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자기가 살지 않은 과거는 뭉뚱그리는 관성이 있다‘라고 메모했다. 세대론은 의심스러운 도구였지만 젊은 사회학자의저서는 고등학생의 심성 구조를 상상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마흔이 된 지금, 곽은 ‘동시대‘라는 단어에 소유권이 있다면 자신보다는 십대들의 지분이 크다는 걸 납득했다. 교사는 어린 학생들과 생활하며 유치해지기 쉬운 직업이라고들 했다. 퇴행보다는조로(早老)가 나았다.
생각은 생각이고 시간은 시간이었다. 충분한 연금 수령액에 도달하려면 십오년은 더 일해야 했다. 그 연금을 실제로 받으려면이십오년이 남아 있었다. 따지자면 곽은 교무실에서는 젊은 축이었다. 대표전화와 가깝고 방문자에게 등을 보이는 자리, 도서전에서 받은 머그잔과 저녁 산책을 하다 구입한 스투키 옆에 가방을 내려놓으면 힘이 빠졌다. 밀린 보직 업무를 시작하기 전, 의자에 몸을 묻고 수업을 돌아봤다.  - P115

연주하던 기타를 부수거나 관객에게 주먹을 날린 적이 있는 록 밴드들의 음악을 한두 곡 이어폰으로 들었다. 오아시스가 인터뷰에서 "우리는 예전에 끝났어"
라며 위악적으로 남긴 말은 재미있었다. 그걸 이렇게 바꿔서 속으로 읊기도 했다.
‘교육은 예전에 끝났어. 그러니까 엿같은 월급이나 내놔.‘
냉소는 독이었지만 적당히 쓰면 자기 연민을 경계하는 데에유용했다. 머그잔에는 『노인과 바다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탕비실에서 향 좋은 커피를 내리며 그 문 - P115

장이 자신에게 사치라는 걸. 자신은 패배는커녕 파괴되지도 않았•다는 걸 분명히 해두었다. 아쉬운 월급이었지만 임금노동자 평균•수입에 비하면 넉넉했다. 법으로 고용을 보장받았고 실적의 압박이 없으며 냉난방이 원활한 공간에서 일했다. 자잘한 연수나 업무가 있긴 해도 방학은 방학이었다. 일 년에 두 달을 쉴 수 있는직업은 많지 않았다. 균형감각, 계급의식, 뭐라고 부르든 견지해야 할 미덕이 있다면 푸념은 자제해야 했다. 게다가 한국은 대다수의 국민이 십 년 이상 공교육을 받는 선진국이므로, 명절의 친척집이든 독서 모임이든 포털 댓글난이든 모두가 학교와 교사에대해 나쁜 기억 하나쯤은 있었다. 병원에 가봤다고 의사의 일을.
은행에 가봤다고 은행원의 일을 다 아는 건 아닐 텐데 다들 지나치게 비난한다는 의문이 들기도 했으나, 그만큼 지난 시대 교육이 남긴 상흔이 큰 탓일지도 몰랐다.  - P116

하지만 학생들은 나의 식민지가 아니다‘
4월이 되자 완연히 따뜻해진 날씨에 꽃나무들이 만개했다. 고전읽기 교실은 2층이라 창밖으로 손을 뻗으면 하얗고 부드러운꽃잎들을 손으로 만질 수도 있을 듯했다. 교실 안으로 고개를 돌리면 엎드려 자거나 스마트폰을 보거나 다른 과목 문제집을 풀고있는 학생들이 한가득 보였다. 곽은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참여하는 학생들에게 감사하려고 했다. 네다섯 명은 곽의 설명을 듣고 텍스트를 읽고 학습지를 쓰고 있었으며 이따금 웃어주기도 했다. 은재도 그중 하나였다. 철학이나 사회학전공을 고려하고 있다고, ‘수업 재미있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라고 정돈된 글씨체로 썼던 은재, 그렇다고 평가를 계산하며 요란하게 열심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단지 허리를 펴고 수업을 듣다가 종종 무언가를 끄적거리며 초연하게 앉아 있던 은재, 덕분에 창밖으로 뛰어내리지 않았다고 농담을 건네며 나중에 악수라도 하고 싶었던 은재.
민원을 넣은 건 은재의 아버지였다. 은재가 마르크스를 읽고있다는 것이었다. 『자본론」은 수업에서 다루는 열한 권의 추천 도서 중 하나였다. - P125

