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우


멋있으면 다 언니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를 쓰고, 『여자 둘이살고 있습니다 퀸즐랜드 자매로드』를 김하나와 함께 썼다. 팟캐스트 <여둘: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를 제작, 진행하고 있다.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 편지 저편 ‘혼비씨‘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꽃이 피었다가 졌다.
시간이 사람에게 하는 일이 그사이 어김없이 우리에게 일어났다. 풍경 사이로 끊임없이 일상의 피로를 해결되지 않는문제들을 늙음과 죽음을,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흘려보내는 것 말이다."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아무튼, 술』 『다정소감을 쓰고, 전국축제자랑을 박태하와 함께 썼다. 못 견디게 쓰고 싶은 글들만을 천천히 오래 쓰고 싶다.


"당연히 최선을 다하겠지만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하지는 않는것을 실현하는 여러 방법이 있을 텐데, 그중 ‘함께 나눠서 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꼭 물리적인 몫의 나눔이 아니더라도함께 꾸준히 일상을, 웃음을, 마음을 나누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앞으로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어려서부터 호칭 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게 자연스러운 문화권 사람들과는 달리, 어려서부터 한국어 호칭이 상대방에 대한 나의 태도를 담는 그릇으로서 기능하는 것에 익숙해진 저 같은 사람은 머리로는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서는 이게 분리가 칼같이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공식석상에서는 "김연경씨"라고 말하겠지만, 제 마음속에서는 ‘연경언니‘ ‘연느님‘인 것처럼 말이에요. 이럴 때 저에게 "김연경씨"는 의미의 누수, 존경심의 누수를 넘어 정체성의 누수가 생기는 단어가 되어버리고 말아요. ‘언니‘나 ‘선배‘ 같은 호칭에 이미 새겨진 위계가 싫으면서도, 호칭을 버리는 것이 언어적 평등의 시작임을 알면서도, 나이나 직함과 전혀 관계없이 순수한 존경심을 담아낼 명명법을 찾고 싶은 관습적인 욕망 또한 남아 있어서, 찾다보면 결국 위계적 호칭으로 돌아가게 되는 이 도돌이표. 현재우리가 갖고 있는 언어 체계 안에서는 존경심을 담는 호칭으로 ‘언니‘나 ‘선배‘의 의미를 확장하는 것 이상의 대안은 없으니까요. - P21

재미있냐고 자꾸 물어보는 선생님이 다음달 말일 자유 탁구 시간에 다른 반 풋내기들과 친선 경기를 가져보자고 하셔서 저희는 약간 흥분 상태입니다. 승부 vs. 상부상조의 혼란에다 경쟁자 vs. 같은 팀 복식조 파트너로서의 혼합된 감정까지 더해져 아주 파란만장한 한 달을 보내게 될 예정입니다. 어쨌거나 이 지름 40밀리미터짜리 가볍디가벼운 공이 만들어내는 ‘탕타당타당‘과 ‘통토동토동‘에 집중하는 동안만은 많은 시름을 잊고 있습니다. 천둥같이 발 구르는 소리에 놀라고 분하기도 하지만요.
누군가는 속이 빈 나무를 두드리는 데 집중하며, 또다른 누군가는 속이 빈 플라스틱 공을 쫓아다니는 데 몰두하며 자신만의 번뇌를 다스리는 거겠죠. 이 목- 탁 - 구가 어디로 나아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당분간은지속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믿지 못하시는 것 같아도재미가 있거든요. 재미와 (얄)미움이 승부와 상부상조처럼 공존하는 탁구입니다. - P55

혼비씨의 편지를 읽으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진되었다고, 지금 상태가 번아웃이 맞다고 혼비씨가 알아차렸다는 점 말입니다. 그걸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일 거예요. 일을 의식적으로 줄이는 것도, 작정하고 쉴 틈을 만드는 것도, 새로운 취미생활을 시작해보거나 뭐든 에너지를 채우는 활동도 말이죠.
한국 사회의 많은 일하는 사람들처럼 저 역시 번아웃으로 짐작되는 시기를 지나온 것 같아요. 짐작이라 말하는 건 그때 나에게 벌어지는 일이 뭔지 당시에는 스스로잘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험들은 한창 그가운데 있을 때는 진행중이라는 게 보이지 않다가 지나가고 나서야 그 시간이 뭐였는지, 그때 내가 어땠는지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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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모레아 기행』에서모뎀바시아 편을 읽어보면 모넴바시아를 아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믿을 만한 안내자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에 따라 모넴바시아를 조금 더 파악해보면 이렇다.


