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은 일단 저 고통이 타인의 것이라는 판단을 전제로 할 겁니다. 거기에서 벌써 공감의 한계가 생기는 것이지요. 저는 타인의 고통은 표현할 줄 모릅니다. 특히 육체적 고통은 알 길이 없습니다. 타인의 마음의 고통이나 실패는 얼마만큼 공감할 줄 알지요. 하지만 육체의 고통에 저의 육체로 동참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저는제 육체적 고통밖에 표현할 줄 모릅니다. 그것도 잘하지는못하지요. 고통을 표현할 언어는 언제나 부족하니까요.
저는 제 고통이 극에 달한 밤, 제 몸에 돋는 거대한 날개를 목도합니다. 그리고 고통받는 여자의 어깨에 투명한날개가 돋았다고 씁니다. 더 나아가 여자의 고통이 여자를 하늘에 올렸다고 씁니다. 그것뿐입니다. 오직 즉각적인 상상력에 의해서만 우리의 고통을 쓸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타인이 되어보는 상상을 할 때조차도 ‘나‘를 버리지 못합니다. ‘나‘는 타인의 관망자, 유령일 뿐이라고 자책합니다. - P85

전문가가 만든 음식이 보잘것없는 제 부엌의 음식보다 맛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우리 식구들은 식당에 가서 항상 제가 하는 ‘맛‘ 평가를 기다립니다. 자신들의 판단은 일단 보류해놓고요. 요리 동사를 생각해보십시오. 재료에 열을 더하고 빼고, 칼을 더하고 빼고, 물을 더하고 빼고, 요리하는 이의 손길을 더하고 빼고, 증기를 더하고 뺨에 따라 수많은 동사가 작열합니다. 굽고, 삶고, 지지고, 볶고, 졸이고, 따로 사전을 만들어야 할 정도로 많지요. 자작하게 하고, 팔팔 끓이다 뜸 들이고, 깍둑썰고, 어슷썰고, 질게 하고, 지집니다.
우리나라의 요리 동사들은 모두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동사들과 똑같지요. 마음을 졸이고, 태우고, 볶지않습니까? 미각을 솟아오르게 하기 위해선지, 수, 화, 풍이 모두 작용하는 전 지구의 질료적인 조화가 필요합니다. 내 바깥의 생물을 조리하는 것과 마음을 조리하는 것은 아주비슷하지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누구의 마음을 조리하듯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하기 싫은데 나아닌 누구를 먹여야 하니까 게으른 검객처럼 칼을 들고, 불을 올리고 하지요. 저 혼자 살고 있다면 그렇게 열심히 반복적으로 조리를 하진 않았겠지요. - P89

저는 ‘모성‘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아요. 모성이 이데올로기가 되다니요? 심지어 모성은 본능적인 것이고, 신화적인 것이고,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라고, 어머니는 신 다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신 다음이 산후우울증에 걸린단 말입니까? 사실 서구에서 모성 이데올로기가 생겨난 것은 18세기부터라고 합니다. 여자를 가정에 두고, 아이 돌보는 일을 전적으로 맡기는 역할을 시킴으로써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가 좋았기 때문이죠. 여자 말고, 어머니를 신화적인 인물인 양 높여주는 척하면서 집 안에 가두는 것이지요.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를 자의적으로 사용한, 공고한 사회적 - P107

차별이 가부장제를 당연한 것으로 보장해준 것이지요.
텔레비전을 볼 때 늘 놀라는 장면이 있는데 출연자들이자신의 어머니 얘기를 꺼내면서 불에 덴 듯 운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 있는 어머니를 가졌건, 돌아가신 어머니를 가졌건 말입니다. 아마 저도 그 상황에 처하면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현상이 모성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엄마와 자식 양쪽 다 죄의식 때문에 그렇게 울게 되지요. 부모는 완벽한 모성을 발휘하지 못한 죄의식, 자식은 모성성을 유감없이, 목숨을 바치도록 발휘해서 희생한 자신의 엄마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말입니다. 모성은 사회적 구성물입니다.  - P108

이 구성물때문에 여자들은 여자처럼 살아야 하고, 자라서는 어머니노릇을 해야 하고, 주부가 되어야 하고, 자신의 안녕과 쾌락을 구할 땐 죄의식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이 사회의 모성이데올로기가 여자들에게 영원히 다른 방식으로 어머나되기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니까요. 이때 어머니 스스로가 우울하건 불안하건 자신을 미완성으로 느끼건 소용없지요. 저는 이 모성이라는 말을 바꿔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은 여자겠지만, 안아주고 길러주고 돌봐주는 것을 ‘어머니성‘이라고 부르지말아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누구나 돌보고 보살필 줄 아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남자건 여자 - P108

건 말입니다.
우리나라 남성 시인들이 쓴 ‘어머니‘에 대한 시들을 일별해본 적이 있습니다. ‘밥해주는, 온 정성을 다한, 희생한,
이제 늙어버린, 그러다가 죽어버린‘ 어머니들이지요. 혹은전능의 판타지를 장착한 어머니들이지요. 그들은 환상 속에서만 어머니를 위치시킬 수 있을 뿐, 실재의 어머니는보지 않으려 하지요. 그 남성 시인들은 여성성을 잃어버리거나 숨긴, ‘새벽 별을 이고 30년을 하루같이 자식들게 둥근 밥상을 대령한 어머니의 피폐한 노동을 왜 그토록 찬양하는 것일까요? 시마저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듬뿍품고, 모성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게 만드는지요? - P109

