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네가 다시 말하더군. 난 무슨 소리인가 싶었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가 계속 말하기를 기다렸지. 노인네는 그 당시를 회상하더니, 잠시 후 말했어. ‘우리는 빅터 축음기하고 레코드판 몇 장이 있었다오, 선생. 밤마다 축음기를 틀어놓고 음악을 들으면서 거실에서 춤을 추었소. 매일 밤 그랬지. 가끔은 바깥에 눈이 내리고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다오. 1~2월이면 기온이 많이 내려갔지. 하지만 우린 레코드판을 들으면서양말을 신고 거실에서 춤을 췄다오. 레코드판을 다 들을 때까지췄지. 그러고 나면 불을 지피고, 등은 하나만 남겨두고 다 끈다음 잠자리에 들었어.  - P400

어떤 날은 밤에 눈이 내렸는데 밖이 어찌나고요한지 눈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오. 정말이오. ‘선생.‘ 그가 말했어. 정말 들을 수 있소. 가끔은 눈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조용히 하면, 그리고 마음이 맑고 나와 주변 세상이 조화를이루면, 어둠 속에 누워서 눈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언제한번 해보구려.‘ 그가 말했어. ‘여기도 이따금 눈이 내리지 않소?한번 해보시구려. 여하간 우린 매일 밤 무도회에 갔다오. 그러고나서 잔뜩 쌓아올린 누비이불 안으로 들어가서 아침까지 포근하게 잤지. 아침에 일어나면 입김이 보였소.‘ 그가 말했어.
헨리가 휠체어에 탈 만큼 회복되었을 때, 간호사 한 명이랑 내가 그를 휠체어에 태워서 부인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어. 붕대를 - P400

푼지 이미 한참 지났을 때였지. 노인네는 그날 아침에 면도도하고 로션도 발랐어. 목욕가운 위에 병원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알다시피 아직 회복중이었는데도 휠체어에 앉아서 몸을 꼿꼿이세우더라고. 근데 꼭 고양이처럼 긴장한 게 눈에 보였어. 아내의 병실이 가까워지니까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기대심으로 가득한 표정, 뭐라고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되더라고. 나는 휠체어를 밀었고 간호사는 내 옆에서 걸었어. 간호사는 얘기를주워들었는지 둘의 상황을 좀 알고 있었지. 간호사들이란 왜 온갖 것들을 보다보니 조금 지나면 무슨 일을 당해도 시큰둥해지는데, 그날 오전엔 이 간호사도 꽤 긴장했더군.  - P401

병실 문이 열리고, 내가 헨리를 병실로 밀고 들어갔어. 게이츠 부인, 그러니까애나는 아직 몸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머리와 왼쪽 팔은 움직일수 있었어. 애나는 눈을 감고 있다가, 우리가 병실로 들어가니까눈을 번쩍 뜨더군. 아직 붕대를 감고 있기는 했지만 골반 아래쪽만 하고 있었어. 난 헨리를 침대 왼쪽으로 밀고 가서 말했어. ‘손님이 오셨네요, 애나. 손님이 왔다구요.‘ 더는 말이 나오지 않더라고. 애나는 살짝 웃더니 얼굴이 환해졌어. 시트 아래에서 애나의 손이 나오더군. 푸르뎅뎅하게 멍들어 있었어. 헨리는 양손으로 그 손을 잡았어. 손을 들더니 입을 맞췄지. 그러고는 말했어.
‘안녕, 애나, 내 사랑, 좀 어때? 나 기억하겠어?‘ 애나 뺨에 눈물 - P401

이 흐르기 시작했어. 애나가 끄덕였지. ‘보고 싶었어.‘ 헨리가 말했어. 애나는 계속 끄덕였지. 간호사랑 나는 잽싸게 밖으로 나갔어. 병실 밖으로 나오니까 간호사가 엉엉 울기 시작하더라, 억센축에 드는 간호사였는데도. 정말이지 대단한 경험이었어. 여하간 그후로 헨리는 매일 오전, 오후에 휠체어를 타고 거기 갔어.
우리는 두 사람이 점심과 저녁을 부인 병실에서 같이 먹을 수 있게 했지. 나머지 시간에 두 사람은 그냥 앉아서 손을 잡고 이야기를 하더군. 이야깃거리가 끝이 없더라구." - P402

