之


얼결에 건네받은 소책자를 펴 보는데 글자는 보이지 않고 산기이겸로 선생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책에서 삶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것만 같았다. - P57

인간이 만들어낸 생활 용기 중 백자를 능가하는 것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14세기 중국에서 처음 카오링 (고령토)이라는 백토 광석을 재료로 만든 경질백자는 이후 15세기엔 조선왕조 분원백자와 베트남의 안남백자, 17세기엔 일본의 아리타야키(有田焼), 18세기엔 독일 드레스덴의 마이센 자기로 이어지며 전 세계가 사용하는 생활용기로 되었다.
도자기는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도자기를 보면서 잘생겼다. 멋지다, 아름답다, 우아하다, 귀엽다, 앙증맞다, 호방하다, 당당하다, 수수하다 소박하다 등등 본 대로 느낀 대로 말하곤 한다. 그런 미적 향수와 미적 태도를 통해 우리의 정서는 순화되고 치유된다. - P81

각 나라의 백자에는 자연스럽게 그 민족의 미적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일찍이 일본의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한·중·일 동양 3국의 도자기를 조형의 3요소인 선, 색, 형태와 비교하면서 중국은 형태미가 강하고, 일본은 색채가 밝고, 한국은 선이아름답다고 했다. 때문에 중국 도자기는 완벽한 형태미를 강조하고, 일본 도자기는 화려한 색채미를 보여주는 데 반하여 한국 도자기는 부드러운 선맛을 자랑한다고 했다. 그래서 도자기 애호가들은 중국 도자기는 멀리 높은 선반에 올려놓고 보고 싶어하고,
일본 도자기는 옆에 가까이 놓고 사용하고 싶어지는데, 한국 도자기는 어루만지고 싶게 한다는 것이다. 그 따뜻한 친숙감과 사랑스러운 정겨움이 조선백자의 특질이다.
백자는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시대적 취향을 절로 드러낸다. - P82

똑같은 항아리, 병이지만 조선 전기 백자는 새로운 이상국가를 건설하는 왕실문화를 반영하는 귀(貴)티가 역력하고, 조선 중기의백자는 선비 취향의 문기가 가득하며, 조선 후기의 백자는푸르름을 머금은 유백색에 기형이 넉넉하여 부(富)티가 흐른다.
세계 도자사의 시각에서 조선백자의 특질을 보면 순백에의 사랑이 역력하다. 중국, 일본, 유럽의 모든 나라가 말이 백자이지 청화 안료로 문양을 가득 배치하며 화려함을 지향하며 나아가서 백자위에 에나멜 안료로 채색을 가한 유상채(彩)와 금속기까지결합한 기발함을 추구하고 있을 때, 조선은 변함없이 품위 있고,
단아하고, 넉넉한 여백의 미를 보여주는 고고한 백자의 세계로 나아갔다. 이것이 한국미의 특질이다.
조선백자 중에서도 18세기 전반기, 영조 시대에 금사리 가마 - P83

에서 만들어진 백자 달항아리는 조선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8세기에 높이 한자반(45센티미터) 이상 되는 백자 대호는 조선이외에 어느 나라에서도 만들어진 예가 없다. 아직 기계식 동력이발명되지 않은 때여서 수동식 물레로는 이처럼 둥근 원형의 항아리를 만든다는 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동시대 항아리들은 고구마처럼 길거나 작은 몸체에 목을 길게 붙이곤 했다. - P84

그러나 달덩이 같은 항아리를 만들고 싶었던 조선 도공의 예술의지는 마침내 커다란 왕사발 두 개를 아래위로 이어 붙여 달항아리를 만들어냈다. 때문에 달항아리는 기하학적인 동그라미가 아니라 둥그스름한 볼륨감을 지니고 있다. 그로 인해 완벽한 기교가주는 꽉 짜인 차가운 맛이 아니라 부정형이 주는 여백의 미가 있다.
최순우는 이를 어진 선맛이라고 표현하면서 달항아리를 보면 잘생긴 종갓집 맏며느리를 보는 듯한 흐뭇함이 있다고 했다. 이동주는 선비문화와 서민문화의 절묘한 만남이라고 하였고, 김원용은 잘 만들겠다는 욕심조차 없던 도공의 무심한 경지라고 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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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희성 시인은 「동년일행(同年一行)」에서 이렇게 읊었다.


