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휩쓸려 간다. 부유물처럼, 물이 거세나 잔잔하냐에 따라 때로는 순하게, 때로는 격하게.

보지 못하는가?
인간이란 뭘 원하는지 모르고, 끊임없이 찾으면서,
마치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려는 듯,
여기저기 옮겨 다닌다는 걸.
루크레티우스


날마다 새로운 공상을 품고, 날씨가 변하면 기분도 덩달아움직인다.

주피터가 세상에 보내는 다채로운 빛줄기들을 따라,
인간의 생각도 그와 함께 변하나니.
호메로스 - P14

플라톤은 「법률」에서, 공공의 비판이나 피치 못할 숙명적인불행,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수치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아니라 겁이 많아 비열하고 유약한 탓에 자기와 가장 가깝고 가장친한 자, 즉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과 운명의 흐름을 빼앗은 자는수치스럽게 매장하라고 명한다.
게다가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견해는 가소롭다. 왜냐하면결국 그것이 우리의 존재요 우리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보다고상하고 풍요로운 존재를 지닌 것들은 우리를 비난해도 좋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찮게 여기며 우리를 소홀히 다루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다. 자기를 미워하고 하찮게 여기는 것은별난 병(病), 다른 피조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병이다.  - P45

이 역시 우리가 아닌 다른 것이 되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치한 생각이다. 그런 욕망의 결실은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런 욕망자체가 자기모순, 자가당착이니까. 사람에서 천사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저 자신을 위해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천사가 된 것에서 아무 득도 보지 못한다. 그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누가 자기를 위한 이 변화를 느끼고 즐길 것인가?

한 존재가 불행과 고통을 느낄 수 있으려면,
그 불행이 닥치는 그 순간에
존재하고 있어야만 하므로.
루크레티우스 - P46

1573년이나 1574년에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에세에서 몽테뉴는, 초기 에세에서 다룬 죽음과 병에 대한 그 자신의 강박관념, 삶을 위협하는 고난에 대처하기 위해 고대 철학자들이 수행했던 고행을 상기시킨 뒤, 1569년 또는 1570년 초에 겪은ㅈ낙마 사고를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그리고 그 체험을 에세 쓰기의 목적, 방법, 의미와 연결시킨다. 제목에 쓰인 ‘exercitation (연습, 수련, 훈련)‘은 고대의 철학집단과 그리스도교 등의 종교 집단이 진리와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삼은 어려운 논전, 고행 수행 등에 쓰인 옛 단어이다. 몽테뉴는 고대 철학이 설정한 거의 초인적이며 일면 가학적인 수행을 지칭하던 이 단어를 보편적 ‘인간조건‘을 지닌, ‘보잘것없고 광채 없는‘(『에세 3」 2장) ‘나‘의 인생을 참되고 가치있게 만들기 위한 ‘자기 탐구‘를 지칭하는 단어로 삼는다. 그 실행이 글쓰기였고,
그 글쓰기의 형태가 곧 ‘에세‘이므로, exercitation, 같은 뜻으로 보다 흔히 쓰인exercice, exercer, 그리고 essai는 글쓰기라는 하나의 행위 안에서, 구별하기 어려울만큼 동시에 수행되는 수련이라 하겠다. "이 글은 영광이나 칭송을 바라기 어려운 일종의 수련(exercitation)이요, 이름을 낼 만한 것이 못 되는 일종의 시작
(composition)이다." (『에세 2』 17장)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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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미소는 제한된 관계에서만 오간다. 아는 사이, 좁히자면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웃음은 ‘정상‘이다. 그런데 나는 잘 웃는 사람이다. 강연이나 낭독회 등 독자들과 만나는행사장에서 나의 웃음은 곧잘 빵빵 터진다. 지인들과의 만남에서도심각한 포즈는 영 질색이다. 외롭고 고독한 포즈, 사양이다. 내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차라리 사람을 만나지 않는 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존재다. 어차피 존재의 고독은 혼자 감당하게 설계되어 있는 것이고, 고독은 행복의 반대편에 있는 말이아니다. 행복한 사람에게도 고독이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행복한사람일수록 존재의 고독에 명민하게 깨어 있고 고독을 잘 보살피는것이리라. 그러니 고독은 존재의 자기 증명 방식이기도 하다. 고독을잃어버린 삶은 영혼의 어떤 부분이 마모되어버린 삶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 고독해, 나 외로워, 라며 사뭇 괴로운 포즈로 엄살 피우는예술가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고독을 잘 감당하는 사람, 고독 - P46

