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서 덧붙였다. 독일에서는 불법주차를 하면 이웃이 바로 신고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불법주차를 하면 이웃이 와서 몇 시에 경찰이 단속을 나오는지 알려준다고. 오래전 이야기라 이제는 다르겠지만 작가의 이 말도 내 외사랑을 부추겼다. 격정이 넘치고, 걱정을 표출할 수 있다는 건 장점만이 아니라 치명적인 단점이 되기도 한다. 코비드 첫해에 이탈리아는 여러 면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높은 사망자 수 못지않게, 자가 격리나 외출 금지 등을 비롯한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시장이 격정적으로 호소하는 동영상도 주목을 끌었다. 걱정이라면 아시아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도 빠지지 않는다. 동양과 서양이 ‘격정‘을 놓고 세기의 대결을 벌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이탈리아를 사랑해 찔끔찔끔 드나들었지만 이제는 여행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 살아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궁금하다. - P168
TMB의 베이스캠프인 샤모니에는 헬멧과 로프를 배낭에 매단 이들이 가득했다. 그들 사이에 지도 한 장을 손에든 ‘내‘가 보였다. 산악 가이드 협회의 문을 밀고 들어서는그녀. 홍조가 핀 얼굴로 산악 가이드에게 쉬지 않고 질문을던지고 있다. 타고난 체력만으로도 충분해 스틱도 들지 않았다. 복장은 허름하지만 기개는 높고, 열정도 뜨겁던 ‘삼십대의 나‘였다.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더 좋은 등산복으로 무장하고, 스틱 두 개를 목숨줄인 양꼭 쥔 오십대의 내가 이 거리에 서 있다. 흰머리만큼 몸무게도 늘었고, 체력은 떨어졌다. 여전한 점도 있다. 나에게 어울리는 곳에, 나와 닮은 이들과 함께 있다는 안도감. 몸을 써서 이루어 내는 느린 성취를 즐긴다는 점도 변하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지그시 누르며 나는 눈부시게 빛나는 설산을 바라본다. - P175
무엇보다 산은, 지구는 언제까지 버텨줄까. 기후 위기로 인해 점점 더 많은 빙하가 더 빠르게 녹고 있고, 몽블랑 산군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길, 위로라도 하듯 꽃들이 하늘거린다. 고개를 넘어 능선길에 접어드니 붉고 희고 노랗고 파란 꽃들이 길 위에 색채를 더한다. 연보라색 꽃마리, 노란색 금매화와 기는 뱀무, 자주색 범의귀, 샛노란 노랑벌이와 동이나물, 진보라색 트럼펫 용담, 연분홍 솔채꽃과 진분홍 앵초와 알핀로제, 무리 지어 하얗게 핀 알파인 데이지 꽃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걷다 보니어느새 오늘의 산장. 저녁을 기다리는 동안 산장 앞 안락의자에 앉아 저무는 몽블랑을 지켜봤다. 바람결에 날아오는 워낭소리가 골짜기로 번져가는 시간이다. 산장에 머물러야만 누릴 수 있는 순간이다. 이토록 고요하고 아름다운저녁과 아침을 위해서라면 ‘국경 없는 코골이회‘의 중단 없는 밤샘 공격도 견뎌내리라. 다음 날 펼쳐질 고생은 생각도하지 못한 채 나는 몽블랑이 붉게 물드는 모습을 보며 앉아있었다. - P188
쉰을 넘기면서 깨닫게 된 인생의 격언이 있다면 이렇다. "체력이 인성이다." 체력이 떨어지는 만큼 정신도 위축되기 마련이다. 무엇이든 다 감당할 수 있다 믿었던 마음의 대양도 말라가기 시작한다. 체력이 부족하면 여행에서도 사소한 일에 불만이생기고,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체력이 있어야 타인에게도친절할 수 있다. 그들은 고단한 여정에도 지친 티가 전혀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유쾌하고 다정했다. 자기가 떠나온 곳과 여행지를 비교하며 불평하지 않는 점은 귀한 미덕이라 나는 그들이 좋았다. 타지키스탄을 지나 우즈베키스탄으로 넘어갔을 때도 그들과 종종 만나 밥을 먹곤 했다. - P195
