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우리는 너무 떨어져 살아서 만날 때마다 방을 잡았다.
그 방에서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었고 파티를 했다.
자정을 훌쩍 넘기면 한 사람씩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지만, 누군가는 체크아웃 시간까지 혼자 남아 있었다.
가장 먼 곳에 사는 사람이었다.
건물 바깥으로 나오면그 방 창문을 나는 한 번쯤 올려다보았다.

2023년 9월
김소연

흩어져 있던 사람들


선생님 댁 벽난로 앞에서 나는 나무 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누군가 사과를 깎았고 누군가

허리를 구부려 콘솔 위의 도자기를 자세히 보았다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무 타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갔다 누군가 창 앞으로 다가가

뒷짐을 지고 비를 올려다보았고 누군가

그 옆으로 다가갔다

뭘 보는 거야?

비 오는 걸 보는 거야?

선생님 댁 벽난로에서 장작 하나가 맥없이 내려앉았다 - P9

다 같이 빗소리 좀 듣자며 누군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때 말벌 한 마리가 실내로 날아들었다

누군가 저것을 잡아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모두가

일제히 어깨를 움츠렸다 처마 밑에 벌집이 있는데요?

119를 불러서 태워야 하지 않을까요?

누군가 선생님을 처마 아래로 불러 세웠고 누군가는

날아다니는 말벌만 쳐다보았다

겨울이 되면 말벌이 떠나고 빈집만 남는댔어

가만히 기다리면 적의 목이 떠내려온다구 - P10

선생님 댁 벽난로에서 나무 타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 옆에 와 앉으며

말벌의 독침은 연사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 옆에 다가와서 누군가는 어린 시절 벌에 쏘인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은 2층으로 올라가서

벌집을 들고 내려왔다 이건 작년 겨울에

처마 밑에 있던 거야 조금만 기다리면

저 벌집도 내 차지야

벌집은 정말로 육각형이었다

까끌까끌했지만 보석 같았다 - P11

근데 말벌은 어디 있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벌집을 에워
싸며

처음으로 가까이 모여들었다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며 선생님은 빙그레 웃었다

말벌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

선생님은 2층에 벌집이 하나 더 있다며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 P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행은 마음의 발걸음이기도 해서, 다른 장소에 가면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나는 이 여행에서 내 마음의 발걸음도 한번 뒤따라 가보고 싶었다. 내 주관적, 개인적 경험을 적어나갔지만 내 평범한 삶을 미화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글자 그대로의 땅을 걸어가는 것이 어떻게 마음의 구석진 곳들을 탐험하는것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사례로 내 경험을 이용한 것뿐이었다. 이 책의 장르는 통상적 의미의 여행서가 아니라 여행을 계기로 구상되고 배열된 연작 에세이다. 이 책의 글 한 편 한 편이 다양한 모양의 구슬이라면 이 책의 계기가 된 여행은 그 글들을 한데 엮는 실이었다. 글마다 소재(여행지 풍경과 여행자의 정체성, 기억하는 내용과 기억에서 사라지는 내용, 상수와 변수)가 다르지만, 여행(내가 떠났던 수수한 여행이기도 하지만, 그와 같은 다른 많은 여행들이 공명했던 과거의 모든 위대한 여행들이기도 하다.) 자체는 이 책으로 엮인 모든 글의 소재였다. - P7

조이스의 『율리시스』 끝부분에 나오는 몰리 블룸의 독백이 잘포착한 것으로 유명한 의식의 흐름은 내적 자아로의 귀환이다.
내가 다른 나라라는 미지의 영토로 떠나면서 해보고 싶었던 것중 하나 또한 그 내적 자아라는 연상의 영토를 탐험하는 것이었다.
여행자가 가장 여행하기 어려운 풍경은 여행자에게가장 강한 영향을 미치는 풍경, 곧 여행자 자신의 생각 속에 녹아 있는 풍경이다. 자아의 두 번째 겹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은풍경이 마치 모기들처럼, 아니면 갑옷처럼, 아니면 향수처럼, 아니면 눈가리개처럼 자아를 에워싸고 있다. 내가 마음의 발걸음을 쓰면서 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 내적 경험이라는 겹을여행에 포함시키는 것, 그리고 이로써 여행수필(travel writing)의 관행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 P9

