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모리슨Toni Morrison


1931년 미국 오하이오주 로레인에서 태어났다. 하워드대학교에서영문학을 전공하고 코넬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여러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쳤고 랜덤하우스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며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70년 첫 소설가장 파란 눈으로데뷔했고, 1973년 출간한 두번째 소설 「술라」가 전미도서상 후보에오르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후 1977년 솔로몬의 노래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1987년 출간된 「빌러비드」로 이듬해 퓰리처상, 로버트 F. 케네디 상 등을 수상했다. 「빌러비드」는 오프라 윈프리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1992년에는 음악에서 적극적으로 모티프를 차용한 소설 「재즈』를 발표해 평단의 호평을 얻었다.
1993년 "독창적인 상상력과 시적 언어를 통해 미국 사회의 핵심적인문제를 생생하게 담아냈다"는 평과 함께 흑인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96년 전미도서상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2006년프린스턴대학교 교수직에서 퇴임한 후에는 집필에 매진해 소설자비」 「고향」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 등을 발표했다. 2012년 버락오바마 대통령에게서 자유 훈장을 받았고, 2019년 88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숨을 거두었다.

가장 파란 눈은 작가의 고향 로레인을 배경으로, 파란 눈을 가지면끔찍한 현실이 뒤바뀔 것이라고 믿은 흑인 소녀의 비극을 다룬 소설이다. 차별과 빈곤, 폭력이 대물림되는 흑인 사회의 슬픈 연대기가 어린아이들의 순수함과 대비되어 더욱 강렬하게 그려진다.

서문


일시적으로든 지속적으로든, 누군가 자신을 싫어하거나 거부했을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모르는 사람은 분명 없을 것이다. 고작 무관심이나 가벼운 짜증 정도의 기분일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상처가 될 것이다. 우리 중에는 실제로 미움을 받는 일이 어떤 건지 아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것도 본인은 어떻게 해볼 수도, 바꿀 수도 없는 면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질 때 그 미움이나 증오가 정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당신이 그런 대우를 받을 까닭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얼마간 위로가 된다. 그리고 가족이나 친구가 정서적으로 힘이 되어주고지지해준다면 피해는 덜해지거나 사라진다. 인간으로 살아가다보면겪게 되는 (심각하든 심각하지 않든) 스트레스로 여기게 된다.
『가장 파란 눈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내 관심은 그보다는 다른 것에 - P7

있었다. 남들의 멸시에 대한 저항이나 그것을 피하는 방법이 아니라,
배척을 정당하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때 초래되는 훨씬 더 비극적이고 파괴적인 결과에 관심이 있었다. 나는 지독한 자기비하의 피해자가 결국 위험하고 난폭한 성향이 되어, 자신을 거듭거듭 욕보이게될 적을 재생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다른 부류는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고, 자신들에게 부족한 강한 자아상을 건네주는 구조 속으로녹아들어간다. 대부분은 그것을 극복하고 성장하지만 말없이, 이름도없이, 그것을 표현하거나 인정할 목소리도 없이 붕괴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자아를 일으켜세울 ‘두 다리‘를 가지기이전의 아이들에게 자존감의 종말은 금방, 쉽게 일어날 수 있다. 무관심한 부모와 무시하는 어른, 자체의 언어와 법과 이미지로 절망을 강화하는 세상에 어린 나이라는 취약성이 더해지면 파멸로 이르는 길은 확정적이다. - P8

그래서 내 첫 책인 이 소설은 어린 나이나 성별이나 인종으로 인해해로운 외부 영향력에 가장 저항하기 힘들 법한 인물의 삶으로 들어가려는 기획이었다. 심리적 살인이라는 암울한 서사로 시작하고 나니, 주인공의 수동성에서 서사의 공백이 초래되어 주인공 혼자로는 지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인공의 곤경을 이해하고 공감까지 보낼 수있는, 하지만 든든한 부모와 왕성한 혈기라는 이점을 지닌 친구들과급우들을 만들어냈다. 그들도 무력하긴 마찬가지라 친구를 세상에서구해내지는 못했고, 주인공은 망가져버렸다.
이 소설의 첫 구상은 어릴 적 친구와 나눴던 대화에서 나왔다.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무렵이었다. 친구는 자기 눈이 파란색이면 좋겠다고 - P8

했다. 나는 파란 눈을 가진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 바람이 이루어진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했고, 그러자 반감이 일었다. 슬픔이 담긴 친구의 목소리가 동정을 바라는 투라서 동정을 꾸며 보이긴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친구가 그런 훼손을 원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서 그애에게 ‘화가 치밀었다.
그때까지 난 예쁜 사람, 사랑스러운 사람, 멋진 사람, 추한 사람을 보며 살아왔다. 그리고 ‘아름답다‘라는 단어를 당연히 사용하기도 했겠지만 그것이 얼마나 충격적인지는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 충격의 강도는 아무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 그것을 소유한 사람조차, 아니 본인이라 특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맞먹었다.
내가 그때 살펴보았던 그 얼굴만의 문제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날 이른 오후 거리에 깃든 적막, 빛, 그 고백을 듣던 순간의 분위기도 작용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때가 내가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알게된 순간이었다. 나 혼자 상상해왔던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은 그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본인이 실행할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 P9

「가장 파란 눈」은 그런 문제를 두고 무슨 말이라도 하고자 했던 시도다. 그애는 어째서 자신이 소유한 것을 체험하지 못했는지, 혹은 영원히 체험하지 못할 것인지에 대해서. 또한 그애는 어째서 그렇게 근본적인 변화를 원했는지에 대해서. 그애의 욕망에는 인종적 자기혐오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후 스무 해가 지났지만 그런 것이 어떻게 습득•되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누가 그런 말을 했을까? 자기 본연의 모습보다 괴물이 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누가 그애에게 심어주었을까?

그애를 보며 모자란다고 아름다움의 저울에 올려보니 너무 빈약하다고 여긴 이는 누구였을까? 이 소설은 그애를 단죄하는 시선을 쪼아 없앤다.
1960년대에 인종적 아름다움을 회복하자는 운동이 이런 생각을 불러일으켜, 나는 그런 주장의 필요성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남들에게매도당할지언정, 공동체 내에서는 이 아름다움이 왜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못했을까?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어째서 광범위한 대중적 발화가 요구되었을까? 그 대답은 금방 자명해졌고 지금도 그러하니, 총명한 질문들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이 소설을 시작한 1962년과 이것이한 권의 책을 이루게 된 1965년에는 그렇게 자명하지 않았다. 인종적 아름다움의 주장은 모든 집단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문화적·인종적 약점에 대한 자조적이고 익살스러운 비판에 대한 반발이 아니었다.