게으름뱅이의 대명사인 나무늘보는 여러 면에서 나를 매혹한다. 우선은 나무늘보의 삶 자체가 게으른 내가 꿈꾸는최고의 삶이다. 여행에 대한 지독한 갈망으로 많은 것을 포•기하고 20년째 떠돌며 사는 처지라, 내게 나무늘보는 정착하는 삶에 대한 어떤 은유 같다. 하루 열다섯 시간을 자고, 일주일에 한 번 나무에서 내려오는, 움직임에 있어서 극단적인 미니멀리스트. 무엇보다 나무늘보는 친환경적인 동물이다. 느린 속도의 생활 방식을 선택해 가능한 한 적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신진대사율이 극단적으로 낮아 나뭇잎몇 장만 먹어도 살 수 있고, 근육도 적고, 체중도 적게 나가서 에너지 소모량도 적다. 그 최소한의 움직임은 포식자의 눈에 띄는 횟수를 줄여 살아남는 데도 유리했다. 6천 5백만년 이상 나무늘보가 생존할 수 있었던 비법인 셈이다. 나무늘보는 주로 나뭇잎이나 수액, 과일을 먹지만 소화하는 데너무나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며칠 혹은 몇 주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기도 한다. 출산, 잠자기, 짝짓기, 먹이 주기, 밥 먹기 등 삶 전체가 나무에서 이루어진다. 나무늘보가 하 - P236
는 가장 힘들고 먼 여행이 바로 일주일에 한 번 배변을 위해나무 아래로 내려오는 일이다. 이토록 지독한 정착민이또 어디에 있을까. 나무늘보의 털에 자라는 녹조류는 보호색이 되어주고, 몸의 털은 수많은 미생물, 곤충, 곰팡이, 나방과 딱정벌레들이 공생하는 집이다. 그들은 그 안의 해로운 진드기와 세균을 먹어 치운다. 이렇게 자신의 몸을 내주어 다른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는 나무늘보는 서식지인 열대우림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어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거주하던 숲이 벌목으로 사라지면 원숭이처럼 다른 숲으로이동하지도 못하기에. - P237
나무늘보에 한껏 정신이 팔렸던 시간이 끝나고, 조니와함께 구조 센터의 곳곳을 돌아보며 이곳에 남게 된 동물들의 사연을 들었다. 악어과인 카이만을 예로 들자면 이름은 파초. 이 근처 정글 호텔로 신혼여행을 왔던 독일인 부부가 트레킹을 다녀와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야외 욕조에 이 녀석이 떡하니 들어앉아 있더란다. 건기에 물 냄새를 맡고 거기까지 왔던 것이다. 이미 인간 세계에 익숙해진 상태여서야생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0년째 거주 중이다. 야생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동물은 우리 같은 방문객이접촉할 수 없다. 이곳이 집이 된 동물만 만날 수 있는 셈이다. - P237
나무늘보는 강하고, 부지런해야 생존에 유리하다는 상식에 균열을 낸다. 느리게 움직이며 적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극단적으로적게 먹고, 최소한으로 움직이는 방식으로 생존해왔다. 기후 위기가 일상이 된 우리의 미래를 생각해보면 나무늘보코스타리카 같은 국가가 존속에 더 유리할지도 모른다. 퓨마나 재규어 같은 육식 동물의 울음소리로 가득한 정글. 온 숲이 긴장하며 바르르 떠는데 두 발가락 나무늘보 한 마리가 느릿느릿 나무를 오르고 있다. 너무 느려 움직이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마음에 온기가 피어오른다. - P242
가는비 흩뿌리는 아침, 나는 여름 숲에 서 있다. 비에 젖은 열대의 숲은 맹렬하게 서로를 향해 팔을 뻗은 나무들로몽환적인 분위기에 휘감겨 있다. 검은 나무의 몸피마다 초록의 이끼나 덩굴식물이 가득하다. 서로 몸을 읽은 푸른 잎들이 빗방울을 매단 채 늘어져 있고, 차가운 안개가 숲을제품에 가두었다 풀어놓기를 반복한다. 저마다 조금씩 다른 무수한 초록으로 채워진 공간에 원시적인 선정성이 넘실거리고 있다. - P243