브렌다는 철학의 역설을 수집, 편찬하는 작업을 구상 중이었고나는 온유에 관심이 있었으니 우리는 서로의 작업에서 어떤 친연성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몇 가지 정의를 찾으면서 행복해한 것은 그 전날에 스네이크 강가를 산책하며 얼어붙은 웅덩이를 이리저리 피하면서였고, 그렇게 찾아낸 정의들을 함께 정리해본 것은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저녁으로 브렌다가 만든 토마토 커리를 함께 먹으면서였다.(브렌다는 지식욕이 왕성한 만큼 식욕도 왕성한 미인이었다.) 나의 은유와 브렌다의 역설은 한 번에 두곳에 있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데가 있었다. 모종의 종점에 가닿고 싶어 하는 철학은 결국 한 곳에만 있으려는재미없는 시도가 아닐까. 비유가 아닌 진리, 곧 진리 그 자체는영원히 가닿을 수 없는 소실점 같은 것이 아닐까, 끝나는 곳은시작하는 곳과 마찬가지로 신화적 장소가 아닐까, 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었다. - P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이 점을 포착하고 있다. 마리아 공주는 자기 집 앞으로 지나가는 무수한 러시아 순례자들에게 먹을 것을내주면서 모종의 열망을 느낀다. "그녀는 순례자들에게 이야기를 청해들을 때가 많았다. 그들의 소박한 말투, 그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하지만 그녀의 귀에는 깊은 의미로 가득한 것처럼 들리는 그 말투에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동했던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길을 나설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럴 때 이미 그녀는 누더기를 걸친 차림으로 보따리와 지팡이를 들고 흙먼지 자욱한 길을 걸어가는 자기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단 한 곳의 목적지를 향해 명료하고 검소하고 강렬하게 나아가는 고상한 은둔자의 삶을 상상한다. 순례자의 발걸음은 단순 명료함의 표현이자 목적의식의 표현이다. 낸시 프레이(NancyFrey)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까지의 긴 순례길에 대해 이렇게말한다. "순례자가 걷기 시작하는 순간 세계를 느끼는 방식 몇 가지가 한꺼번에 변하는데, 그 변화는 여정 내내 이어진다. 시간 감각이 바뀌고, 오감이 예민해지고, 자기 몸과 자기 몸을 둘러싼 자연경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긴다. [......] 그것을 한 독일 청년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했다. ‘걷는 경험 속에서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사유가 된다. 자신으로부터 도피하기란 불가능하다.‘
- P91

실비아 플래스(Sylvia Plath)가 그 이유를 일기에 적은 것도 열아홉살 때였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건 내 끔찍한 비극이다. 길에서 일하는사람들, 선원들과 병사들, 술집 단골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은데, 익명의 존재가 되고 싶은데, 경청하고 싶은데, 기록하고 싶은데, 다 망했다. 내가 어린 여자라서 수컷으로부터 습격당하거나 구타당할 가능성이 있는 암컷이라서. 남자들이 어떤 존재인지, 남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데, 그렇게 궁금해하면 유혹한다고 오해받는다. 모든 사람과 최대한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좋을까. 노천에서 자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서부로 여행을 가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밤에 마음껏 걸어 다녀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플래스가 남자들을 궁금해한 이유는 남자들에 대해 알아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제 막 자기의 인생을 시작한 이 어린 여자는 자기보다 자유로운 남자들의 삶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산책, 즉 집 밖에서 재미 삼아거니는 일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가 자유 시간, 둘째가 걸을 만한 - P374

장소, 셋째가 질병이나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육체다. 자유 시간에는 다양한 변수가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대에 대부분의 공공장소는여자들에게 그렇게 편하고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법률, 성별 관행, 추행과 강간의 위험 등은 여자들이 걷고 싶을 때 걷고 싶은 곳을 걷는 일에 제약을 가했다.(여자에게는 옷이 신체적 구속이 될 때가 많다. 굽이 높은 신발, 발을조이는 가냘픈 구두, 너무 넓거나 너무 좁은 스커트, 쉽게 찢어지는 옷감, 시야를 가리는 베일 등은 법이나 두려움 못지않게 여자에게 핸디캡을 안겨주는 사회 관행이다.)
여자들은 공공장소에 있는 동안 사적인 부분(private parts)을 침해당하는 일이 놀라울 정도로 자주 발생한다. 영어에도 여자의 걷기를성별화하는 표현이 많다. 창녀를 뜻하는 표현으로 길거리를 걷는 사람(streetwalker), 거리의 여자(woman of the streets), 도심의 여자(woman on thetown), 공공의 여자(public woman) 등이 있다. 이런 표현에서 여자(woman)를 남자(man)로 바꾸면 공인(public man), 유행에 밝은 사람(man abouttown), 건달 (man of the streets)이 된다. 성에 관한 관습을 깨뜨린 여자를 묘사하는 방황한다
(stroll, roam, wander, stray)는 표현은 여자의 여행에 성적인 면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또는 여자가 여행을 떠날 때 여자의 섹슈얼리티는 관습을 위반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 P375

‘일요일의 떠돌이들(Sunday Tramps)‘은 레슬리 스티븐을 비롯한 남자 보도 여행자들의 모임이름인데, 만약 여자들이 자기네 모임을 이런 이름으로 불렀다면 그건일요일에 보도 여행을 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일요일에 뭔가 외설적인일을 한다는 뜻을 품었을 것이다. 실제로 여자의 보행은 많은 경우 이동이 아니라 공연으로 해석된다. 그런 해석대로라면 여자들은 보고 싶은것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보여주기 위해서 걷고, 자기의 경험이아니라 자기를 보는 남자의 경험을 위해서 걷는 셈이다. 곧 여자는 무슨 - P375

종류의 관심이 됐든 관심받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예로부터 여자의 걸음걸이에 대한 글을 쓴 사람은 많이 있다. 얼마나 에로틱하게 걷는가라는 평가(예컨대 17세기 아가씨의 "페티코트 밑으로 작은 생쥐들처럼 / 슬쩍슬쩍 들락날락하는 두 발"에 대한 평가, 또는 메릴린 먼로의 씰룩거리는 걸음걸이(wiggle)에 대한 평가)에서부터 무엇이 올바른 걸음걸이인가라는 지침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우리가 어디에서 걷는가에 대한 글을 쓴 사람은 많지않다.
이동을 제약당하는 사람들이 여자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종, 계급, 종교, 민족, 성적지향으로 인한 제약에는 지역 특수성이 있었던 데 비해, 여자라는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받는 제약은 세계 전역에서 거의1000년 동안 젠더 정체성의 근본적 조형 요소가 돼왔다. 생물학적,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적절한 설명은 사회적·정치적 상황이 아닐까 싶다.  - P376