그러나 여성 시인들이 ‘어머니‘를 쓴 시들은 다르지요. 여성 시인들은 어머니의 자궁을 기쁨의 잠재성으로 노래하기도 하고, 반면에 피폐한 죽음의 공간, 훼손하여 버려야하는 기관으로 노래하기도 하지요. 자궁을 자연과 연결된 공간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그 크기를 오대양 육대주로 넓히기도 하지요. 그래서 어머니를 욕망을 가진, 슬프고 참담한, 절대로 모방하거나 답습할 수 없는, 낯설고 무기력한 존재로 보지요. 그리고 절대로 어머니를 닮지 않겠다는 각오도 하지요. 혹은 이분법적 성의 구별과 차별에 넌더리가 나서 양성적 존재의 구현을 어머니의 모습에서 찾으려 하고요. 저는 모성 또한 우리의 성정체성처럼 개인마다 다른 수천만 가지의 모습이므로, 이데올로기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P109

이미지의 연쇄와 끝없는 시간, 공간적인 인접성의 환기,
그로 인한 현실의 변형과 굴절, 그것들을 굴러가게 하는리듬이 ‘나‘의 결핍 그 자체를 소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원 대립 속에서 하나의 개념을 채택하는 은유의 동일자 의식을 버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은유는 근원에 대한 형이상학적 욕망을 바탕으로 갖고 있기에 그런것을 갖춘 ‘그‘의 시선을 받는 자리에선 사물/여자는 몸서리를 치게 되지요. 간혹 시를 읽다가 그런 시인의 은유를 만나면 저는 ‘시인‘이라는 이름을 가진자의, 대상에게서 생명을 빼앗고 ‘의미‘를 준 생산자의 얼굴을 마주한 듯한 무서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요.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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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경험 속에서 제시의 여성 화자의 언어들, 그 목소리의 유령 화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가 이전에 썼던 시들의 화자는 이런 유령 화자들이었습니다. 이승의그라운드에 발 디딜 데가 없는 바리공주처럼, 세 번이나죽임을 당했으나 다시 돌아온, 거절당하고 쫓겨난 바리공주처럼 죽임을 당한 화자들이었습니다.  - P40

무당이 죽은 영혼의 억울함과 슬픔을 자신의 몸에 얹어 발설하는 것, 혹은죽은 이의 영혼에게, 목소리에게 가보는 것처럼 거절당한유령 화자가 시를 발설하는 거였다고, 이전 제시의 화자를 저 스스로 이해했습니다. 바리공주 신화는 죽음을 극복하는 이야기라기보다 죽음을 여행하는, 죽음을 넘나드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바리공주 신화를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 시하다』에서 여성의 시학을 전개하는데 ‘비빌 언덕‘으로 삼은 것은 바리공주가 여자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체제로부터 거절되고, 추방되고, 헤쳐졌으나, - P40

다시 여자이기 때문에 작은 노동 행위들에 대한 신성을발견할 수 있었고, 종당에는 죽음(죽임)에서의 귀환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화는 저에게 죽음이 일회적이고 직선적인 시간의 사건이 아니라 복수적이고 끝없이 귀환하는 생명의 사건임을 드러내주었습니다. - P41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그래서 제가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데요. 바로 변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지요. 영혼은 ‘있음‘과 ‘없음‘이라는 이분법으로 믿음의 틀안에 가둘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영혼이라고 명명하는순간, 이미 영혼이 아닌 것이 되는 게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저는 우리에게 ‘나‘에게 한 사람 또는 개인 - P41

의 것이라 명명할 수 없는 어떤 복수적이고 집단적인 무엇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있어서 우리는 연민하고 사랑하고 죽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영혼이라불러야 한다면 할 수 없지요. 이것은 저 나무와 저 돌과저 물과 저 동물에게 고루 번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한테만 있는 것이 아니겠지요. 그것으로 우리는 연결되어, 그것에서 나오는 감각들로 얽히고설키는 것이겠지요. - P42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개정판을 출간하기 위해 다시교정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물론 그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의 한국말과 20년 지난 후의 한국말이 많이변했다는 것도 있지만, 제가 바리데기의 세 번의 여행 (죽음 여행)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여행, 그러니까바리데기가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고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 되는 세 번째 여행을 너무 협소하게 해석한 것은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내용을 수정하거나 보태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만약 그 책을 지금 쓴다면, 그 세 번째 여행에서 바리데기가 강을 건네주는 역할을 맡은 것이 애도의 여행이었다는, 공감의 행함이었다는의견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바리데기는영원히 애도해주는 역할을 맡은 것이었습니다. 누구를 위해? 남은 사람들만이 아닌 죽은 사람들과 우리의 연결성, - P42

