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을 읽을 때도 그랬는데 [푸른 들판을 걷다]의 첫 단편부터 쉽지 않다. 토 나올 것 같고 한편으론 먹먹하다. 부모는 대체 뭔가! 부모가 권력인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다니! 욕정을 배출하다니!
아이들의 생애 전체를 망쳐버렸다. 오래 전의 글들이지만 지금이라고 다를 것 같지는 않다. 그 생각때문에 메슥거린다.

햇살이 화장대 발치에 닿을 때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행 가방을 다시 들여다본다. 뉴욕은 날씨가 덥지만 겨울이 되면 추워질지도 모른다. 오전 내내 밴텀 닭들이 울었다. 그 소리가 그립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은 옷을 입고, 씻고, 구두를 닦아야 한다. 바깥은 들판에 이슬이 내려서 종이처럼 하얗고 텅비어 있다. 곧 태양이 이슬을 태워버릴 것이다. 건초를 말리기좋은 날이다.
당신 어머니는 자기 방에서 물건을 이리저리 옮기고 문을열었다 닫았다 한다. 당신이 떠나면 어머니는 어떨까. 상관없다는 마음도 든다. - P11

당신은 아침 식사에 쓴 접시들을 건조대로 치운다. 어머니에게 할 말이 없다. 입을 열면 엉뚱한 말이 나올 텐데, 그런 식으로 끝내고 싶지 않다. 당신은 위층으로 올라가지만 방으로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당신은 층계참에 서 있다. 부엌에서 두사람이 뭐라 말하지만 무슨 소리인지 들리지 않는다. 참새가창틀에 휙 내려와 앉더니 유리에 비친 자신을 쫀다. 부리가 유리에 부딪친다. 당신은 참새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고, 새는 곧 날아간다. - P15

큰언니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좋은 기숙학교에 들어가서 교사가 되었다. 유진은 공부를 잘했지만 열네 살이 되자 아버지가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농사일을 시켰다. 사진을 보면 장남과 장녀는 옷을 잘 차려입었다. 새틴 리본, 짧은 바지, 두 눈속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태양, 자연의 흐름에 따라 아이들이줄줄이 태어나는 대로 먹이고 입히고 기숙학교에 보냈다. 가끔 공휴일과 주말이 이어지면 집으로 돌아왔다. 선물과 낙관주의를 안고 오지만 낙관주의는 금방 시들었다. 언니와 오빠들은 모든 것을, 여기서 살던 추억을 떠올리다가도 아버지의그림자가 바닥을 가로지르면 뻣뻣하게 굳었다. 언니 오빠들은집을 다시 떠나면 치유받는 것 같았고, 빨리 가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 P16

당신이 기숙학교에 들어갈 차례는 결코 오지 않았다. 그때쯤 되자 아버지는 딸을 가르쳐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신은 어차피 떠날 사람이므로 가르쳐봐야 다른 남자가득을 볼 뿐이다. 하지만 집에서 통학하는 학교에 보내면 집안일과 농사일을 거들게 할 수 있다. 아버지는 방을 옮겼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생일날 섹스를 해주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 P16

방에 들어가서 거기서 했다. 오래 걸리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않았지만 당신은 알았다. 그러다가 그 역시 멈추었고 대신 당신이 아버지의 방에 들여보내졌다. 한 달에 한 번 정도였고, 늘유진이 집을 비운 사이였다.
당신도 맨 처음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갔다. 잠옷을 입고 층계참을 가로질러 가서 아버지의 팔을 베고 누웠다. 아버지는당신과 장난을 치고, 칭찬하고, 머리가 좋다고, 제일 똑똑하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끔찍한 손이 옷 속으로 들어와 잠옷을 끌어 올렸고, 우유를 짜면서 튼튼해진 손가락이 당신을 찾았다. - P17