혼자 걷는 것에도 막대한 영적, 문화적, 정치적 울림이있다. 지금껏 혼자 걷기는 명상과 기도와 종교적 성찰의 중요한 일부분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요학파에서 시작해서 뉴욕과 파리를 배회하는 시인들에 이르기까지 혼자 걷기는 사유와 창작의 형식이었다. 또한 작가, 예술가, 정치적 이론가 등에게는 작품을 구상할 공간을 마련하는 방법이자,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을 만남과 경험을 확보하는 방법이었다. 이 뛰어난 남자들이 세상을 마음껏 걸어 다닐 수 없었다면 과연 그 뛰어난 것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을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집 안에만 있어야했다면 어땠을까. 뮤어가 풀스커트를 입어야 했다면 어땠을까. 여자들이 낮의 도시를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뒤에도 밤의 도시,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애상적이고도 시적인 카니발은 ‘창녀(woman of the night)‘가 아닌 여자에게는 출입 금지 구역이나 마찬가지였다. 걷기가 기본적인 문화적 행위이자 인간의 중요한 존재 방식이라면, 발길 닿는 대로 걸어 다닐 가능성을 빼앗겨온 사람들은 단순히 운동이나 여가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크게 박탈당해온 사람들이다.
제인 오스틴으로부터 실비아 플래스에 이르기까지 여자들은 남자들과 다른 주제, 비교적 협소한 주제를 다뤄왔다. 틀을 깨고 좀 더 넓 - P392

은 세계로 나아간 여자들도 없지 않았다. 얼른 떠오르기로는 평화 순례자(중년의 나이로), 조르주 상드(남장 차림으로), 에마 골드먼, 조세핀 버틀러, 그웬 모펏 등등. 그러나 아예 침묵해야 했던 여자들이 훨씬 많았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버지니아 울프의 유명한 에세이 자기만의 방』은 제목 그대로 여자들이 작업 공간을 가져야 한다는 항변으로 기억되지만, 사실이 에세이는 창작하는 사람에게 작업 공간 못지않게 필요한 경제, 교육, 공적 공간에의 진입 가능성을 논의하고 있다.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위해 울프는 셰익스피어에게 똑같이 재주 있는 누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한다. 주디스 셰익스피어라는 이 여자의 망가진 인생 앞에서 울프는 묻는다. "그녀가 술집에서 정찬을 시켜 먹거나 밤거리를 걸어 다닐수 있었을까요?" - P393

세라 술먼(Sarah Schulman)의 소녀들, 전망들, 온갖 것들(Girls, Visionsand Fonerything)이라는 소설은 울프의 에세이와 마찬가지로 여자들의 자유에 가해지는 제약을 논의하고 있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의 한 대목에서 제목을 따왔다. 케루악의 강령이 소설 속의 젊은 레즈비언 작가 라일라 푸투란스키에게 얼마나 유용한지를 검토하겠다는 의미다. 푸투란스키는 생각한다. "문제는 잭 케루악과 나를 동일시하게 된다는 것, 그가 길을 가는 중에 같이 잔 여자들과 나를 동일시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케루악은 오디세우스처럼 한 자리에 머무는 여자들이라는 풍경 속을 여행하는 남자였다. 케루악이 1950년대에 미국의 매력을 탐험했듯, 푸투란스키는 1980년대 중반의 맨해튼 로어이스트사이드의 매력을 탐험한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길거리를 몇 시간씩 정처 없이 걸어 다니다가 어딘가에 가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녀의 세계는 더 바깥으로 열리는 대신 더 내밀해진다. - P393

옛날에 말 두 필이 끄는 마차에 올라타는 것은 밖으로 나가되 걷지 않기 위해서였지만, 지금 말 두 필의 힘, 곧 2마력으로 움직이는 기계에 올라서는 것은 걷되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서다. 어딘가에서는 지상의 풍경과 생태를 바꿔놓고 있는 발전 설비, 배전 설비 등의 전기 인프라 전체(전선과 계량기와 노동자로 구성되는 네트워크, 발전소를 돌아가게 하는 탄광과 유전의 네트워크, 수력발전 댐의 네트워크)가 눈에 띄지 않게 가정과 연결되어 있고, 어딘가에는 러닝머신을 만드는 공장이 있다. (그리고 오늘날 미국에서 공장노동은 소수집단의 경험이 되었다.) 그러니 러닝머신을 사용한다는 것은 밖에서 걷는 것에 비해 훨씬 많은 경제적·생태적 상호작용을 필요로 하는 일인데, 러닝머신이 만들어내는 경험적 관계는 훨씬 적다. 러닝머신 사용자는 책을 읽는 등의 방법으로 시간을 보낸다.  - P424

