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 대박
싱고의 <詩누이> 에서도 박소란시인을 첫, 으로 만난다.
당신은 다정한 사람입니까?
yes.
심지어 병적으로 다정한 사람 ㅠ.ㅠ 이라고 적고나니 혼자서 뻘쭘~~~!
어이구야~! 삼월도 절반이 지나간다.




설탕

박소란


커피 두 스푼 설탕 세 스푼 당신은
다정한 사람입니까 오 어쩌면

테이블 아래
새하얀 설탕을 입에 문 개미들이 총총총
기쁨에 찬 얼굴로 지나갑니다 개미는
다정한 친구입니까 애인입니까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
달콤한 입술로 내가 가본 적 없는
먼 곳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당신을 위해
오늘도 나는 단것을 주문하고 마치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웃고 재잔대고 도무지 맛을 알 수 없는
불안이 통째로 쏟아진 키피를 마시며

단것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당신은 다정한 사람입니까 다정을 흉내 내는 말투로
한번쯤 묻고도 싶었는데

언제나처럼 입안 가득 설탕만을 털어넣습니다
그런 내게 손을 내미는 당신

당신은 다정한 사람입니까 오 제발 다정한
당신의 두 발, 무심코
어느 가녀린 생을 우지끈 스쳐가고

심장에 가까운 말 (창비 2015) - P22

환상의 빛
강성은


옛날 영화를 보다가
옛날 음악을 듣다가
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생각했다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생각했다

명백한 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몇세기 전의 사람을 사랑하고
몇세기 전의 장면을 그리워하며
단 한번의 여름을 보냈다 보냈을 뿐인데

내게서 일어난 적 없는 일들이
조용히 우거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눈 속에 빛이 가득해서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단지 조금 이상한(문학과지성사 2013) - P32

몽유산책
안희연


두 발은 서랍에 넣어두고 멀고 먼 담장 위를 걷고 있어

손을 뻗으면 구름이 만져지고 운이 좋으면
날아가던 새의 목을 쥐어볼 수도 있지

귀퉁이가 찢긴 아침
죽은 척하던 아이들은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이따금씩 커다란 나무를 생각해

가지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불이 되어 일제히 날아오르고
절벽 위에서 동전 같은 아이들이 쏟아져나올 때

불현듯 돌아보면
흩어지는 것이 있다
거의 사라진 사람이 있다

땅속에 박힌 기차들
시간의 벽 너머로 달려가는

귀는 흘러내릴 때 얼마나 투명한 소리를 내는 것일까

나는 물고기들로 가득한
어항을 뒤집어쓴 채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 2015) - P41

봄날
김기택


할머니들이 아파트 앞에 모여 햇볕을 쪼이고 있다.
굵은 주름 잔주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햇볕을 채워넣고 있다.
겨우내 얼었던 뼈와 관절들 다 녹도록
온몸을 노곤노곤하게 지지고 있다.
마른버짐 사이로 아지랑이 피어오를 것 같고잘만 하면 한순간 뽀얀 젖살도 오를 것 같다.
할머니들은 마음을 저수지마냥 넓게 벌려
한철 폭우처럼 쏟아지는 빛을 양껏 받는다.
미처 몸에 스며들지 못한 빛이 흘러넘쳐
할머니들 모두 눈부시다. 아침부터 끈질기게 추근거리던 봄볕에 못 이겨
나무마다 푸른 망울들이 터지고
할머니들은 사방으로 바삐 눈을 흘긴다.
할머니 주름살들이 일제히 웃는다.
오오, 얼마 만에 환해져보는가.
일생에 이렇게 환한 날이 며칠이나 되겠는가.
눈앞에는 햇빛이 종일 반짝거리며 떠다니고
환한 빛에 한나절 한눈을 팔다가
깜빡 졸았던가? 한평생이 그새 또 
지나갔던가?
할머니들은 가끔 눈을 비빈다.

사무원(창비 1999) - P47

돌멩이
오은


뻥뻥 차고 다니던 것
이리 차고 저리 차던 것

날이 어둑해지면
운동장이 텅 비어 있었다

골목대장이던 내가
길목에서
이리 채고 저리 채고 있었다

돌멩이처럼 여기저기에 있었다

날이 깜깜해지면
돌담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좁은 길로 들어서는 일이 쉽지 않았다

돌멩이처럼 한곳에 가만히 있었다

돌멩이처럼 앉아
돌멩이에 대해 생각한다 - P54

돌멩이가 된다는 것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
온 마음을 다해 온몸이 된다는 것
잘 여문 알맹이가 된다는 것

불현듯 네 앞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
마침내
네 가슴속에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
철석같은 믿음이 된다는 것

입을 다물고 통째로 말한다는 것

날이 밝으면
어제보다 단단해진 돌멩이가 있었다
내일은 더 단단해질 마음이 있었다

「의자를 신고 달리는」 (창비교육 2015) - P55

구름의 산책
이현승


아빠 구름은 어떻게 울어?
나는 구름처럼 우르릉, 우르릉 꽝! 얼굴을 붉히며,

오리는?
나는 오리처럼 꽥꽥, 냄새나고,

돼지는?
나는 돼지처럼 꿀꿀, 배가 고파.

