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사랑

상처의 시절은 단단히 기억하지,
밀려온 진눈깨비조차
참 따뜻한 나라라고
ㅡ김명인의 시 「여수」 - P9

여수. 그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대고 있을 것이다. 여수만(灣)의 서늘한 해류는 멍든 속살같은 푸릇푸릇한 섬들과 몸 섞으며 굽이돌고 있을 것이다. 저무는선착장마다 주황빛 알전구들이 밝혀질 것이다. 부두 가건물 사이로검붉은 노을이 불타오를 것이다. 찝찔한 바닷바람은 격렬하게 우산을 까뒤집고 여자들의 치마를, 머리카락을 허공으로 솟구치게 할것이다.
얼마만큼 왔을까.
통곡하는 여자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빗물이 객실 차창에 여러 줄기의 빗금을 내리긋고 있었다. 간간이 벼락이 빛났다. 무엇인가를 연달아 부수고 무너뜨리는 듯한 기차 바퀴소리, 누군가의 가슴이 찢어지고 그것이 영원히 아물지 않는 것 같은 빗소리가 아련한 뇌성을 삼켰다. 음산한 하늘 아래 나무들은 비바람에 뿌리 뽑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젖은 줄기와 - P9

가지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휘어졌다. 노랗고 붉게 탈색된 낙엽들이 무수한 불티처럼 바람 부는 방향으로 흩날렸다. 조금 큰 활엽수들은 의연하게, 줄기가 여린 묘목들과 갈대숲은 송두리째 제 몸을 고통에 바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도, 그들의 뿌리를 움켜 안은 대지도 놀라운 힘으로 인내하고 있었다. 무수한 보릿잎 같은 빗자국들이 차창과 내 충혈된 눈을 할퀴었다.
손목시계는 얼추 오후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열차가 종착역인 여수에 닿으려면 앞으로도 두 시간 가까이 철로를 달려야 했다.
나는 깍지 끼고 있던 손매듭을 풀어 허리 아래로 늘어뜨렸다. 캐시밀론 냄새가 희미하게 풍기는 좌석 등받이에 상체를 밀착했다. 며칠 잠을 설쳤던 탓에 저절로 눈꺼풀이 감겼으나, 심장은 여전히 초조하게 두근거리며 의식의 한 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감은 눈앞에 물고기들이 맴돌기 시작했다. 반경 이십 센티미터가 채 안 되는 둥그런 어항, 그 속에 감질나게 몇 가닥 흔들리고 있는 청록색 수초들, 수초를 투명한 지느러미로 건드리며 빙글빙글 맴을 그리는 금붕어,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불현듯 나는 두 개의 층계를 한꺼번에 헛디딘 것처럼 소스라치며 가수면에서 깨어났다. - P10

그 물고기들은 죽었다.
어제 아침 나는 여섯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죽은 금붕어를 비닐봉지에 싸서 대문 밖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자흔이 떠난 뒤의 나흘동안 그녀의 물고기들은 아침마다 한 마리씩 두 마리씩 허연 배를뒤집으며 수면으로 떠올랐다. 자흔이 하던 것과 똑같이 정성껏 먹이를 주고 물을 갈아주었지만 나는 그것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쓸모없어진 어항의 물을 쿨링쿨렁 소리를 내며 수챗구 - P10

멍에 비웠다. 미끈거리는 어항 유리 안쪽을 물비누로 씻고 마른 행주로 물기를 닦아낸 뒤 높다란 선반 위에 엎어놓았다. 갑작스러운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우욱, 하는 신음과 함께 타액과 물이 싱크대 홈통에 토해졌다. 뱃속에 남은 것들을 마저 게우기 위해 나는 목젖 깊이 검지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직 용해되지 않은 파랗고 노란 알약과 캡슐들이 흐물흐물한 위액을 뒤집어쓴채 토해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다시 욕지기가 치밀었다. 수챗구멍으로 알약들을 밀어 넣었다.
구토한 다음이면 으레 입속에 고여 드는 낯익은 체념과 회한 따위를 곱씹으며 나는 거칠게 수도꼭지를 틀었다. 맵싸한 소독 약품냄새가 풍기는 수돗물에 입을 헹구었다. 세면장의 계단 턱을 무릎으로 짚고 방문을 열었다. 고무 슬리퍼를 벗어 던졌다. 장판 바닥에 쓰러지듯 상체를 엎디었다. 이런 순간에 자흔의 목소리를 떠올리고싶지 않았으므로 이마를 방바닥에 찧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나직한 목소리의 환청은 이미 귓전까지 다가와 내 먹먹한 고막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 P11

뭐가요? 뭐가 더럽다는 거예요?
자흔이 묻는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어깨를 붙들고 있는 자혼의 몸을 밀어냈다. 다시 홈통에 머리를 처박고 토하기 시작했다. 저녁 내내 씻어낸 쓰라린 뺨을 타고 생리적인눈물이 흘러내렸다. 뺨이, 목줄기가 따끔따끔하게 젖었다. 눈물로흐릿하게 가려진 시야 옆으로 자흔의 맨발은 차가운 세면장 바닥을 안타까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 그만해요.
자흔은 내 등을 두드리며 속삭였다. 그녀의 서늘한 손가락이 내뜨겁게 젖은 이마와 뺨을 어루만지려 했다. 내가 그 손짓을 뿌리치자 자흔은 둘 데 없어진 열 손가락들을 가지런히 허공에 펼치며 쓸쓸한 어조로 중얼거렸었다.
이젠 괜찮아요...... 그만해요. - P12

해질녘에 밀려 나가는 썰물처럼 환청은 
천천히 귓가에서 잦아들었다. 자취방 유리창 가득 늦가을 오전의 다사로운 햇살이 내리비치고 있었다. 장판 바닥에 엎디었던 몸을 굼벵이처럼 모로 누이며나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명치 끝이 찢기듯이 아파왔다. 적요한 햇빛 속으로 무수한 먼지 입자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름답구나, 하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먼지는 진눈깨비 같았다. 먼 하늘로부터 춤추며 내려와 따뜻한 바닷물결 위로 흐느끼듯 스미는 진눈깨비……, 여수의 진눈깨비였다.
열차는 여전히 비바람을 뚫고 달리고 있었다.
습기 먹은 스피커를 통해 차장은 불분명한 목소리로 남원(南原)역이 가까웠음을 알려왔다. 추레한 차림의 아낙들이 둘씩 셋씩 일어나 선반에서 짐을 내리고 우산을 챙기느라고 부산스럽게 움직이기시작했다. 여수까지 열차는 아직도 많은 역들을 남겨두고 있었다. - P13

그때 나는 얼핏 그 어둠이 자흔의 지성의 그늘일 것이라고 추측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단지 외로운 표정일뿐이었다.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기다려온 사람들에게서 손쉽게 발견되는 표정이기도 했다. 열차를 기다리며 승강장에 서 있는 얼굴들, 늦은 밤 버스 손잡이에 매달려 차창 밖의 휘황한 네온사인을 바라다보는 눈빛들, 출근 무렵 살갗이 터질 듯한 지하철에 올라 말없이 몸 부대끼는 사람들의 메마른 광대뼈 같은 데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기쁠 흔(欣) 자예요‘라고 뇌까리는 자혼의 목소리는 마치 그 모든 사람들의 외로움을 쌓아다가 반죽해놓은 흰떡살같이 고즈넉했다. - P14

심지어 자흔은 자신의 몸조차 함부로 
다루었다. 옷을 갈아입을때 보면 얻어맞은 사람처럼 몸 여기저기에 푸릇푸릇한 멍이 들어있기 일쑤였고, 공장에서도 바늘에 곧잘 손이 찔리는지 검지나 엄지손가락에서 소형 밴드가 떠나는 날이 없었다. 주말 같은 때에 시장에 같이 다니다 보면 자흔은 유난히 사람들과 어깨를 잘 부딪쳤다. 유리문이 없는 줄 알고 심상하게 지나쳐 가려다가 이마와 무릎을 찧곤 했고, 뒤에서 다가오는 승용차나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를 듣지 못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곤 해서 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자흔과 함께 걸을 때면 나는 어린아이를 동반한 사람처럼 그녀가 행여 차에 치이지나 않는지, 무엇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지를 살피느라고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당사자인 자흔은 마치 알지 못하는 무슨 거대한 뒷힘에 보호라도 받고 있는 양 태평하고도 무심하게 거리를 활보하곤 했다. - P25