나는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제 하늘에서 파란 층이 물러나며 전체적으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별들이 나타났다. 금성이 보였고 그 옆으로 저멀리. 그만큼 환하지는 않지만 지평선 위에 분명하게 걸려 있는 화성이 보였다. 바람이 거세어졌다. 나는 바람이 빈 벌판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았다. 맥기니스 부부가 더이상 말을 기르지 않아서 참으로 안되었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말들이 거의 어두워진 들판을 가로지르며 질주하는 모습을, 아니면 그저 울타리 근처에서 서로 반대편을 향해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싶었다. 나는 창가에서서 기다렸다. 아직은 그대로 있어야 한다는 걸, 바깥으로 눈길을 향하고 밖을 내다봐야 한다는 걸 알았다. 볼 것이 남아 있는동안은. - P4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문


"마지막의 마지막." 지난 일 년간 나는 새로 발견한 레이먼드카버의 단편소설 다섯 편을 출간하는 과정에서 친구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시인으로서의 나는 ‘마지막까지길이 남으리‘란 울림을 듣는다. 동시에 이 책은 이 비범한 작가그의 작품들은 전 세계에서 스무 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었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작품들을 담고있기도 하다.
레이가 죽은 뒤, 훌륭한 소설가이자 레이 작품의 일본어 번역가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내인 요코와 함께 나를 찾아온 적이있다. 그때 하루키가 털어놓길, 번역을 하는 동안 레이가 옆에있다고 느꼈으며 그의 전집 번역을 마치는 게 두렵다고 했다. 그 - P9

리고 이제 나는 그가 느꼈을,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감정을 이해한다.
이 과업을 통해, 나는 세상을 영영 떠났다고 생각한 이에게서 뭔가 새로운 것을 듣게 됐을 때 같은 즐거움, 극장의 막이 내린뒤 예기치 않게 무대에 다시 나타난 배우를 봤을 때 같은 즐거움을 누렸다. 만약 오늘날 카프카나 체호프의 원고가 담긴 트렁크가 발견된다면, 사람들은 거기 담겨 있는 걸 보러 몰려들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문학과 삶에 있어 존경하던 낯익은 영혼들에 대해 호기심과 향수와 정열을 느끼는 것이다. - P10

레이의 새로운 작품들에 대한 이 발견은 그가 생전에 출간했던 작품들과 관계가 없으면서도 관계가 있다. 이 발견은 그것을바랐던 이들에게 가치가 있다. 어떤 작가를 사랑하면 그 작가의글을 계속해 읽고 싶어지고, 그 작가가 쓴 모든 글을, 탁월한 것, 뜻밖의 것, 심지어 미완성작까지 읽고 싶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의 가치는 글 전체뿐아니라 표현, 문법, 캐릭터에 대한 인식이나 놀라움, 한 줄 한 줄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과 같은 작은 것들에도 배어 있다.
이 책의 원고들은 서로 다른 때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발견됐다. 첫 발견은 1999년 3월, 레이가 세상을 뜨던 당시 나와 함께살던 워싱턴 주 포트앤젤레스의 리지 하우스에서였다.  - P10

나는 이 책에 실린 글들을 무척 존중하고 사랑한다. 단지 전기적이고 문학적인 가치뿐 아니라, 열정과 명확함 또한 가득 담겨있기 때문이다. [영웅담은 사양합니다]를 처음 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윌리엄 L. 스틸에게 큰 빚을 진 느낌이다. 그는 신문과 정기간행물에서 레이가 그때그때의 감흥으로 쓴 작품들을 모았다. 나는 우리가 발견한 단편소설 세 편을 발표하는 과정에서제이 우드러프가 개인적으로 보여준 상냥함과 협조에 늘 고마워할 것이다. 전부터 이미 돈독했던 우리의 우정은 이 작업을 하는동안 더욱 두터워졌다.
여기 북서부에서는 자연의 하사품을 받기 위해 빗물통을 설치하는 경우가 흔하다. 빗물통은 머리를 감고 식물에 물을 줄 수있는 충분한 연수를 책임져준다. 이 책은 그렇게 하늘에서 곧장떨어진 것을 통에 모아둔 빗물과도 같다. 우리는 언제라도 그 안에 손을 담가 기운을 주고 격려를 해줄 뭔가를, 레이먼드 카버의 삶과 작품에 다시 가까이 가게 해줄 뭔가를 찾을 수 있다.