을 잘 즐기는 사람이 좋다. 자신의 고독의 무게로 다른 사람까지 무거워지게 하지 않는 삶이 나는 좋다.


그런데 나는 이내 깨달았다. 모든 오로빌 주민들이 다 미소를 띠며 사는 건 아니란 걸. 오로빌 같은 데서 도대체 저 이는 왜 저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는 걸까. 어쩌면 그런 의문은 오로빌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에서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매혹적인장점이 너무나 많은 이 마을에서 저렇게 안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본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내가 토로할 때, 나는 이미오로빌을 대상화시켜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막연한호감을 가지고 오로빌에 오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여러 가지 정보들 중 대체로 두 가지 정도의 선입견이 공통적인 듯하다. 오로빌을 수식할 때 자주 사용되는 말들이다. - P47

오로빌은 젊다. 오로빌에선 모든 실험이 가능하다. 누구든 제안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언제든 발의하고 발의한 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룹이 생기면서 일이 추진된다. 열정과 용기만 있다면 내가 상상하는 모든 것을 실험해볼 수 있다. 오로빌의 에너지는스스로의 변화와 진보를 꾀하는 이런 열정과 용기를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 같다. 그 모든 현장에 유일한 규칙이 있다면 오픈 마인드. 자신과 다른 의견과 관점에 대해 틀렸다고 하지 않고 다르다고 인식하는 것. 다른 것들을 조율하는 데 시간과 노력이 걸리는 것을 인내해야 한다는 것. 내가 느낀 오로빌의 가장 큰 매력은바로 이 지점이다. 오로빌에선 모든 것이 ‘되어가는 과정‘이지 평화롭고 완숙한 결론에 미리 도달해 있는 것이 없다. 완성형이 아니라 다양한 실험들이 모색되고 실천되는 과정의 마을인 오로빌은 ‘되기 마을‘이다.

이 푸른 오로빌의 메리 크리스마스! - P57

안에는 흙 한줌이 들어있다. 냄새를 맡아보라고 한다. 바구니를 들어 코 가까이 대었다. 아, 말할 수 없이 향기로운 흙의냄새, 눈물이 핑 돌 뻔 했다.
향기를 뿜는 흙 한 줌. "꽃이군요!" 흙에 코를 묻은 채 내가 외치자 얼굴 가득 미소를 지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 역시 한줌 꽃 거름을 두 손에 받쳐 든 채로.
내가 지상에서 처음 맡아본 꽃 거름 냄새, 꽃으로 만들어진 흙의 냄새.
세속의 관점에서라면 이토록 쓸모없는 일을 자신의 일로 삼은 사람과, 그 일을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공동체 사람들과, 그 일에 맘껏 감동한 한 게스트가 함께 보낸 오전 시간이 무슨 병처럼 찌르르찌르르하게...... 그렇게 완성되었다. - P68

오로빌 아이들이 오로빌을 사랑하는 마음은 각별하다. 오로빌너머의 세계를 경험한 아이들일수록 더하다. 오로빌에서 자라 평생오로빌에서 사는 이들도 있지만 오로빌 바깥에서 다양한 공부를하고 돌아와 오로빌에 무언가 기여하기를 원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외국에서 대학을 마친 아이들 중 80% 이상이 다시 오로빌로 돌아온다. 그게 이해가 된다.