결국 기찻간에서 발견된 그 순간부터 이미 자신은 평생토록 떠돌아다니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고 말하며, 자흔은 짐짓 일그러뜨린 입술로 웃어 보였다.
...... 어느 곳 하나 고향이 아니었어요. 모든 도시가 곧 떠나야 할낯선 곳이었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죠.
여수에 가보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요.
자흔은 갑작스럽게 정색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잔뜩 웅크려서 모로 누웠던 몸을 반듯이 누이며,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괴롭지도 않아요. - P40

여름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도시의 뒷골목에서 살인과 패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것만 같은 울컥울컥한 무더위가 한 달도 넘게계속된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모처럼 잘 지내고 있는 룸메이트를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 탓에 차츰 사그러들고 있었던 내 결벽증이발작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온갖 눈병과 귓병이 지하철과 버스 손잡이를 통해 옮겨다녔다. 나는 내 살갗에 다른 사람의 살이 닿는 게 싫어서 기를 쓰고 세 정거장 네 정거장의 거리를 걸어다녔다. 복사열이 끓어오르는 아스팔트위에서의 체감 온도는 오십 도에 가깝다고 했다. 땀은 이마에서.
목에서, 겨드랑이에서, 사타구니와 종아리와 발가락 하나하나에서까지 흥건하게 흘러내렸고, 숨을 헐떡이며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퇴근하여 자취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온몸의 피부가 발갛게부어오르도록 비누칠을 하고 수건으로 문질러대곤 했다. 몸에 땀이 차는 끈적끈적한 느낌을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땀샘을 모조리 도려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 P41

갑자기 몸이 가벼워졌다. 부두 시멘트 바닥이 급경사로 기울었다. 미선이를 집어던진 아버지는 이번에는 반항하는 나를 목에 감아 안은 것이다. 짙푸른 물살 속으로 머리부터 곤두박질쳤다. 눈과입과 코로 정신없이 들이닥치는 짠물, 짠물.
의식이 돌아왔을 때 나는 젖은 시멘트 바닥 위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까마득히 높은 하늘 위에서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흰 적란운 덩어리들이었다. 나를 둥그렇게 둘러싼 사람들의 입에서 ‘살았다‘ ‘살았다‘ 하는 낮은 탄성들이 돌림노래처럼 퍼져나갔다. 방금 짠물과 음식을 토해 엉망이 된 윗옷자락에 손바닥을 비비며, 누운 채로 나는 빠개질 듯한 고개를 쳐들었다.
죽을라면 혼자 죽을 것이지 어쩐다고 죄 없는 어린 것들을.... - P53

자흔이 떠난 뒤의 나흘 동안 나는 한 번도 책장과 창틀의 먼지를 닦지 않았다.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집요한 걸레질도, 때묻을 겨를도 없는 흰 걸레를 몇 번이고 두들겨 빨아야만 했던 강박 증상도 사라지고 없었다. 퇴근하여 돌아와 누우면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평화가 피로한 육신을 어루만지며 밀려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창문 틈으로 적요한 햇빛이 춤을 추었다. 자흔의 말간 얼굴이 그 햇빛과 먼지 속에 고요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예리한 칼날이 겨드랑이로부터 젖가슴까지의 살갗을 한 꺼풀 한 꺼풀 저미어오는 것같은 슬픔에 나는 눈을 감아버리곤 했다. 그러나 토악질만은 멈출수 없었다. 이제는 ‘왜 그런 짓을 해요?‘라고 물으며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흔이 없었으므로 나는 마음 놓고 구역질을 했다. 그녀의 부재를 확인할 때마다, 내 더러운 손바닥을 들여다볼 때마다 나는 욕지기를 느꼈다. 내가 뿌리친 자흔의 손, 그녀가 가지런히 허공에 펼쳐보이곤 했던 열 손가락들이 내 수많은 혈관들을 비집고 살갗 속으로, 숭숭 구멍 뚫린 뼛속으로 파고들었다. - P57

저마다 빗물에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승객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역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여수, 마침내 그곳의 승강장에 내려서자 바람은 오래 기다렸다는듯이 내 어깨를 혹독하게 후려쳤다.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은눈부신 얼음 조각 같은 빗발들을 내 악문 입술을 향해 내리꽂았다. 키득키득, 한옥식 역사의 검푸른 기와 지붕 위로 자혼의 아련한 옷음소리가 폭우와 함께 넘쳐흐르고 있었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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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기 전에는 이 사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집집마다 흔하게 있는 사진, 흔하게 있는 소풍으로 여기며 사진철의 첫 장을 넘기곤 했다. 이제는 생각한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며 아버지가 부양의 의무를 맡았던 넓지 않은 집에 늘 함께 있었던 삼촌, 고모들, 작은집 식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러니까 이날은 그들이 모두 어디론가 가고 오붓이 네 식구만 남았던 명절이나 휴일이었을까. 아버지는 이날 아침 쉬고 싶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어린 나를 옷 입히고(무척 두꺼운 스웨터를 입히셨다) 나들이 가방을 싸느라 힘들지 않았을까. 한 사람이 나를 안으면 다른 한 사람은 가방을 들고 오빠의 손을 잡는 식으로 두 분은 버스를 타고 왔겠지. 유원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내가 가리키는 풍선을 사주었겠지. ‘사진 찍어요‘라는 사진사의 권유에 따라 얌전히 정해진 장소에 섰겠지. 여기 봐요. 여기. 사진사가 외치는 소리에 오빠와 내가 동시에 렌즈를 바라보기까지는 몇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을까.
그날, 두 분은 행복하셨을까. 돌아오는 길은 멀지 않았을까. 어린 내가 너무 무겁진 않았을까.  - P304

어린 시절 내가 느낀 아버지의 가장 지배적인 인상은 ‘피곤하시다‘는 것이었다. 낮이면 국어교사로, 밤이면 글쓰는 사람으로 네다섯 시간밖에 못 자며 아버지는 꽤 오랜 시간을 버텼다. 새벽 네시쯤부터 안방에서 타자기 소리가 들렸다(오랫동안 아버지에게는서재가 따로 없었다). 비몽사몽간에 아득히 들려오던, 타닥, 타다다닥, 드르륵, 땡, 하는 소리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그러다 아침결에 아버지가 잠깐 토막잠을 붙이는 동안 우리 형제들이 일어나 이른 아침을 먹을 때면, 어머니가 우리에게 수저 소리를 못 내게 했던 것이다. 예민한 아버지가 숟가락 소리에 깰까봐 우리는가만히 숟가락을 상에 놓고, 쉬쉬 귓속말로 얘기하며 가만히 밥을 덜어먹었다. 그러다 누군가 실수로 큰 쇳소리를 내면 숨죽여 키득키득 웃기도 했다.
- P305

불우한 시절이라 이사를 많이도 다녔는데, 중흥동에서도, 삼각동에서도, 풍향동에서도, 서울 올라와 수유리에서도 어김없이 새벽이면 타자기 소리가 들렸다. 수유리에 이사온지 이 년쯤 뒤 워드프로세서를 들여놓으며 처음으로 그 소리가 사라졌다. 새벽 네시부터 여덟시까지 일하는 아버지의 습관은 하루의 예외도 없이 이어져, 낙향하신 뒤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집안에 어떤 우환이 있어도, 아무리 몸이 아파도, 입원을 하거나 상가에서 밤을새우거나 하지만 않으면 자명종 없이 일어나 책상 앞에 앉으신다. - P305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는 허리디스크를 앓으셨는데, 의자에 앉기어려울 만큼 통증이 심할 때는 워드프로세서 밑에 두꺼운 책을 여러 권 깔아 높이를 맞춘 뒤 서서 일하셨다.
고백하자면 아버지를 잘 이해했던 것 같지는 않다. 왜 늘 저랑게 피곤하실까. 인생은 꼭 저렇게 힘들어야 하는 건가. 막연히 그런 의문을, 때로는 불만을, 때로는 연민을 가졌을 뿐이었다. - P306

