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관련된 우스꽝스러운 일화에 틴이 더 이상 재미를 느끼지못하게 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엄마는 일찍, 그것도 호상이라 할수 없는 방식으로 죽었다. 죽음에 호상이라는 것이 있겠나 싶지만그래도 정도는 있다고 틴은 생각한다. 퇴근 후 슬픔에 잠겨 두 눈이눈물에 가려진 상태로 무단횡단을 하다가 트럭에 치여 죽는 것은 호상이 아니었다. 다만 신속한 죽음이기는 했다. 엄마의 죽음을 계기로, 쌍둥이는 대학에 진학할 무렵 얼간이와 깡패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실로 선 없는 악은 없다라고 틴은 그 시절 드문드문일기에 적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은 있는 법이다. - P124

월간이들 중 두 명은 감히 엄마의 장례식에도 찾아왔다. 이는 조리가 장례식에 집착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사건일지도 모른다. 조리는 지금도 그 개새끼들을 가만두지 말았어야 했다고, 묘 옆에 나타나 슬픈 척을 하면서 쌍둥이에게 너희 엄마는 정말 멋지고 친절한사람이었다고, 정말 좋은 친구였다고 말하게 내버려 두지 말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친구?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그냥 자기랑놀아날 여자나 원했던 거면서!" 조리는 노발대발했다. 그들에게 따줬어야 했다. 소란을 피웠어야 했다. 주먹으로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줬어야 했다.
틴은 그 남자들이 정말 슬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엄마 메이브를 사랑했을 수도 있다는 게,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를 한가지나 두 가지 혹은 세 가지로 본다면 그렇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 - P124

지 않나? 아모르, 볼룹타스, 카리타스로 즉 사랑, 쾌락, 자선으로 말이다. 하지만 틴은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랬다간 조리의 분노를더 자극할 것이다. 특히 이렇게 라틴어를 써 가면서 말하면 더 그럴것이다. 조리는 라틴어와 관련된 모든 것에 인내심이 없으니까. 라틴어는 조리가 평생 틴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부분 중 하나다. 왜 사람들 기억에서도 잊힌 죽은 언어로 쓰인 그 곰팡내 나는 낙서 쪼가리에 인생을 낭비하는 거야? 너는 정말 영리하고, 정말 재능이 많고, 잘하면...... (뒤이어 틴이 잘하면 될 수도 있었을 많은 것이 길게 나열될 테지만 그중 무엇도 실제로 가능하지는 않다.)그러니 조리를 자극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 P125

최악은 개빈이 승승장구하며 찬사를 받자 다크 레이디 소네트가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졌고 대단하지는 않아도 경력 면에서 상당히의미 있는 상들을 연달아 수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시간이흐름에 따라 개빈의 이 초기 시들은 색다른 결을 가진 후기 시들을통해 변주되었다. 사랑에 빠진 화자는 처음에는 다크 레이디의 단순한 육체성을, 실제로는 추잡함과 변덕스러움을 좇았고, 나중에는 예전만 못해도 여전히 희미한 빛을 발하는 자신의 진정한 사랑의 뒤꽁무니를 다시 좋았다. 하지만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매끄럽기만 하고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데다 나중엔 책으로 출간되기까지한 화자의 호소를 진정한 사랑은 차가운 눈길로 일축했다. - P138

복수심에 사로잡힌 조리는 길거리의 도랑과 주차장을 훑고 돌아다니면서 마치 눈에 보이는 데이지 꽃을 죄다 꺾어 버리듯 성욕 강한 아무 남자하고 관계를 맺었다가 그들을 아무렇게나 버렸다. 그런행동이 조리를 함부로 내팽개친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틴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사람은 내가 그 사람을 붙잡기 위해 무슨 짓을 하며 망가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머리 없는 염소와 떡을 친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계절의 수레바퀴가 돌아갔고, 매일의 새벽이 362차례 분홍빛 아침을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진 후 또다시 362번의 아침을,
그리고 또다시 362번의 아침을 어루만졌다. 욕망의 달은 차올랐다이지러졌다 다시 차오르기를 반복했고, 그러는 사이 정욕의 화신 같은 시인은 점점 희미하고 까마득한 먼 곳으로 사라져 갔다. 아니, 그러기를 틴은 바랐다. 조리를 위해서.
하지만 정욕의 시인은 사라지지 않은 듯하다. 당장 죽어서 다시 사람들의 조명을 받는 것, 그게 너 같은 자식이 해야 할 일이야. 틴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개빈 퍼트넘의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가. 실제로 사라지지 않는다면, 무해하기를 바라고 있다. - P139

