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미지의 것들에 둘러싸여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됐고,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자신이 걸음걸이 때문에 어색하게 보인다는 걸 의식했으며, 제 모든 행동거지와 자질이 마찬가지로 나쁘게 보일까 봐 두려웠다. 그는 극도로 예민했고,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자의식이 강했다. 그래서 아서가 편지 너머로 자신을 훔쳐보는 눈길이 몸을 쑤시고 드는 칼처럼 느껴졌다. 그는 아서의 재미있어하는 눈길을 보고도 내색하지 않았는데, 그건 절도가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칼로 찌르는 듯한 시선에 자존심이 상한 탓이었다. 그는 이곳에 온 자신을 저주했으며, 동시에 이왕 왔으니 어떤 일이 벌어지든버텨 내겠다고 결심했다. 표정은 단호해지고 눈에는 전의가 깃들었다. 그는 더욱 태연하게 주위를 둘러보면서 예리하게 관찰했다. 아기자기한 실내 장식이 그의 뇌리에 세밀하게 새겨졌다. 크게 벌어진 그의 두 눈은 시야에 들어온 어떤 것도 놓치지 않았다. 앞에 있는 아름다움을 빨아들이자, 두 눈에서 전의가 사그라들고 따스한 빛이 생겨났다. 그는 아름다움에 호응하는 사람이었으며, 이곳에는 호응할만한 것이 있었다. - P17

아서는 말했다.
"루스, 이 분이 에덴 씨야."
집게손가락으로 책이 접혔다. 그들을 돌아보기도 전에 그는 처음 겪는 새로운 느낌에 전율했다. 젊은 여자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남동생이 한 말 때문이었다. 에덴의 근육질 몸 안은 지독히 섬세한 감수성의 덩어리로 채워져 있었다. 아무리 사소한 외부 영향일지라도 그의 의식에 미치면, 그의 생각과 공감과 감정은 불꽃처럼 치솟아 하늘거렸다. 그는 유별나게 잘 받아들이고 잘 반응하는 성격이라서, 그의 뛰어난 상상력은 늘 유사성과 차이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예민하게 작동해 왔다. ‘에덴 씨‘라는 말은 그를 전율하게 했다. ‘에덴‘이라거나, ‘마틴 에덴‘이라거나, 그냥 ‘마틴‘이라고 평생 불리던 그가, ‘씨‘
라니! 그는 속으로 이건 보통 일이 아니라고 논평했다. 그의 마음은대번에 거대한 카메라 렌즈로 변했고, 의식 주변으로 끝없이 늘어서는 제 삶의 장면들을 보았다. 기관실과 선원실, 병영과 해변, 감옥과선술집, 열병 치료소와 슬럼가가, 저마다의 상황에 따라 그가 다 달리 불리던 호칭과 연계되어 떠올랐다.
마침내 그는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았다. 그녀의 모습에 머릿속 환영은 사라져 버렸다.  - P19

식사하는 동안 마틴은 ‘핑거 볼‘에 대한 궁금증에 내내 사로잡혀있었다. 그 상황에 적절치는 않지만 그는 끈질기게, 수십 번씩이나그것이 언제 들어올지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했다. 이제 조만간, 몇분 후면 말로만 들어 왔던 그 핑거 볼이란 물건을 보게 될 것이다. 그그릇에 손을 씻는 높으신 분들과 함께, 아, 자신도 거기에 손을 씻을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지는 않더라도 그의 의식 표면에 늘 도사리고 있는 문제는 이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하는것이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그는 끊임없이 그 문제와 씨름했다. 자기도 그들 가운데 하나인 척하자는 비겁한 생각이 들었다. 또한, 원래 기질에 맞지 않으니 그런 척해 봤자 될 리가 없으며 결국 조롱감이 되고 말 것이라는 더욱 비겁한 생각도 들었다. - P33

그는 하프였다. 그가 알고 의식했던 모든 삶은 현이었다. 그리고 밀려오는 음악은 그 현들에 부딪혀 기억과 꿈을 울려 나오게 하는 바람이었다. 단순히 느끼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감각은 형태와 색깔과 광휘를 입어, 그가 무엇을 상상하든 마술적인 방식으로 그 상상을 구체화시켰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였다. 그는 그 넓고 따뜻한 세계를 누비고 있었다. 험난한 모험과 고귀한 행위들을 하면서 그녀를 향해. 아,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얻어 그녀와 함께, 그녀를 품에 안고 마음의 왕국을 가로질러 날았다.
그녀는 어깨 너머로 그를 힐끔 돌아보았고, 그의 얼굴에서 이 모든 것의 기미를 발견했다. 완전히 달라진 얼굴이었다. 강렬하게 빛나는 두 눈이 소리의 장막 너머 생명의 약동과 정신의 장엄한 환영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스라쳤다. 미숙하고 쩔쩔매는 촌뜨기는사라졌다. 맞지 않는 옷, 상처투성이 손, 햇볕에 그을린 얼굴색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감옥의 쇠창살인 듯싶었다. 쇠창살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제대로 말할 능력이 없는 어눌한 입 때문에 말을하지 못하는 한 위대한 영혼을 그녀는 보았다. 이걸 본 건 오직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녀는 촌뜨기가 다시 돌아와 있는 것을 보았고, 자신의 일시적 공상에 실소했다. 그래도 순간적인 일별의 여운은 남았다. 그가 머뭇대며 물러가려 할 때 그녀는 그에게 스윈번 시집과 함께 브라우닝 시집을 빌려주었다. - P43

그러나 그가 그녀의 눈에서 본 것은 영혼, 절대 죽지 않는 불멸의 영혼이었다. 그가 아는 어떤 남자도 여자도 그에게 불멸이라는 메시지를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것을 주었다. 처음 그를 본 순간, 그녀는 불멸을 속삭였다. 걸어가는 동안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오직 영혼만이 지을 수 있을 듯한 연민과 상냥함이 담긴 미소를 짓는, 창백하고 진지하며 다정하고 예민한, 그가 결코 꿈도 꾸어 보지 못했을 정도로 순수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순수함이한방 먹이듯 그를 강타하며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선과 악을 알았으나 순수함은 존재의 한 속성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이제 그녀로 인해 그는 순수함이 최상의 선함과 정결함이며, 둘의 합이 영원한 생명을 이룬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영원한 생명을 잡고 싶다는 야망이 즉시 밀려왔다. 그는 그녀에게 물을 떠다 주기에도 모자란 인간이었다. 그는 알았다. 그날 밤 그녀를 보고, 그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건 기적적인 행운과 환상적인 우연 덕분이었다.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 행운을 얻을 자격이 마틴에겐 없었다. 그는 매우 종교적인 기분이 들었다.  - P46

