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의 편지는 감정적이지 않았다. 분노의 기미조차 없었다. 그러나 구구절절, 처음부터 끝까지, 상처받았고 실망했다는 암시가 담겨있었다. 그는 그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방탕했던어린 시절을 극복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사랑이 그가 진지하고 점잘게 살도록 할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여겼다고 했다. 그러나이제 그녀의 부모님은 단호한 입장을 취하여 파혼하라고 명하셨다. 부모님의 결정이 정당하다는 것을 그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결코 행복한 것일 수가 없었고 처음부터 가망이 없었던 거라고 했다. 편지 전체에서 그녀는 단 한 번 아쉬움을 드러냈는데, 그게 마틴에게는 쓰라렸다. "당신이 어느 직장에 자리를 잡고 성공하려고 노력하기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하지만 그렇게 될 리가 없었어. 당신의 예전 삶이 너무 거칠고 불규칙적이었으니까. 당신이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는 걸 이해할 수 있어. 당신은 자신의 본성과 일찍이 받은 훈련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나는 당신을 비난하지 않아, 마틴, - P158

이 점을 기억해 줘. 우리의 관계는 단순히 실수였어. 부모님은 우리가 서로에게 맞지 않고, 너무 늦지 않게 알게 된 걸 둘 다 다행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어. 나를 만나려고 해 봐야 소용없어." 편지 막바지에 그녀는 말했다. "우리 어머니에게는 물론이고 우리 둘다에게 즐겁지 않은 만남이 될 거야. 나는 내가 어머니께 크나큰 고통과 걱정을 안겨 드렸다고 느끼고, 그건 사실이야. 나는 속죄하기위해 아주 열심히 노력하며 살 거야."
그는 끝까지 읽었고, 주의 깊게, 두 번째로 다시 읽었다. 그러고 앉아서 답장을 썼다. 사회주의 집회에서 자신이 했던 발언을 간략히 개괄하고, 어느 모로 보나 그 발언은 신문에 그가 한 말로 적힌 내용과 반대임을 지적했다. 편지의 막바지에는 자신이 열렬히 사랑을 갈구하는, 신이 선택한 연인이라고 썼다. "제발 답장을 해 줘." 그는 말했다. "답장에서 한 가지 대답만 해 줘. 당신은 나를 사랑해? 그게 다야.
내 질문은 이것 하나뿐이고, 당신이 할 대답도 하나야." - P159

그녀는 소리 내어 울면서 갔다. 그녀의 무거운 몸과 꼴사나운 걸음걸이를 지켜보는 그의 가슴이 슬픔으로 찢어졌다. 멀어져 가는 누나를 보고 있자니, 니체주의적인 사고체계가 흔들려 기우뚱대는 듯했다. 추상적인 개념으로의 노예 계급이야 아무 문제 없지만, 그게 제 가정사일 경우에는 괜찮지만은 않았다. 강자에게 짓밟히는 노예가 있다면, 바로 제 누나 거트루드였다. 그 역설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어쩌다 감정 혹은 정서를 느끼자마자 흔들리다니, 아아, 노예의 도덕에 흔들리다니, 자신은 어지간히 훌륭한 니체주의자였다. 그가 누나에게 느끼는 연민은 사실 노예의 도덕이었다. 진정으로 강한자는 연민과 동정을 초월했다. 연민과 동정은 지하의 노예 수용소에서 생겨났고, 비좁게 욱여넣어진 비참한 약자들의 몸부림과 땀에 지나지 않았다. - P161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게 다 당신 자신의 뜻인가?" 그는 물었다.
"그래." 그녀는 낮고 분명한 목소리로 신중하게 말했다. "내 뜻이야. 당신이 나를 망신스럽게 해서 나는 친구들 만나기도 부끄러워.
다들 당신 얘기를 하고 있어. 난 알아. 내가 당신한테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다야. 당신이 나를 매우 불행하게 만들었고, 나는 다시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
"친구들! 뒷말! 신문의 허위보도! 이런 것들은 절대로 사랑보다 강하지 않아! 난 당신이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없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도 사랑하라고?" 그녀는 희미하게 말했다.
"마틴, 당신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라. 난 쉬운 여자가아니야"
"봤지? 누나는 당신과 어떤 인연도 맺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노먼은 소리치고 그녀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마틴은 그들이 지나가도록 옆으로 물러서서, 외투 호주머니 속을더듬어 거기 있을 리 없는 담배와 종이를 찾았다. - P163

북 오클랜드까지는 먼 길이었으나, 계단을 올라 제 방에 들어서고나서야 그는 그 길을 걸어왔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침대 가에 앉아막 깨어난 몽유병자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식탁 위에 있는 『기한 초과를 보고 그는 의자를 끌어다 앉아서 펜을 찾았다. 그 - P163

의 천성에는 완성을 향한 논리적 충동이 있었으며, 여기 완성해야할 것이 있었다. 다른 일 때문에 미뤄져 왔으나, 이제 그 다른 일이끝났으니 그는 이 일에 전념하여 이것을 끝낼 것이다. 그다음에 뭘할지는 알지 못했다. 인생의 전환기가 끝났다는 것만 알았다. 그 기간이 다했으므로, 그는 노동자다운 자세로 마무리하려는 것뿐이었다. 미래는 궁금하지 않았다. 미래가 그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 두었을지 곧 알게 될 터였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 어떤 것도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 P164

오래지 않아 그는 일본 식당의 단골 노릇을 그만두게 되었다. 투쟁을 포기한 바로 그때, 전세는 역전되었다. 그러나 너무 늦은 일이었다. 아무런 흥분 없이 그는 「천년 왕국지에서 온 두툼한 봉투를뜯어 300달러의 액수가 적힌 수표를 훑어보았고, 『모험』을 수락하고 보낸 원고료임을 알게 되었다. 그가 세상에 진 빚의 총액은 전당포의 고리대를 포함해서 100달러가 채 안 됐다. 빚을 다 갚고 브리슨덴의 변호사에게 써준 100달러의 차용증서를 청산해도 100달러이상이 수중에 남았다. 그는 양복점에 정장을 주문하고 시내에서 가장 좋은 카페에서 매끼 먹었다. 여전히 마리아가 세놓은 제 작은 하숙방에서 자긴 했지만, 새 옷을 입은 그의 모습에 동네 아이들이 잠잠해졌다. 더 이상 헛간 지붕 위나 뒷담 너머에서 그를 ‘떠돌이‘라든지 ‘부랑자‘라고 놀려대지 않았다. - P176

