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성 시인은 「동년일행(同年一行)」에서 이렇게 읊었다.


괴로웠던 사나이
순수하다 못해 순진하다고 할 밖에 없던
남주(南柱)는 세상을 뜨고
서울 공기가 숨쉬기 답답하다고
안산으로 나가 살던 김명수(金明秀)는
더 깊이 들어가 채전이나 가꾼다는데
훌쩍 떠나
어디가 절마당이라도 쓸고 싶은 나는
멀리는 못 가고
베란다에 나가 담배나 피운다. - P16

또 누구는 말한다. 싸우지 않고는 살 수 없었고, 술이 아니면 잠들 수 없었던 저 캄캄한 시절에 담배마저 없었다면 그 간고한 세월을 어떻게 견뎠겠냐고. 유신 시절 감옥에서 출소한 어느 민주인사는 바깥세상이 감옥과 다른 것이라곤 담배 피울 수 있는 자유가있는 것뿐이라고 했다.
담배는사람 사이를 가깝게 해준다. 라이터가 귀하던 시절 남의담뱃불을 빌려 불을 댕기는 모습은 인생살이의 살내음을 느끼게한다. 『해방기념시집』(중앙문화협회 1945)에 실린 이용악의 「시골 - P16

사람의 노래」는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밤기차 안에서 "어디루 가는 사람들이 서로 담뱃불 빌고 빌리며/나의 가슴을 건너는 것일까"라며 침묵 속에 오가는 온정을 그렸다.
사실 나는 1994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둘째 권을 펴내고 나서 담배를 끊었다. 그러던 내가 4년 만에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된것은 1997년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를 위해 방북하면서였다. 북측 인사들은 만나면 담배부터 권했다. 그때마다 나는 손을저으며 사양했다. 모처럼 친선적 관계를 맺고자 찾아가서 손사래부터 치는 것이 멋쩍었고 그들은 나를 무슨 골샌님처럼 보는 것같았다. - P17

사람들은 어려서 자랄 때는 모두들 꽃같이 되기를 바라지만 나이가 들 만큼 들면 잡초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삶을 부러워하는 것은 아니다. 이생진 시인은 「폴 되리라」에서 이렇게 읊었다.


풀 되리라
어머니 구천에 빌어
나 용 되어도
나 다시 구천에 빌어
풀되리라 - P22

흙 가까이 살다
죽음을 만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풀 되리라


잡초란 생물학적인 용어가 아니라 곡식, 농작물, 원예작물 등인간에 의해 재배된 것이 아닌데 저절로 번식하는 잡다한 풀을 말한다. 잡초라면 흔히 개망초, 까마중, 쇠비름, 강아지풀, 피, 토끼풀, 엉겅퀴, 질경이 따위를 떠올리지만 맛있는 나물의 재료인 달래, 냉이, 씀바귀, 고사리, 고들빼기, 쑥, 머위도 밭에서 농사를 방해하면 잡초다. - P23

야생초라 불리는 제비꽃, 초롱꽃, 달개비, 민들레, 쑥부쟁이, 부들꽃창포 등이 잡초로 분류되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그런데 가내린 꽃을 피우는 풀에 애기똥풀, 며느리밑씻개, 개불알풀이라 이를 짓고 업신여긴다.
늦여름 따가운 햇볕에서 농부들은 논밭에 무성히 자라나는 잡초를 제거하느라 구슬땀을 흘린다. 여름철 농사는 잡초와의 전쟁이다. 인류는 농업을 시작한 이래 곡식과 농작물의 영양소를 씨앗이나 열매에 축적하도록 개량해왔다. 이에 비해 잡초는 생태 그대로 영양소를 성장과 번식에 사용한다. 그래서 곡식과 농작물은 잡초를 이길 수 없다. 그 억센 생명력은 이리저리 시달리며 사는 민초의 삶을 연상케 한다. 김수영 시인은 「품」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 P23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그러나 잡초는 무죄다. 잡초의 해악이란 곡식과 농작물의 생산력 증대라는 기준에서 말하는 것일 뿐 잡초는 생태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잡초는 땅의 표토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잡초들이 사라지면 토양이 황폐화된다. 미국 텍사스의 한 과수원에서는잡초의 씨를 말려버렸더니 극심한 토양침식과 모래바람으로 몇년치 농사를 망쳤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과수와 잡초를 공생시키고 있다고 한다. - P24

잡초는 지구의 살갗이다.


김정헌과 나는 청옥산 육백마지기의 잡초공적비를 떠나면서이생진 시인의 「풀 되리라」를 큰 소리로 낭송하였다.


물 가까이 살다
물을 만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풀 되리라

아버지 날 공부시켜
편한 사람 되어도
나 다시 공부해서
풀되리라 - P28

봄이 왔다. 새봄을 맞으며 추사 김정희는 "봄이 짙어가니 이슬이 많아지고 땅이 풀리니 풀이 돋아난다(春濃露地暖草)"라며 향기 은은한 난초를 그렸지만 나는 봄꽃이 만발한 유적지를 생각하며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강진 백련사의 동백꽃, 선암사 무우전의 매화, 부석사 진입로의 사과꽃, 한라산 영실의 진달래, 꽃의 향연이 벌어지는 서울의 5대 궁궐⋯⋯ 전 국토를 거대한 정원으로 삼으며 이 땅에 살고 있는 자랑과 행복을 누리고 있다.
봄의 전령, 화신(花信)은 남쪽으로부터 올라온다. 지구 온난화로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봄꽃의 개화에는 꽃차례가 있다. 2월말이면 남쪽에선 동백이 피고 매화가 꽃망울을 맺었다는 소식이올라오기 시작하여 3월 하순이 되면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만 바 - P29

쁘던 텔레비전 뉴스도 연일 꽃소식을 전한다.
화신은 언제나 동백꽃부터 시작된다. 엄밀히 말하면 동백은 봄꽃이 아니라 이름 그대로 겨울 꽃이다. 제주도에는 눈 속에서 꽃피우는 설동백도 있다. 그래도 동백은 봄꽃의 상징이다. 동백나무는 집단을 이루는 속성이 있어 거제도, 오동도를 비롯하여 한려수도와 다도해의 섬들엔 어디를 가나 지천으로 널려 있다. 동백은윤기 나는 진초록 잎새마다 탐스러운 빨간 꽃송이가 얼굴을 내밀듯 피어나 복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동백꽃은 반쯤 질 때가 더 아•름답다. 동백꽃은 송이째 떨어진다. 그리하여 동백나무 아래로는 떨어진 꽃송이들이 붉은 카펫처럼 깔려 있다. - P30

보길도 고산 윤선도의 원림인 세연정에 떨어진 동백꽃이 둥둥떠 있을 때, 다산 정약용이 유배 시절 즐겨 찾았던 강진 백련사의동백나무 군락지는 천연기념물인데 그 숲속 자그마한 승탑 주위로 떨어진 동백꽃이 가득 널려 있을 때는 가히 환상의 나라로 여행은 것 같다.
봄꽃은 생강나무, 산수유, 매화가 거의 동시에 피면서 시작된다. 생강나무는 산에서 홀로 자라고, 산수유는 마을 속에서 동네사람들과 함께하지만, 매화는 정성스레 가꾸어지기도 하고 밭을이루며 재배되기도 한다. 돌담길이 정겨운 구례 산동마을에 노목으로 자란 산수유가 실로 장하게 피어나고, 광양 매화마을은 일찍부터 매화 축제를 열고 있어 꽃소식은 섬진강에서 올라온다.
어디에 핀들 마다하리오마는 매화의 진짜 아름다움은 노매(老 - P30

