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난간이 투우장 황소를 꿰뚫은 칼처럼 나를 꿰뚫어 버렸다. 행인 한 사람이 피를 많이 흘리는 나를 길 위로 옮겨놓았고, 적십자 요원들이 나를 돌봐 주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순결을 잃었다. 신장에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소변을 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척추였다. 하지만 아무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고, X선 검사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서 적십자 요원들에게 가족을 불러달라고 했다. 신문에서 소식을 읽은 마티타가 가장 먼저 달려왔다. 그녀는 석 달간 밤낮으로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돌봐주었다.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한 달 동안 아무 연락이 없었고 나를 보러오지도 않았다. 언니 아드리아나는 사고소식을 듣고 기절했다. 그리고아버지는 몹시 상심해서 몸져누웠기에 이십 일이 지나서야 볼 수있었다." - P70
사고결과는 너무도 끔찍해서 프리다를 진찰한 의사 대부분은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 했다. 척추는 허리부분에서 세 군데가 부러져 있었다. 대퇴골의 경부가 부러졌고, 갈비뼈도마찬가지였다. 왼쪽 다리에 열한 군데의 골절상을 입었고, 오른발은 짓이겨져서 탈구되었다. 왼쪽 어깨가 빠졌고, 골반뼈도 세군데나 부러졌다. 버스의 쇠난간이 그녀의 배를 뚫고 들어가 왼쪽 옆구리를 관통해서 질을 통해 다시 빠져나왔다. 그러나 프리다는 놀라운 생명력으로 버텨냈다. 그녀는 사고와그에 따르는 절망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병원에서도 그녀는 참기 힘든 고통을 견뎌냈다. - P70
적십자 병원에서 퇴원한 프리다는, 코요아칸의 집으로 돌아가서도 침대에서만 지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고통과 고독에서 생겨난 의지였다. 프리다는 자신의 결심을 어머니에게 알렸다. "나는 죽지 않았어요. 게다가 나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요. 그건 바로 그림이에요." 어머니는 그녀의 잠자리 위에 일종의 닫집을 만들고 침대의 천장 위치에 큰 거울을 붙여 소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스스로의 모델이 될 수 있도록 했다. 프리다 자신을 묘사하는 작품에 등장했던, 바로 그 침대와 거울이었다. 그것은 마치 김이 서린 유리창에 그려진 문을 통해 핀손의 ‘6‘ 를 지나 언제나 명랑하고 경쾌하게 춤을추며 함께 비밀을 나누던 상상 속의 프리다를 만나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항해사나 유명한 여행가가 되기를 꿈꾸던 변덕스럽고 냉소적인 소녀에게 남은 것은 그림과 씁쓸한 냉소와 고독이었다. 약혼자 알레한드로는 편지가 오가는 데도 몇 달씩 걸리는 독일로 유학을떠났고, 고독은 그만큼 더 깊어졌다. 알레한드로의 유학은 우연이아니었다. 그의 부모는, 그가 방탕하고 불손하며 게다가 불구가 된처녀와 교제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겼다. - P71
그녀가 겪은 사고는, 인간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육체적 고통을 겪게 했다. 그러나 사고 이후가 더 어려웠다. 그녀는 육체의 자유를 회복해야 했고, 이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코요아칸의 집으로 돌아온 것은 투쟁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무리해서 외출도 하고 국립예비학교에 다니는 친구들과 만나기도 했다. 병원에서 퇴원한지 삼 개월 후에는 멕시코시티 중심부까지 버스를 타고 나갔다. 이제 그녀의 인생에서 그림이 중심이었고, 존재의 이유였다. 1923년부터 습작을 시작하여, 첫 번째 작품으로 보티첼리풍의 자화상을 완성했다. 프리다는 알레한드로를 붙잡기 위해 그에게 이그림을 선물했다. 라파엘 이전 화풍으로 (혹은 멕시코 화가 사투르니노에란풍으로) 그려진 낭만적인 자화상 속에서, 그녀는 육체적인 고통으로 창백함이 두드러지는 어두운 보라빛 배경 위에 몹시 연약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이 그림에서 그녀의 개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불거진 눈썹 아래, 지적으로 빛나는 검은 눈동자와 그림하단부에 독일어로 쓰여진 ‘오늘도 여전히 힘들다‘ 라는 말이었다. - P75