부조리의 경험에 있어서 고통은 개인적인 것이다. 반항적 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그 고통은 그것이 집단적인 것임을 의식하게 되고, 그 고통은 인간 모두가 겪는 모험이 된다. 이상함의 느낌에 사로잡힌 인간이 최초로 내딛는 진일보는 그러므로 이 이상함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느낀다는 사실과…… -알베르 카뮈, 『반항하는 인간』에서  - P143

애들 얘기 하지 말라고 싫다고 난.
나는 다시금 말했다. 정호는 내가 매일 학원에서 어떤 생각과 어떤 눈빛들을 마주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이들의 눈을 보고 있으면 나는 매번 나의 치부를 들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얼마나 하찮은 사람인지 다 꿰뚫고 있다는 듯한 눈빛과, 꼭꼭 숨겨둔 것이 무색하게 나의 지저분한 면모들을 이미 알고 있다는듯한 표정들, 언젠가 나 스스로 순순히 그 치부를 보여줄 수밖에없는 날이 올 것 같은, 처형을 기다리는 염소의 마음을 정호가 알리 없었다. - P166

현철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려내는 데는 딱 일주일이 걸렸다. 정호의 말은 틀렸고, 현철의 말은 진짜였다. 현철은 시시하게 찾아왔지만 끈질기게 괴롭힐 준비가 된 사람 같았다. 현철은모든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현철이 찾아온 지 딱 일주일 되던 날, 현철은 증거의 일부를 정호에게 보냈다. 얻어맞은 사진과 의사의소견서도 삼 년 전에 머물러 있기는 했지만 진짜였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아무렇게 불쑥불쑥 꺼내도 미울 만큼의 미움을, 나는 잘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런 미움은 어떤 것일까. 시시해 보일 만큼 자연스럽고 명이 긴 미움은 어떤 것일까. 현철은 그 이후부터 그림자처럼 우리 주변을 맴돌았다. 정해진 입금일이 되었거나, 날짜가 지나도 돈이 들어오지 않을 때마다 나타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나 나는 현철이 무섭거나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현철이라면 분명 나에게 해를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현철은 그저 시시한 일상처럼 스며들었다. 그러나 정호는 달랐다. 정호는 현철과 비슷한 그림자만 보아도 소름 끼쳐했고, 그럴 때면 머리가 무거운 사람처럼 고개를 조금 떨구고는 생각에 잠기곤 했다. - P168

...... 모르겠네요. 그냥 매일 그 속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말할 수 없을 만큼 괴롭혔으니까. 아니. 이미 죽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저 새끼 전역하면 진짜다 끝이다. 생각하면서 버티고. 근데 진짜 끝이더라고요. 허무하게. 허무해서 더 화가 나더라고요. 사실 이제 와서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런 생각도 해요. 근데 어느 날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렇게 넘어가면 나는 다음번에 또 이렇게 넘어가겠구나, 하는 생각. 앞으로 계속 이렇게 피하기만 한다고 상상하니까 내 다음이 무서워지고, 내가 무서워지고. 무서워지니까 또 밉고...... 미치게 밉고, 이해 안 되겠지만 그래서 그랬어요. 전역하고 나서 매일 생각했어요. 목 조르는 생각, 칼로 찌르는 생각. 그런데 막상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렇게 골라내다보니 이렇게 시시해진 것도 같고. 그땐 진짜 죽이고 싶었는데. 어떤 사람한테는 삼 년이 어저께 같아요. 그 생각에 묶여서 시간이 안가요. - P180

