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결심이 철학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왔다. 이제 철학은 우주에 대해 불확실한 추측을 하는 학문이 아니다. 철학은 삶,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한 것이고, 어떻게 하면 이 삶을 최대한 잘 살아내는냐에 관한 것이다. 철학은 실용적이다. 필수적이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처음으로 철학을 하늘에서 끌어내려 마을에 정착시켰고, 철학을 사람들의 집 안으로 불러들였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철학자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추종자를 모으는 데 관심이 없었다 제자들이 다른 철학자에대해 물으면 소크라테스는 기꺼이 알려 주었다). 그 어떤 지식이나 이론또는 신조도 남기지 않았다. 두꺼운 책을 출판하지도 않았다. 사실 단 한 글자도 쓴 적이 없다. 오늘날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아는것은 주로 그의 제자 플라톤이 남긴 얼마 안 되는 고대의 자료 덕분이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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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시인선 135
이원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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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는 아래로 깊고 나는 뒤로 깊다

                                     이원하

   뒤로 물러섭니다

   약속 시간에 늦었지만

   나를 믿고 뒤로 물러섭니다

   보이는 것은

   되돌리려는 마음뿐입니다

   뒤에서 해결하려는 버릇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요

   지난 일들은 쉽게 잊혀도

   미래는 안 잊히는 데에서

   왔을까요

   가방을 뒤로 메고

   신발도 옷 입은 뒤에 신고

   발 맞추는 것도 뒤에서 맞추고

   약을 삼킬 때도 목을 뒤로 젖히고

   도대체 숨바꼭질도 아니고

   화도 내 보았지만

   화도 뒤에서 내고 있더군요

   아마 내가 보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바다는 아래로 깊고

   나는 뒤로 깊습니다

               시집[제주에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중에서

 

 

    바다 보러 가고 싶다.

    코로나 이전에 만났던 파스텔톤의 제주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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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슬픔과 기쁨 우리시대의 논리 19
정혜윤 지음 / 후마니타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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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맞아. 나는 차를 좋아했지.'

  그는 1995년에 쌍용자동차에 입사했다. 도장반에서 일했다. 그는 일을 좋아했다. 그는 맑은 날의 차와 흐린 날의 차, 여름날의 차와 겨울날의 차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차를 칠하는 날의 기온·습도가 차의 색깔에 미치는 영향도 알게 되었다.

  온도는 24도에 습도는 70퍼센트. 봄가을에는 그런 습도가 유지되니까 좋고, 안 좋은 계절은 여름하고 겨울. 여름은 온도가 너무 올라가서 신나가 빨리 증발해요. 자동차 신차 나오면 보면 알아요. 언제 만들었는지. 어느 것은 색이 매끈하고 어는 것은 안개 낀 것처럼 뿌옇고. 겨울은 반짝이고, 봄가을은 금방 칠한 것처럼 보이고, 여름에 은색은 얼룩이 있는 것 같고.

  그는 해고되었을 때 믿지 않았다. "저놈이 있어야 완벽한 차가 나온다." 그를 자랑스럽게 하던 칭찬들을 그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파업에 이틀 늦게 합류했다. '해고는 실수야! 뭔가 착오가 있었던 거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저기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해고는 착오가 아니었다. 그는 해고되었다.

  '설마 내가 정리해고를 당할라고?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내가? 저놈이 아니면 차가 완벽해질 수가 없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던 내가? 설마 아니겠지. 아니겠지.' 하고 계속 부서장에게 전화해 봤어요.