하와이에 대한 그의 단편 소설 『위키위키는 워런스 먼슬리에250달러에 팔렸다. 「노던 리뷰」가 그의 에세이 『미의 요람』을, 「매-킨토시 매거진이 「손금쟁이 그가 매리언에게 써준 시 - 를 가져갔다. 편집자와 독자들이 여름휴가에서 복귀해 원고들이 빠르게처리되었다. 그런데 무슨 변덕으로 그들이 2년 동안 줄기차게 거절했던 원고들을 이처럼 한꺼번에 수락하는지 마틴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의 원고는 이전에 한 번도 출판된 적이 없었다. 그는 오클랜드 밖으로는 알려지지 않았고, 오클랜드에서도 몇몇이 그를 악명높은 행동대원이자 사회주의자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의 상품의 이처럼 급작스러운 수락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순전히 운명의 장난질이었다. - P176

어느 날 마틴은 자기가 외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건강하고 힘이 넘쳤으나 할 일이 없었다. 글쓰기와 공부의 중단, 브리덴의 죽음, 그리고 루스와의 결별로 그의 삶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카페에서 호사스런 식사를 하고 이집트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삶이 채워지지는 않았다. 정말로 남태평양이 부르고 있었지만, 그는 미국에서의게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느꼈다. 두 권의 책이 곧 출간될 것이고, 출간될지도 모를 다른 책들도 있었다. 그 책들로부터 돈이 나오면, 그는 한 자루 가득 돈이 채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남태평양으로 가져갈 것이다. 칠레 달러로 천 달러면 살 수 있는 마르케사스 제도의 한 골짜기와 만을 알고 있었다. 말굽 모양의 육지로 둘러싸인만으로부터 구름을 머리에 인 까마득한 산꼭대기까지, 내내 이어지는 골짜기는 대략 만 에이커는 되리라. - P180

마틴은 예전에 느꼈던 싸움의 전율을 다시 느끼며 싸움을 즐겼다. 하지만 즐거움은 빠르게 사라지고 그는 커다란 슬픔에 짓눌렸다. 거리낌 없고 속 편한 저 지난 시절의 친구들보다 자기는 훨씬 나이를더 먹은 ㅡ수백 살은 더 먹은ㅡ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먼 길을,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한때는 자기도 그렇게 살았건만, 이제는 싫었다. 전부 다 실망스러웠다. 그는 외계인이 되어 버렸다. 맥주 맛이 조야했듯이, 그들의 우애도 지금의 그에게는 조야하게 보였다. 그는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다. 수천 권의 책들이 그들과 그 사이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가 그자신을 추방했던 것이다. 지식의 광대한 영토로 너무 깊숙이 들어온 나머지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그는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는 어디에서도 새로운 고향을 찾을 수 없었다. 그 패거 - P191

리가 그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그 자신의 가족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부르주아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그가 매우 존경하는 옆자리의 아가씨는 그도, 그가 그녀에게 바친 영예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의 슬픔은 씁쓸함으로 물들어 갔다.
- P192

한 가지는 분명했다. 모스 가 사람들은 그라는 사람 자체나 그의작품 때문에 그를 만나려 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지금 그들이 그를-원하는 이유는 그라는 사람 자체나 그의 작품 때문이 아닌, 그가 가진 명예 때문이었다. 그가 발군의 인물이고, 왜 아니겠는가? - 또수십만 달러쯤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부르주아 사회가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이니, 어떻게 그렇지 않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자존심이 있었다. 그런 평가를 경멸했다. 그 자신으로서, 혹은 그 자신의 표현인 자신의 작품으로 평가받기를 바랐다. 리지가그렇게 그를 평가했다. 그녀는 그의 작품조차 개의치 않았다. 그만을, 그라는 사람만을 높이 평가했다. 배관공 짐과 옛 패거리도 그를 그런 식으로 평가했다. 그가 그들과 어울리던 시절에 이 점은 충분히 입증되었다. 셸 마운트 공원의 일요 야유회에서도 입증되었다. 그의 작품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들이 좋아하고 싸움마저 마다하지 않고 지키려 한 대상은 자기들 중 하나이며 꽤 괜찮은 녀석인 마틴 에덴, 그냥 그였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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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건 경우가 달라. 신문에 실리는 가벼운 소설들은 내가 하루 종일 문체와 씨름하고 나서 기진맥진한 상태로 써내는 거야. 그러나 기자라는 직업은 아침부터 밤까지 기사만 써내야 하는 일이고 삶 전체를 바쳐야 하는 일이야. 소용돌이 같은 삶, 과거도 미래도 없이 당장의 그 순간만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해. 문체에 대해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보고체만 써야 하는데, 그건 문학과는 거리가 멀지. 내 문체가 막 형성되려는 지금 기자가 된다는 건 문학적 자살이나 마찬가지야. 지금도 신문에 실리는 가벼운 소설 한 편마다, 가벼운 소설의 단어 하나마다, 나 자신과 나 자신에 대한 존중과, 나의 문학에 대한 존중에 위배돼. 정말 구역질이 난다고. 나는 죄를 지었어. 그래서 나는 그것들이 팔리지 않게 되자 속으로 기뻤어. 옷을 전당포에 맡겨야 했지만 말이야. 그런데 연애시 연작』을 쓸 때의 기쁨이란! 지고의 창조적 기쁨이란! 만사가 그걸로 보상되고도 남았어." - P67

마틴은 루스가 창조적 기쁨에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창조적 기쁨‘이란 말을 종종 썼다. 그는 그 말을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처음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에 대해 읽었고,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따는 과정에서 그것에 대해 배웠다. 그러나 그녀는 독창적이지도 창조적이지도 않았으며, 그녀가 문화에 대해 하는 말이란 다른 사람이 어디선가 듣고 되풀이한 말을 또 되풀이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바다 서정시를 손 본 편집자가 옳지 않았을까?" 그녀는 의문을 제기했다. "생각해 봐, 편집자는 자격을 검증받았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편집자가 되지 못했을 테니까." - P67

"그 말은 기존 체제를 지속시키는 논리와 같아." 편집자라는 족속에 대한 분노로 그는 열변을 토했다. "이미 있는 것이 옳을 뿐만 아니라, 있을 수 있는 가능성 중에 최상이라는 논리.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존재하기에 적합하다는 증명이 충분히 된다는 논리. 보통 사람들은 현재의 조건에서 그럴뿐더러 모든 조건에서도 그럴 거라고 믿어. 그런 헛소리를 믿는 이유는 물론 무지 탓이야. 그들의 무지는 바이닝거 (오스트리아의 사상가 - 옮긴이)가 묘사한 몽매한 상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들은 자신이 생각한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그런생각 없는 사람들이 진짜 생각하는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의 목줄을틀어쥐고 있단 말이야."
그는 자신이 루스가 이해하기에는 무리인 얘기를 하고 있음을 깨닫고 멈추었다. - P68