괴로웠던 사나이
순수하다 못해 순진하다고 할 밖에 없던
남주(南柱)는 세상을 뜨고
서울 공기가 숨쉬기 답답하다고
안산으로 나가 살던 김명수(金明秀)는
더 깊이 들어가 채전이나 가꾼다는데
훌쩍 떠나
어디가 절마당이라도 쓸고 싶은 나는
멀리는 못 가고
베란다에 나가 담배나 피운다. - P16

또 누구는 말한다. 싸우지 않고는 살 수 없었고, 술이 아니면 잠들 수 없었던 저 캄캄한 시절에 담배마저 없었다면 그 간고한 세월을 어떻게 견뎠겠냐고. 유신 시절 감옥에서 출소한 어느 민주인사는 바깥세상이 감옥과 다른 것이라곤 담배 피울 수 있는 자유가있는 것뿐이라고 했다.
담배는사람 사이를 가깝게 해준다. 라이터가 귀하던 시절 남의담뱃불을 빌려 불을 댕기는 모습은 인생살이의 살내음을 느끼게한다. 『해방기념시집』(중앙문화협회 1945)에 실린 이용악의 「시골 - P16

사람의 노래」는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밤기차 안에서 "어디루 가는 사람들이 서로 담뱃불 빌고 빌리며/나의 가슴을 건너는 것일까"라며 침묵 속에 오가는 온정을 그렸다.
사실 나는 1994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둘째 권을 펴내고 나서 담배를 끊었다. 그러던 내가 4년 만에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된것은 1997년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를 위해 방북하면서였다. 북측 인사들은 만나면 담배부터 권했다. 그때마다 나는 손을저으며 사양했다. 모처럼 친선적 관계를 맺고자 찾아가서 손사래부터 치는 것이 멋쩍었고 그들은 나를 무슨 골샌님처럼 보는 것같았다. - P17

사람들은 어려서 자랄 때는 모두들 꽃같이 되기를 바라지만 나이가 들 만큼 들면 잡초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삶을 부러워하는 것은 아니다. 이생진 시인은 「폴 되리라」에서 이렇게 읊었다.


풀 되리라
어머니 구천에 빌어
나 용 되어도
나 다시 구천에 빌어
풀되리라 - P22

흙 가까이 살다
죽음을 만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풀 되리라


잡초란 생물학적인 용어가 아니라 곡식, 농작물, 원예작물 등인간에 의해 재배된 것이 아닌데 저절로 번식하는 잡다한 풀을 말한다. 잡초라면 흔히 개망초, 까마중, 쇠비름, 강아지풀, 피, 토끼풀, 엉겅퀴, 질경이 따위를 떠올리지만 맛있는 나물의 재료인 달래, 냉이, 씀바귀, 고사리, 고들빼기, 쑥, 머위도 밭에서 농사를 방해하면 잡초다. - P23

야생초라 불리는 제비꽃, 초롱꽃, 달개비, 민들레, 쑥부쟁이, 부들꽃창포 등이 잡초로 분류되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그런데 가내린 꽃을 피우는 풀에 애기똥풀, 며느리밑씻개, 개불알풀이라 이를 짓고 업신여긴다.
늦여름 따가운 햇볕에서 농부들은 논밭에 무성히 자라나는 잡초를 제거하느라 구슬땀을 흘린다. 여름철 농사는 잡초와의 전쟁이다. 인류는 농업을 시작한 이래 곡식과 농작물의 영양소를 씨앗이나 열매에 축적하도록 개량해왔다. 이에 비해 잡초는 생태 그대로 영양소를 성장과 번식에 사용한다. 그래서 곡식과 농작물은 잡초를 이길 수 없다. 그 억센 생명력은 이리저리 시달리며 사는 민초의 삶을 연상케 한다. 김수영 시인은 「품」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 P23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그러나 잡초는 무죄다. 잡초의 해악이란 곡식과 농작물의 생산력 증대라는 기준에서 말하는 것일 뿐 잡초는 생태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잡초는 땅의 표토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잡초들이 사라지면 토양이 황폐화된다. 미국 텍사스의 한 과수원에서는잡초의 씨를 말려버렸더니 극심한 토양침식과 모래바람으로 몇년치 농사를 망쳤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과수와 잡초를 공생시키고 있다고 한다. - P24

잡초는 지구의 살갗이다.