그것은 외부 시선에서 유래하는 절대불변의 열등함이라는 가정을 내면화하는 해로운 과정에 대한 반대였다. 따라서 나는 한 인종을 통째로 악마화하는 기괴한 현상이, 아이라는 사회의 가장 연약한 구성원이자 여자라는 가장 취약한 구성원인 인물 속에 어떻게 뿌리박게 되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무심한 인종적 멸시로도 초래될 수 있는 인간성의황폐화를 이야기로 구성하면서 난 전형적이 아니라 독특한 상황을 선택했다. 페콜라의 사례가 지닌 극단성은 평균적인 흑인 가족이나 화자의 가족과 달리 구성원을 무력하게 만드는 무력한 가족에서 기인한다. 페콜라의 삶이 비록 남다르지만 그 취약성의 몇몇 면모는 모든 여자아이 안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아이를 말 그대로 산산이 부숴버린 사회와 가정의 폭력성을 탐구하면서 난 일상적이거나 예

외적이거나, 무시무시한 배척의 여러 장치를 마련했는데, 그러는 내내페콜라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악마화 과정에 공모하는 일이 생기지않도록 무진 애를 썼다. 다시 말해 페콜라를 맹비난하고 그애의 파멸에 기여한 인물들을 비인간적인 인물로 그리고 싶지 않았다.
한 가지 문제는 소설적 탐구에서 그렇게 연약하고 취약한 인물에게큰 비중을 두면 그런 인물은 아무래도 산산이 부서지기 쉽고, 그러면독자는 그런 상황을 따져 묻기보다 그 인물을 적당히 동정하고 말 수있다는 것이었다. 서사를 여러 부분으로 나눠 독자가 재배열하도록 했던 내 해결책은 당시엔 좋은 방안으로 보였는데, 지금 보니 만족스럽게 실행된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효과도 없었다. 마음이 움직이기보다 동정심만 보인 독자들이 많았으니까.

또다른 문제는 당연히 언어였다. 멸시하는 시선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전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 소설은 인종적 자기멸시라는 쓰린 신경을 타격하고 드러낸 뒤, 그것을 마취제가 아니라 내가 처음으로 아름다움을 경험했을 때 발견한 작용을 모사하는 언어로 진정시키고자했다. 그 순간은 워낙 인종에 침윤되어 있었기에 내 친구가 원했던, 아주 검은 얼굴의 아주 파란 눈에 내가 느꼈던 반감, 그애가 아름다움에대한 내 관념에 해를 가했던 일), 난 명백하게 검은 글쓰기를 하려고고군분투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들에도불구하고 난 여전히 그것을 추구할 것이다.
내 언어 선택(말하는 투의 구어적 대화체), 충분한 이해를 돕기 위해 흑인문화에 뿌리박힌 관례에 의존한 일, 직접적인 공모와 친밀함의

효과를 (거리를 두어 설명하는 구조 없이) 추구했던 일, 그리고 침묵을깨뜨리면서 동시에 형성하려는 시도는 미국 흑인문화의 복잡성과 풍부함을 문화라는 이름에 값하는 언어로 변형하려는 시도다.
표현적 언어가 내게 제기했던 문제를 지금 다시 돌아보니, 그것이여전히 유효하고 끈질기게 지속된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교양 있는‘
언어가 인간의 존엄을 떨어뜨린다는 말이 들리고, 문화적 푸닥거리가문학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상황이 눈에 띄고, 효력을 없애는 은유의호박 속에 자신이 보존 처리되는 상황을 목격하는 지금, 나의 서사기획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어렵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기 집이 있다. 녹색과 흰색이다. 문은 빨간색이다. 무척 예쁘다.
여기 가족이 있다. 어머니, 아버지, 딕. 제인은 녹색과 흰색의 집에 산다. 아주 행복하다. 제인을 보라. 빨간 원피스를 입고 있다. 놀고 싶다고 한다. 누가 제인과 놀아주지? 고양이를 보라. 야옹야옹 운다. 이리와서 놀아. 이리 와서 제인이랑 놀아. 고양이는 놀아주지 않는다. 어머니를 보라. 무척 상냥하다. 어머니, 제인과 놀아줄래요? 어머니가 웃는다. 웃어요, 어머니, 웃어요. 아버지를 보라. 아버지는 몸집이 크고 힘이 세다. 아버지, 제인과 놀아줄래요? 아버지가 싱긋 웃는다. 싱긋 웃어요, 아버지, 싱긋 웃어요. 강아지를 보라. 멍멍 짖는다. 제인이랑 놀아줄래? 강아지가 뛰는 걸 봐. 뛰어, 멍멍아, 뛰어. 봐, 봐, 여기 친구가오네. 친구는 제인과 놀아주겠지. 재밌는 놀이를 하겠지. 놀아, 제인, 놀아봐.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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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곳에서 내가 글을 쓴다면 ‘살고 감동하고 사랑하라‘가 되려나. 살아 있다는 감각이 솟구친다. 거리낄 것이 없는 완전한 자유 안에서 나는 젊은 사람들처럼 뛰었다가, 아줌마 아저씨들의 속도에 맞춰 걸었다가 또 내 마음대로 움직였다. 언덕 위에 올랐다가 호숫가로 내려가기도 했다가, 커다란 나무에 몸을 바싹 붙이고 앉기도 한다. 작은 반짝임에도 사소한 촉감에도 아낌없이 감동한다. 이러려고 그토록 호들갑을 떨며공원 근처로 숙소를 고집했던 걸까. 한 번도 내 것인 적이 없었던 아침 시간을 내 마음대로 써보고 싶어서. 평생을 한결같이미워했던 아침 시간들에게 정당한 자리를 찾아주고 싶어서. 아침부터 숨쉬듯 쉽게 행복해지고 싶어서.


살고 감동하고 사랑하고 있다.
이곳이 나의 매일이라는 것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만들어낸 이 삶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 P203

미술관을 좋아하지만 미술적 지식은 부족한 나는 언제나 나의 느낌에 충실하다. 느낌이 오는 작품만 들여다보고, 느낌이오지 않는다면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오늘 이곳에서 나는 다르다. 나는 유나 작가님의 오일 파스텔 제자. 작가님과 우리는 한 달간 꽃을 그릴 예정이다.
운명처럼 전시장 입구에서 밀레의 <데이지 꽃다발> 그림이나를 맞아준다. 덕분에 첫 그림부터 나는 좀처럼 떠날 수가 없다. 그림 앞에 딱 붙어서 하얀 데이지꽃을 표현한 파스텔의 선들을 유심히 본다. 뒤에 배치된 꽃과 전면에 나선 꽃이 어떻게다르게 표현되는지 들여다본다. 그늘 속에 잠긴 꽃들은 또 어떤 색으로 어떤 농도로 표현했는지도 유심히 살펴본다.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서 꽃을 클로즈업해 찍고, 따라 그려보고 싶은 부분들도 또 찍는다. 다음 그림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 P219