어느 정도 그는 도덕적 혁명을 겪었다. 그녀의 정결함과 순수함은 그에게까지 다다라서, 그는 제 존재가 깨끗해져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그녀와 같은 공기를 숨 쉴 자격이 있는 인간이 되고자 한다면, 그는 반드시 깨끗해져야 했다. 이를 닦았고, 부엌 솔로 손을 문질러대다가 약국 유리창으로 보이는 손톱 솔의 용도를 알았다. 손톱솔을 사려는데 그의 손톱을 본 점원이 손톱 다듬는 줄을 권했고, 그래서 그는 화장 도구를 하나 더 갖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몸 관리에 관한 책을 우연히 읽고는 바로 아침마다 찬물로 목욕하는 취미를 개발하여, 짐을 몹시 놀라게 했다. 그런 야단스런 개념들에 공감하지않는 히긴보삼 씨는 몹시 황당해했으며, 마틴에게 추가로 물값을 물려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또 다른 진보는 바지에 줄을 잡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사안에 눈을 뜬 마틴은 바지의 계급 간 차이에 신속히 주목했다. 무릎이 불룩한 노동 계급의 바지와 달리, 상위계급 남자들이 입는 바지는 무릎부터 밑단까지 똑바른 선이 내려왔다. 그는 또 그 이유를 알아냈고, 누나의 부엌에 침범해 다리미와 다림질 판을 찾아냈다. 처음에는 바지 하나를 완전히 태우고 다른 바지를 사는 불운을 겪었는데, 그 지출 탓에 그가 바다로 나가야 할 날이 더욱 앞당겨지게 되었다. - P73

그는 깨어 있는 매 순간을 충실히 살았고, 잠자는 동안에도 그러했다. 그의 주관적인 정신은 다섯 시간의 휴지기에 저항했고, 낮에 겪은 일들과 생각을 결합시켜서 기괴하고 불가능한 경이를 만들어냈다. 사실, 그는 한순간도 쉬지 않았다. 몸이 약하거나 두뇌가 덜 견고한 일반적인 경우라면 붕괴되고 말았을 것이다. 요즘은 오후에 루스를 보러 가는 일도 드물었는데, 그녀가 대학 과정을 끝내고 학위를 받아야 하는 6월이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문학사! 그녀의 학위를 생각하면, 자기가 따라갈 수 있는 속도보다 빠르게 그녀가 저 너머로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 P137

너는 누구야, 마틴 에덴?
그 밤 하숙방에 돌아와서, 그는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물었다. 자신을 오래도록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너는 누구야? 무엇이야? 어디에 속해? 너는 당연히 리지 코놀리 같은 아가씨들에게 걸맞아. 너는노동 군단에 속하고, 낮고 천박하고 추한 모든 것에 어울려. 악취 나는 환경에서 소처럼 일하는 무리의 일원이지. 지금도 상한 채소의 냄새가 나. 감자가 썩고 있어. 그 냄새를 맡아, 빌어먹을 놈, 맡아 보란말야. 그런데도 너는 건방지게 책을 펴고, 고전 음악을 듣고, 근사한그림을 감상하는 법을 배우고, 고상한 영어를 구사하고, 네가 속한 계급의 사람들은 아무도 하지 않는 생각을 하고, 노역자들과 리지코놀리로부터 자신을 억지로 떼어 내어 한 창백한 여인을, 너로부터 백만 마일은 떨어져 별들 속에 사는 여인을 사랑하지! 너는 누구지? - P147

뭘 하는 놈이지? 빌어먹을 놈! 끝내주게 해내겠다고?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주먹을 휘두르고는 침대 구석에 앉아서 눈을 크게 뜬 채 잠시 멍하게 있었다. 그런 뒤 공책과 대수학책을 꺼내 2차 방정식을 푸는 데 몰두했다. 시간이 흘러 별빛은 흐려졌고, 새벽의 여명이 그의 창에 밀려들었다. - P148

스펜서가 거의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한동안 납득할 수 없었다. "허버트 스펜서." 도서관의 사서는 말했다. "네, 그래요. 위대한 지성이죠." 그러나 사서는 그 위대한 지성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듯했다. 어느 날 저녁, 버틀러 씨도 동석한 식사자리에서, 마틴은 화제를 스펜서로 돌렸다. 모스 씨는 그 영국인 철학자의 불가지론을 통렬히 규탄했으나, 「제1 원리는 읽지 않았다고 실토했다. 버틀러 씨는 스펜서가 견딜 수 없이 싫고, 그의 책은 한 줄도 읽지 않았으며, 그런 책을 읽지 않아도 무척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마틴의 마음 속에 의혹이 일었다. 주관이 강하지 않았다면 그는 일반적인 의견을 받아들여 허버트 스펜서를 포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물에 대한 스펜서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스펜서를 포기하는 것은 항해사가 나침반과 항해용 정밀 시계를 배 밖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마틴은 계속해서 진화를 철저히 공부했고, 그 주제를 스스로 정복해 나갔으며, 수천명의 독자적인 작가들의 확인에 힘입어 믿음을 굳혔다. 공부하면 할수록 아직 탐구하지 못한 지적 영역이 바라다보였다. 하루가 스물네시간밖에 안 돼서 불만이라고 그는 입버릇처럼 투덜거렸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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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먼지보다는 재가 되리라


내 삶의 불꽃이 마르고 부패되어
숨막혀 죽기 보다는
차라리 찬란한 불길 속에서 타오르리라

졸린 듯 영원한 행성보다는
차라리 떨어지는 최고의 별똥별이 되어
내 모든 원자 하나하나가 장엄한 빛을 발하리라

존재가 아니라 사는 것이 곧 인간의 본분일지니
나는 생의 연장을 위해 주어진 날들을 허비하지 않으리
내게 허락된 시간들을 모두 쓰리라

잭 런던, [먼지가 되기보다는 재가 되리라]


의미 없는 먼지가 되기보다는 찬란한 재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
작가 잭 런던은 187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잭의 생부는 자신의 아이를 낳은 여자를 외면했고, 잭의 어머니는 곧 ‘존 런던‘이라 - P7

는 남자와 재혼한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기에, 잭 런던은 소년 시절부터 통조림 공장에서 하루 18시간 노역을 하곤 했다. 가끔 도피처가 되어준 건 도서관이었고, 사서와도 친해져서 독서 지도를 받곤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런던은 학업을 중단하고 노동자, 도둑, 선원, 부랑자 생활을 하며 밑바닥 세계를 떠돈다. 그 시기에 그가 경험으로 체득한 사실은, 세상은 약육강식의 원칙으로 돌아가며 그 바닥에서 생존하려면 모든 면에서 강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15세되던 해, 양식장의 굴을 약탈해서 팔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배를한 척 사서 어린 해적이 되기도 한다. 2년 후엔 직업 선원이 되어 생애 처음 일본과 시베리아까지 항해를 하고 돌아온다. - P8