김정헌과 나는 청옥산 육백마지기의 잡초공적비를 떠나면서이생진 시인의 「풀 되리라」를 큰 소리로 낭송하였다.


물 가까이 살다
물을 만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풀 되리라

아버지 날 공부시켜
편한 사람 되어도
나 다시 공부해서
풀되리라 - P28

봄이 왔다. 새봄을 맞으며 추사 김정희는 "봄이 짙어가니 이슬이 많아지고 땅이 풀리니 풀이 돋아난다(春濃露地暖草)"라며 향기 은은한 난초를 그렸지만 나는 봄꽃이 만발한 유적지를 생각하며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강진 백련사의 동백꽃, 선암사 무우전의 매화, 부석사 진입로의 사과꽃, 한라산 영실의 진달래, 꽃의 향연이 벌어지는 서울의 5대 궁궐⋯⋯ 전 국토를 거대한 정원으로 삼으며 이 땅에 살고 있는 자랑과 행복을 누리고 있다.
봄의 전령, 화신(花信)은 남쪽으로부터 올라온다. 지구 온난화로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봄꽃의 개화에는 꽃차례가 있다. 2월말이면 남쪽에선 동백이 피고 매화가 꽃망울을 맺었다는 소식이올라오기 시작하여 3월 하순이 되면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만 바 - P29

쁘던 텔레비전 뉴스도 연일 꽃소식을 전한다.
화신은 언제나 동백꽃부터 시작된다. 엄밀히 말하면 동백은 봄꽃이 아니라 이름 그대로 겨울 꽃이다. 제주도에는 눈 속에서 꽃피우는 설동백도 있다. 그래도 동백은 봄꽃의 상징이다. 동백나무는 집단을 이루는 속성이 있어 거제도, 오동도를 비롯하여 한려수도와 다도해의 섬들엔 어디를 가나 지천으로 널려 있다. 동백은윤기 나는 진초록 잎새마다 탐스러운 빨간 꽃송이가 얼굴을 내밀듯 피어나 복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동백꽃은 반쯤 질 때가 더 아•름답다. 동백꽃은 송이째 떨어진다. 그리하여 동백나무 아래로는 떨어진 꽃송이들이 붉은 카펫처럼 깔려 있다. - P30

보길도 고산 윤선도의 원림인 세연정에 떨어진 동백꽃이 둥둥떠 있을 때, 다산 정약용이 유배 시절 즐겨 찾았던 강진 백련사의동백나무 군락지는 천연기념물인데 그 숲속 자그마한 승탑 주위로 떨어진 동백꽃이 가득 널려 있을 때는 가히 환상의 나라로 여행은 것 같다.
봄꽃은 생강나무, 산수유, 매화가 거의 동시에 피면서 시작된다. 생강나무는 산에서 홀로 자라고, 산수유는 마을 속에서 동네사람들과 함께하지만, 매화는 정성스레 가꾸어지기도 하고 밭을이루며 재배되기도 한다. 돌담길이 정겨운 구례 산동마을에 노목으로 자란 산수유가 실로 장하게 피어나고, 광양 매화마을은 일찍부터 매화 축제를 열고 있어 꽃소식은 섬진강에서 올라온다.
어디에 핀들 마다하리오마는 매화의 진짜 아름다움은 노매(老 - P30

梅)에 있다. 노매는 아름다운 늙음의 상징과도 같다. 수령이 300년에서 500년 이상 되는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 순천 선암사의 무우전매, 구례 화엄사의 매화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율곡매는 몇 해 전부터 앓고 있는데 이제는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안타까운 진단이 내려졌다. 특히 오래된 사찰의 노매는 격조 높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양산통도사의 자장매를 그려본다. 그래서 절집의 진정한 자산은 노스님과 노목이라고 한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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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 호롱불을 밝히고