梅)에 있다. 노매는 아름다운 늙음의 상징과도 같다. 수령이 300년에서 500년 이상 되는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 순천 선암사의 무우전매, 구례 화엄사의 매화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율곡매는 몇 해 전부터 앓고 있는데 이제는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안타까운 진단이 내려졌다. 특히 오래된 사찰의 노매는 격조 높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양산통도사의 자장매를 그려본다. 그래서 절집의 진정한 자산은 노스님과 노목이라고 한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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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 호롱불을 밝히고



밤이 이슥해지자 달이 떠올랐다.
부풀어 터질 듯 팽팽히 알을 빈 섣달 보름의 만월이었다. 달과함께 산속이 밝아왔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들어차 있는 숲속이었지만 그 대부분이 잡목들이어서 잎새를 지운 앙상한 가지 새로 달빛은 땅 위에 드문드문 얼룩을 그리며 키 작은 관목과 말라붙은 덤불들을 드러내주고 있었다.
엊그제 내린 눈 위에 하얗게 반사되어 달빛은 여기저기에 자그맣고 신비스런 발광체를 흩뿌려놓기도 했다. 이따금 마른 갈나무 잎새가 바스락 소리를 낼 뿐, 이날따라 사위는 기이할 만큼짙은 적막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산 아래쪽에선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아들은 총을 눕혀두고바위에 비스듬히 몸을 의지한 채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멀리적벽(赤壁)으로 여겨지는 봉우리가 맞은편에 도톰하게 솟아 있 - P217

고, 가까이로는 들판에 누운 전답들이 달빛 아래 희미하게 눈에잡혔다. 그 들판이 산기슭과 만나는 지점, 산자락의 우묵한 끝머리에 청풍리(淸風里) 마을은 들어앉아 있었다.
지금 저만치 들판을 돌아나간 희끗한 띠가 동복면(同福面)으로 통하는 길일 게다. 그 길을 따라 산을 향해 거슬러오노라면 청풍리 동구 밖에 이르고, 이내 초가지붕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들은 달빛에 희부연하게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을 눈을 감고서라도 훤히 그려낼 수가 있었다. 마을 초입의 사백년 묵은 느티나무와 그 아래 돌을 깎아 세운 송덕비며 효자비, 길을 따라 흐르는 실개천과 대보름날 깡통에 불을 지펴 돌리며 놀던 중머리 밭둑. 그리고 당집 너머 저수지 언덕은 바람이 잔날에도 하늘 높이 연을 띄워올릴 수 있는 유일한 자리였다. 들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 무렵, 느티나무를 지나 마을로 접어들면 초가집들은 도란도란 얼굴을 맞대고 있었고, 굴뚝마다엔 하얀 연기가 실타래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을 언제나 볼 수 있었다. - P218

아들은 그 낯익은 고향 마을에서 태어났고 열아홉의 나이를 거기에서 먹었다. 쇠똥이 질펀히 깔린 고샅이며 담장의 돌멩이 하나하나에까지 그의 눈길이 가 닿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집을 멀리 떠나본 적이 별로 없어서, 간혹 장날이면 면소재지에 들러 오곤 했을 뿐 산길로 한나절 걸리는 읍내까지 나가본 기억이라곤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만치 아들은 고향마을을 맴돌며 살아온 것이었다.
시상에, 저렇게 집을 코앞에 두고도 내려갈 수가 없다니·......
생각할수록 아들은 기가 막혔다. 당장이라도 산길을 뛰어내려가 눈에 선한 사립문을 들어서며 어무니, 하고 부를 수 있을 것 - P218

만 같았다. 하지만 옆구리에 닿는 쇠붙이의 섬뜩한 촉감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러버렸다. 아들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흠칫 제풀에 놀라며 곁눈질을 했다. 저만치 나무 아래서 두사람은 뭔가 수군거리고 있었다. 잔뜩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으므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아들은 다시산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마을은 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달빛 아래 초가지붕들이 무덤처럼 동그마니 모여 있을 뿐 살아 움직이는 것의 기척이라곤아무것도 없었다.
무등산 사방 오십 리 안팎으로 소개령이 내려진 지도 벌써 석달이 지났다. 마을마다 사람들이 비워두고 떠난 집들만 을씨년스레 옹송그리고 있었다. 그나마 불에 타서 온전한 꼴을 하고 있는 집은 드물었다. 그 흔한 개 짖는 소리도 끊겨버렸고, 아침이와도 어디서고 닭은 울지 않았다. 청풍리뿐만 아니었다. 지금, 적벽 아래 면소재지 쪽에서도 불빛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거대한 파충류처럼 무등산에서 흘러내려온 산줄기가 짙게 주름을 드리운 채 누워 있을 뿐이었다. - P219

지금의 행복동이 들어선 일대는 본디 무허가 판잣집들이 난립해 있던 지독히도 가난한 동네였었다. 시에서 지역 일대에 대한재개발을 시작하면서 부스럼 딱지같이 더덕더덕 붙어 늘어서 있던 꼴사나운 판자촌을 강제 철거했기 때문에 한동안 철거민들과시청 사이의 충돌로 인한 크고 작은 소란으로 그곳의 이름이 시민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적이 있긴 있었다. 하기야 아직도 행복동북쪽 산기슭엔 그 당시 쫓겨난 철거민들 중의 이백여 가구가그쪽으로 옮겨가서 역시 또 다른 판잣집을 짓고 끈질기게 버티고 있음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벌써 오륙 년 전이므로,
제 목구멍 풀칠하기도 바쁜 사람들의 뇌리에서 그새 까맣게 잊혀져가고 있는 터였고, 행복동은 이 도시에서도 손꼽는 부자촌으로 어느덧 부상해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요즘 그 난데없는소문에 휘말려 행복동 주민들은 구설수에 올라 있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마치도 자기들이 예전에 그곳으로부터 쫓겨난 철거민이라도 되는 양 까닭 없는 악의까지 지닌 채 그 해괴하고 망측한소문을 자진해서 열심히 퍼뜨리고 다니는 형편이었다. - P293

대학 교수와 신문사의 사회부 기자와, 인기 작가와, 가난한회사원은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서로의 얼굴을 겸연쩍게 흘끔거리면서 바로 조금 전까지 자신들을 열광케 했던 그런 갖가지의사건들이 도대체 자신들에게 얼마만큼의 무게로 관련지워져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열띤 분위기가 스러져버린 뒤에 남은 지금의 이 알 수 없는 허탈감과 배신감은 또 무엇인가에 대하여 침묵속에서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저마다 곰곰이 따져보고 있었다.
"왠지 허전하군요. 그렇잖습니까."
침묵을 깨며 잠시 후에 허교수가 말문을 열었다. 그는 묵묵히 앉아 있는 다른 세 사람의 표정 속에서도 역시 자신의 것과 비슷한 느낌들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군요. 뭔가 비어 있는 느낌입니다. 오래 지니고 있던 어떤소중한 것을 문득 떠나보낸 느낌 말입니다. 이야기를 너무 많이한 탓일까요."
신문 기자가 약간 감상적인 눈빛으로 허교수의 말에 동의했다. 그런 우울한 감상은 문창부씨에게도 감염되어졌다. - P313

