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떤 사람들에겐 결코 심상할 수 없고 평범할 수 없으며 지나가는 말이 될 수 없는 말. 그 말을 읽은 덕분에 나는 이 글을 썼다. 그리고 굳이 이 말을 하고 싶어서. 그 수치심은 당신의 몫이 아니라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아니라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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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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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황정은

   소설가의 첫 에세이를 읽다가 책을 자주 덮었다. 답답해서, 먹먹해서, 울컥해서……. 200쪽 남짓한 얇은 책을 일주일만에 덮는다.

   한 문장 한 문장, 더듬어가며 읽었다.

 

 

 

 

    이런 걸 말해도 되는 걸까. 이런 글을 쓰고 나면 작가로서, 록산 게이가 『헝거』에서 걱정한 것처럼 이 경험을 바탕으로 비좁게 소비되는 것은 아닐까. 이 글은 그러니까, 이것을 읽는 누군가에게는, 이전의 내 모든 소설과 앞으로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달라붙는 글이 되지는 않을까. 내 모든 글이 이 경험을 기반으로 읽히지는 않을까.

    그러나 지금 내 삶은 그 일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 말고도 다른 일들이 내 삶에 있었고 나는 삶과 읽기와 쓰기를 통해 조금씩 학습하면서 본의든 아니든 조금씩 변해왔다. 그 일은 내 전부가 될 수 없다. 거울은 여전히 내게 문제이지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나는 이제 내 얼굴의 흔을 흉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나를 탓하지 않는다. 그 일들을 내가 원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이렇게 된다고, 결국엔 무감해지고 괜찮아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 경우엔 만날 때마다 그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칱척들과의 왕래를 뒤늦게나마 중단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내가 겪은 어려움이 그것만은 아니었다는 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커서…… 바벨을 데드리프트로 하루에 백번씩 들었다 내리는 소설가로 살고 있다는 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내 키보드와 고양이와…… 만화책을 포함해 내가 여태 읽은 책들과 앞으로 읽을 책들에 대한 기대가 내게 도움이 되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록산 게이가 『헝거』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내 아름다운 체리 파이'를 만든느 것, 그런 즐거움을 내가 알며 그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과 살아가고 있다는 점, 그것을 내가 운 좋게 알고 있다는 점이 내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들을 잊은 적은 없다.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그 일을 말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문득 말하기 시작했고 말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그 일을 말하고 싶어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일을 얼마나 말하고 싶어했는가도.

                                             [일기 p179~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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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창비시선 453
이산하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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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먼 길

              이산하

  숟가락은 수직으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 같고

  젓가락은 마주 보는

  두 개의 백척간두 같다.

  숟가락이 밥 속으로

  수직으로 푹 찔러 들어가

  바닥을 긁고 나면

  비로소 젓가락은 수평을 이룬다.

  눈물이

  백척간두에서 한 발 내디딘다.

  나는 흩어진 밥알처럼

  바닥에 바싹 붙은 채

  숟가락과 밥그릇 사이가

  가장 먼 길임을 깨닫는다.

 