소설을 쓰면서 약한 사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 싫었다. 소설도 사람도 전부 다 싫게만 느껴졌다. 한동안 안 쓰고 안 읽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니까 울지도 않았다. 다 잊어버린 척 열심히 연기했다. 그러다가 한 번쯤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한편에 품고서 살았으니까.
약하지만 약하지 않은 사람을 보고 싶었다. 「파주에 나오는 현철은 정호보다, 그리고 ‘나‘보다도 힘이 세다. 아니, 어쩌면 누구보다 셀지도 모른다. 나의 작은 소망 때문에 현철이 파주를 빙빙돌고 있는 것 같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이제는.
이상한 소설도 많이 썼다. 멀리서 누군가를 지켜보기만 하는소설. 망가지는 누군가를 바라보기만 하는 소설. 그러다가 같이뭉개져버리는 소설, 소설을 쓴다는 건 조금씩 시간을 유예하는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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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수리


아내는 또다시 집수리를 시작했다 같이 사는 동안 몇 번있었다 집을 아주 바꾸지는 않았다 제 살 집을 바꾸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를 바꾸고 싶은 모양이었다 불륜과는 다르다

삶은 감자 세 알


사무실 건물 환경원 아줌마가 옥상에 감자를 심어 길렀다고 오늘캤다고 뜨끈뜨끈한 주먹만 한 감자 세 알씩을 사무실마다 돌리며 귀한 거니 잡수어보시라고 했다 세 알을맛있게 다 먹었다 먹는 일이 제일로 귀하다는 걸 몸으로 알았다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귀하다는말! 진종일 내가 귀했다

개구리 우는 밤


논농사 두어 마지기 밤새 물꼬 터두고 새벽에 나가보면그들먹한 논물, 그들먹한 논물로 밤새 울고 울던 개구리들도 예법을 챙긴다 가까이 다가가면 가만히 침묵으로 읍한다 拱手로 절한다 그 침묵의 물 떠다가 혼자 놔두면 다시밤새 울을까 그들먹한 논물, 비친 낮달, 슬픈 눈썹 새로 그리고 있다 택배로 부쳐드리니 놔두고 보시게나

감실 부처님


나를 獨對해주셨다 경주 남산 감실 부처님, 늦은 나의 귀가에도 저녁밥 새로 상 보아 고봉밥으로 허기를 채워주시던 어머니를 상봉했다 손톱 닳아 반달이셨다 늘 들에 나갈 때마다 눌러쓰시던 머릿수건이 좀 낡아 보였다 어머니 가신지 서른세 해 되던 날 겨우 새 타월 하나로 갈아드렸다

슬픈 공복


거기 늘 있던 강물들이 비로소 흐르는 게 보인다 흐르니까 아득하다 춥다 오한이 든다

나보다 앞서 주섬주섬 길 떠날 채비를 하는 슬픈 내역마살이 오슬오슬 소름으로 돋는다

찬바람에 서걱이는 옥수숫대들, 휑하니 뚫린 밭고랑이보이고 호미 한 자루 고꾸라져 있다

누가 던져두고 떠나버린 낚싯대 하나 홀로 잠겨 있는 방죽으로 간다 허리 꺾인 갈대들 물속 맨발이 시리다

11월이 오고 있는 겨울 초입엔 배고픈 채로 나를 한참 견디는 슬픈 공복의 저녁이 오래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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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序


자연의 제 당길심이 무섭도록 크고 그 內奧의 세계에 흐르는 生命의 律呂가 주는 황홀은 더더욱 깊다는 것을 從心之年이 넘어서야 눈치채게 되었다. 이곳 生家 夕佳軒에 寓居를 정하고 나서 거기 기대고만 있는 나를 추스르다 보니 4년 터울의 내 시집이 2년 만에 나오게 되었다. 그만큼 편수가 늘어난 것이 사뭇 조심스럽다. 충실한 시의 일생이고자 하는 나의 생각이 잘 마무리될 수 있기를 늘 다짐하고있다. 이번에도 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서둘러주신 책만드는집 김영재 시인의 배려에 큰 고마움을 느낀다.