틴이 조리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기려 한다. 조리가 버럭 화를 내면서 이 노작가의 정강이를 걷어찰 수도,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소리를 지르기 시작할 수도 있을 법한 상황이다. 조리를 여기에서 빼내야 한다. 집에 가서 독한 술을 한 잔씩 하면서 조리를 진정시키고나면 이 모든 상황을 빈정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리는 틴의 팔을 놓더니 움직이지 않는다.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다.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모든 게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제 삶 전체가요." 우는 건가? 그렇다.
청동색과 금색으로 반짝반짝하며 흐르는 진짜 눈물이다.
"나도 고통스러웠어요." 콘스턴스가 말한다.
"알아요." 조리가 말한다. 두 사람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정신적 교감 속에 갇힌 채 서로의 눈을 응시하고 있다.
"우리는 두 가지 장소에 살고 있어요. 알핀랜드에는 과거가 없어 - P161

요 시간 자체가 없죠. 하지만 여기에는 시간이 있어요. 지금 우리가존재하는 시간이요 우리에게는 아직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어요.
"맞아요. 때가 온 거죠 저도 미안해요. 저도 당신을 놓아줄게요."
조리가 콘스턴스에게 다가간다. 포옹하려는 건가? 틴이 생각한다. 서로를 껴안을까, 아니면 바닥에 쓰러뜨릴까? 이게 일촉즉발의 순간인가? 어떻게 도와야 하지? 대체 지금 여자들끼리 어떤 이상한 짓을벌이고 있는 거지?
틴은 바보가 된 기분을 느낀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조리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가? 조리에게 다른 면면이, 다른힘이 있는 건가? 틴으로서는 절대 상상하지도 못한 차원이?
콘스턴스가 뒤로 물러선다. 그러고는 조리에게 "축복을 빌게요." 라고 말한다. 흰 양피지 같았던 피부가 이제 황금 비늘이 발하는 빛으로 반짝인다.
젊은 너비나는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을 차마 믿지 못하고 있다. 입은 반쯤 벌린 채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숨죽이고 있다. 우리를 호박 결정으로 만들려는 생각이로군. 틴은 생각한다. 고대 곤충들처럼.
우리를 영원히 보존하려는 것이다. 호박 구슬 속에, 호박 단어 속에.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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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삶에 의해 보이는 삶이다. 나는 의미를 지니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건 맥동하는 혈관이 의미를 지니지못하는 것과 같다.


나는 배우는 사람처럼 당신에게 글을 쓰고 싶다. 나는매 순간을 사진에 담는다. 음영을 넣은 그림을 그리듯 단어들에 깊이를 준다. 나는 왜냐고 묻고 싶지 않다. 당신은 언제든 왜냐고 물을 수 있지만 늘 답을 듣지 못할것이다 -대답 없는 질문에 따르는 기대감에 찬 침묵,
내가 거기에 굴복할 수도 있을까? 비록 그 어느 장소 혹은 시간 속에 나를 위한 해답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기는 하지만. - P19

내가 당신에게 쓰는 글은 편안하지 않다. 나는 확신을 전하지 않는다. 대신 나 자신을 금속화한다. 나는 당신에게든 내게든 편안하지 않다. 내 말들은 그날의 공간속으로 터져나간다. 당신이 나에 대해 알게 될 것은 그림자, 과녁에 명중한 화살의 그림자다. 화살은 내게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나는 아무런 공간도 차지하지 않는 그림자를 헛되이 움켜쥔 것이다. 나는 나 자신과 당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무언가를 만들 것이다 -이것은 죽음에 이르는 나의 자유다. - P23

누구든 나와 함께할 사람은 함께해 주기를: 이 여정은 길고 험난하지만, 사는 것이다. 지금 나는 당신에게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말을 가지고 장난하지 않는다. 나는 말들 너머에 뒤엉켜 있는 관능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문구들 속에서 나 자신을 구현한다. 문구들이 조용히 노크하면 거기서 침묵이 뿌옇게 솟아난다. - P31

