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꼍


모든 것들은 저마다의 뒤꼍에 밤낮 없이 열어 두는문이 하나씩 있다 언제나 예감은 불륜의 발자국처럼 그리로 드나들었다 기일게 개미 떼들이 서둘러 피신한 뒤내리는 소낙비에 그러나 나는 왜 번번이 노박이로 흠씬젖었을까 그해 겨울도 그랬다 순천 선암사 뒤꼍 줄로서 있는 홍매화들이 노구를 이끌고 이 엄동에도 꽃눈부풀어 만삭이라는, 통통하게 벌서고 있다는, 숨이 차다는 전갈을 그날 아침 받기도 하였지만 그런 뒤꼍일때는 그리 많지가 않았다 그날 우리집 뒤꼍 간장독이새벽부터 캄캄하게 뒤집혔고 이윽고 한 채 꽃상여가 산모롱이를 돌아갔다 눈발 날렸다 어머니가 이승을 하직하셨다

마지막 가을


여름을 여름답게 들끓게 하지도 못하고 서둘러 가을이 왔다 모든 귀뚜라미들의 기인 더듬이가 밤새도록 짚은 울음으로도 울음으로도 다 가닿지 못한 어디가 따로이 있다는 게냐 사랑이 멍든 자죽도 없이 맞이하는 가을의 맨살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이른 새벽길 아직도떠나지 못하고 있는 바닷가 민박집 여자의 아침상도 오늘로 접어야 하리 늘 비가 내렸다 햇살들의 손톱 사이에낀 푸른곰팡이들이 아직도 축축하다 부끄럽다 이 손으로 따뜻한 네 손을 잡겠다 할 수는 없구나 딸이 늦은시집을 간다는 편지를 객지에서 받는다 노동의 지전을센다 마지막 그물을 거두었다 이러는 게 아니지 너무오래 혼자 있는 가을에 익숙해졌다 서둘러 돌아가야 하리 왜 이토록 서성거리는 게냐 슬픔이 떠난 자리는 늘불안했다 낡은 입성으로 오는 마지막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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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위험한 모험

"내 직감은 그것을 단어로 바꾸려는 노력으로 더욱 명백해진다." 이런 문장을 썼던 적이 있다. 그러나 나의 착각이었다. 글을 쓸 때 직감은 어딘가에 붙거나 고착된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무엇이 나올지 모르니까 ㅡ 그것이 진심이라면, 단어의 힘으로 파괴되거나 자멸한다는 경고를 받을 수 있다. 수면 위로 절대떠오르지 않길 바랐던 기억을 되찾을 수도 있다. 환경이 지옥 같아질 수도 있다. 직감이 통과하려면 심장은 순수해야 한다. 세상에, 언제 심장이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순수한 것을 정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때로는 부정한 사랑 속에 몸과 영혼의모든 순수함이 있다. 성직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사랑으로 축복을 받는다. 이 모든 것을 보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ㅡ본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직감을 가지고는 장난칠 수 없다. 쓰는 행위를 가지고는 장난칠 수 없다. 사냥감은 사냥꾼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으니까. - P328

저항

수술한 손의 손가락 사이에 있던 실밥을 풀었을 때 비명을 질렀다. 나는 아프고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는데, 통증이 온전한 육체를 침해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나는 통증을 핑계로 과거와 현재의 분노를 내질렀던 것이다. 세상에, 미래의 분노도.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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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봄비 내린다


겨우내 꿰맨 마음의 솔기가 촘촘하다 冬安居를 끝낸 중들이 주섬주섬 길 떠날 채비로 궁성대는 새벽, 봄비 내린다 연한 비, 비린내 난다 한 그루 산수유에서도 수런거리는 소리 노랗다 봄 春字 벌레 蟲字 그대로 준동蠢動이다 벌레들 우듬지 끝까지 따라 오르다 저런! 봄신명이 잘못 지폈나 보다 헛발 디뎌 제 몸 패대기친다 터진 속내가 벌써 초록色이다 새순들 과식하셨구나 몸이 무거우셨구나

