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소아가 오텔리아에게 써 보낸 메시지에서 어렴풋이 감시할 수 있듯이, 그는 사람하기 쉽지 않은 남자였을 것이다. 연애가 서툴고 늘 외로움을 체화하며 살아가던 남자. 글을 쓰기위해 지기 안으로 침잠해야만 했던 남자, 지나치게 술을 많이마시던 남자, ‘당신이 아니라면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라고는하지만 끝내 결혼이라는 제도를 부정한 남자. 그러니 당신이아니라면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라는 문장은 애초에 의미를상실한다. 사랑하는 남자의 우유부단함을 인내심으로 견디며기다리던 오필리아에게 먼저 이별을 고한 것도 페소아였는데, 하필이면 사후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 되는 바람에. 국민 시인의 유일했던 연인으로서 원치 않은 세간의 관심을오랜 세월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도 두 사람의 아름답고낭만적인 이야기만이 소비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사랑하는 남자로부터는 ‘너를 사랑하니까 그만 따줄게‘ 같은 말을 들어야했지만 정작 온 국민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아이러니, - P187
사랑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인 것일까. 폐소아의 메시지위에 새겨진, 오펠리아가 연애편지에 쓴 문장을 읽다 보면 그녀가 안쓰러워 화난 내 마음마저도 누그러지는 기분이다. "나는 당신의 입맞춤에 감사하며, 당신에게 많고 많은 포옹을 보내며, 항상 당신의 것~Agradeço muito muito os teus beijos e envio-te tambémmuitíssimo, e muitos chi-corações muito apertados, da tua, esempre muito tua. - 오펠리아 케이로스 - P190
오히려 나야말로 소설 『위대한 개츠비, 의 첫 문장을 마음에 항상 새겨두기로 결심한다. "누구를 비판하고 싶어질 땐,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좋은 조건을 타고난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할 것을, 나는 항상 내가 거쳐온 길이복잡하다고만 생각해왔다. 지나고 보니 그것은, 아무리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해도, 분명히 감사해야 마땅할 특수한 환경이었다. 특히나 리스본에서 보낸 1년 동안 내가 느끼고 경험한 것들은 말이다. 처음으로 언어가 하나도 통하지 않는 경험, 첫 대서양, 첫 그을림, 첫 유럽, 첫 다인종 친구들, 그리고처음 느끼는 자유와 본능의 감각, 그 모든 것들이. - P200
환상을 안겨주는 것은 언제나 ‘일상‘ 의 장소들이었다. 여행을 가면 더더욱 그랬다. 현지의 주택가나 공원, 동네 서점에서머물다 보면 그 이전까지의 과거는 다 삭제된 채, 오래전부터그곳에 살고 있었고 그 장소들이 내 삶의 일부였다는 작각에빠진다. 나는 내가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 낯설음 속의 감미로움을 즐긴다. 그와 반대로 관광 명소에 가면 내가 외국인 관광객이라는 실감만 더 강하게 느낄 뿐이다. 어쩌면 떠나은 곳에그대로 벗어두고 오고 싶었던 그런 본래의 모습 말이다. - P202
편애하는 보사노바에서 특히 그렇지만 포르투갈어로 쓰인 노래 가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아마도 사우다지saudade‘가 아닐까 싶다. 사우다지는 포르투갈 사람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정서인데 한 나라 고유의 특성이 대개 다른 나라언어로 명료하게 번역되기 힘들 듯이, 사우다지도 딱 떨어지게 옮길 수 있는 단어가 없다. 그리움, 향수. 애수, 추억, 갈망. 이 모든 것을 합한 그 무엇. 누군가가 내 곁을 떠나고 나서 느끼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그리움뿐만이 아니라, 내 안에 머무는, 계속 곱씹게 되는 감미로운 사랑의 감정과 그 안에서 우러나는 달콤한 슬픔, 상실의 고통은 힘겹겠지만 사우다지와 함께라면 먹먹해진 마음은 부드럽게 어루만져질 것이다. - P206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통상적인 안내 멘트가 아니었다. 그가진심 으 로 매번 손님들에게 절실하게 ‘호소‘를 해왔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카메라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만반의 준비를 하던 우리 모두가 무안하고 미안해졌다. ‘숙명‘을 뜻하는 라틴어인 ‘fatum 에서 유래한 파두, 마이크 하나없이 생목으로 숙명의 고뇌를 승화시킨 애절한 노래를 듣는다. 는 것은 아마도 그런 것이겠다. 그의 긴 당부가 끝나자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침을 꿀꺽 삼키고 조용히 무대에 집중한다. 이윽고 우수에 젖은 기타 선율이 연주되기 시작하고, - P207