밤이 이슥해지자 달이 떠올랐다.
부풀어 터질 듯 팽팽히 알을 빈 섣달 보름의 만월이었다. 달과함께 산속이 밝아왔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들어차 있는 숲속이었지만 그 대부분이 잡목들이어서 잎새를 지운 앙상한 가지 새로 달빛은 땅 위에 드문드문 얼룩을 그리며 키 작은 관목과 말라붙은 덤불들을 드러내주고 있었다.
엊그제 내린 눈 위에 하얗게 반사되어 달빛은 여기저기에 자그맣고 신비스런 발광체를 흩뿌려놓기도 했다. 이따금 마른 갈나무 잎새가 바스락 소리를 낼 뿐, 이날따라 사위는 기이할 만큼짙은 적막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산 아래쪽에선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아들은 총을 눕혀두고바위에 비스듬히 몸을 의지한 채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멀리적벽(赤壁)으로 여겨지는 봉우리가 맞은편에 도톰하게 솟아 있 - P217

고, 가까이로는 들판에 누운 전답들이 달빛 아래 희미하게 눈에잡혔다. 그 들판이 산기슭과 만나는 지점, 산자락의 우묵한 끝머리에 청풍리(淸風里) 마을은 들어앉아 있었다.
지금 저만치 들판을 돌아나간 희끗한 띠가 동복면(同福面)으로 통하는 길일 게다. 그 길을 따라 산을 향해 거슬러오노라면 청풍리 동구 밖에 이르고, 이내 초가지붕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들은 달빛에 희부연하게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을 눈을 감고서라도 훤히 그려낼 수가 있었다. 마을 초입의 사백년 묵은 느티나무와 그 아래 돌을 깎아 세운 송덕비며 효자비, 길을 따라 흐르는 실개천과 대보름날 깡통에 불을 지펴 돌리며 놀던 중머리 밭둑. 그리고 당집 너머 저수지 언덕은 바람이 잔날에도 하늘 높이 연을 띄워올릴 수 있는 유일한 자리였다. 들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 무렵, 느티나무를 지나 마을로 접어들면 초가집들은 도란도란 얼굴을 맞대고 있었고, 굴뚝마다엔 하얀 연기가 실타래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을 언제나 볼 수 있었다. - P218

아들은 그 낯익은 고향 마을에서 태어났고 열아홉의 나이를 거기에서 먹었다. 쇠똥이 질펀히 깔린 고샅이며 담장의 돌멩이 하나하나에까지 그의 눈길이 가 닿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집을 멀리 떠나본 적이 별로 없어서, 간혹 장날이면 면소재지에 들러 오곤 했을 뿐 산길로 한나절 걸리는 읍내까지 나가본 기억이라곤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만치 아들은 고향마을을 맴돌며 살아온 것이었다.
시상에, 저렇게 집을 코앞에 두고도 내려갈 수가 없다니·......
생각할수록 아들은 기가 막혔다. 당장이라도 산길을 뛰어내려가 눈에 선한 사립문을 들어서며 어무니, 하고 부를 수 있을 것 - P218

만 같았다. 하지만 옆구리에 닿는 쇠붙이의 섬뜩한 촉감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러버렸다. 아들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흠칫 제풀에 놀라며 곁눈질을 했다. 저만치 나무 아래서 두사람은 뭔가 수군거리고 있었다. 잔뜩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으므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아들은 다시산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마을은 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달빛 아래 초가지붕들이 무덤처럼 동그마니 모여 있을 뿐 살아 움직이는 것의 기척이라곤아무것도 없었다.
무등산 사방 오십 리 안팎으로 소개령이 내려진 지도 벌써 석달이 지났다. 마을마다 사람들이 비워두고 떠난 집들만 을씨년스레 옹송그리고 있었다. 그나마 불에 타서 온전한 꼴을 하고 있는 집은 드물었다. 그 흔한 개 짖는 소리도 끊겨버렸고, 아침이와도 어디서고 닭은 울지 않았다. 청풍리뿐만 아니었다. 지금, 적벽 아래 면소재지 쪽에서도 불빛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거대한 파충류처럼 무등산에서 흘러내려온 산줄기가 짙게 주름을 드리운 채 누워 있을 뿐이었다. - P219