젖소는?
나는 젖소처럼 음매, 가슴이 울렁거린다.

기러기는?
나는 기러기처럼 두 팔을 벌리고 기러기럭,

그럼 돌멩이는?
갑자기
돌멩이를 삼킨 듯 울컥해졌다.
소리 없이 울고 싶어졌다.

아빠, 구름은 우르르 꽝 울어요?

「생활이라는 생각」(창비 2015) - P62

슬픔
이시영


김포에서 갓 올라온 햇감자들이 방화시장 사거리 난전에서 ‘금이천원‘이라는 가격표가 삐뚜루 박힌 플라스틱 바가지에 담겨 아직 덜 여문 머리통을 들이받으며 지희끼리 찧고 까불며 좋아하다가 "저런 오사럴 놈들, 가만히 좀 있던 못혀!" 하는 할머니의 역정에 금세 풀이 죽어 집 나온 아이들처럼 흙빛 얼굴로 먼 데 하늘을 쳐다본다.

「호야네 말」(창비 2014) - P71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는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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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시인을 처음 만난 건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을 통해서였다. 시들이 훅! 들어왔다. <노래는 아무 것도>, <다음에>, <주소>, <배가 고파요>, <울음의 방>들에 멈춰서 서성거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용산을 추억함>.


여기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필사하면서 읽었던,  ‘너무 깊은 오해‘, ‘나의 고양이가 되어주렴‘, ‘감‘, ‘참 따뜻한 주머니‘, ‘노인‘, ‘화장실이 없는 집‘, ‘통속적 하루‘, ‘망명‘, ‘지익‘ 등등.
그리고 지금 우리들의 정서적 주소지를 묻는 시가 있다. 눈으로 몇 번을 읽고 어디서 끊어야 할지 가늠한 다음에 소리내어 읽으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우리가 자주, 꼭 읽어야 할 한 편, ˝심장에 가까운 말˝ 이 시집은 이 한 편의 시로도 충분한 값어치가 있다고 어설픈 나도 감히 말하고 싶어지는 ‘용산을 추억함‘. 역설적이게도 악몽 같은 이 사건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라도 기억해야 하는데 잊고 산다. 2009년 1월 20일의 용산을. 



용산을 추억함



  폐수종의 애인을 사랑했네 중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용산 우체국까지 대설주의보가 발효된 한강로 거리를 쿨럭이며 걸었네 재개발지구 언저리 함부로 사생된 먼지처럼 풀풀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도시의 몸 구석구석에선 고질의 수포음이 새어나왔네 엑스선이 짙게 드리워진 마천루 사이 위태롭게 선 담벼락들은 저마다 붉은 객담을 쏟아내고 그 아래 무거운 날개를 들썩이던 익명의 새들은 남김없이 철거되었네 핏기 없는 몇그루 은행나무만이 간신히 버텨 서 있었네 지난 계절 채 여물지 못한 은행알들이 대진여관 냉골에 앉아 깔깔거리던 우리의 얼굴들이 보도블록 위로 황망히 으깨어져갔네 빈 거리를 머리에 이고 잠든 밤이면 자주 가위에 눌렸네 홀로 남겨진 애인이 흉만(胸滿)의 몸을 이끌고 남일당 망루에 올라 오 기어이 날개를 빼앗긴 한 마리 새처럼 찬 아스팔트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꿈이 머릿속을 낭자하게 물들였네 상복을 입은 먹구름떼가 순식간에 몰려들었네 깨진 유리창 너머 파편 같은 눈발이 점점이 가슴팍에 박혀왔네 한숨으로 피워낸 시간 앞에 제를 올리듯 길고 긴 편지를 썼으나 아무도 돌아올 줄 모르고 봄은 답장이 없었네 애인을, 잃어버린 애인만을 나는 사랑했네



시집을 읽고 오래 전에 끝부분을 저렇게 썼는데 정작 시인은... 그랬단다. (끄덕끄덕)
˝오독˝ ㅡ 작품은 시인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반드시 독자를 거치게 된다.ㅡ 그것이 어디로 증폭될지.... (더 격하게 끄덕끄덕)



