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화요일 오후 다섯시 사십오분
세면대 밸브에서 물새는 걸 발견했다.
집수리 기술자에게 연락하니 다른 집 일을 보고 있어 바로 방문하기가 어렵다며 내가 직접 조치할 수 있는 일을 알려주었다. 내일 오후에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단편을 이어 썼다. 한달 뒤 마감엔 탈 없이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기온이 많이 떨어져서 책상 근처가 춥다. 손가락을 덥히려고 커피를 세잔째 마시고 있다. 어젯밤엔 의성어가 엄청나게 많이 등장하는 소설을 쓰고 괴로워하는 꿈을 꾸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잠시 뒤져본 흔적일까. 이디스 워튼의 「이선 프롬 민음사 2020을 읽기 시작했다.  - P9

도입부에서 관찰자의 시선으로 묘사된 이선 프롬의 고독과 고립에 마음 아팠다. 눈과 고독, 고립된 삶. 내가 아는 겨울을 닮은 이야기들에 마음이 흔들린다. 이번 겨울엔 소설을 많이 읽고 싶다.
번역서 두권을 주문하는 김에 귤을 샀다. 지난달에 백두대간수목원을 방문하고 들은 이야기도 곧 원고로 정리해야 한다. 오늘은 원고지 다섯매를 썼는데 밤에 한번 더보면서 다듬고 싶다.

오후 열시 이십삼분
계엄. - P10

12월 4일 수요일 오전 아홉시 십사분
김보리는 출근했다.
네시간쯤 잤을까. 새벽에 눕자마자 잠들었다.
나도 잤다. 짧은 잠.

오후 열한시 구분
낮에 비상시국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국회 앞으로 갔다.
전철을 타고 가는데 몸이 떨렸다.
집수리 기술자에게 연락했다. 오늘 갑자기 외출할 일이생겼다 메시지를 보내고 다음 주로 다시 약속을 받았다.

국회의사당역 6번 출구로 나가 국회 정문을 통과했다. 날이 맑고 문이 열려 있고 사람들이 아무런 저지 없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너무 평화롭고 선명해 보여 현실 같지 않았다. 잔디 마당을 가로질러 국회 계단을 향해 갔다. 사람이 이미 많이 모여 있었다. 자리를 잡지 못해 계단 위쪽으로 올라갔다. 국회의사당이 등 뒤에 있었다. - P11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걸 오늘 알았다.)   12월19일 부기

계단을 오르기 전에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들 일행이 꼭대기쯤에도 모여 있었나보다. 사회를 맡은 김성회 의원이 맨 뒷자리 사람들에게 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 플래카드를 내려달라고 말했다.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시대로" 플래카드를 읽으며 배려와 협조를 부탁하는 태도는 우아했지만 그의 지적 이후로 계단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다. 앞쪽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있었고 뒤쪽을 향해 평화롭게 하자고 쏘아붙이는 사람이 있었다. 고함과 비웃음이 오갔다. 성난 표정으로 돌아보는 앞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평화롭게 하자고 거듭 소리 지르는 그에게 소리 지르지 말라고 외치다가 뒤쪽을 향한 말로 들릴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런 말투로 평화를 요구할까. 수많은 시민을 담은 이 자리가 왜 저 정도 입장과 말을 담지 못할까. 화가 났다. 사람들이 싫었다. 사람들이 안쓰러웠다. 계속 가슴에 통증을 느끼며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이게 뭐지, 생각했다. 눈이 아플 정도로 사 - P12

방이 선명해 보였는데 마음이 곤죽이었다. 나만 그랬을까. 모두가 곤두선 마음.
국회의원이든 시민이든 그 자리에 모인 사람 중에 절박하지 않은 이가 있었을까. 나도 계엄에 반대하고 윤석열의 탄핵과 구속을 간절히 바라며 서 있었지만, 윤석열과 그가 초래한 국가 상태를 묘사하려고 ‘정상‘과 ‘비정상‘을 반복해 말하는 몇몇 연설은 집중해 듣기가 어려웠다. 이사회의 정상성 기준으로 불편과 부당을 겪는 사람들, 소수자들도 여기 있는데 별 조심성 없이 그 말들이 사용되고 있었다. 선 자리가 따끔했고, 뒤쪽 눈치가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 불편함을 말할 수 있을까, 지금은 그래도 되는 시간일까. 2016년 광화문에서 한 생각을 2024년 국회 앞에서도했다. 스스로를 비겁하다고 느꼈다.