지금의 행복동이 들어선 일대는 본디 무허가 판잣집들이 난립해 있던 지독히도 가난한 동네였었다. 시에서 지역 일대에 대한재개발을 시작하면서 부스럼 딱지같이 더덕더덕 붙어 늘어서 있던 꼴사나운 판자촌을 강제 철거했기 때문에 한동안 철거민들과시청 사이의 충돌로 인한 크고 작은 소란으로 그곳의 이름이 시민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적이 있긴 있었다. 하기야 아직도 행복동북쪽 산기슭엔 그 당시 쫓겨난 철거민들 중의 이백여 가구가그쪽으로 옮겨가서 역시 또 다른 판잣집을 짓고 끈질기게 버티고 있음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벌써 오륙 년 전이므로,
제 목구멍 풀칠하기도 바쁜 사람들의 뇌리에서 그새 까맣게 잊혀져가고 있는 터였고, 행복동은 이 도시에서도 손꼽는 부자촌으로 어느덧 부상해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요즘 그 난데없는소문에 휘말려 행복동 주민들은 구설수에 올라 있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마치도 자기들이 예전에 그곳으로부터 쫓겨난 철거민이라도 되는 양 까닭 없는 악의까지 지닌 채 그 해괴하고 망측한소문을 자진해서 열심히 퍼뜨리고 다니는 형편이었다. - P293

대학 교수와 신문사의 사회부 기자와, 인기 작가와, 가난한회사원은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서로의 얼굴을 겸연쩍게 흘끔거리면서 바로 조금 전까지 자신들을 열광케 했던 그런 갖가지의사건들이 도대체 자신들에게 얼마만큼의 무게로 관련지워져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열띤 분위기가 스러져버린 뒤에 남은 지금의 이 알 수 없는 허탈감과 배신감은 또 무엇인가에 대하여 침묵속에서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저마다 곰곰이 따져보고 있었다.
"왠지 허전하군요. 그렇잖습니까."
침묵을 깨며 잠시 후에 허교수가 말문을 열었다. 그는 묵묵히 앉아 있는 다른 세 사람의 표정 속에서도 역시 자신의 것과 비슷한 느낌들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군요. 뭔가 비어 있는 느낌입니다. 오래 지니고 있던 어떤소중한 것을 문득 떠나보낸 느낌 말입니다. 이야기를 너무 많이한 탓일까요."
신문 기자가 약간 감상적인 눈빛으로 허교수의 말에 동의했다. 그런 우울한 감상은 문창부씨에게도 감염되어졌다. - P313

작가 후기


부모를 따라서 처음으로 섬을 떠나 뭍으로 옮겨온 후, 나는 미술 시간이면 언제나 바다와 배를 그려넣곤 했었다. 기차와 비행기와 빌딩만을 그려대는 도회지의 아이들 틈에서 이방인 취급을받아야 했을 때마다, 나는 늘 홀로 낙심하여 담 밖을 맴돌며 그들의 성 안으로 들어가기를 열망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모르는 혼자만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치 무슨 은밀한 죄의 기억처럼 내심 자랑스럽기도 했었다. 결국 그 어린 시절 미술 시간의 그림 속에서처럼 나는 지금껏 늘 혼자서 새로운출항을 꿈꾸며 커온 셈이지만, 그러나 내가 띄운 배는 번번이 가닿을 곳을 미처 찾지 못하여 갈팡질팡 떠돌기만 하다가 종내는오던 길로 되돌아와버리곤 했다.
그 동안 써온 것들을 막상 한데 모아놓고 보니 그렇듯 물만 가득히 차오른 배를 끌고 초라하게 되돌아온 때와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오직 진실된 삶만이 진실한 목소리를 얻을 수 있 - P329

을 것이므로,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떳떳해지도록 애써야 할 터인데도 여전히 그렇지가 못하다. 하지만 이 첫번째 작품집이 내게는 또 하나의 새로운 출항을 꿈꾸게 할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하는 바람이다.
참으로 주위의 여러 귀한 분들로부터 과분한 정을 받아 누리며 살고 있음을 항상 잊지 않고 있다. 그들의 따뜻한 격려와 애정 어린 눈길은 앞으로도 가슴속에서 나와 오래도록 함께 살아갈 것임을 또한 믿는다. 부족한 작품이지만 펴내게 해주신 문학과지성사의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착한 우리집 식구들에게 이 책이 내가 바치는 작은 선물이 되었으며 한다.