단 하루. 잠깐의 기억이 남아 있다. 여덟 살 즈음, 중흥동의 조그만 한옥에 살던 때다. 식구들 모두 마당에 나와 대청소를 하고있었다. 햇빛이 밝은 초여름날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바가지를 들고 작은 화단에 물을 주고, 어머니는 시멘트가 얇게 발라진 마당에 양동이로 물을 부어가며 비질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커다란적갈색 ‘다라이‘에 호스로 물을 받고 있었다. 두 분이 무슨 이야긴가를 나누다 웃는가 싶더니, 어머니가 갑자기 양동이를 들고 가아버지의 등에 물을 끼얹었다.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른 아버지는, 늘 지쳐 보이고 어렵기만 하던 아버지는, 화를 내는 대신 껄껄 웃으며 호스를 들고 어머니에게 물줄기를 쏘았다.
그 순간이 나에겐 일종의 개벽이었다.
아! 어른들도 장난을 하는구나!
두 어른은 숨이 넘어가게 웃으며, 차갑다고 외쳐대며 서로에게 - P306

물을 끼얹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었다. 껄껄껄, 까르륵꺄르륵 웃어대는 그이들을 향해 우리는 누가먼저랄 것 없이 달려가 소리지르며 합세했다. 서로서로 물을 뿌리고 쫓아가고 도망가고 비명을 질러댔다. 온통 부서지고 튀어오르고 흩어지는 게 햇빛인지 웃음소린지, 눈부신 물줄기, 물방울들인지 알 수 없었다. - P307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어두운 것과 밝은 것. 따뜻함과 차가움, 노동과 휴식, 병과 치유, 꿈과 현실, 애정과 오해, 기대와 실망, 잠깐 마주잡는 손길, 잠깐 마주치는 눈빛들...... 속에서 우리는 나아간다. 사실 식구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아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며, 모든 기억을 공유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식구가 주는 애틋함을 말하려 할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은, 이 모든 삶의 국면들을 함께 매만지며, 상처를 공유하며 나아갔던 순간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한 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따뜻한 기억들이 떠오른다는것이다. 아홉 살 즈음, 걸을 수 없을 만큼 고열이 오른 나를 아버지가 업고 소아과로 달리던 기억. 횡단보도를 건너던 아버지의 발소리. 그 등의 온기. 고등학교 때 내가 급체했을 때, 카이로프랙틱치료를 받으시던 기억을 떠올려 척추 마디 하나하나를 한 시간 가 - P307

까이 꾹꾹 눌러주시던 밤. 방학 때면 늦잠 자고 싶어하는 우리 남매들을 억지로 깨워 뒷산 손병희 선생 묘 앞까지 데리고 가 맨손체조를 시키시던 것이 지극한 사랑이었음을.


어느 순간, 갑자기 아버지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자식에게 찾아온다. 그것이 자식의 운명이다. 인생은 꼭 그렇게 힘들어야 하는 건가 하는 의문 없이. 불만도 연민도 없이, 말도 논리도 없이. 글썽거리는 눈물 따위 없이. 단 한 순간에. - P308

오랫동안 아버지에 대한 글을 피해 도망다녔다. ‘귀밑머리 희어질 때쯤 쓰겠습니다‘라는 말이 내가 정해둔 변명이었다. 아직 귀밑머리는 희어지지 않았지만, 가르마 오른쪽으로 희끗한 머리칼이 부쩍 눈에 들어온다. 기억들은 모두 조각조각이고, 그 조각들 하나하나에 어린 빛은 제각기 다른 말을 한다. 씌어지는 것보다 씌어지지 않는 것, 씌어질 수 없는 것이 더 진한 말이라는 것을 간신히 깨닫는 나이가 되었다.
이 글을 마쳐야 하는 지금은 아침 일곱시 십분 전, 아버지가 아직 책상 앞에 앉아 계실 시각이다. 이곳 서울에서 남해 바닷가의 외풍 센 방까지, 쏜살같이 공간을 넘어...... 지금 아버지가 책상앞에 앉아 계신다. 십수 년 된 회색 오리털파카를 입고, 돋보기안경을 끼고, 서리처럼 머리가 희어진 아버지가. - P308

언젠가 읽었다. 우리들 각자는 평생에 걸쳐 한 사람을 집요하게감시하고 있다고. 그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행동을 지시하고, 그 사람의 감정을 느끼며 울고 웃는다고. 그 사람이란 바로 우리 자신이며,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자신이 감시자이자 감시당하는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때로 과거를 골똘히 돌아보려 할 때 (자전적인 산문을 써야 하는지금처럼), 그와 비슷한 느낌이 찾아올 때가 있다. 한없이 비좁고 기다란 어항의 입구에 한쪽 눈을 대고 있는 것 같다. 그 어항 안에서 움직이는 어둑한 ㅡ때로 놀랍도록ㅡ선명한 영상들을 나의 기억이라고 불러야 할 테지만, 그것들이야말로 나의 역사, 내가 경험한 전부임이 분명할 테지만, 어째서인지 곧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어졌다. - P310

서울로 올라온 뒤 열세 살 즈음, 아버지가 광주에서 구해온 사진집과 비디오테이프를 보았던 것. 꼭 그 영향만은 아닐 테지만그후 오랫동안 어쩌면 지금까지도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근본적인 의문을 지울 수 없게 된 것. 그즈음 가방에 넣어가지고다니며 읽기 시작한 책들. 연필로 줄을 긋거나 베껴 적었던 문장들, 활판으로 꾹꾹 눌려 찍힌 그 활자들이, 이따금 눈이나 살갗에도 꾹꾹 박히는 것 같았던 것.
스물여섯 살의 여름, 첫 책을 출판사에서 받아든 오후에 느낀, 말로 옮기기 힘든 복잡한 감정, 증정본으로 받은 ‘내 책‘ 다섯 권을 가방에 넣고, 꺼내보지도 못한 채 혼자서 한동안 일층 카페에 앉아 있었던 것. 그후 지금까지 보낸 시간. 쓰고, 쉬고, 쓰고, 때로오래 쉬고, 다시 썼던 그 밖의 다른 말로는 요약하고 싶지 않거나, 달리 요약할 수 없는 시간. - P312

펜촉 또는 송곳을 들고 등신대의 종이 화폭 앞에 선 사람을 생각한다.
그 사람이 형상에 대해 느끼는 고통은 무슨 고귀한 창작의 진통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피부가 찢어지는 것같이 괴로운 감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그는 화면을 찢어놓았을 것이다.
그렇게 개인적인 방식으로 나는 그 그림을 이해했다.
문장들과 단어들, 구두점들의 날카로운 자국.
약간만 발을 잘못 디뎌도, 아니, 잘 디뎠다고 믿은 순간마저 기다리고 있는 구역질의 기미. - P313

지워야 하는 문장들.
단호하게 송곳으로 뚫어, 깨끗이 찢어버려야 하는 단어들.


이젠 정말 글을 못 쓰려는가보다. 생각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글을 안 쓰고 퍽 오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던 늦여름, 리모델링하기 전의 광화문 교보문고 소설 코너에 갔다. 누군가에게 선물할 일이 있어서 책을 고르려던 것이었다. 수천 권의 소설들이 꽂힌 벽면 앞에 섰을 때 나는 왜 눈이 뜨거워졌던 걸까. 마침 매장에 조용히 울리고 있었던 피아노곡 때문에? 수천 권의 소설들이 뿜어낸 어떤 에너지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이 낯익은 세계로 돌아왔다는 감정 때문에?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인생을 그 세계에서 보냈기 때문에? - P314

그 모든 소설들을 쓴 수천의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등신대의회색 종이 앞에 서서 한 줄씩 점을 뚫었을 것이다. 생존한 사람들은 지금도 그 앞에 서 있을 것이다. 그 일에 고통을 느낄 때도 있고, 충일감이 더 클 때도 있을 것이다. 한순간 깨끗한 생명이 차오르며 기쁨을 느낄 것이다. 건너가야 할 생각의 고리들, 꿰뚫어지지 않는 감정 때문에 서성거릴 것이다. 퀼트를 짜거나 건축물을 설계하듯 오 년, 십 년, 그보다 더 긴 시간을 소설 한 편에 골몰해 - P314

보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시간이 지워지고 있을 것이다. 늙어가고 있을 것이다.