  "나는 차를 좋아하니 차와 함께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라고 그는 담담히 말했다. 그는 차를 몰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무거운 짐을 떨어내려는 듯 엑셀을 밟았다. 속도를 높였다. 무거움은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은 '조상님'들의 무덤 옆에서 며칠씩 자곤 했다. '왜 해고되었을까?' 그는 묻고 또 물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내가 대답을 구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돌아오는 답은 없더라고요. 단지 신이 날 선택 안 한 건지, 나에게 뭔가가 부족했었는지……. 질문이 나에게 와도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어요.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모든 것이 우연인가? 모든 것이 신의 장난인가? 그는 자신의 전 삶을 걸고서라도 대답을 찾아야 하는지, 체념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는 해고 후 택시 운전을 했다. 그렇지만 그 일을 오래 할 수는 없었다. 눈앞으로 하루에도 수백 대씩 쌍용 차가 지나갔기 때문이다. 택시 안의 룸미러로도 사이드미러로도 보였다. 그는 그 차들을 몇 년도에 만들었는지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특별히 애착을 가진 차는 이스타나와 무쏘였다. 그는 "이스타나가 나를 입사시켰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향수'라는 단어를 자주 썼다. 유치원생을 태우고 다니는 노란색 이스타나를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신나 냄새를 한 번 맡는 것만으로도 '향수'가 밀려왔다. 정혜윤【그의 슬픔과 기쁨 】 p12~14

  이미 읽기도 전부터 예상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부터 흔들릴 거는 짐작도 못해서 링에 오르자마자 가격 당한 린치에 휘청 거린다. 26명을 만나야 하는데 첫 번째 주자한테 벌써 너덜너덜해졌다.

  일 잘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앞에 '무조건'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될 만큼 일 잘하는 사람에 대한 나의 짝사랑은 무모하고 맹목적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한다는 것은 그 일을 좋아한다는 것이고, 그 일이 무엇이었든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매사에 신중하고 책임감이 있다는 것이라는 억지 논리를 스스로 가지고 있어서다. 그런데, 바뀌었다. 일 잘하는 사람은 많았다. 천성적으로 손이 재고 눈부시게 빠른 사람들은 도처에 포진해있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그를 존중하고, 닮으려 노력하다가 알게 되었다.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일을 잘하는 사람보다 그 일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일을 잘한다고 해서 모두 책임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을 즐기는 사람들만이 그 일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열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 일을 하는 얼굴이 빛나고 그 일을 대하는 몸의 자태는 아름다웠다. 처음엔 표나지 않다가 어느 순간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숨은 고수들이 있다. 세상에서 정하는 일의 종류는 중요하지 않다. 세상 사람들이 정하는 일의 가치는 더욱 중요하지 않다. 어느 자리, 어느 곳에서나 그런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008년 쌍용자동차 도장부에 근무하는 김대용 씨는 그런 사람이었다. 저만큼만 읽어도 그가 자기 일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즐겼는지 알 수 있어서 심장이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자동차 만들기의 마지막 공정인 '도장'에서 자부심으로 빛나던 그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해고'라는 웅덩이로 내쳐진 것이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도장부라는 부서도, 차가 여름의 색인지, 봄가을의 차인지도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김대용이라는 사람을. 또한 윤충렬, 박호민, 이현준, 박정만, 김정욱, 최기민, 김득중, 한윤수, 서맹섭, 이갑호, 정형구, 고동민, 이창근, 김정운, 김상구, 문기주, 복기성, 한상균, 김남오, 유제선, 박주헌, 염진영, 오석천, 김성진, 양형근. 그렇게 쌍용자동차 선도투 중 스물여섯 명의 사람을.

  그들은 단지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자신의 자리에 충실한 선량한 공장 사람들 중의 한 명에 불과했었다. 각각의 가정에서 자신을 부르는 이름이 있고, 집을 장만하기 위해 노동의 유일한 즐거움인 술자리도 참고, 조립라인의 단조롭고 기계화된 일상의 탈출을 꿈꾸면서도 익숙한 일과 월급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나이가 되기도 하는 세상의 평범한 구성원 중의 1인이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이름이 있다. 엄인섭, 황대원, 이윤형, 임무창, 김철강을 비롯한 쌍용 해고노동자 중 사망자는 서른에 이른다. 이름이 불린다는 것, 김춘수 시인이 우리에게 이미 알려주었다. '꽃'이 되는 것이라고. 이름을 알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내가 오래 좋아했던 차, 코란도 밴 290이 어떻게 세상의 도로로 나와서 그토록 멋지게 달리게 되었는지.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살면서 배신하지 않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매일 어떤 타협인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타협하면서 사는 우리는 어떤 선택이 배신인지 배신이 아닌지, 어떤 선택을 배신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기가 결코 쉽지 않다. p35