1984년 6월
임철우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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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안에는 바람 소리


삼동. 시퍼렇게 날 세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말갛게 개어 있던 밤하늘 어디에 숨어 있다가 그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토록 바람은 맵차고 옹골스런냉기를 품고 있었다.
맨 처음 마을 뒷산 너머 섬의 북쪽에서부터 일어난 바람은 삽시에 뒷산 잔등을 타고 넘어 내달려왔고 이내 황지리(黃地里) 집집의 지붕을 새카맣게 덮쳐누르듯 쏟아져들어와 온 동리를 움찔움찔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몇 개 남은 이파리를 떨구며 뒤안 감나무를 뒤흔들다가 낡은 기와지붕 추녀 끝 험상궂은 귀면에 무턱대고 부딪쳐보기도 하고, 배암 감기듯 칭칭 뻗어나간 마른 담쟁이덩굴을 휘저어놓은 다음, 쇠똥이 여기저기 내갈겨진 좁은고샅을 잽싸게 핥고 다니기도 하면서 바람은 난데없이 나타나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일찌감치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흐리끼한 석유 등잔불 아래 엎디어 이런저런 별스럽잖은 얘기 몇 마디씩 나누다가 선잠이 - P150

들었던 마을 사람들은 그 소란한 바람 소리에 깨어 일어나 방문을 빠끔 열고 내다보았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소름끼치게 싸늘한 바깥 공기에 놀라 냉큼 문고리를 잡아채기도 하는 거였다. 논이 부족한 섬이라 볏짚을 구하기가 힘들어 올해도 지붕을 이지못한 채 겨울을 넘기게 된 집의 남자들은 가뜩이나 허름한 초가지붕을 새삼스레 걱정했고, 여자들은 내리감기는 눈두덩을 억지로 깨어 치켜올리며 마당으로 나가 장독대며 부엌 바깥쪽에서바람에 쏠려 달그락거리고 있는 자질구레한 세간 따위를 건성단속해두고는 진저리를 치며 도로 방으로 들어와버렸다.
아따, 오늘밤엔 된통으로 큰 바람이 불랑갑네.
하늘 꼴새가 심상찮구먼, 눈이 쏟아질지도 모르겠는디.
젠장맞을, 내일 식전 아적에 건장 보러 갈라먼 에지간히 춥겄다. 끄응. - P151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으며 두터운 솜이불 속으로 뒤척뒤척 파고들었다. 문밖에 나갔다 들어온 사람은 이빨을 다다닥 맞두드리며 황급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더러는 아랫목을 더듬어 발바닥을 쭈욱 뻗어보다가 거기서 방금 얼음통에서 건져낸듯한 누군가의 발과 맞닿기라도 했는지 깨액 비명을 지르며 발을 옴츠리기도 하였다.
지랄하고, 먼 놈의 발무가지가 그라고 차다이. 아, 발무가지좀 저만큼 치워.
으마마, 치운 디 나갔다 들어온 사람 심정은 모르고 속 펜한소리하고 있네이.
그렇게 한차례 어수선하게 동리를 뒤흔들어놓고 난 바람은 마을을 비잉 돌아서 이번엔 바다를 향하고 냅다 달려가버렸다.  - P151