글을 쓸 때는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움직이지 못한다. 걷지도 먹지도 못한다. 가장 수동적인 자세로, 글쓰기 외의 모든 것을 괄호 속에 넣고 한 단어씩 써간다. 그 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
그게 다행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 다행이다. 움직일 수 없어서 다행이다. 나의 것이라고 이름 붙은 삶의 모든 것을 괄호 속에 넣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 P315

소설을 쓰다 말고 잠깐 골목을 걸을 때, 어항 밖으로 감고 있던한 눈을 뜬 것처럼 아슴아슴 눈동자가 시릴 때가 있다. 그런 순간에, 나는 그 어항 속에서 움직이던 어둑한(때로 찬란한) 기억들의주인이 아니다. 침묵하는 거울 속을 들여다볼 때마다 그곳에서 나를 마주보던, 낯익고도 낯선 얼굴의 주인이 아니다.
감시자도, 감시당하는 자도 아니다. 천구백몇년생도, 어떤 도시들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사람도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어떤 사람들과 어떤 사물들, 어떤 풍경들을 만나고 사랑해온 사람도 아니다. 몇 권의 초라한 ‘내 책‘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 P315

그렇게 수없이 나는 삶으로부터 구원/버림받는다. 그 구원/버림의 힘으로 계속 등신대의 종이에 점을 뚫는다. 그 행위가 두렵거나 고통스럽다고, 스스로에게조차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막 소설 한 편이 끝나려고 할 때, 괄호 속에 들어가 있던 모든것이 둑을 넘듯 조용히 몸속으로 다시 흘러들어올 때, 언제나 나는 더 머뭇거리고 싶어진다. 더 쓰고 싶어진다. 더 숨을 불어넣고싶어진다.


지금 내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이미지는, 펜촉 또는 송곳을 들고 자신이 뚫다 만 종이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어렴풋한 옆얼굴이다. 그들이 내쉬는 더운 숨이 구멍들을 통과해 가장 단순한언어가 된다. 그들은 어떤 소리를 내지도 움직이지도 않는데, 간결한 부호 같은 언어들이 그 구멍들에서 새어나온다(들립니까. 나는 지금 온 힘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내 말을 듣고 있습니까). 실핏줄들을 타고 흐르는 따뜻한 피 같은, 우리가 가진 생명의 가장 연한 부분. 또는 어떤 목소리의 이미지. - P316

2012년 겨울부터 소년이 온다』를 쓰기 위한 자료를 읽으면서 나는 내면의 투쟁을 치르고 있었다. 인간의 잔혹함을 증거하는 자료들과, 다른 한편에서 인간의 존엄을 증거하는 자료들 사이에서 나는 분열을 겪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에게 광주는 더이상 하나의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인간의 폭력과 존엄이 극단적으로 공존한 시간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어 있었다. 신대륙의 학살, 아우슈비츠, 보스니아, 관동과 난징의 학살을 가로지르는 인간의 잔혹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그 폭력 앞에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던 연약한 몸짓들에 대해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 P331

이 소설을 쓰는 일을 거의 포기하려 했던 어느 날, 5월 27일 새벽 군인들이 돌아와 모두를 죽일 것임을 알면서 광주의 도청에 남았던 한 시민군, 섬세한 성격의 야학 교사였던 스물여섯 살 청년의 마지막 일기를 읽었다. 기도의 형식을 한 그 일기의 앞부분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토록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순간 내가 쓰려는 소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든 폭력에서 존엄으로, 그 절벽들 사이로 난 허공의 길을 기어서 나아가는 일만이 남아있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 먼저 이 소설의 맨 앞과 맨 뒤에 촛불을 밝히기로 - P331

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를 하고 싶었다. 촛불의 불꽃의 중심을 통과하여, 삼십여 년을 건너 우리에게 오는 넋들의 걸음걸이를생각했다. 그 불가능한 재생을 단 한 순간이라도 가능케 하고 싶었다. 열다섯 살에 그곳에서 죽어 여름으로 건너오지 못한 소년 동호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으로 떠오르게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다만 애도하고 온 힘을 다해 존엄에까지 가자고 결심은 했지만, 소년이 온다』를 써가는 동안 나는 여전히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스스로 흔들리곤 했다. 4장 ‘쇠와 피‘ 같은 경우에는 내가 흔들리며 회의했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더이상 나아갈 수 없다고 느껴질 때마다, 달리 방법이 없어서 소년에게 매달렸다. 그가 나를 밝은 쪽으로 이끌고 가기를 바랐고, 실제로 그에게 끌려가듯 가까스로 앞으로 나아가는 경험을 했다. 그러므로 만일 지금 누군가 나에게 인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폭력보다 먼저, 인간의 참혹보다 먼저, 6장에서 어린 동호가 엄마의 손을 잡고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것 같다고 느낀다. - P332

그 마음으로 에필로그에 이 대목을 썼다.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 P332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하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 P333

출간 후에


소설이 출간되었다.


더이상 새벽에 일어나 초를 켜지 않아도 된다.
외딴집이 정전됐을 때 촛불이 얼마나 밝은지 보려고 보일러 센서 등을 가리고 냉장고 코드를 뽑지 않아도 된다. 거인 같은 그림자가 천장에 일렁이는 걸 보려고 초를 들고 서성이지 않아도 된다. 촛불의 빛이 지나갈 때마다 낮은 목소리처럼 일어섰다가 어두워지는 책의 제목들을 읽지 않아도 된다.


살갗에서 눈이 녹는 감각을 기억하려고 손이 빳빳해질 때까지 - P342

눈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 눈이 내리기 시작할때마다 가장 가까운 산을 향해 택시로 달려가지 않아도 된다. 산아래 다다랐을 때 눈이 그친 것에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 등산객들을 위한 식당에서 반쯤 나물밥을 먹다가 창밖으로 다시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일어서지 않아도 된다. 등산로를 벗어나 숲속으로.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더이상 자료를 읽지 않아도 된다. 검색창에 ‘학살‘이란 단어를넣지 않아도 된다. 구덩이 안쪽을 느끼려고 책상 아래 모로 누워있지 않아도 된다. 매일 지나치는 도로변 동산의 나무들 사이로햇빛이 떨어지고 녹음 아래 그늘이 유난히 캄캄할 때, 거기 시체들이 썩어가는 모습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 P343

울지 않아도 된다.


더이상 눈물로 세수하지 않아도 된다.


바람 부는 자정에 천변 길을 걷지 않아도 된다.


산사람들보다 죽은 사람들을 더 가깝게 느끼지 않아도 된다. - P343

이 노래를 처음 들은 날, 달력 종이 뒷면에 1부터 1000까지 숫자를 적어 벽에 붙였었다. 하루에 하나씩 지우자고 생각했다. 하루씩 살고 쓰자고, 그걸 천 번만 반복하자고. 너무 오래 잠을 못자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남은 삶에는 평화도 희망도 없고 나빠질 일만 남았다는 결론에 다다라 있어서 이상한 일은 소설을 써갈수록 점점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잠드는 시간이 조금씩 늘었고, 차츰 악몽을 덜 꾸게 되었다. 피와 시체와 유골로 가득한 소설을 쓰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2020년 가을에 초고를 완성하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경하가 성냥 불꽃을 켰을 때 알았다. 이것이사랑에 대한 소설이라는 걸. 깨어진 유리를 녹여 다시 온전한 덩어리로 만드는 불길인 걸.
- P347

「작별하지 않는다」의 첫 페이지를 쓴 날로부터 완성하기까지거의 칠 년이 걸렸으니, 그사이 퍽 많은 양의 메모를 했다. 얇은노트로 열 권이 넘는, 스스로 묻고 답하고 길을 찾으려 더듬어간 기록들이다. 각기 다른 인물, 다른 내러티브로 원고지 오십 매, 백매, 길게는 이백 매까지 써본 버전들도 남아 있다(최초의 제목은
‘새가 돌아온 밤‘이었다). 2018년 겨울에 들고 다녔던 얇은 노트를 열어보니 이런 메모가 적혀 있다. - P348

기도
치고 들어오는 세계.
이것이 세계인가?
아이들이 죽어가고 여자들이 강간당하는,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인가?

그러나 살아 있으므로 아름다운 것들.
지독하게
무정하게 아름다운 것들.

유령,
종려나무,
팔을 흔드는 검은 나무. - P348

악몽 같은 현실에서 구원을 원하는 인간의 이야기.
공포와 폭력.
기도의 이야기.

바람.
해류.
전 세계가 이어지는
바다의 순환.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

눈이 내렸다.
작별하지 않는다.

역사 속에서의 인간
우주 속에서의 인간

내 몸의 감각.
육체. 연약한. 필멸하는. - P349

‘나‘는 그 집에 가게 된다.
모두 ‘나‘를 떠난 뒤에
거의 폐인이 되어.