기억나는 스리 오로빈도의 말이 있다.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다. 가까운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먼 것으로 나아가라 자신의 성장은 자신의 마음의 인도를 받아야한다"는 교육의 세 가지 원칙.
곱씹어볼수록 동의가 된다.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따라 성장하는교육이 사라진 학교가 배출해온 우리의 모습 속에는 타인의 욕망을욕망하는 것이 자신의 욕망이라고 착각하는 슬픈 그림자도 한 녘에있을 것이다. - P113

남는 음식들은 거의 없지만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남게 되는음식 찌꺼기와 화장실에서 나오는 대변은 거름으로 발효시켜 나무를 심을 때 사용한다. 스머프 하우스처럼 너무 깜찍한 오두막 화장실은 전혀 냄새가 나지 않는다. 냄새는커녕 퍽 정결한 느낌이어서화장실에 앉아 푸른 하늘 흰 구름을 올려다보며 오렌지머핀을 뜯어먹어도 되겠다 싶을 정도였다. 소변과 대변을 따로 보는데 대변을보면 톱밥을 뿌려 거름으로 순환시킨다. 사다나의 곳곳은 이렇게지구환경에 해를 덜 끼치면서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을 찾아내고 실험해보려는 아기자기한 실험들로 넘쳐난다. 사다나 포레스트 안에서는 술, 담배, 마약을 할 수 없고 화학제품을 일체 사용할 수 없다.
비누나 샴푸도 그곳에서 싸게 구매해주는 친환경제품을 사용한다.
숙소용 오두막들의 입구에 대롱대롱 매달린 친환경 치약통도 어찌나 깜찍하던지! - P140

물질도 풍족하지 않고 기후도 열악한 이곳으로 그러나 오로빌리언들은 다시 돌아온다. 쾌적하고 안락한, 원하는 모든 물건들이가게마다 즐비한, 대부분 선진국이라 할 나라들에서 여름 한철을보내고 나면 돌아오기 싫어질 것도 같은데 왜 그들은 이곳으로 돌아오는 걸까. 체감하는 삶의 질, 삶의 만족도가 크기 때문일 거라고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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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세 번째 장편소설의 초고를 마쳐놓고 여행 가방을 쌌다.


나 좀 쉬려고요. 좀 지쳤거든요.


이런 마음이 드는 순간, 먼지 앉은 벽장문이 열리며 몇 개의 문장이 선율처럼 떠올랐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낮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 그르니에의 문장들이 벽장 속에서 떠오르는 날, 여행을 준비한다. 나는 키득거리며 빨강 여행 가방과 남색 여행 가방 중 어느 - P4

걸 가져갈까, 이런 사소한 생각을 하며 커피콩을 간다. 나 자신에게쪽지를 남기듯 다시,


잘 돌아오기 위해, 떠남,


나이 드는 것이 참 좋다, 라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사람들이가진 저마다의 예쁜 구석이 잘 보여서 좋고 몰아붙여야 할 때와 쉬어야 할 때를 비교적 잘 감각할 수 있게 되어서 좋다. 청춘의 시절에는 자주 속았다. 사랑도 분노도 절망도 바닥까지 몰아가야만 직성이 풀리고 고통스러워도 그래야만 진짜라고 생각했다. 진이 빠질때까지 울며 뛰며 소리치며 스스로를 닦달했다. 스스로 경계 지어놓은 진짜와 진짜 아닌 것들이 너무 많아 그것들을 판독하기에만도 늘 시간이 모자랐다. - P5

하긴, 청춘은 그래야만 또한 청춘이려니 이제 청춘의 시절이 지나자 내가 가진 에너지를 조율하게 된다.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힘이 어느 만큼인지 보이기 시작하고 그걸 충전해야 한다는 것도 인정하게 된다. 예전엔 어딜 가든 나를 꽁꽁 싸매놓은 채 뜨거운 돌을 밟듯이 발을 재게 디디며 낯선 것들을 탐험했다. 일종의 대결의지를 가지고서 그 낯섦들을 내 것으로 경험하고 느껴야 한다는 기묘한 소유 의지가 있었다고 할까. 지금은 살짝 힘이 빠진 상태를 낯 - P5