작가 후기


부모를 따라서 처음으로 섬을 떠나 뭍으로 옮겨온 후, 나는 미술 시간이면 언제나 바다와 배를 그려넣곤 했었다. 기차와 비행기와 빌딩만을 그려대는 도회지의 아이들 틈에서 이방인 취급을받아야 했을 때마다, 나는 늘 홀로 낙심하여 담 밖을 맴돌며 그들의 성 안으로 들어가기를 열망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모르는 혼자만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치 무슨 은밀한 죄의 기억처럼 내심 자랑스럽기도 했었다. 결국 그 어린 시절 미술 시간의 그림 속에서처럼 나는 지금껏 늘 혼자서 새로운출항을 꿈꾸며 커온 셈이지만, 그러나 내가 띄운 배는 번번이 가닿을 곳을 미처 찾지 못하여 갈팡질팡 떠돌기만 하다가 종내는오던 길로 되돌아와버리곤 했다.
그 동안 써온 것들을 막상 한데 모아놓고 보니 그렇듯 물만 가득히 차오른 배를 끌고 초라하게 되돌아온 때와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오직 진실된 삶만이 진실한 목소리를 얻을 수 있 - P329

을 것이므로,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떳떳해지도록 애써야 할 터인데도 여전히 그렇지가 못하다. 하지만 이 첫번째 작품집이 내게는 또 하나의 새로운 출항을 꿈꾸게 할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하는 바람이다.
참으로 주위의 여러 귀한 분들로부터 과분한 정을 받아 누리며 살고 있음을 항상 잊지 않고 있다. 그들의 따뜻한 격려와 애정 어린 눈길은 앞으로도 가슴속에서 나와 오래도록 함께 살아갈 것임을 또한 믿는다. 부족한 작품이지만 펴내게 해주신 문학과지성사의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착한 우리집 식구들에게 이 책이 내가 바치는 작은 선물이 되었으며 한다.

1984년 6월
임철우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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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안에는 바람 소리


삼동. 시퍼렇게 날 세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말갛게 개어 있던 밤하늘 어디에 숨어 있다가 그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토록 바람은 맵차고 옹골스런냉기를 품고 있었다.
맨 처음 마을 뒷산 너머 섬의 북쪽에서부터 일어난 바람은 삽시에 뒷산 잔등을 타고 넘어 내달려왔고 이내 황지리(黃地里) 집집의 지붕을 새카맣게 덮쳐누르듯 쏟아져들어와 온 동리를 움찔움찔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몇 개 남은 이파리를 떨구며 뒤안 감나무를 뒤흔들다가 낡은 기와지붕 추녀 끝 험상궂은 귀면에 무턱대고 부딪쳐보기도 하고, 배암 감기듯 칭칭 뻗어나간 마른 담쟁이덩굴을 휘저어놓은 다음, 쇠똥이 여기저기 내갈겨진 좁은고샅을 잽싸게 핥고 다니기도 하면서 바람은 난데없이 나타나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일찌감치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흐리끼한 석유 등잔불 아래 엎디어 이런저런 별스럽잖은 얘기 몇 마디씩 나누다가 선잠이 - P150

들었던 마을 사람들은 그 소란한 바람 소리에 깨어 일어나 방문을 빠끔 열고 내다보았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소름끼치게 싸늘한 바깥 공기에 놀라 냉큼 문고리를 잡아채기도 하는 거였다. 논이 부족한 섬이라 볏짚을 구하기가 힘들어 올해도 지붕을 이지못한 채 겨울을 넘기게 된 집의 남자들은 가뜩이나 허름한 초가지붕을 새삼스레 걱정했고, 여자들은 내리감기는 눈두덩을 억지로 깨어 치켜올리며 마당으로 나가 장독대며 부엌 바깥쪽에서바람에 쏠려 달그락거리고 있는 자질구레한 세간 따위를 건성단속해두고는 진저리를 치며 도로 방으로 들어와버렸다.
아따, 오늘밤엔 된통으로 큰 바람이 불랑갑네.
하늘 꼴새가 심상찮구먼, 눈이 쏟아질지도 모르겠는디.
젠장맞을, 내일 식전 아적에 건장 보러 갈라먼 에지간히 춥겄다. 끄응. - P151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으며 두터운 솜이불 속으로 뒤척뒤척 파고들었다. 문밖에 나갔다 들어온 사람은 이빨을 다다닥 맞두드리며 황급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더러는 아랫목을 더듬어 발바닥을 쭈욱 뻗어보다가 거기서 방금 얼음통에서 건져낸듯한 누군가의 발과 맞닿기라도 했는지 깨액 비명을 지르며 발을 옴츠리기도 하였다.
지랄하고, 먼 놈의 발무가지가 그라고 차다이. 아, 발무가지좀 저만큼 치워.
으마마, 치운 디 나갔다 들어온 사람 심정은 모르고 속 펜한소리하고 있네이.
그렇게 한차례 어수선하게 동리를 뒤흔들어놓고 난 바람은 마을을 비잉 돌아서 이번엔 바다를 향하고 냅다 달려가버렸다.  - P151

바다 쪽에서는 끊임없이 씨근덕대는 파도 소리가 세찬 바람의 틈을 헤집고 한층 더 숨가쁘게 들려왔다.
차츰 하늘 한쪽부터 시커멓게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구름이었다. 바람이 먹장떼 같은 구름을 왁자하니 더불고 내려오고 있었다. 스무이렛날. 구름이 손톱달 뾰족한 귀퉁이를 덥석 깨물어뜯더니 눈깜짝할 새에 통째 삼켜버리고 말았다. 그 틈에 겨울 하늘 가득히 흩어져 있던 별들이 물기를 머금고 오르르 몸을 떨었다. 이윽고 그 무수한 별들의 무리마저 구름이 달려들어 마저 해치우고 나자 하늘은 온통 먹통을 뒤집어쓴 듯 깜깜해져버렸다.
바람은 끊임없이 불어대고, 이따금 그 바람을 거슬러 뚫고 우우웅, 차르르르, 섬 기슭을 핥는 물소리만 숨이 가빴다. 얼핏 마을, 아니 섬 전체가 형체도 크기도 알 수 없는 어떤 거대한 괴물의 가슴팍에 잔뜩 짓눌려 있는 느낌이었다. - P152

밤이 꽤 깊은 시각. 구십여 호가 채 차지 못하는 황지리 마을에 아직 불을 끄지 않고 있는 집이라곤 고작 서너 채뿐이었다. 예전 같으면야 긴긴 겨울밤, 새끼도 꼬고 더러는 묵내기 화투다윷놀이다 해서 간간이 떠들썩한 웃음이 터져나올 법도 했지만 어느덧 그런 풍경을 마지막 본 지도 여러 해 지난 성싶다. 어수선한 세상은 이렇게 조그맣고 보잘것없는 섬마을까지도 몰라보게 바꿔놓은 거였다.
마을 동쪽으로는 이웃 마을과 이어지는 작은 신작로가 서투른솜씨로 갈라놓은 가르마처럼 멀리 고갯마루까지 뻗어 있고, 그신작로가 시작되는 동구 밖 맨 끝 어귀에 허름한 초가집 하나가납작 엎디어 있었다. 돌담에 감싸 안기어 있는 유난히도 추레하게 낡은 집이었다. 지붕 여기저기서 삐죽삐죽 내밀고 있는 말라 - P152