어떤 사람들이 여기 살았을까? 바람, 바다, 외로움, 가난이 망치가 되어 영혼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것을 견딘 사람들.
이곳에 없는 것?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속삭일정원. "여기는 비옥한 땅이야. 이곳을 잃으면 안되니까 고개를 숙이고 폭군과 화해하자!"라고 말할 경작지.
있는 것? 무자비한 바다.
할 수 있는 일? 어부, 무역상, 해적.
비잔틴 제국과의 관계? 비잔틴 황제들은 이렇게판단했다. "걔들은 그냥 놔둬" (그들은 오직 독립,독립만을 원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모넴바시아 여행기를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 P160

폐허에서 여행자는 희망 없는 투쟁에 기꺼이 뛰어드는 영혼을 본다. 아무런 보상을 기대하지않고 치열한 투쟁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영혼을 보는 것이다. 그 영혼은 승부를 떠나서 마치 게임을 하듯 그 투쟁에 몰두하기 때문에 즐거움을느낀다. 그리하여 내 영혼은 이렇게 맹세한다. 다시는 내 마음에 인생의 환락, 도취, 근심으로 부담주지않으리라. 나는 허공에 튀어 오르는 불꽃같은 상태로 내 영혼을 보존하리라."


니코스의 충실한 독자였던 나는 이 문장이 낯익어도 너무 낯익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일생에 걸쳐 아무런 대가도 보상도 바라지 않고(대가나 보상 때문에 하지 않게 되는 일이 너무 많으므로) 용감하게 삶 속으로 돌진하기를 원하고 또 원했다. ‘튀어 오르다‘ ‘솟구쳐 오르다‘는 그가 특히 좋아하는 표현으로 그는 어디 가서 뭘봐도(꼭, 모뎀바시아가 아니어도) 허공에 튀어 오르는 불꽃이 되고 싶어 했지 납작 엎드리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여행자는 풍경을 보는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본다고 한 것은 프루스트였던가?). - P161

그때부터 마법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정신을 조금 차리고 처음에는 눈동자만 나중에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위를 봐도 옆을 봐도 아래를 봐도 모두 다 별이었다. 어떤 꿈에서도 상상해본 적 없는 꿈같은 우주가 눈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렇게 크고 선명하고 고요하고 가까운 밤하늘은 처음이었다. 꼭 별이 나를 하늘로 끌어당긴 것처럼 내가 땅이 아니라 땅과 하늘의 중간계에 붕 떠 있는 것같았다. 느닷없이 찾아온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나는 길잃은 나방 한 마리와 함께 한쪽 발은 맨발인 채로 별에 에워싸여 있었다. 저 멀리 내가 저녁을 먹던 식당들도 불빛하나씩만을 켜둔 채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 외로운 불빛아래 잠든 사람들 머리 위에도 커다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바위도 거대했고 바다도 거대했고 하늘도 거대했다. 지상의 거대한 공간들은 별들이 가득한 영원으로 통하고있었다. 우리 자아 너머의 세계이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인간의 마음도 별 하나를 품을 만큼, 우주를 품을 만큼 거대할지 모른다. 너무 애틋했다. 너무 경이로웠다. 숭고했다. 서로 오염시키고 상처 입히고 온갖 일을 엉망진창 벌이면서도 어찌어찌 각자 인간의 꼴을 갖춰가는 세속적인 - P168

삶과 천상의 삶이 이곳에서는 아주 멋지게 만나고 있었다. 바로 이런 별밤 때문에 인간들은 죽은 사람들이 별이되었을 거라고 상상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크고 가득하고 눈부신 모습으로 서로를 기억할 것이다.