     그와 작별했다. 그는 윙크를 했고, 손하트를 날렸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최고라고 표시한 후 환하게 웃어주었다. 이런 과한 애정공세를 받아도 되나, 당혹할법하지만 당연하다는 듯 사랑을 가득 담은 눈웃음을 날려주고 한술 더 떠 하이파이브에 악수와 깔깔로 마무리한다. 한 달 전의 그는 가끔 웃어주는 것과 악수가 전부였는데 한 달이 지나니 저만큼 좋아졌는데 이제 헤어진다. 묵묵한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큼직한 손으로 세상에서 가장 어눌한 빠이빠이를 한다. 며칠 전 《악의 평범성》을 읽다가 마침 재활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가장 먼 길]을 읽어 주었다. "숟가락은 수직으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 같고/ 젓가락은 마주 보는/ 두 개의 백척간두 같다."는데 그저 순한 눈으로 빤히 쳐다본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울컥한다. 이 시를 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유다. 그는 밥을 먹지 못한다. 단지 영양을 취할 뿐이다. 콧줄로 경관식을 하는 그에게는 "숟가락과 밥그릇 사이가 가장 먼 길"이다. '그는 언제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었을까? ' 이곳 재활 병원으로 온 지가 일 년도 넘었으니 그 과거가 어디쯤이었을지를 짐작조차 못하겠다. 하루 중 스무 시간 가까이 누워만 지내는 그가 머물고 있는 세계는 어느 곳일까. "눈물이/ 백척간두에서 한 발 내디" 딛는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왔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밝은 표정으로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선배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연하게 느낀다. 왼손을 움직여 저런 동작들을 따라 한다. 점차 할 수 있는 동작들이 늘어날 것을 기대한다. 그는 말도 못 하고 경관식에 심한 편마비로 누워만 있기엔 너무나 젊다. 이제 육십을 갓 지났다. 무엇보다 본인의 의지와 재활치료와 운동의 병행이 결과를 보여줄 뿐이다. 물론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생겨버린 일, 꾸준한 재활만이 답이다. 그에게 기적처럼 "숟가락이" 입속으로 들어갈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나는 밥에 진심인 편이다. 따뜻한 밥상이 주는 다정을 알고 그 밥 한 상이 차려지기까지의 노고를 안다. 그래서 오래 누군가에게 밥을 차려주는 일을 즐거이 했고 내 수고로움으로 배고픈 이가 잠시나마 행복해지기를 기원했다. 세상에 가치 없는 일이란 없지만 가치를 알아주기보다는 무시하는 이가 더 많은 듯해 보이는 그 일도, 지금의 이 일도 먹고사는 것과 관계된 그저 그런 아무나 할 수 있는 단순한 일이다. 그러나 누가 뭐라든, 알아주든 말든 내가 조금 힘들지라도 밥 한 숟갈이라도 더 드시게 하는 일에 열심이다. 가장 근본적인 세 잘을 (잘 자고, 잘 먹고, 잘 싸는 것.) 도와주려 애쓰고, 그것이 내 일이다. 나의 소명이다.

     스스로 뭐든 하려 하고, 인지도 멀쩡하고 편마비만 있을 뿐이어서 일하는 입장에서는 별로 힘들 게 없는 젊은 친구를 좋아해야 하는데 마땅찮게 여기는 것은 단지 밥을 깨작거리기 때문이다. 개인 사물함 가득한 간식거리를 즐기면서 쌀이 좋으니, 나쁘니, 맨날 똑같은 반찬이 번갈아 나와서 먹을 게 있니, 없니 하면서 매번 식사 때마다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그에게 대꾸 없이 "흩어진 밥알처럼 바닥에 바싹 붙은 채" 본인이 원하는 것들을 챙겨주는 심사가 편치 않다. 그를 지적질 할 위치에 있지 못하지만 그에게 전해주는 식판 하나가 침상에 놓일 때까지의 과정을 안다. 많은 이들의 수고로움과 동동거림이 담겨있다. 또한 먹을 게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배고파도 먹지 못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많다. 탄수화물의 문제가 지적되는 요즘이지만 밥은, 일차원적인 하나의 명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밥은 평등과 다정의 다른 이름이다. 밥 가지고 장난치지 말자, 먹을 만큼만 감사히 먹자고 다짐한다.

 

     이산하 시인의 《악의 평범성》안에도 온갖 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귀한 한 톨의 쌀이 있고, 한 숟가락의 밥이 있다. 시집을 읽는데 우리의 근, 현대사를 통과하는 대하소설 열권을 읽는 묵직한 느낌은 나만 갖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보고 느끼는 건 누구나 같다. 특정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인을 밟고 통과해온 대한민국의 근, 현대사의 아픈 상처들이 시를 통해서 조금씩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다. 오로지 詩만이, 몸뚱이를 담보로 잡고 사는 사람만이 시인에게는 치료 약이었음을 알겠다. "여기 이 시집이 시인의 끝이다. 샤먼이다. 시여, 여기서 다시 시작이다." 이문재 시인의 표 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더 이상의 부연은 부연일 뿐, 충분하다.