껍질


어머니로부터 빠듯이 세상에 밀려 나온 나는 또 한번나를 내 몸으로 세상 밖 저쪽으로 그렇게 밀어내고 싶다 그렇게 나가서 저 언덕을 아득히 걸어가는 키 큰 내뒷모습을 보고 싶다 어머니가 그러셨듯 손 속에서 손을, 팔다리 속에서 팔다리, 몸통 속에서 몸통을, 머리털 속에서는 머리털까지 빠뜨리지 않고 하나하나 빼곡하게 꺼내어서 그리로 보내고 싶다 온전한 껍질이고 싶다 준비 중이다 확인 중이다 나의 구멍은 어디인가 나갈 구멍을 찾고 있다 쉽지 않구나 어디인가 빠듯한 틈이여! 내 껍질이 이다음 강원도 정선 어디쯤서 낡은 빨래로 비를 맞고 있는 것이 보인다 햇살 쨍쨍한 날 보송보송 잘 말라주기를 바란다 흔한 매미 껍질같이는 싫다그건 너무 낡은 슬픔이지 않느냐

마른 들깻단


다 털고 난 마른 들깻단이 왜 이리 좋으냐 슬프게 좋으냐 눈물 나게 좋으냐 참깻단보다 한참 더 좋다 들깻단이여, 쭉정이답구나 늦가을답구나 늙은 아버지답구나 빈 밭에 가볍게 누운 그에게서도 새벽 기침 소리가들린다 서리 맞아 반짝거리는 들깻단, 슬픔도 저러히반짝거릴 때가 있다 그런 등성이가 있다 쭉정이가 쭉정이다워지는 순간이다 반짝이는 들깻내, 잘 늙은 사람내그게 반가워 내 늙음이 한꺼번에 그 등성이로 달려가는게 보인다 늦가을 앞산 단풍은 무너지도록 밝지만 너무 두껍다 자꾸 미끄럽다

늦가을


上等品으로만 온 마을이 가득 비었다 들앉을 자리가넘친다 태양초 고추 멍석이 빠알갛다 살림 차리자 빠알갛게 들어앉거라 바로 너인 줄 모를 리 없다

장마


비 듣는 소리를 듣고 있다 진종일 귀가 열리고 있다 안이 꽤 깊다 틈서리마다 젖어들어서 불어난 집의 부피와 무게들이 내 마음의 容量 위에 푸른곰팡이의 눈금을 하나씩 더 올려놓고 있다 슬픔이 살찐다 다친 다리가 쑤시기 시작한다 감당키 어려운 대목이 이런 날엔 어김없이 응답을 해야 直性이 풀린다 내가 새고 있다 집이 새고 있다 그게 몸이다 새는 낮게 낮게 뒷산 허리를 날아가고 있다 비리게 속까지 젖어서 높게 뜨지 못한다 새는 어디를 다치셨는가 새도 새고 있다 둥지가 새고있다 슬픔이 새로 살찐다 한참 비안개 자옥하다 새어서 새어서 너에게서도 새어서 나는 여기까지 왔구나 다친 몸은 정직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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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들장미"라는 말만 들어도 단번에 세상이 싱그러운 장미가 된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게 된다. 내게는 가끔씩 들장미를 보내주는 친한 친구가 있다. 그 향기가 얼마나 진한지 나를 숨 쉬게하고 살게 한다.
들장미는 시간이 갈수록 향이 더 진해지는 낯설고 섬세한 신비로움이 있다. 들장미는 노랗게 시들 때가 되어도 향이 강하고 달콤해서 헤시피의 달밤 향기를 떠오르게 한다. 결국 그 꽃이 시들면, 시들고 또 시들어버리면 대지의 요람에서 다시 태어나는 꽃처럼 향기가 나는데 나는 그것에 취해버린다. 꽃은 시들고, 보기 싫어지고, 색이 바래고 갈색을 띤다. 그렇지만 어떻게 버릴수 있겠는가? 죽었다고 해도 영혼은 살아있지 않을까? 나는 시든 들장미를 처리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향기 진한 꽃잎을 따서 속옷서랍장에 뿌려놓는 것이다.
최근에 친구가 들장미를 보냈는데 꽃이 시들려던 차에 향기가 더 진해져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저렇게 사랑의 향기를 내뿜으며 죽고 싶구나. 살아 있는영혼을 발산하며 죽고 싶어."  - P170

사우다지*는 허기짐과 비슷하다. 사우다지는 당신이 그 사람의 현재를 음미할 때에만 지나간다. 그러나 때로는 그리움이 너무 깊어서 현재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당신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흡수하길 원한다. 어떤 존재가 완전한 결합을 위해 타인을 원하는 것은 삶에서 절박한 감정 중 하나다.