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오독, ‘잘못 읽거나 틀리게 읽음‘. 사전적 의미를 놓고 보면 단지 읽는 입장의 실수나 과실에 초점을 맞춘 듯 하지만 사실 실수도 과실도 아니라는것을 안다. 독자라면 글을 읽는 순간 으레 ‘창조적으로‘ 오독한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 또한 나를 어렵게 만드는 대목 중 하나인데, 즉 오독을 이기는 문학이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얘기니까. 우리가 "사진"이 아니라 "음악이 수반된 감각막을 원하는 한 오독은 언제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니까.
이 같은 사실은 매혹이자 동시에 두려움이다. 나는 여태껏 이 오독이 문학을 굴리는 커다란힘 중 하나라고 믿어왔다. 특히 한 번에 여러 뜻을 지시하는 시의 함축적 성질을 시의 가장 매력적인 지점이라 역설해왔다. 시적 신비라는 것이 많은 부분 여기에서 기인한다고도 생각해왔다. 하지만 오독이 수반될 수 밖에 없는 이런 과정은 때로 얼마나 위험한가. 쓰는 이와 읽는 이 모두에게 말이다. 문학이 바람직한 어떤 방향으로 오롯이 나아가, 그바람직한 방향이란 어느 쪽인지 정확히 알 수는 - P121

없으나, 누군가를 위로하고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축도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반대에 가까운 듯하다. 카프카가 말한 "도끼날"이 "얼어붙은 호수를가르는" 것은 차치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누군가를 베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야 할 형국이다. 문학은 가늠할 수 없는 방향으로 시시각각 증폭되어 누구든 무엇이든 상처 입힐 수 있다. 상처입히고 만다. 이것이 문학의 아픈 숙명이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 도끼를 거머쥔 손은 어떤 것인가.


아무도 상처 입히지 않는 쓰기란, 그러므로가능한가?
나는 아직 답을 알지 못한다. 지금 내게 아무도 상처 입히지 않는 쓰기란 그저 신기루에 가까운 듯 보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쓰는 나는 언제든무너지고 또 무너뜨릴 수 있다. 진심은 전해지지않을뿐더러 너무 쉽게 훼손되고 붕괴되는 처지에놓여 있다. 다시 말하지만, 쓰기란 얼마나 위험천 - P122

만한가. 위태롭기 짝이 없는가. 그리고 그만큼 얼마나 막강한가. 쓰는 나는 얼마나 잔혹한가. 나날이 체감하고 있다.
지금은 간신히 이 정도만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 쓸 수 있을 뿐.
결국 모두 무너진다. 쓰는 이조차 그 붕괴를피할 수 없다. 붕괴하지 않는 쓰기란, 없다. 안 된일이지만 이토록 무서운 쓰기를 내가, 우리가 하고있다는 사실.
재건? 만약, 아주 만약 그런 게 가능하다면,
폐허 가장자리에서 내가 다시금 일어나 절룩이며한 삽 흙을 들어 올릴 수 있다면 먼저 이런 사실을 직시해야 하겠지. 쓰기의 무서움과 참혹함을. 그런 뒤에야 천천히 다시 무엇인가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 P123

나는 늘 실패하지만,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있고, 또다시 실패하면서, 실패를 실패하면서, 나는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지었고, 조금 더 견뎠고, 조금 더 썼고, 쓴 것들은 곧잘 지워져버리지만. 익숙한 자음과 모음, 철자들은 막무가내로 쏟아지고. 하는 수 없다는 듯 나는 또 쓰고, 쓰고, 쓰고.
금간 담벼락을 메우는 낙서들. 비뚤어진 글씨들. 때로 진심보다 더 진심인 어떤 것.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어제는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썼고 오늘 아침에는 그가 여전히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는 확신과 강고한 믿음에 대해썼는데,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쓰자마자 지워져버렸다. 읽기 전에 사라지는 이상한 편지. 이상한 시.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나를 안도하게 한다, 하는 진심은 차마 발설할 수 없는 것이다. - P125

몇 시간이고 몰두하다 일어서면 현기증이 인다. 유치한 잔상에 시달린다. 시선을 가져다 대는여기저기서 기다란 막대기가 마구 쏟아진다. 손을뻗는다. 아아, 나 중독인가봐! 저 사랑스러운 헛것들. 고치고 또 고친다. 어떤 문장은 단지 고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참 다행이지? 이런 일이 세상에 있다는 게. 어딘가 기꺼이 몰두한다는 게. 시간은 군말 없이 흐르겠지. 우리는 바쁘게 늙겠지. 잊고 잊히겠지. 모든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럴 것이다.
테트리스가 좋다.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하자.
그러다 보면 내일 더 잘하겠지. 잘 짓겠지.
게임은 다시 시작된다. 여지없이 실패하겠지만, 그래도 하자.
테트리스를 하자. - P126