워싱턴 주 포트앤젤레스 리지 하우스,
2000년 1월
테스 갤러거 - P19

오래전 나는 체호프가 쓴 편지의 한 대목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그와 서신 왕래를 했던 여럿 중 한 명에게 했던 충고로, 대충 이런내용이었다. "친구, 자네는 위대하고 기억에 남을 일을 한 위대한 사람에대해 쓸 필요가 없어." (당시 나는 대학교를 다녔고, 왕자와공작과 왕국의 전복에 대한 희곡들을 읽었다는 걸 감안해주시길. 모험과 그 비슷한기타 등등, 영웅을 그들이 있어야 할 장소에 세우기 위한 과업, 실제 자신의 삶보다도 더 위대해진 영웅들이 나오는 소설들도 읽었다.) 하지만 체호프가 그 편지와 다른 편지들에서 말해야 했던 것들, 그가 쓴 단편들을읽고 난 나는 이전과는 다르게 사물을 보게 되었다.
레이먼드 카버
「소설의 기법 76」 <파리 리뷰>, 1983년 여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발사는 내 몸을 돌려 거울을 마주보게 했다. 그는 내 머리 양옆에 손을 대고 마지막으로 머리의 위치를 잡았다. 그는 나와 머리를 나란히 하고서 같이 거울을 쳐다보았는데, 아직도 양손으로 내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나도 나를 바라보았고, 그도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뭔가 봤다고 해도, 이발사는 아무런 질문도 논평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내 머리카락을 앞뒤로 천천히, 마치 잠시 뭔가 다른 걸 생각하듯 쓸기 시작했다. 연인의 손가락처럼 아주 친근하게, 아주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쓸었다.
그것은 오리건 주 부근, 캘리포니아 주 북쪽에 있는 크레센트시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얼마 후 그곳을 떠났다. 하지만 오늘 난 그곳 크레센트 시를, 거기서 아내와 새 인생을 살아가려고 했던 것을, 그랬는데도 어쩌다가 그날 아침 이발소 의자에 앉아서 그곳을 떠나 뒤돌아보지 않기로 결심했는지를 생각했다. 나는 눈을 감고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 사이로 움직일 때 느껴지던 평온함을, 손가락에 어려 있던 슬픔을, 벌써 다시 자라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 P343

내 거야


낮이 되며 해가 나오자 눈이 녹아 구정물이 됐다. 뒤뜰이 내다보이는 어깨 높이의 작은 유리창을 타고 물줄기들이 흘러내렸다. 자동차들이 바깥에서 진창을 만들며 지나갔다. 바깥도, 안도어두워지고 있었다.
남자가 침실에서 여행가방에 옷을 집어넣고 있는데 여자가 문으로 다가왔다.
당신이 떠난다니 다행이야, 당신 떠난다니 다행이라고! 내 말안 들려?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가방에 자기 물건을 계속 집어넣을 뿐 고개를 들어 보지 않았다.
개자식아! 네가 가서 너무 기쁘다고! 여자가 울기 시작했다. - P347

내 얼굴도 똑바로 못 보는구나, 그렇지? 그러더니 여자는 침대에 놓인 아기 사진을 발견하고 집어들었다.
남자가 여자를 보자 여자는 눈가를 훔치고 남자를 노려보다가 뒤돌아 거실로 다시 나갔다.
그거 가져와
당신 물건이나 챙겨서 나가.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방을 잠그고 코트를 걸치고 침실을 둘러보고는 불을 껐다. 그런 다음 거실로 나갔다. 여자는 좁은 부엌의 문가에 서서 아기를 안고 있었다.
애 이리 줘. 남자가 말했다. - P348

미쳤어?
아니, 하지만 애는 내가 데려갈 거야. 아기 물건 가져갈 사람은 따로 부를 거야.
헛소리 마! 아기는 건드릴 생각도 하지마.
아기가 울기 시작하자 여자가 아기의 머리에서 담요를 걷었다.
그래, 그래. 여자가 아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갔다.
왜 이래! 여자가 말했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애 이리 줘. - P348

꺼져버려!
남자가 다가오자 여자가 뒤로 돌아 아기를 스토브 뒤쪽 구석에서 들어올렸다.
남자가 스토브 위로 손을 뻗어 아기를 꽉 잡았다.
애 놔줘. 남자가 말했다.
저리가 저리 가라고! 여자가 소리쳤다.
아기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둘은 옥신각신하다가 스토브 뒤에 걸려 있던 작은 화분을 떨어뜨렸다.
그때 남자가 여자를 벽에 몰아붙이고, 여자의 손을 풀려고 하면서 아기를 붙잡은 채 체중을 실어 여자의 팔을 밀어냈다.
애 놔주라고. 남자가 말했다. - P349