따라서 글쓰기는 말을 미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말은 말이 아닌 것을 낚는다. 행간에 있는 말 아닌 것이 미끼를 물면 글이 쓰인 것이다. 행간에 있는 것이 잡히고 나면 안심하고 말을 내버릴 수 있다. 바로 여기가 비유가 끝나는 곳이다: 말이 아닌 것, 미끼를 물기, 말에 통합되기. 그러니 당신을 구원하는 건 넋을 놓은 글쓰기다. - P31

나는 내가 무엇을 쓰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나 자신에게 모호한 존재다. 나는 처음엔 달빛의 선명한 시야를 가졌었고, 그래서 하나의 순간이 죽은 뒤 영원히 죽은 상태로 접어들기 전에 나 자신을 위해 그 순간을 뽑아낼 수 있었다. 내가 당신에게 전하고 있는 건 관념들을 담은 메시지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 속에 숨겨져 있었던, 그간 내가 예견해 왔던 직관적인 황홀경이다. 또한 이것은 향연이기도 하다. 말들의 향연. 나는 목소리보다는 몸짓에 가까운 신호들로 글을 쓴다. 사물들의 내밀한 본질로 파고드는 것, 이 모든 건 그림을 그리면서 익숙해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자신을 새로 만들기 위해 그림 그리는 걸 그만둘 때가 되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자신을 새로 만든다. 내겐 목소리가 있다. 그림의선線 속으로 뛰어들 때와 마찬가지로, 이 글쓰기 역시 내게는 계획 없는 삶이 펼치는 활동에 속한다.  - P35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이렇게 실재하고 또기필코 사라져 버릴 순간에 자그맣고 틀에 갇힌 내 자유가 나를 세상의 자유에 연결시킨다직각으로 짜인틀에 담긴 인상, 그게 아니라면 창문이란 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거칠게 살아 있다. 죽음이 말한다. 자신은 떠난다고. 나를 데려간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나는죽음과 함께 가야 하기에 헐떡거리며 몸서리친다. 나는 죽음이다. 죽음은 내 존재 안에 자리 잡는다 - 당신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죽음은 관능적이다. 나는 죽은 사람처럼 키 큰 풀들을 헤치며 푸르스름한 풀빛 속을 걷는다: 나는 금으로 빚어진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이며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건 수북이 쌓인 뼈들뿐이다. 나는 느낌들로 이루어진 지층 맨 밑바닥에 살고있다: 나는 가까스로 살아 있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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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엔 몹시도 심원한 행복이 있다. 할렐루야가 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나는 이별의 고통이 담긴 처절한인간의 울부짖음과 합쳐진 악마의 환호를, 할렐루야를 외친다. 이제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으니까. 나는 아직 이성을 잃지 않았지만 -이성의 광기라고 할 수 있는 수학을 배웠으므로 -그러나 지금 나는 혈장을 원하고 -태반의 혈장을 그대로 먹고 싶다. 나는 조금 두렵다: 다음 순간은 미지의 것이기에 나를 완전히 맡기기가 두렵다. 다음 순간을, 그걸 만드는 건 나일까? 아니면 그것 자신일까?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통해 함께 그것을 만든다. 투우장에 선 투우사의 솜씨로. - P11

이 말을 해야겠다. 나는 이 ‘지금ㅡ 순간‘의 사차원을 포착하려 하지만, 찰나에 불과한 이 순간은 이미 지나가버렸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새로운 지금-순간이되었으며, 그것 또한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의 순간 속에 있다. 나는 이 ‘있음‘을 붙잡고 싶다. 그 순간들은 내가 호흡하는 공기 속을 지나다닌다. 그것들은 폭죽이 되어 공중에서 아무런 소리 없이 폭발한다. 나는 시간의 원자들을 갖고 싶다. 그리고현재를 붙잡는 일은 그 순간의 본질적인 특성상 금지돼 있다. 현재는 스르르 사라져 버리며, 모든 순간이 그 - P11