미친 손은 신음이 나올 때까지 그 자신을 만졌고 그런 다음 그는 당신에게 옆에 놓인 천을 달라고, 이제 가고 싶으면 가봐도된다고 했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키스를 해야 했는데, 수염 그루터기가 까끌까끌하고 숨결에서 담배 냄새가 났다. 가끔 그는 당신에게도 담배를 한 개비 주었고 당신은 그의 옆에 누워서 담배를 피우며 다른 사람인 척할 수 있었다. 끝나고 나면 당신은 욕실로 가서 아무 일도 아니라고 혼자 되뇌고 물이 뜨거우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씻었다.
이제 당신은 층계참에 서서 행복을, 좋은 날을, 즐거운 저녁을, 친절한 말을 기억해 내려 애쓴다. 작별을 어렵게 만들 행복한 기억을 찾아야 할 것 같지만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 - P17

대신 키우던 세터가 새끼를 여러 마리 낳았을 때가 기억난다.
어머니가 당신을 그의 방에 들여보내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헛간에서 어머니가 반으로 자른 나무통 위로 몸을 숙이고 자루를 물속에 넣었고, 결국 낑낑거리는 소리가 멈추고 자루가 고요해졌다. 강아지들을 물에 빠뜨려 죽인 날,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당신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 P18

 마침내 게이트에 도착하니 거의 아무도 없지만 당신은 여기가 맞다는 걸 안다. 당신은 또 다른 문을 찾다가 여자의 신체 일부를 알아본다. 문을 밀자 열린다. 당신은 환한 개수대와 거울을 지나친다. 누군가가 괜찮냐고 묻지만 ㅡ정말 바보같은 질문이다―당신은 또 다른 문을 열었다가 닫을 때까지, 칸막이에 안전하게 들어가 문을 잠글 때까지 울지 않는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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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아침, 내가 산책하러 나갔을 때 언덕 아래 근처 진입로 가장자리로 연노란색 민들레가 자라고 있는 것이보였다.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허리를 숙여 그 부드러운 머리 윗부분을 만져보았다. 그리고생각했다. 오 세상에! 그뒤로 산책길에 민들레가 점점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민들레는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긴 흙길의 가장자리에도 자랐는데, 어느 날, 내가 정말로 어렸을때, 나는 어머니에게 주려고 민들레를 꺾어 작은 꽃다발을만들었다. 어머니는 새로 만들어준 원피스의 위쪽에 얼룩이생겼다며 내게 몹시 화를 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민들레-그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내 가슴을 경이로움으로 열어주었다. - P100

나는 조수의 변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 물이 언제 들고 언제 나는지 이해했고, 그것에서 위로를 받았다. 나는 밀물이들 때 소용돌이치는 파도를 지켜보았는데, 파도는 하얗게 소용돌이치며 우리 아래로 검어진 바위에 철썩철썩 부딪혔다. 또한 우리 앞에 있는 두 개의 섬에도 부딪혔다. 나는 그 장면을 바다가 거의 잠시 평평해 보이는 날에 지켜보았고, 물이 젖은 바위와 구릿빛으로 노르스름한 해초만 남기고 빠져나가는 것도 지켜보았다. 앞을 바라보면, 그 작은 두 개의 섬 - P108

너머로는 수평선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바다는 그만큼 멀리까지 펼쳐져 있었다. 나는 하늘과 바다의 색이 서로짝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늘이 회색이면 종종 그렇듯이-바다도 회색인 것 같았고, 하늘이 연푸른색이면 바다는 푸른색으로, 혹은 구름과해가 있으면 이따금 진녹색으로 보였다. 바다는 내게 어쨌거나 큰 위로가 되었고, 그 두 섬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내 안에서 오르내리는 슬픔이 그 조수 같았다. - P109