하지 마. 애 아프잖아!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부엌 유리창으로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그곳에서 남자는 한 손으로는 여자의 주먹 쥔 손가락을 풀려고 애쓰면서 다른 손으로는 울고 있는 아기의 겨드랑이 밑을 받쳐들었다.
여자는 손가락이 강제로 펴지고 아기가 자기에게서 떨어지는걸 느꼈다. 안 돼, 아기를 놓치는 순간 여자가 말했다. 여자는 아기를, 탁자에 놓인 사진 속에서 토실토실한 얼굴로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는 아기를 자기가 데리고 있을 생각이었다. 여자는 아 - P349

기의 다른 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기의 손목을 잡고는 뒤로기댔다.
남자는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아기가 자기 손에서 빠져나가는 걸 느끼고 세게 잡아당겼다. 아주 세게 잡아당겼다.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은 이 문제를 결정지었다. - P35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십 분간 그대로 거기 앉아서, 아버지와 나는 배스들이 깊은 물에서 위로 헤엄쳐 올라와 우리 앞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멍청이는 그냥 서서 손가락을 잡아당기며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연못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계란 모양으로 높은 가장 큰 돌더미가 물과 맞닿은 자리. 아버지가 연못에서 가장 깊은 곳이라던 데가 그대로 들여다보였다. 나는 연못 가장자리를 훑어보았다 버드나무숲, 자작나무들, 저 끝에 있는 등심초화단,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검정새들이 날아오고 날아가며 여름처럼 높은 음조로 지저귀는 것을 이제 해가 우리 등뒤에서 기분좋을 정도로 따스하게 목을 비추었다. 바람은 없었다. 연못 곳곳에서 배스들이 위로 올라와 수면을 건드리거나, 물위로 뛰어올랐다가 옆으로 떨어지거나, 아니면 수면으로 올라와 등지느러미만 검정 부채처럼 물 밖으로 내밀고 유영했다. - P302

그해 2월에 강이 범람했다.
12월 초순 내내 우리가 살던 지역 전역에 눈이 심하게 내렸고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자 날이 매우 추워지더니 땅도 얼어붙고 눈도 녹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았다. 1월 말이 다가오자 차누크바람이 불어왔다. 어느 날 아침에 깨어나보니 집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 지붕에서 물이 졸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닷새간 계속 불었고 사흘째가 되자 강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15피트까지 차올랐어." 어느 날 저녁 아버지가 신문을 보다가 말했다. "홍수위보다 3피트 높아진 거야. 멍청이 녀석 물고기 잃어버리게 생겼군." - P306

습하고 바람이 거센 날이었고, 시커멓고 조각난 구름 덩어리들이 잿빛 하늘을 빠르게 오갔다. 땅은 흠뻑 젖어 있었고 우리는 빽빽한 풀숲에서 물웅덩이와 계속 마주쳤지만 피해갈 수가 없어서 그냥 해치고 갔다. 대니는 그때 막 욕을 배우기 시작한 터라 신발이 물에 잠길 때마다 거칠게 욕설을 잔뜩 내뱉었다. 목초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물이 불어난 강을 볼 수 있었는데, 아직도 수위가 높았고 물이 물길을 벗어나 나무줄기들 주변에서 물결치며 땅을 가장자리에서부터 조금씩 침식하고 있었다. 강가운데에서는 물이 세차고 빠르게 움직였고, 때때로 수면 위로 덤불이나 가지가 튀어나온 나무가 떠갔다. - P307

버트는 이미 재떨이를 집어들고 식탁에서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그는 재털이이 가장자리를 쥐고 있었고, 양 어깨가 움츠러들어 있었다. 마치 원반처럼 재떨이를 던질 태세였다.
"제발" 베라가 말했다. "좀 가주라. 버트, 그 재떨이 우리 거잖아. 제발. 가라고."
버트는 베라에게 인사하고 테라스 문으로 나왔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뭔가는 증명했다고 생각했다. 버트는 그로써 자기가 아직도 그녀를 사랑한다는 걸, 그리고 자기가 질투한다는 확실히 보여줬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와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조만간 그녀와 진지하게 이야기해야 할 것이었다. 정리해야 할 일들이, 논의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아직 있었다. 둘은 다시 대화할 것이었다. 아마도 명절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나면. 버트는 진입로에 떨어져 있는 파이를 빙 둘러서 차에 탔다. 시동을 걸고 후진 기어를 넣었다. 그는 거리로 나왔다. 그러고는 기어를 저단에 놓고 앞으로 나아갔다. - P3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 말이다. 레스, 그때 죽은 느낌이다. 내 일부는 정말로 죽었어. 네 엄마가 날 떠난 건 잘한 거야. 아무렴 그랬어야지. 하지만 래리 웨인을 묻어서는 안 되는 거였어! 내가 죽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레스, 그건 아니야. 까놓고 말하자면 나도 내가 아니라 그 친구가 묻히는 쪽을 택할 거다. 선택을 해야만 한다면 말이야...... 나는 삶이니 죽음이니 하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구나. 한번 죽으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지만 양심에 짐을 지고 살아가는 건 힘이 드는구나, 그러니까 그게 자꾸 생각나고 내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 친구가죽어야 했다는 사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단 말이다. - P121