己丑 한여름
夕佳軒에서
鄭鎮圭

되새 떼들의 하늘


오늘 석양 무렵 그곳으로 떼 지어 날으는 되새 떼들의하늘을 햇살 남은 쪽으로 몇 장 모사해두었네 밑그림으로 남기어두었네 그걸로 무사히 당도할 것 같네 이승과 저승을 드나드는 날개붓이여, 새들의 운필이여 붓 한 자루 겨우 얻었네 秘標하날 얻어두었네 한 하늘에 대한 여러 개의 질문과 응답을 몸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지덕지할 일인가 오늘 서쪽 하늘에 되새 떼들이 긋고 간 飛白이여, 되새 떼들의 書體여, 자유의 격식이여 몇 장 밑그림으로 모사해두었네 가슴팍에 바짝 당겨 넣은 새들의 발톱이 하늘 찢지 않으려고, 흠내지 않으려고 제 가슴 찢고 가는 그게 飛白이라네 하얀 피라네

박태기 꽃


충혈인지 어혈인지 그쪽으로 자꾸 깊게 물들고 있다 진자주다 한 번 되게 그대에게 부딪쳤을 뿐인데 온몸 다닥다닥 꽃 벌기 직전이다 어쩌려고 이러나 등짬을 당겨보지만돌아서지 않는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갈 때까지 갈 모양이다다닥다닥 서둔다 어느 문전이라는 걸 벌써 다 알고 있는눈치다 박태기 꽃 맺힌 걸 다닥다닥 바라다보며 이 봄이 위태위태하다 한 번 되게 살구나무가 부딪친 것 滿開로 본것이 엊그제인데 맘먹고 박태기 꽃 마지막을 서둔다 이 늦봄 꿈속의 꿈까지 꾸어 몸 밖의 몸을 보려 한다 박태기 꽃 진자주

비 오는 날


빗속에서 저 맨몸 빗줄기들 자연분만된 줄로만 알고 있었더니 빗줄기 속에서 비가 비로소 몸을 얻고 있음을 여기와 보았다 비 젖고 섰는 큰 느티나무를 비가 와서 만든 줄알았더니 느티나물 만나서 비가 비로소 느티나물 크게 적시게 되었음을 알았다 느티나무에게 잘 모시겠다고 큰절했다 이 늦봄 새벽, 사랑이 와서 초록 풀밭 아득히 적시는 빗소리를 귀 열고 있었더니 맨몸 적시고 있었더니 오래전에 있었던 초록 풀밭이 비로소 사랑을 몸 부리고 있음을 알고 큰절했다 노박이로 비 맞고 은하 건너온 칠석날 까치 두마리도 아침 뜨락에 와서 이미 알고 있었다고 두어 번 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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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나는 그 나무를 잘생긴 나무라고 불렀다. 우리는 나뭇잎 모양이나 열매를 보며 나무의 진짜 이름을 알려고 애쓰지않았다. 이름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을까. 어떤 이름이든 나무 스스로 지은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 나무는 회색 수피가 매끄러웠고, 하나로 곧게 뻗은 기둥 끝엔 우산살처럼 둥글게 휜 가지가느긋하게 자라 있었다. 보리차차는 공원에 가면 꼭 그 나무 밑동에 대고 오줌을 쌌다. 보리차차가 나무를 돌며 꼼꼼하게 냄새를맡았기에 우리는 그 옆에 서서 나무의 잘생긴 풍모를 봤다. 시간이 흐른 뒤, 나 혼자 그곳에 갔을 때 나무는 잎을 다 떨군 채 잿빛기둥이 되어 쉬고 있었다. 갈색 깃털의 새가 악보의 음표처럼 나뭇가지를 오르내렸다. 나는 근처의 흙이나 돌멩이에 보리차차의흔적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잘생긴 나무와 그 나무가 뿌 - P9