사다리를 타고


새로나세탁소와 정미부동산이 있는 삼층 건물옥상에
사람이 있다
안전모를 쓰고 토시를 낀 사람이
무언가를 뚝딱거리며 고치는 것을 응암정보도서관 일층 조그만 창으로 내다본다
시를 쓰며 본다

둘이었다가 하나였다가 다시 둘이었다가
사람이

기다란 선을 감았다가 풀었다가
사다리를 세웠다가 눕혔다가

망치를 번쩍 치켜든 오후, 해를 탕탕탕 두드리는 - P127

사람이
양손에 빵과 우유를 쥐고 잠시 난간에 걸터앉는
신발을 벗었다가 신었다가
벗었다가

먼 데를 올려다보면 하나같이 높은 곳
그 뒤로 조금 더 높은 곳

그을린 목을 한껏 젖힌다
금방이라도 닿을 듯 가까웠다가 죽어도, 죽어도 닿을 수 없을 듯 멀었다가

시를 쓰며 본다
사람이
사라지지 않는다 - P128

가까웠다가 멀었다가 가까웠다가

창을 열면
기다렸다는 듯 문장은 바깥으로
도망쳐버리고 잽싸게 날아가버리고
돌아오지 않는다

녹슨 사다리를 타고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쓰고 있는지

땀에 전 수건 하나가 물탱크 옆에 걸려 백지처럼 펄럭일 때

하나였다가 둘이었다가 하나도 둘도 아니었다가 - P129

하늘은 천천히 책장을 덮는데
사람이
사라지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다

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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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이 도시의 많은 것들이 그랬는데. 매혹이면서 절망인, 실패이면서 바람인 것들.
그러면서 나는 계속해서 이 빌딩에서 저 빌딩으로, 저 빌딩에서 그 빌딩으로 향하고 있었다. 들어갔다 나갔다 다시 들어갔다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살고 있었다. 나는 자꾸 빌딩에 있었다. 먹고자고 놀고 일하고, 가끔은 사랑을 하면서. 사랑도다름 아닌 빌딩에 있었다. 그 사랑은 여지없이 짓궂었다.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계단은 가파르고 엘리베이터는 차가웠다. 답답할 때면 옥상에 올라보지만 내가 찾는 것은 도무지 없었다. 나는 없었다. 있었다 없었다 했다. 나는 자꾸 이곳에 없었다. - P8

언제부터였을까. 처음 불빛에 사로잡힌 게.
스물한 살에서 스물두 살로 넘어가던 겨울의 시간이 불현듯 떠오른다. 경주의 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앓는 사람을 눕혀두고 틈날 때마다 골목 여기저기를 쏘다녔던 때. 그 무렵 나는, 죽음이 지나치게 가깝다고 느꼈다. 감히 고백하건대, 이렇게나가까이 온 죽음을 어찌할 도리가 없겠다고. 그런나의 마음을 끈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골목의 불빛이었다. 저녁이면 어김없이 차가운 길을 데우던빛. 늘 같은 자리에 매달려 손짓하던 십자가, 십자가 같은 그 빛만을 나는 간절히 원했다. 기어코 처량해지고 마는 일이겠으나.......
가만히 누워 견디기 힘든 밤이면 무작정 밖으로 나가 불이 총총히 켜진 낯선 연립 앞에 한참을 서 있곤 했다. 창을 가득 메운 저 밝은 걸 가진 - P15

이들은 슬프지 않겠구나, 아프지 않겠구나, 멋대로상상했다. 부러움과 두려움, 열패감 같은 모호한감정들이 마구 뒤엉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을 떠나보낸 뒤 나는 비로소 방에 들어 불을 켤 수 있었다. 그때 엄습해온 묘한 안락감. 나도 빛을 가졌구나 마침내 한 사람의 죽음으로 하나의 빛을, 하나의 삶을 얻었구나. 더불어 밀려든 괴상한 자책 속에 나는 살고 싶지 않았다. 살면 안 된다고, 그래서는 안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보세요. 얼마나 우스운지.) 나는 온전히 살았고, 어쩌면 제법 잘 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왜 아직 밤의 골목을 쏘다니는지. 궁상스러운 열망을 놓지 못하는지.
요즘도 나는 가끔 그때 그 시간 속에 나 자신을 두고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얼른 돌아가야할 것만 같은. 그러면서 그때의 나를 마주하게도된다.
바깥, 바깥에 있는 나를.
이제는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바깥에 있는 - P16

사람, 그게 바로 나라고.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정해진 것 같다고.