빠진 잡초 때문에 어찌 보면 엉성한 까치 둥지같이도 뵈고, 되는대로 풀어헤친 미친년 머리채 같기도 했다. 근처의 가장 가까운집과는 어느 정도 간격을 둔 외딴집인 데다가, 하고 있는 외양까지 그 모양이니 누구라도 대뜸 첫눈에 폐가나 빈집이 아닌가 여길 지경이었다.
그런데 지금 바로 그 집에서 명주실 같은 몇 가닥 흐린 불빛이호르르 새어나오고 있는 거였다. 문고리가 손가락을 쩍쩍 빨아대는 이 추운 겨울밤, 쉴새없이 윙윙거리는 독기 품은 칼바람을막아내기엔 그 집의 때묻은 창호지가 너무 허술하고 얇아 뵀다. 그래서인지 그을음이 켜를 이룬 문틈으로 우러나오고 있는 불빛은 임종하는 노인네의 사위어들어가는 숨결처럼 가냘프기만 했다. - P153

바람이 아까보다 더욱 세차게 불어왔다. 삘릴리리, 헤어져 너덜거리는 문풍지가 피리 소리를 내다가 멈췄다. 불빛이 까마득자지러졌다가 되살아났다.
방안엔 두 사람이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문 쪽으로 등을대고 누운 노모는 잠이 들었는지 흠뻑 뒤집어쓴 이불깃 새로 머리끝만 기웃 내밀고 있는데, 그 머리카락이 반이나 허옇게 세어있었다. 그 너머 모로 누운 아들은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눈을 굴리며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광대뼈 위로 움푹 패어 들어간 눈알이 불길한 꿈을 꾸는 사람의 그것처럼 매앵했다.
밖은 끊임없이 들이치는 바람 소리, 그리고 이따금씩 섞여 날아오는 파도 소리가 미묘한 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삘릴리리, 또문풍지가 울었다. 바람이 방문을 제법 거칠게 흔들었고 잠겨진 - P153

문고리가 두어 번 달그락거렸다. 등잔불이 기우뚱 잦아졌다가간신히 몸을 일으켜세웠다. 순간 아들은 천장이 한꺼번에 펄럭무너져내리는 듯한 환각을 일으켰다. 움찔 몸을 사리며 그는 겁에 질린 시선으로 천장의 구석진 네 귀퉁이를 주저주저 훔쳐보기 시작했다.
"어, 어무니."
아들의 입에서 겨우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다급하면서도 팽팽히 담겨져 있는 음성이었다. 어머니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무니, 어, 어무니."
그제서야 이불 속에서 노파가 머리를 들었다. 잠이 설 들었던 참이었는지 눈자위가 눈곱으로 뀌적뀌적했다.
"왜 그러냐, 으응?"
못박힌 듯 뻣뻣이 굳어 있는 아들을 보자마자 그녀는 휑한 눈을 치뜨며 후두둑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그녀는 놀라 아들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을석아. 어디가 아프냐. 아파서 그러는 거이야?"
노모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 P154

우수수 떨어진 감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쏠려 뒤란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빈 외양간에선 털썩털썩 가마니 날리는 소리가 났다. 뒷산 대밭에선가. 수많은 사람들이 휘파람을 불어대는 것처럼 기묘한 소리가 이따금 바람 끝에 묻어와 툇마루에 흩어졌다.
지금 그 바람 속에서 아들은 어지러운 발소리를 듣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쪽으로 내달려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눈부시게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어둠 저편에서 그들은 옷자락을 하얗게 너울거리며 흐르듯 춤추듯 가볍게 떠오고 있었다. 문득 어디선가 자지러지는 웃음 소리. 발소리, 확성기 소리. 소리.
아악, 별안간 비명이 아들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순간 아들과 어머니가 동시에 벼락치듯 튕겨 일어났다. 아들은 벌써 몸을 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악 뛰쳐나가려는 아들의 다리를 그녀의 두 팔이 억세게 그러안았다. - P156

이윽고 을석은 일어섰다. 내려가야 할 때가 된 거였다. 짧은순간, 그들 다섯 사람은 팽팽히 고개를 들고 일어서는 불길한 긴장감을 저마다 의식했다. 숨이 컥컥 막혀왔다. 을석은 깨달았다. 그들은 각기 을석을 저울질해보고 있었으며 그리고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는 중이었다. 세상에서 비밀을 알고 있는 건 오직 그혼자뿐. 까마득한 벼랑 꼭대기에서 그들 넷은 지금 끝이 다른 네가닥의 밧줄을 을석의 손바닥 안에 건네주려는 거였고 그 밧줄끝엔 다름아닌 그들 네 개의 목숨이 매달려 있는 셈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벼랑 아래로 내려가기 전, 늦기 전에 자신들의 생명을지키기 위해서라면 밧줄을 쥔 배신자의 손목을 가차없이 잘라내버릴 수도 있을 거였다.
벗어나고 싶다. 어서 도망치고 싶다. 거의 질식할 것 같은 순간이었다. 을석의 두 무릎이 무섭게 떨려왔다. 한치 앞을 분간키어려운 암흑의 정적에 갇힌 채 그들 모두는 다만 다섯 개의 벌떡이는 심장의 고동과 거친 숨소리를 서로 헤아리고 있었다. 딸각, 사내가 있는 쪽에서 가볍게 총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 P167

어둠



화장을 하기 위해 거울을 마주하고 앉는다. 세 개의 서랍이 서로 제각기 끝을 물고 물린 채 옆으로 나란히 달려 있는 화장대는유난히 커다란 거울 때문에 늘 무너져내릴 듯 불안하다. 거울 속엔 흘러내리지 않도록 머릿단을 수건으로 꼼꼼히 받쳐 맨 여자가 나를 쏘아보고 있다. 막 세수를 끝낸 여자의 눈가엔 군데군데엷은 잔주름이 드러나 있고 귓불 언저리엔 버섯처럼 각질의 마른버짐도 몇 돋아 있다.
난 거울 속의 여자와 결코 눈을 맞추지는 않는다. 그건 버릇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않기로 했던 것이다. 맞닿을 듯 가까이서 똑바로 나를 노려보고있는 거울 속 여자의 눈은 언제나 소름끼치도록 싸늘한 적의와간절한 파괴에의 욕구로 비수처럼 불길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그것이 다만 나의 투영된 허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인정할 수가 없었고, 그것과 마주하고 앉기만 하면 이내 새파랗게 공포에 질려버리곤 했었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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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새벽


약기운이 차츰 소진해가는 마취 상태에서처럼 몽롱한 의식을후드득 털어내며 그녀는 눈을 떴다.
희고 검은 빛깔의 물고기 형상을 하고 균일한 분포로 판박이된 천장의 사방 연속 무늬가 어슴프레 공중에 걸려 있는 게 맨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현관 바깥에 매달린 외에서 가느다란불빛이 유리창으로 새어들어와 맞은편 벽면으로 날이 잘 다듬어진 비수처럼 음험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녀는 메말라껄끄러운 눈꺼풀을 몇 번인가 깜박거리며 눈의 초점을 맞추려애를 썼다.
뚜걱, 뚜걱, 뚜거덕.
불현듯 온몸의 털구멍이 한꺼번에 바짝 아가리를 닫고 수축되어버리는 듯한 긴장감, 그녀는 전신이 풀먹인 무명베처럼 빳빳하게 굳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발소리는 역시 이층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두 뼘도 채 못 되는 천장의 콘크리트 두께를 뚫고 발소리는 분명히 그녀의 귀에까지 전달되고 있었다. - P62