방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꿈결처럼 은하수를 타고 흘러들어온 것 같다. 내가 방에 들어오기전 나방은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향해 작은 별처럼 날아갔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과 기쁨을 느끼기에 충분한데 도대체뭘 그렇게 많이 원하고 괴로워했단 말인가. 모든 밤마다별은 반짝이는데, 별이 가득한 우주가 뭔지 정체를 알 수없지만, 별은 신비로운 에너지를 흘리면서, 무한을 상상하게 하면서 그냥 거기, 그 모습으로 있는 것만으로 좋은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 밤하늘처럼 큰 세계가 내 마음을잡아끌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이렇게 놀라고 감탄해야만 가벼워진다. 감탄이 나의 힘이다.
영원한 행복은 없지만 영원한 기쁨은 있다. 그날의 밤하늘은 나에게 스며들었고 내가 사는 동안 내내 나와 함께할 풍경이 되었다. 언제 어디서나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은 나의 습관이고 취미고 쾌락이다. 늦은 밤 퇴근할 때 - P169

마다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은 적이 없고 그때마다 모뎀바시아 밤하늘의 기억이 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함께 펄럭인다. 내 마음의 일부분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내 몸의 일•부분은 한쪽 발은 들고, 황금빛 나방을 든 한쪽 팔은 하늘을 향해 뻗은 자세로 영원히 굳어 있다. 그날 밤의 하늘은이 세계에 다가가는 나의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나는 내삶에 경이로움을 섞어놓고 싶어졌다. 경이로움은 내 안에없던 빛이 내게로 흘러들어오는 것이니 이제 나는 나 혼자 힘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인간은 절대로 자기 홀로 창조적이지 않다. 자율성에는 한계가 있고 세상에 나와는 다른 생각, 나와는 완전히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행운이다. 사방 어디를 봐도보이는 것이 나뿐이었다면 나는 지금쯤 ‘나나나나‘로이어지는 가시철조망에 찔려 죽었을 것이다. 나를 변하게하는 것은 고백도 아니고 내면의 응시도 아닌, 다른 사람, 다른 생명, 다른 이야기다. 내가 자꾸만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그날 밤의 경이로움과 같은, 세상에 숨겨진 경이로움과 마주치는 그 우연을 기대해서다. 우리는시간과 우연의 자식들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시간과 우연을 초월해서 살아남는 경이로운 것들, 우리 인류가 존재하는 한 불멸일 것들, 우리를 끝까지 기쁘게 인간이게 하는것들도 있다. 그것들도 별처럼 나를 끌어당긴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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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형태를 부여할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을 어떻게 발견할까? 이 문제는 이제 내게는 싱거울 정도로 쉬워졌다. 나는 책을 읽으면 된다. 내게는 새 책에 대한 기대가 새삶에 대한 기대, 곧 내 목소리와 합쳐질 새 목소리에 대한기대나 같았다. 작가들은 나에게 새 ‘눈‘과 새 ‘목소리‘를준다. - P95


"오래된 휴대폰 쓰시네요! 저도 오래전에 그걸 썼었는데 바꿨어요."
내 휴대폰은 사용한 지 대략 10년은 된 것 같다.
"배터리 괜찮아요? 왜 안 바꾸세요?"
사실 이런 질문을 숱하게 받았다. 나는 대답을 망설이다가 갑자기 두 번 다시 이런 말을 할 기회가 없다는 듯이, 피를 빨아먹을 인체를 발견한 모기처럼 쏜살같이 말하기 시작했다.
"휴대폰이나 노트북에 필수적인 광물 중에 콜탄이라는 것이 있어요. 콜탄에서는 탄탈룸이 추출되는데 탄탈룸은 전기를 꼭 붙잡고 있는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콜탄이 가장 많이 묻혀 있는 나라는 아프리카의 콩고민주공화국인데 IT산업이 발달하자 콩고민주공화국이 부자가 되는 것은 따논 당상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그런 일은일어나지 않았어요. 반대로 아동들이 강제노역에 시달리게 되었고 고릴라들은 서식지를 잃었어요.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마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처음 알게된 것처럼 많이 놀랐어요. 그 뒤로 몇 번 휴대폰을 바꾸려고 하긴 했는데, 에이 관두자, 다음에 바꾸지 뭐, 그렇게 미루게 되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 P120