대회가 끝나고 잔디 마당 곁을 지날 때 앞서 걷는 사람의 코트에 붙은 낙엽을 보았다. 작은 단풍잎들. 털어줘야할까, 하지만 예뻐서 아까웠다. 망설이기만 했다. "털어드려야 될 것 같은데, 너무 예뻐서 아까워요." 다른 이가 그에 - P13

게 건네는 말을 들었다. 그게 기뻤다. 내게 예쁜 것이 그에게도 예뻤다는 게. 웃었다. 간밤 이후 처음으로 긴장이 풀어졌다.
더불어민주당,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은 오늘 여의도에서 시국대회를 마친 뒤 대통령 탄핵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 P14

12월 5일 목요일 오후 세시 이십구분
원고를 보다가 헬기 소리를 듣고 놀라 베란다로 나갔다.
파주에서 서울 방향으로 날아가는 군용 헬기를 보았다.
그거 한대인지, 더 있는지를 알려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눈물이 터졌다.
원고로 돌아갈 수 없어 일기로 들어왔다.
오늘 뭔가를 쓸 수 있을까.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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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도 가까이서도


멀리서 바라보는 산동네는 아름답다
언덕을 기어 올라간 집들은 당당하기 성곽 같고
집들을 반쯤 덮은 붉은 장미는 멀리까지 향기를 뿜는다
밤이면 창문마다 별들이 매달리겠지
새벽이면 기우뚱 마을 뒤로 초승달이 지고

골목에 나뒹구는 헌 옷가지가 낯익고
담 너머로 넘어오는 된장 냄새가 반갑다
음정이 맞지 않는 노랫소리가 정답다
개짖는 사이사이 숨죽인 시비까지 귀에 익어

들어가 걸어보면 산동네는 더 아름답다
멀리서도 아름답고 가까이서도 아름답다 - P54

허공


해 지고 날 어두워지니 길이 보인다
밝은 대낮에는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인다
잡초만 어지럽게 자라고
잡초 속에 풀벌레가 숨죽인 길이 보인다

달과 별이 없어 더 아름다운 길이 보인다
잡초도 풀벌레도 잠들어 더 아름다운 길이 보인다

머지않아 내 그림자만 길게 드리울
마침내 그것마저 사라지고 없을
내가 휘적휘적 걸어갈 허공이 보인다

눈부신 햇살 아래서는 보이지 않던
허공이 보인다 - P69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다
귀를 통해 들어오는 것만은 아니다
개중에는 집요하게 살갗을 파고들어
동맥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것이 있다
구석구석 그 소리가 닿을 적마다
우리들의 몸은 전율하고 절규하다가
드디어는 그것을 따라
통째로 밖으로 빠져나온다
한순간 높이 하늘로 치솟았다가
폭죽처럼 터져 지상으로 쏟아져

새파란 풀밭에
조각조각 꽃이 되어 흩어진다

해가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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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마을은 강이 있는 산골 마을, 산을 그려주며 내려온 눈송이들이 강으로 간다. 검은 바위 위에도 새들이 지나다니는 마른 풀잎 사이에도 뒤꼍 감나무 꼭대기 까치집에도 홀로사는 산골 사람들의 지붕 위에도 눈이 오는데, 문태준의 시를읽는다. 시집을 다 읽고 눈 오는 마을을 한바퀴 돌고, 집에 돌아와 또 시집을 읽고 눈 그친 마을을 한바퀴 돌아도 자꾸 생각이 끊기고 말문이 막혔다. 해가 지고 어둠이 오고, 어둠 속으로 눈발이, 그리고 내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나는 눈보라가 치는 꿈속을 뛰쳐나와 새의 빈 둥지를 우러러밤처럼 울었어요"(「이별」), 태준아, 나는 울기 싫다.
김용택 시인




당신은 꽃봉오리 속으로 들어가세요
조심스레 내려가
가만히 앉으세요
그리고
숨을 쉬세요
부드러운 둘레와
밝은 둘레와
입체적 기쁨 속에서 - P10

첫 기억


누나의 작은 등에 업혀
빈 마당을 돌고 돌고 있었지

나는 세살이나 되었을까

별바른 흰 마당과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깰 때 들었던
버들잎 같은 입에서 흘러나오던
누나의 낮은 노래

아마 서너살 무렵이었을 거야

지나는 결에
내가 나를
처음으로 언뜻 본 때는 - P11

음색(音色)