뚜거덕 뚜걱 뚜거덕.
잠시 멈췄던 발소리는 다시 쇠사슬처럼 연결되기 시작했다. 돌아가신 시부모의 사진이 걸려진 왼쪽 벽에서부터 장롱이 있는윗목으로, 그러다가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온 발소리는 곁에 누운 다섯 살짜리 아들의 배를 북북 밟으며 건너오더니 이윽고 그녀의 목과 머리를 지나치려다가 문득 정지했다. 지금 강도인지살인범인지 모를 그 발소리의 주인은 그녀의 가슴팍 어느쯤에서두 다리를 벌린 채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는 참이었다. 그녀는나무토막처럼 빳빳이 굳어 누운 채로 천장에서 울려오는 발소리의 방향을 끈질기게 눈길로 쫓고 있었다.
발소리가 멎은 그 순간 그녀의 모든 세포는 또 한 차례 바짝결빙했다. 까슬한 소름이 꽃가루 번지듯 돋아났다. 전신의 땀구멍마다 털이 부우우 허리를 곧추세워 일어나기 시작하고 그녀의모든 촉각은 소리가 정지한 천장의 한 점에 레이다망처럼 집결하고 있었다. - P63

그것은 물고기 형상을 한 검은 유선형 무늬의 머리 부분이었다. 그녀는 거기에서 가늘고 날카로운 금속성의 선이 불쑥 뛰쳐나오는 듯한 환각을 일으켰다. 바늘같이 예리한 침. 분명히 압정(釘)의 끝이었다. 밑창에 압정이 달린 구두를 신고 다니는 괴한. 그녀는 비명을 지르려 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이내 깊이 잠겨버렸다. 침묵은 차츰 고드름마냥 길어나며 영락없이 그녀의 심장을 겨냥해 내려오고 있다. 둘둘둘둘. 굴착해오는 착암기의 섬뜩한 소음. 퍼뜩 잠자리의 표본이 뇌리에 떠올랐다. 아아, 가슴에 예리한 핀을 찌르고 그녀는 이대로 방바닥에 누운 채로 한 마리 표본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었다. 파르르, 잠자리의 날갯짓처럼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뚜거덕 뚜걱 뚜걱
다행히 발소리가 다시 움직임을 시작한다. 그녀는 나지막이 푸우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핀은 사라지고 없었다. 등허리로 식은땀이 질펀했다. - P64

아버지의 땅


쫓겨가는 한 마리 딱정벌레처럼 트럭은 저만치 들판 가운데로난 황톳길을 따라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었다. 고르지 못한 노면에서 바퀴가 튀어오를 때마다 덜컹대는 쇳소리가 들려왔고 꽁무니로 부옇게 마른 먼지가 피어올랐다.
덮개 없는 트럭의 뒤칸에 홀로 쭈그려앉은 채 실려가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유난히도 자그맣게 오므라들어 있어 보였다. 뒤칸에 적재된 알루미늄 식깡들이 이따금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금속성의 광선을 쏘곤 했다. 풀잎들이 저마다 윤기를 잃어가고있는 들녘과 차츰 잿빛으로 퇴색해가기 시작하는 야산의 정지된 풍경 속에서 그것은 안간힘을 쓰며 집요하게 꿈틀거리고 있는단 하나의 운동체였다. - P85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옆구리에선 허리띠에 찬 수통과 부딪치며소총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돌아다보니, 까마귀떼가 조금 전에우리가 지나온 밭으로 다시 펄럭펄럭 내려앉고 있는 게 보였다.
놈들은 거기에다 무엇인가 먹을 것을 숨겨두었던 것일까. 텅빈 초겨울의 들녘에서 저희들끼리 몰려다니며 무엇 하나 남아 있을것 같지 않은 메마른 밭고랑 사이를 어슬렁어슬렁 배회하고 있는 그 크고 흉물스런 새떼의 모습이 까닭 없이 마음을 우울하게했다.
-저걸 좀 봐라이. 새들은 사람보담도 몬치 계절을 아는 법이여.
어머니가 말했다. 그녀는 잘게 썬 고구마를 햇볕에 말리기 위해 마당 앞 돌담장 위에 하나씩 널고 있던 참이었다. 토방에 주저앉아 잠자리를 들여다보고 있던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담장에 기댄 어머니가 목을 젖힌 채 하늘을 치어다보며 서 있었다. 그녀의 눈길이 가 닿아 있는 쪽 하늘엔 언뜻 작은 점들이 무수하게 흩어져 있는 게 눈에 잡혔다. 새떼였다. 목이 길다란 것이 어쩌면 자연 시간에 배운 청둥오리나 재두루미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새들은 별로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허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 P89

그런 어머니의 변명은 끝끝내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지 못했다. 그 후로 나는 좀처럼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게 되었다. 뜻밖에도 아버지의 죄를 순순히 시인하는 그녀의 한마디가 내게는 그토록 엄청난 충격으로 깊이 남겨졌던 탓이리라.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아버지의 그 죄라는 것을 내 스스로 함께 나누어 지니고 만 느낌이었고, 그 때문에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나는 눈빛이 깊고 어두운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버지의 무서운 환영은 저주처럼 내 곁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나 시커먼 어둠 저편에 숨어서 음산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는 어디에나 숨어 있었다. 내 어릴 때 이따금 고개를 디밀어 들여다보면 마루 밑 저편 깊숙이 도사리고 있던 그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도 그 어둠 속에서 술술 기어나오던 그 눅눅하고 음습한 냄새 속에서도 내가 한 번도얼굴을 본 적이 없는 그 사내는 핏발 선 눈알을 번득이며 나를쏘아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건 어디서 묻었는지도 모르는, 오랜시간이 흐른 뒤에까지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처럼 내게는 저주와 공포의 낙인으로 깊이 박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낙인을 가슴에지닌 채, 나는 끝끝내 나를 휘감고 있는 어떤 엄청난 죄악감과 불길한 예감으로부터 영영 벗어날 수가 없었다. - P100

그때였다. 쭈그려앉아서 손을 움직이고 있던 노인이 불쑥 소리치는 것이었다.
"어허. 대관절...... 대관절 그게 어떻다는 얘기요. 죽어서까지원, 아무리 이렇게 죽어 누운 다음에까지 이쪽이니 저쪽이니 하고 그런 걸 굳이 따져서 무얼 하자는 말이오. 죽은 사람이 뭣을알길래... 죄다 부질없는 짓이지. 쯔쯧."
노인의 음성은 낮았지만 강하고 무거웠다. 그러면서도 노인은고개를 숙인 채 뼛조각에 묻은 흙을 정성스레 닦아내고 있었다.
무슨 귀한 물건마냥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신중히 손질하고 있는 노인의 자그마한 체구를 우리는 둘러서서 지켜보았다. 모두들 한동안 입을 다물었고, 나는 흙에 적셔진 노인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 P105