선 시간과 공간에게 무람없이 들키고 싶어서 여행을 떠난다. 여행지에서 무언가 얻어야 한다는 강박 없이. 허술하게 짐을 싸고 그냥훌쩍 떠난다. 다만 솔직하게 고백한다.
나 좀 쉬려고요. 좀 지쳤거든요. 일단 쉬고 다시 잘 살아볼게요.
알았어요. 좀 쉬고 다시 잘 사랑해볼게요.
삶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어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 다행이다.
조금씩, 병아리 눈물 만큼일지라도, 조금 조금씩,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은 거다. 산다는 게 영 녹록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우리의, 갸륵한 수고, 아, 좋은 날이다. - P5

선 시간과 공간에게 무람없이 들키고 싶어서 여행을 떠난다. 여행자에서 무언가 얻어야 한다는 강박 없이. 허술하게 짐을 싸고. 그냥훌쩍 떠난다. 다만 솔직하게 고백한다.


나 좀 쉬려고요. 좀 지쳤거든요. 일단 쉬고 다시 잘 살아볼게요.
알았어요. 좀 쉬고 다시 잘 사랑해볼게요.


삶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어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 다행이다.
조금씩, 병아리 눈물 만큼일지라도, 조금 조금씩,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은 거다. 산다는 게 영 녹록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우리의 갸륵한 수고. 아, 좋은 날이다. - P6

그랬다. 나는 개개인의 삶이 자신의 내면의 풍요에 맞춰져 있고, 사회의 전체 분위기가 개인의 행복감을 훼방하지 않는 그런 공간 속으로 들어가 몸과 마음을 쉬고 싶었다. 행복에 감염되고 싶었다고 할까. 우리 사회 전체의 차갑고 딱딱한 절망, 어떤 무기력의 상태라고나 해야 하는, 무거운 매연처럼 내려앉은 이 차가운 절망으로부터 어떻게 스스로를 깨울까. 이런 절실함이 내게 있었다. 행복의 감각이 깨어 있을 때라야만 우리는 꿈꾸기를 지속할 수 있다. 무엇이 정말 행복한 상태인지 스스로에게 더 이상 묻지 않게 될 때 꿈도 끝난다. 꿈 없이 행복 없이, 인생은 뭐란 말인가. - P7

나는 지상에서 신비가 사라지는 것이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종류의 사람이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경험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신비이다. 신비는 예술과 과학의 근본을 이루는 진정한 모태이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확실한 길만을 추구하는 과학자는 결코 우주를 맑은 눈으로 볼 수 없다."
아름다웠던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이런 태도를 나는 사랑한다 내가 아인슈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그가 놀라운 법칙을 발견해낸 천재과학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주와 지구의 신비 앞에 엎드려 탄성을지를 줄 안 아름다운 몽상가이기 때문이다. 신비를 잃으면서 인간이라는 종의 타락은 가속화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또한 지나친 신비주의도 경계하는 사람이다. 어느 시대건 지나치게 배타적인 종교나 오컬티즘은 인간의 미혹에 봉사해온 혐의가 크다. 특히나 나는 ‘진리는 오직 하나‘라고 생각하 - P14

는 ‘절대‘의 세계에 대한 본질적 거부감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가진 우주관은 범신론에 가깝고, 다양다색의 진리가 자연스럽게 창조, 수용되는 사회일수록 평화의 구현이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는쪽이다. 세상 만물 모든 것 속에 신성함의 씨앗이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 속에 부처도 예수도 성모 마리아도, 크리슈나도 존귀한 가능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 P15

오로빌에 도착해 보름 동안은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냥 놀았다. 메모나 간단한 일기조차 쓰지 않았다. 단 한 글자도 쓰거나 읽지 않고 보름 동안이나 놀아본 것은 드문 일이다. 나는 오로빌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숲길에서 여러 번 길을 잃었고 사는 일이 길을 잃는일이기도 하듯이), 오가며 마주친 많은 사람들과 따뜻한 미소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그런데 슬슬 뭔가 쓰고 싶어지기 시작한 거다. 노트북을 무릎에 안고 커서가 홀로 깜빡이는 무한한 공포의 시간 속으로 여행을하고 싶어지는, 여행지 속의 또 다른 여행, 이른바 글쟁이의 지병이 도진 거다.