와 같다. 이 순간 나는 영원한 지금 속에 있다. 오직 사랑의 행위 - 그 맑은 별과 같은 느낌의 추상화- 만이 그 미지의 순간을, 허공 속에서 진동하는 수정처럼 단단한 그 순간을 붙잡으니, 삶은 이 말할 수 없는 순간이다. 사건 그 자체보다 큰 순간: 사랑하는 동안에는 그순간의 보석이, 보편하는 보석이 허공에서 빛난다. 몸의 기이한 영광, 순간들의 떨림 속에서 느낌으로 승화하는 물질-그리고 그 느낌은 형태가 없는 동시에 너무도 객관적이어서 마치 당신의 몸 바깥에서 생겨나는듯하다. 황홀경 속에서 반짝이는 것, 기쁨, 기쁨은 시간의 성분이고 순간의 본질이다. 그리고 순간 속에 순간의 있음이 있다. 나의 있음을 붙잡고 싶다. 나는 새처럼허공에 대고 할렐루야를 노래한다. 그리고 내 노래는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열정이없이는 할렐루야가 사랑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
- P12

나는 내 모든 걸 바쳐 당신에게 글을 쓰고 있으며, 나는존재의 맛을 느끼고, ‘당신의 맛‘은 순간처럼 추상적이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도 온몸을 바쳐 형태가 없는 것을 캔버스에 옮긴다. 나는 온몸으로 자신과 씨름한다.
당신은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들을 뿐, 그러니당신의 온몸으로 나를 들어라. 너무 거칠고 무질서한내 글을 본 당신은 내게 왜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하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 내가 말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쓰는 것은 나에게 있어 새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껏진실한 말에 가닿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나의 사차원이다. - P13

내가 당신에게 글을 써야만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당신이내 그림에서 명확성 대신에 두서없는 말들을 수확해가기 때문이다. 지금 쓰고 있는 구절들이 조잡하다는건 나도 안다. 나는 너무도 큰 애정을 갖고 글을 쓰는중이고, 그 애정이 글의 결함들을 상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애정은 작품에 좋지 않다. 이것은 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남들이 쓰는 방식으로 쓰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건 어떤 단일한 클라이맥스일까? 내 삶은 단일한 클라이맥스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다. - P15

하지만 나는 온몸으로 당신에게 글을 쓴다. 말의 여린 신경에 가 박힐 화살을 쏜다. 나의 은밀한 몸이 당신에게 말한다: 공룡, 어룡, 사경룡. 그저 소리라는 의미밖에 지니지 않은 이 말들은지푸라기처럼 마르지 않고 축축해진다. 나는 관념들을 그리지 않고 도달할 수 없는 ‘영원‘을 그린다. 아니면, ‘무‘, 영원이나 무나 결국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림 그리기를 그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에게 단단한 글쓰기를 쓴다. 나는 말을 손에 쥐고 싶다.
말은 하나의 물체일까? 나는 순간들로부터 주어진 열매의 즙을 짜낸다. 삶의 핵심에, 삶의 씨앗에 다다르려면 나 자신을 소거해야만 한다. 순간은 살아 있는 씨앗이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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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는 사제가 쌀알 한 움큼을 흩뿌리고 있기라도 하듯, 차디찬 빗방울이 체에 거른 가루처럼 후드득 떨어진다. 빗방울이 닿은 곳마다 표면이 오돌토돌한 얼음 알갱이가 맺힌다. 가로등 아래서 바라보면 아름답기 그지없다. 은빛 요정 같네. 콘스턴스는 생각한다. 그러고 나면 이런 생각이 뒤따른다. 자신은 너무 쉽게 매혹당하는 사람이라는 생각. 아름다움은 일종의 환상이다. 또한 일종의 경고다. 아름다움도 독나비처럼 어두운 이면을 간직하고 있는 터다. 그러니 텔레비전 뉴스에서 이번 얼음 폭풍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겪게 될 것이고 또 이미 겪고 있다고 하는 위협과 위험과 비탄에 대해 생각해야만 한다.
이완이 하키와 축구 경기를 보겠다고 산 텔레비전은 평면 고해상도 화면을 탑재하고 있다. 콘스턴스는 수상한 오렌지빛을 발하는 사 - P9