사랑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프리다는 실패와 불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가 고통에서 벗어났을 때, 달라진 모습을 볼수 있었다. 여윈 가운데 불타는 듯한 시선은 둥글고 짙은 눈썹으로더욱 그늘져 보였으며 꽉다문 입술은 냉정해 보였다. 1926년 2월, 아버지가 찍은 사진에서 누이들과 사촌들 사이에 소년으로 가장한채 나무 지팡이에 기대고 있는 프리다의 모습이 바로 그랬다. 그녀는 살고자 했다. 상처가 재발하고 코요아칸의 방안에 갇혀지내면서도, 그리고 코르셋과 목발에 의지해야 함에도, 자신을 짓누르는 고독에 맞서 싸웠다. 그녀는 이제 스무 살이었고, 젊음이지니는 조급함과 열정이 상처 입은 육신 속에서 꿈틀거렸다. 신문과 잡지를 통해 오브레곤과 카예스 사이의 권력 투쟁, 북아메리카의 위협, 대중세력에 대한 탄압, 그리고 오브레곤과 판초 비야의암살과 학생운동 등 바깥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사건들을알게 되었다. 특히 러시아 혁명과 중국 신해혁명에 관한 기사를 열심히 읽었다. - P77
"내가 다룰 주제는 분명하다. 이것은 정의와 계급철폐를 위해싸우는 멕시코 노동자라면 누구라도 선택할 주제이다. 나는 다른눈으로 멕시코의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그때부터 최대한의 열정을 기울여 일해왔다." 1932년,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혁명운동에는 예술적인 표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술은전세계 노동자와 농부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점이 있다. 중국의 농부나 노동자는 혁명미술을 어떤 책보다도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지금 부르주아 계급은 붕괴상태에놓여 있으며, 그들의 예술은 유럽예술에 의존한다. 이 사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의 창조가 없다면 진정한 아메리카 예술의 발전이 있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이 나라의 예술이 좋은 예술이 되기위해서는 혁명적인 예술이어야 한다." 또한 대중 종교미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예리한 어조로 예술에 관한 자기 견해를 요약했다. "농부와 도시 노동자가 단순히 곡식과 채소, 공산품만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아름다움도 만들어낸다." - P134
유산이후의 몇 주 동안 프리다는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고 데생을 했다. 그림은 그녀에게 현실의 고뇌를 피할 수 있는 방편이었고, 데생 하나하나, 그림 하나하나가 주위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렇게 생겨난 자화상이 <두 세계사이에서이다. 이 그림은 디에고의 산업도시 디트로이트와 멕시코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상처받고 있는 그녀 자신의 삶을 연출한 것이다. 또한 디트로이트 중심가 건물들이 만들어 내는 윤곽, 수정된 알, 별처럼 떠있는 디에고의 얼굴, 울고 있는 하늘 등 난해한 꿈들과 입원실에서 느꼈던 현실적인 두려움을 단번에 그려낸 데생들도 있었다. - P152