사실 작가에게 여행이란 문학하는 행위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문학은 꿈이다. 여행은 꿈을 충동한다. 문학한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자기 고백과도 같다. 포기하고 싶은 순 - P17

간이 많지만 끝내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다시 들끓는, 문학은결국,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의 소산이다. 그러므로 결국은인간학인 문학의 운명을 나는 사랑한다. 여행 역시 인간학의 공부가 지속되는 학교이니, 이 에세이도 그렇게 나의 학교 외딴 교실 한칸에서 자란 셈.


그동안 여러 곳을 여행하며 살았지만 여행 에세이를 쓰지 않았다. 모든 여행은 시와 소설로 전이되어 몸 바꾸기를 하기에 특별히 - P18

여행 에세이라는 형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오로빌을 여행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똑같은 욕망을 욕망하게 되어버린 우리 사회의 욕망의 획일성이 오로빌에 와서 더욱 아파진 까닭이다. 갈수록 현란해지는 이 시절에 우리의 삶의 방식은 점점 더다채로워지는 게 아니라 왜 더 획일적이 되어 가는 것일까. 언제부터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착각하며 살게 된 걸까.
지금 우리 사회는 주체의 과잉이 문제라기보다 주체의 실종이 문제인 것은 아닐까. 휘황한 거리에는 ‘나‘라는 광고 문구가 넘치건만 왜갈수록 나를 잃어버리며 산다는 느낌이 드는 걸까. 나의 실종에 불안하면서도 남들 사는 대로 살지 않으면 또 다른 불안이 엄습하는기이한 닫힌 회로, 출구 없는 일상의 쳇바퀴로부터 어떻게 ‘나‘를 찾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과 함께 다른 삶의 풍경을 만들며사는 이들을 훔쳐보고 싶었다고 할까. 굳이 말하자면 이 여행 에세이는 ‘약간 건강한 의도를 가진‘ 훔쳐보기의 소산일 수 있겠다. 이훔쳐보기를 통해 우리의 삶에 몇 개의 새로운 창문이 더 생기고 열려서 기존의 사회가 강요하는 방식과 전혀 다른 삶과 행복도 가능하다는 것을 공유하고 싶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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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나는 너의 그늘을 베고 잠들었던 모양이다.
깨보니 너는 저만큼 가고.
나는 지는 햇살 속에 벌거숭이로 눈을 뜬다.
몸에게 죽음을 연습시키는 이런 시간이 좋아.
아름다운 짐승들은 떠날 때 스스로 곡기를 끊지.

너의 그림자를 베고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는
지구의 시간.
해지자 비가 내린다.
바라는 것이 없어 더없이 가벼운 비.
잠시 겹쳐진 우리는
잠시의 기억으로도 퍽 괜찮다.

별의 운명은 흐르는 것인데
흐르던 것 중에 별 아닌 것들이 더러 별이 되기도하는
이런 시간이 좋아.
운명을 사랑하여 여기까지 온 별들과

별 아닌 것들이 함께 젖는다.

있잖니. 몸이 사라지려 하니
내가 너를 오래도록 껴안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날이야.
알게 될 날이야.
축복해.

허공


수천수만 번의 벼락도
나를 멍들게 할 수 없다

비어 있으므로

나는 자유

봄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믿기지 않았다. 사고 소식이 들려온 그 아침만 해도
구조될 줄 알았다. 어디 먼 망망한 대양도 아니고
여기는 코앞의 우리 바다.
어리고 푸른 봄들이 눈앞에서 차갑게 식어가는동안
생명을 보듬을 진심도 능력도 없는 자들이
사방에서 자동인형처럼 말한다.
가만히 있으라, 시키는 대로 해라, 지시를 기다려라.