<프리벤션(Prevention)>이라는 잡지는 러닝머신 사용 시에 텔레비전을 시청할 것을 추천하기도 하고, 봄이 왔을 때 러닝머신의 루틴을 실외 걷기로 대체하는 법을 알려주기도 한다.(밖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러닝머신을 이용하는 것을 경험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뉴욕 타임스>는 한창 유행하고 있는 실내자전거 강좌에 이어서 러닝머신 장거리 사용자의 고독을 달래주기 위한 러닝머신 강좌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뉴스를 전한다. 러닝머신의지루함은 공장노동과의 공통점이다. 쳇바퀴가 수감자 교화에 도움이 된다고 본 것도 바로 이 지루한 반복 때문이었다. 프레코사(社)의 광택 나는 상품 안내 책자가 심혈관 러닝머신의 장점을 알려주었다. 이 러닝머신에는 "거리별, 시간별, 경사별로 "다섯 가지 코스가 프로그래밍되어 있고, "그중 ‘인터랙티브 체중 감량 코스‘는 운동량을 조절함으로써 사용•자의 심박수가 최적의 체중 감량 존을 벗어나지 않게 유지"하며, "사용자설정 코스는 사용자가 자기에게 맞는 프로그램을 최대 13킬로미터까지 - P424

최소 150미터 간격으로 간단하게 설정, 저장할 수 있다. 나에게는 사용자 설정 코스가 가장 놀랍다. 사용자는 마치 도보 여행길에 오른 듯 다양한 지형의 행로를 설정할 수 있고, 그 다양한 지형을 구현하는 것은 180센티미터 길이의 발판에서 회전하는 고무벨트라는 놀라운 이야기. 일찍이 기차가 공간 경험을 잠식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동 거리의 측정 기준은 공간에서 시간으로 변경되기 시작했다.(요즘 로스앤젤레스 사람은 할리우드에서 베벌리힐스까지 몇 킬로미터 거리라고 하는 대신 20분 거리라고 한다.) 러닝머신은 여행의 의미를 이동 시간, 체력 소모, 기계적 동작으로 측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이 변경의 과정을 완성했다. 분위기로서의공간, 지형으로서의 공간, 볼거리로서의 공간, 경험으로서의 공간은 사라졌다. - P425

언어는 말이든 글이든 시간 속에 펼쳐지기에 한눈에 인지될 수 없다는 점에서 길과 비슷하다. 언어와 길은 이렇듯 시간적 전개라는  점에서 닮은 데가 있는데, 미술과 보행은 전혀 닮은 데가 없다. 그런데 1960년대에 모든 것이 변하면서, 시각예술이라는 넓은 우산 밑에서 불가능한 것이 없어졌다. 일종의 혁명이었다. 모든 혁명에는 부모가 있다.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이 시각예술 혁명의 대부(代父) 중 하나라는 것이 그의 자식 중 하나인 앨런 캐프로(Allan Kaprow)의 주장이다. - P427

배회와 도박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기대하고 있을 때가 결과가 나왔을 때보다 즐거울 가능성이 높다. 둘 다 소망은 확실하지만 성취는 불확실하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일이나 손에 쥔 카드를 테이블에 펼쳐놓는 일은 둘 다 운을 시험하는 일이다. 그러나 카지노의 입장에서 도박은 꽤 예측 가능한 과학이 되었다. 이제 카지노와 라스베이거스법집행 세력은 스트립을 걸어 내려갈 때 개입하는 운까지 통제하고자 한다. 스트립은 진짜 대로다. 비바람에 노출되어 있고 주위 환경에 개방되어 있는 공공장소이자, 미국 수정헌법 제1조가 보장하는 명예로운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장소다. 그 자유를 빼앗으려는 상당한 노력이 진행 중이다. 이대로 간다면 스트립은 유원지나 쇼핑몰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런 공간에서 우리는 소비자는 될 수 있지만 시민은 될 수 없다.  - P452

사람들에게는 장소를 향한 갈증, 도시와 정원과 정글을 향한 갈증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 야외를 배회하면서 건물과 구경거리들과 상품들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낯선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은 마음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라스베이거스는 알려준다. 라스베이거스 전체를 놓고 보면 지구상에 이곳만큼 보행자에게 적대적인곳도 없다는 사실은 앞으로 어떤 문제들이 생길지를 시사하지만, 라스베이거스의 명소가 보행자들의 오아시스라는 사실은 보행을 살려낼 수 있는 공간들을 회복할 가능성을 시사해주기도 한다. 공간이 사유화됨으로써 보행과 발언과 시위의 자유가 불법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미국이 도시공간을 놓고 통행권 전투(반세기 전 영국 배회자들이 시골길을 놓고벌였던 통행권 전투 못지않게 심각한 전투)를 치러야 하리라는 것을 알려준다. 실제 장소들의 이미테이션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확산돼 있다는 사실도 오싹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이미테이션은 시민적 자유의 온전한 행사를 가로막는 동시에 시인이나 문화비평가나 사회 개혁가나 거리 사진가를 자극할 수 있는 장면들, 만남들, 체험들의 온전한 스펙트럼을 가로막으니 말이다. - P4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쨌거나 세계를 향해 문호는 개방되었고, 넓은 공간을 향유할 수 있었음에도 사람의 시각이 좁아져가는 이율배반, 그것은 물질에 치우친 데서 오는 의식의 축소일 것입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공간은 무한대입니다. 확실한것보다 불확실한 것 역시 무한대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확신할 수 없다 하여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는 것, 확실한 것에다 말뚝을 박아놓은 물질주의, 과학 만능은 새로운 구속일 수도, 억압일 수도 있습니다. 즉 선택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는, 흔히 쓰이는 말인데 오늘날 이 말같이 설득력이 강한 것은 달리 없을 성싶습니다. 막히게 되면 언제나 꺼내는 전가의 보도 같은 것이며 근본적으로 봉쇄해버리는 위협적인 말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오늘의 현실은 어떤 현실일까요. 방향 전환이 불가능하며 - P82