1934년 여름, 크리스티나의 고백으로 그들의 배신을 알게된 프리다는 악몽에 시달렸다. 건망증에 걸린 아버지, 결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 프리다는 단숨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성격상 거짓말을 견디지 못했던 그녀는 위선적인 가면을 부숴버리기로 하고 디에고를 떠나 혼자 지냈다. 꿈속에서라도 크리스티나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아파트에 혼자 묵으면서 시련을 이기려고 애썼다. 그녀는 디에고에게 돌아오기 위해 그의몸짓, 그의 말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불행에서 벗어나려는 첫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디에고와 프리다의 파국은 단순히 부부생활중에 일어날 수 있는 일화의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이것은 가면이 벗겨진 일이었다. 미국에 머물 때, 프리다는 디에고 곁에서 멍하니 무의미한 생활을 했다. 그녀가 그토록 혐오했던 디트로이트나 뉴욕의 앵글로색슨 사회는 어떤 점에서 멕시코 현실에 대한 방벽 구실을 했다. 디에고가 구원의 사자 역할을 맡고 그녀가 아스텍 공주 역을 연기하는 동안 겉치레와 장식이 되어준 방벽이었다. - P180
그런 까닭에 그녀는 디에고가 다른 남자들과 다르지 않음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속한 이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 돌아가고 싶었다. 자기 여동생과 바람을 핀 디에고의 배신은 멕시코 여성의 고통스런 운명을 상징한다. 디에고는 어린시절에 겪었던 가정의 비극을 이번에는 자신이 재연했을 뿐이다. 그의 어머니 도나 마리아는*카자치카(남자가 정부와 딴살림을 차리는 풍속)‘ 를 답습한 남편의 애정행각 때문에 평생 고통을 겪었다. 심지어 그녀는 스페인까지 찾아가서 아들의 도움을 받으려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불행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다. 디에고와 안젤리나의 아들인 첫손자 디에고의 첫돌을 축하하며 그녀가 보낸 사진에는 드물게도 자신의 고통을 암시하는 씁쓸한 글이 적혀있다. "아이들에게 불행이 없기를" - P182
그녀가 견뎌야 했던 크나큰 희생과 부부간의 굴종에 대해 언급하는 글이었다. 디에고는 성의 자유가 필요했다. 바로 그것이 그의 예술의 자양분이며, 혁명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 자유는 파리의 자유분방한 생활을 모방한 반부르주아적 비도덕주의와는 전혀 달랐다. 디에고에게 여체의 탐구는 본질적인 부분이었다. 고갱이나마티스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여인과의 쾌락을 통한 자기확인이 필요했고, 지속적인 육체적 접촉이 필요했다. 여체의 아름다움, 모델들의 아름다움은 격렬한 생명의 상징이며, 머릿속 이념들과 지성의 무력함에 맞서는 현실적인 생명력의 상징이었다. 그의 그림은 - P182
쾌락과 생명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표현하고 있으며, 남성에속한 죽음과 전쟁의 본능에 대립해서 빛을 발하는 여성적 아름다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표현하고 있었다. 디에고의 지칠 줄 모르는 육체적 욕망과 거리낌없이 쾌락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태도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그런 것만이 디에고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과일만 먹고 전분질이나 고기는 거의 먹지 않으면서 미네랄 워터만 마시는 고행자이기도 했다. 또한 열여덟 시간 동안 계속해서 작업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많은 활동을 하면서도 전혀 잠을 자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여인의 육체에서 자신의 그림을 위한 모든 형태를 끌어냈고, 이 형태들을 조각가의 희열로 빚어냈다. 마티스나 세잔처럼 그는 둥그스름한 모양과 몹시 부드러운 윤곽 속에서 균형을 찾고자했다. - P183