나는 이 말을 다다다다 했다(그가 지루해하고 관심을잃을까 봐. 그리고 그의 눈치를 봤다. 그동안 몇 번은 이런 말을 했지만, 조금 과한 것 같다, 그래 봤자 뭐가 바뀌나, 경제는 누가 살리냐, 취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휴대폰바꿔, 신제품이 기분을 업그레이드해준다 등등의 말만 들었다. 그때마다 힘이 빠졌었다. 그런데 그는 내 대답을 잘들어줬다. 그러고는 몇 초간 침묵하다니 이렇게 말했다.
"대단하네요."
솔직히 그의 반응에 어안이 벙벙했다. ‘살다 보니 이런 말을 듣는 날도 있구나!‘ 어찌나 감개무량했던지 손이라도 덥썩 잡을 뻔했다. 어쨌든 이것은 나의 새로운 목소리다. 내가 동물의 서식지가 파괴되는 것을 의식해서 뭔가를 하지 않기로 하고 처음 한 일이었다. 나의 새로운 목소리가 나의 오래된 목소리를 이기길 바란다(나의 오래된목소리는 세련된 디자인의 편리한 최신 상품을 좋아한다).
스마트폰과 콩고민주공화국의 아이들과 고릴라의 이야기에 내가 놀랐다면 우리가 세상과 연결되는 무수한방식, 그 여파의 예측 불가함에 놀랐다는 뜻이다. 이 이야기는 ‘나는 세상에 어떻게 연결되면 좋을까?"라는 심란한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나의 ‘새로운 목소리‘는 내가 지구의 현실과도, 미래와도 연결되는 하나의 방 - P121

법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 목소리를 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고릴라와 아이들과 숲이 생각난다.
나는 몇 번은 좋은 꿈을 꿨었지만 아직 이 세상에 좋은 일이 일어나는 데 영향을 미치지 못해봤다. 이 사실이 슬프기 때문에, 좋은 연결이야말로 기쁨이자 힘, 어둠 속의 희망(나는 다른 입장에서,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희망을 걸고 있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생명, 자연, 삶의 의미와 가치(삶의 의미와 가치는 우리가 미래 지향적인 존재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볼 마음이 있는 사람들, 변화의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강하고 고귀한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다. 그 사람들을 존경하면서 그 사람들의 가치를존중하면서 그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받고 살고 싶다. - P122

나는 머뭇거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가 거대한 고래가 내 위로 건물처럼 높게 솟아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머리는 완전히 수면 밖으로 나와 있었고, 따개비로 뒤덮인 얼굴에서 슬로모션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하나까지 보였다. 나는 고래가 천천히 도로 물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질 때까지경외감에 사로잡혀 바라보았다.


나는 이 장면을 읽을 때 부러움으로 그야말로 가슴이 찢어질 뻔했다. 따개비로 뒤덮인 거대한 고래 얼굴이 신처럼 로스를 굽어보는 장면이 마치 내가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이것이 바로 두려움에서 벗어난 로스가 본 세상이다. 두려움의 감옥 문을 열고 나와서 본 현실은 그렇게나 크고, 그렇게나 신비롭고, 그렇게나 놀랍도록 다정한 것이었다. 고래와 헤어진 로스는 자신이 그렇게나 원하던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아버지였다. 로스는 바닷속에서 이룬 것-사랑과 신뢰을 바다 바깥에서도 이루었다.  - P137