리 내린 땅, 할머니와 내가 보리차차를 앞세우며 걷던 공원의 오솔길, 그 풍경 어딘가에 보리차차의 오줌이 스며든 자국이 남아있을 것 같았다. 똥은 없겠지. 똥은 늘 우리가 배변봉투에 담아서가져갔으니까. 하지만 고불거리는 털 오라기나 콧방울에서 나오는 숨, 담홍색 젤리 같은 혓바닥에서 떨어지는 침방울, 높고 빠르게 짖는 소리.. 그게 무엇이든 보리차차의 일부가 산의 한 부분이 되어 여전히 내 곁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았다. 부르면 의심이 달려오던 보리차차. - P10

"말은 항상 느리죠. 생각에 비하면 언제나 느려요."
그러니 마음놓고 말하라며 레인코트가 우유수염의 팔에 닿을듯 말 듯 자신의 손을 올렸다. 우유수염의 표정에서 S자 곡선이그려지는 듯했다. 우유수염은 달아오른 열기를 식히듯 손등을 뺨에 갖다댔고 초조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레인코트는 우유수염이 무엇을 찾는지 알아챘다.
"혹시 이응을 찾는 거라면."
레인코트의 말에 우유수염의 얼굴이 밝아졌다. 레인코트는2층 발코니에 이응이 있지만 새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작동을 멈춰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랑하는 기색 없이 이곳에서 하는 이응의 탁월함을 말했다. 풀과 흙 냄새를 맡으며 개울물소리와 함께 이응을 하면 발가벗고 빗속에 서 있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도시의 폐쇄된 공간에서 하는 이응과는 자극의 차원이달라서 한번 하고 나면 한동안 이응 생각이 안 날 만큼 에너지가충전된다고. - P19

할머니, 이 사람은 슬퍼할 자격이 있어? 울어도 돼?
할머니는 팬티를 갈아입는 인간이란 함부로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했다. 그래서 뫼르소는자기 엄마가 죽었을 때 울지 않고 카페오레를 마신 거라고.
나는 카페오레 대신 오미자물을 마셨다. 엄마가 보고 싶어 우는 대신 빵빵해진 아랫배로 변기에 앉아 소변을 봤다. 할머니는내가 울음을 터뜨리려고 하면 오미자물을 주면서 달랬다. 다울어버리지 말고 울고 싶은 마음에서 한 걸음 물러나 울고 싶은 자신을 바라보라고 했다. 그런 복잡한 설명을 들으면서 차갑고 새콤한 오미자물을 마시면 내 슬픔은 어리둥절한 눈을 한 채 나에게서 멀어졌다. 할머니는 나를 욕실로 데려가 울고 싶지만 울음 - P31

이 떠나간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손에 물을 묻힌 다음 슬퍼서 흘러내릴 것 같은 내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했다. 홍 홍! 나는 수건을 목에 두르고 앉아 내 콧방울을 움켜쥔・할머니의 손가락에 콧물을 풀었다. 향긋한 로션을 바른 다음 할머니의 배를 빼고 누우면 꾸루루 꽐꽐 꾸루루 꽐꽐 멧비둘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줄줄 나는 거야. 하나도 안 아프고 하나도 안 슬퍼."
내게 오미자물을 주며 울지 말라던 할머니는 녹내장 증상으로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주전자의 주둥이와 유리병 입구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서 오미자물을 바닥에 흘렸고, 물을 흘린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보리차차도 눈가에 눈물 자국이 생겼다. 송곳니가 약해져 딱딱한 음식은 잘 먹지 못했고 개가 먹을 수 있는 우유를 주면 코코아빛 입가에 우유 수염을 만들었다. - P32