사람들이 비극적인 운명을 이겨내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이 균형이었고 그는 바로 이 균형을 일생에 걸쳐서 화폭과 벽화 위에담아냈다. 똬리를 튼 것 같은 여인들의 형체는 전쟁이나 가난한 자들의 예속, 강자의 사악함을 순화시켜 준다. 그 곡선은 과일의 모양과 닮았고, 대지의 꿈틀대는 창조력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화가도 그처럼 강한 신념으로 남성과 여성, 전쟁과 사랑, 태양과 달의 힘 사이에 작용하는 상호보완성을 표현한 적은 없었다. 디에고자신의 육체도 이런 이중성을 띠고 있었다. 이 거인은 둥그스름한 몸매를 가졌고, 못생긴 얼굴에 대조되는 아름다운 두 눈을 가졌으며, 거친 성격에 대조되는 다정다감함을 보여주곤 했다. 그 자신이 농담조로 자신은 남자인 동시에 여자라고 말하면서 증거로 자기가슴을 보여주곤 했다. 디에고는 무기와 연장을 생산하는 산업세계, 디트로이트와 뉴욕의 현실세계에 그가 추구했던 부드러운 형체, 율동적인 선, 마티스가 여인을 응시하면서 발견했던 몹시 순수한 곡선들을 대입시켰다. - P183
‘자존심이 무척 상했지만 변함없는 사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균열된 믿음은 복구할 길이 없었다. 바로 이 1935년부터 프리다는활기를 되찾고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을 뒤덮은 끔찍한 흉터처럼 드러난상처의 기억‘ (1938년에 그린 데생의 제목이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피, 죽음, 기생식물처럼 그녀를 감싸고 있는 억누를 길 없는강박관념들, 그녀의 눈에 비치는 공허함, 이런 것들이 그녀의 일부가 되었고, 그녀의 모든 작품에서 드러났다. 디에고는 감각적인 생활을 했고, 주변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자기 마음을 끄는 것들과 그 상징들로 쉴새없이 벽을 뒤덮었다. 프리다는 자신의 태양에서 멀리 떨어진 이상, 차갑게 식어서 지옥 같은 허무에 빠져들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역경을 이기고 살아남고 싶었다. - P189
그림이 프리다의 출산을 대신할 수는 없었지만, 모순과 저주를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문제를 외적 현실로 노출시킴으로써 마음 속의 고통으로 남지 않도록 해준 덕분이었다. 예술은 프리다에게 다른 종류의 동물성이었고, 자연적이며 즉흥적인 충동이었다(이 때문에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녀의 그림에 열광했다). 운명이 그녀를 가차없이 몰아냈던 현실세계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예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예술, 아이, 아름다움, 폭력, 사랑, 이모든 것이 그녀가 자기 주위에 늘어놓은 화려한 장치를 통해 밀접하게 뒤섞였다. 화려한 장치들이란 이를테면 새들이나 식물의 화려한 모습과 비슷한 원주민 의상들, 원주민들이 숭배하는 우상들의 가면, 대지의 여신 틀라솔테오틀이 의식을 행할 때처럼 땋아 묶은 머리, 그녀를 옭아매면서 고통을 가하는 자연이 마술을 부릴 때면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눈물, 가장 값비싼 술처럼 붉게 흘러내리는 피 등이다. - P228
집으로 돌아온 후, 몸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진 프리다는 육체와 집에 갇혀 지내야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녀는 계속 살아갈 힘을 주는 정신세계를 완성할 수 있었다. 프리다와 디에고 사이에 설치된 개폐식 다리(산 앙헬에 있는 두 사람의 개별 작업실을 이어주는 다리로, 그녀가 혼자 있고 싶을 때는 폐쇄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그녀가 일종의 조화로운 상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제는 그녀 자신이 자기 세계의 확고한 중심이 되었고, 그녀는 이 세계가 자기 주위로 서서히 선회하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영원한 아이이자 태양이며 모든 것의 근원인 디에고는 이 우주를 비추는 빛의 원동력이었다. 디에고의 잔인함과 프리다의 몸에 쏜 화살과도 같은 배신행위들은 어떻게 보면 고통과 행복이한 몸을 이루는 이 우주의 균형을 완성시켜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우주의 피창조자는 제식에서 피를 흘림으로써 창조자와 영원히 결합한다. - P230