나무그네에 앉아 다리를 흔들면서 그런 대화를 나누는 둘을 바라보는 나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들에게 그리고 세상 모든 것에 사랑을 나눠주고 싶은 욕망이 샘솟았다. 나의 세계가 무한히 확장되었다. 돌핀맨의 삶, 복피디의 삶, 연산호를 걱정해서 복 피디에게 제주로 와달라고 연락한 사람들의 삶, 춘삼이의 삶, 춘삼이를 야생 방류하려고 애쓴 사람들의 삶, 춘삼이를 품고 있는 바닷속 다른 생명들의 삶, 이들 생명과 질적으로 다른 관계를 맺은 크레이그와 로스의 삶, 나에게 <나의 문어 선생님>을 보라고 권한 친구와 후배의 삶, 또 뭐가 있지? 나를 무사히 제주공항에 데려다준 기장과 승무원 일동의 삶? 「바다의 숲을 펴낸 출판사 편집자들의 삶? 내가 모르는 모든 삶. 아! 쌍안경을 발명한 사람의 삶도. 그리고 우리 세월 - P148

호 아이들의 삶도(내가 복 피디를 알게 된 것은 세월호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모여서 이 한순간이 되었다. 그 숱한 이야기와 시간들이 돌고래 무리를 입 벌리고 바라보는 생명에 무지한 멍청이(나)를 둘러싼 봄의 대기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 쓸쓸함 너머, 덧없음 너머, 세상은 빛나고있었다. 나는 보고 싶은 것을 봤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내 마음속에 무의미가 도사리고 있다 해도 세상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이렇게 쓰고 보니 마치 내가 아카데미상을 수상해서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것같다). - P149

만약 어떤 평범한 하루가 유난히 빛이 나는 하루로 기억에 남는다면 어떤 한 순간이 진실했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생명 그 자체, 춘삼이가 살아서 다시 돌고래의 삶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되어야 할것이 된다!) 그 자체에 감동했고 그 감동은 진실했다. 자아실현을 하는 데 힘을 쓰려면 그냥은 어렵고 창조적으로 힘을 쓰게 도와줄 뭔가가 필요하다. 토대와 기준이 될단어와 문장도 없이, 같이 할 사람도 없이 힘을 낼 수는없다(다시 말하지만 토대가 없다는 것은 나의 두려움이다. 힘을 쓰려고 해도 쓸 기준이 없거나 낮다는 것도).
2번 돌고래는 나에게 기쁨을 상기시킨다. 그 단어를 들으면 나는 언제나 그날의 진실한 기쁨, 깨끗한 기쁨, 티없는 기쁨, 생명이 약동하는 기쁨을 느낀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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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희생자 대책위를 만든 유족들은 질문을 던졌다.
"가족을 잃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복수를 꿈꾸는자, 냉소주의자, 은둔자, 알코올 중독자, 이중 어떤 것이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것은 정의의 문제였고 고독의 문제였다. 가족의 목숨을 잃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건 후에도 여전히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서 유족들은 고독했다. 유족들은 많은 것이 될 수 있었지만 가장 어려운 정체성을 택했다. 바로 ‘사랑하는 자‘였다. "아직 우리들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있지 않은가?" 유족들이 만든희생자 대책위 4대 과제 중 두 번째는 ‘안전한 지하철 만들기‘였다. 2005년 대구 지하철 참사 유가족들은 대구지하철 노조와 함께 대구 지하철 전 차량의 내장재를 불연재로 교체했다. 우리는 불연재로 된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 P86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그 전해에 태안 해병대 캠프참사에서 아들을 잃은 아버지들은 참사 소식을 듣자 즉시 팽목항으로 출발했고 진도의 체육관과 경찰서 문을박차고 들어갔다.
"당신들 누구요? 뭐 하는 사람들이에요?"
"나? 나는 해병대 캠프에서 목숨을 잃은 아들을 둔 아버지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로서 말합니다. 지금 잘하면아이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아들을 잃은 사람으로서 간곡히 부탁합니다. 꼭 좀 구해주세요."
그 순간 내 자식의 목숨이나 남의 자식의 목숨이나차별하고 말 것이 없었다. 똑같이 중요했다.