시월에는
물드는 잎사귀마다 음색이 있어요

봄과 여름의 물새는 어디로 갔을까요
빛의 이글루인 보름달은 어디로 갔을까요
뒤섞여 있던 초록들은 누구의 헛간으로 갔을까요

나는 갈대의 흰 얼굴 속에 있었어요
마른 잎에서는 나의 눈을 보았어요

얇고 고요한 물, 꺾인 꽃대, 물에 잠기는 석양
그리고 그 곁엔
간병인인 시월 - P12

수평선


내 가슴은 파도 아래에 잠겨 있고
내 눈은 파도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고

당신과 마주 앉은 이 긴 테이블
이처럼 큼직하고 깊고 출렁이는 바다의 내부, 바다의 만리

우리는 서로를 건너편 끝에 앉혀놓고 테이블 위에 많은것을 올려놓지
주름 잡힌 푸른 치마와 흰 셔츠, 지구본, 항로와 갈매기, 물보라, 차가운 걱정과 부풀려진 돛, 외로운 저녁별을 - P18

봄산


쩔렁쩔렁하는 요령을 달고 밭일 나온 암소 같은 앞산 봄산에는
진달래꽃과새알과 푸른 그네와 산울림이 들어와 사네

밭에서 돌아와 벗어놓은 머릿수건 같은 앞산 봄산에는
쓰러진 비탈과 골짜기와 거무죽죽한 칡넝쿨과 무덤이 다시, 다시 살아나네

봄산은 못 견뎌라
봄산은 못 견뎌라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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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심스럽게 그 집을 나섰고, 전에 빌리 아버지의 위스키를 마셨을 때보다도 더 취해 무릎이 노인처럼 후들거리고 얼굴은 아직도 화끈거렸다. 내가 밖으로 나서며 맞이한 4월의 날은 물론 바뀌어 있어 모든 것이 발그레하고 떨리고, 욕구가 넘치도록 충족된 사람 특유의 내굼뜬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스치듯 가벼웠다. 이날을 통과해 움직이면서 나는 걷는다기보다는 뒹굴뒹굴 굴러가는 느낌이었다. 바람이 빠진커다란 풍선처럼. 집에 갔을 때는 어머니를 피했다. 조금 전에, 비록일시적이라 해도, 충족된 욕망의 불그레한 자국들이 나의 달아오른 이목구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보일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 P75

나는 곧장 내 방으로 가서 침대에 몸을 던지고, 정말로 몸을 던지고, 팔뚝으로 감은 눈을 가린 채 누워서 아직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과거에 다른 침대에서 일어난 모든 일, 무구한 가정용 설비들로 이루어진 관객이 두려움과 놀라움에 사로잡혀 입을 떡 벌리고 구경한 모든 일을 나의 내부 스크린에 프레임 단위로, 미친듯이 느린 슬로모션으로 재생했다. 아래쪽 푹 젖은 정원에서는 찌르레기 한 마리가 노래의 폭포로 목을 씻어내기 시작했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눈에 뜨거운눈물이 고였다. ‘오 미시즈 그레이!" 나는 작은 소리로 외쳤다. "오 내 사랑!" 그러면서 달콤한 슬픔에 두 팔로 내 몸을 감싸안았고 그러는 동안에도 포피의 따끔거리며 찔러대는 느낌에 괴로워했다. - P75

그리고 나도, 심지어거기에 그녀와 함께 있는 나도 나 자신의 기억 너머에 있었고, 움켜쥐는 두 팔과 경련을 일으키는 다리와 미친듯이 펌프질을 하는 엉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게 완전히 퍼즐이었고 나는 곤혹스러웠다. 아직 어떤 일을 하는 것과 이루어진 일을 회상하는 것 사이에 입을 벌리고 있는 틈새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내 마음속에 그녀의 조각조각을 빼놓지 않고 고정하여 그녀를 단 하나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완천체로 만들고, 그와 더불어 나도 그렇게 만들기까지는 연습과 그 결과로 나오는 익숙함이 필요하게 된다. 하지만 완전체니 하나의 덩어리니 하는 게 무슨 뜻인가? 내가 복원해내는 그녀 자체가 나 자신이 만드는 허구 외에 무엇이었을까? 이것이 더 큰 퍼즐, 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이 소외의 수수께끼가.
내가 그날 어머니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단지 나의 죄가 틀림없이 나의 온몸에 분명하게 적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어떤 여자든, 심지어 엄마도, 두 번 다시 똑같이 보지 못하게 되었다. 전에는 여자애와 어머니들만 있었던 곳에 이제 둘다 아닌 뭔가가 있었고, 나는 그것을 어떻게 파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P77

그러나 캐스가 떠오르는 것, 특히 그런 미약한 방식으로 떠오르는 것과 그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그것도 그렇게 느닷없이, 심지어 황망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캐스를 생각할 때면ㅡ내가 캐스 생각을 하지 않는 때가 언제인가? ㅡ내 주위 사방에서 수많은 것이 몰려오며 울부짖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치 온몸을 적시는 폭포 바로 밑에 서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내 몸은 마른 채, 뼈처럼 바싹 마른 채인 듯하다. 애도는 나에게 그런 것이 되었다. 항상 밀려오는 큰물, 바싹 말려버리는 큰물. 사별에는 어떤 수치심이 따라붙는다.
는 것도 알게 된다. 아니, 딱히 수치심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어떤 어색함, 어떤 멋쩍음. 심지어 캐스가 죽고 난 직후에도 나는 사람들 앞에서 지나치게 울어대지 않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침착한 것, 또는 침착의 외양을 유지하는 것이 의무라고 느꼈다. - P120