Saudade, 향수, 추억, 그리움, 외로움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감정. 사랑하지만 부재하는 무언가 또는 누군가에 대한 우울하거나 깊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감정 상태, 종종 그리움의 대상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 - P172

더는 글을 쓸 수 없다, 쓰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렇지만 나는 세상에서 많은 것을 봤다. 그중에 덜 고통스럽다고 말할 수 없는 하나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혹은 그저 중얼중얼 내뱉으려다 실패하고야 마는 벌어진 입을 보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그 입들이 설명하지 못한 것들을 말하고 싶다. 나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
문학적 행위들은 내게 점점 그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글을 쓰지 못하는 건 어쩌면 구체적으로 나를 문학으로부터 구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제 내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게 무엇이든 어쨌든 문학 덕분에 그런 것이 생겼을 것이다. - P184

마찬가지로 나도 모르게 이 글을 쓰면서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곧 있으면 내 과거와 현재의 삶을 출간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건 내 계획에 없던 것이다. 또 하나 내가 깨달은 것은, 내가 쓰는 글이 정말 원하는 사람만 열어볼 수 있는책이 아니라 모두가 쉽게 볼 수 있는 신문에 실린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글을 쓰는 방식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 변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다. 그렇지만 조금 더 깊고 내면적인 변화여서 글에도 반영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단지 칼럼이나 기사를 쓴다고 글이 바뀐다면? 독자들이 원한다고 그저 더 ‘가벼워진다면? 재미있어진다면? 몇 분동안 읽을거리가 될 수 있다면? 또 하나, 나는 내 책 속에서 나와독자들이 더 깊은 대화를 나누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여기 이 신문에서는 독자들에게 그저 말을 건네는 것이며그들이 만족하면 나도 만족한다.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만족하지 않는다. 후벵 브라가와 대화를 나눠봐야 할 것 같다. 혼자서는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 P186

며칠 후에 그 젊은 여성은 다시 나를 만나러 왔고, 나는 그녀에게 로리바우 박사에게 책을 전해줬는지 물었다. 그녀는 책을 전해줬고, 그가 내 헌사에 대해 언급했다고 말했다. 나는 호기심에 그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고 싶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클라리시는 남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면서 정작 자신이 존재해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네요."
그렇습니다. 로리바우 박사님, 저는 존재해도 되는지를 겸허하게 묻습니다. 겸허하게 기쁨을, 은혜로운 행동을 애원하지요.
저는 조금 덜 고통받으며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저를 사랑과 존중을 받아 마땅한인간으로 봐달라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저는 삶의 축복을 원합니다. - P199

내가 괜히 길을 찾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힘들게 길을 찾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감히 길에 대해 말할 수없기 때문에 오늘처럼 열기에 들떠 격렬하게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최고의 방식, 나의 길을 찾는 것이다. 나는 대단한 길을 원했지만, 이제는 맹렬하게 확실한 걸음으로 걷는 방식을 찾는 데 매달린다. 그렇지만 시원한 그늘과 나무 사이로 빛이 반사되는 오솔길, 내가 마침내 진짜 내가 되는 그 오솔길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 길은 내가 아니라는것이다. 그것은 타인, 다른 사람들이다. 내가 타인을 충만하게느낄 수 있을 때 나는 위험을 벗어나며, 그곳이 나의 휴식처라고느낄 것이다. - P203

언젠가 글쓰기는 저주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왜 진심을 담아그런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오늘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자면, 글쓰기는 저주이긴 하나 구원하는 저주다.
내가 신문에 기고하는 글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야기나소설로 변형될 글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당신을 제약한다는 점에서, 당신을 고통스러운 악취미로 끌어들이되 대체할 수 있는 게아무것도 없으므로 거기서 못 벗어난다는 점에서 글쓰기는 저주이며 구원이다. - P222

글쓰기는 붙들린 영혼을 구하고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끼는 사람을 구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를 구하는데, 이것은 글을 쓰지 않는다면 절대 이해할 수 없다. 글쓰기는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고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을 재현하는 일이며 단지 모호하고 답답하게 남아 있는 감정들을 깊이 느껴보는 일이다. 글쓰기는 축복받지 못한 인생을 축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무언가‘가 무의식적으로 찾아오는 순간에만 글을 쓸 수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래서 하늘의 뜻에 맡긴다. 진정한 글쓰기에 이르는 데에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책을 쓰면서 겪었던 고통이 지금 아련하게 기억난다. - P222