춘천 산사태 유족들은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사고 지역의 산에 여섯 번이나 올라 산사태가 인재임을 밝혀냈고 아이들의 꿈을 기억하고 싶어 했다. 유족들은 자식들이 자원봉사를 하러 갔다가 목숨을 잃게 된 상천초등학교의 아이들을 위해 해마다 장학금을 기부한다. 자원봉사에 관한 조례 또한 개정했다.


김용균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자 김용균의 동료들에게 물었다. - P87

"말해줘. 우리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이상한 질문이다. 부모가 자식의 죽음을 묻다니 순리에 맞지 않는다. 김용균의 어머니는 이 이상한 질문을 끝까지 밀고 갔고 죽음을 막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고 일하다 죽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을 원했고 그 세상을 만들려고 했다. 김용균 사후 만들어진 ‘중대재해처벌법‘은 사랑으로도, 하늘까지 들릴 듯한 통곡으로도 결코 자식을 되살려놓을 수 없었던 어머니의 고통과 비탄이 녹아 들어간 이름이다. - P88

유족들은 한결같이 "내가 이렇게 슬프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게 너무 많아요"라고 말한다. 그들의 슬퍼하는 눈에는 보이는 것이 있다. 그들은 비극이 자꾸 일어나는 것에대해서 기이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들은 견딜 수 없는 일을 겪었지만 그 일을 재료로 그나마 견딜 수 있는 세상을만들려고 했고 타인이 살아갈 힘을 뺏기는 일이 없는 데힘이 되려고 했다. 그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뭘까? 믿어지지 않게도 희망 때문이다. - P88

희망은 정말 묘한 것이라서 희망을 가진다는 게 터무니없어 보이는 곳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된다. 유족들은차마 겪어내기 힘든 일을 겪었지만 슬픈 자아의 일부분은 눈물겨운 희망에 근거를 두고 있다. 대체 희망이 무엇이길래 이 슬픈 사람들에게 그렇게 중요했을까? 유족들에게 물어보면 모두 이구동성으로 이렇게만 말한다. "유족이 되면 그렇게 돼버려요."
나로서는 그 대답을 찾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희망은 다른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곳을 바라는 열망이다. 희망은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잡고 늘어지는 것이다. 차마 뿌리치지 못하게 하는 어떤 것들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제는 곁에 없는 사랑하는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변화뿐인데, 더 나은 곳으로의 변화만이 시간과 이야기 밖으로 떨어져 나간 가족들을 다시 시간과 이야기 속에 자리 잡게 할 수 있는데.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냈다.
유족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살려내지 못한 것이 한이라서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다. - P89

세월호 이후 내게 가장 크게 바뀐 점이 있다면 삶이 사라지는 것을, 삶을 잃어버리는 것을, 우리의 인간적인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무척 아까워하게 되었다는점이다. 내 삶뿐 아니라 타인의 삶도. 그것을 다른 무엇보다도 훨씬 더 많이 말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유족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법을 배웠다. 유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구해야 할것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삶도 죽음도 무의미하지 않기를 바라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삶도 죽음도 무의미하다는 그 무의미와 싸우며, 자신의 아픈 가슴속 생각 중 가장 좋은 것을 내주면서 변화의일부분이 되려고 하는 것이 유족들의 사랑이다. 나는 유족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나 개인에게 갖는 의미를 알고 있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큰 사랑과 더 큰 세상"
에 대해 생각한다면 유족들 덕분이다. 유족들은 슬픈 마음의 일부분을 해방시키고 그것을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 P91

이렇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매한 행위로서의 사랑을 발명했다. 이것이 많은 유족들이 반복적으로 하는 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는 한문장 안에 담긴 말 없는 말들이다. 나는 사랑은 창조 행위라는 말을 그들을 보면서 이해한다.
단, 유족의 말이 나를 숙연하게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런 유가족이 더는 없는 세상을 꿈꿔야만 한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실, 유한한 삶속에 무한한 것은 오직 슬픔뿐인 것만 같은, 혼자서 겪어내고 혼자서 감당해야 할 괴로움이 너무 많은 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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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신들의 싸움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나도 길에서 뱀들과 마주쳤으며 그 만남으로 상태가 바뀌어 이상하게도말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인 프리모 레비의 말이다. 나도 실은 길에서 인간을 초월한 존재를 만난 적이 있다. 나도 그 만남으로 상태가 바뀌어 이상하게도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운명을 면하게 되었다. - P63