 

 

 

  산수유 씨앗

    전우익 선생의 휠체어를 밀며

 

  2003년의 뜨거운 여름

  전 선생이 사고로 대구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난 며칠 동안 그늘만 찾아다니며 휠체어를 밀었다.

  예전 봉화 청량사를 오를 때는 그의 등을 밀었다.

  선생은 질문이 곧 성찰에 이르는 길인 듯 줄곧 물었다.

  왜 한국에는 도연명 같은 혁명적인 시인이 없는가.

  왜 권정생 같은 동화작가가 다시 나오지 않는가.

  왜 쌀알 한 톨이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가.

  왜 벼꽃이 피는 걸 개화라 하지 않고 '출수'라 부르는가.

  왜 포도나무는 자꾸 사막 멀리 뿌리를 뻗어가는가.

  왜 솔개는 바위에 부리를 부수고 발톱을 뽑아버리는가.

  왜 큰 것은 작은 것을 겸하지 못하는가.

  왜 세상은 인간이 직립한 이후부터 비극이 생기는가.

   ……

 

  9년 전 세상을 떠난 선생의 질문이 아직도 귀에 맴돈다.

  그의 책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에도 나오지만

  무슨 선거 때만 되면 노란 산수유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느 날

  전 선생이 산수유 묘목을 밭에 심고 있는데

  이웃들이 그게 언제 커서 돈이 되겠느냐며 혀를 찼다.

  5년 후 심은 나무에서 노란 꽃이 몇 개 달리더니

  10년이 지나자 노란 숲으로 변해 향기가 마을에 진동했다.

  선생은 산수유 묘목을 가꿔 이웃들에게 나눠주었다.

  간혹 묘목 대신 씨앗을 달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대목에서 전 선생이 빙긋이 웃으며 내게 물었다.

  자네는 씨앗과 묘목 중 어느 것을 받겠느냐고……

  나도 빙긋이 웃으며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토양이 너무 나빠 먼저 땅부터 완전히 갈아엎지 않으면

  아까운 산수유 씨앗만 버리게 될 거라고 덧붙였다.

  전 선생이 다시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뜨락의 그늘에 저녁 어스름이 깔린다.

  어둠과 빛이 교차하자 모든 것들이 지워져간다.

  생사의 안팎이 이 한순간의 박명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젠 어제 씨앗이었던 저 나무들도 내일은 재로 변하리라.

  그 잿더미에서 쌀알 같은 벼꽃들이 피어나기도 하리라.

  두 바퀴를 두 손으로 직접 굴리는 이 휠체어는

  천천히 손에 힘을 주는 만큼만 바퀴자국을 남긴다.

 

            시집[악의 평범성]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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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의 고독 - 시간과 자연을 걷는 일에 대하여
토르비에른 에켈룬 지음, 김병순 옮김 / 싱긋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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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과 자연을 걷는 일에 대하여'는 [두 발의 고독]의 부제다. 노르웨이의 저널리스트 토르비에른 에켈룬이 쓴 책이다. 뇌전증 진단을 받은 저자가 면허증을 반납한 후 걷기를 시작하면서 만나는 거리 풍경과 사유를 그리고 있다. 그렇게 시작된 걸음은 과거의 길, 어릴 때의 숲속 오두막 길을 기억하고 그 시절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시간과 자연을 걷는' 글이다.

   "걷기"를 좋아하고 '길'을 좋아하는 나에게 꼭 맞는 책이기도 했지만, (비슷한 책들에 매번 혹한다.) 무엇보다 '뇌전증으로 면허를 반납한 저자'부분에서 끌렸다. 우리나라에서라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뇌전증'이라는 병이 당당히 밝힐 수 있는 병도 아니고 그 병으로 인해 운전면허증을 자진 반납하는 사례도 들어본 적 없다. (물론 내가 들어 본 적 없는 거겠지만.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우리도 이제는 초고령자가 운전하는 것에 대해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 그래서 더욱 끌렸다. 결론은 역시나 탁월한 선택이었다. 길에 관한 사유로 빛나는 책이었던 것이다. 건강했던 자신에게 들이닥친 병마와의 투쟁이나 좌절로 징징거릴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염려가 있었으나 깔끔하게도 그런 문장은 한 줄도 없었다.