도 다시 돌아와서 또 들여다본다. 마침내 결론을 내린다. 밀레, 훌륭한 화가였구먼. 그의 <이삭줍는 사람들>과 <만종>이 아무리 유명하든 말든, 나는 꾸준히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자극적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담담한 <데이지 꽃다발)에나는 마음을 홀라당 빼앗긴다.
겨우 그 그림 앞을 떠나자마자, 또 바로 다음 그림에게 붙잡힌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하얀 강아지를 안고 있다. 나는 하얀 원피스의 레이스도, 하얀 강아지의 털 하나하나도 좀처럼 믿기지 않지만,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이 하얀데 그토록 또렷하게 구분되며 자신의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 도대체 믿기지 않는다. 분홍색 옷을 입고 검정 모자를 쓴 여자를그린 마네의 파스텔화는 또 어떻고. 들여다볼수록 머릿속에 물음표만 늘어났다. 여인의 머리와 모자를 표현한 검은색, 얼굴을 표현한 흰색, 입술 위의 빨간색, 옷을 표현한 분홍색, 바탕을 표현한 회색, 딱 다섯 가지 색으로 이런 그림이 가능하다고? 드가의 발레 소녀들은 또 어떻고. 영원히 토슈즈를 고쳐매고 있고, 영원히 무대 뒤에서 뛰어나가기 일보 직전인 소녀들. 영원히 보고 있어도 영원히 새로울 그림들. - P220

지쳐서 일찍 집에 들어온 어느 오후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거세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 옆커다란 창을 활짝 다 열었다. 침대에 대자로 누워서 빗소리만들었다. 도로 위를 미끄러지는 차들의 소리가 지나가고, 빗속을 뛰어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고, 다시 빗소리. 안과 밖의 선명한 풍경 차이. 포근한 침대와 시원한 비. 얇은 잠옷과 창밖의 흔들리는 나뭇잎들. 적막과 빗소리. 일상과 비일상. 경계에 누워 경계의 시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어떤 현실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20년간 지속되어온 나의 일상과 지금 이시간의 거리가 가늠되지 않았다. 너무나 일상적인 한순간처럼보이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나의 일상이 아닌 곳에 일상인 양천연덕스럽게 누워 있다. 생의 이런 무게감은 너무나도 생소해서 이것이 나의 생인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비는 계속 내렸다. 아직 밖은 밝았다. 뜨거웠던 공기가 진정이 되고 차가운 바람이 슥 불어 들어온다. 나는 창문을 닫을 생각이 없다. 이불 - P246

속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 모든 것이 아무리 비현실이라도, 이 바람의 서늘함과 이 이불의 포근함은 너무나도 나의현실이다.


저녁이 되어 비가 그치고 난 후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거실 창문을 다시 열고, 창문 앞으로 옮겨둔 나의 작은 책상에 저녁 식사를 차린다. 토마토를 썰고, 민트잎을 마음껏 따서 넣고 치즈도 썰어 넣는다. 샐러드 채소에는 블루 치즈를 마음껏 넣는다. 오이절임에도 딜을 아낌없이 넣는다. 세 가지 샐러드를 앞에 두고, 또 스파클링 와인 한 잔을 꺼냈다. 내 방식대로 내가 먹고 싶은 걸 가장 신선하게 먹는다. 가장 신선하게마신다. 음악을 틀고 창문을 더 활짝 연다. 마침내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살면서 나에게 가장 다정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을. - P247

이 안전은 우연이다. 우연히 내가 저기에 없었고, 우연히 누군가가 거기에 있었다. 우연히 내가 안전하고, 우연히 누군가가 위험에 처했다. 일상이라 단단히 믿고 있던 지반이, 안전하다고 믿고 있는 이 모든 순간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 나의 안전은 얼마나 수많은 우연이 결합해서 기적적으로 찾아온것인지. 이 안전에 필연은 없다. 도서관에서 읽던 책에 세월호이야기가 나와서 결국 울었던 며칠 전이 생각났다. 수많은 생이 가라앉는 순간을 모두 같이 목도한 기억이 우리에겐 있다. 이태원이라는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몇 겹으로 짓눌린 날들도 있다. 오래 아팠고, 오래 슬펐고, 오래도록 죄스러운 날들이있었다. 나의 안전은 당연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을 일상이라 부르며 이것을 당연한 듯 누리고 있지만 이것은 특별한 것. 투명하도록 얇고 우연한 안전이 손에 만져졌다. 나의 안전이 누군가의 위험을 담보로 한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누리는 모든 말 - P255

짱한 생활이 말짱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누구를 향한 건지도알 수 없는 미안함이 밀려왔다. 더는 음악 속에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창문을 열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안전을 빌었다. 그렇게 창가에 밤늦도록 앉아 있던 밤이 있었다. - P256

공연을 마치고 나와 지은 작가님과 카페에 앉아 오래도록이야기를 나눴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이야기는 글을 쓰는 이야기로 흘러간다. 본 나젤 장인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도 우리만의 작은 세계를 글로 지키고 있다. 책 읽는 사람이 드문 이시기에, 들인 노력과 받는 보상이 전혀 일치할 수 없는 이 세계를 못 떠나고 있다. 무슨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좋아하는 세상이니까 못 떠나는 거다. 파리까지 와서 한국어로 글 쓰는 일의 고단함에 대해, 우리의 같은 운명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글을 쓴다는 정체성이 파리까지 와서 새로운 인연이 되다니. 한국에 돌아와 글을 쓰는 지금에 와서야, 지은 작가님에게 받은 그 모든 마음들은 글 쓰는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특별한 유대감이었음을 깨닫는다. 그것이 한국이든 파리든 글쓰는 이의 고충은 한결같으니까. 매일 의심과 싸우며, 매일 가장 깊이 좌절하며 쓴다. 그 사실을 서로는 알고 있다. - P277

무엇을 했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대답은 쉽다. 하루는 크루아상을 먹었고 뱅센느 숲을 갔죠. 또 하루는 공연장까지 걷다가 신기한 마을을 발견했어요. 하루는 한 문장 안에 간편하게 요약된다. 하지만 그렇게 요약 가능하지 않다는 걸 나는 안다. 나만의 작고도 사소한 모험이 있었고, 그 모험 끝에 나는 요상하게 생긴 나의 보물을 꼭 쥐고 돌아왔다. 객관적으로 예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시장에서는 전혀 값이 안 나간다고 평가받을지는 몰라도,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신비로운 빛이 있었다. 그 빛이 나의 하루를 찬찬히 비추는 걸 보노라면,
그 빛 아래에서 드러난 새로운 나의 모양이 나는 참 반가웠다.