스스로를 좋아할 수 없는 만큼 나는 사람이라는 족속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빛속에 든 사람에 대해서라면 아직 좋아하기를 포기하지 못한 건지도. (이게 대체 무슨 앞뒤 없는 마음일까요?) 문 안쪽에 모여 앉은 사람들 말이다. 서로에게맛있는 걸 권하고 서로의 어깨에 붙은 머리카락같은 걸 떼어주면서 또렷이 미소 짓는 사람들. 그사람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일만이 내 오랜 몫이 아닐까.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일, 그런 일을 나는 종종 한다. 모임이 한창인 때 조금 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서서 환한 창저편을 바라보는 일, 밥집이나 술집, 혹은 카페. 친분이 있는 시인의 낭독 행사가 막 끝난 서점일 때도 있다. 안을 들여다보면, 그 안은 너무 따스한 것이다. 모두 웃고 있는 것이다. 조금의 결락도 없는 - P17

것처럼. 꼭 그런 것도 아닐 테지만,
나는 조금 망설인다.
그러다 잠시, 아주 잠시 그 속에 있게 된다.
그리고 이내 겉도는 사람이 된다. 가까스로 주고받던 대화는 멈춰버린다. 정적만이 남는다.
문제는 나다. 왜 궁금하지가 않을까? 왜 아무것도 묻고 싶지가 않을까? (앞뒤 없는 마음이란 대체!)너라는 사람이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나, 나는 왜하필 이런 사람일까? 하필 이런 나를 너 또한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고, 무언가 단단히 어긋난 기분. 늘 반복되는 이런 식의 상황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러나 실은 그리 슬픈 일도 아니지. 나는 사람을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런 일쯤 그냥 시시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서둘러 빛 속을 빠져나온다.
다시 골목을 걷는다. 집으로, 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혼자만의 자리로, 도착하면 나 또한 맨 먼저 불을 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먹고 자고웃고 우는 것이다. 누군가 한 번은 내가 사는 4층 - P18

창을 올려다볼지도 모른다. 새벽까지 불은 꺼지지않을 테고, 누군가는 희미하게 매달린 빛을 보며막연한 행복을 상상할지도 모른다. 자신 곁에 없는온기를.
그런 헐거운 상상만으로 어떤 이는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터덜터덜 걸어오늘의 끝이 아닌 내일의 시작을 기약할 수 있을것이다. 허상에 가까운 것을 상상하고 갈망하며 버티는 바깥의 존재. 어쩌면 모두, 하나같이.

빌딩이라는 크고 단단한 상자 속에 든 작고
무른 사람. 이따금 상자 밖을 어슬렁거리는 사람. 상자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사람.
결국 사람.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 P19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시간이 멋대로 잘도흐르는 동안 나는 언제나처럼 명진관 그늘진 복도를 오갔다. 그늘이 반쯤 삼켜버린 그림자는 여느 때처럼 볼품없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얼마간 휴학을 했고 이후 어렵게 복학을 했다. 돌아오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너무 깊이 좋아했기 때문에, 라고 한다면 그 또한 얼마나 우스운지. 오글거리는지. 그사이 나는 가장이 되었고, 지나친 아르바이트로 몸과 마음이 부서질 듯 아팠는데……. 그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마저 없었다면 나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견디기위해 하는 수 없이 사랑이라는 과장된 마음을 택했다고 하는 편이 어쩌면 옳을 것이다. - P93

너는 이제 스물세 살이고, 막 시라는 걸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 사랑도 결국 눈을 감겠지.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꽤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실은 그리 긴시간도 아니다. 슬픈 일도 기쁜 일도 아니다.
스물세 살, 아직 고아가 아니고, 사랑 때문에,
단지 사랑 때문에 울 수 있는 바로 이 시간을 훗날의 너는 이따금 그리워하게 된다. - P100

암순응


캄캄한 방에 누워 마침내

빛을
믿는다

잘 자, 그 마지막 말을

잘자,
또 잘자 - P101

나는 알지 못하는.
그 건물이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프랜차이즈 카페에 앉아 나는 무수히 보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문 쪽을 흘끔거리는 사람. 휴대폰을 붙잡고 놓지 않는 사람. 잡지를 뒤적이는 사람.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노트북을 들여다보는 사람. 노트북 앞에서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사람. 그런 사람들 사이 끼여 앉아 나 또한 무언가 끄적이곤했다. 시를 쓰곤 했다. 그에 대한 시를 쓰고 싶어서, ‘그는......‘이라고 시작하면 너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와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쓰지 못했다. 그런 것이야말로 어쩔 수 없는
사랑의 증상이라고 나는 믿었다. - P104