빌은 자기가 작아지는 게, 여위어지고 무게가 없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귀를 올려붙이는 강한 바람을 마주보는 느낌이 들었다. 빌은 뛰어 달아나고 싶었지만, 뭔가가 자기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형상이 바위의 그림자들과 만나자 그림자들이 그 형상 아래에서, 그것과 함께 움직이는 듯싶었다. 바닥이 기이한 각도로 빛을 받아 뒤틀린 듯했다. 비이성적이게도 빌은 언덕 아래의 자동차 근처에 세워진 자전거 두 대를 떠올리며, - P202

마치 둘 중 한 대를 없애버리면 이 모든 일이 바뀌어, 그가 언덕꼭대기에 올랐을 때 여자가 더이상 나타나지 않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제리가 빌 앞에, 온몸의 뼈가 사라진 듯 축 늘어진채서 있었다. 빌은 둘의 몸,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두 몸이 끔찍할 만큼 가깝게 느껴졌다. 그때 빌의 어깨에 제리의 머리가 내려앉았다. 빌은 손을 들어, 둘 사이를 갈라놓는 거리가 적어도 이 정도 의미는 있다는 듯, 상대를 토닥이고 쓰다듬기 시작했고, 눈에서는 눈물이 솟았다. - P203

뒷문 현관 등불에서 나오는 노란 불빛이 유리창에 어렸다. 그는 두 눈을 뜨고 누워서 바람이 집을 뒤흔드는 소리에 귀기울였다. 다시 내면에서 뭔가가 일어나는 게 느껴졌지만, 이번에는 분노가 아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좀더 누워 있었다. 기다리듯 누워 있었다. 그때 뭔가가 그를 떠나고 다른 뭔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는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고, 단어들과 구절들이 급류처럼 마음에 차올랐다. 그는 천천히 기도했다. 단어를 하나하나 붙여나가며 기도했다. 이번에는 소녀와 히피 남자도 기도에 넣을 수 있었다. 그래, 하고 싶은 대로하게 두자, 밴을 몰고 오만하게 굴고 웃음을 터뜨리고 반지를 끼고, 원한다면 속임수도 쓰라지. 한편, 기도도 필요했다. 두 사람도 기도를 써먹을 수 있을 것이고, 심지어 그의 기도, 아니 특히 그의 기도를 써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모든 이를 위해,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 모두를 위해 다시 기도하며 말했다. "당신뜻에 부합한다면." - P240

과거는 불확실하다. 꼭 어린 시절에 얇은 막을 씌워둔 느낌이다. 나는 내게 일어났던 일이라고 기억하는 일들이 정말로 일어났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부모와 함께 살던 한 여자애가 있었는데ㅡ아버지는 작은 카페를 운영했고 어머니는 거기서 웨이트리스와 계산원으로 일했다꿈결처럼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일이 년 후에 비서양성학교에 들어갔다. 나중에, 한참 뒤에ㅡ그사이의 시간은 어떻게 된 거지? 그 여자는 다른 도시에서 전자부품회사의 접수원으로 일하면서 자기에게 데이트를 신청한어떤 기술자와 가까워지게 된다. 결국 여자는 남자의 목적이 뭔지 알고서, 유혹에 몸을 맡긴다. 당시에는 어떤 직감이 그 유혹을 꿰뚫어보는 통찰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이 뭔지 떠올릴 수 없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결혼하기로 결정했지만, 과거는, 여자의 과거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미래는 여자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P259

우리 아버지는 멍청이가 죽은 후로 오랫동안 아주 예민하고 괴팍하게 굴었다. 나는 어쩐지 그 사건이 아버지 인생에서 평온한 시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라고 느꼈는데, 아버지 건강이나빠지기 시작한 게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다. 첫째는 멍청이 일, 다음은 진주만 사건. 그리고 다음은 웨나치 근방에 있는 할아버지 농장으로 이사한 일이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사과나무 여남은 그루와 소 다섯 마리를 보살피며 마지막 나날을 보냈다.
내게 멍청이의 죽음은 유달리 긴 어린 시절이 끝나고, 내가 준비되었든 그렇지 않든 어른의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ㅡ패배와 죽음이 좀더 자연의 질서에 따라가는 세상으로. - P2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