방법이 없다는 것인지, 최상의 상태로서 다른 대안이 필요 없다는 것인지. 물론 물질문명이 우리 인류에게 가져다준 것은 막대한 것이었습니다. 격세지감이란 오늘을 두고 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비록 한시적인 것이기는 해도 풍요로움을 우리에게 안겨주었고 다양한 생활방식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지구가 망가지고 자원이 고갈될 것이라는 전망, 이러한 가시적인 피해에 대해서 일일이 매거할 수는 없고 보이지 않는 부분, 정신 영역에 속하는 부분의 황폐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비생산적이며 별반 가치가 없는 분야, 그러나 명심할 일은 존재의 원리가 균형이라는 점입니다. 육체와 정신은 분리된 것이 아니며 그것은 하나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만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그릇이 있어야 물이 형태를 잡듯, 생명이 지닌 능동적인 것에 의해 피동적인 물질은 변화하는 것입니다. 어찌해서 보이지 않는다 하여 우주의 공간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엄연히 그것이 물질은 아니지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 P83

사는 것 이상의 진실은 이 세상에 없다. 그러면 생명들은 왜 살고 싶은 것일까. 그것은 본능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 본능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신을 모르듯이, 신을 본 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살고 싶고 살아야겠다는 의지는 자기 자신의 실존을 의식하고 사물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며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능동성이다. 그리고 생명만이 보유한 능력이다. 그것은 고귀하고 값진 것이며, 어떠한 보물로도 대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물은 생물을 먹지 않고는 생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근원적인 비극이며 갈등이며 원죄적인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순환으로 자위하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하며 풀뿌리 하나, 들꽃 하나, 풀벌레 하나, 그 모두가 생명인 이상 애잔하다. 살기가 힘들고 외로우며 씨앗을 위해 헌신하는, 이 대자대비의 세계, 인간만이 동족을 살육한다는 것은 천지 만물 중에서 억조창생 중에서 가장 저열한 종자가 아닐 수 없다. - P109

멋은 자연스러운 것, 자연스러운 것은 생명 그 자체며 정신이나 행동거지에서도 자연스러울 때 멋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물체나 조형예술도 자연스러울 때 멋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멋은 균형이며, 균형은 존재하게 하는 것이며, 예술가가 작품 제작에 임해 균형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생명을 추구하는 것이다. - P116

진정 우리는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러한 세상을 꿈꾸며 출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명은 융성하나 사람들은 야만으로 퇴화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는 패션쇼의 전성기요. 개성의 시대라고도 하고 미스코리아가 관심의 대상이다. 또 멋이라는 말도 그런 것에만 집중적으로 쓰여지고 있다. 사실 그런 부분에 멋이라는 말이 쓰여지는데 이의가 있을 수 없고 그런 부분이 여분으로 있는 것 역시 이상할 것은 없다. - P117

우리 민족의 문화는 멋으로 집약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직선은 생경하다. 그러나 곡선은 유연하다. 그리고 흐름이다. 우리의 산천이 그러하고 우리의 구조물, 의복 할 것 없이 일체의 생활용품에도 곡선을 선호한 흔적이 역력하다.
심지어 버선의 코까지, 외씨 같은 버선발이라는 그야말로 간드러진 표현도 바로 그 곡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명은 율동감이다. 흔들리며 배어 나오는 영혼의 율동이기도 한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존중돼야 한다. 살아 있다는것은 추상적인 것이며 결코 물질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 P118

그러나 자기집 앞을 청소하듯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인간을 위해서는 그까짓 미물쯤이야, 그런 생각에 못지않게, 인간을 위해 그런 미물도 보존해야 한다는 이기적 발상으로서는 환경운동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총체에 대한 인식과 생명의 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한 운동은 실패할 것입니다. 자연과 환경은 다 같이 생사유하는 생명체가 삶의 실체를 인식하는 곳입니다. 어떠한 미물, 풀한 포기라도 생명은 능동적인 것이며 삶은 능동적인 것의 표현입니다. 해서 보다 나은 삶을 열망하게 되고 안락과 행복을 희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양분이있는 흙으로 풀뿌리는 뻗어가고 따뜻하고 풍성한 먹이를 찾아 철새는 수만 리 장천을 날아갑니다. 인간만이 잘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새가 노래하고 나비는 꽃과 노닌다고 합니다. 그러나 새는 슬피 울기도 할것이며 나비는 노니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하여 꿀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 P123

 자본주의는 생산하고 소비하고 이윤을 챙기는, 말하자면 생명을 망각한 수치가 있을 뿐입니다. 문화는 창조하고 발견하고 끊임없이 생명을 불어넣으며 존재를 보존하고 삶의 질을 높여나가는 것입니다. 물질이란 쓰면 쓸수록 줄어들게 마련이며 종국에 가서는 없어지게 됩니다. 지금 지구는 바로 줄어드는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질탕하게 소비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기르고 가꾸고 터전을 침해하지 않는 한 결코 줄어들거나 소멸하지 않습니다. 밀 한 알, 풀 한 포기는 생명들의 양식이지만 금괴· 화폐는 결코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식과 교환한다는 반발이 있을수 있고, 현재 그 교환 수단으로서 세계가 돌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밀한 알, 풀 한 포기 없는 세상을 생각해보십시오. 화폐로서, 금괴로서 교환해올 양식이 없다면 재화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밀 한 알, 풀한 포기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 P135