마거릿은 걸음이 빨랐고 윌리엄도 그랬다. 그래서 그 두사람이 우리보다 앞에서 걸어갔는데, 솔직히 그건 좋았다.
기분좋은 아침이었다. 산책로는 강을 따라 이어지는 포장된좁은 길이었고, 강은 그날 햇빛 속에서 반짝거렸다. 마침내새잎이 돋기 시작했고, 녹색과 밝은 빛의 느낌이 있었다. 나는 나무들이 자신들의 아름다움에 확신이 없는 소녀들 같아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풀이 자란 땅에는 여기저기 민들레가 피어 있었다.
마거릿은 종종걸음을 멈추고 우리가 지나갈 때 마주치는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고, 나는 그녀가 그들의 안부를. 그들의 어머니들과 자식들의 안부를, 이런저런 안부를 묻는것을 보았다. 그들과 대화를 나눌 때 그녀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녀는 어쨌거나 목사였다-그리고 그 역할을 잘해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정말로 좋은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었다는 것, 그게 내가 말하려는 것이다. - P119

그날 밤이 지나고 나서야, 잠자리에 누운 채 나는 윌리엄이 줄곧 외로웠음을 깨달았다. 내가 있었는데도, 우리 딸들이 있었는데도, 그리고 브리짓과 다른 두 아내가 있었는데도, 윌리엄은 세상에서 외롭다고 느꼈다. 그런데 이제 그에게 누이가 있었다. 나는 속으로 울었다. 행복해서, 그리고 또한 슬퍼서.


그리고 잠들기 직전,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윌리엄이 팬데믹 동안 메인에 오기로 한 것이 여기 누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그는 분명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그들 사이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지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를 몬토크에 있는 집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메인에 왔다.
정말로 그 때문이었을까? 잠이 들면서,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 P203

나는 내 머리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한 문장을 시작하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밥은 말했다. "나도 그래요.
나는 그게 그냥 코비드 머리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증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혹시 더 나빠질지도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또한 내 머릿속에 혼란스러운 감각이 있었다. 예컨대 침실로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왜 여기로 온 거지? 그러면 마이클이, 바이러스와함께 나타났다는 마이클의 ‘브레인 포그‘ 증상이 생각났다. 그의 브레인 포그는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그 바이러스에감염되지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가 그방에 온 이유를 기억해낼 수 없었던 때가 몇 번이나 있었다.
그리고 예컨대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려고 커피머신에 필터를 넣다가 내 동작이 느려졌다고 생각했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늙어버린 것 같았다 - P204

우리는 포치에서 플렉시글라스를 떼어내고, 안쪽 벽에 기대어 있던 방충망을 달았다. 우리는 거기서 식사했다포치는 덧붙인 보조 식탁만 아래로 내리면 둥근 식탁을 놓을 수있을 만큼 충분히 넓었고, 식탁에는 방울이 달린 꽃무늬 보가깔려 있었다. 그리고 바다는 굉장했다. 지금은 창문이 열려있어 밤에 바다의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바다의 소리에 대해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기엔 두 개의 층이 있었다. 조용하고 거대한 깊고 지속적인 소리가 있었고,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는 늘 내게 전율을 일으켰다. 매일 아침 찾아오는 빛은 경이로웠는데, 희미한 흰색이다가거의 번지듯 노란색으로 변해갔고, 이어 하루가 지나면서 노란색이 더욱 짙어지는 듯했다. 비가 내릴 때 사실 비는 차갑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밤에 공기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 - P210

"내 인생에 대해 애도하는 중이야."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아침을 먹은 뒤 카우치에 같이 앉아 여름비가 내리는 것을보고 있을 때 윌리엄이 말했다.
"그거 체호프 희곡에 나오는 말인데." 내가 말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그걸 알다니 놀라워. 『갈매기에 나오는 거야."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에스텔이 끊임없이 오디션을 봤잖아." 그리고 윌리엄이 다시 그 대사를 반복했다. "내 인생에대해 애도하는 중이야." - P249

12월에 나는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오빠의 죽음과 연관이 있었다. 비키가 나를 이기적이라고 했기 때문은 더이상 아니었고, 피트의 죽음이라는 단 하나의 무서운사실 때문이었다. 그 일로 내 어린 시절 전체가 죽은 것처럼느껴졌다. 내가 어린 시절의 모든 부분이 사라지기를 바란다고, 당신은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내 어린 시절의 모든 부분이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나는 오빠가 살아 있기를 바라지만, 그는 그 작은 집에서 혼자 죽었다. 나는 그가 바이러스에 감염됐어도 병원에 가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을 - P300

