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이 도시의 많은 것들이 그랬는데. 매혹이면서 절망인, 실패이면서 바람인 것들. 그러면서 나는 계속해서 이 빌딩에서 저 빌딩으로, 저 빌딩에서 그 빌딩으로 향하고 있었다. 들어갔다 나갔다 다시 들어갔다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살고 있었다. 나는 자꾸 빌딩에 있었다. 먹고자고 놀고 일하고, 가끔은 사랑을 하면서. 사랑도다름 아닌 빌딩에 있었다. 그 사랑은 여지없이 짓궂었다.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계단은 가파르고 엘리베이터는 차가웠다. 답답할 때면 옥상에 올라보지만 내가 찾는 것은 도무지 없었다. 나는 없었다. 있었다 없었다 했다. 나는 자꾸 이곳에 없었다. - P8
언제부터였을까. 처음 불빛에 사로잡힌 게. 스물한 살에서 스물두 살로 넘어가던 겨울의 시간이 불현듯 떠오른다. 경주의 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앓는 사람을 눕혀두고 틈날 때마다 골목 여기저기를 쏘다녔던 때. 그 무렵 나는, 죽음이 지나치게 가깝다고 느꼈다. 감히 고백하건대, 이렇게나가까이 온 죽음을 어찌할 도리가 없겠다고. 그런나의 마음을 끈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골목의 불빛이었다. 저녁이면 어김없이 차가운 길을 데우던빛. 늘 같은 자리에 매달려 손짓하던 십자가, 십자가 같은 그 빛만을 나는 간절히 원했다. 기어코 처량해지고 마는 일이겠으나....... 가만히 누워 견디기 힘든 밤이면 무작정 밖으로 나가 불이 총총히 켜진 낯선 연립 앞에 한참을 서 있곤 했다. 창을 가득 메운 저 밝은 걸 가진 - P15
이들은 슬프지 않겠구나, 아프지 않겠구나, 멋대로상상했다. 부러움과 두려움, 열패감 같은 모호한감정들이 마구 뒤엉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을 떠나보낸 뒤 나는 비로소 방에 들어 불을 켤 수 있었다. 그때 엄습해온 묘한 안락감. 나도 빛을 가졌구나 마침내 한 사람의 죽음으로 하나의 빛을, 하나의 삶을 얻었구나. 더불어 밀려든 괴상한 자책 속에 나는 살고 싶지 않았다. 살면 안 된다고, 그래서는 안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보세요. 얼마나 우스운지.) 나는 온전히 살았고, 어쩌면 제법 잘 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왜 아직 밤의 골목을 쏘다니는지. 궁상스러운 열망을 놓지 못하는지. 요즘도 나는 가끔 그때 그 시간 속에 나 자신을 두고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얼른 돌아가야할 것만 같은. 그러면서 그때의 나를 마주하게도된다. 바깥, 바깥에 있는 나를. 이제는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바깥에 있는 - P16
사람, 그게 바로 나라고.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정해진 것 같다고.
스스로를 좋아할 수 없는 만큼 나는 사람이라는 족속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빛속에 든 사람에 대해서라면 아직 좋아하기를 포기하지 못한 건지도. (이게 대체 무슨 앞뒤 없는 마음일까요?) 문 안쪽에 모여 앉은 사람들 말이다. 서로에게맛있는 걸 권하고 서로의 어깨에 붙은 머리카락같은 걸 떼어주면서 또렷이 미소 짓는 사람들. 그사람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일만이 내 오랜 몫이 아닐까.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일, 그런 일을 나는 종종 한다. 모임이 한창인 때 조금 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서서 환한 창저편을 바라보는 일, 밥집이나 술집, 혹은 카페. 친분이 있는 시인의 낭독 행사가 막 끝난 서점일 때도 있다. 안을 들여다보면, 그 안은 너무 따스한 것이다. 모두 웃고 있는 것이다. 조금의 결락도 없는 - P17
것처럼. 꼭 그런 것도 아닐 테지만, 나는 조금 망설인다. 그러다 잠시, 아주 잠시 그 속에 있게 된다. 그리고 이내 겉도는 사람이 된다. 가까스로 주고받던 대화는 멈춰버린다. 정적만이 남는다. 문제는 나다. 왜 궁금하지가 않을까? 왜 아무것도 묻고 싶지가 않을까? (앞뒤 없는 마음이란 대체!)너라는 사람이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나, 나는 왜하필 이런 사람일까? 하필 이런 나를 너 또한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고, 무언가 단단히 어긋난 기분. 늘 반복되는 이런 식의 상황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러나 실은 그리 슬픈 일도 아니지. 나는 사람을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런 일쯤 그냥 시시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서둘러 빛 속을 빠져나온다. 다시 골목을 걷는다. 집으로, 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혼자만의 자리로, 도착하면 나 또한 맨 먼저 불을 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먹고 자고웃고 우는 것이다. 누군가 한 번은 내가 사는 4층 - P18
창을 올려다볼지도 모른다. 새벽까지 불은 꺼지지않을 테고, 누군가는 희미하게 매달린 빛을 보며막연한 행복을 상상할지도 모른다. 자신 곁에 없는온기를. 그런 헐거운 상상만으로 어떤 이는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터덜터덜 걸어오늘의 끝이 아닌 내일의 시작을 기약할 수 있을것이다. 허상에 가까운 것을 상상하고 갈망하며 버티는 바깥의 존재. 어쩌면 모두, 하나같이.