잎 사이로, 가지마다, 큰 나무 너머로 빗줄기가 소리도 없이 스며들고 있다. 길이 아닌, 숲으로 발을내딛고 싶다. 뒤엉킨 가지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면 다른 차원의 세계가 열릴 것만 같다. 가까이서 하울러 멍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눈앞에서 붉은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잠시 깨어진 숲의 정적이 다시 찾아오고, 흔들리던 나뭇가지도 제자리로 돌아간다. 어떤 대가가 세상에 존재하는모든 초록색을 풀어 자유롭고 호방하게 붓질을 한 듯한 숲이다. 앙리 루소나 김보희의 그림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은. 아쉬움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들던 그 숲의 이름은 몬테베르데, 그 이름대로 초록 산에 들어가 푸른 물에 흠뻑 젖은 하루였다. 숲을 빠져나오니 짧고 애틋한 꿈을 꾼 것 같았다. - P244
코스타리카는 어디나 열대우림이었다. 내 나라에서는보기 힘든 나무와 꽃이 가득했고, 조림하지 않은 원시림이많았다. 나는 이틀에 한 번씩 국립공원을 옮겨 다니며 산과바닷가와 숲을 걸었다. 인생이 이렇게 풍요로워도 되는 건가. 문득 두려워질 정도로 매 순간 생명의 환희가 일렁였다. 생명력이 이토록 충만한 땅이라면 누구라도 그 기운에스며들어 어떻게든 살아내게 될 것 같았다. - P244
코스타리카에서 걷는 사람은 시간을 잊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걸음과는 완전히 다른 속도로 걸어야 하기에, 평소걷던 속도를 버리고 느리게 걸어야 한다. 그래야만 주변의나무와 숲과 하늘에 시선을 둘 수 있다. 시선을 주고 기다려야만 숲에 깃든 생명을 만날 수 있다. 이 나라 트레킹에서 제일 힘든 점은 열대우림답게 비가 자주 내려 진흙탕이 되는 길도, 후텁지근한 습도와 살갗에 달라붙는 더위도 아닌, 속도 조절이다. 나무늘보처럼 느릿느릿 걸으며 숲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조금씩 시선이 열리게 된다. 나뭇가지에몸을 감고 천천히 가지를 건너가는 긴 형광 연둣빛 뱀이, - P245
덩치가 새끼 돼지만 한 설치류 아구티가 나무뿌리 사이로고개를 내민 모습이, 라쿤 패밀리 중에서 유일하게 주행성인코아티가 코를 킁킁거리며 먹이를 찾는 모습이, 거대한몸체를 끌고 뒤뚱거리듯 걸어가는 새 크레스티드구안 (볏통관조)이, 나뭇가지에 다리를 걸고 잠에 빠진 두 발가락나무늘보가, 키 큰 나무의 꼭대기 가지에 앉은 투칸의 노란 부리가, 속도를 늦추고 걸음을 멈춘 이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 수백 년을 살아온, 세월에도 더 성성해지는 나무들은 또 어떤가. 앙코르와트의 유적을 뚫고 자라나는 걸로유명한 케이폭 나무의 땅 위로 뻗어나간 뿌리와 압도적인 - P245
몸피. 온몸에 푸른 이끼를 두르고 서로의 몸을 지지대 삼아 뻗어나간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나무들. 그렇게 숲에 사는 무수한 생명과 눈을 맞추며 감탄하고 신기해하며걷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맞아, 지구는 원래 이런곳이었지. 다양한 생명이 어울려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지. 오래전에는 어디나, 누구나 이렇게 살았겠지. 이런 생각이절로 든다. 그래서 코스타리카의 야생은 그 어느 곳과도 다르다. 인간의 손길이 채 미치지 못해 막막할 정도로 강대한 자연의 힘을 깨닫게 되는 파타고니아와도 다르고, 일체의 생명이 절멸한 후의 지구를 상상하게 만드는 아이슬란드와도 다르다. 코스타리카는 인간과 동물이 경계나 구분없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곳 같았다. - P246