파디스타의 감정에 듣는 사람도 휘말려서 마음이 붕 뜬다. 가사를 이해하는 못 하는 일단 들어보면 저절로 이해되는 감정이 있다. 곡 하나하나가 인생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것만같다. 말미에는 번뇌를 받아들이며 사는 인간의 강인함이 물씬 느껴지며 얹했던 속이 뻥 뚫리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파두를 제대로 부르고 표현하려면 어느 정도의 인생 경험과 연륜이 필요하다는 말은 일리가 있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이깊은 침묵 속에서 생생하게 듣는 파두에 울컥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 P209
우리 가게의 방식은 우리가 정한다. 손님에게 기본적으로절절하게 대하지만 불필요하게 숙이고 들어가거나 맞출 필요까지는 없다. 우리에게는 돈벌이보다 소중한 다른 가치가 있다. 그 소중한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자부심을 지켜나가고 싶다. 이런 완고함을 가진 가게들에 속수무책으로 매료되는 것은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정말이지, 그날 밤 나를 가장 설레게 하고 그 뒤로도 여운을 남겨준 한 순간은 브루노 코스타가 우리에게 파두 음악을 듣는 법‘에 대해 울컥한 목소리로훈계해줄 때였다. 사실 그는 얼마나 이 말이 하기 싫었을까. 대체 언제쯤이면 이 얘기를 하지 않아도 될지, 아니 그런 날은 이제 다시는 오지 않는 게 아닐지, 그러니 이런 고집을 지켜나가는 것이 부질없지는 않을지, 나름대로 얼마나 고민을 숱하게 했을까. - P210
우리가 만들어내는 이 분위기를 그 무엇보다 소중히 하자. 지금 이 순간을 사진이나 온라인이 아닌 우리의 마음과 기억속에만 남기자.
진실은 심금을 울린다. 그 덕분에 오늘 밤 파레이리냐 다 알파마라는 작은 공간에 함께 있던 우리 모두는 마치 해변가 모닥불을 동그랗게 둘러싸고 앉은 어린아이들처럼, 그 순간의기쁨을 함께할 수 있었다. 파두 공연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그래서 단 한 장도 없다. - P230
결과적으로 내가 간직하게 된 그의 유품은 아주 오래전에 그가 색연필로 그린 풍경화 한 점과 그의 인감도장이다. 마지막 뒷정리를 하는 와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한때는그가 꼭 손에 쥐고 있어야 했던 물건이지만, 지금 내가 둘러보고 있는 누군가의 학위 수료증이나 자격증처럼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엄마의 유품으로는 여성용 롤렉스 시계를 가지고 있다. 리스본에서 살 무렵, 여름방학을 맞이해서 자동차로 세 식구가 유럽 여행을 다닐 때 아빠는 베니스에서 엄마에게 그 타원형 가죽끈 시계를 선물했다. 지극한 사랑의 징표를받은 엄마의 눈빛을 여전히 기억한다. 나도 곁에서 더불어 설레었으니까. 그날 이후로 엄마는 그 시계를 몸의 일부처럼 20년 넘게 차고 다녔다. 그사이 두어 번 가죽끈을 교체해야만 했다. 암 투병 중에 엄마가 그 시계를 풀어 내게 몰래 남겨주었을때, 나는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마쳤음을 알았다. - P231
리스본에는 저마다 역사를 지닌 아름다운 성당이 많지만따터 시간을 내서 제대로 본 곳은 없다. 다만 에스트렐라 대성만은 꼭 한번 들르고 싶었다. 별‘이라는 뜻을 가진 ‘Estrela‘ 다는 단어가 사랑스럽기도 하거니와 성당 전체가 하얀색 외관인 것도 좋다. 하물며 바로 앞에는 에스트렐라 정원 Jarlim diasHistrea )이 있다. 툭툭을 타고 가는 길에 새하얀 둥근 돔과 한 쌍의 종탑이 멀리서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리는 어느새 우아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성당 앞에 도달한다. - P231
우리는 트램 위에올라타고, 자리에 앉아 창밖 세상을 구경한다. 그러다가 저마다 자신의 때가 되면 트램에서 내린다. 누구는 더 먼저 내리고 누군가는 더 나중에 내린다. 다만 모두가 언젠가는, 한 사람도빠짐없이 내려야만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를테면 약속 같은 것이다. - P237