"땅속에 누운 사람의 잠을 살아 있는 사람이 깨워서야 되겠소. 또 그럴 수도 없는 법이고. 원통한 넋이니 죽어서라도 편히 눈감도록 해야지, 암. 그것이 산 사람들의 도리요...... 하기는, 이렇게 불편한 꼴로 묶여 있었으니 그 잠인들 오죽했을까만."
노인은 어느 틈에 꾸짖는 듯한 말투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두개골과 다리뼈를 꼼꼼히 문질러 닦은 뒤, 노인은 몸통 뼈에묶인 줄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완강하게 묶인 매듭은 마침내 노인의 손끝에서 풀리어졌다. 금방이라도 쩔걱걱 쇳소리를 낼듯한 철사줄은 싱싱하게 살아 있었다. 살을 녹이고 뼈까지도 녹슬게 만든 그 오랜 시간과 땅 밑의 어둠을 끝끝내 견뎌내고 그렇듯 시퍼렇게 되살아나오는 그것의 놀라운 끈질김과 냉혹성이 언뜻 소름끼치도록 무서움증을 느끼게 했다.
노인은 손목과 팔에 묶인 결박까지 마저 풀어낸 다음 허리를 - P105

펴고 일어서더니 줄묶음을 들고 저만치 걸어나갔다. 그가 허공을 향해 그것을 멀리 내던지는 순간, 나는 까닭 모르게 마당가에서 하늘을 치어다보며 서 있는 어머니의 가녀린 목줄기와 그녀가 아침마다 소반 위에 떠서 올리곤 하던 하얀 물사발이 눈앞에 떠올랐다가 스러져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멀리 메마른 초겨울의 야산이 헐벗은 등을 까내놓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사위는 온통 잿빛의 풍경이었다. 피잉, 현기증이 일었다. - P106

광주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가 모래밭을 걸어오고 있었다. 돌돌거리며 흐르는 물소리를 거슬러 강변 모래밭을 어머니가 혼자저만치서 다가오고 있었다. 모래밭은 하얗게 햇살을 되받아 쏘며 은빛으로 반짝였다. 허리띠를 질끈 동인 어머니의 치맛자락이 흐느적이며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햇살에 부신 눈을 가늘게 오므리고 줄곧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꿈속에서처럼 나는 그녀의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는 한 사내의 환영을 보았다. 그건 아버지였다. 언젠가 어머니의 낡은 반닫이 깊숙한 옷가지 밑에 숨겨져 있던 액자 속에서 학생복 차림으로 서있던 그대로 그건 영락없는 그 사내였다. 나를 어머니의 뱃속에남겨놓은 채 어느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밤, 산길을 타고 지리산인가 어디로 황황히 떠나가버렸다는 사내. 창백해 뵈는 뺨에 마른 몸집의 그 사내가 어머니와 함께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놀란 눈으로 풀밭에 앉아 나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어머니의 눈썹과 코, 입의 윤곽과 야윈 목줄기까지 뚜렷이 드러날만큼 가까워졌을 때 사내의 환영은 어느 틈에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 P106

술이 가득 차오른 반합 뚜껑을 나는 두 손으로 받쳐들었다. 저것 봐라이. 날짐승도 때가 되면 돌아올 줄 아는 법이다. 어머니가 말했다. 저만치 웬 사내가 서 있었다. 가슴과 팔목에 철사줄을 동여맨 채 사내는 이쪽을 응시하며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퀭하니 열려 있는 그 사내의 눈은 잔뜩 겁에 질려 있는 채로였다.
애앵. 총성이 울렸고 그는 허물어지듯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불현듯 시야가 부옇게 흐려왔다.
아아.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쓰러져 누워 있을 것인가. 해마다 머리맡에 무성한 쑥부쟁이와 엉겅퀴꽃을 지천으로 피워내며 이제 아버지는 어느 버려진 밭고랑, 어느 응달진 산기슭에 무덤도 묘비도 없이 홀로 잠들어 있을 것인가. - P107

아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그토록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려왔었음을. 내 유년 시절의 퇴락한 고가의 마루밑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음습하고 불길한 냄새와 함께 나를 쏘아보고 있던 한 사내의 눈빛을, 그리고 청년이 된 지금까지도 가슴을 새까맣게 그을려놓으며 깊숙한 상흔으로만 찍혀져 있을뿐인 그 증오스런 사내의 이름을, 어머니는 스물다섯 해가 넘도록 혼자서 몰래 불씨처럼 가슴속에 키워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한테 그 사내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곱고 자상한 눈매로서만, 나직한 음성으로서만 늘 곁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울고 있는 건 그 미련스럽도록 끈질긴 기다림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아니, 사실상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더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녀의 기다림이 얼마나 까마득하게 손이닿지 않는 먼 곳으로 자꾸만 자꾸만 밀려나가고 있는 것인가를 말이다. 스물다섯 해의 세월이 스스로 묶어놓은 그 완고한 기만이 목에 잠기어 흐느낌도 없이 지금 어머니는 울고 있는 것이었다. 밥상을 받아놓은 채 나는 고개를 처박고 앉아 있었다. 눈앞에는 우리 가족의 그 오랜 어둠과 같은 미역가닥이 국그릇 속에서 멀겋게 식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 P111

까우욱. 까우욱.
어느 틈에 날아왔는지 길 옆 밭고랑마다 수많은 까마귀들이 구물거리고 있었다. 온 세상 가득히 내려 쌓이는 풍성한 눈발 속에 저희들끼리만 모여서 새까맣게 구물거리며 놈들은 그 음산함과 불길함을 역병처럼 퍼뜨리고 있는 것이었다. 얼핏, 쏟아지는그 눈발 속에서 나는 얼어붙은 땅 밑에 새우등으로 웅크리고 누운 누군가의 몸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였다. 손발이 묶인 아버지가 이따금 돌아누우며 낮은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나는 황량한 들판 가운데에 서서 그 몸집이 크고 불길한 새들의펄렁거리는 날갯짓과 구물거리는 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보았다.
머리 위로 눈은 하염없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함박눈이었다. 굵고 탐스러운 눈송이들은 세상을 가득 채워버리려는 듯이 밭고랑을 지우고, 밭둑을 지우고, 그 위에 선 내 발목을 지우고, 구물거리는 검은 새떼를 지우고, 이윽고는 들판과 또 마주 바라뵈는 거대한 산의 몸뚱이마저도 하얗게 하얗게 지워가고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새벽마다 샘물을 길어와 소반 위에 떠서 올려놓곤 하던 바로 그 사기대접의 눈부시도록 하얀 빛깔이었다. - P112

사평역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별로 복잡한 내용이랄 것도 없는 장부를 마저 꼼꼼히 확인해보고 나서야 늙은 역장은 돋보기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놓고 일어선다.
벌써 삼십 분이나 지났군.
출입문 위쪽에 붙은 낡은 벽시계가 여덟시 십오분을 가리키고있다. 하긴 뭐 벌써라는 말을 쓰는 것도 새삼스럽다고 그는 고쳐생각한다. 이렇게 작은 산골 간이역에서 제시간에 정확히 도착하는 완행 열차를 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님을 익히 알고 있는탓이다. 더구나 오늘은 눈까지 내리고 있지 않은가. - P113

역장은 손바닥을 비비며 창가로 다가가더니 유리창 너머로 무심히 시선을 던진다. 건널목 옆 외눈박이 수은등이 껑충하게 서서 홀로 눈을 맞으며 희뿌연 얼굴로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송이눈이다. 갓난아이의 주먹만한 눈송이들은 어둠 저편에 까맣게 숨어 있다가 느닷없이 수은등의 불빛 속에 뛰어들어오면서 뚱그렇게 놀란 표정을 채 지우지 못한 채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굉장한 눈이다. 바람도 그리 없는데 눈발이 비스듬히 비껴날리고 있다. 늙은 역장은 조금은 근심스런 기색으로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대어본다. 하지만 콧김이 먼저 재빠르게 유리창에 달라붙어 뿌연 물방울을 만들었기 때문에 소매로 훔쳐내야했다. 철길은 아직까지는 이상이 없었다. - P114