   일 년 전에 사고가 있었다. 정확히는 2020년 10월 25일이다. 여느 때처럼 '바람이'를 타고 출근하는 중이었다. 광교산의 아침 바람은 매일매일 새롭게 황홀했다. 그날은 안개를 약간 머금은 가을 아침치고는 눅지고 차운 바람이었다고 기억한다. 갑자기 우측에서 튀어나온 파란색 차를 보았다고 생각한 순간, 텅~ 이었다. 119차량이 올 때까지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 있었다.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에 큰 소리로 비명을 내지르며 심호흡을 했다. 통증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으나 (지나고 보니 엄살이 과했나 싶기도 하고 차량 운전자는 얼마나 놀래고 쫄았을까 싶기도 했다.) 다행히 갈비뼈 두 개의 골절과 염좌, 오른쪽 엄지손가락의 미세한 골절 등의 부상으로 그쳤지만 바람이는 폐차해야 했다. 십 년 동안 시내 곳곳을 함께 다니고, 종류별 바람을 느끼게 해준 나의 도반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내내 뚜벅이다. 한 시간이 못 미치는 길들은 거의 걸어서 다닌다.

   늘 걷는 자였지만 '바람이' 없는 일 년은 온전하게 걷는 사람이다. '걷는 사람'이 된 지금도 처음 도보 여행을 시작했을 때의 길에 관한 생각과 같다. 우리의 길은 '사람을 위한' 길이 없다. '탈 것들'를 위한 길만 존재한다.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서는 걸을 길이 없거나 차도 변 좁은 틈 사이로 걸을라치면 25톤 화물차가 경적과 바람으로 겁을 주며 쏜살같이 지나간다. 도심의 인도는 또 어떤가. 차가 점령해있거나 가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거나, 보도블록들은 복병처럼 튀어 올라있거나 길은 기울어져 있어 발에 있는 힘을 다 주며 걸어야 한다. 횡단보도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푸른 신호에도 달리는 차들에 건너기가 쭈뼛하고 신호는 어찌나 짧은지 자동적으로 걸음이 빨라진다. 걷는 일이 가장 안전해야 하는데 생각에 빠지거나 방심하고 걷다 보면 위험해진다. 사람을 위한 길은 여전히 없다.

   지금처럼 걷는 길이 상품화된 적도 없을 것이다. 제주 올레의 성공을 지켜본 전국의 지자체에 길 만들기 열풍이 불어닥쳤다. 올레 마니아인 나로선 환호했다. 그러나 몇 개의 길들을 따라가 보고는 바로 실망했다. 과연 그 길을 기획하고 만든 사람이 자주 그 길을 걸어보았을까 싶은 것이다. 도심 사이에서 팻말을 놓치는 것은 기본이고, 왜 이 길을 걸어야 하는지 싶은 도로변을 무한정 걷게 되는 경우도 있고, 마치고 나면 뭐 하러 이 길을 끝까지 걸었는지 의미도 몰라서 허무해지는 길들도 많다. 그래도 혹시 하는 기대감을 안고 **길들을 따라 걷는다. 일단은 길에 부여된 이름들이 그 길을 정의하게 만들고 걷는 사람이 있어야만 그 길은 걷기에 최적화된 길로 거듭날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제주 올레의 성공은 그 길을 걷는 사람이 많아서다. 나는 수원을 좋아한다. 여기서 보낸 시간이 40년이 지났다. 수원의 구석구석을 걸어 다녔다. 그 길들에 걷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내게 걷는 일은 하루의 완성이고 하루의 마감이다. 걷는 동안, 하루 동안 내가 했던 일들을 생각하고 정리하고 내일을 준비한다. '길'은 내게 '쉼'이면서 '일기 쓰기'이고 '사유'의 장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 걸으면서 어릴 적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강을 따라 걷던 둑길에서 보낸 그 시간들이 어떤 의미였는지. 저자와 같은 사유는 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어릴 적의 둑길은 나를 세상으로 이끈 힘이 되어주었다. 그때의 둑길과 같은 광교저수지 둑길에 서면 가슴이 펴진다. 심호흡 몇 번으로 하루 동안 가득 차 있던 세상을 향한 불합리와 이산화탄소들이 산소로 전환된다. 비로소 숨쉬기가 편안해진다. 이 단순한 동작이 가능한 곳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둑에 설 때마다 매번 새롭게 느낀다.