물론 순전히 허튼소리지. 지나치게 신경 쓰고 정신을 혹사해서 생기는 증상이야. 요점은 이거야. 내가 왜 이렇게 지내왔을까? 자기를위해서야. 수련 기간을 단축하고 성공을 앞당기기 위해서야. 이제 나는 수련을 마쳤어. 내 장비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아. 맹세컨대, 나는 매달 평범한 대학생이 일 년에 걸쳐 배우는 것보다 더 많이 배워. 정말이지 나는 알아. 하지만 자기가 이해해 주기를 내가 이토록절실히 바라지 않는다면 얘기하지 않았을 거야. 자랑하는 게 아니라고 읽은 책을 보면 결과를 알 수 있지. 지금 시점에서 자기의 남동생들은 나에 비하면 무지한 야만인들이야. 그들이 자는 동안 나는 책을 비틀어 지혜를 짜냈어. 예전에는 유명해지기를 원했지만, 이제는 별로 개의치 않아. 내가 원하는 건 너야. 음식보다, 옷보다, 인정받는 것보다 나는 네게 굶주려 있어. 내 꿈은 너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수억 년쯤 잠자는 거고, 그 꿈은 남은 한 해가 가기 전에 이루어질 거야." - P75

"그것들은 염병에 걸려 버리라지!" 마틴이 브리슨덴의 작품을 잡지사들에게 보내 보겠다고 자청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것들은 내버려 두고, 자네는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 사랑하게. 배를 타고 자네의 바다로 돌아가. 그게 내가 자네에게 하는 충고야, 마틴 에덴. 이 병들고 썩은 도시에서 뭘 바라나? 자네는 잡지계의 천한 요구에 맞춰 아름다움을 팔아 보려는 헛수고로 날마다 제 목을 조르고 있어.
전에 자네가 인용한 구절이 뭐였더라? 아, 그래, ‘인간, 최신 하루살이 자네, 최신 하루살이는 명성을 얻어서 뭘 하려는가? 명성은 자네에게 독이 될 거야. 그따위 이유식을 먹고 크기에는 자네가 너무 단순하고, 너무 원초적이고, 너무 합리적이라고 나는 믿네. 자네가 시한 줄도 잡지에 팔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네가 섬겨야 할 단 하나의 주인님은 아름다움이야. 아름다움을 섬기고 대중은 무시해 버려! 성공! 헨리의 유령」을 능가하는 자네의 스티븐슨에 관한 소네트, 『연애시 연작』, 그리고 바다에 관한 시들이 성공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면, 성공이란 게 대체 뭔가? 자네의 기쁨은 글을 써서 성공하는 데있지 않고, 글을 쓰는 데에 있어. 자네는 그렇게 말하지 못하겠지. 난 알아. 자네도 알아. 아름다움이 자네를 아프게 해. 아름다움은 자네 - P94

에게 끝나지 않을 고통이고, 치유되지 않을 상처이며, 화염의 칼이야.
자네가 왜 잡지사와 흥정해야 하지? 아름다움을 자네의 목적으로삼아. 왜 자네가 아름다움을 거푸집에 넣어 금화를 찍어 내야 해? 어쨌거나 자네는 할 수도 없어. 그러니 내가 흥분할 필요도 없지. 잡지를 천 년 동안 읽어 봤자 키츠의 시 한 줄 만한 값어치도 없어. 명성과 돈은 내버려 두고, 내일 당장 선원 계약을 해서 바다로 나가라고."
"명성이 아니고, 사랑을 위해서입니다." 마틴은 웃었다. "당신의 우주에는 사랑이 있을 자리가 없는 모양이죠? 내 우주에서 아름다움은 사랑의 시녀죠."
브리슨덴은 연민과 동경이 담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참 젊네, 마틴, 참 젊어. 자네는 높이 날아오를 텐데, 날개가 가장 섬세한 실로 짜여 있고 가장 선명한 염료로 물들여져 있지. 그걸 그을게 하지 마. 그런데 물론 자네의 날개는 이미 그을었어. 『연애시 연작』을 쓰려면 찬미의 대상인 어떤 여자가 있었을 테고, 그게 그 시에서 아쉬운 점이야." - P95

이제 내 목을 졸라 봐야 소용없어. 난 할 말을 할 거니까. 명백히 이번은 자네의 풋사랑이야. 그런데 아름다움을 위해서, 다음번에는 보다 나은 취향을 보여 줘. 부르주아의 딸과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 그런 여자애들은 내버려 두라고. 삶을 비웃고 죽음을 야유하며, 사랑을 마다하는 법 없는 대단한 여자, 걷잡을 수 없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은 여자를 고르라고. 그런 여자들이 있고, 그들도 부르주아의 온실 같은 삶에서 배출된 여느 겁쟁이만큼 기꺼이 자네를 사랑할 걸세."
"겁쟁이라고요?" 마틴은 항의했다.
"바로 그거야, 겁쟁이. 자기들에게 지껄여진 오밀조밀한 도덕을 지껄이면서, 삶을 제대로 살기는 겁내지. 그들은 자네를 사랑하겠지만,
마트, 자기들의 오밀조밀한 도덕을 더 사랑할 거야. 자네가 원하는것은 삶의 멋진 방기, 위대하고 자유로운 영혼, 불타는 나비야. 조그맣고 칙칙한 나방이 아니지. 오, 자네는 그 멋진 나비들도 역시 지겨워하게 될 거야. 불행히도 그때까지 살아 있게 된다면, 여자라면 다지겨워하게 될 거라고. 그런데 자네는 그때까지 살지 못할 거야. 배를 타고 바다로 돌아가지 못할 거야. 그래서 이 역병이 창궐하는 도시들을 배회하다 뼛속 깊이 썩어 문드러져, 죽어 버릴 거야." - P97

그러나 브리스덴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금욕적인 얼굴에 급격히 떨어지는 체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놓고 쾌락을 탐닉했다. 그는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삶의 모든 방식을 신랄하게 비꼬았다. 그러면서도, 죽어 가면서 삶을 철저히 사랑했다. 그는 살려는 광기, 짜릿한 흥분을 느끼려는 광기, 그 자신이 언젠가 썼듯이 ‘내가 태어난 우주 먼지 속, 나의 작은 공간에서 꿈틀거리려는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새로운 짜릿함과 새로운 감각을 추구하여 마약에 손대고 여러 이상한 짓을 한 적도 있었다. 마틴에게 말한 바로는, 한번은 갈증이 해소될 때의 그 격렬한 쾌감을 경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3일이나 물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자인지, 마틴은 결코 알 수 없었다. 그에게 과거는 없고 미래는 임박한 죽음이며, 현재는 삶의 모진 열병이었다. - P98