울 때도 우리는, 리디아와 나는 은밀히 울었다. 위로하러 온 사람이 떠나면 미소를 지으며 현관문을 닫고 나서 곧바로 서로의 목에 얼굴을 묻고 아예 울부짖었다. 그러나 이제 빌리 스트라이커에게 말을 하면서 나는 어떤 식으로인가 사실상 울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명은 할 수 없다. 물론 눈물은 없었다. 그저 말이 그치지 않고 쏟아져나왔을 뿐이지만, 정말 제대로 우는 일에 몸을 완전히 내맡겼을 때 경험하게 되는, 무력하게 곤두박질치는 거의 관능적인 느낌이 있었다. 물론 마침내 말이 바닥났을 때는 마치 가볍게 뎬 것처럼 몹시 후회스럽고 무안했다. 빌리 스트라이커는 노력이라고는 조금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는데 어떻게 내가 그렇게 많은 말을 하게 한 걸까? 그녀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뭔가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또 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 P120

것은 호감이 간다고 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일까? 기억나지 않는다. 주절거렸다는 것만 기억나지 뭘 주절거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 딸이 학자였고 드문 종류의 정신장애로 고생했다고 말했던가? 아이가 어리고 아직 병 진단을 받지 않았을 때 병의 신호가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다가 이내 전보다 확연하게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날 때마다 아이어머니와 내가 불안한 희망과 잿빛 실망 사이를 어지럽게 오가곤 했다는 이야기를 했던가? 그 시절 우리가 단 하루의 평범한날, 아침에 일어나 아무것에도 마음 쓰지 않고 아침을 먹으며 서로 신문에 난 기사를 조금씩 읽어주고 할일을 계획하고 그런 뒤 산책을 하면서 순수한 눈으로 풍경을 보고 나중에 와인 한잔을 함께 마시고 더나중에는 함께 잠자리로 가 평화롭게 서로의 품에 누워 무탈하게 잠으로 빠져드는 날을 갈망하곤 했다는 이야기.  - P121

하지만 아니, 캐스와 함께하던 우리의 삶은 늘 감시였으며, 마침내 아이가 우리를 빠져나가 사*라지는 묘기를 부렸을 때 사람들이 아주 정확하게 말하듯이 아이가자신에게서 벗어나버렸을 때 우리는 슬퍼하는 한가운데서도 아이가 결국 우리의 뜬눈으로 보내는 밤들을 끝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혹시나 우리가 자지 않고 지키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그런 끝을 앞당기도록 부추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했고,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에 경악하기도 했다. 진실은 아이가 늘 우리를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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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언제 나을지 알 수가 없는데
어느 날엔가 나을 것 같다

추위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할 때처럼
한여름에 느닷없이

네가 말했던 절반의 문장에 대하여
얼음처럼 부서지는 일들에 대하여

십이월에 태어난 사람들은 멍이 잘 든대
한 연구자가 말했다

이젠 모든 걸
십이월에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될까

매번 깨지 말아야 할 장면에서 깨어났다
좀더 깊은 악몽에까지 가보고 싶게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왜 안 되냐는 질문으로 돌아왔다

- P72

아주 근처까지 왔어

너는 지금 너를 돌보고 있구나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구나

풀빛 여린 나물에
흰 쌀밥을 먹으면서 - P73

모로코식 레몬 절임


너의 안부를 전해들었다

펼치면
전부 펼쳐질 것 같았다

입구를 꽉 묶어두었던
가느다란 실이 풀릴 것만 같았다

주머니 안에 넣을 수 없었다
주머니는 자주 비워야 하고
빨래를 할 때마다 속을 뒤집어야 했으니까

멀리 있다가 가끔씩 찾아오는
한겨울의 눈처럼

녹지 않고 쌓일까봐
겨울이 계속될까봐

얇게 저민
레몬 슬라이스, 소금과 함께
병에 담아 밀봉하였다

레몬 절임에도 - P84

상온에서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 달이 지나면

다 녹아 알맞게 절여진 레몬과
뒤섞인 안부를
컵에 담고 뜨거운 물을 부어
휘휘 저어볼 수 있겠지

그러면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마셔볼 것이다

적어도 따뜻하게 사라질 수 있게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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