잭 런던이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이 항해에서 돌아오고 난 다음이다. 그는 엄청난 에너지로 작품을 써 나갔고, 여러 잡지사에 응모했으나 모두 반송되는 수모를 겪는다. 10대 후반부터 시작된 소설습작 시절에도 그는 여전히 가난했고, 고된 노역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정해진 수순처럼 사회주의자가 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19세가 되어 뒤늦게 오클랜드 중학교에 입학을 했고 여세를 몰아 버클리 대학에 입학했지만,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금 노동자가 된다. 그러고는 곧 금광을 찾아 떠났고 공무원 시험에도 합격했지만, 끝내 작가가 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어 공무원의 길을 포기한다. - P9

1903년, 마침내 소설 「야성의 부름』 (The call of the wild)이 베스트셀러가 되며 잭 런던은 스물여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미국 최고의인기작가 반열에 오른다. 그 이후 발표한 「바다 늑대, 하얀 송곳니도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잭 런던은 저택과 목장, 최고급 요트를 소유한 부유한 작가가 된다. 노동자로 태어나 부르주아의 세계에 진입한 것이다. 하지만 1908년에는 선명한 사회주의 소설 『강철군화』를 발표하며 또 한 번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소설 「마틴 에덴」은 「강철 군화를 발표한 이듬해에 출간되었고, 잭 런던의 자전적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은 소설이다. 마틴과 루스의사랑이라는 주요 내용에 작가가 되기 전 고난의 경험을 함께 담고있다. 이 소설은 2019년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어 2020년 국내에서도 개봉되었다.


「마틴 에덴이 다른 사랑의 이야기와 가장 차별화 되는 부분은 로맨스에 계급의 문제를 접목시켰다는 점이다. 사랑은 모든 역경을 - P10

뛰어넘을 수 있는 사건 같지만, 실은 계급적 차이를 포함한 여러 가치관이 가장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현장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소설을 짧은 단어로 압축해 본다면, ‘추앙‘과 ‘붕괴‘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의 노래인 랙타임을 들으며 성장한남자가 클래식이 흐르는 배경에서 자라 수준급의 피아노 연주 실력을 지닌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남자는 추앙하는 여자가 사는 세상으로 넘어가기 위해 부르주아 문화를 습득하고 최고의 작가가 되는 꿈을 품기 시작한다. 자신이 두르고 있는 계급의 껍질을 찢고 나와 다른 계급의 껍질을 입는다는 것은 ‘붕괴‘를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일이 아닐까? 마틴이 가고자 하는 ‘그 곳‘이 ‘에덴(Eden, 천국)‘인지 아닌지를 알게 되는 과정이 이 소설의 긴장을 추동하는 힘이다.


아름다움을 동반하는 붕괴들은 도처에 존재한다. 독자분들께서마틴의 붕괴에서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이라도 발견하기를 바라는마음으로 이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모순과 붕괴가 매력적으로다가오는 것은 문학 안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므로.

2022년 9월
녹색광선 편집부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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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목소리의 개성에 나는 놀랐다. 대화할 때는 특별한 점을느끼지 못했는데, 노래하는 인아의 목소리는 무척 맑았다. 더욱 특별한 것은, 맑기만 하던 그 목소리가 높은 음역대로 들어갈 때마다 미묘하게 변한다는 것이었다. 차가운 유리잔처럼 섬세한 그 목소리의 표면에, 기묘하게 처연한 슬픔 같은것이 자잘한 물방울들처럼 응결되었다가 사라지곤 했다.
잊을 수 없는 여름밤의 한순간이었다. 인아의 노래가 아름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청춘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순간 인아를 사랑하게 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인아의 노래가 갑자기 끝났을 때, 지난 이십여년 동안 억눌러왔던 생생한 갈망이 단박에 빗장을 끄르고 내심장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을, 그 어둡고 남루한 골목 한가운데서 나를 마주 보며 서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 P69

인아의 말대로, 이런 날의 밤 산책은 나에게 환영의 숲이나 바다 아래를 걷는 것이다. 원피스를 입고 힐을 신고 진하게 화장을 하고, 내가 태어나 자란 도시의 번화가를 목적 없이 걷는다. 내가 아는 누구를 우연히 이 거리에서 마주친다 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이 눈부시게 휘황하고, 가슴 아프도록 절실해서 나는 가끔 눈물을 흘리고 싶은 마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다. 방해하지 않으려고 천천히 반보 앞에서 걷고 있는 인아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눈언저리의 뜨거움은 곧 식혀진다. 얼음이나 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그 옆얼굴을 뒤따라 나는 계속 걷는다.
눈부시던 번화가의 불빛이 차츰 성글어지다 문득 황량한본모습을 드러낸 거리의 끝에서, 인아는 걸음을 멈추며 나에게 묻는다. - P79

이런 날의 밤 산책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시선을 견디는 것이다. 편견과 혐오, 경멸과 공포의 시선들, 때로 노골적이고 더러 은근한 그것들을 감지하며 잠자코 앞으로 나아간다. 이따금 지나치게 강렬한 감정이 담긴 시선을 만날 때 인아는 나에게 말을 건다.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는다. 활짝 눈웃음치는 눈으로 내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럴 때 나는 오래전에 보았던 짧은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기도 한다. 한 쌍의 레즈비언이 햇빛 환한 거리를 팔짱을 끼고 걷고 있다. 서로의 뺨과 어깨와 팔을 애무하며, 웃음과 입맞춤을 나누며 건물들의 모퉁이를 돌고 또 돈다. 십 분 가까이 침묵 속에서 그들의 다정한 오후를 비추던 카메라는 그들이 사라진 모퉁이를 뒤따라 돌아가, 둔기에 머리를 맞고 피 흘리며 죽어 있는 그들을 마지막으로 위에서 비춘다. 핏속에 나란히 누워 있는 그들의 몸 위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 P80

나중에 안 일이지만, 분수대 앞의 벤치에서 우리가 그 고백들을 주고받았을 때 인아는 결혼 생활을 막 청산한 상태였다. 얼마간의 위자료가 있었기 때문에 ㅡ 역시 정확히 묻지 못했지만, 인아가 경험한 어떤 폭력이 환산된 금액인 것 같았다 ㅡ당장 생계가 쫓기는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인아는 그 후 첫일 년 동안 닥치는 대로 일했다. 대형 마트의 캐셔 일이 가장 먼저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급자의 눈에 들어 환불처리팀으로 옮겨갔는데, 한 번 더 부서를 옮기게 되었을 때 그 일을 그만두었다. 그 후로는 수개월에 걸쳐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까맣고 독한 액체 같은 게 뒤통수로 흘러들어오는 것 같아. 그럴 땐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잠을 잘 수도 없어.), 거의 위 - P81

험하게 느껴졌던 마지막 순간에 대학 시절 밴드를 함께 했던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당시 인아의 상태가 너무 나빴기 때문에, ‘일어나서 움직여봐‘라고 꾸준히 격려하는 중에도 나는결국 인아가 회복될 수 없을 거라고 몰래 예상했었다. 하지만, 완전히 죽은 줄 알았던 화분에서 기이하게 선명한 꽃이피듯 인아는 되살아났다. - P82