가장 최악은 갑자기 모든 것에 지치는 것이다. 풍족해진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가져서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는 것 같다. 비틀스에도 지치고 다른 이들에게도 지친다. 아주 힘겹게 얻은 나의내면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타인을 사랑하는 일에 지쳐서 차라리 미움이 나을 것 같다. 이 풍족한 느낌으로부터 ㅡ이것은 풍족함인가, 혹은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인가? ㅡ 나를 구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분노일 것이다.
애정을 품은 분노 같은 것이 아니다. 단순하고 폭력적인 분노다. 그것은 거칠수록 더 좋다. 정말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때문에 생긴 분노다.  - P223

또 똑똑한 사람들, 그러니까 ‘무언가를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긴 분노이며 누보시네마 때문에 생긴 분노이기도 하다. 안 될 것 없지 않은가? 그리고 또 다른 영화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몇몇 사람에게 느끼는 애착 때문에 생긴 분노이기도 하다, 마치 나에 대한 애착이 없는 듯이. 성공 때문에 생긴 분노일까? 성공은 실수이자 거짓 현실이다. 분노가 내 삶을 구했다. 분노가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브라질에서 매일 기아로 아이들이 죽어간다고 말하는 최근 신문 기사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분노는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나의 가장 깊은 저항일까? 누군가가 되는 일은 나를 피로하 - P223

게 한다. 나는 이토록 많은 사랑을 느끼는 것에 몹시 분노한다. 산다는 것에 분노하며 며칠을 산다. 왜냐하면 분노는 내게 활기를 불어넣으며, 그것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경계심을 느끼지 못했을 테니까. 나는 어떻게 될지 알고 있으며 필요한 결핍이 다시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 나는 모든 것을 원할 것이다. 모든 것을! 필요를 느끼고 그것을 얻는 일은 얼마나 좋은가. 소유하기 이전의 순간은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쉽게 가져서는안 된다. 왜냐하면 그 허울뿐인 용이함은 우리를 지치게 하니까. 그렇다면 쉽게 쓰는 글도? 가슴 깊은 곳으로 글을 썼던 내가 지금은 왜 손가락 끝으로 쓰고 있는가? 나도 안다, 결핍을 원하는것은 죄악이다. 그렇지만 내가 말하는 결핍은 이런 유의 풍족함보다는 충만에 훨씬 더 가깝다. 나는 그저 그런 것은 원하지 않는다. 잠을 잘 것이다. 오늘의 내 세상을 견딜 수 없으니까. 불필요한 것이 너무 많다. 안녕, 영원히 안녕, 다음 주 토요일까지 안녕. 내게 대답하지 말기를, 인간의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작별 인사를 하는 내 목소리를 견딜 수 있는 것은 목소리가 분노를더욱 돋우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축복받는 하나의 분노가 있다. 필요한 사람들의 분노다.  - P224

1968년 10월 5일


나는 봄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봄이 완연한 지금, 나는 봄이 무엇인지 안다는 말의 덧없음을 잘알고 있다. 하지만 때때로 나는 너무 겸손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도 한다. 그것은 어쩌면 지나친 감사에서 오는 겸손함으로, 이는 어린애 같은 ‘나‘와 어린애 같은 공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런 순간, 비 오는 봄이 올 때 느껴지는 기쁨에 내가 너무 겸손하다는 걸 깨닫는 이런 순간이면 나는 내게 속한 것도 남에게 속한 것도 모두 손에 넣는다. - P236

봄이 뭔지 안다. 공기에 꽃가루 향이 퍼져 있으니까. 어쩌면 내고유의 꽃가루일 수도 있다. 작은 새가 노래할 때면 느닷없이 소틈이 돋고, 나도 모르게 삶을 환원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살아있으니까. 가슴에 사무치는, 맑은, 죽음이 드리운 봄은 내가 살아 있음을 말해주고, 나는 해마다 봄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나도 이것이 감각의 혼란임을 잘 알지만, 머리가 어지러우면어떤가? 나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반짝이는 봄비를 맞는다. 나는 나의 존재를, 타인들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것은 그들의 권리이고, 그들이 없다면 나는 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최소한의 것을 위해 기도했고, 받지 못했음에도 위대한 타인이 존재할 가능성을 인정한다.
나는 삶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느낀다. 봄에는 몇 시간이고 혼지자 앉아서 담배를 피울 수 있다. 때로는 피를 흘릴 수도 있다. 그 - P236