  대기업으로 분류되지는 않았지만 계열사를 몇 거느린 회사에서 노조활동을 몇 해했다. 주류였던 적도 있었고 비주류에 머문 적이 더 많았다고 생각하지만 다분히 주관적인 판단일 수도 있다. 꽤 오랫동안 하면서 가장 많이 시달린 루머는 '사 측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더라'였다. 그렇기에 정혜윤의 위문장은 여운이 길었다. 회사를 그만둔 지가 삼십 년이 다 되어가고 그 회사조차도 몇 번의 이름이 바뀌고 산산조각으로 공중분해되어 어디서 그 흔적을 찾아야 할지 모르게 시간이 지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랬어도 저 말을 들었을 때의 비참함은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오래 곱씹어 보았다. 과연 옳은 선택들이었을까. 거대 집단에 맞서는 개인에게 도대체 옳은 선택이 있기나 한 걸까. 누군가를 담보로 잡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소수를 포기하고 다수를 향한 옳은 선택은 소수를 배신하는 선택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스스로도 타협하면서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고 싶었던 마음이 만들어 낸 배신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만들어 낸 실적들 보다 우리가 옳은 선택이라 믿었던 선택지 때문에 고통받았을 이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편치 않다. 모두를 위한 좋은 선택은 없다는 말은 위로를 주지 않는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만지던 기계 속 부품처럼 교환되고 버려진 것이다.

  나는 단지 선량하게 묵묵하게 자기 일을 사랑하고 자신의 구성원들 속에서 평온하게 사는 사람들을 좀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건가 싶을 때가 있다. 평범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하고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게 만들어버리는 사회의 시스템은 우리를 모두 가해자로 만들어가고 있다. 진짜 가해자들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데.

  우리 모친은 나한테 그러죠. "이 미친놈아, 그냥 처음에 가만히 있지 뭐가 잘났다고 나섰냐." '산 자였을 때 가만히 있지.' 그 말이죠. 집사람 보기 미안해서 하는 말이죠. 내가 하지 말란다고 안 할 것도 아니고, 그런데 이걸 그만두고, 이 해고를 인정하고 다른 일을 찾아서 한다? 그럼 나는 돌아 버릴 것 같아요. 그래서 하는 거예요. 내가 그때 그렇게 후배들이랑 평택 공장으로 파업 참여하러 올라온 게 그렇게 잘못된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나는 너무 억울한데 그렇다고 법이 보호해 주는 것도 아니고, 모든 변호사들이 그랬어요. 법대로 하면 복귀된다고. 회사가 잘못한 게 밝혀지고 있는데 잘못한 놈이 해고시켜 놓고, 그걸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반성의 기미가 없다고 하면 뭘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더 처절해지는 거예요. 내가 뭘 잘못한 것인가? 그걸 알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내가 미친놈인가 알고 싶어서.

  그렇지만 대한문에 있으면서 인생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2009년에는 다 우리 보고 잘못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이게 쌍차만의 문제가 아니더라. 우리 가족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그런 말 하는 분들이 많아요. 나도 그렇게 살지 않았거든요. 누가 해고돼도 상관 안 했거든요. 그런데 내가 해고당하고 보니 억울해죽겠는데 많은 분들이 자기 일처럼 여겨 주는 것 보면서 '난 세상을 잘못 살았구나.' 하고 배웠어요. 지금은 미사 때문에 버티는 것 같아요. 수녀님들이나 신부님이나 신도들, 굳이 매일 저렇게 할 필요 없잖아요. 이번 달에 비 얼마나 많이 왔어요? 폭우 맞고 기도하더라고요.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 그렇게 하더라고요. 자기 일도 아닌데 그러는 것 보고 내가 세상을 잘못 살았다고 생각했어요.