마침내 그는 자기만의 완벽한 장소를 찾았다. "너무 거대해서 만들어지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을지 짐작조차 못할 만한 광경이 펼쳐진 곳이었다. 그날 오후 그는 그곳에서 제인의 뼛가루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그가 하늘로 날려 보낸 제인의 뼛가루는 별안간 바람이 사라진 공기 중에 한참 머무르다 느릿하게, 조금씩 빛바랜 사암을 등지고 날아갔다." 그는 뼛가루를 담은 도자기 병을 발밑 모래에 반쯤 묻었다. 그리고 몸을 낮춰 온기가 남은 바위에 가만히 뺨을 댔다. 그가 바위에 뺨을 대고 있는 동안 쓸쓸한 구름이 그의 머리 위에 머물렀다가 이내 흩어졌다. 그리고 다른 일도 있었다. "하늘나리 꽃밭에서 점심 식사를 끝낸 벌새 한 마리가 날갯짓하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아무리 슬퍼도 그냥 흘려보낼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단지 몇 분에 불과하지만그는 그 시간 동안 "어깨에 진 짐을 내려놓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그의 "삶에 생긴 구멍이 하늘과 반들반들한 바위와 나팔꽃이 있는 더 넓은 세상으로 메워지는 듯"했다.
- P66

슬픈 자아가 있던 자리를 차지한 것은 경이로운 생명들의 관계였다. 그는 이것을 마치 고대 중국의 풍수지리를 내적으로 체험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생명을 이렇게정의한다. "몸으로 표현된 관계들의 망."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 생각이 어딘가 낯설지 않은가? 고대 중국의 풍수지리를 내적으로 체험하다니? 몸은 관계들의 망이라니? 그가 들려주는 것은 이야기의 시작도 자기 자신, 이야기의끝도 자기 자신, 하루의 시작도 자기 자신, 하루의 끝도 자기 자신인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다. 그의 말을 몸으로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는 뭔가가 우리에게 있다.
맹목 중에서도 가장 무자비한 맹목, 주변 세계를 다르게 볼 기회를 막고, 자신을 새롭게 알 기회, 회복의 기회마저 막아버리는 것, 너무 자주 두려움에 빠지거나 공허하거나 외롭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 너무 자주 우리 삶을 그토록 취약하게 만드는 것, 바로 지나친 자기중심주의다. - P68

이 자기중심주의가 세상을 성스럽게 경험하는 것을 막고, 세상을 풍요롭게가 아니라 그 정반대로 세상을 빈곤하게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 몸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신체는 외부와 연결되는 감각기관들로 만들어져 있다. 자아의 고통은 자아의 바깥으로 나와야만 덜어지고 게리 퍼거슨이 보여준 세상이 바로 자아 바깥 세상, 아직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이 있는 세상이다. 그는 아직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관계‘ 속에서 에너지와 힘을 얻고 ‘회복‘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게 된다. 그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에게 ‘회복‘은 어떤 의미를 가진 단어일까? "삶은 내 안에도 더 많은 삶을 탄생시킬 것이다. 더욱 다양한관계와 경험을, 감사를, 아름다움을. - P69