   길은 스스로 생겨났다. 길은 숨 막힐 듯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기 위한 산책로나 전시 공간으로 설계된 경치 좋은 통로가 아니었다. 길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길이 만들어질 때 예비 보고서 나 타당성조사도 없었고 길의 등급을 정하거나 포장하기 위한 사전심사도 없었다.

길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길은 자연적으로 생겨나고 분해되며 자연환경에 순응하고 그것이 통과하는 바로 그 자연계의 일부다. 길은 일시적이다. 그것의 용도와 존재는 상호의존적이다. 길은 누군가가 그 길을 다니기 때문에 거기에 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 길을 다닌다. 따라서 길이 그대로 남아 있으려면 누군가가 그 길을 걸어야 한다.

   길은 전설과 신화, 민요, 동화와 비슷하다. 그것들은 모두 집단 창작을 통해 생겨나기 때문에 어느 특정 작가를 원작자로 지명할 수 없다. 그것들은 몸과 영혼이 일체다.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비물질적이다. 길은 단순한 통로 이상을 의미한다.

   길은 일직선의 반대다. 길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 반면에, 일직선은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이론적 구성체다. 일직선은 구체적인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물의 표면조차 일직선으로 평평하지 않다. 태양에서 발사되는 광선도 마찬가지다.

길은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자연에 끼어든다. 길은 자연계 영역의 일부로서 거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길은 언제나 작다. 우리가 그것을 길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만일 길이 확장되어 더 커지면, 그것은 길이 아닌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이 된다. p45,46

 

   이 같은 도보여행길들은 세계 곳곳에 다 있다. 거기서는 온갖 형태의 지형들이 서로 교차하고 길마다 구간 거리와 난이도도 가지각색이다. 일본의 시코쿠 오헨로 사찰 순례길, 페루의 마추픽추까지 가는 잉카 트레일, 태즈메이니아 섬의 오버랜드 트랙,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에 걸친 투르 뒤 몽블랑, 칠레 파타고니아의 더블유 트랙, 킬리만자로 정상의 롱가이 루트, 오스트레일리아의 그레이트 오션 워크, 코르시카섬의 GR20 등이 그런 길이다.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에 있는 "왕의 오솔길"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길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그 길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중간 공중에 매달린 발판을 따라 이어진다. 오랜 세월 보수가 안 되어 상태가 악화된 그 길을 가다 떨어져 죽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심각한 상해를 입는 사람 수는 훨씬 더 많아지자 스페인 당국은 길을 폐쇄했다. 그러다 얼마 전, 그 길을 다시 복원했고 지금은 뱃심 두둑한 도보여행자들에게 개방된 상태이다. 그 길을 걷는 여행자들에게 그들이 허공에 떠 있다는 느낌을 높여주기 발판 바닥 일부에 유리 판을 깔았다. 왕의 오솔길은 현대화된 도보여행길의 선구자적 면모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p66,67