어디까지 차가울 것인가.
따뜻할 것인가.
뜨거울 것인가의 문제.

학살에 대하여 쓴 ‘나‘가, 학살에서 살아남은 부모를 둔 친구의 집에서, 죽음ㅡ 명부 ㅡ에서 돌아온 새와 하루를 보낸다. - P350

어떤 임계에서, 산자가 마치 혼처럼 되어서, 극심한 고통의 마지막 가장자리에서, 몸을 빠져나와 마침내, 너머의 것을 보게 되는 순간.

삶의 유한성,
존재의 시간성.
극한의 무의미
시간의 불꽃.

눈의 침묵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 P350

눈이 소리를 빨아들이며
내 목소리, 새의 소리도 빨아들일지 모른다는 생각

바람이 그치고 마침내 오직 눈만이.
어떤 소리도 내지 않으며 모든 음향을 흡음하는 눈만이.

이곳은 그녀의 집.
톱을 깔고 자는 어머니와
밤이면 섬망에 시달리며 산으로 올라가는 아버지의 집.

행렬.
그 모든 행렬들.
아메리칸인디언들. 아우슈비츠

모든 학살들.
얼굴이 없는 사람들,
뭉개어진 사람들,

내가 그 밤 서울에서 본.
머리가 길고 걸음이 느린,
총을 든 사람들의 행렬. - P351

눈은 얼마나 많은 공기의 틈을 가지고 있는가?


결정들.


죽은 사람의 얼굴에서 녹지 않는 눈.
죽는다는 건 차가워진다는 것.


대사: 숲속을 걷다가 갑자기 깨달았어. 내가 귀신들과 평생을 살아왔다는 걸.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정말 그럴 필요가 없었어. 네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어. 하지만 거절하기 싫었어. 생각했어.아흔아홉 개의, 무한의 혼들을 깎자고. 그리고 맹세로서 작별하자고. 아니, 반대로 하자고 결코 작별하지 말자고 맹세로서. - P352

그리고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쓴다…… 쓴다.
울면서 쓴다.


흐름을 끊기 싫어 부엌에 선 채로 요기를 했다.
화장실에 뛰어갔다 돌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온 힘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 P353

그보다 앞서 소년이 온다』를 썼던 일 년 육 개월을 기억하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압도적인 고통이다. 그걸 일종의 ‘들림‘이었다고 말한다면 손쉬운 일일 거다. 내가 작가로서 영매의시간을 건너갔다고 근사하게 말한다면.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때 나는 ‘들리지 않았다. 어떤 트랜스 상태에도 들어가지않았다. 매 순간 분명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고통이 나를 부수고 또 부수는 걸 견디면서 작업실에서, 지하철에서, 횡단보도에서, 부엌에서, 이불 속에서 이를 물고 울고 있는 내가 미친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사실은 조금도 미치지 않았다. - P354

그 고통이 대체 무엇이었던가를, 
소년이 온다』를 쓰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야 했다. 그 소설을 읽은 사람들도 함께 느꼈다고 말하는 바로 그 고통을. 그 생생한 고통은 대체 무엇을 증거하는 걸까? 설마, 그건 사랑인가? 지극한 사랑에서 고통이 나오고, 그 고통은 사랑을 증거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 사랑에 대한 다음 소설을 쓰고 싶었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던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소설이 환상성과 현실의 경계에 걸쳐져 있는 것과 별개로 매 순간 분명하게나는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행여 그런 식의 오해를 받을까봐 입 - P354

밖에 꺼내본 적 없는 어떤 생각을, 얼마 전 격월간 문예지의 인터뷰에서 털어놓았다. 인터뷰어였던 동료 소설가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 거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설이 되기 이전에 노트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었나요? - P355

죽음에서 삶으로 가는 소설. 절반 죽어 있던 사람들이 생명을얻는 소설. 바다 아래에서 촛불을 켜는 소설. 어떻게 보면 좀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는데∙∙∙∙∙∙ 항공기 조종사가 우울증을 앓다가 아주 많은 사람들과 함께 추락해서 자살한 사건이 있었잖아요. 살아 있던 사람들을 아주 많이 살해하며 죽었어요. 그런데 절반 죽은 또다른 사람이, 그 항공기 사건과는 정반대로, 삶으로 건너오면서 죽어 있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날 수도있지 않을까요? 물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을 수 있지만, 죽은사람들이 되살아나는 건 현실에서 불가능한 방향이죠. 하지만 어떤 한 순간에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반쯤 죽어 있던 사람이 혼들과 함께, 단 한 순간 삶으로 함께 건너올 수 있지 않을까요? - P355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던 과정에서 내가 구해졌다면, 그건 (목적이 아니라) 부수적인 결과였을 뿐이었다.


글쓰기가 나를 밀고 생명 쪽으로 갔을 뿐이다.


날마다 정심의 마음으로 눈을 뜨던 아침들이.
고통과 사랑이 같은 밀도로 끓던 그의 하루하루가.


날개처럼, 불꽃처럼 펼쳐지던 순간들의 맥박이.
촛불을 넘겨주고 다시 넘겨받기를 반복하던 인선과 경하의 손들이. - P356

그렇게 덤으로 내가 생명을 넘겨받았다면, 이제 그 생명의 힘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생명을 말하는 것들을, 생명을 가진 동안 써야 하는 것 아닐까?


허락된다면 다음 소설은 이 마음에서 출발하고 싶다. - P356

아직 추웠을 때 첫 교정지를 받았던 책이 여름의 문턱에서 나오게 되었다.


장편소설 한 편.
단편소설 두 편.
시 다섯 편.
산문 여덟 편.


이렇게 골라 모으기까지 여러 차례 목차를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하게 된 결심들 중 몇 개를 약속처럼 여기 적어본다. 어머니에 대해 제대로 된 한 권의 책을 따로 쓰겠다. 십 년 전에 앞머리를 써두었던, 「파란 돌」의 꿈에 대한 독립적인 책도 더 늦기 전에 - P358

쓸거다.


예전의 나는 나와 같은 사람이기보다 닮은 사람(들)이다. 교정지를 읽는 동안 그 사람(들)과 묵묵히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사주에 역마가 들어서인지 무던히도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살아왔는데, 오직 쓰기만을 떠나지 않았고 어쩌면 그게 내 유일한 집이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강윤정 편집자님과 도움 주신 모든 분들께, 이 책을 만나주실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2022년 늦은 봄
한 강 -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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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 가득 부풀어오른 두 사람의 그림자가 갑자기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소리 없이, 검은 경계선을 굳게 지킨 채 떨어져 있다.


...... 마침내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오랫동안 익혀 이젠 내 것이나 다름없어진 미소를 머금은 채 비행기를 빠져나왔지요. 누군가와 몸이 가까워질 때마다 실례합니다, 라고 독일어로 말하고 싶었어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짓고 싶었어요. 입국장을 빠져나온 순간 깨달았어요. 가족이며 친구들을 마중 나온 한국 사람들의 사이를, 어깨로 헤치며 나아가면서...... 이제야 내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 모르는 사람에겐 웃거나 인사하지 않는 문화 속으로 무사히 돌아왔다는 걸.
알 수 없었어요. 그 사실이 왜 그때, 그토록 뼈저린 고독감을 나에게 안겨주었는지. - P170

토할 것 같아.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그녀는 중얼거린다.
수개월 전 그녀는 한 시간에서 두 시간 간격으로 여러 날 동안토한 적이 있었다. 재판에 패해 아이를 잃은 직후였다. 일주일 만에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을 때, 아이가 좋아하는 오므라이스를 가까스로 만들어준 뒤 그녀는 저녁 내내 양배추만 먹었다. 믹서기에갈아 먹고, 냄비에 쪄서 먹었다. 그것 말고는 속이 견뎌낼 수 있는것이 없었다.
그러다 엄마 토끼 되겠다. 아이가 말했다. 온몸이 초록색 되겠어. 그녀는 아이와 함께 웃고는 다시 화장실에 들어가 토했다. 위산으로 시어진 입을 헹구고 나와 아이에게 장난스레 물었다. 그런데 왜 토끼는 초록색이 되지 않는다니? 풀만 먹는데, 아이가 대답했다. 그거야, 토끼는 당근도 먹으니까. 구역질을 참으며 그녀는 웃었다. - P173

무거운 눈꺼풀을 가까스로 치켜올리며, 그녀는 설핏 꿈에 잠기듯 해가 저물던 옛집 앞의 골목을 떠올린다. 젊은 어머니와 함께가까운 외가에 가려고 나서던 참이었다. 시장에 들러서 귤을 좀사가자. 어머니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코트의 지퍼를 혼자 잠그지 못해 쩔쩔매던 어린 그녀는 그 순간 문득 눈앞에 떠오르는주황색 감귤들을 보았다. 그것이 진짜 귤이 아니라는 사실에 정말로 보는 것이 아닌데도 그토록 또렷하게 보인다는 사실에 놀랐다. 얼른 생각을 바꿔 나무를 떠올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마술같았다. 그녀의 눈이 보는 풍경은 오직 저무는 골목과 한없이 길게 펼쳐진 콘크리트 담장뿐이었는데, 그녀는 분명히 나무를 보고있었다. 깨우친 지 얼마 되지 않은 문자의 형상들이 거기 겹쳐졌다. 나무, 소리내어 발음하며 그녀는 혼자 웃었다. 나무, 나무, - P181

화해할 수 없었다.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이 모든 곳에 있었다.