할머니의 손을 따라 뺨이 뭉개지고 나면 할머니는 턱받이처럼 목에 두른 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얼굴이 맑게 다시 생겨나는 기분. 그리고 나의 애처로운 강아지 보리차차는 아무리 내가 잘 말려줘도 털에 스민 물기를 세차게 흔들어 털어냈다. 머리, 몸통, 꼬리를 세 방향으로 비틀어 몸을 말렸다. 그러고선 날듯이 네발로 점프해 자기의 방석으로 몸을 던졌다.
내가 잃어버린 화살은 모두 내 안에 있었다. 나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떨었다. 레인코트가 떨며 신음하는 나를 더 세게끌어안았다. 끝없이 애정을 갈망하는 강아지처럼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이응 안에서 오래 포옹했다. 속옷을갈아입어야 하는 몸으로 다른 몸에게 안겼다. 레인코트, 당신의 이름은 무슨 색이죠? 나는 묻고 싶었지만, 입속의 말들이 소리로나오지 않았다. 옛이응의 ‘호‘가 아닌, 지금 나를 가득 채우는 이 느낌을 표현할 새로운 언어가 필요했다. 더 깊은 품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 P46

만약 미래의 어떤 기술이 우리의 삶을 좀더 이롭게 할 수 있다면, 그건 우리로 하여금 그 기술이 탄생하기 이전의 삶을 다시 한번 더 충실히 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기술이란 본질적으로 우리가 느끼고 이해하는 정보를 배열하는 방식인데, 그 정보란 것이 인간에겐 뇌에 입력된 과거의 기억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자기의 삶에서 그 어떤 것도 돌이켜 추억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현재를 지각할 수도 없고, 기억이란 재료를 혼합해 내일을 꿈꿀 수도 없을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래의 신기술은 우리의 지난 삶을 위해, 우리를 다시금 어린아이로 돌려보내 또 한번 배우고 자라나게 하기위해 필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 P51

이 소설은 이런 길들을 거쳐 저에게 왔습니다. 저를 깨우치게한 책들과 나무가 자라 있는 풍경, 그 안에 머무는 개와 새들이 제가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겨 떠올리고픈 이미지입니다. 그 기억을 따라 저는 넘어지고 발을 헛디디며 틈과 오류로 가득한 ‘이응‘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기억은 ‘ㅇ‘이란 글자의 생김새처럼 저를 지나쳐 또다른 곳으로 굴러갑니다. 부디 이 소설이 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구 굴러가 자신만의 이응을 그려내는 누군가에게 잘 썩은 낙엽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등돌리고 선 듯한 절망에 빠진다 해도, 그 이응 안에서 자기 자신만은스스로를 꽉 안아주면 좋겠습니다. - P53

수영장 천장에서 빛이 쏟아진다. 형광등에도 타나 많이 탔어.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말들을 물이 밀어낸다. 물속과 물 밖. 시끄러움과 고요함. 오늘은 끝까지 가볼래요? 아니요. 저는 안 갈래요. 왜 안 가요. 희주와 주호는 실랑이를 한다. 희주가 먼저 간다.
주호가 뒤따른다. 물이 흔들리고 물이 휜다. 딱 그만큼 몸이 흔들리고 몸이 휜다. 떠오르는 몸. 가라앉는 몸. 물을 밀어내는 만큼밀려가는 몸. 밀어내는 만큼의 무게. 딱 그만큼 두 사람은 손안에들어오는 물을 만진다. 움켜쥔다. 갈 수 있는 만큼 간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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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공동 집필하는 동안 위와 같은 소설들을 다수 읽으면서, 이 소설들이 제인 오스틴이나 샬럿브론테,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같은 작가들이 보다 감추어진 식으로 발언했던 항변을 어떤 식으로 강조하는지 깨닫고 놀랐다. 그러나 오스틴, 브론테, 배럿 브라우닝의 주인공들과 달리, 페미니즘 소설의 주인공들은 이성애 관계에 헌신하며 ‘그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의 삶을 사는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다. 그들은 미치거나,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거나, 이혼하거나, 독신으로 지내면서 자신의 저자들에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페미니스트들이 양성 간의 전통적인 관계를 도전적으로공격하면서 이혼율이 급증했던 시기 동안) 결혼 제도를 비판할기회를 제공했다. - P238