영혼을 위해서 말입니다. 비탄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연대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영원한 비탄의 연대가 영혼을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마 영혼이라는 단어는 그런 행함을 지칭하는 말일 것입니다. 제가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를 쓰면서 비탄의 연대를 늘 마음속에 두고 있었던 것은, 어쩌면 영혼이라 이름 붙인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저는 시를 쓰면서는 늘 존재론적 개종이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 P43

그렇다고 제가 전체주의적이고 탈개인화된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식물의 영혼, 동물의 영혼, 인간의 영혼 이렇게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애니메이션 세계처럼 영혼계와 현실계를 나누어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영혼과 육체를 나누어 이원성을 증명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영혼의 집으로서의 육체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영혼은 일개인을 넘어선,
자아 정체성을 넘어선 어떤 거대한 존재성을 가진 것이겠지만, 그것을 흡입하면 자아 정체성이 더 세어질 것이라는 역설적인 생각도 해봅니다. ‘내‘ 영혼이라고 하기에는너무나 큰 것이 ‘내‘ 영혼일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곤 합니다. ‘내‘ 영혼이 ‘내‘ 육체를 알아볼까? ‘내‘ 영혼이 지금 쓴 ‘내‘ 시에 깃들였나? 하고요. - P43

당시에 저는 남해의 절에서 참선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좀 더 자세히, 다른 방향으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스님의 말씀이 가부좌한 우리에게 떨어질때마다 제 몸이 그렇게 비루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저 멀리 공중으로 떠올라서 제 몸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돼지를 먹는 돼지의 몸을, 돼지로 다루어지는 몸을, 저는 육욕에 사무친 우리의 몸을 비하하는 스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마다 그에 반하는, 혹은 핑계를 대는 시를중얼거리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몸이 있다는 것은 ‘감각‘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고 고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저 - P46

는 그때 침묵하는 돼지 행성의 돼지 한 마리로서 멀리서돼지의 목을 자르고 희롱하고 마침내 먹는, 구제역에 걸린 돼지를 산 채로 구덩이에 묻는 인간인, 나와 같은 감각을 가진 동물 돼지를 봤습니다. 심지어 돼지와 몸을 서로맞대고 있다는 공통감각을 홀연히 느꼈습니다. 서로를 인지하는 존재의 감각을 가졌습니다. 이것을 관념으로 환원할 수 없는, 동물성이라는 공통감각, 감각의 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느끼는 것과 느껴지는 것이 동일한 감각 말입니다. 저에게서 동물 존재라는 어떤 추상성이 떨어져나가고, 동물 존재의 총체성이라는 어떤 생의 감각이 내려앉았습니다. 저는 저의 존재가 살아 있는 살 속에 있음을 느꼈습니다. 저의 안에서 자연스럽게, 그러한 동물들과함께 도살된 동물의 비명 소리를 들었습니다. - P47

그동안 우리는 동물을 결핍의 존재, 언어 없는 미물, 응답없는 주체로 느끼고 판단해왔지 않습니까? 마치 남자들이여자들을 그렇게 느꼈듯 말입니다. 휴머니즘이 버린 두존재가 동물과 여자라는 항간의 말이 있지 않았습니까?
동물성은 저 자신이 시를 쓰며 그것과 내통함으로써 재현이나 비유가 아니라 어떤 내재성을 몸소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동물성은 저의 내적 세계의 비유의 산물이 되거나 초월이 필요한 어떤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동물 자체가 자연에 내재하듯 저라는 시인의 내재성이 되었습니다. - P47

제가 쓰는 용어 ‘시하다‘ ‘여성짐승하다‘는 ‘되기‘가 아닙니다. ‘되기‘는 은유를 전제로 하지요. ‘하다‘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다‘는 타자를 동사적 관계 속에서 발견합니다.
타자를 명사로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다‘를 통해동물의 몸, 벌거벗은 몸, 자연의 몸이되지 않습니까? 그처럼 ‘하다‘ 속에서 저는 타자 앞에서 동요하는 자이고, 구멍 난 자이며, 타자에게 매달려 안달하는 자입니다. ‘사랑하다‘는 나를 타자로 만듭니다. 그래서 랭보처럼 "나는 타자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시하다‘는 ‘사랑하다‘입니다. 나를 타자에게 내주지 못해 안달하는 말이 시입니다. 모든 시는 몸으로 하는 연애시이며 풍자시라고 저는오래전에 저의 에세이‘에서 쓴 적이 있습니다. 시는 몸으로 ‘하는‘ 관계 맺기입니다. 이때 우리는 주체도 객체도 아닌 관계 그 자체가 되지요. 우리는 서로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민족, 국가, 이데올로기의 한 부분도 아니 - P57

고 전체의 부속물도 아닙니다. 우리는 ‘자연‘이고 몸입니다. 익명적이고, 비분리적이고, 생물인 몸입니다. 이것으로 시하는 것이지요.
타자의 몸은 총체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삐져나옴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삐져나온 것들과 일그러진 것들과 나의 삐져나옴과 일그러짐을 맞대는 것입니다. 동일성에의 강요가 우리를 얼마나 폭력 아래 있게 했고, 우리를 죽게 했는지 알지않습니까? 서정시마저 시인의 그런 시선 아래 타자를 둘수는 없습니다. 시에서는 타자의 나머지와 저의 나머지가만나는 것이지요. 우리는 서로의 몸으로 관계 맺고 있기에 서로 태어나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그런 것으로 우리는 관계 안에서 서로 끝없이 발견하는 것이지요. - P58