환한 봄날, 공원 벤치에 겹겹이 덮인 신문지 아래 발견된 노숙자의 시체 속에 늦은 밤의 지하철, 끈끈한 땀에 젖은 어깨들을 겹치고 각기 다른 곳을 보는 사람들의 흐릿한 눈 속에 폭우가 퍼붓는 간선도로, 끝없이 붉은 미등을 켠 차들의 행렬 속에 수천 개의 스케이트 날들로 할퀴어진 하루하루 속에. 그토록 쉽게 부스러지는 육체들 속에. 그 모든 걸 잊기 위해 주고받는 뚝뚝 끊어지는어리석은 농담들 속에, 그 어떤 것도 잊지 않기 위해 꾹꾹 눌러적는 말들, 그 속에서 어느새 부풀어오른 거품들의 악취 속에.

어느 이른 새벽이거나 늦은 밤, 혼자 오래 있거나 몸이 아픈 뒤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하고 고요한 말이 문득 방언처럼 흘러나오기도 했지만, 그것이 화해의 증거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 P186

어둠을 향해 두 눈을 뜬 채 그는 아직 그녀의 어깨를 안고 있다. 틀려서는 안 되는 무게를 재는 것 같다고 느낀다. 틀려버리고 말것 같다고 느낀다. 그것이 정말로 두렵다고 느낀다.
그녀가 이곳에 오기 직전에 어디 있었는지 그는 모른다. 색색의우산들로 붐비는 방학식 날의 학교 앞에서 기다리다가 마침내 버즈라이트이어가 그려진 우산을. 그 아래 보이는 아이의 반바지를무릎에 박힌 팥알만한 갈색 점을 알아본 것을 모른다. 오늘 왜 왔어. 내일이 만나는 날이잖아. 겁내는 듯 작게 말하는 아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내려다본 것을 모른다. 그 얼굴에 흘러내린 빗방울을 손바닥으로 닦아준 것을 모른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준비한 말을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술을 열었던 것을 모른다. 멀리 안 가도 돼. 아무데도 안 가고 엄마랑 있어도 돼. 같이 도망가도 돼.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어, 라고 말하기 위해. - P203

닫힌 창틀 사이로 빗소리가 파고든다. 거리의 모든 도로를 건물들을 움푹 파이게 하고 금가게 하려는 듯 세찬 소리다. 누군가신발을 끌며 층계를 내려가고 있다. 다시 어디선가 문이 거칠게닫힌다.
심장과 심장을 맞댄 채 여전히 그는 그녀를 모른다. 오래전 아이였을 때,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해도 되는지 알 수 없어 어스름이 내리는 마당을 내다보았던 것을 모른다. 바늘처럼 맨몸을 찌르던 말들의 갑옷을 모른다. 그녀의 눈에 그의 눈이 비쳐 있고, 그비친 눈에 그녀의 눈이, 그 눈에 다시 그의 눈이...... 그렇게 끝없이 비치고 있는 것을 모른다. 그것이 두려워, 이미 핏발이 맺힌 그녀의 입술이 굳게 악물려 있는 것을 모른다. - P204

그녀의 얼굴에서 가장 부드러운 곳을 찾기 위해 그는 눈을 감고 뺨으로 더듬는다. 선득한 입술에 그의 뺨이 닿는다. 오래전 요아힘의 방에서 보았던 태양의 사진이 그의 감은 눈꺼풀 속으로 타오른다.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의 표면에서 흑점들이 움직인다. 폭발하며 이동하는 섭씨 수천 도의 검은 점들. 그것들을 가까이에서본다면, 아무리 두꺼운 필름조각으로 가린다 해도 홍채가 타버릴것이다.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는 입맞춘다. 축축한 귀밑머리에, 눈썹에먼 곳에서 들리는 희미한 대답처럼, 그녀의 차가운 손끝이 그의눈썹을 스쳤다 사라진다. 그의 차디찬 귓바퀴에, 눈가에서 입가로이어지는 흉터에 닿았다 사라진다. 소리 없이, 먼 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 - P205

나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뒤치럭거린다.
두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금세 다시 말라버린 입술을 연다.
끈질기게, 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 P213

심장이라는 사물



지워진 단어를 들여다본다

희미하게 남은 선의 일부

또는 ㄴ이 구부러진 데
지워지기 전에 이미
비어 있던 사이들

그런 곳에 나는 들어가고 싶어진다
어깨를 안으로 말고
허리를 접고
무릎을 구부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

희미해지려는 마음은
그러나 무엇도 희미하게 만들지 않고

덜 지워진 칼은
길게 내 입술을 가르고 - P278

더 캄캄한 데를 찾아
동그랗게 뒷걸음질치는 나의 혀는 - P279

마크 로스코와 나
ㅡ 2월의 죽음



미리 밝혀둘 것도 없이
마크 로스코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는 1903년 9월 25일에 태어나
1970년 2월 25일에 죽었고
나는 1970년 11월 27일에 태어나
아직 살아 있다
그의 죽음과 내 출생 사이에 그어진
9개월여의 시간을
다만
가끔 생각한다

작업실에 딸린 부엌에서
그가 양쪽 손목을 칼로 긋던 새벽
의 며칠 안팎에
나의 부모는 몸을 섞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점 생명이 - P280

따뜻한 자궁에 맺혔을 것이다
늦겨울 뉴욕의 묘지에서
그의 몸이 아직 썩지 않았을 때

신기한 일이 아니라
쓸쓸한 일

나는 아직 심장도 뛰지 않는
점 하나로
언어를 모르고
빛도 모르고
눈물도 모르며
연붉은 자궁 속에
맺혀 있었을 것이다

죽음과 생명 사이,
벌어진 틈 같은 2월이
버티고 - P281

버텨 마침내 아물어갈 무렵

반 녹아 더 차가운 흙 속
그의 손이 아직 썩지 않았을 때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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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언젠가 꼭 이런 밤을 겪은 것 같다.
비슷한 수치와 당혹감을 느끼며 이 길을 걸었던 것 같다.
그때에는 그녀에게 말이 있었으므로, 감정들은 더 분명하고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몸속에는 말이 없다.
단어와 문장들은 마치 혼령처럼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보이고들릴 만큼만 가깝게 따라다닌다.
그 거리 덕분에, 충분히 강하지 않은 감정들은 마치 접착력이약한 테이프 조각들처럼 이내 떨어져나간다.