추운 방에서 루스는 몸이 떨리고 방으로 맞아들이는 그의 손이 너무 차가운 데에 이미 충격을 받았건만, 그의 얼굴은 창작열로 환히 빛났다. 그의 낭독을 그녀는 경청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따금 못마땅한 기색이 비칠 뿐이었으나, 그는 끝까지 읽고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 줘. 어때?"
"나.... 나는 모르겠어." 그녀는 답했다. "그게 과연... 당신은 그게이팔리리라 생각해?"
"안 팔리겠지."라는 고백이었다. "잡지에 실리기에는 너무 강해. 하지만 이건 진실이야, 맹세코 진실이야."
"팔리지 않을 줄 알면서 왜 그런 걸 꾸역꾸역 쓰는 거야?" 그녀는가차 없이 따지고 들었다. "당신은 먹고살기 위해 글을 쓰는 거잖아, 안 그래?"
"그래, 그렇지. 그런데 이 처절한 이야기가 나를 낚았어. 나는 쓰지 않을 수가 없었어. 나더러 써야만 한다고 했어."
"하지만 그 주인공, 그 위키위키를 왜 그렇게 거친 인물로 만들었어? 독자들에게 분명히 거슬릴 거고, 그러니 편집자들이 당신 작품을 거절하는 거야." - P108

"왜냐하면 진짜 위키위키는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그건 좋은 취향이 아니야."
"인생이지." 그는 무뚝뚝하게 답했다. "그게 현실이야. 그게 진실이라고. 나는 인생을 내가 본 대로 써야만 해."
그녀는 아무 말 하지 않았고, 둘은 거북한 상태로 잠시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가 그녀를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하는 탓이었고, 그녀가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그녀의 지평 너머의 너무나 거대한 존재인 탓이었다.
"아, 「트랜스콘티넨탈」에서 원고료를 받아 냈어." 그는 보다 쉬운 화제로 말을 돌렸다. 지난번에 본 구레나룻의 삼중창단과 그들이 4달러 90센트와 배표를 물어내던 장면이 떠올라 그는 낄낄댔다.
"그럼 당신은 올 거네!" 그녀는 기쁘게 외쳤다. "사실 나는 그걸 알려고 왔어" - P109

"오다니?" 그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어디를?"
"내일 저녁 만찬 말이야. 그 돈을 받아 내면 정장을 찾겠다고 당신이 말했잖아."
"까맣게 잊고 있었어." 그는 순순히 말했다. "오늘 아침 시청의 단속원이 마리아의 암소 두 마리와 송아지를 끌고 갔어. 그런데 마리아는 돈이 한 푼도 없어서 내가 그 암소와 송아지를 찾아 줘야 했어. ‘트랜스콘티넨탈」에서 받은 5달러, 종소리」의 원고료는 단속원의 호주머니로 들어가 버린 거야."
"그럼 당신은 오지 않겠다는 거야?"
그는 제가 걸친 옷을 내려다보았다. - P109

"갈 수가 없다고."
실망과 질책의 눈물이 그녀의 푸른 눈에서 반짝였으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추수감사절에는 당신이 나와 함께 델모니코 레스토랑에서저녁 식사를 하게 될 거야." 그는 기운 내서 말했다. "아니면 런던이나 파리, 당신이 바라는 어디에서건. 내가 장담할게."
"며칠 전 신문에서 읽었어." 그녀는 불쑥 밝혔다. "이 지역에서 몇명이 철도우편국 발령을 받았다. 당신은 그 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했잖아?"
그는 제게 소집장이 왔으나 거절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믿었고, 지금도 믿어." 그는 결론지었다. "일 년 후 나는 철도우편국 직원 열댓 명의 월급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 거야. 자기는 기다려만 봐." - P110

"오." 그가 말을 마치자 그녀가 한 말은 이게 다였다. 그녀는 일어나서 장갑을 끼었다. "난 가야 해, 마틴. 아서가 기다리고 있어."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으나, 그녀는 수동적이기만 했다. 몸에 긴장이 없었고, 팔은 그를 감싸지 않았으며, 그의 입술을 맞는 그녀의 입술도 여느 때와 달리 마주 누르지 않았다.
대문간에서 돌아서면서 그는 그녀가 자기에게 화가 났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왜 그랬을까? 단속원이 마리아의 소를 채간 것은 불운한 사건이었다. 운명의 일격이었다. 그 일로 누구도 비난받아서는 안되었다. 그는 그 일에 대해 자기가 달리 처신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그래, 맞아, 자기가 약간은 비난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다음에 들었다. - P110

그러나 그보다 그녀를 더 속상하게 한 것은 그의긍지와 자존심의 결여였다. 더욱이, 그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그녀는 그 일을 통해 그가 노동자 계급 출신임을 씻어 내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 사실 자체로 낙인이건만 부끄러움도 없이온 세상에 드러내고 다니다니, 선을 넘어선 행동이었다. 그녀와 마틴의 약혼은 비밀로 지켜졌으나 둘의 오랜 교제에 대한 뒷말이 없지않았으며, 그 제과점에는 그녀의 연인과 그를 따르는 무리를 암암리에 힐끗거리는 몇몇 지인들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마틴과 같은 넓은포용력이 없었고 환경을 뛰어넘을 능력도 없었다. 그녀는 깊이 상처받았으며, 수치심에 예민한 기질이 발동했다. 그리하여 그날 늦게 그녀를 찾아간 마틴은 선물을 상의 호주머니에서 꺼내지도 못하고, 보다 적당한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격하게 분노의 눈물을 쏟아 내는 루스의 모습이 그로서는 너무나 뜻밖이었다. 그녀가 고통받는 광경은 그로 하여금 자기가 못된 짓을 저질렀다고 인정하게 했지만, 그의 영혼은 그 이유도 경위도 찾아낼 수 없었다. 자기가 아는 사람들이 부끄럽다는 생각은 결코 해 본 적이 없었으며, 크리스마스를맞아 마리아의 가족에게 한턱내는 것이 루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을 듯했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나니 그녀의 관점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그는 그것을 최고로 훌륭한 여자를 포함한 모든 여자에게 다 있는 타고난 연약함으로 여겼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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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 이후 그날처럼 서로가 그렇게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진 적은 없었다. 솔직하지만 그 이면에 반발심이 깔린 그의 고백은 그녀를 물러나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를 물러나게 한 원인보다, 자기가 물러났다는 것 자체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에게 얼마나 가까이 끌려가 있었는지 알게 됐고, 일단 그렇게 받아들이자, 그 물러남으로 인해 친밀감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연민과 더불어, 상대를 개조하고자 하는 순수하고 이상주의적인 생각들도 솟아났다. 여기까지 크게 발전해 온 이 미숙한 젊은이를 그녀는 구할 것이다. 그의 어릴적 환경이 내린 저주로부터 그를 구할 것이며, 그도 모르게 그를 그자신으로부터 구할 것이다. 이 모든 생각은 그녀로 하여금 매우 고상한 의식 상태에 머물게 만들었다. 그 이면에, 그리고 그 저변에 사랑의 질투와 욕망이 있는 줄 그녀는 꿈에도 몰랐다. - P219