생각했고, 어렸을 때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는 것을 얼마나무서워했는지 떠올렸다. 나는 슬프다는 느낌을 멈출 수 없었다. 그것은 아주 깊숙이 파고드는 슬픔이었고, 육신의 질병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날이 아주 일찍 어두워지면서 바람이 심하게 불고날씨도 추워서, 우리가 처음 메인에 도착했을 때만큼 자주산책하러 나갈 수 없었다. 너무 추운 날씨라 더이상 사교적인 만남도 없었다. 게다가 코비드가 메인까지 침투했고, 온 주에 퍼져서 극도로 조심해야 했다. 나는 거의 매일 작은서점 너머의 내 작업실로 갔다. 그게 없었다면 나는 정말로미쳤을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거의 미칠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아주 어렵게 느껴졌다. 심지어 집안의 욕실 두 개를 청소하는 것도 내 역량 밖의 일 같았지만, 마침내 청소를 끝냈을때는 기분이 훨씬 좋아진 것을 알아차렸다. 잠시 동안은 그랬다. 자신을 형편없게 느끼는 많은 사람이 그렇듯 이 기분에는 수치심이 뒤따랐다. 윌리엄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쨌거나 그에게 말할 것이 뭐가 있는가? 나는 버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 P301

며칠 뒤 나는 한밤중에 잠에서 깼고, 기억 하나가 나를 찾아왔다. 너무 불쾌해서 내 머리에서 밀어낸 기억. 나는 그 기억을 나쁜 기억들이 화장지 부스러기처럼 조각나는 주머니맨 아래에 밀어넣어두었었다. 그 기억은 이런 것이었다.
이 모든 일ㅡ팬데믹 말이다ㅡ이 일어나기 전 가을에 떠난북투어에서, 나는 시카고 외곽에 있는 내가 다닌 그 대학에서 강연을 하러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북투어 때 시카고에 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강연을 하러 가기 바로 전날 밤에 갑자기 아주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날 밤 공포가 계속 자랐고,
그래서 거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강의실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우려가 사실이 
된 것을 느꼈다. 학생들이 들어왔지만 나를 쳐다보지 않았고, 나는 당황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내 삶을 회고하는 이야기를 하기로되어 있었고, 그것은 가난하게 자란 것에 대한 내용이었다. - P306

하지만 학생들은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리고 학생들이 나를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나라고 생각한다고생각되는 내가 되었다. 나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것에 대한 글을 쓰는 늙은 여자였다. 그래서 내가 감정적으로—춥다고 느꼈다는 것,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그들이 나를 그런 식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학생들하나하나에게 어디에서 왔는지 물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출신지를 중얼중얼 말했는데, 내가 알기로 전부 부자 타운이었다. 메인에서 온 젊은 여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나를 흘끗 쳐다보기라도 한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여기는 사십 년 전에 내가 다닌 학교가 아니라고. 나는 여기가 그 학교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 내가 그 강의실에 앉아서 보기로는 지금 이 폐쇄적인 젊은이들에게서 보이는 부유한 분위기는 없었다. 학생들은 모두 열다섯 명이었는데, 회의용 테이블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둘러앉아 나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 P307

나는 조용히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계속 이것에 대해 생각했다. 내 생각은 이랬다. 그날 시카고 외곽에서 보낸 그 한 시간 동안, 나는 어린 시절에 느낀 수치심을다시금 아주 깊이 느꼈다는 것. 그런데 내 인생 전체에서 계속 그렇게 느꼈다면 어땠을까. 평생 가진 모든 직업이 내가제대로 먹고살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내가 내종교와 내 총을 조롱한 이 나라의 부유한 사람들에게 늘 멸시를 당했다면 어땠을까. 나는 종교도 없고 총도 없었지만, 이들이 무엇을 느끼는지 문득 알 것 같았다. 그들은 내 언니 비키와 같았고, 나는 그들을 이해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가난하다고 느껴왔고, 멸시받았으며, 더이상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 P310