사에서의 리듬은 시가 전개하는 시간이고, 에너지와 긴장,
현기증입니다. 한 편의 시의 리듬은 한 편의 시의 생애지요. 시에서의 리듬은 한 편의 시가 시라는 장에서 살아내는 모습, 과정 전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듬안에 시의미학과 윤리학이 작동할 겁니다. 물론 리듬은 신이 우리에게로 걸어오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걸 시인이 받아안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 시의 리얼리즘을 말하는 사람들이 시에 등장하는 내용만을 가지고 시에서의 윤리학을 거론하는데, 그것은 시를 하나의 장르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것은 소설을 다룰 때와 똑같이 시를 다루는 것입니다. 시의 시간은 강렬한 응축이기 때문에 운율이나 박자 혹은 호흡만으로도 정의내릴 수 없습니다. - P62

리듬은 시 속의 언어들과 그 언어들 때문에 언어 밖에 있게 된 입자들의 흐름이며, 그 흐름의 방식, 수학입니다. 리좋은 규칙이 아니라 생성입니다. 리듬이 시안에서 시인을 잉태하고, 시인을 분만합니다. 물론 한 편의 시 안에는반복이 있고 차이가 있겠지만 그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일종의 변용입니다.
저는 『날개 환상통』에 「리듬의 얼굴」이란 제법 긴 시를 실은 적이 있는데, 제가 그 시에 그런 제목을 붙인 것은 제가 그 시를 쓰는 중에 이글이글 타고 있으나 싸늘한, 사라졌으나 따가운, 버리고 싶어도 버려지지 않는 제 몸의 살 - P62

아 있는 고통들, 그 고통의 리듬 끝에서 사라진 어머니의희미한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제 몸의 고통은 고뇌와 달리 리듬이었습니다. 그곳의 제일 깊은 곳엔 죽음도넘어서는 끝없이 ‘나‘를 소멸로 밀어 넣는 리듬의 실체,
사라진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내 고통의 주인은언젠가 제 몸을 수태한, 제 몸의 주인이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이의 얼굴로 거기 있었습니다. 내밀성으로 깊이깊이침잠해가는 무한수열의 고통, 그 리듬의 끝에 제 몸의 기관을 하나하나 만들었으나 지금은 제 몸에 부재하는 어머니의 몸 같은 존재가 앉아 있는 걸 보았다고나 할까요. 아마도 제 몸을 만드신 이는 자신의 몸이 지닌 리듬을 나누어 ‘나‘를 만들었을 겁니다.  - P63

리듬이 쓸개가 되고, 리듬이허파가 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시의 제목을 "리듬의 얼굴"이라 했습니다. 저는 시라는 것이 결국 그 텅 빈얼굴인 음악에 이르고자 하는, 끝끝내 하나의 벌어진 입술모양, 하나의 모음에 이르고자 하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제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호스피스에 입원해 계셨는데, 저는 엄마가 입원한 방에 들어갈 때마다 유리 믹서에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엄마가 자신의 일생을 천천히 믹서로 갈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블렌딩blending의 리듬이 느껴졌지요. 엄마가 경험한 산과 바다, 엄마의 시간, 엄마가 저장해둔 공간들. 그리고 우리 형 - P63

제들을 모두 소멸의 수학 속에 집어넣은 듯한 리듬 속에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엄마가 말을 못 하게 된 날부터는 모음 한 개가 방 안을 채웠다가 다른 모음 한 개가 다시 채우는 듯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 하나의 모음의 끝에다다르는 수열이 리듬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루트 기호를 붙인 것처럼 하나의 숫자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 마침내 모음 하나로 꺼지는 리듬 말입니다. 거기에 이르기위해 엄마의 리듬은 끝없이 헤엄쳐온 것이지요. - P64

황 시인이 제가 답변 중에 빠트린 ‘반복‘을 질문해주었습니다. 한 번 경험한 것은 영원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파토스를 말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이미 반복이 있었습니다.
죽은 후에도 반복이 있을 겁니다. 시작도 끝도 반복의 결과물입니다. 지금 저의 현재는 반복을 반복하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반복을 반사하는 거울입니다. 단적으로 잠자고 일어나고 잠자고 일어나듯이 저의 과거는 저와 함께일어나고 잠듭니다. 그렇지만 리듬은 이 규칙적인 반복을시적인 이행으로 생성해주는 것이겠지요. 제가 시는 쓰는 것이라기보다 ‘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 P66

이것은 시의 리듬이 이 반복과 반복을 ‘수행하기‘ ‘이행하기‘로 변용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성들의 시에 대해 글을 쓰면서 느낀건 저와 동시대의 남성 시인들과 다르게 여성시의 화자들이 시에서 무엇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화자 스스로 행위를 한다는것이었습니다. 스스로 시안에서 몸을 움직이고, 행위를주고받고, 쓰러집니다. 그래서 저는 ‘시하다‘라는 용어를사용했습니다. 요즘 제가 쓰는 시들도 ‘죽음하다‘를 반복함으로써 오히려 지속을 영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 P66