프리다가 자신의 척추를 그리스의 부서진 원기둥으로 표현했던 <부서진 기둥>의 크로키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말없는 고뇌 속에서 부서진 기둥과 끝없는 시선을 기다릴 것. 강철로 둘러싸인 나의 생명을 자극하면서 광활한 길위에서 꼼짝도 하지 말것." ‘푸른집‘ 과 견고한 코르셋의 이중 감옥에 갇힌 프리다가 디에고에게 바친 사랑은 실로 초인적이어서, 오직 그녀만이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거인, 식인귀, 폭군, 신비적인 숭배의식의 사제, 현대를 떠도는 신화의 창조자이자 피창조자. 이 모든 것인 디에고는 그 이유도 모른 채, 자신에게 스며들어 빛이 되어주는 한없는 사랑에 감동했고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불화와 이혼은 그를 휩쓸어버릴듯한 이 두려운 감정에서 벗어나려 했던 단 한번의 시도였다. 이 시도는 그 자신에게도 큰 상처가 되었다. 이로인해 자신의 진정한 존재이유에서도 멀어졌기 때문이다. - P241
그녀는 생애 말기의 절친한 친구 라켈 티볼에게 "내 그림은 혁명적이지 않아. 굳이 내 그림이 전투적이라고 믿어야 할 이유가뭐겠어? 난 그럴 수 없어" 라고 털어놓았다. 프리다의 혁명은 디에고의 혁명과 달랐다. 그녀의 투쟁은 사실상 정치참여나 당이 예술에 부여한 교화적 목적과는 아무관련도 없었다. 그녀는 평생동안 필요하다고 여길 때는 항상 디에고와 함께 시위대열의 선두에 섰지만, 정치 투쟁에 있어서는 디에고의 뒤편으로 물러나 있었다.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그녀의 의지속에는 어딘지 애매하고 까다로운 구석이 있었고, 자신의 예술을 당의 행동노선에 맞추기 꺼려했다. 프리다에게 예술은 의사전달의 수단이나 상징적인 어떤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육체와 영혼의 파멸을 딛고 일어나 자기자신으로 남는 유일한 길이었고 존재의 수단이었다. 예술이 그녀의 전부였기에 그녀는 예술의 자유를 제한하고 그 의미를 변질하는 어떤 타협도 받아들일 수없었다. 그녀는 초현실주의자들의 후원을 거부했던 것처럼 자신의 예술이 정치적으로 해석되거나 안이한 목적론에 이용되는 것을 끝내 거부했다. - P262
그녀는 고열에 시달렸지만 의식은 극도로 맑았다. 포사다를 도취시키던 최후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그녀는 머지않아 자신이 죽게 되리라는 확신에 찬 글을 일기장에 남겼다. 코요아칸의 집에는 그녀와 하녀들 밖에 없었다. 정원에서는 그녀의 개들이 굳게 닫힌 문앞에서 차가운 비를 피하고 있었다. 후에 디에고는 프리다와 함께 보낸 마지막 순간에 대해 글라디마치에게 들려주었다. "전날 밤, 그녀는 아직 17 일이 남은 결혼 25주년 기념일을 위해 사둔 반지를 내게 주었다. 왜 선물을 미리 주느냐고 묻자, 그녀는 ‘머지않아 당신 곁을 떠날 것 같아서 그래요‘ 라고 했다."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에 죽음의 사자를 그린 그녀는 그 옆에아주 처절하면서도 그녀의 완벽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을써놓았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프리다는 정확히 47년 7일을 살고, 7월 13일 숨을 거뒀다.
다음날은 폭우가 내렸고, 디에고는 흰색 셔츠를 입고 뚜껑 없는관에 곱게 누운 프리다를 따라 그녀의 추모식이 열릴 미술 궁전까지 갔다. 그 후관은 별과 낫, 망치가 그려진 붉은 기로 덮여서, 돌로레스 시립 묘지의 화장터로 옮겨졌다. - P299
디에고 리베라 (1886~1957)
대형 벽화 작품을 통해서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주제를 다루었던디에고 리베라는 1886년 멕시코의 광산 도시 과나후아토에서출생하였다. 몽마르트르에서 큐비즘의 세례를 받았지만, 타고난 색채감각으로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창조해냈다. 멕시코 혁명이후 귀국을 하여 멕시코 토착문화에 기반을 둔 벽화주의 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대담하고 산뜻한 색과 평면적이고 단순화한 형태의 그가 그린 대형벽화는 멕시코 현대미술의 위대한 기념비이다. 아내 프라다와는 이념과 예술을 서로 교감하는 동지였으며 프리다가 사망한 지 3년 후인 1957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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