참 오래 걸렸지. 이 모양의 나를 만나기까지.
참 만나고 싶었지. 이토록 낯선 나를, - P295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이번엔 몸을 일으켜 절벽 위로 올라가는 산책 길을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시야가 달라진다. 운이 좋았다. 들꽃 시즌에 이곳에오다니. 들꽃들이 작지만 강한 어조로 이 언덕이 자기들 땅이라 외치고 있다. 특히 절벽 끝엔 노란 들꽃들이 촘촘하게 피어서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화려하게 태양빛을 반사하고 있는 에메랄드색 바다 위로 앙증맞게떠 있는 노란색 부표. 해변엔 알록달록한 사람들의 모습. 유난히 절벽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걸 좋아하는 나는(여수 향일암과 남해 보리암에 끝없이 가는 이유다) 프랑스에서도 한결같은 나의 취향을 확인한다. 왼쪽에 바다를 두고 한가롭게 절벽 위 산책 길을 걸으며 크게크게 호흡했다. 깊이깊이 숨을 들이쉬고깊이깊이 숨을 내뱉으며, 이 감각은 또 얼마나 오랜만인가 생각했다. 자연 속에서만 새롭게 깨어나는 감각들이 있다. 바다의 광활함이 주는 사고의 폭이 있고, 자갈의 재잘거림이 깨우는 청각의 예민함이 있고, 작은 들꽃들이 흔들어 깨우는 마음의 진동이 있다. 그것들이 동시에 나를 찾아와서 나는 그곳에서 아낌없이 행복했다.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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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명이 넘게 투입되어 채석장을 인위적으로 바꾸었다지만, 이곳에서 인공미는 찾아보기 힘들다.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에서 이어지는 넓은 산책로도 자연스럽게 굽어 있고, 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도 마음껏 꼬불하다. 둥근 호수도 있고, 호수 안에는 기암괴석의 절벽도 있고, 절벽 위에는 로마식 건축물의 전망대도있다. 길은 계속해서 몇 갈래로 갈라지며, 영원히 이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한다. 가도 가도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은이 커다란 공원 안에 가장 많은 것은 바로 잔디밭, 완만한 언덕에도, 가파른 언덕에도 드넓은 잔디가 펼쳐진다. 그 위로는 사람들이 빼곡하다. 물론 ‘빼곡‘이라는 단어를 쓰는 건 뷔트 쇼몽 공원에 조금 각박한 처사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아무리많아도, 그러니까 이토록 날씨가 좋은 토요일 저녁 시간에, 파리 시민 모두가 뷔트 쇼몽 공원에 온 게 아닐까 착각이 들 만큼사람이 많아도, 이 공원은 붐빌 수 없다. 여전히 한적한 공간이있다. - P199

자연의 모든 시기엔 제각각의 아름다움이 있는 법이지만, 그래도 부인할 수 없는 전성기가 있는 법이다. 나는 어쩌자고뷔트 쇼몽 공원에, 날씨 좋은 6월의 저녁에, 해가 지기 전 가장빛이 아름다울 때 찾아온 걸까. 천국에 온 게 아닐까 생각했다.
과장이 아니다. 숲의 정령처럼 높다랗게 자란 나무들이 제각각 녹색으로, 갈색으로 몸을 치장하고 잔디밭을 빙 두르고 있다. 모든 나무들이 기분 좋은 바람에 몸을 내맡기고 살랑살랑 - P199

잎을 흔들며 대화를 한다. 호수 옆 나무도 치렁치렁 머리를 수면 위로 드리우고 있다. 그 나무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고 어린 사람들은 나무 밑에, 잔디 위에, 제각각 자리 잡고 앉거나누워 있다. 웃으며 술을 마시고, 웃으며 대화하고, 다시 대화하며 웃는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사람도 많다. 모두가 이빛나는 시간이 사라져버리기 전에 아낌없이 생을 살아버리고있다.
절벽 뒤로 곧 넘어가려는 해는 마지막으로 금가루를 온 세상에 뿌린다. 그 노란 기운을 받아 나뭇잎들이 투명한 형광으로 빛나고, 물은 금빛으로 반짝인다. 사람들의 머리카락은 모두 금발이 되고, 모두의 실루엣에도 금색 가루가 내려앉았다. 그 누구도 아름답지 않을 수 없는 시간에, 눈 닿는 곳마다 아름다운 곳에 도착해버렸으니 어떻게 이곳이 천국이 아니란 말인가. 나는 끝없이 사진을 찍고, 아름다움에 발을 동동 구르고,
한숨을 푹푹 내쉰다. 이것은 카메라 안에 갇히는 자연이 아니다. 천국은 그렇게 쉽게 기록되지 않는다. 기록할 순 없어도 기억할 순 있다. 매일 오면 되니까.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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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을 때도 나는 선을 넘지 못한다. 하지 말라는 건 하지않고, 하면 안 될 것 같은 것은 건드리지도 않는다. 결국 들킬것 같고, 결국 망할 것 같다. 불안한 건 질색이다. 영화를 보다가도 등장인물들이 하지 말라는 행동을 하면 그때부터 엄청나게 불안해한다. 왜 저래. 하지마 좀. 하지만 선을 넘어야 다른이야기가 펼쳐진다. 선을 넘어야 예상치 못한 세상을 마주할수 있다. 선을 좀 넘어야 비로소 인생은 풍성해진다. 20년 만에회사라는 울타리를 넘는 용기를 내놓고도, 여기서 또 고분고분하게 주변만 알짱거리고 있는 내 손을 붙들고 친구가 선을넘었다. 그 순간 나를 찾아온 해방감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막혀 있는 줄도 몰랐던 마음 구석구석까지 바람길이 나는 것같았다. 내내 접혀 있던 날개가 살짝 펼쳐진 것도 같았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고, 숨을 아주아주 깊숙이 들이마셨다. 오늘이 풀밭의 첫 주인공은 우리다. - P139

스타벅스에서 친구가 말한 건 바로 이런 순간이었다. 뭔가또 대단한 것을 찾아 나서려는 나에게, 친구는 이 순간을 더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고객으로 여기지 않길 주문하고 있었다. 너도 여행을 온 거고, 나도 여행을온 거고, 우리 둘의 여행이 이곳에서 문득 겹친 것뿐이니 너무조급해하지 마. 나는 그냥 아침을 좀 더 느긋하게 바라보고 싶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친구의 이 말은 김민철여행사에 곧바로 전달되었다. 어려울 게 하나도 없는 고객의 주문이다. 아니, 오히려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한 순간을 친구와 함께여행할 기회였다. - P141

지나가다 봐둔 예쁜 카페에 들어간다. 한적한 카페에 앉아 카푸치노와 크루아상을 시킨다. 비현실적으로 봉긋하게 우유거품이 올라온 카푸치노를 마시면서 따뜻한 크루아상을 먹는다.
몰랐다. 유명하지도 않은 동네 카페에서 이토록 맛있는 크루아상을 먹게 될 줄은. 이토록 쉽게 만족하는 우리니까 굳이 멀리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집 앞 빵집의 따뜻한 바게트가 가장 맛있고, 집 앞 카페에서 따뜻하게 내주는 크루아상이 제일 맛있다는 걸 오늘 알게 되었으니. 그리고 우리의 행복은 이토록 간단한 레시피로 완성된다는 사실도. 물론 그 행복은 각자에게아주 다른 모양이다. 내 행복은 자주 미술관에 있었고, 내가 찍는 파리 사진들에 자주 있었고, 덕분에 나는 끝없이 헤매는 여행을 택했다. 친구의 행복은 여유로운 아침에, 편안한 자세에,
햇빛과 바람에 있었다. 파리에 무엇이 유명하든 말든 친구는자신의 행복 앞에 스스로를 데려다주는 법을 알고 있었다. - P143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혼자 도서관에 가던 어린이는, 처음 파리에 왔을 때도 도서관에 반해버렸다. 파리 도서관 때문에 반드시 여기에 돌아와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무엇이 되었건 간에 여기에 와서 공부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전적인 분위기의 따뜻한 조명 아래 나도 있고 싶었다. 오래전 그 꿈도 실패했는데, 그 꿈을 하루치 살아보는 것도 실패라고? 친구앞이라 실망한 마음을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불행은 이미 내 마음속에서 몸집을 한껏 부풀렸다. 친구가 복도 끝으로 가길래 나도 맥없이 친구를 따라 그쪽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무슨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놀랍게도 똑같은 타원형 도서관이 하나 더 있었다. 심지어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하늘색 조명이 놓인 개인석은 꽉 차 있었지만, 괜찮았다. 마침내 들어왔으니까. 우리는 빈 의자에 앉았다. 카메라를 꺼내서 찍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도서관이니까. 관광지가 아니니까. 카메라 소리로 민폐 관광객이 되고 싶 - P157