유한하게 닫힌 시간과 공간이 무한한 순환으로 자기유사성을 뚫고 우주선처럼 솟아오릅니다. 마치 시간의 흐름이 눈에 보이는 듯하고, 지금의 절망사건이 미래에도 끝나지 않을 절망 사건으로 확장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음악은 반복으로 구성됩니다. 열 번, 스무 번을 반복해도더 들려줄 것이 남았기 때문에, 아직 끝이 아니기 때문에음악은 반복합니다. 하지만 시는 이 음악을 배면에 갖추고 있기도 하지만, 이미지와 해석적 진술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반복 위에서 물처럼 튀어 오르고, 반대로 흐르고, 교 - P67

차합니다. 그래서 시의 리듬과 음악의 리듬은 다릅니다.
시는 박자가 아닙니다. 시는 반복 사이에 있는 것, 그 반복 사이에 있는 감각적이고 해석적인 것들의 리듬, 그것의 확장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시의 모습, 시의 반복은 모방해야 하고, 재현해야 할 원본을 전제로 하지 않기때문에 밖으로 튀어 오를 준비를 진행해나갑니다. 여자들의 시는 디뎌야 할 부동산이 없으니 방향 없이, 도달할 수없는 ‘사이‘의 공간에서 쓰이니까 더욱 그렇지요. 발 디딜곳 없는 미지에서 리듬의 발자국만 떠도는 것이지요. - P68

시의 원료는 감각이지요. 시는 어떤 장르보다 감각이 주재료이고, 시는 감각기관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장르입니다. 한 편의 시가 서사를 진행한다 해도 그 서사에서 시간적 요소를 제거하면 감각이 오롯이 남지요. 저는 학생들과 수업할 때 항상 학생들이 내놓은 감각적 소여를 가지고 어떻게 그것들이 한 편의 시가 되는지 토론했습니다.
물론 감각이니 지각이니 하는 용어를 써서 학생들을 괴롭히지 않았고, 학생들의 재료를 감각으로 옮겨 가게 하고, 그 감각들의 뭉텅이를 보이지 않는 어떤 에너지 흐름의단위, 생성의 블록, 묘사의 시점 안에 모이도록 만들어보게 했습니다. 그 감각들이 어떻게 문장에 놓여야 하는지,
그 감각들이 병렬적으로 교차하거나 수렴하고 발산해서대상에 종속되지 않고 어떻게 지각의 범주를 벗어나게 할수 있는지도 생각해보게 했습니다. 저는 감각이라 하지않고, 학생들에게 묘사의 숨은 형식들, 구조의 시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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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제까지 시에 관한 글들을 모은 세 권의 책(『여성이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 시하다』 『여자짐승아시아하기)을 출간했습니다. 그 책들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생체시학‘이라 부를 수 있겠다고 언젠가 생각한 적 있습니다. 몸에게서 이름과 인종과 피부 색깔과 취향과 그 모든 것을 제거한 몸, ‘돼지‘의 시학이지요. 나중에 그 돼지를 ‘여자짐승‘
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는가려움과 갈증과 배고픔과 결핍의 비명과 갈망이 제 몸의지금이고 직감이듯이 시의 직감도 그와 같지요. 지금의직감으로, 그 모든 것을 떨군 몸뚱이의 내밀성으로 저는 시를 감지하지요. - P18

황인찬

몸뚱이의 내밀성으로 시를 감지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선생님의 시는 항상 몸에 대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어쩌면 선생님 시에서 무의식이 큰 힘을 발휘하는 것 또한 바로 그 몸에 대한 깊은 천착에 의한 것이 아닐까 헤아려보게 됩니다. 돼지의 시학이 결국 폭력과 죽음을 통해서, 즉 육체성의 무력화를통해서 드러난다는 것도 의미심장하게 생각되는데요. 선생님의 세계에서 죽음이란 몸과 참 가까운 것처럼 보입니다. ‘죽음의 자서전』 역시 죽음을 탐구하는 작업이었고요.
원래는 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이어가려 했지만, 죽음을 함께 짚어가며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쭙고 싶은데요. 선생님의 시에서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 P19

김수영 시인의 「눈」에서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김수영이 생각한 죽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김수영은 왜 젊은 시인에게 "눈더러 보라고" 기침을 하고 "가슴의 가래"를 뱉으라 했을까요? 저는 김수영이 죽음을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같은 상태라 지각했다고 생각합니다. 김수영이 생각하기에죽음을 잊어버린 젊은 시인은 시인이 아니었지요. 그러니죽음을 잊어버리지 않은 시인은 눈에게 살아 있다고, 아 - P20

