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창비시선 453
이산하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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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탑

                   이산하

   절로 가는 오솔길

   가파른 모퉁이마다

   돌탑들이 쌓여 있다.

   나도 빌어볼 게 많아

   돌 하나 얹고 싶지만

   하나 더 얹으면

   금방 무너질 것 같아

   차마 얹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

   나를 하나 더 탐하는 게

   이렇게 어렵구나.

                     시집 [악의 평범성]중에서

    80년 5월 5일 자 소인이 찍힌 엽서가 한 장 있다. 김춘수의 시, 꽃이 적혀있고 작은 풀꽃이 스카치테이프로 붙어서 바래진 23년 된 엽서. 그저 엽서엔 시 한 편과 꽃이 전부이지만 아직도 시를 옮겨 적던 친구의 마음과 내 이름, 친구의 이름, 그리고 10원짜리 엽서에 추가로 붙인 5원짜리 우표. 그렇게 그해 5월은 내게 왔다. 세상은 80년 서울의 봄에서 점차 경직되고 대학생들은 데모를 다시 시작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의 감성에 빠져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은 소녀였다. 그 친구는 광주 '전대사대 부고' 학생이었고 나는 '기본 수학의 정석'을 끼고 다니는 '여공' 이었다. 그저 세상의 많고 많은 풀 한 포기, 잡초에 불과한 이름 '여공' 쉽게 밟아 버려도 아무런 죄책감조차 들지 않는 바로 그 이름의 '공순이' 그 시절의 나였다. 하지만 내 이름을 불러주는 친구 있어 꽃이었다.

    세상에 관심을 갖기에는 너무 어렸고, 너무 고민할게 많았고, 너무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은 시절이었다. 둘 다 궁극적으로 되고 싶었던 대학생들은 날마다 데모만 했지만, 미성년의 여공인 나의 눈에는 그것조차도 부럽고 낭만적인 대학생만의 빛나는 특권이었다. 그저 당장 계속하고 싶은 공부의 꿈을 접어야 하는 현실에 절망하고, 어둡게 내 안으로 침잠하느라 세상의 봄도 현기증으로 어질어질했던 것이다. 늘 불평으로 닦달하는 고참 언니에 치여서 12시간의 작업 후 퇴근은 녹초로 만들었고, 책을 펴면 졸고 앉아있는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는 날들이기도 했다. 유일한 끈이 있다면 친구들과의 편지가 전부이던 시절이었다.