내가 만약 교통사고를당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4월에, 너무나 아름답다는 검은머리물떼새들의 선회를 보러 유부도로 여행을 갔을 것이다. 내가 사고로 보지 못한 검은머리물떼새가 머리 위를날다니. 이를 어쩐다지?
"복 피디님, 검은머리물떼새예요!"
나는 복 피디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사고 이후 처음으로 새가 날아간 쪽을 향해 절뚝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내 몸만 생각하던 에너지의 방향과 흐름이 바뀌었다. 에너지가 바깥을 향하기 시작했다. 위기상황일수록 바깥을 바라보는 힘내가 그토록 절실하게의지하던 힘, 나를 수차례 살려준 힘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세상의 아름다운 장소들은 무거운 영혼을 가진 사람의 발걸음을 조금 더 가볍게 내밀게 돕는다. 바깥 공기를 마시게 한다. 나는 내 몸의 회복을 걱정하는) 나이면서 나 자신 너머, 내 바깥에 있는 존재가 되어갔다. 내 생각이 아니라 내 바깥 세상의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되었다.
나는 다시 사고 이전의 자유롭던 내가 되어갔다. 자연은예기치 않은 순간에 우리를 놀라게 할 일을 선물한다. 이래서 감사라는 단어가 생겨났을 것이다. 게리 퍼거슨이말한 대로 ‘회복은 더 많은 감사를, 더 많은 아름다움을‘ - P71

지속적인 부정의만큼 유족들을 지치게 하는 것도 없었다. 그날 세상을 떠난 쌍둥이 중 한 명인 나현이는 노트에 이런 글을 남겼다. "저는 소망유치원에 다닙니다. 저는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저는 햇님반 선생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그날 머문 씨랜드는 학생 1인당 5천 원의 리베이트 비용이 오가는 곳이었다.
유족들은 아이들의 믿음을 저버리는 세상이 미웠다.
유족들은 한 인간의 생명, 자유, 꿈이 누구의 손에 달렸는지를 따져보고 마음속 깊이 흔들렸다. 우리 모두 깨끗해지지 않는 한 대책은 영원히 없을 것 같다고 유족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저절로 변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누가 미래를 바꿀 수 있는가? 현실의 추악함과 절대로 이해관계를 나누어 갖고 싶지 않은 사람이어야 했다.
숨 쉬고 사는 것만으로도 초인적인 인내심이 필요했을 유족들은 고통과 분노로 피눈물을 쏟으면서도 끝까지용감하게 진실을 감당했고 경험을 보존했다. 2000년 4월, 유족들은 ‘그날 밤 씨랜드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라는 부제를 단 「씨랜드 참사 백서를 냈다. 유족들은 이 - P78

책에 「우리의 다짐 글이란 글을 남긴다.


과연 무얼 걸고 맹세해야 우리의 다짐이 변하지않을까?
우선 우리 유가족들이 변하지 않고 영원히 함께하길바란다
그래야만 우리 아이들이 편할 것이고
우리의 사랑 또한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기때문이다
외롭고 슬플 땐 오늘을 다시 되돌아봤으면 한다
우리가 함께했던 세월을
아이들을 맨 처음 잃었을 때부터
그리고 그 긴 여정을 함께했던 세월을!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른다
어떻게 해야 바로 사는 건지, 무엇이 옳은 건지
그러나 이거 하나만은 알고 있다
우리가 영원해야만 그리고 우리가 언제까지나
깨끗해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린 바라고 싶다
모든 사람들이 편하게 살 수 있고 모든 생명이. 존중받고 사랑받기를 - P79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단 우리 아이들을 잃은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미래를 위해서
자라나는 새싹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2017년이나 2018년경, 나는 처음 이 글을 읽었다. 읽고 나자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작아졌다. 깨끗하게 살아야만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이 신비로운생각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 말은 할 수만 있다면 불타는 지옥에 가서라도 아이들을 업고 나오고 싶었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사랑했던 기억, 몸의 따뜻함, 그 몸의 훼손, 피, 눈물, 검은 상복, 흰 상복의 기억이 유족들의 말 안에 다 녹아 들어가 있다. 어떤 경험을 들을 가치가 있는 말로 바꾸는 것은 미치도록 어려운 일인데 유족들은 바로 그 일을 했다. 현실을 그대로 보면서도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방법을 상상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돌덩이 같은 현실을 깨려고 숯덩이 가슴에서 나온 말들이다. 비극과 꿈의 가슴 찢어지는 결합이다.
나는 이 말들이 그들을 부축하고,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을 지상에 묶어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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