문화는 반드시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생명을 위해 창조하고 발견하고 균형을 잡아나가는 것입니다. 생명은 생명 아닌 것을 먹고 살 수 없습니다. 식물도 퇴비를 먹고 살찌워나가는데 퇴비는 생명이 썩은 것입니다. 플라스틱이나 시멘트를 먹고 사는 생명은 없습니다. 그것이 순환이고 생태계의 질서인 것입니다.
이 순환을 억제하고 방해하는 것이 물질 만능의 자본주의인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먹지 못하고 생존과 관계없는 것, 때로는 생존을 위협하는 것을 축적합니다.
그리하여 무기를 팔아먹기 위한 전쟁이 있게 되고 전쟁은 지구를 초토화해왔습니다. 창조를 위배하고 생존에 역행하는 것이지요.
농부는 생명을 가꾸는 사람입니다. 옛 농부는 내 자식 목에 젖 넘어가는 소리와 내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가 제일 듣기 좋다는 말을 했습니다. 사랑이지요.
상업주의가 만연한 오늘날 농촌에 그와 같은 사랑이 과연 남아 있을까요? 모든생명들은 지금 사랑이 아닌 학대를 받고 있습니다. 자연과 격리되어 닭장에, 우사에, 아파트에 감금되어 살고 있습니다. 인스턴트식품, 화학비료를 먹고 농약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 P137

물론 모든 생물은 선택함으로써 삶을 지속하고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원론적 선택에는 억압이 내포되어 있다. 가시 밖은 무한이며 불확실이 충만해 있는데 그것을 다 생략하는 물질문명의 상자 속에는 자연이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자유 개성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물은 모순 위에 존재하며 바로 그것이 균형이라는 점이다. 물과 불은 다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어느 한편이 성하면동티가 난다. 불이 강하면 초토화될 것이요, 물이 넘치면 땅은 매몰되고 말 것이다.
물질 숭배의 이 시대는 지구가 파괴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당연한 귀결이다. 사방에서 지금 위험신호를 보내오고 있으나 지구는 태풍 전야같이 조용하고 사람들은 일상을 되풀이하고 있다. 왜 그럴까.  - P161

욕망에 잠 못 이루는 저 악머구리 떼가 울어대듯 시끄러운 소리는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잊게 한다. 국민을 볼모로 치부와 권력에 환장한 무리, 염치는 떼어다가 어느 나무에 걸어놨는지 지지해달라, 내 말만 믿으라,
나에게 동정을 보내다오, 그 몰골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다. 옛날이 좋았다는 얘기가 아니며 돌아가자는 것도 물론 아니다. 시간은 돌아오는 것이 아니며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확실하게 돌아오는 것은 결과뿐이다.
사람이 바라볼 수 있는 시야의 넓이는 과연 얼마나 되는 걸까. 사람이 인식하는 확실함은 또 얼마나 될까. 우주 공간에서 본다면 한 알 모래만큼일까. 가시적인 것과 물증으로는 총체적인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가시 밖의 무궁한 공간과불확실한 것에 우리는 둘러싸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만 열린 마음으로 총체적인 것을 느끼지만 그것도 어렴풋하게 파악될 뿐. 그러나 그것은 본질에 접근하려는 열망이며 절묘한 균형의 추구다. 절묘한 균형이야말로 창조하고 우리를 존속하게 하는 힘이며 삶의 비밀 그 자체인 것이다. 오늘과 같이 모든 것을 분업화하고 전문화하여 또 그것으로 발전해온 것도 사실이지만 차츰 총체적인 것을 망각하게 한 발전은 균형의 파괴를 초래했고 해체 현상으로 나타났으며, 생명의 - P173

터전인 생태계는 물론 인성도 균형을 잃어버렸다. 욕망만 돌출하여 사회 전반에걸쳐 온갖 해괴한 일이 자행되고 지식은 재탕을 되풀이, 창의성을 죽여버린 미래의 일꾼들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원주의 새벽하늘은 아름답다.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더러는 샛별이 깜빡거린다. 무진장으로 널려 있는 별들과 모든 생물, 보이지 않는 미물에 이르기까지 그 삶의 운행이 한결같음에 가슴이 떨린다. 소름 끼치게 엄숙한 균형을 우리는 깨면서 스스로 자멸하려 하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만난을 헤치고 살아남는다는 것을 믿고 싶다. 핵무기, 오존층 파괴, 대기 오염, 물의 고갈, 잘못 잡혀진 방향을 다잡아 궤도 수정할 것을 믿고 싶다. 결자해지라 했던가. 시끄러운 악머구리 떼 울음은 사양의 만가쯤으로 생각하고 보편적 삶을 위한 총체적 인식 아래. 역시 그것은 과학의 몫일 것이다.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 - P174

한밤중.
촛불을 켜놓고 장대같이 내리꽂히는 빗소리를 듣는다.
방 안을 훤하게 비춰주는 섬광에 이어 뇌성은 천하를 흔들고 거위가 소리를지르곤 한다.
이 무슨 재앙일까. 두렵기도 하지만 인간이 한낱 미물 같아서 슬프다.
화면에서 본 이재민들의 무표정한 모습은 통곡보다 참혹했다. - P216

