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심스럽게 그 집을 나섰고, 전에 빌리 아버지의 위스키를 마셨을 때보다도 더 취해 무릎이 노인처럼 후들거리고 얼굴은 아직도 화끈거렸다. 내가 밖으로 나서며 맞이한 4월의 날은 물론 바뀌어 있어 모든 것이 발그레하고 떨리고, 욕구가 넘치도록 충족된 사람 특유의 내굼뜬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스치듯 가벼웠다. 이날을 통과해 움직이면서 나는 걷는다기보다는 뒹굴뒹굴 굴러가는 느낌이었다. 바람이 빠진커다란 풍선처럼. 집에 갔을 때는 어머니를 피했다. 조금 전에, 비록일시적이라 해도, 충족된 욕망의 불그레한 자국들이 나의 달아오른 이목구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보일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 P75
나는 곧장 내 방으로 가서 침대에 몸을 던지고, 정말로 몸을 던지고, 팔뚝으로 감은 눈을 가린 채 누워서 아직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과거에 다른 침대에서 일어난 모든 일, 무구한 가정용 설비들로 이루어진 관객이 두려움과 놀라움에 사로잡혀 입을 떡 벌리고 구경한 모든 일을 나의 내부 스크린에 프레임 단위로, 미친듯이 느린 슬로모션으로 재생했다. 아래쪽 푹 젖은 정원에서는 찌르레기 한 마리가 노래의 폭포로 목을 씻어내기 시작했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눈에 뜨거운눈물이 고였다. ‘오 미시즈 그레이!" 나는 작은 소리로 외쳤다. "오 내 사랑!" 그러면서 달콤한 슬픔에 두 팔로 내 몸을 감싸안았고 그러는 동안에도 포피의 따끔거리며 찔러대는 느낌에 괴로워했다. - P75
그리고 나도, 심지어거기에 그녀와 함께 있는 나도 나 자신의 기억 너머에 있었고, 움켜쥐는 두 팔과 경련을 일으키는 다리와 미친듯이 펌프질을 하는 엉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게 완전히 퍼즐이었고 나는 곤혹스러웠다. 아직 어떤 일을 하는 것과 이루어진 일을 회상하는 것 사이에 입을 벌리고 있는 틈새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내 마음속에 그녀의 조각조각을 빼놓지 않고 고정하여 그녀를 단 하나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완천체로 만들고, 그와 더불어 나도 그렇게 만들기까지는 연습과 그 결과로 나오는 익숙함이 필요하게 된다. 하지만 완전체니 하나의 덩어리니 하는 게 무슨 뜻인가? 내가 복원해내는 그녀 자체가 나 자신이 만드는 허구 외에 무엇이었을까? 이것이 더 큰 퍼즐, 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이 소외의 수수께끼가. 내가 그날 어머니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단지 나의 죄가 틀림없이 나의 온몸에 분명하게 적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어떤 여자든, 심지어 엄마도, 두 번 다시 똑같이 보지 못하게 되었다. 전에는 여자애와 어머니들만 있었던 곳에 이제 둘다 아닌 뭔가가 있었고, 나는 그것을 어떻게 파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P77
그러나 캐스가 떠오르는 것, 특히 그런 미약한 방식으로 떠오르는 것과 그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그것도 그렇게 느닷없이, 심지어 황망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캐스를 생각할 때면ㅡ내가 캐스 생각을 하지 않는 때가 언제인가? ㅡ내 주위 사방에서 수많은 것이 몰려오며 울부짖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치 온몸을 적시는 폭포 바로 밑에 서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내 몸은 마른 채, 뼈처럼 바싹 마른 채인 듯하다. 애도는 나에게 그런 것이 되었다. 항상 밀려오는 큰물, 바싹 말려버리는 큰물. 사별에는 어떤 수치심이 따라붙는다. 는 것도 알게 된다. 아니, 딱히 수치심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어떤 어색함, 어떤 멋쩍음. 심지어 캐스가 죽고 난 직후에도 나는 사람들 앞에서 지나치게 울어대지 않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침착한 것, 또는 침착의 외양을 유지하는 것이 의무라고 느꼈다. - P120
울 때도 우리는, 리디아와 나는 은밀히 울었다. 위로하러 온 사람이 떠나면 미소를 지으며 현관문을 닫고 나서 곧바로 서로의 목에 얼굴을 묻고 아예 울부짖었다. 그러나 이제 빌리 스트라이커에게 말을 하면서 나는 어떤 식으로인가 사실상 울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명은 할 수 없다. 물론 눈물은 없었다. 그저 말이 그치지 않고 쏟아져나왔을 뿐이지만, 정말 제대로 우는 일에 몸을 완전히 내맡겼을 때 경험하게 되는, 무력하게 곤두박질치는 거의 관능적인 느낌이 있었다. 물론 마침내 말이 바닥났을 때는 마치 가볍게 뎬 것처럼 몹시 후회스럽고 무안했다. 빌리 스트라이커는 노력이라고는 조금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는데 어떻게 내가 그렇게 많은 말을 하게 한 걸까? 그녀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뭔가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또 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 P120
것은 호감이 간다고 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일까? 기억나지 않는다. 주절거렸다는 것만 기억나지 뭘 주절거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 딸이 학자였고 드문 종류의 정신장애로 고생했다고 말했던가? 아이가 어리고 아직 병 진단을 받지 않았을 때 병의 신호가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다가 이내 전보다 확연하게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날 때마다 아이어머니와 내가 불안한 희망과 잿빛 실망 사이를 어지럽게 오가곤 했다는 이야기를 했던가? 그 시절 우리가 단 하루의 평범한날, 아침에 일어나 아무것에도 마음 쓰지 않고 아침을 먹으며 서로 신문에 난 기사를 조금씩 읽어주고 할일을 계획하고 그런 뒤 산책을 하면서 순수한 눈으로 풍경을 보고 나중에 와인 한잔을 함께 마시고 더나중에는 함께 잠자리로 가 평화롭게 서로의 품에 누워 무탈하게 잠으로 빠져드는 날을 갈망하곤 했다는 이야기. - P121
하지만 아니, 캐스와 함께하던 우리의 삶은 늘 감시였으며, 마침내 아이가 우리를 빠져나가 사*라지는 묘기를 부렸을 때 사람들이 아주 정확하게 말하듯이 아이가자신에게서 벗어나버렸을 때 우리는 슬퍼하는 한가운데서도 아이가 결국 우리의 뜬눈으로 보내는 밤들을 끝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혹시나 우리가 자지 않고 지키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그런 끝을 앞당기도록 부추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했고,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에 경악하기도 했다. 진실은 아이가 늘 우리를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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