  천주교 정의 구현 사제단의 미사는 2013년 11월 18일까지 225일간 계속되었다. 마지막 미사 때 대한문에 걸린 플래카드엔 이런 구절이 써있었다.

  "사람아 희망이 되어라"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라는 《로마서》5장 5절의 말씀이 써있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능한 사제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능력 없는 신자들을 기꺼이 동료로 맞아준, 그래서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쌍용자동차 동지들께 감사합니다." p210,211

  2021년이 며칠 안 남은 지금의 쌍차는 어떨까?

  우리의 무관심으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그의 슬픔과 기쁨' 속의 그들의 삶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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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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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은 뒤로 '어린이'라는 입버릇과 생각버릇을 갖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린이를 어린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도 좋다. 아이와 어린이는 다른 존재인 것 같다. 말해보면 그렇다. 어린이가 있다, 하고 말하면 거기 있는 어린이가 조금 더 또렷하게 보이고 그가 나와 조금 더 관련된 존재로 느껴진다. 이 차이는 뭘까. 어린 사람이었던 적이 나도 있으니까. 그래서일까. 모든 이가 아이를 둔 부모일 수는 없지만 누구나 어린 사람이었던 적은 있기 때문일까. 그런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인지 혹은 조카들이 자라는 과정을 보고 듣기 때문인지, 창작물에서든 현실에서든 어린이가 곤란을 겪거나 학대당하는 것을 견디기 어렵다. 온라인 뉴스를 눌러 보기가 두렵고, 드라마나 영화에 어린이가 등장하면 일단 긴장한다.

   하지만 나는 매 맞는 형제가 등장하는 「소년」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 이라는 단편을 쓴 적이 있고 다시 매 맞는 형제가 등장하는 『야만적인 앨리스씨』라는 장편을 쓴 적이 있다. 왜 소년들인가, 그 소설들을 그런 생각을 한 날도 있다. 화자를 소녀로 두었을 때 가능해질 이야기들이 당시 내게는 가능하지 않았던 거라고 지금은 생각하고 있다. 당시에 나는 그 이야기를 서술하는 나를 일단은 보호하고 싶었을 테니까. 지금의 나는 일부러 읽지는 못할 이야기를 썼다는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소년」은 화자를 끊임없이 소년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데 기대고 썼고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내가 지금 문장 하나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며 쌓은 문장들의 모양에 기대어 썼다. 어찌되었든 그 이야기들을 끝까지 썼다는 점이 중요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성장기에 내가 방치한 동생들을 향해 해야 할 이야기가 내게는 있었으니까.

   잘못을 저지르면 매우 엄하게 혼났기 때문에 어릴 적 나는 내 부모를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잘못'의 영역에 제한이나 기준이 딱히 없었으며 체벌의 강도나 형태가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는 점은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다. 나의 부모는 불운하고 서글픈 데다가 늘 누군가를 향한 격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감정의 골이 깊은 사람들이기도 했고 나는 성장기 내내,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한동안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부모 중 누군가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그들 각자가 스스로를 연민하는 강도로 그들을 연민하느라고 마음을 다해 애를 쓰고 그들의 기분에 따라 절망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면서, 그들의 감정을 내 감정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열렬히 부모를 바라보느라고 나는 어린 동생들을 살피지 못했다. 시간을 돌려 바꿔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면 일단 그 시기로 돌아가 동생들을 돌보고 싶다. 나도 어렸으니까, 그 돌봄은 내 몫도 책임도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하질 않고, 그게 사실도 아닐 것이다. 나는 동생들이 겪은 시간에 책임을 느낀다. 지금의 동생들이라기보다는 당시 내 어린 동생들에게.