여기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능력이다.
필요불가결한 것이 줄어들고 그렇지 못한 것이 늘어난다는 증거로 땅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 지구가 망가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생존의 욕망이 생존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욕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주가 존재하고 지구를 존재하게 하는 창조적 균형을 넘어서는것은 이 세상 아무 곳에도 없다.
우리가 그것을 본으로 하여 새로운 균형, 질서를 찾지 못한다면 황금과 지폐가 난무하는 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 P2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다 절실하게 말한다면 지구와 모든 생명은 공동체이며 같은 운명이다. 살기 위하여 지구를 파괴한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며 죽기 위하여 지구를 파괴한다고 해야만 옳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죽은 별에는 공기가 없고 물이 없으며 생물도 없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이, 공기가 생물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고, 억조창생 일체가 그 생존의 조건이 같으며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기능도 같아서 일사불란하게 순환해왔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본래부터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 자부해오긴 했지만 여하튼 20세기 초반, 인류는 조물주의 창조 능력과 자연을 통제하는 권한을 물려받기라도 한 것처럼 굴면서 지구의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불행한 일은 아니었다. 불행은 능력을 옳게 쓰지 못하고 권한을 올바르게 행사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 P12

천년, 오백 년을 살아온 거목에 대한 신앙은 말할 것도 없이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이며 거목 앞에서 기도하는 것도 생명이 갖는 동질감, 그 존귀함을 믿으며 생명의 일체를 지녔다고 생각하는 영성과의 교신을 간절히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또 생명의 무한유전無限流轉을 믿음으로써 죽은 자들이 있을 다른 공간과의교신을 열망했을 것이며 그것은 알지 못할 미래에 대한 물음, 생명의 슬픔이기도 했을 것이다. 대자대비大慈大悲, 큰 슬픔이 있기에 큰 자애가 필요하고 결핍이 없는 곳에 사랑이 있을 수 없다. 슬픔, 결핍 없는 것은 완성이며 정지된 것이며그것은 또한 삶이 아니며 생명으로 인식할 수도 없다. 생명은 영원한 미완이요,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며 끝없는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같은 우리 민족의 생명에 대한 공경은 그 자체가 세계주의다. 인류뿐만 아니라 모든생명, 살아 있는 일체에 대한 평등, 그와 같은 사상은 우리 민족 문화 전반에 걸쳐 그 흔적이 뚜렷하다. - P14

모순은 균형이며 긴장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데서 가능했으며 존재의 조건인 동시에 연속성과 삶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다. 만일 모순이 없어진다면 논리는 완성될 것이며 언어도 피안에 도달하겠고 절대적인 것이 그 모습을드러낼지 모르지만 완성은 끝이며 정지이며 소멸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오늘까지 인간의 질서를 위해 광분해왔다. 논리도 그것을 위해봉사해왔으며 인간이 만든 연장과도 같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소중한 - P25

능력이다. 그러나 연장이 삶을 위한 도구일 수 있지만 파괴하고 죽음에 이르게하는 것일 수 있고 쾌적한 삶의 지속을 위하여 논리가 만든 틀이 반대로 인간성말살의 폐단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어떠한 사물에도 양면이 있고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하나를 절대시하고 선택의 자유를 말하기도 하지만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벌써 강요의 조짐으로 볼수 있다. 왜냐하면 총체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하기때문이다. 선택의 자유는 서양의 자유 개념으로 적극적이고 전투적이며 모순을용납하지 않는 선명함인데, 그것은 문명의 승리였으나 문화의 패배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동과 서의 구별 없이 이미 보편화한 것이지만 본래 동양에서는 하나라는 확실한 것, 절대적인 것, 선택의 자유라는 인식이 매우 희박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다. - P26

편안한 노년이라는 말에는 나도 무관심할 수는 없다. 나 자신이 노년이기 때문이다. 편안한 노년, 그것도 일부 소수만이 누리는 것이지만, 적당히 운동하고 뭔가 한 가지쯤 취미를 가지며 가끔은 가까운 사람들끼리 외식을 하고 차림새에도 신경을 쓰며 국내 혹은 해외여행도 해보고, 대강 이 정도가 편안한 노년의 모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삶일까. 그럴 수밖에 없는 노약자의 피동적 처지라는 것은 물론 안다. 잉여 시간에서 오는 멀미 같은 것, 중심에서 벗어난 객관적 인생, 시각적인 것만 남겨져 있는 듯. 어쩔 수 없는 비애다. 그러나 한 개인의 삶에는 모델이 없다. 불행이든 행복이든 자기 존재에 대한 깊은 인식이야말로 진정한 삶이 아닐까.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밖으로, 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겠고 내 경우는 집 안보다 집 밖이 외로웠다. 황량함도 집밖에 있었다. 안과 밖이라는 개념도 실은 명료한 것이 못 되며 편의상의 안팎을 - P56

넘어서 각기 자신들의 공간이라 하는 편이 합당할 것 같다. 자기 세계라 해도 무방하고 추상적 공간일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개체의 냉혹함과 치열함을 본다. 타자와의 관계는 그야말로 관계일 뿐 일체가 될 수 없다. 다만 일체라는 것을 관념적으로 시인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문학은 일체가 될 수도 있고 그림자가 될 수도 있다. 삶이 구체적인현실이요. 문학은 추상적 상상일지라도. 언제였던지 영화에서 보았는데 흰빛의짧은 내리닫이를 입은 화가 고흐가 창밖에서 조롱하는 아이들을 향해 팔짝팔짝뛰던 장면은 지금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명예를 갈망했을까? 돈을 갈망했을까? 생존(자유)을 위해 얼마쯤은 필요했을 것이다. 묘하지만 그런 생각을해본 적이 있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다시 떠오르는 것은 그림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하는 물음이다. 해방과 자유와 생존, 새를 볼 때 특히 그 세가지 말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느낀다. 새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다 해당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며 모든 생명들의 원형질로서 예술가는 그것에 대한 그리움을 전제로 하며 본질을 탐구하고 표현하는 사람, 하여 자유에의 갈망은 그리고 싶은 갈망과 같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갈망과도 같은 것이다. 내리닫이의 그 - P57

우스꽝스런 모습은 무구한 자의 슬픔이었고 남의 귀를 자를 수 없어 내 귀를잘라버린 순전한 그를 사람들은 광인이라 했다. 자살하기 전까지 그림을 그렸던그는 정말 광인이었을까?