나는 두려워졌다. 쓰는 일이. 나를 드러내는일이. 솔직함을 빙자해 드러낸 나의 위태로움. 나의 균열. 금방이라도 무너져 무고한 이들을 마구해치고 나 자신을 다치게 할 나의 쓰기. 불쑥 고백하자면, 글을 쓰는 나는 조금도 건강하지 않다. 나의 내면은 자주 비틀댄다. 합리적이라고도, 윤리적이라고도 도무지 할 수가 없다. 이런 주제에 나는쓰는 일을 지속하며, 그 과정에서 자주 무언가를, 누군가를 ‘사유화私有化한다. 함부로 감정을 이입하고 내 식대로 해석한다. 마구 가져다 써버린다. 그것이 빚는 사태란, 결코 간단치 않다는 생각.
어떻게 써야 할까.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수시로 검열하며? 윤리적으로 타당하다고 판단되는이야기만을 고르고 골라? 이런 것이 능사일까. (그 - P114

렇다면 이는 이대로 또 무서운데.) 애당초 이런 문학은, 예술은 가능한 것일까. 쓰는 이의 주관적 인식이나의식을 완전히 탈피한 어떤 것? 불행히도, 그럴 수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테드 휴즈가 Poetry inthe Making』(1978)에 적었듯, 문학을 하는 "우리는사진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들어맞는 음악이 수반된 감각막을 원하는 것"이므로. 인간 중심의 통념으로 세계를 명명함으로써 진실이 왜곡되는 것을 거부한, "있는 그대로"를 주창한 문학사속 저 유수의 시인들이 물론 건재하지만, 그 태도의 염결성에 대해 내가 가지는 존경심과는 별개로,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인간의 지극히 인간적인 꿈이 아닐까 생각해왔다.
아, 쓰기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무서워서한 줄도 쓸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 자체가 터무니없는 비극이라고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다음 날또다시, 어김없이 노트북 앞에 앉는 것.
정말이지 끔찍하지 않을 리가. - P115

2015년 첫 시집을 낼 때도 그랬다. 편집 막바지에 이르러 나는 내가 쓴 시 한 편을 두고 고민에빠졌다.


폐수종의 애인을 사랑했네 중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용산우체국까지 대설주의보가 발효된 한강로 거리를 쿨럭이며 걸었네 재개발지구 언저리함부로 사생된 먼지처럼 풀풀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도시의 몸 구석구석에선 고질의 수포음이 새어나왔네 엑스선이 짙게 드리워진 마천루 사이 위태롭게 선 담벼락들은 저마다 붉은 객담을 쏟아내고그 아래 무거운 날개를 들썩이던 익명의 새들은남김없이 철거되었네 핏기 없는 몇 그루 은행나무만이 간신히 버텨 서 있었네 지난 계절 채 여물지못한 은행알들이 대진여관 냉골에 앉아 깔깔거리던 우리의 얼굴들이 보도블록 위로 황망히 으깨어져갔네


「용산을 추억함」이라는 시의 일부. 2009년 - P116

용산 참사로부터 촉발된 이 시는 여러 면에서 내게 특별하다.
참사가 발생한 2009년을 전후해 나는 몇 년간 용산에 위치한 직장에서 근무했는데, 그 때문에 그곳 분위기를 다소간 생생하게 접할 수 있었다. 아픈 풍경은 어째서인지 내 안에 움츠린 또 다른 아픔을 불러냈고, 용산은 그렇게 ‘사적인 공간‘이 되어버렸다. 이 시는 분명 그때 그 용산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용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기도 하다. 나는 이 부분이 늘 불편했다. 너무 쉽게 용산을 사유화했고, 비극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노래한 것이 죄스럽게 여겨졌다. 그래서 이 시를 시집에 싣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편집 막바지까지 고민한 기억이 난다. 늦은 밤 전화기를 붙들고 해설을 쓴 ㄴ 평론가께 토로하듯 사정을 이야기한 적이있다. 공교롭게도 시집 해설의 주요 부분이 이 시를 다루고 있었고, 나는 해설을 수정해줄 수 있는지 어려운 부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ㄴ 평론가는 물론 내내 너그럽게 받아주었지만 속으로는 제 - P117

법 난감하지 않았을까.
일련의 과정 끝에 시를 그대로 수록하기로마음먹은 다음에는 제목이라도 바꾸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용산‘이라는 무거운 짐을 그저회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목을 바꾼다고해서 용산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어쩔 수 없겠다, 반쯤 체념한 채 버젓이 제목에 용산을 달게 된 이 시는 줄곧 나를 고민스럽게 했다. 나는 그때 왜 하필 전경들이 에워싼 남일당 건물앞에 멈춰 섰고, 또 왜 하필 그곳으로 나의 상처들을 불러 모은 것일까. 명확히 설명할 수도, 이해할수도 없었다. 아직까지 나는 이에 얽힌 의아함과 두려움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나의 서툰 자의식이 누군가의 상처를 함부로건드리고 그것을 누차 헤집을 수 있다는 사실. 무엇보다 이건 글이니까. 더욱이 글은 말이나 노래처럼 날아가지도 않고 그 자리 그대로 박제된 채 남아버리니까. 아, 무서워라.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썼다가, 이튿날 장마로 구멍이 난 옆집 천장에 - P118