빌딩이라는 크고 단단한 상자 속에 든 작고 무른 사람. 이따금 상자 밖을 어슬렁거리는 사람. 상자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사람. 결국 사람.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 P19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시간이 멋대로 잘도흐르는 동안 나는 언제나처럼 명진관 그늘진 복도를 오갔다. 그늘이 반쯤 삼켜버린 그림자는 여느 때처럼 볼품없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얼마간 휴학을 했고 이후 어렵게 복학을 했다. 돌아오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너무 깊이 좋아했기 때문에, 라고 한다면 그 또한 얼마나 우스운지. 오글거리는지. 그사이 나는 가장이 되었고, 지나친 아르바이트로 몸과 마음이 부서질 듯 아팠는데……. 그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마저 없었다면 나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견디기위해 하는 수 없이 사랑이라는 과장된 마음을 택했다고 하는 편이 어쩌면 옳을 것이다. - P93
너는 이제 스물세 살이고, 막 시라는 걸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 사랑도 결국 눈을 감겠지.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꽤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실은 그리 긴시간도 아니다. 슬픈 일도 기쁜 일도 아니다. 스물세 살, 아직 고아가 아니고, 사랑 때문에, 단지 사랑 때문에 울 수 있는 바로 이 시간을 훗날의 너는 이따금 그리워하게 된다. - P100
암순응
캄캄한 방에 누워 마침내
빛을 믿는다
잘 자, 그 마지막 말을
잘자, 또 잘자 - P101
나는 알지 못하는. 그 건물이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프랜차이즈 카페에 앉아 나는 무수히 보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문 쪽을 흘끔거리는 사람. 휴대폰을 붙잡고 놓지 않는 사람. 잡지를 뒤적이는 사람.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노트북을 들여다보는 사람. 노트북 앞에서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사람. 그런 사람들 사이 끼여 앉아 나 또한 무언가 끄적이곤했다. 시를 쓰곤 했다. 그에 대한 시를 쓰고 싶어서, ‘그는......‘이라고 시작하면 너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와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쓰지 못했다. 그런 것이야말로 어쩔 수 없는 사랑의 증상이라고 나는 믿었다. - P104
나는 두려워졌다. 쓰는 일이. 나를 드러내는일이. 솔직함을 빙자해 드러낸 나의 위태로움. 나의 균열. 금방이라도 무너져 무고한 이들을 마구해치고 나 자신을 다치게 할 나의 쓰기. 불쑥 고백하자면, 글을 쓰는 나는 조금도 건강하지 않다. 나의 내면은 자주 비틀댄다. 합리적이라고도, 윤리적이라고도 도무지 할 수가 없다. 이런 주제에 나는쓰는 일을 지속하며, 그 과정에서 자주 무언가를, 누군가를 ‘사유화私有化한다. 함부로 감정을 이입하고 내 식대로 해석한다. 마구 가져다 써버린다. 그것이 빚는 사태란, 결코 간단치 않다는 생각. 어떻게 써야 할까.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수시로 검열하며? 윤리적으로 타당하다고 판단되는이야기만을 고르고 골라? 이런 것이 능사일까. (그 - P114
렇다면 이는 이대로 또 무서운데.) 애당초 이런 문학은, 예술은 가능한 것일까. 쓰는 이의 주관적 인식이나의식을 완전히 탈피한 어떤 것? 불행히도, 그럴 수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테드 휴즈가 Poetry inthe Making』(1978)에 적었듯, 문학을 하는 "우리는사진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들어맞는 음악이 수반된 감각막을 원하는 것"이므로. 인간 중심의 통념으로 세계를 명명함으로써 진실이 왜곡되는 것을 거부한, "있는 그대로"를 주창한 문학사속 저 유수의 시인들이 물론 건재하지만, 그 태도의 염결성에 대해 내가 가지는 존경심과는 별개로,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인간의 지극히 인간적인 꿈이 아닐까 생각해왔다. 아, 쓰기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무서워서한 줄도 쓸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 자체가 터무니없는 비극이라고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다음 날또다시, 어김없이 노트북 앞에 앉는 것. 정말이지 끔찍하지 않을 리가. - P115
2015년 첫 시집을 낼 때도 그랬다. 편집 막바지에 이르러 나는 내가 쓴 시 한 편을 두고 고민에빠졌다.