바다 쪽에서는 끊임없이 씨근덕대는 파도 소리가 세찬 바람의 틈을 헤집고 한층 더 숨가쁘게 들려왔다.
차츰 하늘 한쪽부터 시커멓게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구름이었다. 바람이 먹장떼 같은 구름을 왁자하니 더불고 내려오고 있었다. 스무이렛날. 구름이 손톱달 뾰족한 귀퉁이를 덥석 깨물어뜯더니 눈깜짝할 새에 통째 삼켜버리고 말았다. 그 틈에 겨울 하늘 가득히 흩어져 있던 별들이 물기를 머금고 오르르 몸을 떨었다. 이윽고 그 무수한 별들의 무리마저 구름이 달려들어 마저 해치우고 나자 하늘은 온통 먹통을 뒤집어쓴 듯 깜깜해져버렸다.
바람은 끊임없이 불어대고, 이따금 그 바람을 거슬러 뚫고 우우웅, 차르르르, 섬 기슭을 핥는 물소리만 숨이 가빴다. 얼핏 마을, 아니 섬 전체가 형체도 크기도 알 수 없는 어떤 거대한 괴물의 가슴팍에 잔뜩 짓눌려 있는 느낌이었다. - P152

밤이 꽤 깊은 시각. 구십여 호가 채 차지 못하는 황지리 마을에 아직 불을 끄지 않고 있는 집이라곤 고작 서너 채뿐이었다. 예전 같으면야 긴긴 겨울밤, 새끼도 꼬고 더러는 묵내기 화투다윷놀이다 해서 간간이 떠들썩한 웃음이 터져나올 법도 했지만 어느덧 그런 풍경을 마지막 본 지도 여러 해 지난 성싶다. 어수선한 세상은 이렇게 조그맣고 보잘것없는 섬마을까지도 몰라보게 바꿔놓은 거였다.
마을 동쪽으로는 이웃 마을과 이어지는 작은 신작로가 서투른솜씨로 갈라놓은 가르마처럼 멀리 고갯마루까지 뻗어 있고, 그신작로가 시작되는 동구 밖 맨 끝 어귀에 허름한 초가집 하나가납작 엎디어 있었다. 돌담에 감싸 안기어 있는 유난히도 추레하게 낡은 집이었다. 지붕 여기저기서 삐죽삐죽 내밀고 있는 말라 - P152

빠진 잡초 때문에 어찌 보면 엉성한 까치 둥지같이도 뵈고, 되는대로 풀어헤친 미친년 머리채 같기도 했다. 근처의 가장 가까운집과는 어느 정도 간격을 둔 외딴집인 데다가, 하고 있는 외양까지 그 모양이니 누구라도 대뜸 첫눈에 폐가나 빈집이 아닌가 여길 지경이었다.
그런데 지금 바로 그 집에서 명주실 같은 몇 가닥 흐린 불빛이호르르 새어나오고 있는 거였다. 문고리가 손가락을 쩍쩍 빨아대는 이 추운 겨울밤, 쉴새없이 윙윙거리는 독기 품은 칼바람을막아내기엔 그 집의 때묻은 창호지가 너무 허술하고 얇아 뵀다. 그래서인지 그을음이 켜를 이룬 문틈으로 우러나오고 있는 불빛은 임종하는 노인네의 사위어들어가는 숨결처럼 가냘프기만 했다. - P153

바람이 아까보다 더욱 세차게 불어왔다. 삘릴리리, 헤어져 너덜거리는 문풍지가 피리 소리를 내다가 멈췄다. 불빛이 까마득자지러졌다가 되살아났다.
방안엔 두 사람이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문 쪽으로 등을대고 누운 노모는 잠이 들었는지 흠뻑 뒤집어쓴 이불깃 새로 머리끝만 기웃 내밀고 있는데, 그 머리카락이 반이나 허옇게 세어있었다. 그 너머 모로 누운 아들은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눈을 굴리며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광대뼈 위로 움푹 패어 들어간 눈알이 불길한 꿈을 꾸는 사람의 그것처럼 매앵했다.
밖은 끊임없이 들이치는 바람 소리, 그리고 이따금씩 섞여 날아오는 파도 소리가 미묘한 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삘릴리리, 또문풍지가 울었다. 바람이 방문을 제법 거칠게 흔들었고 잠겨진 - P153