람들이 잔물결처럼 일렁였다가 어슴푸레 옅어지기 일쑤였던 옛날의 호리호리한 화면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고해상도 화면으로 보면 더 별로인 것들도 있지 않은가. 모공, 주름, 코털, 그리고 바로 두 눈 앞으로 덮쳐드는 비현실적으로 새하얀 치아, 현실 속 자기 모습을 도무지 무시할 수 없게 하는 그런 것들을 보면 콘스턴스의 마음에는 불쾌감이 인다. 마치 본의 아니게 타인의 욕실에서 오목한 확대 거울 역할을, 좀처럼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 그런 거울 역할을 수행하는 느낌이다. - P10

콘스턴스는 텔레비전을 끈다. 방을 가로질러 램프 조도를 낮춘 다음 현관 전면으로 난 유리창 옆에 앉아 가로등이 불을 밝힌 어둠을내다보면서 나뭇가지와 지붕과 전봇대가 찬란하게 반짝이는 광경을, 바깥세상이 다이아몬드 결정으로 변하는 광경을 지켜본다.
"알핀랜드"콘스턴스가 소리 내어 말한다.
"소금이 필요할 거야." 이완이 콘스턴스의 귀에 대고 말한다. 처음 이완이 그런 식으로 말을 걸었을 때 콘스턴스는 화들짝 놀란 것은 물론이고 공포심마저 느꼈다. 이완이 만질 수 있고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게 된 지 적어도 나흘은 지난 지금은 그의 존재에 한결 편안해진 상태이지만, 예측 불가능한 것은 여전하다. 이완과 어떤 방식으로든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품을 수 없을지라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이완의 참견은 보통 일방적이다. 콘스턴스가 대답을 해도 이완은 보통 대꾸하지 않는다. 하지만 둘 사이의 대화는 거의 늘 그런 식이었다. - P12

현재 알핀랜드는 콘스턴스의 컴퓨터상에 살아 있다. 알핀랜드는여러 해에 걸쳐 다락방에서 꽃피었다. 그 다락방은 콘스턴스가 알핀랜드를 통해 방 개조에 필요한 돈을 충분히 벌어들이자마자 스스로를 위한 일종의 작업실로 탈바꿈시킨 공간이었다. 하지만 바닥을 새로 깔고 창문도 새로 내고 에어컨과 천장형 선풍기를 설치해도 다락방은 옛 빅토리아 시대 벽돌집의 꼭대기 층처럼 비좁고 숨 막혔다.
그래서 얼마 후, 아들들이 고등학생이었던 시절에 알핀랜드는 부엌식탁으로 이주했고, 한때는 혁신의 주봉(主峯)이었으나 이제는 한물간 전동 타자기 위에서 수년간 문장으로 펼쳐졌다. 알핀랜드의 다음이주지는 컴퓨터였는데, 위험 요소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컴퓨터에담긴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 분노가 솟구치는 경험을 하게 될 수도있었다. 하지만 컴퓨터는 점점 발전했고 콘스턴스도 이제는 능숙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이완이 더 이상 눈에 보이는 형태로 존재하지않게 된 이후, 콘스턴스는 컴퓨터를 이완의 서재로 옮겼다. - P27

집중해야 할 때다.
콘스턴스는 서재로 가서 이완의 의자에 앉아 컴퓨터의 검은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이완은 틀림없이 알핀랜드를 구하고 싶었을것이다. 그는 알핀랜드가 전기 자극에 타 버리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콘스턴스에게 컴퓨터를 꺼 두라고 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알핀랜드는 이완의 영역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알핀랜드의 유명세에 속으로 질색했다. 알핀랜드 자체가 바보 같은 짓거리라고 생각했고, 알핀랜드의 지적인 경박함에 모욕감을 느꼈다. 콘스턴스가 알핀랜드에 흠뻑 빠져 있게 하면서도 거기에 깊게 몰두하는 모습을 보면 분개했다. 게다가 이완은 알핀랜드에서, 콘스턴스의 사적인 세계에서 배제되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빗장이 이완을 막고 있다. 늘 그랬다. 콘스턴스와 이완이 만난 순간부터. 이완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 P54