나는 밖으로 나갔고, 내가 지내고 있는 건물의 현관 입구계단에 앉았다. 거기 앉아 딸들과 윌리엄과 데이비드에 대해-그가 떠나버린 것에 대해 그리고 우리 모두 언젠가는떠난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다. 이 생각을 하면서 슬펐다는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이 생각이 내 마음을 스쳤다.
우리는 모두 늘 록다운 상태에 있다는 생각. 단지 우리는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 그저 그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우리 대부분은 그저 헤쳐나가려고 애쓸 뿐이다.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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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그날 아침에 내가 몰랐던 것은 이것이다. 나는 다시는 내 아파트를 보지 못하리란 사실을 몰랐다. 친구 한 명과가족 한 명이 그 바이러스로 죽으리란 것도 몰랐다. 딸들과의 관계가 내가 결코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달라지리란 것도 몰랐다. 내 인생 전체가 뭔가 새로운 것이 되리라는 것도 몰랐다. - P22

우리가 도시를 빠져나갈 때, 나는 내 아파트 건물 옆으로 꽃을 피운 수선화를, 그레이시맨션 근처 나무에서 터지고 있는 꽃망울을 보았다. 태양은 부드럽고 따스한 빛을 내려 보냈고, 사람들은 보도를 걷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오,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인가! 우리는 FDR‘로 들어섰고, 거기엔 평소처럼 차가 많았다. 도로 왼쪽으로는 남자들이 체인 울타리를 두른 코트에서 농구를 하고있었다.
크로스 브롱크스 고속도로로 접어들었을 때, 윌리엄이 크로스비 해안에 있었다라는 이름의 타운에 집을 빌렸다고 말했다. 오래전 팸 칼슨의 남편이었던 밥 버지스가 지금 거기 살아서 그 집을 찾아봐주었다고 했다.  - P23

하늘 역시 음산했다-밥이 밖으로 나와서 진입로에 우리 차와 좀 거리를 두고 섰다. 그는 머리가 회색으로 센 체격이 큰 남자였는데, 데님 셔츠와 좀 헐렁한 청바지를입고 있었고, 거기서 우리를 보려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윌리엄이 차창을 열었다. 그러자 밥이 집 앞쪽 포치에 열쇠가있다고 말하고는 어떻게 거기까지 가는지 알려준 뒤 "이 주동안 격리하실 거죠?" 하고 물었다. 그러자 윌리엄이 네, 그럴 겁니다. 하고 대답했다. 밥이 그 기간만큼 버티기 충분한 식료품을 집안에 준비해두었다고 했다. 윌리엄 너머로 쳐다본 그는 아주 좋은 사람 같았는데, 나는 왜 윌리엄이 차에서 내리지 않는지, 왜 그들은 악수하지 않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없었다. 우리는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고, 윌리엄이 말했다.
"우리를 두려워하는 거야. 우리가 방금 뉴욕에서 왔잖아. 그사람 생각에는 우리가 독이야. 진짜 그럴지도 모르고." - P28

길 양옆으로 바다가 있었는데, 이런 바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구름이 짙게 드리웠는데도 풍경이 믿을 수 없을 만큼아름다웠다. 해변도 없었고, 그저 진회색과 갈색의 돌들 그리고 절벽에서 튀어나온 바위에서 자란 듯한 뾰족한 상록수뿐이었다. 진녹색 물이 바위 위로 넘실넘실 흘러갔고, 거의짙은 구릿빛 갈색이 도는 금색 해초가 진녹색 파도가 찰싹찰싹 밀려오는 바위 위에 물결처럼 누워 있었다. 바다의 나머지는 진회색이었고, 해안 멀리로 아주 작은 흰 파도만 보였다. 그저 광대하게 펼쳐진 바다와 하늘뿐이었다. 모퉁이를도니 바로 작은 만이 나왔고, 거기 바닷가재잡이 배들이 많았다. 너무 많은 공기가 있는 것 같았고, 이 작은 만에 들어앉은 배들은 모두 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 배들 뒤로 탁트인 바다가 보였다 진심으로 나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여긴 바다야! 내게는 외국처럼 느껴졌다. 다만, 솔직히 말하면, 낯선 곳은 늘 나를 겁먹게 한다. 나는 익숙한 장소가 좋다. - P29