코스타리카에서는 밤 산책의 기쁨도 빼놓을 수 없었다. 어두운 밤에 가이드와 함께 정글을 걸으며 야생동물을 찾아보는 투어다. 밤 산책을 하기 전에는 몰랐다. 밤의 열대우림이 얼마나 풍부한 표정을 지녔는지를. 검은 하늘을 촘촘하게 채운 별들도,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서늘한 밤의 공기도, 짝을 찾는 벌레들의 가냘픈 울음소리도, 무성한 잎들을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의 노래도, 나뭇가지 위깃털 사이 - P246
로 부리를 파묻고 잠든 투칸도, 랜턴 불빛에 형광색으로 빛나는 작은 스콜피온도, 먹이를 노리며 나뭇잎 위에 앉아있는 붉은 눈의 독개구리도, 저마다의 존재감을 내뿜으면서도 조화로운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무수한 생명을 거두어안은 밤의 숲은 마법의 성 같았다. 깊고 어두운 세계 안에는 잠든 생명과 깨어 있는 생명이 공존하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숲은 저 홀로 고요히 분주했다. 코스타리카의숲은 한 번 들어가면 나오고 싶지 않게 만드는 마력을 품은것 같았다. 태양의 시간에도, 달의 시간에도. - P247
사실 코르코바도는 트레일이 제한적이고 이정표도 없어서 "길이 없는 국립공원"으로 불리지만, 오는 사람마다 더, 더, 더 깊이 들어가며 동물들에게 다가간다면 결국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우리에게 점점 더 필요해지는 능력은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생명들을 상상하는 힘, 그리고 그들과 공존하는 길을 찾는 능력일 것이다. 이런 사실을 되새기지만 알고 있다. 가장 모순적인 존재는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지구를 위해서는 여행을 멈추는 게답이라는 걸 알면서도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내 안의 두 존재가 다투고 있다. 이 아름다운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지키고 싶은 이와 그에 반하는 행위를 지속하는 이가. 대지가내 몸을 옥죄기라도 하는 듯 두 발이 무거워진다. - P252
돌로미티를 제대로 누리는 최고의 방법은 산장에서의숙박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와 사진만 찍다가 내려간다면 ‘인생샷‘은 건질 수 있을지 몰라도 ‘인생의 명장면‘을만들기는 어렵다. 타오르던 태양이 기세를 잃고 봉우리 너머로 사라지고, 소란하던 등산객들이 떠난 자리에 침묵의그늘이 드리우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거대한 암봉이 촘촘한 어둠의 그물에 갇히고, 뭇별들이 하늘을 빼곡하게 수놓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느슨해진 어둠의 그물 사이로희미한 푸른빛이 스며드는 새벽의 서늘한 공기 속에 서 있어야 한다. 태양이 사라지는 시간과 다시 태양이 떠오르는시간, 그 사이에 몸을 묻은 채 시시각각 달라지는 산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볼 것. 그 고요한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할때, 주변의 모든 생명을 부드럽게 감싸는 어떤 신성한 기운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온다. 찰나일지언정 이런 위안을 얻기 위해 산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아닐까.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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