지 않았다. 이 공간에 스며들고 싶었다. 일상인 척 가져온 책을읽으려 했다. 하지만 실패. 책을 몇 줄 읽다가 다시 실패. 시선이 자꾸 도서관으로 향했다. 공간 자체가 너무 오랜 꿈의 모양그대로라서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책을 읽는 척하며 공간을 더 열심히 읽었다. 오래전이었다면 나는 얼마나 질투 섞인 눈으로 여기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봤을까. 하지만 나는 더이상 20대가 아니었고, 이들을 대책 없는 질투심으로 부러워할 나이는 지났다. 다만 이곳에 슬쩍 속해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꿈과 지금 나의 거리를 충분히 알고도 남을 나이라 다행이었다. 친구가 돌아가도 여기에 다시올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 P158

실제로 나는 나중에 혼자 이곳에 와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날은 그토록 앉고 싶었던 개인석이 비어 있었다. 하늘색 조명 하나를 내 몫으로 가지고 책을 읽다 보니 불현듯 도서관이어두워졌다. 순식간에 공간은 빗소리로 가득 찼다. 유리 천장은 바깥 날씨를 그대로 공간 전체에 투영했다. 빗소리가 점점거세지며 그 큰 도서관 전체를 두드려댔지만, 나는 괜찮았다.
우산을 안 챙겨왔지만 나는 어둑해진 도서관 안에, 원하는 하늘색 조명 아래 안전하게 자리 잡았으니까. 나는 책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책이 너무 좋아서 고개를 들면 책보다 아름다운 도서관의 풍경이 보였다. 오래전 후배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일주일만 내 맘대로 시간을 쓰고 싶다는 내 말에, 후 - P158

배는 그럼 뭘 하고 싶냐고 물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지겹도록 책만 읽고 싶어"라고 말했다. 후배는 그런 대답을 하는나를 지겹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다른 대답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책만 읽어도 괜찮은 시간을 살고 싶다는 그 소원이 이런 공간 속에서 이뤄지기를 바란 적은 없다. 너무 과한 걸인생에 요구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어쩌다 나는이곳에서 지겹도록 책만 읽어도 좋을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좋아하는 것 앞에 ‘지겹다‘라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는 호사가어찌하여 내 것이 됐단 말인가. 나는 하늘색 구름 같은 질감의꿈속에서 마음껏 뒹굴었다. 마음껏 점프했다. 한참이 지나 다시 유리 천장으로 빛이 들어올 때, 나는 책을 덮고 도서관을 나섰다. 비 온 뒤 말간 세상을 말간 마음으로 걸었다.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았다. 부러움 한 톨 깃들 여지없는 말간 마음이었다. 물론 이건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난 후의 이야기지만.

시간은 봄처럼 야속하게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슬퍼할 시간은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여전히 수많은 처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 P159

여기서 우리의 길은 갈라진다. 여기서부터는 각자의 길이다. 우리는 서로의 길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의 길을 잘 걷고 싶은 사람들이니까. 진하게 포옹을 하고 각자의 최선을 다해 각자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서로의 길이 평온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만큼 순진하진 않다. 다만 그 길끝에서 우리가 다시 평온하게 만나길 바랄 뿐이다. 우리 각자가 바라는 우리가 되어서. 그러기 위해 저 멀리 근사한 꿈을 세워둔다. 불가능한 꿈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능하게 만들 거니까.

우리는 우리만의 축배를 든다.
19년 동안 같이 즐겼고, 같이 울었고, 같이 웃었다.
인생에 이 이상을 바랄 수는 없다.

안녕, 나의 유일한 동기. - P163

청소부터 했다.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이불을 털고, 설거지를 하고, 향을 피운다. 오랜만에 낮잠도 잔다. 언제 나가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나가야 하지 않겠나 생각하다가,
더 이상 가고 싶은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튈르리 정원, 오랑주리 미술관, 팔레 루아얄, 에펠탑, 르봉 마르셰 백화점, 오르세 미술관, 뤽상부르 공원, 마레 지구, 보주 광장, 콩코드 광장, 샹젤리제 거리, 트로카데로 광장, 바토 무슈 유람선, 사마리텐 백화점, 몽쥬약국, 몽마르트르 언덕, 생마르탱 운하, 퐁다시옹 루이비통, 생제르맹, 퐁피두 센터, 로댕 미술관, 지베르니, 오베르 쉬르 우아즈, 옹플뢰르와 몽생미셸 그리고 수많은 음식점과 카페와 술집과 시장과 공원과 성당까지. ‘파리‘라는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모든 곳에 다녀왔다. 쉽게 떠올리기힘든 곳도 김민철여행사는 쏙쏙 찾아내서 안내했다. 파리원정대는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쳤다. 물론 더 이상 파리에 갈 곳이없다는 건 아니다. 파리는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아니, 어떤 곳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다만 내가 지친 거다. - P165

이제는 애쓰지 않아도 나는 나를 찾을 수 있다. 무리하지 않아도 나를 돌볼 수 있다. 내 마음을 읽어, 내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면 된다. 책과 노트를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유난히 날씨가 좋은 주말이었다. 덕분에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붐볐다. 공원에도 카페에도 행복한 사람들로 빼곡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밝음이, 신남이, 웃음이 버겁기만 했다. 그세계엔 내가 원하는 자리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자꾸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만 방향을 틀었다. 외로움이 필요했다. 침묵이간절했다. 그러다 발견했다. 작은 선술집을. 텅 빈 그곳을 이토록 반짝이는 날씨에 실내에서 술을 마실 멍청이는 나 빼곤없다. 나는 어둑어둑한 선술집 창가 자리에 앉았다.  - P167

파리에서 한 달씩 머무를 숙소를 구하는 나의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1. 근처에 큰 공원이 있을 것(완성하고 싶은 아침이 있었으므로).
2. 두 개의 숙소가 완전히 다른 지역에 있을 것(아예 다른 도시에 도착한 기분이라면 환영).
3. 너무 비싼 동네거나 너무 한국 사람이 많은 동네는 피할것(편안하게 여행하려면 아무래도).
4. 침실과 다른 공간이 분리되어 있을 것 (나는 20대가 아니므로 이 정도는 누려도 된다).
5. 큰 창문이 있을 것(그 앞에 책상을 놓을 수 있다면 더 좋고).