"그의 손이 떨려요." 수치심으로 여전히 얼굴을 어머니 무릎에 묻은 채 루스는 고백을 이어 갔다. "그게 가장 재밌고도 우스꽝스러워요. 하지만 그를 생각하면 안됐기도 해요. 그의 손이 너무 떨리고 눈이 너무 반짝일 때면, 나는 그의 인생과, 그가 자기 인생을 고친답시고 동원하는 잘못된 방법들에 대해 훈계해요. 그런데 그는 나를 추앙하거든요, 나는 알아요. 그의 눈과 손은 거짓말을 못 해요. 그가 나를 추앙한다는 생각이, 바로 그 생각이 나로 하여금 어른이 됐다고 느끼게 해요. 당연히 나의 것인 뭔가를 갖게 됐다고 느껴요. 다른여자애들처럼, 그리고 젊은 여자들처럼 말이에요. 예전에는 내가 다른 여자들과 같지 않았다는 것도 알아요, 그래서 어머니를 걱정시켰다는 것도요. 어머니는 걱정하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끝내주게 해내고 싶었어요. 마틴 에덴이 말하는 식으로 표현하자면요." - P224

그런데 마틴의 힘과 건강은 신통했다. 그녀의 동부 체류 계획을 통보받자 그는 서둘러야 한다고 느꼈다. 루스 같은 여자에게 어떻게사랑을 고백해야 할지 그는 몰랐다. 그녀와 완전히 다른 수많은 아가씨들이나 여인들과의 경험은 도리어 장애가 됐다. 그 여자들은 사랑과 인생과 연애 행각을 알았던 반면, 루스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의 기막힌 순진함은 그를 긴장하게 만들어서, 말은 딱딱하게 얼어붙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는 듯했다. 다른 문제도 있었다. 그 역시 이전에 사랑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방만하게 지내던 과거에 그는 여자들을 좋아했고 그 중 몇몇에게는 홀리기도 했으나,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내키는 대로 능숙하게 휘파람을 불기만 하면 여자들이 그에게 왔다. 그 연애들은 기분 전환용이었고, 부수적인 것이었다. 남자들이 하는 놀이의 일부, 그것도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그는 애걸하는 심정이었다. 과민하고 소심하며 확신이 없었다. 사랑의 방식도 언어도모르는 채 그는 사랑하는 이의 해맑은 순수함에 겁을 먹고 있었다. - P228

그래서 그는 루스를 지켜보면서 기다렸다. 사랑을 고백하고 싶었지만 감히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충격을 줄까 봐 두려웠고, 스스로확신도 없었다. 자신이 그녀와 함께 제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그가알았더라면! 사랑은 인간이 말을 또렷하게 하기도 전에 세상에 출현했고, 미숙한 채로 제 방식과 수단을 찾아냈으며 결코 잊지 않았다. 이런 오래되고 원시적인 방식으로 마틴은 루스에게 구애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자기가 그러는 줄도 몰랐다. 그녀의 손에 그의 손이 스치는 것이 그가 구사할 수 있는 어떤 말보다 강력했으며, 그녀의 상상을 이끄는 그의 감화력이 수천 세대 동안 연인들이 읊고 쓴 연모의 미사여구보다 매력적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녀의 판단에 얼마간 영향을 미치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손의 스침, 그 찰나의 접촉은 그녀의 본능에 바로 가 닿았다. 그녀의판단력은 그녀 자신처럼 미숙했으나, 그녀의 본능은 인간 종족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노숙한 것이었다. 사랑이 어리면 본능도 어리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관습과 견해, 인류 역사에 새로 태어난 모든 것들보다는 현명했다. 따라서 그녀의 판단력은 작동하지 않았다.  - P229

아름다운 가을날이 왔다. 따뜻하고 나른하며, 계절의 바뀜으로 잔잔히 설레었다. 태양은 뿌옇고, 부드러운 바람결이 대기의 선잠을 깨우지 않으면서 어슬렁거리는, 캘리포니아의 인디언 서머였다. 잘 짜인 직물 같은 자줏빛 안개의 막이 구릉지의 계곡을 가리고, 샌프란시스코는 고지에 몽롱한 연기처럼 누워 있었다. 그 사이에 가로놓인만은 용해된 금속의 둔한 광택을 띠었으며, 물에 떠 있는 선박들은 움직임이 없거나 느린 조류에 게을리 밀려갔다. 멀리 타말페이 산이 은빛 아지랑이 속에 거대한 자태를 어렴풋이 드러냈고, 그 옆에금문교는 저물어 가는 태양 아래 옅은 금빛 오솔길처럼 뻗어 있었다. 그 너머, 겨울의 거친 첫 날숨을 경고하며 내륙으로 넘실대며 밀려오는 구름을, 흐리고 드넓은 태평양이 수평선 위로 밀어 올렸다.
소거될 때가 임박했으나 여름은 꾸물거렸다. 언덕에서 서서히 바래져 갔으며, 계곡의 자줏빛을 짙게 했고, 기우는 기력과 충분히 즐 - P237

기고도 남은 황홀로 아지랑이의 수의를 자아내다가, 다 살았고 잘 살았다는 차분한 만족감으로 죽어 갔다. 구릉지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둔덕에 마틴과 루스가 나란히 앉아 책을 함께 굽어보고 있었다.
브라우닝을 사랑한 여인의 연시를, 마틴은 큰 소리로 읽었다. 그토록사랑받은 남자는 드물 것이기에.
그러나 낭독은 시들해졌다. 주위를 지나쳐 가는 아름다움의 마법이 너무 강했다. 황금 같은 한 해가 시들어 갔고, 후회 없이 아름다웠던 방탕한 삶과 황홀경의 추억이, 그리고 만족감이 대기에 무겁게실려 있었다. 마법에 걸린 그들 또한 꿈을 꾸는 것 같았으며 정신력이 느슨해졌다. 그들의 도덕관념이나 판단력을 아지랑이와 자줏빛안개가 뒤덮어 버렸다. 마틴은 노곤하게 녹아내리는 듯했으며 이따금 열기에 휩싸였다. 그의 머리는 그녀의 머리에 아주 가까이 있어서, 어슬렁대는 산들바람의 정령이 흐트러뜨린 그녀의 머리카락이 뺨에닿으면 눈앞에 있는 책의 활자들이 헤엄을 쳤다. - P238

점원의 변변찮은 벌이로 자기와 내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겠어? 나는 자기에게 이 세상 모든 것들의 가장 최상의 것을 해 주고 싶고, 내가 그런 걸 원하지 않을 때는 더 좋은 게 나왔을 때뿐일 거야. 그러면 나는 그 더 좋은 걸 몽땅가져올 거야. 성공적인 작가의 수입에 비하면 버틀러 씨는 초라해 보일 지경이야. 베스트셀러 작가는 오만 내지 십만 달러를 번다고. 때로 더 벌기도 하고 때로 덜 벌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 액수에 가까워"
그녀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실망했음이 역력했다.
"어때?" 그는 물었다.
"내가 원하고 계획한 건 다른 거였어. 내가 자기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 건, 속기를 배워서.. 자긴 이미 타자를 칠 줄 알잖아. 우리 아버지 사무실에 들어가는 거야. 자긴머리가 좋으니까, 변호사로 성공하리라고 나는 확신해."