어쩌면 그가 이주민이라는이 영향을 미친 것일지도 모른다. 몸놀림이 빠른 그는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에 들어오는 손님을 결코 기다리게 하지 않는다. 낯선 억양이지만 힘차고 또.. 한 목소리로 손님이 원하는 주스와 커피 종류를 묻는다. 부 스테이션의 음식이 떨어지면 재빨리 셰프에게 요청해서 새것으로 채워다 놓는다. 식사 중인 손님들이 언제고 도움을 - P241
요청할지 모르니 테이블들을 주의 깊게 살피지만, 시선 처리가 부담스럽지 않게끔 조심하고, 먼저 손님에게 다가가 친절함을 내세우진 않는다. 손님이 식사를 마치고 나갈 때는 뒤따라가서 끝까지 배웅하며 다정한 인사를 건넨다. 그러고는 이내 돌아와, 그들이 사용한 테이블을 빈틈없이 말끔히 정리한다.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일을 하느냐에서 격차를 깨닫고 나면, 세상엔 ‘단순 업무‘란 사실상 없고, 타인의 일하는모습에서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직원이 성의를 다해 능수능란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매일아침 내가 누리던 사사로운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나흘 밤을 묵고 체크아웃을 하는 마지막 날, 그는 평소에 식사를마친 나를 배웅하면서 항상 그 특유의 억양으로 "땡큐, 맴"이라고 인사를 했더랬다. 한데 오늘은 인사말이 조금 길다. "땡큐 베리 머치, 맴, 씨 유 투모로." 그 말을 듣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너무나 당연하다. 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활짝 미소 지으며 내일 또 보자니, 곧이곧대로 오늘 리스본을 떠난다고 말해줄까 잠시 생각도해보았지만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다. "땡큐, 씨 유 투모로" - P242
순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있는 장소로 나를 데려가고 싶었다. 그 바람대로 나는 리스본에서 겸허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 반년에 걸쳐 인간이 가진썩 아름답지 못한 일련의 모습들을 목격하며 차갑게 굳어가던 내 심장은 그들이 나눠준 온기 덕분에 조금씩 부드럽게 풀려갔다. 환멸이 자칫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려던 내 마음을 그들이 제자리로 되돌려놔 주었다. 소박하고 천성이 고운 리스본 사람들의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의가 고통에 둔감해지고 싶어 일부러 죽어가던 나의 감각을 다시 조용히 깨어나게 해주었다. 나를 위로해주려고 애쓰지도 않았지만, 지나고 보니 크나큰 위안이 되어준 것이다. 그간의 일기에 등장한사람들도, 등장하지 않은 사람들도 여럿이다. - P243
가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나는 매년 6월이 되면연보라색 자카란다 꽃나무가 흐드러지게 만개한 모습이 보고싶어질 것이다. 여름날이 오면 긴초 해변의 그르렁대는 파도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어질 것이다. 9월이 되면 올리브나무밭에서 윤기 나는 검정색 올리브를 손수 수확하는 기쁨을 꿈꿀 것이다. 날이 추워지면 한겨울에도 온기를 나누어주던 리스본의 눈부신 행살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행여 마음이 지치기라도 하면 선량한 리스본 사람들이 내게 다정하게대해준 순간들을 떠올리며 힘을 낼 것이다. - P246
리스본에서 보낸 시간들은 통제할 수 없는 그 당연한 사실을 우아하게 직시하고 받아들이기 위함이었다. 그래야만 나는그들을 마음껏 그리워할 수가 있고, 그래야만 내가 그들을 놓아주고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을 테니까. 소멸과생성, 끝과 시작은 하나의 몸이고, 끝이 있기에 우리는 순간순간의 찬란함을 한것 껴안을 수 있다. 혹은 나는 모종의 ‘의미‘ 를 찾아 헤맸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부모 자식 관계로 만나게된 의미, 죽음이라는 결론이 이미 나와 있는데도 삶을 한껏 껴안고 가야 하는 의미, 상대와 나를 용서하는 일의 의미 .… 그를 찾기 위해 나는 차분히 많은 것들을 응시하고, 소화시키고, 어떤 형식으로든 이야기를 천천히 시작해야만 했다. 지금의나는 한결 자유롭고 가벼운 마음이다. 스스로 확신하게 된 몇가지 덕분이기도 하다. - P2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