   우리 자매의 부모는 여전히 불행했고 불운해 당신들의 감정과 삶에 가족 구성원이 모두 휩쓸리기를 바라고 있으며 마땅히 그렇게 되는 것을 화목이고 친밀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나는 그런 시도들에 동의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친밀한 관계가 아니다. 내가 내 부모와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씁쓸하거나 놀랍다는 듯한 얼굴로 그래도 부모인데 가족인데, 하고 말한다.

   그래요.

   그게 무슨 말인지 나도 압니다.

   동거인은 요즘 뉴스를 보다가 자꾸 한숨을 쉰다.

   또 죽었어.

   또.

   또 죽였어.

   동거인과 나는 요즘 부모와 자식 간, 어른과 어린이의 관계를 두고 자주 대화를 나눈다. 자식을 벗겨 집 밖으로 쫓아내는 부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동거인은 시장 근처에서 자랐는데 자기가 사는 집 근처에도 발가벗겨진 채 집밖에 서 있곤 했던 친구가 있었다고 했다.

   낮에 같이 놀았는데 밤에 그러고 있어서 못 본 척했어.

   그래.

   애가 벗고 있어서.

   그런데 당시 어른들은 왜 자식을 왜 벗겨서 내쫓곤 했을까.

   멀리 가지 말라고, 라는 것이 동거인의 의견이었고 나는 그게 전권의 확인이라고 생각했다. 멀리 가지도 못하도록 벗긴 몸을 바깥에 전시하는 체벌 행위는 그 몸이 자기 것이라는 주장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부모의 매질엔 늘 그런 근거가 있다. 자식(의 몸)에 대한 권리. 지금까지 내가 겪은 한국사회는 관습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인정하고 있다. p49~53

   나는 어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이유를 곰곰 생각해본 일은 드물다. 생각이라기보다는 깊게 따지고 싶지는 않은 감정의 영역이었으니까. 이 글을 쓰려고 동생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우리가 어린 시절 한때 어른들을 기다린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른들이 우리를 발견하기를 바라며 견딘 밤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우리가 마당에서 골목에서 놀이터에서 등교하거나 하교하는 길에 시장길에서 늘 어른들을 보곤 했으니까 이웃에 늘 어른들이 있으니까, 그들 중 누군가는 이런 밤에 문을 두드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줄 것이다. 그런 것을 바란 밤이 우리에게 있었으나 우리는 그런 어른을 만나지 못했다. 나의 어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지금 어린이의 어른들은 다를 것이다. 어른들은 이웃에서 어린이가 울면 주의를 기울이고, 어린이가 맞고 있지는 않은지,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지는 않은지 걱정할 것이고, 주저 없이 그의 부모를 의심할 것이고, 경찰에 신고할 것이고, 최소한 공권력이 도착하는 순간까지 그 집 기척에 귀를 곤두세울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는 어른이 이웃에 살고 있다는 메세지가 되어줄 것이고 그다음을 궁금하게 여기는 어른이 되어줄 것이다. 폭력으로부터 분리된 어린이에게는 그 뒤에 갈 곳이 있어야 하니까, 우리의 구조에 그게 마련되어 있는지를 묻는 어른이 되어줄 것이다. p59

   황정은 산문집 일기중에서

    또 세살짜리 아이가 맞아서 죽었다.

   의붓 엄마의 소행이라한다. 그럼, 아빠는 대체 어디 있었을까? 엄마는 의붓엄마이면 그런 친 아빠는???

   아이는 죽고, 이런 일들은 멈추지 않는다. 프레임은 나쁜 엄마로만 한정 된다. 그러는 한 이런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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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창비시선 453
이산하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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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탑

                   이산하

   절로 가는 오솔길

   가파른 모퉁이마다

   돌탑들이 쌓여 있다.