작가로서 마틴의 능력을 루스가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틴은 그녀를 달리 보거나, 폄하하지는 않았다. 휴식으로 그는 기운을 - P256

차렸고, 자기 분석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 자신에 대해 훨씬 잘 알게되었다. 그는 자신이 명성보다는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는 것을, 그리고 제 명예욕은 주로 루스를 위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의 명예욕이강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위대해지고 싶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훌륭하다고 여기게끔, 자기식 표현으로, ‘끝내주게 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자신은 아름다움을 열정적으로 사랑해서 아름다움을 섬기는기쁨만으로 보상은 충분했다. 그런데 그는 아름다움보다 루스를 더사랑했다. 그에게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것이었다. 그의 내면에 혁명을 일으켜 투박한 선원에서 학생이자 예술가로 바꿔 놓은 것이 사랑이었다. 셋 중에서 가장 멋지고 위대한 것, 배움과 예술적 숙련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사랑이었다. 자신의 지성이 루스의 동생들이나 그녀 아버지의 지성을 능가했듯이, 그녀의 지성도 능가했음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대학 교육의 모든 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문학사 자격증 앞에서도, 그의 지적 능력이 그녀의 지적 능력을 넘어섰다. 일 년가량의 독학과 작가 수업이 그녀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세상사와 예술과 인생에 통달하게 해 주었다. - P257

그는 이 모든 걸 알았지만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도, 그에 대한 그녀의 사랑도 달라지지 않았다. 비판으로 손상시키기엔 사랑은 너무나 멋지고 고귀하며, 그는 너무나 충직한 연인이었다. 예술, 올바른 행위, 프랑스 혁명, 평등 선거권에 대한 루스의 견해가 그와 다르다고 해서 사랑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그런 것들은 사고하는 과정이지만 사랑은 이성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직관적인 것이었다. 그 - P257

는 사랑을 깎아내릴 수 없었다. 사랑을 숭배했다. 사랑은 이성의 저지대 너머 산꼭대기에 있었다. 존재가 승화된 상태, 삶의 최절정인사랑은 드물게 오는 법이었다. 그가 애독하는 과학적인 철학자들 덕분에 그는 사랑의 생물학적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같은과학적 추론을 정교하게 진전시켜, 인간의 생체는 사랑으로 그 최고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랑은 따져서는 안 되고, 삶이 주는 최고의 보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연인이 어떤 생명체보다 축복받은 존재라고 여겼다. 지상의사물들 위로, 부유함과 평가와 여론과 박수갈채 위로, 삶 자체 위로떠 오르면서 ‘입맞춤으로 죽어가는, 신이 선택한 연인‘들을 생각하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이런 생각들 중 많은 것들은 이미 정리된 생각들이었고 일부는 나중에 정리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루스를 만나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잠시도 쉬지 않고 글을 쓰며 스파르타인처럼 살았다. - P258

작가 수업에 있어서 그는 진일보했다. 이름난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들이 이룬 결실을 빠짐없이 기록했으며, 그들의 성공 비결인 내러티브, 설명, 문체, 시점, 경구를 알아냈다. 그리고 이 모두를공부 목록으로 만들어 두었다. 그는 그것들을 모방하지 않았다. 원칙을 파헤쳤다. 많은 작가들의 작품으로부터 추려낸 효과적이고도설득력 있는 기법의 목록을 만들어, 기법의 일반적 원칙을 도출했다.
그럼으로써 자기만의 새롭고도 독창적인 기법들을 찾아냈고, 그 기법들을 재량껏 평가할 수 있었다. 그는 비슷한 방식으로 강렬한 문장들, 살아 있는 언어로 된 문장들, 산(酸)처럼 자극적이고 불길처럼통렬한 문장들이나, 일상 언어의 무미건조한 사막 한가운데서 빛나는 감칠맛 나고 달콤한 문장들의 목록을 모았다. 그는 언제나 그 배후와 저변에 깔려 있는 원칙을 찾으려 했다.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를알고자 했다. 알아낸 후에는 스스로 해낼 수 있었다. 그는 아름다움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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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미지의 것들에 둘러싸여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됐고,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자신이 걸음걸이 때문에 어색하게 보인다는 걸 의식했으며, 제 모든 행동거지와 자질이 마찬가지로 나쁘게 보일까 봐 두려웠다. 그는 극도로 예민했고,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자의식이 강했다. 그래서 아서가 편지 너머로 자신을 훔쳐보는 눈길이 몸을 쑤시고 드는 칼처럼 느껴졌다. 그는 아서의 재미있어하는 눈길을 보고도 내색하지 않았는데, 그건 절도가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칼로 찌르는 듯한 시선에 자존심이 상한 탓이었다. 그는 이곳에 온 자신을 저주했으며, 동시에 이왕 왔으니 어떤 일이 벌어지든버텨 내겠다고 결심했다. 표정은 단호해지고 눈에는 전의가 깃들었다. 그는 더욱 태연하게 주위를 둘러보면서 예리하게 관찰했다. 아기자기한 실내 장식이 그의 뇌리에 세밀하게 새겨졌다. 크게 벌어진 그의 두 눈은 시야에 들어온 어떤 것도 놓치지 않았다. 앞에 있는 아름다움을 빨아들이자, 두 눈에서 전의가 사그라들고 따스한 빛이 생겨났다. 그는 아름다움에 호응하는 사람이었으며, 이곳에는 호응할만한 것이 있었다. - P17

아서는 말했다.
"루스, 이 분이 에덴 씨야."
집게손가락으로 책이 접혔다. 그들을 돌아보기도 전에 그는 처음 겪는 새로운 느낌에 전율했다. 젊은 여자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남동생이 한 말 때문이었다. 에덴의 근육질 몸 안은 지독히 섬세한 감수성의 덩어리로 채워져 있었다. 아무리 사소한 외부 영향일지라도 그의 의식에 미치면, 그의 생각과 공감과 감정은 불꽃처럼 치솟아 하늘거렸다. 그는 유별나게 잘 받아들이고 잘 반응하는 성격이라서, 그의 뛰어난 상상력은 늘 유사성과 차이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예민하게 작동해 왔다. ‘에덴 씨‘라는 말은 그를 전율하게 했다. ‘에덴‘이라거나, ‘마틴 에덴‘이라거나, 그냥 ‘마틴‘이라고 평생 불리던 그가, ‘씨‘
라니! 그는 속으로 이건 보통 일이 아니라고 논평했다. 그의 마음은대번에 거대한 카메라 렌즈로 변했고, 의식 주변으로 끝없이 늘어서는 제 삶의 장면들을 보았다. 기관실과 선원실, 병영과 해변, 감옥과선술집, 열병 치료소와 슬럼가가, 저마다의 상황에 따라 그가 다 달리 불리던 호칭과 연계되어 떠올랐다.
마침내 그는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았다. 그녀의 모습에 머릿속 환영은 사라져 버렸다.  - P19