아니, 들어갈 수도 있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마법에 걸린재가 소임을 다하고 고대의 주문이 깨어졌으니 알핀랜드를 다스리는 규칙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난밤 개빈이 펑하고 오크통 뚜껑을 열어 콘스턴스의 집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이유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개빈이 알핀랜드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당연히 이완은 알핀랜드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혹은 금지된 것의 마력에 이끌려 알핀랜드로 끌려 들어갈 수 있었던건지도 모른다.
이완이 사라진 곳은 분명 그곳일 것이다. 이완은 망대가 설치된 석벽을 통과해 지금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완은 구불구불하고 어둑한 길을 따라 걷고, 달빛이 비치는 다리를 건너고, 고요하고 위험한숲으로 들어서고 있다. 머잖아 그늘진 교차로에 다다를 텐데, 그러면 어느 방향으로 향할까? 이완은 답을 내리지 못할 것이다. 거기서길을 잃을 것이다.
이완은 이미 길을 잃었다. 이완은 알핀랜드의 이방인이고, 알핀랜드에 도사리는 위험을 모른다. 룬 주문도 모르고, 무기도 없다. 동맹도 없다.
아니면 콘스턴스가 유일한 동맹일 수도, "날 기다려, 이완, 거기서 기다려!" 콘스턴스는 알핀랜드로 들어가 이완을 찾을 것이다. - P55

레이놀즈는 두 서재를 신전처럼, 그리고 개빈을 자신의 우상처럼 돌본다. 개빈이 쓰는 모든 연필을 날카롭게 깎아 두고, 모든 핸드폰전화를 차단하고, 개빈을 서재에 가둬 둔다. 그러고는 개빈이 생명유지 장치를 부착하고 있는 상황인 양 서재 밖에서 발끝으로 살금살글 걸어 다니고, 그러면 개빈은 한 자도 쓰지 못한다. 지푸라기를 엮어서 금을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서재라는 그 영묘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요즘 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와 가장 닮은 악랄한 난쟁이 룸펜슈틸츠킨이,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굼뜬 룸펠슈틸츠킨이 그 서재에는 절대 나타나지 터다. 그렇게 있다 보면 점심시간이 찾아온다. 레이놀즈는 식탁 맞은편에서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며 개빈에게묻는다. "뭐 새로운 소식 있어?" 레이놀즈는 자신이 개빈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그가 자신만의 시적 정수와 교감하게 해 주고, ‘창의적인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하는 방식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개빈은 자기가 비쩍 곯아 뼈만 남은 상태라고 말할 용기가 없다. - P77

조리가 무덤 위에서 혼자 탭 댄스를 추지 않는 이유는 뭐든 혼자하기 싫어해서다. 조리가 여자만 한가득한 침울한 장례식장에 같이가 달라고 계속 조르면, 틴은 겉으로는 우울한 척하지만 속으로는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자축하는 늙은이들 틈에서 지루해죽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다고 빵 테두리를 잘라 낸 샌드위치를 잇몸으로 물어뜯으며 말하면서도 조리의 뜻대로 해 준다. 생의 마지막 통과의례에 대한 조리의 관심이 다소 지나치고 심지어는병적이라고 틴은 생각하며 조리에게 그 생각을 털어놓고는 했다.
"존경을 표하는 것일 뿐이야."라고 조리가 대꾸하면 틴은 코웃음을 친다. 농담하기는 두 사람 모두 겉치레를 해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존경을 중요한 가치로 삼은 적이 없었다.
"그냥 그거 보는 게 고소해서 그러는 거잖아." 틴이 응수한다. 조리는 틴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기 때문에 코웃음만 친다.
"우리 좀 가식적인가?" 조리는 틴에게 그런 질문을 하기도 했다.
유머 감각이 뛰어난 것과 가식적인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 P112