문고리가 두어 번 달그락거렸다. 등잔불이 기우뚱 잦아졌다가간신히 몸을 일으켜세웠다. 순간 아들은 천장이 한꺼번에 펄럭무너져내리는 듯한 환각을 일으켰다. 움찔 몸을 사리며 그는 겁에 질린 시선으로 천장의 구석진 네 귀퉁이를 주저주저 훔쳐보기 시작했다.
"어, 어무니."
아들의 입에서 겨우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다급하면서도 팽팽히 담겨져 있는 음성이었다. 어머니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무니, 어, 어무니."
그제서야 이불 속에서 노파가 머리를 들었다. 잠이 설 들었던 참이었는지 눈자위가 눈곱으로 뀌적뀌적했다.
"왜 그러냐, 으응?"
못박힌 듯 뻣뻣이 굳어 있는 아들을 보자마자 그녀는 휑한 눈을 치뜨며 후두둑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그녀는 놀라 아들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을석아. 어디가 아프냐. 아파서 그러는 거이야?"
노모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 P154

우수수 떨어진 감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쏠려 뒤란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빈 외양간에선 털썩털썩 가마니 날리는 소리가 났다. 뒷산 대밭에선가. 수많은 사람들이 휘파람을 불어대는 것처럼 기묘한 소리가 이따금 바람 끝에 묻어와 툇마루에 흩어졌다.
지금 그 바람 속에서 아들은 어지러운 발소리를 듣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쪽으로 내달려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눈부시게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어둠 저편에서 그들은 옷자락을 하얗게 너울거리며 흐르듯 춤추듯 가볍게 떠오고 있었다. 문득 어디선가 자지러지는 웃음 소리. 발소리, 확성기 소리. 소리.
아악, 별안간 비명이 아들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순간 아들과 어머니가 동시에 벼락치듯 튕겨 일어났다. 아들은 벌써 몸을 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악 뛰쳐나가려는 아들의 다리를 그녀의 두 팔이 억세게 그러안았다. - P156

이윽고 을석은 일어섰다. 내려가야 할 때가 된 거였다. 짧은순간, 그들 다섯 사람은 팽팽히 고개를 들고 일어서는 불길한 긴장감을 저마다 의식했다. 숨이 컥컥 막혀왔다. 을석은 깨달았다. 그들은 각기 을석을 저울질해보고 있었으며 그리고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는 중이었다. 세상에서 비밀을 알고 있는 건 오직 그혼자뿐. 까마득한 벼랑 꼭대기에서 그들 넷은 지금 끝이 다른 네가닥의 밧줄을 을석의 손바닥 안에 건네주려는 거였고 그 밧줄끝엔 다름아닌 그들 네 개의 목숨이 매달려 있는 셈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벼랑 아래로 내려가기 전, 늦기 전에 자신들의 생명을지키기 위해서라면 밧줄을 쥔 배신자의 손목을 가차없이 잘라내버릴 수도 있을 거였다.
벗어나고 싶다. 어서 도망치고 싶다. 거의 질식할 것 같은 순간이었다. 을석의 두 무릎이 무섭게 떨려왔다. 한치 앞을 분간키어려운 암흑의 정적에 갇힌 채 그들 모두는 다만 다섯 개의 벌떡이는 심장의 고동과 거친 숨소리를 서로 헤아리고 있었다. 딸각, 사내가 있는 쪽에서 가볍게 총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 P167

어둠



화장을 하기 위해 거울을 마주하고 앉는다. 세 개의 서랍이 서로 제각기 끝을 물고 물린 채 옆으로 나란히 달려 있는 화장대는유난히 커다란 거울 때문에 늘 무너져내릴 듯 불안하다. 거울 속엔 흘러내리지 않도록 머릿단을 수건으로 꼼꼼히 받쳐 맨 여자가 나를 쏘아보고 있다. 막 세수를 끝낸 여자의 눈가엔 군데군데엷은 잔주름이 드러나 있고 귓불 언저리엔 버섯처럼 각질의 마른버짐도 몇 돋아 있다.
난 거울 속의 여자와 결코 눈을 맞추지는 않는다. 그건 버릇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않기로 했던 것이다. 맞닿을 듯 가까이서 똑바로 나를 노려보고있는 거울 속 여자의 눈은 언제나 소름끼치도록 싸늘한 적의와간절한 파괴에의 욕구로 비수처럼 불길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그것이 다만 나의 투영된 허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인정할 수가 없었고, 그것과 마주하고 앉기만 하면 이내 새파랗게 공포에 질려버리곤 했었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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