5월의 집은 그 모든 기준을 통과했다. 숙소는 깨끗한 5구에 있었고, 뤽상부르 공원이 바로 옆이었고, 조금만 걸으면 무프타르 시장에 도착할 수 있고, 침실과 거실과 부엌이 분리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발 드 그라스 성당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큰 - P175

창문이 두 개나 있었다. 리뷰가 몇 개 없는 점이 매우 마음에걸렸지만, 뤽상부르 공원과 거리가 너무나 가까워서 모험을해보기로 했다. 모험은 아주 성공이었다. 하지만 5월의 숙소와동네가 너무나도 만족스러웠기에 결과적으로 나는 점점 더 쪼그라드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6월에 내가 예약한 숙소는 파리 20구, 파리의 끝, 위험하다는 평이 압도적으로 많고, 관광객은 도대체 갈 일이 없는 동네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 P176

순식간에 택시는 그곳을 지나쳤지만, 나는 보았다. 도로 옆작은 광장을. 작은 광장 위 무대를. 그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그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는사람들을. 그 사람들을 아낌없이 비추는 찬란한 태양을. 시간은 이제 토요일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택시는 나를 새로운 숙소 앞에 내려주었다. 숙소 입구에서 무대가 또렷이 보였다.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나오는 그 잠깐에 사라질 무대가 아니었다. 그런 유의 흥이 아니었다. 나는 진정하고 벨을 누른 후 새로운 숙소로 올라갔다.
낡고 잘 관리된 나무 바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쪽벽엔 소파, 맞은편 벽엔 초록색 주방. 옆방엔 커다란 침대와 키가 큰 창문, 그 밖으로 넘실넘실 출렁이는 키가 큰 초록 나무들. 정확하게 사진으로 본 그대로다. 역시나 이번에도 숙소 찾기 대마왕이 성공적으로 일을 해버렸다. 가방을 내려놓고, 작은 테이블부터 창문 앞으로 옮긴다. 노란색 의자도 그 앞으로옮긴다. 이로써 나는 키가 큰 나무를 창밖으로 보며 밥을 먹고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집은 더 완벽해졌다.
집에 필요한 것들을 체크한 후 나는 곧장 음악으로 향한다. - P188

딱 손바닥만 한 사이즈로, 딱 얇은 지갑 같은 두께로 나의 치즈가 잘려졌다. 이 정도 크기라면 얼마든지 더 사도 된다. 얼마든지 다양하게 사도 된다. 마트에서 포장된 완제품 치즈는 나혼자 다 먹는 데 며칠이나 걸렸지만, 이 정도 크기로 살 수 있는 거라면 나의 치즈 세계는 앞으로 얼마나 넓어질 것인가. 나는 그 세계의 준비된 인재였다. 치즈를 위한 나의 위장은 무한대로 열려 있고, 낯선 치즈를 향한 내 마음의 넓이는 측정 불가이니 말이다.
치즈 가게에서 줄을 서며 나는 새삼 또 배웠다. 누구든 자신의 차례가 오면 그 시간을 충분히 누려도 된다는 것을. 궁금한것을 물어보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도 된다는 것을. 이곳은 - P192

자리에 앉기도 전에 주문해야 하는 한국이 아니다. 내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매려하느라 너무 급한 선택을 하지않아도 된다. 내 시간에 대해 당당해져도 된다. 그것은 나의 권리. 눈치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주인장까지도 기다려준다. 고민 끝에 내가 두 번째로 고른 치즈는 겉에 허브가 잔뜩 발린 Al romero 치즈였다(이름도 처음 듣는 치즈였다). 비싸도 어쩔 수 없다 생각했는데 다 합쳐서 겨우 8천 원. 웅장해진 마음으로, 치즈의 이름이 적힌 영수증을 손에 꼭 쥐고 가게를나섰다. 이것은 평범한 영수증이 아니다. 이것은 지금부터 파리 생활이 달라질 거라는 확약서였다. 두고 봐. 치즈계의 만수르가 되어주겠어. - P193

제일 어려울 거라 생각한 치즈 가게 관문을 넘었으니, 나는이제 거리낄 것이 없었다. 치즈 가게 맞은편 마트에 가서 장을봤다. 늘 빵과 곁들일 생채소와 요구르트, 햄과 과일 정도만 샀는데, 새 동네에 왔더니 새 마음이 장착된 건가. 파스타와 파스타 재료를 사고, 신선한 줄기콩과 엔다이브와 오이와 딜 그리고 민트도 다발로 산다. 집 바로 앞에 벨빌 맥주 양조장이 있길래 병맥주도 종류별로 사 왔고, 작은 식료품 가게에서 올리브절임도 포장해 왔다. 양손과 어깨에 먹을 것들을 잔뜩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텅 빈 냉장고를 꽉꽉 채웠다. 이 모든 것이이 집에서 반경 50미터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양조장까지는10미터, 양조장에서 코너를 돌면 치즈 가게, 2차선 도로를 건 - P193

너면 커다란 마트. 마트에서 다시 코너를 돌면 축제가 열리는작은 광장. 광장 옆엔 유기농 마트 그리고 낯선 나라의 궁금한식당들까지. 이토록 내게 필요한 것들이 꽉꽉 들어찬 동네라니. ‘동네‘라는 말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동네라니.


5월에는 멀리멀리 계속 뻗어나가며 우리 동네의 지도를 그렸다. 마음에 드는 곳이 생기면 나는 거침없이 그곳을 우리 동네로 편입시켰다. 동네는 나날이 커지기만 했다. 그러나 6월은아주 다를 것 같았다. 나는 작게, 아주 작게 지도를 그리고 싶어졌다. 그냥 이곳에 살고 싶어졌다. 밖의 파리가 어떻든, 유명한 무엇이 어떻든 간에 그냥 여기에 있고 싶었다. 그래도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궁금한 식재료들을 사다가 밥을 해 먹고, 해피 아워에는 집 앞 카페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고, 매일 다른 치즈를 사다 먹으며 그냥 이 작은 동네 안에 머물고 싶었다. 지도를 작게, 아주 세세하게, 시간대별로, 아주 촘촘하게 그리고 싶어졌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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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은 또 어떻고. 아침 산책 길에 붙어 있는 광고판을 들여다보다가 우연히 부르델 미술관의 재개관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날 오후에 바로 달려갔다. 우연에 복종하는 것이 이곳에서의 나의 의무.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이었다. 부르델이 로댕의 오랜 조수였다는 사실만 겨우 알고 간 부르델 미술관은 들어서자마자 나를 압도했다. 규모도 힘도 예상을 빗나간다. 고요함 속에서 저토록 뿜어 나오는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 가장유명한 <활 쏘는 헤라클레스> 작품 옆에서 손가락 하나, 종아리 근육 하나까지 오래 유심히 보았다. 제목에도 ‘활 쏘는‘이라고 표기돼 있지만, 이 작품에는 화살이 없다. 어떤 사람은 활쏘기 전의 포즈라 해석하고, 어떤 사람은 활 쏜 직후의 포즈라해석한다. 나는 후자의 해석에 마음을 둔다. 그 표정으로 보건대, 이미 화살은 떠난 직후니까. 안간힘을 쓰는 표정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다 쏟아부은 표정. 고요하고 강인하다.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까지도 운명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다. 날아간 화살은 이미 상대의 심장을 뚫었다는 걸 알 수 있었 - P54