1970년대에 가장 폭넓게 읽힌 소설 중 하나는 미국의 전통적 여성성을 비판한 작품으로, 그 여성성의 모순은 우울증에 걸린 주인공/서술자를 광기로 (그리고 자살 시도로) 몰아간다. 실비아 플라스의 『벨 자』는 원래 1963년 런던에서 빅토리아 루커스라는 필명으로 출간되었다. 저자가 자살하기 채 한 달도 안남은 시점이었다. 그녀가 죽고 난 후 그녀의 남편도 그녀의 어머니도 영국에서 그녀의 이름으로 이 작품이 발표되도록 허락하는 것을 주저했으며, 미국에서의 출간에 대해서는 한층 더 불안해했다. 이 소설은 마침내 1971년 미국에서 출간되면서 엇갈린평가를 받거나 열혈 독자들을 감동시켰다. 이들 열혈 독자 다수는 이 작품의 플롯이 플라스 자신의 애틋한 개인사를 따르고있고 그녀의 불길한 미래를 예언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 P239

1960년대 초반 플라스가 이 암울한 내용을 썼을 때 그녀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명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와 그녀의 작품(시와 산문) 모두는 1970년대 페미니즘을 구성하는 내용을 구체화한다. 1950년대식의 고정된 여성의 역할들과 거리두기라든가, 섹슈얼리티(‘처녀성‘과 그것의 상실)라든가 심지어 밀릿의 『지하실에서처럼 "여성이기에 죽는 것"이라는 은밀한 생각을 하며 역겨워하는 반응 등이다. 운명의 변덕스러운 장난인지, 미래는 그렇게 떠오르는 것인지, 1963년 『벨 자』가 발표되고 나서 한 달 뒤에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가 출간되었는데, 이는 플라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불과 일주일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두 책 모두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와의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밀릿의 『성 정치학』과 함께 이 세 책은 실비아 플라스의 강렬한 비극적 인생 이야기가 그랬던 것처럼, 1970년대의 페미니즘을 탄생시켰다. - P244

이 소설의 출간은 플라스의 자살 사건을 둘러싸고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던 미스터리까지 더해지면서 일종의 문학적 폭동을 촉발시켰다. 로빈 모건의 1972년 첫 시집 『괴물』에 실린 시 「규탄」은 테드 휴스에게 플라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여긴 페미니스트들에게 공격 무대를 마련해준다.


당연히, 많은 말을 쏟아내지 않고서
내가 어떻게
비난할 수 있을까
테드 휴스를
영국과 미국의 온 문학계와 비평계가
장황하게 부인해왔던 사실
실비아 플라스를 죽인 자가 그자 아닌가? - P245

그러나 일부 독자들은 어쩐지 플라스가 지금도 살아 있을 것같다는 환상을 여전히 버리지 못한다. 얼마 전 <런던 리뷰 오브북스)는 플라스 서한집 완전판의 서평 「여든여섯의 플라스」를 실었다. 그 글을 쓴 조애나 빅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었다.


실비아 플라스는 결코 죽지 않았다. 1963년 겨울에 그녀는 살아남았고 지금도 피츠로이 스트리트에서 살고 있으며, 『벨자』와 ‘남편이 멋지고 완벽한 남자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배신자에 바람둥이임이 밝혀지는 내용의 1964년 소설 『뒤늦은 반응』으로 돈을 벌어 건물을 통으로 사들였다. 그녀는 패션브랜드 아일린 피셔의 옷을 자주 입고 다니며, 페이버 출판사의 파티가 열리면 가장자리 안락의자에 앉는다. (...) 미투 운동은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관심이 있다. (…) 소설 집필은 몇 년전 그만두었고 시는 느긋하게 쓰고 있다. 이제 퓰리처상과 부커상에 노벨상까지 받았으니까. 그녀는 너무나 대단한 대가가 되어 가까이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녀가 화장실에서 백발을 벗고있고 당신은 립스틱을 바르는 동안, 당신은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수줍게 미소 짓는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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