가만히 기다린 봄이 얼어붙은 시신으로 올라오고있다.
욕되고 부끄럽다. 이 참담한 땅의 어른이라는 것이.
만족을 모르는 자본과 가식에 찌든 권력,
가슴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오만과 무능이 참혹하다.
미안하다. 반성 없이 미쳐가는 얼음 나라,
너희가 못 쉬는 숨을 여기서 쉰다.
너희가 못 먹는 밥을 여기서 먹는다.

환멸과 분노 사이에서 울음이 터지다가
길 잃은 울음을 그러모아 다시 생각한다.
기억하겠다. 너희가 못 피운 꽃을.
잊지 않겠다. 이 욕됨과 슬픔을.
환멸에 기울어 무능한 땅을 냉담하기엔
이 땅에서 살아남은 어른들의 죄가 너무 크다.
너희에게 갚아야 할 숙제가 너무 많다.

마지막까지 너희는 이 땅의 어른들을 향해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차갑게 식은 봄을 안고 잿더미가 된 가슴으로 운다.
잠들지 마라, 부디 친구들과 손잡고 있어라.
살아 있어라, 산 자들이 숙제를 다할 때까지.

지옥에서 보낸 두 철


보았네

보았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보다,의 지옥

인간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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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글쓰기에 내 삶을 바쳤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내게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 묻는다. 나는 그들의 표정을 보면서 그들이무언가를 비밀스럽게, 어렵게 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글쓰기를 가르쳐줄 수는 없다. 그 과정과 구상이 내안에서 무르익어 표출될 때까지 무의식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쓰는 방법도 정확히는 모른다. 글쓰기는 문장 안에서 호흡할줄 아는 것이다. 독자가 필수적인 일종의 대위법 안에서, 나의리듬뿐만 아니라 독자 자신의 리듬에도 적응하면서 나와 함께서두르지 않고 호흡할 수 있도록 문장만큼이나 행간 사이에도약간의 침묵을 둘 필요가 있다.
나는 일곱 살 때부터 문장이 숨 쉬는 수준에 이르기 위해 연습해왔다. 미리 계획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열다섯 살에는 돈을 받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 P958

준비 과정이 길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상 과정이 빠르게 이뤄지기도 하니까. 내 준비 과정은 호흡하는 것을 배우고, 몇몇 사람이 문체라 부르고 나는 "자연적인 문체"라 부르는 내 글쓰기 방식을 스스로 배신하지 않는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내 교열자가 내 글의 단어를, 구두 - P958

점을 바꾸지 않는 것에 감사한다. 내 교열자는 악센트 부호를 넣는 것이 전부인데, 그건 내가 계속 빠트리기 때문이다. 브라질리아에서 온 한 청년이 리우에서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나를 찾아오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전화상으로 이해한 바에 의하면, 그는나를 만나서 내가 그에게 글을 써서 먹고살 수 있는지 말해주길원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나랑 만나기로 약속한 일요일, 나는 점심을 먹고 유감스럽게도 잠이 들었고, 그 청년은 떠나버렸다. 미안해요. 언젠가 나를 다시 찾아주세요. 그러나 지금 당장 그에게말할 수 있는 건 브라질에서 책을 써서 받는 수입으로 생활하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방법은 기자가 되는 것과 다른 소소한 일을 하는 것이다. 소소한 일을 더하면 경제적으로 합당한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수입에 간신히 도달할 수 있다.
거기에 이런 일들을 다 하면서 문학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내야 한다. - P959

주디스 역시 연극을 좋아했다. 그녀는 사람들을 만나 자기를소개하면서 극장에서 예술가로 일하고 싶고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대부분은 조롱했다. 모두가 경험이 없는 순진한 이젊은 여자 앞에서 자연히 다른 것을 상상했다.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직업도 없는 그녀에게 남은 것은 거리를 떠도는 일뿐이었다.
결국 누군가- 어떤 남자였다 그녀를 불쌍하게 여겨 데려갔다. 이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가엾게 여기길. 주디스는 곧 아기를 낳을 예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밤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게 존재하지 않았던 이 이야기는 끝난다.
버지니아 울프는 묻는다. "누가 여성의 몸에 갇힌 시인의 뜨겁고 맹렬한 심장을 평가할 수 있는가?" - P968