내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존재하고 있는지 깨닫게 하는 웃음이다.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여자이고 싶은지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고, 남자의 몸으로 여자를 안고 싶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다. 어린 시절, 점점 어두워지는 골목을 내다보며 어머니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저녁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 우산이 없어 강당 처마 아래 서서 잦아들지 않는 빗발을 바라보던 오후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도 인아다. 그런 순간 막연히 만나고 싶었던, 모르는 누군가의 희끗한 얼굴과 무심코 겹쳐지는 사람도 인아다.
인아의 얼굴에서 곧 웃음이 걷힌다. 나도 더 이상 웃지 않는다. 10센티 굽의 에나멜 구두를 절름절름 끌며 더 걷는다. 물이 마른 우물 속처럼 비좁고 더러운 골목에 이르렀을 때, 그녀에게 그 노래를 불러달라고 말한다. - P87

(이제 난 늙어가고 있고, 앞으로 더 늙을 거야.)
인아가 입을 다물었다 뗄 때마다 가느다란 주름들이 입가에 패었다 지워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녀가 반년쯤 전 장기와 각막 기증 서약을 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기운이 날 때마다 헌혈 차량의 비닐 침대에 누워 두 팩씩 피를 뽑아왔다는 것을, 서랍에서 우연히 발견한 수십 장의 헌혈 증서를 보고 알았다. 시체까지 의학생들의 해부실습을 위해 내놓을 거라고 그녀가 무심하게 말했을 때 나는 못 들은 척 눈을돌렸었다. 살이 다 발라진 인아가 꿈틀거리며 수술용 침대 위에서 몸을 뒤트는 환상 때문이었다.
(내 안에서는 가볼 수 있는 데까지 다 가봤어.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어. 그걸 깨달은 순간 장례식이 끝났다는 걸 알았어. 더 이상 장례식을 치르듯 살 수 없다는 걸 알았 - P91

어. 물론 난 여전히 사람을 믿지 않고 이 세계를 믿지 않아. 하지만 나 자신을 믿지 않는 것에 비하면, 그런 환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무언가에 항의하는 것처럼 단호해진 말씨에, 나는 숨을 죽인채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말한 건 네가 방금 물었던, 왜 그런델 다니면서 그런 노래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진짜 대답이 아니야. 그 대답은 너에게 하고 싶지 않아.) - P92

주춤주춤 사과하듯 나는 말했다.
이젠 뭐 다 끝났는걸. 지금부터 사 년쯤 조심해서 지켜보기만 하면 돼. 언니 여행 이야기 해봐, 인도는 어땠어?
다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는 조금 웃었다.
글쎄, 이번엔 여행이 아니었어. 그냥 거기서 살았던 거지.
그러니까, 살았던 이야기를 해봐.
인도 여행기마다 나오는 구도적인 분위기 같은 건, 난 전혀 못 느꼈어. 굳이 특별한 게 있다면, 숨겨진 게 없다는 것? 예를 들면 죽음. 거기선 시체를 밖에서 태워.
그때 앳된 아르바이트생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내가 메뉴판을 펼치고 막 마실 것을 고르려는데, 은희 언니는 주변의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 사람처럼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야. 저녁에 불을 붙인 몸이 밤새 타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 - P109

그 이야기 때문에, 그날 은희 언니가 들려준 다른 이야기들은 모두 잊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지글지글 끓는, 마지막 지방이 타들어가고 있는 그 심장을보고 있는데, 왜 저절로 내 손이 심장 위로 올라왔는지.

그때 처음으로 은희 언니를 닮은 어떤 여자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직 밝아지지 않은 새벽, 시체가재가 되고 덩이들만 하얗게 남은 자리에 여태 지글지글 끓는 심장. 그걸 내려다보다 자신의 심장에 손을 얹는 어떤 여자. 그 여자가 고개를 들면, 무섭도록 낯익은 얼굴꺼진 눈, 두드러진 광대뼈, 검게 죽은 내 입술이 그을린 살갗 가운데새겨져 있을 것 같았다. - P110

의사의 진단을 들은 직후, 내 인간관계는 계속 만날 수 있는 사람과 애써 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졌다. 거의 직관적으로 빠르게 이뤄진 그 압축의 과정에서, 은희 언나는 내가 계속 만날 수 있다고 느낀 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수술을 앞뒀던 늦은 봄, 이 길을 걸으며 은희 언니 생각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얼마 전 인도로 떠난 그녀를 다시 만날수 있다면 이곳에 데려오고 싶었다. 발바닥을 지압하도록 산책로 끝에 깔려 있는 하얗고 뾰족한 돌들을 맨발로 밟아보게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윤이는 이 돌 모양이 새 같대, 언니 눈에도 그렇게 보여? 자주 연락하고 싶었는데, 언니 자신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그게 어쩐지 겁이 나서 그러지 못했어. 주말에 불러내서 뭐든 먹이고 싶었는데, 찐새우를 고소한 찹쌀 전병에 말아주는 중국집에 데려가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 그러다 언니가 여행을 시작해서 좋았어,
움푹 마음의 짐이 덜어진 것 같았어. - P111

변명하고 싶다.

은희 언니를 닮은 어떤 여자에 대한 소설은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 문장만을 써두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열대 지방의 느낌을 머리로는 상상할 수없어 회복된 뒤 처음으로 여행을 계획했다. 내 계획을 메일로 받아본 은희 언니는 흔쾌히 답장을 보냈다. 설렌다, 정말 여기로 네가 오다니.
어젯밤 편집자에게 넘기려 했으나 이제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소설을 쓰는 동안에도, 나는 줄곧 그 어떤 여자에 대한 새 소설을 생각하고 있었다. 적당한 여행사를 검색해 항공권을 예매하고, 자료를 모으고, 여정을 짜고, 저녁마다 조금씩 짐을 꾸렸던 지난 한 달은 나에게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라는 단순한 문장만큼이나 조용하고 밝은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그 순간의 내가 써낼 수 있었던 가장 가볍고 고요하고 환한 문장이었을 뿐이다. - P112

부질없는 심문과 대답 사이, 체념과 환멸과 적의를 담아, 서늘하게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는 시간.
눈이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는 시간.
내 죽음 속으로 그가 결코 들어올 수 없고, 내가 그의 생명속으로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시간.

그 모든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시간.
오직 삶을, 삶만을 달라고, 누구에게든, 무엇에게든 기어가구걸하고 싶던 시간.

그 시간들이 충분히 멀어지지 않았다. 모래톱 저쪽의 바다처럼, 아직 지척에서 일렁이며 소리를 낸다. 짠물이 덜 마른흙 같은 몸이 아직 모든 걸 똑똑히 기억한다. - P120

그녀에게 말해보고 싶었다.