다. 거센 빗소리가 미술관 앞 정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나는 작품과 충만하게 함께였다.
나는 내가 좋아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작가의 세계에기꺼이 빠져 허우적거렸다. 동네 산책을 하다가 자드킨 미술관을 발견하고 그의 아틀리에를 통째로 대여한 기분을 만끽하며 (관람객이 나 혼자였다) 조각들을 마음껏 즐겼고, 퐁피두 센터옆의 아틀리에 브랑쿠시도 나에겐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미술관이 공짜였다(다시 말하지만, 파리는 자기방식대로 친절하다). - P55

마침내 꽃도 샀다. 여행자의 신분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그것. 노트르담 대성당 옆을 지나가다가 꽃시장을 발견하고, 그곳에 들어가서 작약 열 송이를 샀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누군가의 파리 사진에서 작약을 보았다. 뭐지. 저렇게 크고, 저렇게 탐스럽고, 한 송이만으로도 저토록 풍성한 저 꽃은.
그땐 그 꽃이 작약인 줄도 몰랐다. 창밖의 파리 지붕들을 배경으로 오래된 나무 창틀 앞에 놓인 꽃병 사진이 이상하게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그 사진을 부적처럼 컴퓨터 바탕화면에 걸어놓고 나는 오래도록 파리를 향한 마음을 키웠다. 그 꽃이 작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작약은 파리를 상징하는 나의 꽃이 되었다. - P56

거짓말처럼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만큼 거센 비. 웬만한 비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프랑스 사람들도 차양 밑으로 뛰어 들어가는 비였다. 거리가 빠르게 텅 비었다. 우산을 썼지만 한쪽 어깨가 순식간에 젖었다. 우산을 푹 쓰고 빠른 속도로 걷는데 뭔가 이상했다. 이렇게나 비가 내리는데, 물웅덩이마다 햇빛이 고여 있었다. 고개를 드니 거리 전체가 비와 햇빛으로 반들거렸다. 이건 무지개의 신호인데? 하며하늘 쪽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봐버렸다. 너무나도 큰 쌍무지개를 모두가 뛰느라, 비를 피하느라 못 보고 있었지만, 나는봐버렸다. 본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사진을 찍고, 영상을 찍다가 또 하염없이 무지개를 봤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큰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내내 내 얼굴에는 큰 미소가 걸려 있었다. 기세 좋게 내리는 비와 기세 좋은 해가 만든 크고 선명한 그 무지 - P64

개도 오래 하늘에 걸려 있었고.
이걸로 다 되었다. 뭘 더 바라겠는가. 마침내 내가 이런 시간에 도착했는데, 두꺼운 갑옷을 입고 의무와 책임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매 순간 칼을 겨누며 나에게 달려오는 수많은 요구들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앞으로, 그저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던 시기가 있었다. 결코 혼자가 아니었지만, 결코 누구와도 함께일 수 없었던 시간들. 혼자 삼키고 혼자 무릎을 털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갑옷을 고쳐 입는 동안 마음에는 굳은살이 많이 박였다. 지금부터 굳은살을 다 떼어내고, 생살의 따끔따끔한 시기를 거쳐, 새살이 돋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보드라운 시간들이 필요하다. 오늘 먹은 버터의 부드러움을 마음에 바르고, 각양각색의 치즈들로 감싸서, 일곱 가지 무지개의 빛깔을 쬔다면 너무 늦지 않게 새살이 돋아날 것이다.
조급할 필요는 없다. 비로소 나도 낯선 시간에 당도한 것이니까. 나도 낯선 시간의 틈에 닻을 내린 거니까. 우선은 낚싯대를드리우고 마음의 물결을 멍하니 바라보자. 애초에 물고기를바라고 던진 낚싯대가 아니지 않니. - P65

응? 뭐? 눈물?

친구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부터 들어찼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친구가 눈물을 닦으며 웃는다. 어, 이 정도라고? 나는 당황한다. 이 방에 사로잡혀서 한 시간 넘게 모네의 <수련>만 보다가 결국 다른 전시관은 보지도 못하고 나가야만 했던 오래전의 나를 소환한다. 그때의 나라면 지금의 친구를 이해하고도 남을 것이다. 모네의 <수련>을 본다고 연보라색 옷까지 맞춰 입고 나온 친구를 지금의 나는 놀리지만, 오래전의 나라면친구 옆에서 같이 울었을 테니까. 여긴 아름다움이 온몸에 직진으로 와서 안겨버리는 공간이니까. - P85

그런 거다. 관계는 주고받는 거다. 나는 내가 하는 게 편하고, 함께 있는 누군가가 신경을 안 쓰는 게 좋고, 그리하여 결국 다 내가 해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좋고 싫음도 지나치게 분명하기에 나는 내가 좋은 걸 해야만 하고, 싫은 표정은 숨길 줄 모른다. 그 와중에 수시로 멈춰 사진을 찍고, 뭔가를 끄적이고, 자꾸 자기 세상으로 빠져버린다. 내가 생각해 도나는 데리고 다니기에 상당히 까다로운 인간이다. 친구는 그런 나를 다 받아주고 거리를 유지해주고 또 혼자 있을 시간까지 준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안다. 덕분에 상대에게 나를 적당히 맞추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무리가 없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 그래서 이 관계는 평생 가까이에서 제자리걸음이다. 변치 않고 계속 제자리걸음을 했더니 관계는 깊고 깊고 깊어졌다. 근데...... 나의 소중한 친구...… 또 딴 데로 가네?
"보미야, 그쪽 아니라니까. 이쪽으로 온나. 으이구." - P96

스스로를 꿈으로 만드는 데 이토록 성공한 도시가 또 있을까. Paris‘라는 단어를 새기기만 해도 팔리는 상품들이 있다.
그 단어를 듣기만 해도 꿈꾸는 얼굴로 돌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파리라는 단어 속에서 각자의 꿈은 다르겠지만그 배경엔 언제나 에펠탑이 있다. 에펠탑은 겨우 130년 만에이 오래된 도시의 수많은 상징들을 물리치고 이 도시의 지울수 없는 얼굴이 되었다. 당연히 2024년 파리 올림픽의 메달에도 에펠탑이 있다. 말 그대로다. 에펠탑 보수 공사에서 채취한철조각 91킬로그램을 활용해 금은동 메달 뒷면에 에펠탑의 실제 철조각을 박은 것이다. 이로써 모든 운동선수들의 꿈에 프랑스란 꿈이 더해졌다. 이 꿈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언제나 이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다. - P108