서 콸콸콸 억수가 쏟아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식이다. 비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 그런 적나라한 현실은 더 이상 드물지 않고......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다 성장의 과정이라고 사람 좋은 위로를 건넬지도 모른다. 만물이 변화하는 것과같이 글을 쓰는 자아도 자연히 상황에 따라 변화하고 성숙해가는 것 아니겠냐고. 맞다,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겠지, 수긍하면서도 거듭되는 황망함을 성숙이라고 혹은 진전이라고 해도 좋은 것일까회의하게 된다. 모르겠다. 알 수 없다. 세상에는 온통 알 수 없는 것투성이. 갈수록 이런 말만 되풀이하게 되는 것이다.


앞서 한 「용산을 추억함」에 얽힌 이야기를이후 한 문예지에서 짧게나마 언급한 적이 있다. ㄴ평론가와 함께한 대담 지면에서였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는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역사를 시인의 사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 조금만 더 너그러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최 - P119

•소한 저같이 예민하지 못하고 아둔한 사람은 그렇게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면 다시 현실을 들여다보지 못할 때가 많거든요. 소란 씨는지나치게 낭만적인 것에 대해 우려했습니다만, 작품은 시인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반드시 독자들을거치게 되잖아요. 그것이 어디로 중폭될지 조금은너그러운 시선으로 봐주었으면 합니다." 고마운 조언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사려 깊은 이야기에 크게안도할 수 있었던 한편, 또다시 복잡하게 다가오는지점은 있다. 여기, "작품은 시인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반드시 독자들을 거치게 된다"는 부분. "그것이 어디로 증폭될지" 갖은 가능성을 지닌다는 부분. 이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고민은 점차로 더 커진다. 이는 말하자면, 작품은 필연적으로 확장되고 끝내 어떤 식의 오독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창작자의 의도를 뛰어넘는 창작물은 기어코 생겨나고 마는 것.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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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立秋)


신새벽에 요사채 방문 열고 밖에 섰다
승복 한 벌 가을비에 젖고 있다
두 철째 묵언중인 젊은 납자(衲子)
가슴에 다 마르지 못한 것들 저리 많았는가
속살 베이도록 단단히 풀기 먹였는데
잠시 고개 돌리면
이 산중에서도 젖고 또 젖었다
두어라, 서둘러 걷을 일 없다
빳빳이 세웠던 풀기 다 빠져야
곧추선 허리 풀린다
그리운 이름 한 사발쯤 가슴으로 젖어야
이 겨울, 다시 눈 푸르게 넘기지 않으련
비 들이친다 문 닫아라! - P10

새벽별


외로움도 오래되면 온몸 따스히 데워주는 것인지, 홀로 뽑아낸 거미줄 같은 길이 달빛에 하얗게 내려앉는 밤이면, 가슴에 그토록 사무쳤던 사람 아니 죽어도 용서할수 없을 것만 같던 사람…… 사람들, 하나씩 쓸쓸한 길을 따라 내게 찾아와, 벚나무 아래 삐걱이는 평상 위에 나란히 걸터앉아, 목젖을 적시는 묵은 이야기 두런두런 나누기도 하다가, 붉은 홍시 위로 가을비 번져오는 신새벽,오줌누러 뛰어가면 오돌오돌 떠는 어깨 뒤를, 어느결엔가 당신은 다가와 꿈결인 듯 나를 감싸안기도 합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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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믿음보다는 배반에 기댄다는 걸 너무
오래 믿어왔다. 문학은 확신보다는 불안에 기댄다는 걸 너무 오래 확신해왔다. 문학은 내 이야기를 말하려는 욕망보다는 너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는 욕망에 기댄다는 걸 너무 오래 말해왔다. 믿음이 아닌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닌가. 확신이 아닌 것을 확신하는 것은 확신이 아닌가. 너의 이야기를 듣겠다고 계속해서 말하는 것은 말하기가 아닌가. 모순 속에 갇혀 고착돼 있는 문학에게 어떤 생명력이 깃들 수 있을까. - P89

문학이 한 시대의 명민한 증인으로 존재한다고 하자. 누구의 증인이라 말할 수 있을까. 누구의 손끝에서 가장 예민한 증언이 태어나고 있을까. 그자는 문학장의 이너서클에 있을까. 아닐 것같다. 아무래도 문학인의 세계는 성 같다. 내부가있고 외부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내부에 있는 사람이 맞는 것 같다. 내부에 있는 사람이 문학에 대해하는 이야기는 누가 듣게 될까. 나는 누가 읽기를바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걸까. 내부는 아닌 것 같다. 이 성 바깥을 상상한다. 우선, 성벽 바깥은 해자로 둘러싸여 있을 것이다. 아무나 이성 안에 들여놓지 않기 위해서 문지기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 성안으로 들어오려면 출입증을 보여주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 바깥에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쓰기 위해 모이는 사람과 읽기 위해 모이는 사람. 어디선가 누군가가 무언가를…… - P90