조리와 틴은 쌍둥이이므로 서로 함께일 때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 다른 사람과는 그 어떤 노력을 해도 잘 되지 않은 일이다. 속마음을 숨기고 가식적으로 굴어도 외부 사람만 속인다. 서로 앞에서는 구피처럼 투명하며, 서로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있다. 적어도 두 사람은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틴이 한때 수족관을 가진 애인을 만난 덕에 잘 알듯이 구피의 몸에도 불투명한 부분이 있다.
심홍색 테 돋보기안경을 쓰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아니 보톡스를맞은 것을 감안한다면 최대한 찌푸릴 수 있는 만큼 얼굴을 찌푸리면서 부고란을 보고 있는 조리를 틴은 사랑스러운 눈길로 응시한다. 최근 들어, 그러니까 근 수십 년 사이에 조리의 눈은 과로한 사람처럼 앞으로 조금 튀어나왔다. 모발 상태도 좋지 않다. 그래도 틴은 조리가 모발을 시꺼먼 색으로 염색하는 것을 관두게 하는 데 결국 성공했다. 짙은 색의 파운데이션을 칠하고 반짝이는 청동색 미네랄 파우더를 아무리 성실히 발라도 생기가 없는 지금 피부색에 맞지 않게 모발이 너무 ‘죽지 않은‘ 상태라 자기를 기만하는 딱하고 불쌍한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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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게이하트가 죽고 25년이 흐른 어느 겨울 오후, 해버퍼드의 선량한 주민들은 또 다른 장례식을 위해 묘지에 모였다. 수술을 받기 위해 시카고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던 게이하트씨의 시신이 고향으로 보내진 것이다. 장례식이 열리는 시간치고는 이례적인 오후 4시였으나 기차 도착 시각에 맞춰 정한 일정이었다. 급행열차로 실려 온 관은 영구차로 옮겨져(이때는 현대, 1927년이었다) 루터 교회로 운반되었고 짧게 추도식을 치른 뒤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렇게 큰 장례식이 열린 적이 언제였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게이하트 영감님으로 통한 그는친구가 많았다. 5년 전 폴린이 죽고 난 뒤에도 재단사네 딸 - P211

중 한 명을 가정부로 부리며 줄곧 같은 집에 살았다. 변함없이 시계방을 운영하며 클라리넷 연주도 조금씩 계속했지만, 숨이 달린다며 불평했다. 여름날의 일요일이면 이따금 오래된 사과나무밭으로 나가 연습했다. 사과나무밭은 베어내지않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길고 훌륭한 삶이었다고, 사람들은 걷거나 천천히 차를 몰고 묘지로 가는 길에 생각했다. 해버퍼드에 있는 시계 중에 그의 손을 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분명 손이 느리기는 했으나 솜씨 좋은 장인이었다. 오랜 손님들은 간밤에 시계태엽을 감다가 괜스레 망연해졌다. 째깍째깍, 그의 손안에 있던 작은 것은 전과 마찬가지로 똑똑하게 시간을 재고 있는데 게이하트 영감님은 시간의 흐름에서 완전히 튕겨 나간 것이다. - P212

지루하고 공허한 삶을 산 수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해리고든 역시 열정적으로 전시 사업에, 흔히 하는 말처럼 ‘자신을내던졌다. 적십자, 식량 보존 사업 등을 벌였고 종국에는 자금 조달을 도왔던 야전병원에 가서 직접 일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8개월을 보내는 동안 아내가 은행장으로 대행하며 남편의 사업 전반을 관리했다. 그때가 고든 부인의 인생 중 가장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사업가의 성정을 타고난 여자였다.
고든에게 외국에서 보낸 시간은 굉장히 의미 깊었다. 사람들은 돌아온 그에게서 모종의 변화를 느꼈다. 게이하트 영감님과 맺은 우정은 더 긴밀하고 따뜻해졌다. 실로 부자 같은사이였다. 가정에서 맡은 역할도 한층 능숙하게 해냈다. 부부는 전보다 잘 어울렸다. 함께 외출하고 손님을 초대해 저녁을먹었다. 매끈한 바닥과 수많은 화장실이 있는 저택의 분위기는 전처럼 냉랭하지 않았다. - P216

그는 우체국에서 처음 루시를 보고 자기 마음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루시는 지저분한 남자들이득실거리고 사위로 담배 연기가 자욱한 곳에서 천천히 아버지의 사서함 자물쇠 비밀번호를 맞추고 있었다. 문 너머로 보이는 루시의 몸이 그리는 곡선에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너무나도 작고, 너무나도 섬세하고, 너무나도 가만했다. 해리는안으로 들어가 루시를 마주하는 대신 번개처럼 뒤돌아 부리나케 떠났다. 하지만 한 손을 들고 서 있는 옆모습을 한 번흘긋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후로 매일 거리에 나설 때마다 저 멀리 지나가는 루시를바라보고 그 옆을 지나쳐야 했다. 루시의 우아함은 걱정 없고 명랑하던 시절보다 내향적인 지금 더욱더 돋보였다.  - P220