새벽까지 타는 심장을 그녀가 지켜보았던 그해,
생각 속의 미로 속에서 더듬더듬 내가 움켜쥐려 한 생각들을.

시간이 정말 주어진다면 다르게 살겠다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짐승처럼 죽지 
않도록,
다음번엔 두려워하지 않을 준비를 하겠다고.
내 안에 있는 가장 뜨겁고 진실하고 명징한 
것,
그것만 꺼내놓겠다고.
무섭도록 무정한 세계,
언제든 무심코 나를 버릴 수 있는 삶을 
향해서. - P123

변명할 수 있을까.

그 꿈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나는 무엇인가를 이해했지만, 내가 이해한 것을 은희 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 꿈을 듣고 이해한 것을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처럼.
그러지 마, 라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 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 치 앞 - P126

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 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마. 잠 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 마.
그러나 그중 한마디 말도 나는 입 밖으로 꺼내놓지 못했다. 오래전에 단 한 번 그랬던 것처럼 어깨를 꽉 안지도. 손을 잡지도 않았다. 다만 은희 언니가 제 힘으로 찾아가는 곳의 여름이 그녀를 구할 거라고 믿었다. 내가 할 수 있었을 어떤 말보다 강렬한 열기와 소낙비로, 물을 머금고 생생하게 솟아오르는 열대의 꽃과 나무로. - P127

저물 무렵에야 돌아와 제대로 씻지 못하고 잠들었다. 윤이가 부르는 소리, 깨우지 말라고 동생이 달래는 소리를 들은 것이 생시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얼핏 잠이 엷어질 때마다 숲의 산책로가 어른거렸다. 하루에 두 번, 움직일 수 있는 한걸었던 그 길가에 흰 질경이꽃이 핀다. 여린 잎들이 버드나무에 돋아난다. 어지러운 햇빛이 돌아온다. 희거나 목이 길거나부리가 노란 새들이 온다. 생명이 온다. 조금 더 버티면, 후회와 고통을, 깊게 찌르는 자책을, 안 지워지는 얼굴을 등지고 조금 더. - P128

조금씩 무엇인가 몸속에서 깨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하루하루, 한 달 한 달, 한 계절 한 계절의 시간들이 차츰 나를 변화시키는 것을 느낍니다.
지난해 여름 이곳으로 이사한 뒤 처음으로 운동장을 달렸을 때는 한 바퀴도 다 뛰지 못했습니다. 허파와 심장이 모두 터져버릴 것 같아서요. 아이가 있을 때는 아이와 함께, 아이 - P213

가 어린이집에 갔을 때는 혼자서 하루에 반 바퀴씩 늘려갔습니다. 다섯 바퀴를 쉬지 않고 뛰고 난 오후, 운동장을 빙 둘러 심어진 나무들을 세어보았습니다. 키 큰 자작나무들이 모두 스물두 그루였어요. 다 세고 나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뭉클뭉클한 흰 구름들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그림들에 제목이 있느냐고 내가 물었을 때 당신은 하늘이라고 대답했지요. 두번째로 입원했던 열두 살 때, 너무 심심해 종일토록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그곳이 얼마나 가슴 뛰는 공간인지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평생토록 여행다운 여행 한번 해본 적 없지만, 하루에도 수없이 꿈틀거리며 변하는 형상과 색채들이 경이롭다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늘을 보던 어느 순간, 영원과 무한 같은 것을 생각이나 느낌이 아닌 몸으로 알게 되었다고도 했습니다. 그것들이 뭔지 잘 모르겠다고 내가 말하자 당신은 심상하게 대답했지요.
그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그리고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눈가에 가득 잔주름을 만들며 웃었지요. - P214

먹빛 하늘이 서서히 밝아집니다.
이렇게 푸른빛이 실핏줄처럼 어둠의 틈으로 스며들 때면, 내 몸속의 피도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 의지, 내 기억, 아니, 나라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워집니다. - P214

한차례 파도가 밀려 나간 사이 잠깐 드러난 부드러운 모랫벌처럼, 우리가 여기 머무는 시간은 짧은 순간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문득 당신의 그림이 보고 싶어집니다.
어쩌면 시간이란 흐르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때 함께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그 시간의 당신과 내가 빗소리를 듣고 있다구요. 당신은 어디로도간게 아니라구요. 사라지지도. 떠나지도 않았다구요. 언젠가부터, 당신과 동갑인 남자를 만날 때마다 세월이 변화시켰을 당신의 얼굴을 막막하게 그려보던 버릇을 버린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에게 물어도 되겠지요.
거긴 지낼 만한가요. 빗소리는 여전히 들을 만한가요. 영원히 가져오지 못하게 된 감자 생각은 잊었나요. 오래전 꾸었다는 꿈속의 당신, 부풀어오른 팔로 파란 돌을 건지고 있나요. 물의 감촉이 느껴지나요. 햇빛이 느껴지나요. 살아 있다는 게 느껴지나요.
나도 여기서 느끼고 있어요. - P215

잔멸치 떼를 만난 적이 있다. 무수한 은빛의 점들이 일제히반짝이며 배 밑을 헤엄쳐 갔다. 빠른 속력으로 그것들이 사라지고 나자, 헛것을 보았던 것 같았다. 한순간의 빛, 떨림, 들이마신 숨, 물의 정적이 내 안에 남아 있다.
그게 전부다. - P219

모든 일에는 교훈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그런 자세로 살아왔다. 서른세 살이 될 때까지 악운이나 과오 앞에서 언제나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 통찰하고 교훈을 얻으려는 그 습관 덕분이었다. 병원에서 눈을 떠, 목의 늘어난 인대나 금간 척추는 어떻게든 회복 가능하나 왼손만은 완전히 으스러져버린 것을, 신경까지 손상돼 재활이 불가능하게 된 것을 알았을 때, 버릇대로 나는 통찰했다. 점점 크게 요동치는자동차를 멈추게 하기 위해, 열린 차창 밖으로 왼손을 뻗어올려 차체를 붙잡았던 나의 과오를.
난 언제나 그렇게,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감당해내려 하는 어리석음이 단점이었어. 순간적인 판단력도 부족했어. 항시 냉철하여, 때로는 잔인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교훈이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나는 그때 알았다. 인생은 학교가 아니다. 반복되는 시험도 아니다. 내 왼손은 으스러져버렸고, 그게 끝이었다. 배울 것도 반성할 것도 없었 - P224

다. 어떤 의미도 없었다.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개를 피하지 않겠지만, 이를 악물고 치어버리겠지만...... 대체 그런 일이 언제 다시 생긴다는 말인가?
첫 불운은 조용히 다른 불운을 불러왔다. 피를 많이 흘려 쇠약해진 데다 매사에 오른손에만 무리한 힘을 준 탓에, 퇴원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오른손의 관절들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악화될 때는 냄비나 주전자, 심지어 머그컵조차 혼자 다룰 수없어 일일이 남편을 불러야 했다.
무의미한 반성들은 그 과정에도 뒤따라왔다. 재활치료에 지나치게 열심이었던 것, 빠른 회복에 집착했던 것, 그래서 마치 완전히 회복된 사람처럼 행동했던 것. 개선되어야 할 내 습성은, 때로 균형을 잃을 만큼 맹목적인 의욕. 하나의 과제가 주어지면 세 개는 해내야 마음이 편해지는 모범생 기질. 폐 끼치는 것을 정도 이상으로 싫어하는 결벽성. - P225