폐수종의 애인을 사랑했네 중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용산우체국까지 대설주의보가 발효된 한강로 거리를 쿨럭이며 걸었네 재개발지구 언저리함부로 사생된 먼지처럼 풀풀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도시의 몸 구석구석에선 고질의 수포음이 새어나왔네 엑스선이 짙게 드리워진 마천루 사이 위태롭게 선 담벼락들은 저마다 붉은 객담을 쏟아내고그 아래 무거운 날개를 들썩이던 익명의 새들은남김없이 철거되었네 핏기 없는 몇 그루 은행나무만이 간신히 버텨 서 있었네 지난 계절 채 여물지못한 은행알들이 대진여관 냉골에 앉아 깔깔거리던 우리의 얼굴들이 보도블록 위로 황망히 으깨어져갔네
「용산을 추억함」이라는 시의 일부. 2009년 - P116
용산 참사로부터 촉발된 이 시는 여러 면에서 내게 특별하다. 참사가 발생한 2009년을 전후해 나는 몇 년간 용산에 위치한 직장에서 근무했는데, 그 때문에 그곳 분위기를 다소간 생생하게 접할 수 있었다. 아픈 풍경은 어째서인지 내 안에 움츠린 또 다른 아픔을 불러냈고, 용산은 그렇게 ‘사적인 공간‘이 되어버렸다. 이 시는 분명 그때 그 용산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용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기도 하다. 나는 이 부분이 늘 불편했다. 너무 쉽게 용산을 사유화했고, 비극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노래한 것이 죄스럽게 여겨졌다. 그래서 이 시를 시집에 싣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편집 막바지까지 고민한 기억이 난다. 늦은 밤 전화기를 붙들고 해설을 쓴 ㄴ 평론가께 토로하듯 사정을 이야기한 적이있다. 공교롭게도 시집 해설의 주요 부분이 이 시를 다루고 있었고, 나는 해설을 수정해줄 수 있는지 어려운 부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ㄴ 평론가는 물론 내내 너그럽게 받아주었지만 속으로는 제 - P117
법 난감하지 않았을까. 일련의 과정 끝에 시를 그대로 수록하기로마음먹은 다음에는 제목이라도 바꾸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용산‘이라는 무거운 짐을 그저회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목을 바꾼다고해서 용산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어쩔 수 없겠다, 반쯤 체념한 채 버젓이 제목에 용산을 달게 된 이 시는 줄곧 나를 고민스럽게 했다. 나는 그때 왜 하필 전경들이 에워싼 남일당 건물앞에 멈춰 섰고, 또 왜 하필 그곳으로 나의 상처들을 불러 모은 것일까. 명확히 설명할 수도, 이해할수도 없었다. 아직까지 나는 이에 얽힌 의아함과 두려움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나의 서툰 자의식이 누군가의 상처를 함부로건드리고 그것을 누차 헤집을 수 있다는 사실. 무엇보다 이건 글이니까. 더욱이 글은 말이나 노래처럼 날아가지도 않고 그 자리 그대로 박제된 채 남아버리니까. 아, 무서워라.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썼다가, 이튿날 장마로 구멍이 난 옆집 천장에 - P118
서 콸콸콸 억수가 쏟아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식이다. 비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 그런 적나라한 현실은 더 이상 드물지 않고......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다 성장의 과정이라고 사람 좋은 위로를 건넬지도 모른다. 만물이 변화하는 것과같이 글을 쓰는 자아도 자연히 상황에 따라 변화하고 성숙해가는 것 아니겠냐고. 맞다,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겠지, 수긍하면서도 거듭되는 황망함을 성숙이라고 혹은 진전이라고 해도 좋은 것일까회의하게 된다. 모르겠다. 알 수 없다. 세상에는 온통 알 수 없는 것투성이. 갈수록 이런 말만 되풀이하게 되는 것이다.
앞서 한 「용산을 추억함」에 얽힌 이야기를이후 한 문예지에서 짧게나마 언급한 적이 있다. ㄴ평론가와 함께한 대담 지면에서였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는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역사를 시인의 사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 조금만 더 너그러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최 - P119
•소한 저같이 예민하지 못하고 아둔한 사람은 그렇게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면 다시 현실을 들여다보지 못할 때가 많거든요. 소란 씨는지나치게 낭만적인 것에 대해 우려했습니다만, 작품은 시인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반드시 독자들을거치게 되잖아요. 그것이 어디로 중폭될지 조금은너그러운 시선으로 봐주었으면 합니다." 고마운 조언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사려 깊은 이야기에 크게안도할 수 있었던 한편, 또다시 복잡하게 다가오는지점은 있다. 여기, "작품은 시인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반드시 독자들을 거치게 된다"는 부분. "그것이 어디로 증폭될지" 갖은 가능성을 지닌다는 부분. 이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고민은 점차로 더 커진다. 이는 말하자면, 작품은 필연적으로 확장되고 끝내 어떤 식의 오독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창작자의 의도를 뛰어넘는 창작물은 기어코 생겨나고 마는 것.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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