    코딱지만 한 작은방에 더 작은 트랜지스터라디오로 들은 뉴스, 간첩들의 사주에 의한 폭도들이 광주를 장악했다 한다. 놀래서 언니네 집으로 tv를 보러 뛰어갔더니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광주에 빨갱이가 쳐들어가서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 빨갱이들이 전라도 사람들을 붙들고, 경상도 군인이 여고생들을 강간하고, 임신부를 총으로 쏴 죽이고, 전라도 사람이면 닥치는 대로 칼로 찔러 죽이더라는 유언비어를 유포해서, 흥분한 시민들이 다 들고일어나서 파출소를 불지르고, 군인들을 찔러 죽인다는 얘기를 전하는 것이다. 듣느니 끔찍하고도 믿기지 않은 얘기들뿐이었다. 혼란의 와중에 tv는 광주 엠비시 건물이 불타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세상에 맙소사! 사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별밤 DJ 소수옥이 있는 광주 MBC, 거기 내 엽서도 예쁜 엽서로 남아있는데, 그 건물이 불타고 있었다. 아! 광주에 있는 내 친구들 다 여고생인데... 광주 인근이 우리 집인데 그럼 엄마랑 동생은... 전화국으로 시외전화를 하러 뛰어갔지만 전화는 불통이었다. 별일 없는지 전보라도 쳐봤지만 소식을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이것은 난리가 확실했다. 광주는 고립무원의 전쟁터가 되어있는데, 그저 뉴스에 귀를 뺏기고 눈을 박을 뿐, 그 흉흉한 소식들에 애달아 하며 그저 가족이 무사하기만을 바라는 심정으로 아주 긴 며칠을 보냈다. 휴~ 안도의 소식, 계엄군이 시민을 가장한 깡패들과 폭도들을 진압해서 광주는 평화를 되찾았고 바람대로 주변 모두 무사했다. 내 주변에는 다행히 단 한 명의 깡패도, 단 한 명의 빨갱이도 없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아무도 죽지 않았고, 아무도 끌려가지 않았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다시 세상도, 나도, 일상 속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제 누구도 드러내놓고 광주를 얘기하지 않았고 나 자신도 얘기하지 못했다. 그 단절로 내 고향은 내 속에 서럽게 잠겨있어야 했고, 그저 광주가 고향이라는 것 때문에 덩달아 폭도라도 되는듯한 시선을 참아내야 했다. 직장에서는 동료들조차 작은 실수라도 하면 깽깽이가 그렇지 였고, 뭘 좀 잘하면 쩌, 저! 지독한 전라도 것이 되었다.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은 사기꾼 기질이 있는 것이었고, 싸움을 아주 잘 할 것이고, 상종 못할 지독한 악질이라는 동의어였다. 광주사태의 영향은 나에게 그렇게 왔다. 상사의 시선을 받다가도 고향이 어디냐는 물음에 답을 하고 나면 나는 갑자기 전염병 환자 취급을 받아야 했다. 자연스럽게 원래도 별로 쓰지 않는 사투리를, 혹여 쓸까 봐 조심하게 됐고 의식적으로 안 쓰게 되었다. 누구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선입견의 손해를 보지 말아야겠다는 영악한 계산이 깔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회사는 전라도 사람은 아예 입사도 안 시킨다는 둥, 승진을 꿈도 꿀 수 없다는 둥의 얘기를 새로운 소식인 양 비아냥 거리는 고참 선배의 잔소리에도 나는 언론이 말하는 것들을 믿었다. 그리고 그런 시선만을 빼고 광주사태를 빠르게 잊어갔다.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 다니고, 회사에서 외에는 밥을 먹지 않아도, 여전히 학원 다닐 형편은 안됐고 책 사 볼 돈도 모자라서, 책방에서 눈치 받으며 서서 책을 읽는 가난에 스스로도 지쳐가고 있었다. 공부를 해서 대학을 가리라던 꿈은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는데 가정 형편도 점점 나빠져만 가고 있었다. 그래도 광주는 친구들이 있고, 무등산이 있고, 눈을 감아도 훤하게 떠오르는 충장로의 길들이 있는 그리운 곳이었다. 언제나 가고 싶지만 지금은 갈 수 없는 곳이 바로 광주였다. 왜? 아니겠는가! 광주는 내게 고향이었고 거기서 꿈꾸던 길들이 있었는데. 하지만 다음 해 추석에야 내려간 광주는 달라졌다. 내가 그리던 광주가 더 이상 아니었다.

    2003년 5월에 망월동에 다녀와서 쓴 글의 시작 부분이다.

    어제, 전두환 씨가 사망했다는 기사를 본 이후, 망월동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산하 시인의 [돌탑], '차마 얹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다./나를 하나 더 탐하는 게/ 이렇게 어렵구나.'

    자신을 위해서는 돌 하나 보태 얹기도 저어하는 우리, 이 땅의 모든 우리들에게 존경을 보낸다.

    잘 가라, 가서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는 그들을 만나보라. 이런 인사도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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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4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28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Falstaff 2021-11-24 1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을, 모레 읽을 거라서 서재에 들어와보았습니다.
본문이 시와 견줄 수 없이 무겁군요. 그땐 그런 시절이었지요.
잘 읽었습니다.

2021-11-28 15:26   좋아요 0 | URL
이제 시집을 읽으셨겠군요.
시집도, 시인의 삶도 죽은 그와 무관하지 않아서... 무겁게 되어버렸지요.
고맙습니다.
 
있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36
박소란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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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의 최선

                      박소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는다

   많이 힘들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위로를 건네기도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믿지 않는다

   슬픔을 응원하는 사람들

   힘을 내요 조금 더, 더, 더

   슬플 수 있도록

   웃는 사람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서로의 어깨에 묻은 머리카락 같은 걸 떼어주면서

   난롯가에 붙어 앉아 불을 쬔다

   연한 김이 서린 유리 벽, 바깥

   실금처럼 스케치된 겨울의 풍경

   뭐 해요 들어가지 않고?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건다면

   그냥요

   얼버무리고 말겠지만 슬픔은

   혼자 서 있다 코트를 여미고 빈 주머니를 더듬거리면서

   뒤돌아 먼 곳을 본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

   눈발이 나부끼자마자 사라지는

   空中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는데, 차고 투명한 손이

   인사하듯

   슬픔의 물크러진 뺨을 할퀴고 간다

                             시집 [있다]중에서

   "[현대문학] "핀" 시리즈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월간 [현대문학] 지면에 선보이고 이것을 다시 단행본 발간으로 이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에 선보이는 단행본들은 개별 작품임과 동시에 여섯 명이 '한 시리즈'로 큐레이션 된 것이다. 현대문학은 이 시리즈의 진지함이 '핀'이라는 단어의 섬세한 경쾌함과 아이러니하게 결합되기를 바란다.)"