그녀는 다만 바라본다. 바라보면서, 바라보는 어떤 것도 언어로번역하지 않는다.
눈에는 계속해서 다른 사물들의 상이 맺히고, 그녀가 걷는 속력에 따라 움직이며 지워진다. 지워지면서, 어떤 말로도 끝내 번역되지 않는다. - P75

나는 서둘러 복도로 뛰어나갔어. 캄캄한 비상계단으로 막 내려가려는 그 사람의 팔을 붙잡았어. 그 사람이 천장의 환한 조명을벗어나는 순간 난 더이상 볼 수 없게 되니까. 나는 말과 수화로 동시에 미안하다고 말했어.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거냐고, 모르고 있었다고. 불편하게 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고. 그게 독일어 수화라는 사실을, 당연히 한국어 수화와는 다를 거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지만 다른 방법을 생각해낼 수 없었어.
어떤 반응도 하지 않은 채 그 사람은 물끄러미 나를 건너다보았어. 그때 내가 느낀 이상한 절망을 너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여자의 침묵에는 두려운 데가 어딘가 지독한 데가 있었어. 오래전, 죽은 삐비의 몸을 하얀 가제수건에 싸려고 들어올렸을 때……우리가 얼어붙은 숟가락으로 파낸 작은 구덩이 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느꼈던 정적 같은.
상상할 수 있겠니.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그런 침묵을 본 건 처음이었어. - P87

한 계절에 한두 벌뿐인 검은 옷을 제때 세탁해 입고, 최소한의식료품을 가까운 가게에서 장 봐오고, 최소한의 음식을 만들어 먹은 뒤 바로 치운다. 그 기본적인 일들을 하지 않는 낮시간에는 대채로 거실의 소파에 꼼짝 않고 앉아서, 키 큰 나무들의 두꺼운 밑동과 푸르른 가지들을 내다본다. 저녁이 오기 전에 집은 벌써 어두워진다. 나무들의 윤곽이 검어질 때쯤 그녀는 현관문을 열고 나간다. 어둑어둑 저물어가는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초록색 신호등이 금세 깜박거리는 횡단보도를 건너 계속 걷는다.
더 견딜 수 없을 만큼 피로해지기 위해 걷는다. 이제 돌아가야할 집의 정적을 느낄 수 없게 될 때까지, 검은 나무들과 검은 커튼과 검은 소파, 검은 레고 박스들에 눈길을 던질 힘이 남지 않을 때까지 걷는다. 격렬한 졸음에 취해, 씻지도 이불을 덮지도 않고 소파에 모로 누워 잠들 수 있을 때까지 걷는다. 설령 악몽을 꾸더라도 중간에 잠에서 깨지 않기 위해,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해 새벽까지 뜬눈으로 뒤척이지 않기 위해 걷는다. 그 생생한 새벽시간, 사금파리 같은 기억들을 끈덕지게 되불러 모으지 않기 위해 걷는다. - P101

두 사람이 잠자코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가 있다. 수업시간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수업이 시작된 뒤에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사무실 앞에서 차츰 그의 얼굴이 그녀에게 낯익은 것이 되었다. 그의 평범한 이목구비와 표정과 체구와 자세가 고유한 이목구비와 표정과 체구와 자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 변화에 대해 언어로 생각한 적이없기 때문이다. - P103

무더운 칠월의 밤이다.
흑판 양쪽 가장자리에 설치된 선풍기 두 대가 맹렬히 돌아가고있다. 강의실 양쪽의 창문들은 모두 활짝 열려 있다.


이 세계는 덧없고 아름답지요 라고 그가 말한다.
하지만 이 덧없고 아름다운 세계가 아니라 영원하고 아름다운세계를 원했던 거지요. 플라톤은. - P104

연한 녹색 안경알 뒤의 담담한 눈길로 그는 그녀의 또렷한 눈을응시한다. 학생들이 유난히 집중하지 않기 때문인지, 십 분 가까이 그는 희랍 문법 대신 텍스트의 내용을 풀어 설명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이 강독의 성격은 희랍어와 철학 사이에 비스듬히 걸쳐진 것이 되었다.


아름다운 사물들은 믿으면서 아름다움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은 꿈을 꾸는 상태에 있는 거라고 플라톤은 생각했고, 그걸 누구에게든 논증을 통해 설득해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세계에선 그렇게 모든 것이 뒤집힙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오히려 모든 꿈에서 깨어난 상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실 속의 아름다운 사물들을 믿는 대신 아름다움 자체만 ㅡ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수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만을ㅡ 믿는 자신이. - P105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감정을 부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파편으로 다가와
파편인 채 그대로 흩어진다. 사라진다.

단어들이 좀더 몸에서 멀어진다.
거기 겹겹이 무거운 그림자처럼,
악취와 오심처럼,
끈적이는 감촉처럼 배어 있던 감정들이 떨어져나간다.
오래 침수돼 접착력이 떨어진 타일들처럼.
자각 없이 썩어간 살의 일부처럼. - P115

너와 함께 내가 보낸 그 긴 시간 동안, 그 어떤 질문과 대답 어떤 인용과 암시와 논증보다 절실하게 너에게 건네고 싶었던 말은어쩌면 정작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어.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루한 맥락에서 나는 플라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것이라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고.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 P135

아직 식지 않은 늦가을의 흙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눈송이들.
어질머리나게 피어오르는 이른봄의 아지랑이.

고요하고 희미한 그 기척들,
믿어본 적 없는 신의 파편들.

태어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이데아.

모든 존재의 뒤편에 물 위의 환한 그림자처럼 떠올라 있는,
모든 존재가 수천의 눈부신 꽃으로 피어나 세계를 싸안고 있는,
열여섯 살의 내가 온 힘으로 붙들었던 화엄.

안경을 벗은 채 이 침대에 누워, 모호하게 휜 저 허공을 올려다보면서 그 세계를 생각하고 있어.
눈을 부릅뜨고 그걸 들여다보고 있어. - P136

이제 곧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다른 사물과 구별할 수 없게 되겠지.
내가 기억하는 모든 얼굴들은 기억 속에 굳게 얼어붙겠지.

너라면 이 순간 나에게 거침없이 충고하겠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과장되게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하겠지.
그게 어쨌다는 거지? 점자를 배워. 백지에 구멍을 뚫어서 시를써. 근사한 리트리버를 사귀는 법을 배워.

만일 네가 죽지 않았다면, 독일로 돌아가 널 다시 만날 때 난 네 얼굴을 만져야 했을까, 내 손으로 더듬어 네 이마를, 눈꺼풀을, 콧날을, 뺨과 턱의 주름들을 읽어야 했을까.
아니, 나는 그러지 못했을 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너는 나를 욕망했으니까.
그 욕망을 견딜 수 없어서 몸부림쳤으니까. - P139

우리 사이의 모든 걸 네 손으로 무너뜨렸으니까.
난 전속력으로, 너를 깊게 상처 입히며 도망쳤으니까.
널 원망했으니까.
네가 아닌 네가 보고 싶어 잠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네가 아닌 너만을 미치도록 그리워했으니까.


그 쓸쓸한 몸은 이제 죽었니.
네 몸은 가끔 나를 기억했니.
내 몸은 지금 이 순간 네 몸을 기억해.
그 짧고 고통스러웠던 포옹을.
떨리던 네 손과 따스한 얼굴을.
눈에 고인 눈물을. - P140

그녀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다.
연필을 쥔 손에 힘을 준다.
고개를 더 수그린다.
단어들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입술을 잃은 단어들,
이뿌리와 혀를 잃은 단어들,
목구멍과 숨을 잃은 단어들이 잡히지 않는다.
몸이 없는 헛것처럼, 형체가 만져지지 않는다. - P141

한 사람이 눈 속에 엎드려 있다.
목구멍에 눈물.
눈두덩에는 흙.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 사람이 그 앞에 멈춰 서 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 P142

연한 사과향의 목욕비누 냄새가 코끝으로 끼쳐온다. 차갑고 날렵한 두 손이 그의 두 겨드랑이에 끼워진다. 손들이 일으키는 대로 그는 일어선다. 보이지 않는 바닥을 단단히 두 발로 디디려 애쓴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팔에 의지해 그는 한 발 한 발 계단을오른다. 그가 발을 헛디딜 때마다, 그의 몸을 붙든 팔에 힘이 실린다.
어둠의 명도가 달라진다. 계단이 끝났다는 것을, 불 켜진 현관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아볼 수 있다. 희끄무레하고검은 것들의 윤곽이 보인다. 우편함으로 짐작되는 회색과 흰색의벽면, 아마도 현관문 바깥일 압도적인 어둠이 보인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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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일본계 혼혈인 비서였던 아름답고 젊은 마리아고타마에게. 그녀는 87세의 보르헤스와 결혼해 마지막 석 달을 함께 지냈다. 그가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제 묻히고 싶어했던 도시 제네바에서 그의 임종을 지켰다.
한 연구자는 자신의 책에서 그 짧은 묘비명이 ‘서슬 퍼런 상징‘ 이라고 썼다. 보르헤스의 문학으로 들어가는 의미심장한 열쇠라고ㅡ기존의 문학적 리얼리티와 보르헤스식 글쓰기 사이에 가로놓인 칼ㅡ믿었던 그와는 달리, 나는 그것을 지극히 조용하고 사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였다.
그 한 줄의 문장은 고대 북구의 서사시에서 인용한 것이었다. - P9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침상에서 보낸 첫 밤이자 마지막 밤, 새벽이 올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 장검이 놓여 있었다. 그 ‘서슬 퍼런‘
칼날이 만년의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길게 가로놓였던 실명失明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스위스를 여행한 적이 있지만 제네바에는 들르지 않았다. 그의무덤을 굳이 직접 보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가 보았다면 무한히 황홀해했을 성 갈렌의 도서관을 둘러보았고(천년 된 도서관의 마루를 보호하기 위해 관람객들에게 덧신게 했던 털슬리퍼의 까슬한 감촉이 떠오른다), 루체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저물녘까지얼음 덮인 알프스의 협곡 사이를 떠다녔다.
어느 곳에서건 사진은 찍지 않았다. 풍경들은 오직 내 눈동자속에만 기록되었다. 어차피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소리와 냄새와감촉 들은 귀와 코와 얼굴과 손에 낱낱이 새겨졌다. 아직 세계와나 사이에 칼이 없었으니, 그것으로 그때엔 충분했다. - P10