지 죽지 않았다고, 죽음으로 살아 있다고 마음껏 말해야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김수영에게는 죽은 자야말로 시인이고, 가래를 뱉을 수 있는, 죽음으로 산 자였지요. 저는아주 오래전에 김수영론으로 박사학위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요. 그때 저는 레퍼런스 없이 제 생각만으로 논문을써서 제출했습니다. 그러자 심사위원 중 한 분이 강렬하게 레퍼런스를 100개 이상 달아오지 않으면 통과를 시켜주지 않겠다 해서 기호학을 가져다가 도식적으로 김수영시를 분해했습니다.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김수영이 참으로 형식적인 시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는 계산이 참 정확했습니다. 일상어를 쓰는 시적 혁명을 도모했지만, 시 안에서의 형식은 참으로 도식적이었습니다. 저는그가 시에서 주로 ‘생활, 죽음, 자유, 혁명, 고독‘을 다루고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제 논문의 챕터를 나누었습니다.
시를 쓸 때마다 김수영은 ‘생활, 죽음, 자유, 혁명, 고독‘의반대편에 위치한 구절과 에피소드 들을 도식적으로 배열했어요. - P21

사실 저는 죽은 자의 죽음이 아니라 산 자의 죽음을 쓴 것입니다. 저는 살아서 바리공주의 여행을 하고 싶었습니다.
바리공주처럼 저의 죽음인 저의 바깥을 왕복하고 싶었습니다. 죽음을 왕복하면서 만난, ‘나의 죽음‘을 포함한 죽음의 존재들은 몇 인칭일까요? 저의 죽음을 ‘나‘라고 부를수 있을까요? ‘나‘가 유령 화자로 말을 시작하자 제 죽음은 인칭을 특정할 수 없는 ‘너(희)‘가 되었어요. 저는 제가죽은 후 ‘나‘라는 단독 자아로 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죽음은 ‘나‘를 ‘나 아닌 것‘으로 만들 겁니다. ‘나‘
는 아마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지 않을 겁니다. ‘나‘가 죽은그곳에, ‘내‘가 여럿이 된 그곳에 그 시들이 ‘나‘를 기다리 - P24

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의 화자인 ‘너(죽음)‘는 인칭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제죽음의 인칭은 몇 인칭일까 자주 생각해봤어요. 아마 육인칭이나 칠인칭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시를 쓰는 것자체가 일인칭에서 육인칭이나 칠인칭으로 건너갔던 순간을 쓰는 것이 아닐까요? - P25

바람이 창문 아래서 두려움에 떤다.
바람은 침묵치료를 견디지 못한다.
가만히 있어, 소리치는 침묵은 어떤 나라 같다.
사정없이 내리쬐는 빛 아래 드넓은 운동장엔 아무도 없다.
다 치료받으러 갔다.
평평하고 광활한 운동장, 그러나 그 안은 스텐처럼 싸늘하다.
바람은 합창단에 가입했다 쫓겨난다.
바람의 목소리는 나무 꼭대기에 붙은 나뭇잎 두 개를 떨게 할 만름 높이 올라갈 수 있지만
탁자의 잔들이 모조리 깨질 만큼 예리하지만 음정이 계속 틀리는 바람, 박자를 못 맞추는 바람. 악보를 못 읽는 바람.
두 옥타브 올라갔다가 세 옥타브 떨어지는 바람. - P26

바람이 다리를 떤다. 바람이 창문을 떤다.
바람은 긴장을 견디지 못한다.
바람은 기분이 잘 상한다.
바람의 불안이 극도로 커진다. 교실의 전등이 모두 흔들린다.
바람이 미술치료 시간에 그려놓은 밤바다를 보라. 물결치는 수억만의 머리카락을 보라.
전봇대가 윙윙 운다.
입술 밖으로 전류가 흐른다.
싸늘한 운동장이 벌벌 떤다.
바람에게 누가 귓속말하나 보다.
바람은 흰 이빨 블록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가지런한 문장들을 견디지 못한다. - P27

바람이 어디선가 험한 메시지를 받아온 사람처럼 포효한다.
바람에게 최면을 걸어야겠다.
바람에게 수면치료를 해야겠다.
바람은 바람들과 파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바람이 집에 도착하니 바람의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바람을 입관하고 있었다.
이제 바람은 더욱 심해진다.
펼쳐진 영혼처럼 울먹인다.
귓속말로 명령을 계속 받는가 보다.
바람 속에 몇백의 아이가 들어 있다. 바람은 그 아이들하고만 얘 - P27

기한다. 그 아이들하고만 산다.
바람은 다중인격이다.
바람은 구강애호증이다.
바람에게 공갈젖꼭지를 물려야겠다.
바람에게 진정제를 놔줘야겠다.
바람의 두 팔을 결박해야겠다.
바람은 상담치료를 견디지 못한다.
바람은 밖에만 있지 않다.
바람은 꿈 분석을 싫어한다.
바람은 빙 둘러앉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 P28

바람은 걸레 같은 가면 아래서
회오리치는 무의식의 대륙들과 만나는 걸 싫어한다.
거대한 풍선처럼 천천히 부풀어 오르다가 의자 모서리에 찔려 터진다. 통곡한다.
저물녘 붉은 물감을 칠한 바람이 폭발한다. 몇 시간째 데굴데굴구르며 회오리친다. 번개 친다.
바람에게서 바람이 뽑혀나가며 지르는 비명.
바람은 자유연상을 못 견딘다.
연상의 끝에는 꼭 무시무시하게 일어서는 밤바다가 있다.
바람은 일인실을 견디지 못한다. 바람은 육인실을 견디지 못한다.
바람은 관에 못이 쳐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유골함도 견디지 못한다. - P28

바람은 견디지 못한다.