일 년 가까운 통원 물리치료를 끝낸 늦은 겨울, 나는 두 손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왼손은 완전히 으스러졌고, 오른손으로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생활만을 억지로꾸려갈 수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 일 년만 두고 봅시다‘라고 의사는 말했다. 그동안오른손을 쉬어주라는 것이었다. 최대한 가사를 쉬고, 그림은 말할 것도 없으며, 무거운 것을 들거나 힘을 주거나 손목을 뒤로 꺾는 자세를 취하지 말라고 했다.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 - P225

고 스트레스를 피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인체의 자연 치유력을 믿어보자는 것이었다.
회복된 뒤에라도, 손에 무리가 가는 일은 되도록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의사가 당부한 일 년이 지났지만, 오른손은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좋은 의사였다. 젊었고, 권위적이지 않았고, 환자들을 배려할 줄 알았다. 그런 의사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말하자면, 지난 이 년간 내가 만난 유일한 행운이었던 셈이다. - P226

어떤 영원한 사람. 귀신처럼 어른거리는 사람. 흔적인사람. 그림자인 사람. 혹은, 오래된 집의 마룻바닥에 스민 누대의 일생들의 자취…… 그런데,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이 여자의 어딘가가 나와 닮았다는 것을. 과거 속의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여자는, 이 년 전의 내 갈망이었다. 시간의 뒤편으로 들어가고싶어 했던 나, 낡은 마룻바닥 속으로 희미하게 스며들고 싶었던 나. 천천히 세월에 지워지고 싶었던, 눈비와 들쥐들과 바람 속에 폐가처럼 무너져 내려앉고 싶었던 나.
창문을 열었지만 실내는 몹시 덥다. 이마의 땀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나는 일어선다. 벽 쪽으로 걸어간다. 더러는 비닐을 뒤집어쓰고, 더러는 먼지로 부예진 작품들을 둘러본다.  - P230

육송 널빤지를 일정한 폭으로 자르고, 못질을 해 붙이고, 사포질을 하고, 아교를 포수했었다. 벽돌을 곱게 가루내 분채와섞어 색을 내고, 늙은 세월의 느낌을 입혀줄 대두 기름과 잣기름을 직접 짜서 만들었다. 어깨를 결려가며, 손가락에 상처를 내가며 두 손, 두 팔로 이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 며칠밤을 새워 작업에 몰입할 수 있었을 때 나는 행복했다. 그 행복만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전부라고 믿었던 것을 잃고도 살아갈 수 있다. 이 년 동안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환자. 한 남자의 골칫덩어리. 때로 오른손이 악화되면 자신이 쓴 물컵 하나 선반에 - P230

뒤집어놓을 수 없는, 철저히 쓸모없는 존재.
나는 그림들로부터 등을 돌려, 여자의 옆얼굴이 그려지다만 널빤지 앞으로 돌아와 앉는다. 이 얼굴의 이미지를 왜 그렇게 사랑했을까. 마치 종교에 몰입한 사람처럼 나는 진정으로 매달렸었다. 이렇게 고요하게, 나는 침잠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이런 것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 오른손이 과연 아물 수 있을지, 작업을 다시 할 수 있을지조차 확실치 않지만, 다시 그린다면 나는 이런 고요 대신 울부짖고 싶다.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발을 구르고 싶다. 이를 악물고 동맥을 끊어, 솟구치는 피를 보고 싶다. 이 그림의 놀라운 고요.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느낌으로 고여 있는 평화가 나를 구역질나게 한다. 이 평화는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오히려 죽음 같은 공허, 황무지의 참혹함-그편이 나에게는 진실로 느껴진다.
천천히, 그러나 단호히 오른손을 뻗어, 나는 그 낡은 널빤지를 뒤집어버린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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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자꾸 잊어버린다. 방금 전까지 당신이 어디 있었는지, 무슨 치료를 받았는지, 지금은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 건지 잊는다. 지하도 출구를 빠져나오자 당신은 걸음을 멈춘다. 활짝 문이 열린 전자 제품 매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음악의 비트, 쉬지 않고 아스팔트를 뚫어대는 기계들의 먹먹한소음에 넋을 빼앗긴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처방받은 항생제가 노트북 가방 앞주머니에 잘 들어 있는지 손끝으로 더듬어 확인한다.
당신은 이미 잊었다. 자신이 얼마나 재치 있는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지, 나름으로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는지 잊었다. 작은 키 때문에 늘 굽이 있는 단화를 신고, 자유스러운 밝은색 옷을 걸치고, 흰색과 노랑색 계열의 스카프를 두르고, 눈꼬리가 살짝 처진 눈엔 언제나 어렴풋한 장난기가 어려 있었던 것을.
목을 덮는 검은 스웨터에 검은 모직 재킷, 검은 면바지에 검은 단화를 신은 당신의 키는 초등학교 고학년생처럼 왜소해 보인다. 화장은커녕 입술에 립글로스도 바르지 않아,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가 고스란히 드러나 보인다. - P12

막 눈발이 쏟아질 것 같던 하늘은 아직 한 점의 눈송이도 뱉어 내지 않았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거리는 붐볐다. 끝없이 붉은 미등을 켠 차들이 숨죽인 채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있었다. 당신은 앞좌석에서 여전히 두 주먹을 쥐고 있었고,
이따금 뒷좌석에 웅크려 누운 언니를 돌아보았고,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목구멍이 따가웠다.
당신의 언니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당부할 필요가 없었다. 당신이 그 비밀을 언제까지나, 부모는 물론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끝까지 짊어질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을 만큼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당신의 언니는 그날 이후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다. 당신과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고, 눈조차 제대로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 후 수년간 당신은 그녀의 마음을 다시 얻기 위해 애썼지만, 어떤 노력도 부질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한순간 그녀에게서 돌아섰다. - P19

그해가 지나가기 전에, 당신은 늦은 밤 그녀의 방에서 물었다. 난 정말 모르겠어, 사람들이 어떻게 통념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지, 그런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당신에게 등을 돌린 채 화장을 지우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 P20

얼핏 어두워졌다. 거울을 통해 당신의 눈을 마주 보며 그녀는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지만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통념 뒤에 숨을 수 있어서.
그때 당신은 그녀를 이해한다고 느꼈다. 여러 겹 얇고 흰 커튼 속의 형상을 짐작하듯 어렴풋하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애가 아니었다. 다만 가장 안전한 곳, 거북과 달팽이들의 고요한 껍데기 집, 사과 속의 깊고 단단한 씨방 같은 장소를 원하는 것뿐이었다. - P21