위층에 올라가 창문에 나무가 바짝 붙어 자란 안쪽 침실로들어갔고, 그 순간 창문 반대쪽 벽에 책이 잔뜩 꽂힌 큰 책장이 있는 것이 보였다 전에는 심지어 알아차리지도 못한 것이었다. 대부분 빅토리아시대 소설, 특히 2차대전에 대한 역사책들이 있었다. 나는 거기 침대에서 퀼트 이불 하나를 가져와 내 방 침대에 있는 이불 위에 덮었다. 그리고 잠이 들어밤새 깨지 않고 잤는데, 그 사실이 놀라웠다. 어느 목요일 밤이었다. 그건 기억한다. - P34

우리는 주말을 보내는 동안 함께, 그리고 따로 밖에 나가걸었다. 구름이 짙게 드리워 절벽 위 집 근처 작은 녹색 잔디밭 빼고는 어디에서도 색깔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불안했다. 그리고 계속 추웠다. 나는 추운 것을 견디지 못한다. 어린 시절에 엄청난 결핍을 경험했고, 늘 추웠다. 수업이 끝나면 학교에 남았는데, 그저 따뜻한 곳에 있고 싶어서였다. 심지어 지금도 이 집에서 나는 스웨터 두 벌을 입고 그 위에 윌리엄의 카디건을 껴입는다.


월요일 아침에 윌리엄이 자기 컴퓨터로 뭔가를 읽다가 불쑥 말했다. "엘시 워터스라는 작가 알아?" 나는 놀랐다. "알지." 내가 말하자, 그가 컴퓨터를 건넸다. 그 여자 엘시 워터스에 대해 알게 된 건 그렇게였다. 만나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다가 내가 너무 피곤하다고 해서 못 만난 여자-그녀가 그 바이러스로 죽은 것이었다. - P35

나는 내 아파트를 청소해주는 마리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제 더이상 아파트에 오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녀가 지하철을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떠난 다음날 내 아파트에 갔었지만, 다시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남편이 그 아파트 건물의 수위라, 마리는 그가 브루클린에서 지하철을 피하려고 거기로 운전해 가고, 매주 내 큰 화분에 물을 줄 거라고 말했다. 그건 내 유일한 화분이었는데, 이십 년 동안 키우고 있던 식물로- 윌리엄과 헤어져 처음 집을 나왔을 때 산것이었다 내가 아주 깊은 애착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 일에 대해, 그리고 그녀가 해준 모든 일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침착하게 들렸다. 그녀는 종교가 있는 사람이라, 나를 위해 기도해주겠다고 말했다. - P37

두 사람 다 일하는 곳이 요양원이라 걱정되었지만, 언니는말했다. "음, 나는 일을 해야 해, 루시." 언니는 그 말을 침울하게 했고, 언니의 침울은 해묵은 것인데, 나도 그 이유를 안다. 언니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언니에게 매달돈을 보내주지만, 언니는 고맙다는 표현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언니를 탓하지 않았다. 몇 년 전에 언니의 남편이 직장을 잃었다. 솔직히 언니를 생각하면 나는 아주 슬퍼지고, 정확히 내가 받은 그 장학금을 받았던 라일라를 생각해도 그렇다. 라일라의 삶이 뭔가 새로운 것이 되기를 내가 얼마나 바랐던가. 하지만 그애는 그것을 해낼 수 없었다.