해리가 즐거움 없는 결혼 생활을 시작한 후로 1년이 흘렀고 (실로 모든 종류의 즐거움이 박탈된 결혼이라 아내는 아이도 낳지 못했기에) 마음 한쪽에 항상 루시와 함께 산다면 누렸을 삶에 관한 궁금증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루시가 한순간의 변덕 때문에, 한 조각의 간지러운 감상주의 때문에 망쳐버린 것이다. 그러니 고통받으라. 하느님은 아시거니와 자신은 고통받았으니까!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루시를 두고 길모퉁이를 벗어날 때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루시를 벌주겠다는 결심과 앙심 저변의 깊은 곳, 너무나도 깊어서 들여다볼 수도 없는 곳에는 모순적인 확신이있었다. 두 사람 모두 충분히 벌받고 나면 무슨 일이든 일어나리라는 확신이었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몰랐다. 어쩌면그가 보장된 미래를 다 내던지고 이 마을을 떠나게 될지도몰랐는데, 어쨌든 그와 루시 게이하트는 다시 함께하게 될 터였다. - P222

그렇다. 그는 오래도록 마음 끓였다. 그는 강했으나 고통도그만큼 강했다. 다행스럽게도 세기가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가 보급되었다. 그는 카운티 최초의 자동차 소유주가 되었고, 더 좋은 차가 나올 때마다 사고 또 샀다. 그는 가진 땅이 많았기에 도로에 살다시피 하며 여기저기로 다녔다.
주말에는 ‘악마처럼 사납게 차를 몰아 덴버에 다녀올 때가많았다. 운전하며 머릿속 생각을 중얼거리는 습관이 생겼다.
사실상 자동차 엔진에 대고 말하는 셈이었다. 한번은 아내가 동석했는데 깜빡 잊어버리고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래, 종신형을 받은 셈이지." - P226

과거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루시는 몇 시간, 기껏해야 몇주 고통받았다. 하지만 자신은 영원히 고통받아야 했다. 그는루시가 어째서 플랫강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알았다.
고통과 분노가 루시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았으니까. 열정과 맹렬함, 앞뒤 살피지 않고 하나의 충동에 자신의 온 존재를 오롯이 불태우는 성정, 바로 그것이 그가 루시에게서 발견한 경이였다. 루시는 감정의 불씨가 붙으면 불화살이 되어끝까지 날아가는 사람이었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세월이 흐르자 그는 마음속 어둠에 익숙해졌다. 다리를 잃은 사람이 의족을 달고 살아가는 삶에 익숙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돈을 어마어마하게 벌었고, 땅을 어마어마하게 사들였다. 부동산 가치가 떨어지는 중이었기에 실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주의를 돌려야만 했던 시절에 분주하게 지낼 수있었다. 게이하트 씨와 다진 우정은 위로가 되었다. 일종의 응보였다. 체스판 앞에서 보내는 저녁은 그의 일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게이하트 영감의 시계방이 마을의 그 어느 장소보다 애틋해졌다. 그들은 절대 루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루시가 앉아서 연습하던 피아노는 한구석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 P227

사소한 것, 실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그토록 행복해할 수있다니! 그는 그런 성정이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런축복을 누리지 못했다.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해도 외면했을터였다. 하지만 잠시 루시를 통해 엿보는 것, 한순간 귀 옆으로 느껴보는 것은 좋았다. 가만히 서서 동이 트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새가 날아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그의 옆에서느껴지는 기대감에 저릿저릿했다. 사냥복과 단단한 근육 위로 거센 봄 소나기가 퍼붓는 듯했다. 몸이 경이롭도록 자유로이 가벼워졌고, 핏속을 질주하는 불꽃에 이를 악물게 되었다. - P229

집을 나서자 겨울 한낮의 강렬한 햇살이 마지막으로 저 밑의 마을에 내리쬐고 있었고 무성한 나무 꼭대기와 교회 첨탑이 황동처럼 빛났다. 이제 해버퍼드를 떠나는 일은 없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곳을 영영 떠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겪었다. ‘고향‘이 무엇이겠나, 결국 실망을 겪고 참아내는 법을 배우는 곳 아니겠나? 게이하트 가족이 살던 집을 떠나는길, 그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로 잠시 보도에 멈춰 서서 지금껏 수천 번은 족히 그랬던 것처럼 세 개의 가벼운 발자국을바라보았다. 달아나려는 발자국을.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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