카몽이스의 흉상을 지나 계단을 오른다. 오르며 시선은 고집스럽게 계단으로만 향한다. 내 뒤에 에펠탑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가장 극적으로 에펠탑을 만나는 순간을 내게 주고 싶기 때문이다. 계단을 다 올라 마침내 뒤돌아선다. 건물들 사이로 세느강이 보이고, 그 뒤로 에펠탑이 있다. ‘너 여기 파리야!‘라고 빼기는 얼굴로 알려주는 에펠탑. ‘감동할 순간이야!"라고 교육하는 에펠탑. 그 교육을 나는 오래도록 받았다.
하지만 볼 때마다 감정의 수위는 교육의 범위를 넘어선다. 저렇게나 아름답다고? 저렇게나 웅장하다고? 나의 로망이 저토록 거대했다고? 뻔한 것을 보고 뻔하지 않게 감동하는 법을 나는 모른다. 금세 눈물이 맺힌다. 나는 당황한다. 솔직히 이나이에 에펠탑을 보고 눈물까지 맺힐 일은 아니지 않나. 에펠탑이 처음도 아니고, 파리가 처음도 아니고. 하지만 어쩌겠나. 이렇게 반응하는 이 몸도 나의 일부인걸. 그토록 좋은 것이다. 내가 파리에 있다는 사실이. 나의 지난한 일상이 꿈과 뒤섞이는이 기적이. - P111

돌아가는 길엔 점점 더 어두워지며 조명들이 제대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파리는 이제 유명 배우 같다. 어둠 속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는 파리를, 흔들리는 배 위에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니, 어쩜 이 도시는 주름살 하나 없이 이렇게 잘늙었을까 감탄만 나온다. 잘 관리된 노년. 영원한 낭만, 오래된과거가 현재형으로 빛난다. 강 표면까지 끝없이 흔들리며 각양각색의 조명들을 반사하고 있다. 문득 이 도시에서 인상파화가가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확신이 든다.
솜씨 좋은 인상파 화가가 강물 위에 끝없이 작품을 그리는 중이다. 붓질은 섬세하고, 순간순간 결과물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나는 세느강 수면에서도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한다. - P113

마지막으로 유람선은 에펠탑 앞에서 다시 방향을 튼다. 에펠탑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그 순간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조명을 반짝인다. 그 육중한 몸이 빛으로 별처럼 가벼워진다. 모두의 눈 속으로, 핸드폰 속으로, 강물 위로 아름다움이 낙화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주머니를 꺼내 떨어지는 별빛을, 스치는 반짝임을, 친구 얼굴에 일렁이는 감동을 담는다. 기억하고 싶은 그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꾹꾹 눌러 담아서 아쉬움으로 꼭꼭 닫아둔다. 이 시간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애틋하게 간직할 기억들이다. 40대 친구 둘이서 하는 여행도,
아이 없이 이토록 마음 편히 있는 시간도, 시시각각 터지는 웃음도, 무엇보다 이토록 빛나는 도시에 우리가 머물렀다는 사실까지도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순간지금 이곳의 모든 것이 아쉬워질 것이다. 이곳에 우리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가장 믿지 못할 무엇이 될 것이다. 뚱뚱해진 기억 주머니를 단단히 챙긴다. 주머니 안에는 온통 친구와의 파리 추억뿐이다. - P114

어느 날 지하철 안에서 친구와 떨어져서 앉게 되었다. 나는우리가 지나는 역이 비르하켐역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친구에게 바로 문자를 보낸다.
‘지금이야, 창밖을 봐•친구가 문자를 확인하고 고개를 드는 바로 그 순간 지하철은 세느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건물들 사이에 가려졌던 에펠 - P114

탑이 갑자기 탁 트인 세느강을 배경으로 튀어나온다. 빠르게달려나가던 모든 시간이 갑자기 느리게 흐른다. 매 순간이 분절되어 찬란하게 새겨진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몸서리를 친다. 그 장면에 이젠 친구의 표정까지 더해졌다. 친구의 저표정은, 진짜다. 이 아름다움은, 진짜다.

우리가 이 아름다움 속에, 같이 있었다.

이 문장은 오래도록 믿기지 않을 것만 같다. - P115

한 세계가 가고 다른 한 세계가 왔다. 겨우 두 시간 만에 세계는 완전히 뒤바뀐다. 여행 친구를 선택하는 건 실은 어떤 여행 세계를 선택하느냐와 같은 문제라는 걸 깨닫는다. 좀 더 친숙한 세계를 택할 것인가, 좀 더 모험심 가득한 세계를 택할 것인가, 요리와 술이 넘치게 흐르는 세계를 택할 것인가. 천천히 오래 보는 세계를 택할 수도 있고, 빠르게 많이 경험하는 세계를 택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지금 내게 새로운 세계가 찾아왔고, 덕분에 나는 완전히 다른 파리에 도착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친구에게 내가 지금까지 있었던 보미라는 세계의 이야기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다 보따리는 본격적으로 풀린다.
"밥 먹을 때 와인 한 잔 시켰다가 보미에게는 술 중독이라는소리 들었잖아."
"보미 언니는 술 못 마셔?"
"걘 주량이 맥주병 목이거든." - P126

2023년 5월 21일 / 선영과 오랑주리 / 다시, 마티스 전

가장 용기가 되는 건 과정들. 그림을 그린 과정을 그대로 기록한 20개의 사진 속에서 없던 무늬가 생기고, 줄무늬는 격자무늬로 바뀌고, 다리의 모양이 바뀌며 그림 속 여자의 고개가 빳빳하게 들리는 걸 본다. 가장 완벽한 상태를 찾는 것이 아니라 가장적절한 자신의 스타일에, 자신의 세계에 맞는 작품을 찾는과정. 그 여정. 그것이 내 세계를 찾는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과 연결된다. 거의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6개월 동안 떠난 마티스의 타히티섬 여행을 기억할 것.


그림 속 세계에는 옳고 그름이 없었다. 다만 화가의 선택이필연이 될 뿐이다. 이곳은 거대한 성공의 세상이 아니라, 나만의 세상 속에서 나만의 빛남을 쟁취해나가는 세상이다. 내가창조주인 나의 세상 속에서 나만의 필연을 찾아가는 여정. 마티스 전시에서 유독 내 마음을 울린 건 그 여정이었다. 그의 고 - P133

민이, 그의 방황이, 그의 선택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들이 지금내 눈앞에 있다. 그것이 나에게는 큰 자극이었다. 영원히 머물고 싶은 자극. 품이 넓어 언제든 새롭게 해석되는 자극. 나는잔뜩 상기된 얼굴로 선영이를 만났다. 나와 달리 선영이는 담담했다.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이곳을 둘러본 것만으로도친구에게 이 미술관은 소임을 다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연히 모두가 파리의 미술관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녀의 행복이미술관 형광등 아래에 없다면 다른 곳을 찾아보면 된다. 파리는 크고, 그 매력은 결코 하나가 아니니까. 그럼 친구에게 꼭맞는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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