왜 사람들이 다 다른지 누가 그 이유를 알겠는가? 우리는어떤 본성을 타고나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를 이리저리 휘두른다. - P56

믿기 어려우리란 건 알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내가 아이였을 때 우리집 식탁에는 소금과 후추통이 없었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몹시 가난했고, 아무리 가난해도 많은 가정이 집에 소금과 후추통을 놓아둔다는 것을 지금은안다. 하지만 우리집에는 없었다. 많은 밤에, 우리는 저녁으로 식빵에 당밀을 발라 먹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음식이 맛있을 수 있다는 것을 대학에 가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 몇 명은 식당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 저녁을 먹었는데, 어느 밤 내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이름이 존이었다-존이 소금과 후추 통을 들어 자기 접시에 놓인 고기에 갈아뿌리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도 똑같이 했다.
그리고 나는 믿을 수 없었다. - P58

소금과 후추가 만드는 맛의 차이를 믿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음식에 관심이 있었던 적이 없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소포를 들고 포치로 올라왔다. 내게 온소포로 엘엘빈에서 보낸 것이었다. 윌리엄은 산책하러 나가집에 없었고, 상자를 풀어보니 치수가 꼭 맞는 겨울 코트였다. 푸른색이었고, 완벽하게 잘 맞았다. 나를 위한 스웨터도두 번 있었다. 그리고 내 사이즈의 운동화도 한 켤레 있었다!
"윌리엄!" 그가 진입로를 걸어올 때 내가 외쳤다. "당신이나를 위해 주문해준 게 왔어!"
"손 씻어." 그가 말했다. 내가 상자를 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손을 씻었다.
윌리엄이 상자를 포치에 다시 내놓았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와 역시 손을 씻었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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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Elizabeth Strout

1956년 미국 메인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나, 메인주와 뉴햄프셔주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베이츠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뒤 영국으로 건너가 일 년 동안 바에서 일하면서 글을 쓰고, 그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끊임없이 소설을 썼지만 원고는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작가가 되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에 그녀는 시러큐스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잠시 법률회사에서 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을 그만두고 뉴욕으로 돌아와 글쓰기에매진한다.
문학잡지 등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던 스트라우트는 1998년 첫장편소설 에이미와 이저벨」을 발표하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는다. 2008년 발표한 세번째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로 언론과 독자들의 호평을 받으며 2009년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이 작품은 HBO에서 미니시리즈로도 제작되었다. 이후「버지스 형제」 「내 이름은 루시 바턴 무엇이든 가능하다. 그리고 올리브 키터리지」의 후속작인 「다시 올리브까지 꾸준히작품 활동을 이어가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의 후속작인 「오, 윌리엄!」으로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루시 바턴‘ 시리즈의 최신작인 「바닷가의 루시는 루시와 전남편 윌리엄이 세상을 장악한 바이러스를 피해 바닷가의 집에서함께 살게 되며 일어나는 일을 다룬 장편소설이다. 위기를 맞이한 세계에서도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희망과 사랑을 특유의 따스하고 절묘한 언어로 섬세하게 그려낸다.

다른 많은 이들처럼, 나도 그것이 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윌리엄은 과학자고, 그것이 오는 것을 보았다. 나보다 더 먼저 보았다는 것,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 P11

매일 아침 윌리엄은 내가 일어나기 전에 산책했다. 그는일찍 일어나는 사람이고, 첫 오천 걸음을 마쳤다. 날은 자주흐렸고, 잔뜩 흐린 날에도 나는 천창을 통과하는 햇살에 깨어났다. 매일 아침 그에게 그 얘기를 했다. 그가 돌아올 때쯤나는 시리얼을 준비해놓았다. 우리는 치리오스를 먹었고, 식탁 앞에 앉아 아침식사를 했다. 그리고 나는 이상한 이유-그것을 좋아했다. 아마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내 남편 데이비드와 함께 보낸 나날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윌리엄이 어느 정도는 대체로 내게 익숙하기때문이고, 오늘은 뭔가 다른 일이 생기리라는 기대, 팬데믹이 지나가고 우리가 집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작지만 내게는 아주 현실적인 희망이 늘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을 다 먹온 뒤에 우리는 거실로 갔고, 거기서 바다를 내다보았다. 바같은 몹시 추웠고, 햇살은 없다시피 했다. 바다는 계속 회색이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는 새 겨울 코트를 입고 산책하러 나갔다. - P60