베른


눈앞에서 이 완벽한 아름다움을 목격한 이방인은 어쩌면 신비를 밝힐 수 없을지도 모른다. 스위스의 풍경은 아름다움의 증거를 너무 많이 제시하니까. 첫인상은 가벼워 보이지만, 그다음에는 불가해한 느낌이 뒤따른다. 엽서 같다. 그러나 조금씩 그 부동의 상태가, 그 균형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멀리 있는 산을 바라본다. 무감각하고 조용한 공간이다. 그러나 금방 쓰러질 것 같은 벽들이 집들과 교회들을 한데그러모으는 이 마을에는 일종의 단호한, 내부 지향적인 집중이있다. 탑들과 골목길들과 뾰족뾰족한 아치들과 침묵이 있는 이도시에서 악마는 알프스산맥 너머로 추방되었을 것이다. 악마없는 도시에는 혼란스러운 평화, 개혁의 기치 아래서 가혹하게형성된 삶의 흔적, 느린 정복의 표시들, 완고하고 고통스러우며지속적인 광택질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 P1012

악마를 멀리 붙들어두려는 결의인가? 청결에 대한 너무도 스위스다운 욕망에서 배어나는 이 완고함, 땅 위에 공기의 투명함을 복제하려는 욕망, 준엄한 윤곽의 산이 지시하는 명확한 법칙에 대한 순종, 치명적으로 불순하고 무질서한 인간적인 것을 제물로 바치려는 의지, 질서는 더 이상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도덕적 필연이다. 질서는 스위스 사람이 스위스에서 호흡할 수 있는 유일한 환경이다. 스위스 밖에서 스위스 사람은 그가 추방한악마로 인해 놀라고 방향을 잃는다.
거리에는 표정을 아끼는 고행자의 얼굴들이 있다. 그 평온하고 무거운 표정에는 맹신의 힘을 연상시키는 조용한 힘이 있다.
누군가 스위스는 군인이 아니라 전사라고 말했다. 스위스가 전사라면, 스위스 여자는 여전사다. 강인하고 굳건하고 강한, 어떤희생에 바쳐지는 존재. 그녀는 대성당에서 열린 콘서트에 있다. - P1013

화장기 없고, 냉정한 그녀는 목을 축이면서 오르간 소리와 합창단의 날카로운 목소리, 이 민족의 근엄한 기쁨에 맞는 순수한 음악을 들으며 기쁨을 살짝 드러낸다. 그녀는 의자에 완전히 기대지 않고 있다. 그녀는 약간은 근엄하고 이해하기 힘든 모습으로남아 있을 것이다. 꽉 막힌 매력 없이, 때와 장소를 아는 일종의청교도적인 우아함을 지닌 채, 하지만 허영심을 부끄러워하는옷차림에 반기를 들면서,
이 부끄러움은 봄에 극복되어 조금은 대담해진다. 환한 블라우스와 어두운색 원피스에 작은 주름 깃 장식들이 나타나며, 빛을 받아 섬세한 여성성이 돋보인다. 노인들은 정원의 자리를 차 - P1013

지한다. 그곳은 존경할 만한 노인들의 땅이다. 그들은 벤치에 앉아서 반짝이는 호수와 눈 덮인 알프스, 상냥하고 쾌활해 보이는각각의 나뭇가지를 응시한다. 그러다 여름이 온다. 미지근한 향기 속에서 선들은 더욱 선명해지고, 꽃들은 더 서둘러 난폭해지며, 바람은 결국 조금의 먼지를 일으킨다. 놀이, 놀이, 놀이-그것은 악마 없는 개화다. 가을이 오면 물 색깔이 짙어진다. 사냥하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지만 사람들은 사냥 고기를 산다.
산, 표면, 작은 형태, 모든 것은 더 차가워진 바람 아래 태양 없이빛난다. 집이 아늑해진다. 그러고 겨울이 온다. 놀이, 놀이, 놀이.
그러나 지금은 다시 봄이다. 우리는 지체할 시간이 별로 없다. 베른의 다리 아래에 얼어붙은 강이 가볍게 달린다. 빛과 고요와신비, 그것이 내가 베른의 창문으로 본 것이다. - P1014