사람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대합실 벽에 붙은 시계가도착 시간을 한 시간 반이나 넘긴 채 꾸준히 재깍거리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다. 창밖엔 싸륵싸륵 송이눈이 쌓여가고 유리창마다 흰보라빛 성에가 톱밥 난로의 불빛을은은하게 되비추어내고 있을 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말을 잊었다. 어쩌면 그들은 열차를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년 사내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성냥불을 당기려다 말고 멍하니 난로의 불빛을 들여다보고 있다. 노인을 안고 있는 농부도, 대학생도, 쭈그려 앉은 아낙네들도, 서울 여자도, 머플러를 쓴 춘심이도 저마다 손바닥들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망연한 시선을 난로위에 모은 채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만치 홀로 떨어져 앉아 있는 미친 여자도 지금은 석고상으로 고요히 정지해 있다. 이따금 노인의 기침 소리가 났고, 난로 속에서 톱밥이 톡톡 튀어올랐다. - P144

"흐유. 산다는 게 대체 뭣이간다......"
불현듯 누군가 나직이 내뱉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말꼬리를 붙잡고 저마다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산다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중년 사내에겐 산다는 일이 그저 벽돌담 같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햇볕도 바람도 흘러들지 않는 폐쇄된 공간. 그곳엔 시간마저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마치 이 작은 산골 간이역을빠른 속도로 무심히 지나쳐가버리는 특급 열차처럼……. 사내는그 열차를 세울 수도 탈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 - P144

서도 여전히 기다릴 도리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앞으로 남겨진 자기 몫의 삶이라고 사내는 생각한다.
농부의 생각엔 삶이란 그저 누가 뭐래도 흙과 일뿐이다. 계절도 없이 쳇바퀴로 이어지는 노동. 농한기라는 겨울철마저도 융자금 상환과 농약값이며 비료값으로부터 시작하여 중학교에 보낸 큰아들놈의 학비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걱정만 하다가 보내고 마는 한숨철이 되고 만 지도 오래였다. 삶이란 필시 등뼈가 휘도록 일하고 근심하다가 끝내는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리라고 여겨졌으므로, 드디어 어려운 문제를 풀어냈다는 듯이 농부는 한숨을 길게 내쉰다 - P145

서울 여자에겐 돈이다. 그녀가 경영하고 있는 음식점 출입문을 들어서는 사람들은 모조리 그녀에겐 돈으로 뵌다. 어서 오세요. 입에 붙은 인사도 알고 보면 손님에게가 아니라 돈에게 하는말일 게다. 그래서 뚱뚱이 여자는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손님들에게 결코 안녕히 가세요, 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또 오세요다.
그녀는 가난을 안다. 미친 듯 돈을 벌어서, 가랑이를 찢어내던어린 시절의 배고픈 기억을 보란 듯이 보상받고 싶은 게 그녀의욕심이다. 물론 남자 없이 혼자 지새워야 하는 밤이 그녀의 부대자루 같은 살덩이를 이따금 서럽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두 아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소중한 두 아들과 또 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쓰여질 돈, 그 두 가지만 있으면 과부인 그녀의 삶은 그런대로 만족할 것도 같다.
춘심이는 애당초 그런 골치 아픈 얘기는 생각하기도 싫어진다. 산다는 게 뭐 별것일까? 아무리 허덕이며 몸부림을 쳐본들, 까짓 것 혀 꼬부라진 소리로 불러대는 청승맞은 유행가 가락이 - P145

나 술 취해 두들기는 젓가락 장단과 매양 한가지일걸 뭐. 그래서춘심이는 술이 좋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게 해주는 술님이 고맙다. 그래도 춘심이는 취하면 때로 울기도 하는데 그 까닭이야말로 춘심이도 모를 일이다.
대학생에겐 삶은 이 세상과 구별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스물셋의 나이인 그에게는 세상 돌아가는 내력을 모르고, 아니 모른척하고 산다는 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그런 삶은 잠이다. 마취 상태에 빠져 흘려보내는 시간일 뿐이라고 청년은 믿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전부터 그런 확신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는 걸 느끼고 있다. 유치장에서 보낸 한 달 남짓한 기억과 퇴학. 끓어오르는 그들의 신념과는 아랑곳없이 이루어지고 있는강의실 밖의 질서...... 그런 것들이 자꾸만 청년의 시야를 어지럽히고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 P146

행상꾼 아낙네들은 산다는 일이 이를테면 허허한 길바닥만 같다. 아니면, 꼭두새벽부터 장사치들이 때로 엉켜 아우성치는 시장에서 허겁지겁 보따리를 꾸려나와, 때로는 시골 장터로 혹은인적 뜸한 산골 마을로 돌아다니며 역시 자기네 처지보다 나을것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시골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 참말 다발라가며 펼쳐놓는 그 싸구려 옷가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들에겐 그따위 사치스런 문제를 따지고 말고 할 능력도 건덕지도 없다. 지금 아낙네들의 머릿속엔 아이들에게 맡겨둔 채로 떠나온 집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어린것들이 밥이나 제때에 해먹었을까, 연탄불은 꺼지지 않았을까. 며칠째 일거리가없어 빈둥대고 있는 십 년 노가다 경력의 남편이 또 술에 취해서 집구석에 법석을 피워놓진 않았을까...... - P146

그러는 사이에도, 밖은 간간이 어둠 저편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고, 그때마다 창문이 딸그락거렸다. 전신주 끝을 물고 윙윙대는 바람 소리, 싸륵싸륵 눈발이 흩날리는 소리, 난로에서 톡톡튀어오르는 톱밥. 그런 크고 작은 소리들이 간헐적으로 토해내는 늙은이의 기침 소리와 함께 대합실 안을 채우고 있을 뿐, 사람들은 각기 골똘한 얼굴로 생각에 빠져 있다.
대학생은 문득 고개를 들어 말없이 모여 있는 그들의 얼굴을하나하나 눈여겨본다. 모두의 뺨이 불빛에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청년은 처음으로 그 낯선 사람들의 얼굴에서 어떤 아늑함이랄까 평화스러움을 찾아내고는 새삼 놀라고 있다. 정말이지 산다는 것이란 때로는 저렇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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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임철우씨는 1954년 전남 완도에서 태어났다.
전남대학 및 서강대 대학원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1996년 전남대 대학원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1년 「개도둑」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 문단에 데뷔한 그는 잇따른 문제작들의 발표로 80년대 소설계의 가장 주목할 작가로 부상했으며 첫 창작집 아버지의 땅」으로 한국일보 창작문학상, 「붉은 방으로 제2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창작집으로 그리운 남쪽, (1985), 「달빛밟기,(1987), 장편소설 「붉은 산,
흰 새(1990), 「그 섬에 가고 싶다(1991), 「등대 아래서 휘파람, (1993) 등이 있다. 현재 한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곡두 운동회