그녀가 아이를 갖기 위해 십 년 가까이 쏟아부은 노력들을당신은 어머니로부터 낱낱이 들어 알고 있었다. 한방병원에서 지은 고가의 탕약들, 배꼽 아래에 흉이 생길 때까지 받았다는 쑥뜸 치료, 불임 시술을 위한 검사들. 초조하게 시술 날짜를 기다리던 시간. 잔혹하게 반복된 계류유산, 가족 모임에 당신이 나타나면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진다는것을 아는 사람은 당신뿐이었다. 활짝 미소를 지은 채로, 당신은 당신의 언니를 사랑하지 않으려 애썼다. 낯선 여자를 바라보듯 그녀를 보려 애썼다. 그녀가 웃을 때면 장난꾸러기처럼 찡그려지는 콧잔등을 다정하게 바라보지 않으려 애썼다. - P21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혈육을 향해서만 느낄 수 있는, 이루말할 수 없는 친숙한 감정을 당신의 내부에서 깨우지 않기 위해 애썼다. 당신의 마음을 최대한 차갑게, 더 단단하게 얼리기 위해 애썼다. - P22

그녀는 삼십칠 킬로그램까지 몸무게가 줄었고,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고통을 호소했다. 아파, 아파, 라고 아이처럼 가느다랗게 비명을 질렀다. 아빠, 나 좀 살려줘, 라고 그녀가 애원하자 무뚝뚝한 아버지의 턱이 덜덜 떨렸다. 덩치 큰 형부는 뒤돌아서서 울었다. 어머니는 그녀의 손을 감싸 쥔 채 아가, 아가, 라고 속삭였다. 당신은 자책을 멈추지 못했다. 당신의 존재가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을 멈추지못했다. 언니, 라고 마침내 떨리는 입술을 열고 말하려 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 P23

그러니까, 이제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다.
이틀 뒤 두번째로, 이틀이 더 지나 세번째로 다시 당신이 의사에게 그 상처들을 보여주리라는 것을 당신은 지금 모른다. 하루만 더 지켜보죠, 라고 의사가 말하리라는 것을 모른다.
인대, 근육, 신경이 다 모여 있는 곳이라서, 가능하면 수술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당신이 다시 구두를 앞코로만 끌고 걷는 묘기를 해 수납을 하리라는 것을, 오후 여섯 시가 지나 야간 진료비가 추가되리라는 것을 당신은 모른다. 붉은 거미줄 같은 레이저 광선이 훑고 지나가는 왼쪽 발목의 구멍을 다시 들여다보리라는 것을 모른다. 죽어 있는 회백색의 피부 조직을 보며, 드레싱을할 때 왼쪽은 아팠지만 오른쪽은 오히려 아프지 않았던 걸 기억하리라는 것을 모른다. 아마 신경이 죽어버린 모양이지, 생각하리라는 것을 모른다. 수술을 하면 이 죽은 부분을 도려내는 거겠지. 가장자리 생살에서 피가 흐르겠지.
그따위, 라고 생각하며 당신이 마른 눈을 깜박이리라는 것을 모른다. - P26

급하게 비탈진 진입로에 이르자 페달을 놓고 미끄러져 내려간다. 잎이 다 떨어진 버드나무들이 걷고 섬세한 뼈대를 드러낸 채 물가에 무리 지어서있다. 퇴색된 잎들이 아직 붙어 있는 활엽수들 아래를 당신은 빠르게 달린다.
속력을 낼수록 바람이 강해진다. 이 바람을 맞으려고 당신은 여름 한낮에도 이 길을 자전거로 달리곤 했다. 뙤약볕이 이글거리는 팔월의 정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 오듯 흐르는 시간을 골라 이 길을 달렸다. 습기 차고 무더운 바람의 덩어리 속을 자전거로 뚫고 지나갔다. 당신은 살아 있었다. 생생하게 살아서 그 무더운 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별안간 소나기가 쏟아지면 온몸이 흠뻑 젖은 채 가장 가까운 콘크리트 다리를 향해 달렸다. 미친 듯이, 아무 까닭도 없이 소리를 지르고싶은 기쁨을 느꼈다. 그러니까 지난 팔월, 당신의 언니가 친정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형부의 차에 실려 병원을 오가고 있었을 때 당신은 그렇게 미칠 듯한 기쁨을 느꼈다. - P28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아 무릎 관절염이 악화된 어머니를 활달하게 설득하고 돌아온 일요일 저녁, 날개를 편 것처럼 천천히 골목에 내리는 눈을 더 보지 않기 위해 당신이 커튼으로 창을 가리리라는 것을 모른다. 칠흑같이 어두워진 방 가운데 당신이 웅크리고 앉아 맞을 밤을 모른다. 어디만큼 왔나, 당당 멀었다. 눈을 감은 채 언니의 손을 잡고 외갓집에 가던 캄캄한 골목을, 그 목소리를 기억하지 않기 위해 밤새 헤드폰을쓴 채 토막잠을 청하리라는 것을 모른다.
오래전 당신이 첫 월급을 타서 선물했던 스카프를 그녀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말없이 돌려주었던 순간을, 당신이 끈덕지게 되돌려 기억하게 되리라는 것을 모른다. 당신이 그녀에게서 영원히 돌아서리라 결심했던 순간. 그녀의 표정 없는 눈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결코 읽을 수 없었던 그 순간. 그때 당신은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당신 역시 무섭도록 차가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놀라며 발견하는 대신 무엇을, 어떤 다른 방법을 찾아냈어야 했을까. 끈덕지고 뜨거운 그 질문들을 악물고 새벽까지 뒤척이리라는 것을 모른다. - P33

그 모든 것을 아직 알지 못한 채 지금 당신은 갈대밭 가장자리에 누워 있다. 자전거는 천변의 바위 위로 나동그라져 세차게 헛바퀴가 돌고 있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순간 당신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손과 팔꿈치의 피부가 벗겨진게 분명하다. 땅에 부딪친 어깨와 골반이 뻐근하게 아파온다.
이따위, 라고 중얼거리며 당신은 축축한 흙 위에 누워 있다. 회백색 구멍 속의 상처 따위는 이제 느껴지지 않는다. 흙이 들어간 오른쪽 눈이 쓰라리다. 이 모든 통각들이 너무 허약하다고, 당신은 수차례 두 눈을 깜박이며 생각한다. 지금 당신이 겪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차가운 흙이 더 차가워져 얼굴과 온몸이 딱딱하게 얼어붙게 해달라고, 제발 다시 이곳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게 해달라고, 당신은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기도를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린다. - P34