러나 피를 흘리지 않을 방법은 없다. 나는 내 피 안에서 봄을 느끼니까. 그래서 아프다. 봄은 내게 무언가를 준다. 봄은 나를 살게 해준다. 나는 어느 봄에 죽을 것이다. 나를 찌르는 사랑과 약해진 심장으로 - P237

지식인?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나를지식인이라 부를 때 내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겸손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덜 상처받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식인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지성을 이용하는 것인데,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직관과 본능을이용한다. 지식인이 되는 것은 문화를 알아야 하는데 나는 너무보잘것없는 독자이며, 이곳에서 부끄러움 없이 고백하자면, 진정한 문화를 잘 모른다. 인류 역사상 중요하다고 하는 작품도 읽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매우 적게 읽는다. 열세 살에서 열다섯살 때까지는 많이 읽었다. 탐욕스럽게 손에 잡히는 대로. 그러고나서는 누구에게도 지도받은 적 없이 가끔씩 읽었다. 게다가 고백하자면 이번만큼은 부끄럽다 몇 년 동안 추리 소설만 읽었다. 요즘은 글 쓰는 게 자주 귀찮지만, 쓰는 것보다 읽는 게 더 - P253

귀찮을 때도 있다.
나는 문학인도 아니다. 책을 쓰는 일로 ‘직업‘이나 ‘커리어‘가바뀌지 않았으니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어떤 것이 올 때, 내가정말 원할 때에만 쓴다. 나는 아마추어 작가일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나는 때때로 지각하는 심장을 가진사람이고, 어리석은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을 단어로 말하는사람이다. 무엇보다 인간과 동물의 삶에 대해 해야 할 말을 문장으로 완성했을 때 기쁨으로 가슴이 살짝 뛰는 사람이다. - P253

내가 되고 싶었던 것

내게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되고 싶은 것이다.
나는 투사가 되고 싶다. 그러니까 타인의 안위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 그것이 내가 어릴 때부터 원하던 것이었다. 왜 운명은내 안에 있던 투사의 기질을 발전시키지 않고 내가 이미 쓴 그 글들을 쓰도록 이끌었을까? 내가 어렸을 때, 내 가족은 장난으로나를 "동물 수호자"라고 불렀다. 누군가를 비난하면 내가 곧장그를 변호했으니까. 나는 이른바 소외 계층이 당하는 엄청난 불의 앞에서 난감한 마음으로 살아갈 만큼 사회적 비극을 강렬하게 느꼈다. 헤시피에서 살 때 일요일에는 빈민촌에서 사는 가정부의 집을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목격한 것이 나를 이런 일이 계속되게 둘 수 없다고 다짐하게 했다. 나는 행동하고 싶었다. 열두 살 때까지 살았던 헤시피에서 나는 종종 거리에서 사회적 비 - P253

극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따르는 군중을 봤다. 나는 온몸을 떨면서 언젠가 이 일을, 그러니까 타인의 권리를 지키는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있다.
어쨌든 나는 이토록 일찍 무엇이 되었는가? 나는 결국 깊이 느끼는 것을 찾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단어를 쓰는 사람이 됐다.
보잘것없다. 매우 보잘것없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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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0 2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20 20:56   좋아요 0 | URL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세상의 발견>입니다.
책을 터치하면 책정보가나옵니다.
 