- 「바람의 장례」 전문 「피어라 돼지』 - P29

당시에 저는 문학동네 온라인 지면에 시도 아니고 산문도아닌 ‘시산문‘이라 스스로 명명한 글들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다시는 그 글들을 쓸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온세상을 향하여 이 나라가 저 생때같은 아이들에게 한 짓을보십시오!" 하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살아있는 어른이라니, 참으로 저 자신이 수치스러웠습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정부는 국민에게 참으로 나쁜 짓을 많이 해왔습니다. 시인이란 인간은 원래 무턱대고 무한한 자유를 동경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자신의 시의 목적을 정치적 운동에 두지 않더라도 어느 시인이나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시인들이 그 현장에 가서 생일시를 쓰고, 지금도 끊임없이 낭독회를 열고, 학생들 가족과 연대해 책을출간하는 것도 그런 연유일 것입니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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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김혜순의 시집

또 다른 별에서 (1981)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1994)
우리들의 음화 (1995)
불쌍한 사랑 기계 (1997)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2000)
한 잔의 붉은 거울 (2004)
당신의 첫(2008)
슬픔치약 거울크림(2011)

自序


가슴과 함께 뇌가 작동을 시작한 시한폭탄처럼 폭발하려고 한다. 그러나 거울을 보면언제나 같은 얼굴, 같은 표정, 같은 水面.

이 시집의 시들은 첫 시집 이후의 시들을간추려 모은 것이다. 또, 시집을 내주고, 만들어주는 분들께 감사드린다.

진정코 한번 멋들어지게 폭발하고 싶다.
그래서 이 껍질을 벗고 한줌의 영혼만으로
저 공중 드높이..…....

1985년 여름
김혜순

기어다니는 나비


음악이 피리 구멍에서 나오듯
느타리버섯이 진창에서 벗어나오듯

어두운 자궁 속에서 고고의 힘찬 울음이 터져나오듯
쓰러진 육체의 구멍 속에서부터 고통에 찬 영혼이 벗어나오듯

그렇게 무거운 살을 털어버리며
영겁의 기억의 무게를 벗으며
터져나오려는
수천의 무지개빛 종소리를 틀어쥐고
고치를 벗어나 더듬이를 세우고
형형색색의 날개를 펴 마악,
저 푸른 하늘로 투신하려 할 때
갑자기 스러지듯 드러눕는
무심한 번개 한 자락
내 두 날개를 짓뭉개버렸지 - P11

전염병자들아
- 숨차게


푸르게, 시리게, 촉, 수, 만, 켜들고, 달려, 가라, 달려, 가라, 전신을, 파, 먹는, 구, 더, 기, 들에겐, 전신을, 주고, 다리, 사러, 온, 사람에겐, 다리, 팔고, 신나게, 경매를 외쳐라. 토하고, 싸고, 흘리며, 모두, 모오두, 나눠, 줘라, 네, 심지를, 꺼내 보여라. 뛰어라. 앓는, 몸아, 너를, 부르거든, 큰, 소리로, 살아있다살아있다, 외쳐, 대라. 도착하진, 말고, 떠, 나, 기만, 하, 거, 라. 주사, 바늘들이, 빠져, 달아나고, 희디흰,침대, 가, 다, 부서지도록,피똥이,튀고, 토, 사물과, 악취가, 하늘, 높이, 날리도록, 달리기만 하거라. 생명이, 나갔다가들어오고, 출발했다가도착하며, 생, 명, 을, 부렸다가다시, 지고, 또, 다, 시, 달려, 나가는, 않는, 몸아! 저기, 저기, 쳐다봐라, 유화, 물감으로, 그려진, 행복이, 액자,
속에 담겨 있고, 이제, 막, 기쁨의, 사, 카, 린, 이, 강, 물, 처, 럼, 네, 피, 속으로 들어가고 있구나, 누군가, 살아있냐 묻거든, 머리를, 깨부수고, 촉, 수, 를, 보여, 줘, 라.










! - P14

사연


너는 하나의 단어가 되었다
욕설과 증오가 반죽이 된
하나의 찬란한 이름이 되었다
오늘밤 나는 그 이름에게
더러운 옷을 입히고 두 손목을
포승줄로 꽝꽝 결박지어
이 거리 저 거리로 이랴이랴 몰고 다닌다

나도 스무 살박이 하나의 단어가 되었다
나를 향해 서러운 단어들이
기억의 숲 깊은 곳에서 몰려나왔다
그리고 어느덧 서글픈 문장들이 나를 둘러쌌다
가슴에 피멍든 사랑을 품고
거렁뱅이가 된 나는 하나의 이름이 되었다 오늘밤 나는 그 이름의 머리에 꽃 하나 꽂아주었다
더러운 처녀에게 비웃음 나는 향수도
토닥토닥 뿌려주었다