<토지>가 끝났을 때 나는 성취감 같은 것을 느끼지 못했다. 지친 때문이라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이제 토지는 영영 떠나버렸구나, 일종의 상실감이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개나리 울타리에 둘러싸인 곳, 생명의 소리들이 충만해 있고 흙도 숨을 쉬며 억조창생, 생명들이 술렁이던 터전, 농약 없이 가꾼 뜰이며 밭이며, 또 그것들은 나를 먹여 살렸고 서로 참 자알 살았는데 개발 때문에 터전을 잃게 된 것이다. 동시에 나와 일체였던 두 개를 잃고보니 나 자신 공중분해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곳은 15년간 자유를 얻기 위한,
내 심정으로는 격전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불리한 처지에서, 자유는 항상 불리한 처지에 있는 것이지만, 혼자 있는 여자, 그것도 사양길에 들어선 여자, 그것부터가 초라하고 무력한 풍경이다. 특히 이 나라 풍토에서는 그 편견의 골이 - P58

너무나 깊어서 간 데 없는 죄인이다. 감시를 당해야 하는 죄인. 사람들은 새로운 도약을 꿈꾸면서도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상식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증오심을 갖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대상이 여자일 때는 "여자가 글은 써서 뭘 해." 사회적 인식이 그러했던 시기에 출발했기 때문에 내가 과민했는지. 여하튼 여자가 혼자 산다는 것은 무방비의 성곽이요 심하게는 저주다.
일상의 불이익이나 상처받는 일을 거론하자면 끝이 없고 늘어놓는다면 천박한 신세타령이 될 것인즉 긴말은 않겠으나, 예를 들어서 일꾼에게 일을 시키면 농땡이를 부리고 시설물을 설치할 때, 집수리할 때는 바가지 씌우기 일쑤다. 한번은 장마에 연탄이 무너져서 200여 장이나 깨졌는데 연탄가게 종업원 왈 "어디다 버릴까요." 거저 가져가려고 능청을 부린 것이다. "당신 어느 나라 사람이오. 버리라고 광부들이 연탄 캐내는 거요?" 하고 응수했지만 인간적인 접근보다 세勢로써 좌우되는 현실은 정말 나를 눈물 나게 했다. "자식은 없어요? 왜 혼자 사는 거요." "참 안됐소, 근력은 좋으시우." 야박한 입들은 동정과 우월감과 얕잡아 보는 기색을 별로 감추지도 않았다. 언젠가는 양계장에서 계분을 구입한 적이 있었다. 손가락 몇 개가 잘려나간 음성환자인 중늙은 남자가 트럭에 계분을 - P59

싣고 왔는데 이 많은 계분 어디다 쓰느냐. 과수원 하느냐고 물었다. 나무랑 밭에주려구요. 땅이 죽어가는데 유기농업을 해야지요. 하고 말했더니 시골 노친네가 제법 유식하다며 담배를 꼬나무는 것이었다. "예, 풍월은 좀 알지요." 생광스런 남자들, 사위도 있고 손자들도 있고 그들이야 불러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주변에 아는 사람들이 없지도 않아 동원하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설사 볼일이 없겠으나 내가 누구인가를 과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겸손하기 위하여, 수양을 쌓기 위하여 국으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누구이로라 하기에는 쑥스럽고 치욕스러워 못 했지만 물론 생광스런 남성들을 동원하지도 않았다. 세상에 대가 없는 것은 없다. 불이익이나 자존심 상하는 것쯤, 자유를 위해 지불하는 데 값비싼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설물이 고장 나면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고 힘에 겨운 일도 나 자신이 감당하게 되어 농사, 노동에도 이골이 났으며 어김없이 그것에서도 나에게 대가가 돌아왔다. 달마대사 같은 성인은 소림사에서 9년 면벽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범인은 가만히 있으면 생각이 정지된다. 노동은 심신을 상쾌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끝없는 생각 속으로 나를 끌어들인다. ‘노동‘과 ‘글쓰기‘와 ‘나‘는 삼발이 같은 것이었다. 글을 - P60

쓰다 막히면 밖에 나가 풀을 뽑고 그러다 보면 생각이 떠오르고 막혔던 것이 뚫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연의 이치, 사람 살아가는 이치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으며 불평등은 인간의 소위 자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 대붕(상상의 새)은 쥐벼룩이 너무 작아서 볼 수 없고 쥐벼룩은 대붕이 너무 커서 볼 수 없지만 삶의 궤적은 한치 오차 없이 동등하다는 것, 자연의 공평함과 오묘함, 실로 돈으로는 환산될 수 없는 내 세계, 나와 더부 살았던 많은 생명들의 세계, 이미 그것은 내 소유에서 떠나버렸다. - P6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