남편과 사별하면 두번째 해가 첫해보다 더 힘들다고 한다-그건 내 생각에, 충격은 가셨고 이제 그저 그 상실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일 텐데, 나는 심지어 윌리엄과함께 메인에 오기 전에 그 말이 사실인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따금 데이비드의 죽음을 새삼 처음 깨닫는 것 같은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슬픔에 혼자 몰래 비틀거렸다.
그리고 데이비드가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이곳에 와 있다는 것-내가 정말로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 다른 데 와 있는 것 같다는 것,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 P65

그리고 나는 또한 깨달았다.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라고맙소사,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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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틈


그대에게 빈틈이 없었다면
나는 그대와 먼 길 함께 가지 않았을 것이네
내 그대에게 채워줄 게 없었을 것이므로
물 한모금 나눠 마시며 싱겁게 웃을 일도 없었을 것이네
그대에게 빈틈이 없었다면

도시락 소풍


강물 위로 뭉게구름 지나간다 버드나무와 감나무 사이로 물까치떼 오간다

유년 시절 내내 같은 교문을 드나들던 내 친구 종대와 나는 어쩌자고 또 강변 느티나무 그늘 아래 붙어 앉아 도시락을 먹는다 유년의 교실과 칠판 낙서와 긴 복도와 벚나무 아래 그네와 풍금 소리까지 죄다 꺼내놓고 종대가 싸온 도시락을 나눠 먹는다 혼자 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 내 친구 종대가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나를 위해 들고 온 도시락, 커피에얼음까지 챙겨 왔어? 도시락을 다 먹은 종대와 나는 아이스커피를 들고 상수리나무 그늘이 찰랑이는 바위에 올라앉아강물과 뭉게구름과 물까치떼를 바라보다가,

빈 도시락이 뛰는 가방을 메고 징거미 잡으러 가는 소년이 된다

남겨두고 싶은 순간


시외버스 시간표가 붙어 있는
낡은 슈퍼마켓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오래된 살구나무를 두고 있는
작고 예쁜 우체국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유난 떨며 내세울 만한 게 아니어서
유별나게 더 좋은 소소한 풍경,

슈퍼마켓과 우체국을 끼고 있는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아, 저기 초승달 옆에 개밥바라기!

집에 거의 다 닿았을 때쯤에야
초저녁 버스 정류장에
종이 가방을 두고 왔다는 걸 알았다

돌아가볼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으나 곧 단념했다

우연히 통화가 된 형에게
혹시 모르니 그 정류장에 좀
들러달라 부탁한 건 다음 날 오후였다

놀랍게도 형은 가방을 들고 왔다
버스 정류장 의자에 있었다는 종이 가방,
안에 들어 있던 물건도 그대로였다

오래 남겨두고 싶은 순간이었다

백련 백년


꽁꽁 언 연못 위로 눈이 내린다

너와 나는 연못으로 들어가
얼음을 지치다가 눈을 뭉친다

꼭꼭 누른 눈 뭉치를 던지는 일로
서로에 대한 애정을 증명한다

그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눈 뭉치를 들고 서 있는 내게
너는 문득 눈 뭉치를 들고 다가왔다

너는 내가 들고 있는 눈 뭉치 위에
네가 들고 온 눈 뭉치를 올렸다

눈 뭉치는 눈싸움이 될 수도 있고
큰 싸움이 될 수도 있고
작고 예쁜 눈사람이 될 수도 있다

살 비비고 식는 사랑은 사랑 아니다

너와 내가 다시 찾은 연못엔
막 피어난 백련이 둥글고 뜨겁게 하얗다

둥근 연잎 위에 둥글게 쌓인 햇볕

너는 양손으로 끌어모은
햇볕 한뭉치를 연꽃잎 위에 올려
둥글고 하얗게 나를 흔든다

백련이어도 좋고 백년이어도 좋겠다
이게 사랑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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