여자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이마를 찡그리며 흑판을 올려다본다.
자, 읽어봐요.
알이 두꺼운 은테 안경을 낀 남자가 미소를 머금으며 말한다.
여자는 입술을 달싹인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뒤치럭거린다. 여자는 입술을 벌렸다 다문다. 숨을 멈췄다 깊이 들이마신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겠다는 듯, 남자가 흑판 쪽으로 한 발 물러서며 말한다.
읽어요.
여자의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여자는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는 순간 자신이 다른 - P11

장소로 옮겨져 있기를 바라는 듯이.
흰 백묵 자국이 깊게 박힌 손가락으로 남자는 안경을 고쳐쓴다.
어서 말해요.

여자는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 스웨터에 검은 바지를 입었다. 의자에 걸어놓은 재킷도 검정색이며, 커다랗고 검은 헝겊 가방에 넣어둔 목도리는 검정색 털실로 짠 것이다. 상가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 같은 그 복장 위로, 그녀의 거친 얼굴은 일부러 길게 빚은진흙상처럼 여위어 있다.
젊지도, 특별히 아름답지도 않은 여자다. 총명한 눈빛을 가졌지만, 자꾸만 눈꺼풀이 경련하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보기 어렵다. 마치 세상으로부터 검은 옷 속으로 피신하려는 듯 어깨와 등은 비스듬히 굽었고, 손톱들은 지독할 만큼 바싹 깎여 있다. 왼쪽 손목에는 머리칼을 묶는 흑자주색 벨벳 밴드가 둘러져 있는데, 여자의 몸에 걸쳐진 것들 중 유일하게 색채를 가진 것이다. - P12

강단에 선 남자는 삼십대 중후반으로 보인다. 체구는 약간 작은편이고 눈썹과 인중의 선이 뚜렷하다. 감정을 자제하는 엷은 미소가 입가에 어려 있다. 짙은 밤색 코르덴 재킷은 팔꿈치 부분에 밝은 갈색 가죽이 덧대어져 있다. 약간 짧은 소매 밖으로 손목이 드러나 보인다. 그의 왼쪽 눈시울께에서 입술 가장자리까지 가늘고희끗한 곡선으로 그어진 흉터를 여자는 묵묵히 올려다본다. 첫 시간에 그것을 보았을 때, 오래전 눈물이 흘렀던 곳을 표시한 고지도 같다고 생각했었다.
엷은 녹색을 넣은 두꺼운 안경알 뒤로, 남자의 눈이 여자의 꾹다문 입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가신다. 그는 굳은 얼굴을 돌린다. 짧은 희랍어 문장을 빠르게 흑판에 쓴다. 악센트들을 채 찍기 전에 백묵이 두 동강나며 떨어진다. - P13

구두를 벗지 않은 채 그녀는 현관 턱에 걸터앉는다. 두툼한 회랍어 교본과 사전, 공책과 납작한 필통이 들어 있는 가방을 내려놓는다. 노란빛이 도는 센서등이 꺼질 때까지 눈을 감고 기다린다. 어두워지자 그녀는 눈을 뜬다. 어둠 때문에 검게 보이는 가구들을, 검은 커튼을, 정적에 잠긴 검은 베란다를 본다.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가 이내 악문다.
심장에 장전된 차디찬 폭약을 향해 타들어가던 불꽃은 없다. 더이상 피가 흐르지 않는 혈관의 내부처럼, 작동을 멈춘 승강기의통로처럼 그녀의 입술 안쪽은 텅 비어 있다. 여전히 말라 있는 뺨을 그녀는 손등으로 닦아낸다.
눈물이 흘렀던 길에 지도를 그려뒀더라면.
말이 흘러나왔던 길에 바늘 자국을 핏자국이라도 새겨뒀더라면.

하지만 너무 끔찍한 길이었어.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그녀는 중얼거린다. - P26

그녀 자신이 방금 사용한 단어들의 형상을 들여다보다가, 때때로 입술을 열어 그것들을 읽을 때가 있었다. 핀에 꽂힌 육체 같은그 납작한 형상들과, 뒤늦게 그것을 읽으려 하는 자신의 목소리가얼마나 이질적인 것인지 그녀는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읽기를멈추고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곤 했다. 베인 곳을 바로 눌러 지혈하거나, 반대로 힘껏 피를 짜내 혈관 속으로 균이 들어가는 걸 막걸막아야 할 때처럼. - P34

나는 침묵했습니다. 대답을 기다리던 당신은 수첩을 덮어 도로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우리는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허락된 것처럼.
그때 나는 불현듯 낯선 슬픔을 느꼈는데, 방금 받은 상처나 모욕감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나 좌절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모든 것을 못 보게 될 나이는 아직 나에게서 멀리, 충분히 떨어져있었습니다. 쓰라리고도 달콤한 그 슬픔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있는 당신의 진지한 옆얼굴에서, 미세한 전류가 흐르고 있을것 같은 입술에서, 그토록 또렷한 검은 눈동자들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 P40

인간의 모든 고통과 후회, 집착과 슬픔과 나약함 들을 참과 거짓의 성근 그물코 사이로 빠져나가게 한 뒤 사금 한줌 같은 명제를 건져올리는 논증의 과정에는 늘 위태하고 석연찮은 데가 있기마련입니다. 대담하게 오류들을 내던지며 한 발 한 발 좁다란 평균대 위를 나아가는 동안, 스스로 묻고 답한 명철한 문장들의 그물 사이로 시퍼런 물 같은 침묵이 일렁이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계속 묻고 답합니다. 두 눈은 침묵 속에 시시각각 물처럼 차오르는 시퍼런 정적 속에 담가둔 채,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 P48

말할 수 있었을 때, 그녀는 목소리가 작은 사람이었다.
성대가 발달하지 않았거나 폐활량이 문제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공간을 차지하는 것을 싫어했다. 누구나 꼭 자신의 몸의부피만큼 물리적인 공간을 점유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훨씬 넓게퍼진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넓게 퍼뜨리고 싶지 않았다.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카페와 식당에서 
그녀는 스스럼없이 큰소리로 대화하거나 누군가를 소리쳐 부르지 않았다. 어느 자리에서건-강의할 때만 예외였다누구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른 체구였지만, 자신의 부피를 더 작게 만들기 위해 어깨와 등을 웅크렸다. 그녀는 유머를 이해했고 퍽 낙천적인 미소를 가졌지만, 웃음소리만은 낮아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 P57

그에 비하면 언어는 수십 배 육체적인 접촉이었다. 폐와 목구멍과 혀와 입술을 움직여, 공기를 흔들어 상대에게 날아간다. 혀가 마르고 침이 튀고 입술이 갈라진다. 그 육체적인 과정을 견디기 어렵다고 느낄 때 그녀는 오히려 말이 많아졌다. 긴 문어체의 문장으로, 유동하는 구어의 생명을 없애며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도 평소보다 커졌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수록 점점 사변적으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순간들이 반복되는 시기에는, 혼자 있는 시간에도 글을 쓰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말을 잃기 직전, 그녀는 어느 때보다 활달한 
다변가였다. 어느때보다 오래 글을 쓰지 못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공간 속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이 쓴 문장이 침묵속에서 일으키는 소란 역시 견디기 어려웠다. 때로는 글을 시작하기도 전에, 한두 단어의 배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구토의 기미를느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말을 잃은 원인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간단할 수는 없었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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