옮긴이의 말

‘리스펙토르‘라는 세계


"카프카가 여성이었다면, 릴케가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자 브라질인이었다면, 랭보가 어머니였다면……."
작가, 엘렌 식수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를 수식했던 말이다. 카프카, 릴케, 랭보, 이 커다란 이름들 옆에 리스펙토르를 나란히 두어도 부족함이 없겠지만, 나는 그들을 모두 지우고 남은 말들로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 여성,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자 브라질인, 그리고 어머니,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그가1946년부터 1977년까지 30년 동안 브라질 언론에 칼럼니스트로서 썼던 글들을 여기 모았다. 1967년에서 1973년까지 매주 토요일, 일간지 <조르나우 두 브라질>에 연재했던 칼럼들과 미출간된 글 120편 이상을 함께 실은 이 작품집은 사실상 리스펙토르 문학의 원재료라고 말할 수 있겠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삶, 글쓰기에 대한 사유, 독자와의 소통,번역가로서의 면모, 또 그가 만난 인물들까지 리스펙토르라는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풍경들이 이곳에 담겨 있다. - P1021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여성의 텍스트‘의 개념을 조금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엘렌 식수가 설명하는 ‘여성적 글쓰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엘렌 식수는 「출구」에서 "오늘날 글쓰기의 여성적 실천을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실천은 결코 이론화되거나 제한되거나 코드화되거나 할 수 없을 것이기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자면 규정할 수 없는 것이 여성적텍스트의 규정이라는 것이다. 분석하고, 명료화하는 것이 규정이라면 여성의 텍스트는 그 반대편에 있다. 분석될 수 없고, 명료화할 수 없으며, 기존의 체계로 분류할 수 없는, 남성 중심적언어와 사고체계를 전복[]하는 글. 여성의 텍스트는 존재 자체가 전복이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문학은 그 전복된 세계에 위치한다.
식수가 말하는 "자신만의 경험으로 언어를 소유하고, 변형시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여성적 글쓰기"를 리스펙토르는 직관과 본능의 글쓰기를 통해 오랫동안 우리를 길들인 언어가 존 - P1022

재하기 이전 혹은 그 언어 너머의 세계를 향하는 방식으로 실현한다. 언어가 탄생하기 전에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감각했을까.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우리는 세계를 무엇으로 명명할까. 그의글은 이 두 질문에 답을 찾으려는 시도처럼 언어를 해체하며 새로운 앎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가 가닿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의 소설 속 인물들처럼 남성적 세계를 깊은 당혹감에 빠뜨리고,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수정하도록 이끌며, 우리의 원시적 감각을 깨운다. 목소리는 지금까지 배제되고 제한된, 우리가마주한 적 없는 존재들이 있는 장소들을 가리킨다.
익숙한 이곳이 아니라 낯선 저곳, 법칙 안이 아닌 바깥, 우리를통제하는 장치들(규칙, 해설, 설명 등)이 일소되는 곳. 바로 그곳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세계이다.  - P1023

그 꿈은 일종의 슬픈 강박이었다. 꿈은 중간부터 시작됐다.
살아 있는 젤리가 있었다. 그것이 젤리의 감정이었다.
고요했다. 살아 있는 고요한 젤리는 힘겹게 테이블 위를굴러다녔다. 내려가고, 올라가고, 천천히, 넓게 퍼지지않고, 누가 그 젤리를 잡을까? 아무도 그럴 용기가 없었다.
내가 젤리를 봤을 때, 나는 내 얼굴이 반사되어 젤리의삶속으로 천천히 들어가는 것을 봤다. 나의 변형은중요했다. 나는 녹지 않고 형태만 변했다. 나도 기껏해야숨만 쉬고 있었을 뿐이었다. 공포 속에 욱여넣어진 나는 내사본으로부터 원초적 젤리로부터 달아나려고 했고, 테라스로 나가 마지막 층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 P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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