-그해 8월 0일 금요일 새벽 4시.
바닷가 그 작은 마을을 난데없이 쩌렁쩌렁 울려대기 시작한그 요란한 노랫소리에 놀라 주민들 팔백여 명은 약속이나 한 듯이 거의 동시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아침잠을 모르고 일찍 일어나는 시골 사람들이라고는하지만, 적어도 날이 밝기 한두 시간 전인 그 시각은 누구라 할것 없이 가장 달고 곤한 잠에 빠져 있을 때였다. 때마침 구름 한점 없는 여름밤 하늘은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고, 바다는유난히 잔잔했으며, 바람 또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간밤늦게까지 극성을 부리던 물것들도 새벽녘의 한기에 주눅이 들었는지 차츰 뜸해지고 선창 맞은편 작은 무인도의 울창한 수풀 속에서 늙은 부엉이도 울기를 멈춘 지 오래였다. 이따금 풀섶에서는 지친 풀벌레의 울음이 잔뜩 목에 잠겼고, 다만 바다 쪽으로부터 부드러운 물결이 차르르차르르 기슭을 핥는 소리만 간간이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는데 어느 한 순간 웬 요란스럽고 당돌맞 - P9

은 소음들이 느닷없이 그 깊은 정적을 산산조각으로 흩뜨리며아직 짙은 어둠에 혼곤하게 잠겨 있는 온 마을을 우렁우렁 흔들어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즈음 연일 계속되어온 무더위에 시달리느라 대부분 얇은 셔츠바람이거나 아예 웃통을 훌훌 벗어제친 알몸뚱이로 잠자리에들었었다가 얼결에 놀라 후닥닥 눈을 짼 그 마을 주민들은 미처눈곱으로 뻑뻑한 눈두덩을 비벼볼 겨를조차 없이 저마다 그 난데없는 소동이 도대체 꿈인지 생시인지를 가려보느라 한동안 멍멍해져 있었을 따름이었다. 아마도 그 소란통에 맨 먼저 귀가 벌어진 것은 잠이 없는 늙은이들이었을 터이고, 뒤이어 아직 힘깨나 남았을 젊은 축들은 코를 골다가 일어나 우선 곁에 누워 있는아내 혹은 남편을 황급히 흔들어 깨웠을 것이며, 아이들이란 본디 잠이 깊어 잠귀 역시 먼 법이므로 맨 나중에야 깨어나서는 훌렁 이불을 머리꼭지까지 뒤집어쓰거나 더러는 놀란 울음부터 애앵 터뜨리거나 했을 것이다. - P10

하지만 연일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소문은 결코 가만히 주저앉아서 전쟁이 끝나는 날만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도록 만드는뒤숭숭한 것들뿐이었다. 전황은 갈수록 이쪽에게 극히 불리하게진행되어가는 눈치였다. 전선은 그새 벌써 훨씬 아래쪽으로 야금야금 내려오고 있었으며 수도는 이미 오래 전에 적군의 수중에 떨어졌다고들 했다. 그러나 마을은 여전히 평화스럽게만 보였다. 어디서고 총성은 들리지 않았고, 하늘은 쨍하니 맑았으며, 여름 해는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바다는 잠잠하게 숨을 죽이고있었다. 무엇보다도 읍사무소에 주둔해 있는 부대는 철수 준비는커녕 전혀 그 비슷한 기척조차도 보이지 않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지켜보는 주민들은 아직 전쟁의 여파가 이곳까지 밀어닥치기까지에는 얼마간의 시간 여유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어렵잖게 추측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기어코 이 바닷가 작은 마을에도 처음으로 심상찮은 사건이 터지고 만 것이었다. - P17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애걸조로 사정을 해보다가 완장 패거리들의 손에 어지간히 혼쭐이 난 다음에야 개 돼지처럼 네 발로 벌벌 기어가기도 하고, 심장이 약한 축들은 엄지손가락이 오른쪽으로 까딱 눕혀지는 순간그 자리에서 까무라쳐버리기도 했다. 그러면 완장 패거리들은그들을 질질 끌고 가서 새끼줄의 오른쪽 칸 안에 아무렇게나 패대기질을 쳐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퍽이나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새끼줄을 경계로 하여왼쪽 사람들은 어디 소풍놀이라도 나온 사람들처럼 조금은 회회낙락하는 기색으로 앉아 있다가 저만치 누가 차례가 되어 앞으로 나가기라도 할라치면 자진해서 "그놈도 죽여야 해. 똑같은 놈이여" 하고 악을 써서 자신의 갸륵한 충성심을 나타내보여주기도 하였다. 반대로 경찰 가족과 관리들을 비롯한 인물들이 모여있는 느티나무 쪽은 벌써 지옥이었다. 그쪽 사람들은 대부분 사지를 지탱할 힘조차도 잃어버리고 만 듯 축 늘어진 채 땅바닥에무릎을 꿇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목사와 몇몇 신실한 신도들은그 통에서도 간절한 기도를 웅얼거리고 있었고, 그러는 동안 그적군 병사의 엄지손가락은 끊임없이 왼쪽 혹은 오른쪽을 향해굽혀지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 P49

드디어 이번에는 느티나무 쪽으로부터 엄청난 만세 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읍장과 우체국장, 그리고 정미소집 주인 사내와 읍장의 뚱뚱보 아내를 비롯한 느티나무 쪽 사람들은 마치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듯한 그 기막힌 환희와 감격을 도저히주체할 길이 없어 장대 같은 눈물 줄기를 쭐쭐 흘려대며 미친 듯발을 구르고, 서로 부둥켜안고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목이 터져라 손바닥이 부서져라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쳐대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일 순간 전까지 자신들의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던 죽음의 그림자를, 그 소름끼치는 공포와 처참한 고통의 기억을 까아맣게 잊어버리고 다만 기쁨으로 전율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자신들의 육체와 영혼 모두를 그토록 엄청난 힘으로 얽어매어 짓누르고 있던 그 죽음의 족쇄를 참으로 자연스럽게 새끼줄너머 저쪽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으로 통쾌한 복수를 실현시킴으로써, 가슴 벅찬 희열과 통쾌한 감격을 더더욱 감당키 어려운 지경으로 만들었다. - P59

얼마의 세월이 흐른 뒤 전쟁은 끝이 났고 바닷가 그 작은 마을에도 민첩한 도둑처럼 다시 평화가 숨어들어왔다. 그 동안 마을주민의 전체 수효는 전보다 오히려 줄어들어 있었지만, 그 부족한 자리를 채우기까지에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자들은 부지런히 아이를 낳았으며, 갓 짝을 맺은 젊은 부부들은 주인없이 오래 버려져 있던 빈집들을 허물어뜨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집을 지어 살림을 차렸다. 그래도 해마다 팔월 어느 날이면마을의 꽤 많은 집들마다에는 한꺼번에 똑같이 제삿상이 차려지곤 했지만, 무심한 세월은 사람들의 쓰디쓴 기억의 잔에다가 조금씩 조금씩 맹물을 타넣어주었으므로 오래지 않아 그들은 어느 - P60

해 한여름 대낮의 그 기괴한 곡두 놀음쯤이야 쉬이 잊어버릴 수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하늘이 유리알처럼 맑은 가을날을잡아 마을 서쪽 바닷가의 학교 운동장에서는 예전처럼 다시 운동회가 열렸고, 그때마다 온 마을 사람들은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한바탕 열띤 응원을 벌이며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불렀다. 그러다가도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손뼉을 치다 말고 깜짝 놀라 별안간 불안스런 시선으로 서로의 얼굴을 흘끗흘끗 훔쳐보며 문득어두운 얼굴을 짓곤 했는데, 아직 어린 꼬마들은 도통 그 까닭을알 수가 없었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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