   "박소란 시인의 [있다]는 '핀' 시리즈의 서른여섯 번째 책이고 '핀'시리즈의 부연 설명을 현대문학은 저렇게 덧붙여 놓았다. 가로의 폭이 약간은 짧은. 양장본이라서 이 짧음은 조금 더 비중을 차지해 많이 짧은 듯 여겨지기도 한다. 손에 잡히는 작은 사이즈이긴 하지만 두께감이 있다. 나는 시집의 양장본을 좋아하지 않는다. 항상 짐이 가득한 가방에 무게를 더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딱딱한 질감이 책과 나의 관계를 멀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박소란'이라는 이름이 아니었다면 결코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박소란'이었기에 아무 조건 없이 구매했는데 그가 아니었다면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확인하는 한 방법이었다. 일반적인 시집 보다 수록 시는 작아서 아쉬웠고 흑백의 정물수채화는 묘하게도 시와 겉도는 느낌이 강렬했다.

   그래도 '박.소.란' 읽고 나면 수런수런 한 슬픔의 기운들이 묻고 묻는 가운데 '혼자 서있다'. 슬그머니 '코트를 여미고 빈 주머니를 더듬거리면서' 십일월의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산은, 나무들은 생애 처음 만나는 듯한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담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문득 '아무도 없어요?' 소리치고 싶은 외로움에 치를 떠는 밤들, '슬픔의 물크러진 뺨이 할퀴고 간다'. '인사하듯' 시인에게 악수를 건네고 싶은 11월의 절반, '실금처럼 스케치된 겨울의 풍경'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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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떤 사람들에겐 결코 심상할 수 없고 평범할 수 없으며 지나가는 말이 될 수 없는 말. 그 말을 읽은 덕분에 나는 이 글을 썼다. 그리고 굳이 이 말을 하고 싶어서. 그 수치심은 당신의 몫이 아니라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아니라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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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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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황정은

   소설가의 첫 에세이를 읽다가 책을 자주 덮었다. 답답해서, 먹먹해서, 울컥해서……. 200쪽 남짓한 얇은 책을 일주일만에 덮는다.

   한 문장 한 문장, 더듬어가며 읽었다.

 

 

 

 

    이런 걸 말해도 되는 걸까. 이런 글을 쓰고 나면 작가로서, 록산 게이가 『헝거』에서 걱정한 것처럼 이 경험을 바탕으로 비좁게 소비되는 것은 아닐까. 이 글은 그러니까, 이것을 읽는 누군가에게는, 이전의 내 모든 소설과 앞으로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달라붙는 글이 되지는 않을까. 내 모든 글이 이 경험을 기반으로 읽히지는 않을까.

    그러나 지금 내 삶은 그 일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 말고도 다른 일들이 내 삶에 있었고 나는 삶과 읽기와 쓰기를 통해 조금씩 학습하면서 본의든 아니든 조금씩 변해왔다. 그 일은 내 전부가 될 수 없다. 거울은 여전히 내게 문제이지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나는 이제 내 얼굴의 흔을 흉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나를 탓하지 않는다. 그 일들을 내가 원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이렇게 된다고, 결국엔 무감해지고 괜찮아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 경우엔 만날 때마다 그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칱척들과의 왕래를 뒤늦게나마 중단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내가 겪은 어려움이 그것만은 아니었다는 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커서…… 바벨을 데드리프트로 하루에 백번씩 들었다 내리는 소설가로 살고 있다는 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내 키보드와 고양이와…… 만화책을 포함해 내가 여태 읽은 책들과 앞으로 읽을 책들에 대한 기대가 내게 도움이 되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록산 게이가 『헝거』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내 아름다운 체리 파이'를 만든느 것, 그런 즐거움을 내가 알며 그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과 살아가고 있다는 점, 그것을 내가 운 좋게 알고 있다는 점이 내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들을 잊은 적은 없다.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그 일을 말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문득 말하기 시작했고 말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그 일을 말하고 싶어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일을 얼마나 말하고 싶어했는가도.