   나도 빌어볼 게 많아

   돌 하나 얹고 싶지만

   하나 더 얹으면

   금방 무너질 것 같아

   차마 얹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

   나를 하나 더 탐하는 게

   이렇게 어렵구나.

                     시집 [악의 평범성]중에서

    80년 5월 5일 자 소인이 찍힌 엽서가 한 장 있다. 김춘수의 시, 꽃이 적혀있고 작은 풀꽃이 스카치테이프로 붙어서 바래진 23년 된 엽서. 그저 엽서엔 시 한 편과 꽃이 전부이지만 아직도 시를 옮겨 적던 친구의 마음과 내 이름, 친구의 이름, 그리고 10원짜리 엽서에 추가로 붙인 5원짜리 우표. 그렇게 그해 5월은 내게 왔다. 세상은 80년 서울의 봄에서 점차 경직되고 대학생들은 데모를 다시 시작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의 감성에 빠져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은 소녀였다. 그 친구는 광주 '전대사대 부고' 학생이었고 나는 '기본 수학의 정석'을 끼고 다니는 '여공' 이었다. 그저 세상의 많고 많은 풀 한 포기, 잡초에 불과한 이름 '여공' 쉽게 밟아 버려도 아무런 죄책감조차 들지 않는 바로 그 이름의 '공순이' 그 시절의 나였다. 하지만 내 이름을 불러주는 친구 있어 꽃이었다.

    세상에 관심을 갖기에는 너무 어렸고, 너무 고민할게 많았고, 너무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은 시절이었다. 둘 다 궁극적으로 되고 싶었던 대학생들은 날마다 데모만 했지만, 미성년의 여공인 나의 눈에는 그것조차도 부럽고 낭만적인 대학생만의 빛나는 특권이었다. 그저 당장 계속하고 싶은 공부의 꿈을 접어야 하는 현실에 절망하고, 어둡게 내 안으로 침잠하느라 세상의 봄도 현기증으로 어질어질했던 것이다. 늘 불평으로 닦달하는 고참 언니에 치여서 12시간의 작업 후 퇴근은 녹초로 만들었고, 책을 펴면 졸고 앉아있는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는 날들이기도 했다. 유일한 끈이 있다면 친구들과의 편지가 전부이던 시절이었다.