문학장은 완고하고 폐쇄적이다. 문학 하는 우리의 환경을 둘러볼 때의 내 감회는 폐소공포증과 흡사했다. 내가 선택한 나의 환경이 언젠가는 내게 이런 유의 공포를 주는 공간으로 체감될 거라는 걸 설마 나는 몰랐을까. 잘 알고 있었으리라. 그걸 견딜 힘과 새로운 방법에 골몰할 줄 아는 힘을 얻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었다.


문학적이라 여겨왔던 것들과 매혹되어 수용해왔던 문학적 공기를 모두 해독解毒하고 난 이후의 진공 상태를 상상하며 살아가다 보니, 시 쓰는 힘에 의해서보다는 시 쓰는 부력에 의해서 부유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런 상태라면, 출구라든가, 개방감이라든가, 숨구멍 따위는 필요하지가 - P91

않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꿈꿔본 적 없었던 문학적 자아와 맞닿은 채로. 생각지 못했던 방식으로 오랜 이 폐소공포증을 나는 벗어나는 중이다. - P92

"나는 어째서 이 시집이 별로인가?"에 봉착해서 무척이나 답답해하던 그 시절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항상 머릿속에 맴돌았고 암담한 느낌마저들었다. 누구의 안목도 믿지 않은 채로, 아무도 좋다고 말해준 적 없는 시집을 찾아 헤맸다. 쉽게 찾아지지 않았지만 그런 시집을 가까스로 만났다. 아주아주 마음에 들었다. 너무 좋아서 얼굴이 빨개질 정도였다. 너무 기뻐서 시집을 꼭 껴안고 어디 잠시 숨어 있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 시집은 그때 이후 줄곧 유일한 ‘나만의 시집‘이다. 1991년에초판이 발행되었고, 지금은 구하기 쉽지 않은 시집이다. 시인은 이후로 시집을 더 이상 출간하지않은 것 같고, 이 시인을 만난 적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만나본 적이 없다. 이 시인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수십 년 동안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 P104

한편 정도를 인용해볼까 싶어 시집을 펼쳐읽다가 꼬박 하루가 갔다. 시인의 숨결이 너무 부드럽고 너무 진지해서, 시집 속에서 한 편을 꺼내었다가는 이내 그 문장이 바스러질 것만 같다. 그런 시집이 있었다. 도대체 어떤 시집이냐고 누군가가 정말 궁금해한다면, 직접 만났을 때나 ㅡ여러 번 고민을 좀 해본 후에 귓속말로나ㅡ알려줄 생각이다. - P105

기억은 골똘하게 집중할 때만 가까스로 완성에 가까워진다. 향후 반복해서 상기하는 것으로써 어쩔 수 없이 변형된다. 변형된 기억은 종내 완고해진다. 섬세함은 유실되고 이데올로기가 덧입혀지기 십상이다. 좋은 소설은 기억하고 있던 것을 되새김질하듯 기록하지 않는다. 비어 있던 기억의 구멍들을 두터운 진실들로 채워나가기 위하여기억하지 못했던 기억들을 비로소 소환하거나 발명한다. 기억술이 뛰어나서라든가 소중히 기억해오던 것을 마침내 기록하기 위하여 집필을 시작한걸로 짐작되지 않는다. 기억을 기억의 상자 속에서꺼내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길목에서 기억을 불현듯 마주치는 일과 같아진다.
순일하게 시선을 집중하는 것으로써 단 
하나의 이야기가 생겨난다. 마침내 시간이 낯설게 소 - P108

환될 때 우리가 우리 삶에 미묘한 애착을 장착할수 있다는 것을 조용조용 알려준다. 애착해보지못했던 애착, 애착이 될 수 있으리라 상상해본 적없는 애착, 애착해야 한다고 주장되어온 것들의뒤에서 발견되기만을 기다려온 애착.
다른 장소를 꿈꾸지만 다른 시간을 만나는여행처럼, 내 삶이 마치 거기에 있어온 것처럼 여겨질 때야 나는 여기에 온전히 있을 수가 있다.
익숙한 시간이란 건 내게 있어본 적 없다. 서툴렀고 어리석었으나 좋았다.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그 어떤 사건도 사소한 적이 없었고, 세세한 일들을 잊지 않고 싶은 일들로, 열심히 기록해두고는 했다. 세세함은 항상 내게 힘이 된다. 세세히 기억한다는 것은 기억하던 대로 기억하는 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커다란 힘이 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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