오늘밤 늙은 우리는 한 장의 종이 조각이 되었다
때묻은 기억일랑 세월로 짓뭉개버린 - P18

한 장 종이에 박힌 못난 두 얼굴이 되었다
밤새껏 구겨쥐었다 다시 펴보는
냄새 나는 사연이 되었다
늙은 얼굴에 비명을 감추고
한껏 웃어보려고 입술을 비틀며
시궁창 같은 사연에 가슴 설레는
낯선 두 남녀가 되었다 - P19

日沒


노을 속에 머리칼을 처박고
서 있다보면,
나의 발부터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밤의 정체를 숨죽여 바라보다보면,
긴 행렬을 짓고
개울을 가로질러 가는
물새떼들을 보다보면
뒤따라 슬픔이 자르듯이
가슴에 새겨지는 것을 보다보면,
얼굴엔 눈물이
생선 비늘처럼 꽂히는 것을
강물에 비춰보다보면,
나무들이 이리저리 돌아서고
들판이 한없이 접히는 것을 어지러워하다보면,
느닷없이
플래시를 터뜨리듯
내 뺨에 철썩 처얼썩 떨어지는
그의 손바닥을 보다보면
내 얼굴에서 강둑에 떨어져 번득이는
비늘을 보다보면, 내 눈알을 쏘아보다보면 - P20

비상 먹은 달이
팽팽하게 떠올라오지 - P21

비명


겨울 산 나무들은
비명을 질러댄다
머리를 땅에 처박고
긴 목으로 일렁이며
가랑이를 공중에 쫙 벌린 채
거꾸로 선 나무들은
비명을 질러댄다
입으로 흙이 들어가서
위장이 꽉 막히도록
놀란 머리카락들이
땅속에서 철사줄처럼
팽팽해지도록
비명을 질러댄다
겨울 산에 가보라
겨울 나무들이 벗은 살에
매운 매를 맞으며
땅속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막힌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 보이리라 - P23

추운 겨울 밤이 오면
산의 나무들은 더욱 큰
비명을 질러댄다
아무도 모르게 죽은
사람들의 머리채와
거꾸로 선 나무들의
머리채가 서로 맞닿아
질긴 매듭이 지워지고
더욱 큰 비명들이 터져나온다.
추운 겨울 밤
산 나무들은 더욱 큰 소리를 질러 삼킨다
두 가랑이를 휘저으며
그 아래 열 손가락을
부챗살처럼 펴고 펄렁이며
겨울 밤 나무들은
꽉 매인 가슴을 쥐어뜯고 울부짖는다
겨울 밤 산에 올라보라
거기 내가 네 발 아래
물구나무서서
차가운 별빛 같은 매를 맞으며 - P24

매서운 바람 같은 두 손바닥의 질타를
참고 있는 것이 보이리라
언 땅속에서 눈물을 비비고
막힌 사연을 품고
공포에 떨며떨며
비명만 질러대고
있는 것이 보이리라 - P25




나에게 찬물을 끼얹고는
두 주먹으로 가슴을 움켜들고 다니다가,
홍두깨로 사지를 좌악 밀어놓고는
아스팔트 위에 내동댕이도 쳐보다가,
그 위로 버스도 구르고, 탱크도 구르게
하다가, 또 싫증나면
밀가루 같은 것을 솔솔 뿌려
얼굴도 토닥거려주다가,
시퍼런 칼을 들고 나타나서는
머릿속을 쫑쫑 누비고 다니다가도
끓는 물 속에 풀썩 팽개쳐버리는,
하얗게 세어버린 내 머리카락을
물 속에 흔들어 건진 다음
양념에 무쳐 맛있게도 냠냠 칼국수를
말아먹는,
여름 한낮의

너.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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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질문이기에,
이 책을 완성한 건 내가 아니다.
김혜순

저는 그해에도 사직서를 냈다가 다시 안식 학기를 보내고있었어요. 수업이 없고 여유 시간이 생겨 제가 도맡아 엄마를 모시고 앰뷸런스를 불러 타고 병원과 호스피스를 전전했습니다. 결국 엄마의 임종을 맞이하고, 엄마 집을 정리하는 일까지 했지요. 그 와중에 시를 적었습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어서 적은 것들입니다. 그 이후에는 시가 떠올라도 거의 적지 않고 있어요. 후배 시인의 조언대로 시와 멀어져야 할까요? 『죽음의 자서전』부터『날개 환상통』을 거쳐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에 이르기까지 저는 참 많이도 죽음 사건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음 3부작이 되었지요. 시인이란 존재는본래 죽음에의 선험적 직관을 표출하는 존재이지만, 그래서 내내 자신의 끝을 미리 살아내는 존재이지만, 이 시기에는 제 자신이 죽음으로서의 저를 좀 더 느낀 건 아닌가생각되기도 합니다. 저는 죽음 사건으로 비탄에 빠진 사람들의 연대와 죽음에의 선험적 직관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 시들을 쓰면서 저는 죽은 후의 ‘나‘는 ‘단수"
가 아니라 ‘복수‘라는 시적 경험을 하게 되었지요. 그러자복수의 화자가 말을 하는 시끄러운 시들이 폭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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