    코딱지만 한 작은방에 더 작은 트랜지스터라디오로 들은 뉴스, 간첩들의 사주에 의한 폭도들이 광주를 장악했다 한다. 놀래서 언니네 집으로 tv를 보러 뛰어갔더니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광주에 빨갱이가 쳐들어가서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 빨갱이들이 전라도 사람들을 붙들고, 경상도 군인이 여고생들을 강간하고, 임신부를 총으로 쏴 죽이고, 전라도 사람이면 닥치는 대로 칼로 찔러 죽이더라는 유언비어를 유포해서, 흥분한 시민들이 다 들고일어나서 파출소를 불지르고, 군인들을 찔러 죽인다는 얘기를 전하는 것이다. 듣느니 끔찍하고도 믿기지 않은 얘기들뿐이었다. 혼란의 와중에 tv는 광주 엠비시 건물이 불타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세상에 맙소사! 사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별밤 DJ 소수옥이 있는 광주 MBC, 거기 내 엽서도 예쁜 엽서로 남아있는데, 그 건물이 불타고 있었다. 아! 광주에 있는 내 친구들 다 여고생인데... 광주 인근이 우리 집인데 그럼 엄마랑 동생은... 전화국으로 시외전화를 하러 뛰어갔지만 전화는 불통이었다. 별일 없는지 전보라도 쳐봤지만 소식을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이것은 난리가 확실했다. 광주는 고립무원의 전쟁터가 되어있는데, 그저 뉴스에 귀를 뺏기고 눈을 박을 뿐, 그 흉흉한 소식들에 애달아 하며 그저 가족이 무사하기만을 바라는 심정으로 아주 긴 며칠을 보냈다. 휴~ 안도의 소식, 계엄군이 시민을 가장한 깡패들과 폭도들을 진압해서 광주는 평화를 되찾았고 바람대로 주변 모두 무사했다. 내 주변에는 다행히 단 한 명의 깡패도, 단 한 명의 빨갱이도 없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아무도 죽지 않았고, 아무도 끌려가지 않았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다시 세상도, 나도, 일상 속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제 누구도 드러내놓고 광주를 얘기하지 않았고 나 자신도 얘기하지 못했다. 그 단절로 내 고향은 내 속에 서럽게 잠겨있어야 했고, 그저 광주가 고향이라는 것 때문에 덩달아 폭도라도 되는듯한 시선을 참아내야 했다. 직장에서는 동료들조차 작은 실수라도 하면 깽깽이가 그렇지 였고, 뭘 좀 잘하면 쩌, 저! 지독한 전라도 것이 되었다.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은 사기꾼 기질이 있는 것이었고, 싸움을 아주 잘 할 것이고, 상종 못할 지독한 악질이라는 동의어였다. 광주사태의 영향은 나에게 그렇게 왔다. 상사의 시선을 받다가도 고향이 어디냐는 물음에 답을 하고 나면 나는 갑자기 전염병 환자 취급을 받아야 했다. 자연스럽게 원래도 별로 쓰지 않는 사투리를, 혹여 쓸까 봐 조심하게 됐고 의식적으로 안 쓰게 되었다. 누구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선입견의 손해를 보지 말아야겠다는 영악한 계산이 깔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회사는 전라도 사람은 아예 입사도 안 시킨다는 둥, 승진을 꿈도 꿀 수 없다는 둥의 얘기를 새로운 소식인 양 비아냥 거리는 고참 선배의 잔소리에도 나는 언론이 말하는 것들을 믿었다. 그리고 그런 시선만을 빼고 광주사태를 빠르게 잊어갔다.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 다니고, 회사에서 외에는 밥을 먹지 않아도, 여전히 학원 다닐 형편은 안됐고 책 사 볼 돈도 모자라서, 책방에서 눈치 받으며 서서 책을 읽는 가난에 스스로도 지쳐가고 있었다. 공부를 해서 대학을 가리라던 꿈은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는데 가정 형편도 점점 나빠져만 가고 있었다. 그래도 광주는 친구들이 있고, 무등산이 있고, 눈을 감아도 훤하게 떠오르는 충장로의 길들이 있는 그리운 곳이었다. 언제나 가고 싶지만 지금은 갈 수 없는 곳이 바로 광주였다. 왜? 아니겠는가! 광주는 내게 고향이었고 거기서 꿈꾸던 길들이 있었는데. 하지만 다음 해 추석에야 내려간 광주는 달라졌다. 내가 그리던 광주가 더 이상 아니었다.

    2003년 5월에 망월동에 다녀와서 쓴 글의 시작 부분이다.

    어제, 전두환 씨가 사망했다는 기사를 본 이후, 망월동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산하 시인의 [돌탑], '차마 얹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나를 하나 더 탐하는 게/ 이렇게 어렵구나.'

    자신을 위해서는 돌 하나 보태 얹기도 저어하는 우리, 이 땅의 모든 우리들에게 존경을 보낸다.

    잘 가라, 가서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는 그들을 만나보라. 이런 인사도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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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4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28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Falstaff 2021-11-24 1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을, 모레 읽을 거라서 서재에 들어와보았습니다.
본문이 시와 견줄 수 없이 무겁군요. 그땐 그런 시절이었지요.
잘 읽었습니다.

2021-11-28 15:26   좋아요 0 | URL
이제 시집을 읽으셨겠군요.
시집도, 시인의 삶도 죽은 그와 무관하지 않아서... 무겁게 되어버렸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