이 곡선은 모양 때문에 우묵한 곡선 hollow curve 이라고 불리며, 특히 이 우묵한 곡선에는 이름이 있다. 이것은 윌리스의 우묵한 곡선Willis‘s hollow curve이다. 이름이 따로 있는 이유는 이 문제가 거의 한 세기 가깝게 논의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논의한 이들은 인류학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일부러 그러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계속 속들 속에 종들을 이렇게 배치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던 전문 분류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왜 자꾸만 이렇게 하는 것이며, 민속 분류학을 하는 일반 사람들도 왜 똑같이 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해줄 것은 움벨트이다. 움벨트는 우리에게 종들이 매우 특정한 방식으로, 상당히 윌리스의 우묵한 곡선을 닮은 방식으로 속들을 채우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우리가 그런 그래프를 본 적이있든 없든 말이다. 그리고 분류학자들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지각이 알려주는 것에 좌우되는 움벨트의 포로들이다. - P208

인간의 행동은 유동적이고 창조적이며 예측할 수 없지만, 우리가 생명의 세계를 인지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동안 우리의 움벨트는 근본적인 면에서 변함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 움벨트는 우리 존재의 확실한 한 부분이기 때문에 움벨트를 무시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움벨트에 따라 사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들어본 적도 없는 규칙을 따르는 일일망정 침대에서 굴러나오는 것만큼이나 쉽다. 뉴기니의 수렵인부터 마야의 농부를 거쳐 독일의 분류학자까지, 이 시각이 반투어나 표준 중국어로 표현되든, 브라질의 마샤칼리어 혹은 라틴어 학명으로 표현되든 모든 사람이 심층적인 면에서는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생명을 머릿속으로 그린다.
- P209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이건 대단히 장엄한 일이다. 그토록 분명하고 명백하고 그토록 사랑받는 어떤 것(자연 질서 안에서 분명히 구별되는 수많은 생명 형태들과 그것들이 거주하는 움벨트)을 골라내 거기에 손을 대는, 아니면 적어도 그 근처에 손가락 끝을 갖다 대는 일 말이다. 그런데 정확히 그것이 이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정신, 우리 뇌의 어두운 모퉁이들을 탐험하는 그 남자들과 여자들이 해낸 일로 보인다. 그보다 더 경이로운 일은 이 연구자들이 움벨트에 손상을 입은사람들을 연구함으로써 정말로 움벨트가 지닌 가장 심층적이고도 심오한 중요성이 무엇인지 밝혀냈다는 점이다. 그들은 무작위적 현실로부터 질서 정연한 움벨트를 뽑아낼 수 있도록 생물을 분류하고 명명하는 뇌 영역을 지닌 채 태어난다는 것이 분류학자들에게 그리고우리 모두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낸 것이다. - P229

우리가 매일 움벨트의 렌즈를 통해 생명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고 나면 얼마 뒤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눈 닿는 모든 곳에서 움벨트가 미치는 효과와 힘과 영향이 보이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이 보편적인 생명의 비전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점차 이해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나는 꼭 움벨트에 사로잡힌 여자 같았다. 매일같이 나는 책을 읽다가 혹은 장을 보다가 문득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야! 저기 그게 또 있네! 또 움벨트잖아!" 다음날 또 다른 상황에서는 메릴을 쿡쿡 찌르며 "당신 저것 좀 봐! 저것도 움벨트야!" 하고 말했다. 일부러 움벨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면서 아이들과 놀고 있을 때조차 (어쩌면 그럴 때특히 더), 나는 움벨트를 발견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움벨트를 가장 활발하게 가장 생동적으로 사랑하는 존재들이 바로 아이들, 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경이로운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움벨트의 힘이 작동하는 모습을 목격하려고 뉴기니의 야생으로탐험을 떠나거나 지도에도 없는 멕시코 고원지대로 트레킹 여행을떠날 필요는 없다. 아이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 모습을 볼 수있다.  - P234

그러니까 움벨트는 자연탐구가나 분류학자가 생물의 질서를 이해하는 일만 돕는 것이 아니다. 움벨트는 우리 모두에게 강력하며 탁원한 쓸모를 지닌, 절대적으로 필요한 안내자이며, 그것이 없다면 낯설고 불확실해질 세계에서 우리가 현실에 굳건히 발붙이게 해주는닻이다. 아이들은 이를 알고 있다. 심지어 아기들도 이를 잘 알아서, 기저귀를 차고 앉은 완전히 무력한 상태로도 생명 세계의 질서를 가능한 한 잘, 가능한 한 신속히 파악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우리도 모두 한때는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제 다 잊어버리고말았다. 움벨트를 갖는다는 건 세계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안다는 것이고, 주변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분류학자들이 움벨트가 주는 비전에 그토록 필사적으로 매달리는것도, 우리가 우리 움벨트의 비전을 그토록 필사적으로 되찾고자 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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