                                             [일기 p179~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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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창비시선 453
이산하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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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먼 길

              이산하

  숟가락은 수직으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 같고

  젓가락은 마주 보는

  두 개의 백척간두 같다.

  숟가락이 밥 속으로

  수직으로 푹 찔러 들어가

  바닥을 긁고 나면

  비로소 젓가락은 수평을 이룬다.

  눈물이

  백척간두에서 한 발 내디딘다.

  나는 흩어진 밥알처럼

  바닥에 바싹 붙은 채

  숟가락과 밥그릇 사이가

  가장 먼 길임을 깨닫는다.

 

     그와 작별했다. 그는 윙크를 했고, 손하트를 날렸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최고라고 표시한 후 환하게 웃어주었다. 이런 과한 애정공세를 받아도 되나, 당혹할법하지만 당연하다는 듯 사랑을 가득 담은 눈웃음을 날려주고 한술 더 떠 하이파이브에 악수와 깔깔로 마무리한다. 한 달 전의 그는 가끔 웃어주는 것과 악수가 전부였는데 한 달이 지나니 저만큼 좋아졌는데 이제 헤어진다. 묵묵한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큼직한 손으로 세상에서 가장 어눌한 빠이빠이를 한다. 며칠 전 《악의 평범성》을 읽다가 마침 재활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가장 먼 길]을 읽어 주었다. "숟가락은 수직으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 같고/ 젓가락은 마주 보는/ 두 개의 백척간두 같다."는데 그저 순한 눈으로 빤히 쳐다본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울컥한다. 이 시를 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유다. 그는 밥을 먹지 못한다. 단지 영양을 취할 뿐이다. 콧줄로 경관식을 하는 그에게는 "숟가락과 밥그릇 사이가 가장 먼 길"이다. '그는 언제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었을까? ' 이곳 재활 병원으로 온 지가 일 년도 넘었으니 그 과거가 어디쯤이었을지를 짐작조차 못하겠다. 하루 중 스무 시간 가까이 누워만 지내는 그가 머물고 있는 세계는 어느 곳일까. "눈물이/ 백척간두에서 한 발 내디" 딛는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왔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밝은 표정으로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선배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연하게 느낀다. 왼손을 움직여 저런 동작들을 따라 한다. 점차 할 수 있는 동작들이 늘어날 것을 기대한다. 그는 말도 못 하고 경관식에 심한 편마비로 누워만 있기엔 너무나 젊다. 이제 육십을 갓 지났다. 무엇보다 본인의 의지와 재활치료와 운동의 병행이 결과를 보여줄 뿐이다. 물론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생겨버린 일, 꾸준한 재활만이 답이다. 그에게 기적처럼 "숟가락이" 입속으로 들어갈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나는 밥에 진심인 편이다. 따뜻한 밥상이 주는 다정을 알고 그 밥 한 상이 차려지기까지의 노고를 안다. 그래서 오래 누군가에게 밥을 차려주는 일을 즐거이 했고 내 수고로움으로 배고픈 이가 잠시나마 행복해지기를 기원했다. 세상에 가치 없는 일이란 없지만 가치를 알아주기보다는 무시하는 이가 더 많은 듯해 보이는 그 일도, 지금의 이 일도 먹고사는 것과 관계된 그저 그런 아무나 할 수 있는 단순한 일이다. 그러나 누가 뭐라든, 알아주든 말든 내가 조금 힘들지라도 밥 한 숟갈이라도 더 드시게 하는 일에 열심이다. 가장 근본적인 세 잘을 (잘 자고, 잘 먹고, 잘 싸는 것.) 도와주려 애쓰고, 그것이 내 일이다. 나의 소명이다.