식사하는 동안 마틴은 ‘핑거 볼‘에 대한 궁금증에 내내 사로잡혀있었다. 그 상황에 적절치는 않지만 그는 끈질기게, 수십 번씩이나그것이 언제 들어올지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했다. 이제 조만간, 몇분 후면 말로만 들어 왔던 그 핑거 볼이란 물건을 보게 될 것이다. 그그릇에 손을 씻는 높으신 분들과 함께, 아, 자신도 거기에 손을 씻을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지는 않더라도 그의 의식 표면에 늘 도사리고 있는 문제는 이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하는것이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그는 끊임없이 그 문제와 씨름했다. 자기도 그들 가운데 하나인 척하자는 비겁한 생각이 들었다. 또한, 원래 기질에 맞지 않으니 그런 척해 봤자 될 리가 없으며 결국 조롱감이 되고 말 것이라는 더욱 비겁한 생각도 들었다. - P33

그는 하프였다. 그가 알고 의식했던 모든 삶은 현이었다. 그리고 밀려오는 음악은 그 현들에 부딪혀 기억과 꿈을 울려 나오게 하는 바람이었다. 단순히 느끼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감각은 형태와 색깔과 광휘를 입어, 그가 무엇을 상상하든 마술적인 방식으로 그 상상을 구체화시켰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였다. 그는 그 넓고 따뜻한 세계를 누비고 있었다. 험난한 모험과 고귀한 행위들을 하면서 그녀를 향해. 아,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얻어 그녀와 함께, 그녀를 품에 안고 마음의 왕국을 가로질러 날았다.
그녀는 어깨 너머로 그를 힐끔 돌아보았고, 그의 얼굴에서 이 모든 것의 기미를 발견했다. 완전히 달라진 얼굴이었다. 강렬하게 빛나는 두 눈이 소리의 장막 너머 생명의 약동과 정신의 장엄한 환영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스라쳤다. 미숙하고 쩔쩔매는 촌뜨기는사라졌다. 맞지 않는 옷, 상처투성이 손, 햇볕에 그을린 얼굴색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감옥의 쇠창살인 듯싶었다. 쇠창살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제대로 말할 능력이 없는 어눌한 입 때문에 말을하지 못하는 한 위대한 영혼을 그녀는 보았다. 이걸 본 건 오직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녀는 촌뜨기가 다시 돌아와 있는 것을 보았고, 자신의 일시적 공상에 실소했다. 그래도 순간적인 일별의 여운은 남았다. 그가 머뭇대며 물러가려 할 때 그녀는 그에게 스윈번 시집과 함께 브라우닝 시집을 빌려주었다. - P43

그러나 그가 그녀의 눈에서 본 것은 영혼, 절대 죽지 않는 불멸의 영혼이었다. 그가 아는 어떤 남자도 여자도 그에게 불멸이라는 메시지를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것을 주었다. 처음 그를 본 순간, 그녀는 불멸을 속삭였다. 걸어가는 동안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오직 영혼만이 지을 수 있을 듯한 연민과 상냥함이 담긴 미소를 짓는, 창백하고 진지하며 다정하고 예민한, 그가 결코 꿈도 꾸어 보지 못했을 정도로 순수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순수함이한방 먹이듯 그를 강타하며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선과 악을 알았으나 순수함은 존재의 한 속성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이제 그녀로 인해 그는 순수함이 최상의 선함과 정결함이며, 둘의 합이 영원한 생명을 이룬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영원한 생명을 잡고 싶다는 야망이 즉시 밀려왔다. 그는 그녀에게 물을 떠다 주기에도 모자란 인간이었다. 그는 알았다. 그날 밤 그녀를 보고, 그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건 기적적인 행운과 환상적인 우연 덕분이었다.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 행운을 얻을 자격이 마틴에겐 없었다. 그는 매우 종교적인 기분이 들었다.  - P46

어느 정도 그는 도덕적 혁명을 겪었다. 그녀의 정결함과 순수함은 그에게까지 다다라서, 그는 제 존재가 깨끗해져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그녀와 같은 공기를 숨 쉴 자격이 있는 인간이 되고자 한다면, 그는 반드시 깨끗해져야 했다. 이를 닦았고, 부엌 솔로 손을 문질러대다가 약국 유리창으로 보이는 손톱 솔의 용도를 알았다. 손톱솔을 사려는데 그의 손톱을 본 점원이 손톱 다듬는 줄을 권했고, 그래서 그는 화장 도구를 하나 더 갖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몸 관리에 관한 책을 우연히 읽고는 바로 아침마다 찬물로 목욕하는 취미를 개발하여, 짐을 몹시 놀라게 했다. 그런 야단스런 개념들에 공감하지않는 히긴보삼 씨는 몹시 황당해했으며, 마틴에게 추가로 물값을 물려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또 다른 진보는 바지에 줄을 잡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사안에 눈을 뜬 마틴은 바지의 계급 간 차이에 신속히 주목했다. 무릎이 불룩한 노동 계급의 바지와 달리, 상위계급 남자들이 입는 바지는 무릎부터 밑단까지 똑바른 선이 내려왔다. 그는 또 그 이유를 알아냈고, 누나의 부엌에 침범해 다리미와 다림질 판을 찾아냈다. 처음에는 바지 하나를 완전히 태우고 다른 바지를 사는 불운을 겪었는데, 그 지출 탓에 그가 바다로 나가야 할 날이 더욱 앞당겨지게 되었다. - P73

그는 깨어 있는 매 순간을 충실히 살았고, 잠자는 동안에도 그러했다. 그의 주관적인 정신은 다섯 시간의 휴지기에 저항했고, 낮에 겪은 일들과 생각을 결합시켜서 기괴하고 불가능한 경이를 만들어냈다. 사실, 그는 한순간도 쉬지 않았다. 몸이 약하거나 두뇌가 덜 견고한 일반적인 경우라면 붕괴되고 말았을 것이다. 요즘은 오후에 루스를 보러 가는 일도 드물었는데, 그녀가 대학 과정을 끝내고 학위를 받아야 하는 6월이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문학사! 그녀의 학위를 생각하면, 자기가 따라갈 수 있는 속도보다 빠르게 그녀가 저 너머로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 P137

너는 누구야, 마틴 에덴?
그 밤 하숙방에 돌아와서, 그는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물었다. 자신을 오래도록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너는 누구야? 무엇이야? 어디에 속해? 너는 당연히 리지 코놀리 같은 아가씨들에게 걸맞아. 너는노동 군단에 속하고, 낮고 천박하고 추한 모든 것에 어울려. 악취 나는 환경에서 소처럼 일하는 무리의 일원이지. 지금도 상한 채소의 냄새가 나. 감자가 썩고 있어. 그 냄새를 맡아, 빌어먹을 놈, 맡아 보란말야. 그런데도 너는 건방지게 책을 펴고, 고전 음악을 듣고, 근사한그림을 감상하는 법을 배우고, 고상한 영어를 구사하고, 네가 속한 계급의 사람들은 아무도 하지 않는 생각을 하고, 노역자들과 리지코놀리로부터 자신을 억지로 떼어 내어 한 창백한 여인을, 너로부터 백만 마일은 떨어져 별들 속에 사는 여인을 사랑하지! 너는 누구지? - P147