죽은 들고양이를 피하기 위해 그 여자는 무리하게 차선을바꾼다. 오늘로 나흘째다. 노르스름한 털, 부드러운 살의 윤곽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던 고양이는 이제 거의 부패했다.
며칠 더 지나면 부피감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문드러질 것이다.
그 여자는 속력을 낸다. 시속 백이십 킬로미터로 달리는 차들의 굉음 속에서, 십년 된 소형 승용차는 끔찍한 소음을 낸다. 액셀을 밟을 때마다 수십 마리 곤충이 날개를 떠는 것 같은 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 여자는 라디오를 켰다가 끈다. 테이프를 꽂았다가 뺀다. 터널의 어둠 속으로 삼켜진다. 빛 속으로 다시 내뱉어진다. 외마디 비명처럼 짧고 빠르게. - P37

그 봄이 지나갈 때까지, 어지러운 햇빛 속을 승용차로 달려 출근할 때마다 서른두 살의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했다. 두눈을 시큰하게 하는 빛, 생리적인 눈물이 고이게 하는 빛, 어른어른 마성이 피어오르는 빛 속에서 커브를 꺾으며 훈자를 생각했다.
그 여자는 첫번째 육로가 마음에 들었다. 인부들이 수없이 죽어 나가며 건설했다는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절벽 길을 달리다 날이 저물면 교통빈관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한다. 다음날 새벽 다시 버스에 올라 하루를 더 꼬박 달려야 한다. 어디로 눈을 들어도 해발 육천 미터의 눈 덮인 봉우리들이 보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길. 탄식처럼 갑자기 훈자는 - P42

나타날 것이다. 지대가 높아, 늦은 봄이 되어서야 살구꽃이 지천으로 피는 곳. 가을이면 말린 살구가 가게마다 그득한곳. 한번 들어가면 떠나고 싶지 않아지기 때문에 장기 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곳. - P43

오랜 시간 계속되어온 습관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훈자를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여자가 생각하고 싶은 것은 훈자가 아닌 훈자였다.
훈자가 아닌 훈자를 생각하는 일은 훈자인 훈자를 생각하는 일보다 힘이 들거나 거의 불가능했다.

그 여자의 훈자는 더 이상 영문판 『론리 플래닛 파키스탄편에 있지 않았고, 그 여자가 암호를 걸어놓은 파일에 담긴신장 지방과 파키스탄 지도에 있지 않았다. 검색창에 훈자,
라고 써넣으면 떠오르는 블로그들, 카페들에 있지 않았다. 길고 복잡한 화장품의 이름, 깎은 듯 아름다운 여배우의 옆얼굴에 있지 않았다. - P48

수없는 어두운 환상 속에서 그 여자는 낡은 차를 몰고 공항으로 달렸고, 과열된 엔진이 폭발하는 열기를 견뎠다. 비행기 화물칸에서 어리석게, 빳빳하게 얼어붙었다. 훈자의 날카로운 빙하에 내던져져 머리가 산산조각 났다.

그 여자는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맨발로 걸었고, 동이 터왔고, 시퍼런 그믐달이 어둠 속에 면도날처럼 돋아나는 것을 보았다. 소리 없이 다가온 산짐승에게 목덜미가 찢겼고, 목구멍으로 비명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 P49

더 이상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훈자인 훈자도, 훈자가 아닌 훈자도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으나, 더 이상 악몽에시달리지 않았다.
그러자 어느 날인가부터, 수면 부족 때문에 실제보다 표면이 건조하고 거칠어 보이는 사물들 위로, 결코 훈자일 수 없는 것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것이 훈자라는 것을 오직 그 여자만 알 수 있는 것들, 그것이 왜 훈자인지 누구에게도, 자신에게조차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 P52

검은 아스팔트가 새로 깔린 구간으로 그 여자의 차가 들어선다. 차선이 지워진 캄캄한 자리에 드문드문 희뜩한 표지들이 꽂혀 있다. 불안하게 큰 커브를 돌며 그 여자는 눈을 부릅뜬다. 앞차가 뱉어 내는 브레이크 등의 불빛이, 끈덕지게 술렁이는 도로의 어둠이 핏물처럼 그 여자의 눈에 비쳐 어른댄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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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결국, 잃은 뒤에야 그것의 소중함을알게 된다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진리를 나는 이 쾌적한 아파트에서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처음 약수를 길러 한 시간 가까이 차를 타고 그 동네에 갔을 때, 집이 있던 골목 어귀에 들어선 순간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눈시울이뜨거워졌다. 숱하게 오르내렸던 비탈진 언덕을 지나 약수터에 이르자내 마음은 한동안 잊고 있었던 온기로 덥혀졌다.
그, 평화,
햇살이 좋은 봄이면 책 한 권을 들고 나와 나무 그늘 아래서 읽었던 곳이 그곳이고, 저녁이면 계곡물에 떨어졌을 흰 산벚꽃잎을 보려고 산책 나왔던 곳이 그곳이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충일과 평화가 거기 고스란히 떠돌고 있었다. - P221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은 소설가 한강이 1988년 아이오와대학 국제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하느라고 3개월 머무는 동안 사귄 여러 나라 시인, 소설가들과의 우정어린 사귐을 회상하는 애틋한 기록이다.
자기가 태어나서 오래 산 곳을 떠나 낯선 땅에 발을 딛는 순간 느끼는 저 생생한 자유로움-잠정적이나마 과거로부터 멀어지면서 활짝 피는 듯한 그 자유로움 속에 겪는 일들과 사귀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모두 파릇파릇할 것이다. 마음 안팎의 사물을파릇파릇하게 만드는 것이 시인의 영원한 임무라면, 이 책의 작가가 겪고 기록한 그시간들은 필경 시적인 순간들이며, 세계가 시작되기 전과 같은 상황이 만들어준 마음의 가벼움과 원초성에 인화된 순간들이다.
작가가 말하듯이 그 사귐에 깃들어 있었던 평화, 우정, 따뜻함도 물론 그러한 상황의 소산이며, 글 속에 깃들어 다함이 없는 촉촉한(여성적) 애틋함이 읽는 사람을 감동에 젖게 한다.
-정현종(시인)

작가 한강, 자신의 이름 그대로, 그는 강을 똑 닮았다. 투명하고 유려한 그의 문장은먼 길 향하는 강물소리처럼 나직하면서도 깊고, 부드러우면서도 힘차다. 이 아름다운 산문집은 그의 고요한 영혼의 수면 위에 별처럼 잠시 머물렀다 떠난 사람들, 그리고 그 만남에 대한 애틋한 추억록이다. 인생의 전환점에서 마주친 그 특별한 만남들은 삶, 자유, 고독, 사랑, 그리움, 조국, 노래 그리고 눈물이 되어 우리들 앞에 감동적으로 다시 태어난다. 책을 덮고 나서도 나는 한참을 더 조용히 앉아있었다.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고향을 잃고 세상을 떠도는 어느 망명 작가의 쓸쓸한 음성이 오래도록 가슴을 울렸다.
-임철우(소설가, 한신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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