     스스로 뭐든 하려 하고, 인지도 멀쩡하고 편마비만 있을 뿐이어서 일하는 입장에서는 별로 힘들 게 없는 젊은 친구를 좋아해야 하는데 마땅찮게 여기는 것은 단지 밥을 깨작거리기 때문이다. 개인 사물함 가득한 간식거리를 즐기면서 쌀이 좋으니, 나쁘니, 맨날 똑같은 반찬이 번갈아 나와서 먹을 게 있니, 없니 하면서 매번 식사 때마다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그에게 대꾸 없이 "흩어진 밥알처럼 바닥에 바싹 붙은 채" 본인이 원하는 것들을 챙겨주는 심사가 편치 않다. 그를 지적질 할 위치에 있지 못하지만 그에게 전해주는 식판 하나가 침상에 놓일 때까지의 과정을 안다. 많은 이들의 수고로움과 동동거림이 담겨있다. 또한 먹을 게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배고파도 먹지 못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많다. 탄수화물의 문제가 지적되는 요즘이지만 밥은, 일차원적인 하나의 명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밥은 평등과 다정의 다른 이름이다. 밥 가지고 장난치지 말자, 먹을 만큼만 감사히 먹자고 다짐한다.

 

     이산하 시인의 《악의 평범성》안에도 온갖 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귀한 한 톨의 쌀이 있고, 한 숟가락의 밥이 있다. 시집을 읽는데 우리의 근, 현대사를 통과하는 대하소설 열권을 읽는 묵직한 느낌은 나만 갖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보고 느끼는 건 누구나 같다. 특정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인을 밟고 통과해온 대한민국의 근, 현대사의 아픈 상처들이 시를 통해서 조금씩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다. 오로지 詩만이, 몸뚱이를 담보로 잡고 사는 사람만이 시인에게는 치료 약이었음을 알겠다. "여기 이 시집이 시인의 끝이다. 샤먼이다. 시여, 여기서 다시 시작이다." 이문재 시인의 표 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더 이상의 부연은 부연일 뿐, 충분하다.

 

 

 

  산수유 씨앗

    전우익 선생의 휠체어를 밀며

 

  2003년의 뜨거운 여름

  전 선생이 사고로 대구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난 며칠 동안 그늘만 찾아다니며 휠체어를 밀었다.

  예전 봉화 청량사를 오를 때는 그의 등을 밀었다.

  선생은 질문이 곧 성찰에 이르는 길인 듯 줄곧 물었다.

  왜 한국에는 도연명 같은 혁명적인 시인이 없는가.

  왜 권정생 같은 동화작가가 다시 나오지 않는가.

  왜 쌀알 한 톨이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가.

  왜 벼꽃이 피는 걸 개화라 하지 않고 '출수'라 부르는가.

  왜 포도나무는 자꾸 사막 멀리 뿌리를 뻗어가는가.

  왜 솔개는 바위에 부리를 부수고 발톱을 뽑아버리는가.

  왜 큰 것은 작은 것을 겸하지 못하는가.

  왜 세상은 인간이 직립한 이후부터 비극이 생기는가.

   ……

 

  9년 전 세상을 떠난 선생의 질문이 아직도 귀에 맴돈다.

  그의 책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에도 나오지만

  무슨 선거 때만 되면 노란 산수유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느 날

  전 선생이 산수유 묘목을 밭에 심고 있는데

  이웃들이 그게 언제 커서 돈이 되겠느냐며 혀를 찼다.

  5년 후 심은 나무에서 노란 꽃이 몇 개 달리더니

  10년이 지나자 노란 숲으로 변해 향기가 마을에 진동했다.

  선생은 산수유 묘목을 가꿔 이웃들에게 나눠주었다.

  간혹 묘목 대신 씨앗을 달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대목에서 전 선생이 빙긋이 웃으며 내게 물었다.

  자네는 씨앗과 묘목 중 어느 것을 받겠느냐고……

  나도 빙긋이 웃으며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토양이 너무 나빠 먼저 땅부터 완전히 갈아엎지 않으면

  아까운 산수유 씨앗만 버리게 될 거라고 덧붙였다.

  전 선생이 다시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뜨락의 그늘에 저녁 어스름이 깔린다.

  어둠과 빛이 교차하자 모든 것들이 지워져간다.

  생사의 안팎이 이 한순간의 박명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젠 어제 씨앗이었던 저 나무들도 내일은 재로 변하리라.

  그 잿더미에서 쌀알 같은 벼꽃들이 피어나기도 하리라.

  두 바퀴를 두 손으로 직접 굴리는 이 휠체어는

  천천히 손에 힘을 주는 만큼만 바퀴자국을 남긴다.

 

            시집[악의 평범성]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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