뭘 하는 놈이지? 빌어먹을 놈! 끝내주게 해내겠다고?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주먹을 휘두르고는 침대 구석에 앉아서 눈을 크게 뜬 채 잠시 멍하게 있었다. 그런 뒤 공책과 대수학책을 꺼내 2차 방정식을 푸는 데 몰두했다. 시간이 흘러 별빛은 흐려졌고, 새벽의 여명이 그의 창에 밀려들었다. - P148

스펜서가 거의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한동안 납득할 수 없었다. "허버트 스펜서." 도서관의 사서는 말했다. "네, 그래요. 위대한 지성이죠." 그러나 사서는 그 위대한 지성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듯했다. 어느 날 저녁, 버틀러 씨도 동석한 식사자리에서, 마틴은 화제를 스펜서로 돌렸다. 모스 씨는 그 영국인 철학자의 불가지론을 통렬히 규탄했으나, 「제1 원리는 읽지 않았다고 실토했다. 버틀러 씨는 스펜서가 견딜 수 없이 싫고, 그의 책은 한 줄도 읽지 않았으며, 그런 책을 읽지 않아도 무척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마틴의 마음 속에 의혹이 일었다. 주관이 강하지 않았다면 그는 일반적인 의견을 받아들여 허버트 스펜서를 포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물에 대한 스펜서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스펜서를 포기하는 것은 항해사가 나침반과 항해용 정밀 시계를 배 밖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마틴은 계속해서 진화를 철저히 공부했고, 그 주제를 스스로 정복해 나갔으며, 수천명의 독자적인 작가들의 확인에 힘입어 믿음을 굳혔다. 공부하면 할수록 아직 탐구하지 못한 지적 영역이 바라다보였다. 하루가 스물네시간밖에 안 돼서 불만이라고 그는 입버릇처럼 투덜거렸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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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먼지보다는 재가 되리라


내 삶의 불꽃이 마르고 부패되어
숨막혀 죽기 보다는
차라리 찬란한 불길 속에서 타오르리라

졸린 듯 영원한 행성보다는
차라리 떨어지는 최고의 별똥별이 되어
내 모든 원자 하나하나가 장엄한 빛을 발하리라

존재가 아니라 사는 것이 곧 인간의 본분일지니
나는 생의 연장을 위해 주어진 날들을 허비하지 않으리
내게 허락된 시간들을 모두 쓰리라

잭 런던, [먼지가 되기보다는 재가 되리라]


의미 없는 먼지가 되기보다는 찬란한 재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
작가 잭 런던은 187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잭의 생부는 자신의 아이를 낳은 여자를 외면했고, 잭의 어머니는 곧 ‘존 런던‘이라 - P7

는 남자와 재혼한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기에, 잭 런던은 소년 시절부터 통조림 공장에서 하루 18시간 노역을 하곤 했다. 가끔 도피처가 되어준 건 도서관이었고, 사서와도 친해져서 독서 지도를 받곤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런던은 학업을 중단하고 노동자, 도둑, 선원, 부랑자 생활을 하며 밑바닥 세계를 떠돈다. 그 시기에 그가 경험으로 체득한 사실은, 세상은 약육강식의 원칙으로 돌아가며 그 바닥에서 생존하려면 모든 면에서 강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15세되던 해, 양식장의 굴을 약탈해서 팔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배를한 척 사서 어린 해적이 되기도 한다. 2년 후엔 직업 선원이 되어 생애 처음 일본과 시베리아까지 항해를 하고 돌아온다. - P8

잭 런던이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이 항해에서 돌아오고 난 다음이다. 그는 엄청난 에너지로 작품을 써 나갔고, 여러 잡지사에 응모했으나 모두 반송되는 수모를 겪는다. 10대 후반부터 시작된 소설습작 시절에도 그는 여전히 가난했고, 고된 노역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정해진 수순처럼 사회주의자가 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19세가 되어 뒤늦게 오클랜드 중학교에 입학을 했고 여세를 몰아 버클리 대학에 입학했지만,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금 노동자가 된다. 그러고는 곧 금광을 찾아 떠났고 공무원 시험에도 합격했지만, 끝내 작가가 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어 공무원의 길을 포기한다. - P9

1903년, 마침내 소설 「야성의 부름』 (The call of the wild)이 베스트셀러가 되며 잭 런던은 스물여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미국 최고의인기작가 반열에 오른다. 그 이후 발표한 「바다 늑대, 하얀 송곳니도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잭 런던은 저택과 목장, 최고급 요트를 소유한 부유한 작가가 된다. 노동자로 태어나 부르주아의 세계에 진입한 것이다. 하지만 1908년에는 선명한 사회주의 소설 『강철군화』를 발표하며 또 한 번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소설 「마틴 에덴」은 「강철 군화를 발표한 이듬해에 출간되었고, 잭 런던의 자전적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은 소설이다. 마틴과 루스의사랑이라는 주요 내용에 작가가 되기 전 고난의 경험을 함께 담고있다. 이 소설은 2019년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어 2020년 국내에서도 개봉되었다.


「마틴 에덴이 다른 사랑의 이야기와 가장 차별화 되는 부분은 로맨스에 계급의 문제를 접목시켰다는 점이다. 사랑은 모든 역경을 - P10

뛰어넘을 수 있는 사건 같지만, 실은 계급적 차이를 포함한 여러 가치관이 가장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현장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소설을 짧은 단어로 압축해 본다면, ‘추앙‘과 ‘붕괴‘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의 노래인 랙타임을 들으며 성장한남자가 클래식이 흐르는 배경에서 자라 수준급의 피아노 연주 실력을 지닌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남자는 추앙하는 여자가 사는 세상으로 넘어가기 위해 부르주아 문화를 습득하고 최고의 작가가 되는 꿈을 품기 시작한다. 자신이 두르고 있는 계급의 껍질을 찢고 나와 다른 계급의 껍질을 입는다는 것은 ‘붕괴‘를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일이 아닐까? 마틴이 가고자 하는 ‘그 곳‘이 ‘에덴(Eden, 천국)‘인지 아닌지를 알게 되는 과정이 이 소설의 긴장을 추동하는 힘이다.


아름다움을 동반하는 붕괴들은 도처에 존재한다. 독자분들께서마틴의 붕괴에서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이라도 발견하기를 바라는마음으로 이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모순과 붕괴가 매력적으로다가오는 것은 문학 안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므로.

2022년 9월
녹색광선 편집부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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