   '산티아고 순례길'을 알고 나서 오랫동안 그 길에 관한 정보를 모았던 적이 있다. 언젠가, 그 길에 있을 언젠가를 위해서. 그렇게 '한비야'와 '김남희'가 쓴 모든 책을 섭렵하고 그들이 걸은 그 길들을 동경해왔다. 길은 책 속에서 간접 체험을 통해서 나를 세계로 이끌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도보여행길이 저렇게나 많다니, 지금의 팬데믹이 아니더라도 내 형편이나 나이, 가장 중요한 재정적 상황은 저 길 위에 나를 세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많은 길들이 있다. 이름을 가진 '추자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해파랑길', '남해 바래길' 등등과 이름을 갖지 못한 소소하고 작은 동네의 미로 같은 골목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개울이나 강은 날이 저물어도 결코 쉬거나 멈추지 않는 자연의 일부이다. 나는 물이 흘러가는 것, 그것의 의미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개울과 길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둘 다 동일한 작동 원리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개울은 힘들이지 않고 지형을 헤치며 나아간다. 그리고 똑바로 일직선을 그리며 흐르지 않는다. 또한 가장 짧은 거리나 빠른 길을 골라 가지도 않는다. 개울은 저항을 최소한으로 받는 길을 따라간다. 물은 평형상태를 추구한다. 균형을 이루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흐른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개울은 흐름을 멈출 것이다. 그래서 개울은 호수를 만나면 사라진다. 강 또한 바다를 만나면 흐름을 멈춘다. 물은 평형상태에 도달하면 속도를 잃고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평형상태에 도달한 물은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이것은 길도 마찬가지다.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들은 이제껏 함께 걸었던 발걸음을 멈추고 저마다 자기 방향으로 흩어져 가기 때문이다. p105,106

   나는 이제껏 남반구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북반구의 아이슬란드에 이르기까지 많은 길을 걸었다. 문화적 경관도 지나쳤고, 야생의 황야 지대도 통과했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스텝 지역, 축축한 습기로 가득한 열대우림 지역, 용암이 부글부글 끓는 화산 꼭대기도 올랐다. 나는 통과하기 어렵기로 알려진 맹그로브 밀림 속을 걸었다. 고산지대의 빙퇴석 산등성이도 횡단하고, 어깨 높이까지 자란 초록의 거대한 풀들이 굽이치는 초원지대도 통과했다. 너무나 척박하고 황량하고 뼛속까지 훤히 드러난 것처럼 삭막한 돌이 많은 황무지도 걸었다. 그것은 마치 태초 이전 또는 세상이 끝난 뒤의 땅 위를 가로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열대우림 지역을 걷는 것은 대성당 안을 걷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냉랭하고 음울했다. 초록의 나뭇가지와 이파리들이 마치 성당의 지붕처럼 아치형 천장을 이루고 있는 밀림 속은 성당의 실내와 같은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는 정찬용 접시처럼 커다란 낙엽들을 밟으며 숲 기슭을 걸었다. 마치 호빗족처럼 나 자신이 아주 작은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길을 걸으면서 그때처럼 행복감을 느껴본 적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결코 없었다. 길은 나의 구세주였다. 내가 길을 잃는다면, 숲은 나를 집어삼킬 것이며, 나는 거기서 결코 헤어 나오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맹그로브 밀림 속을 걷는 것이 가능하다면 훨씬 더 길이 험난했다. 맹그로브 나무는 그 자체가 아주 오랜 세월의 흔적이며 지구상에서 가장 강인하고 변함없는 생명체 가운데 하나였다. 맹그로브와 바퀴벌레, 그 둘은 미래에도 지구상에 생존해 있을 유일한 생명체의 두 형태일 것이다. p139~141

   

   '날이 저물어도 결코 쉬거나 멈추지 않는 자연의 일부'처럼 걷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저자처럼 맹그로브 밀림 속을 걷지는 못하겠지만 이 글쓰기를 마치면 오늘은 수원 팔색길 중에서 지겟길을 따라 걸을 것이다. 매일 걷는 산책로의 시작점인데 길의 표지판을 따라 끝까지 걸어 볼 생각이다. 옛날 나무꾼이 걸었다는 그 길이 맞을까 갸웃하면서, 지게 대신 물 한 병과 커피를 채운 텀블러를 담은 배낭을 메고 사브작사브작 걸을 것이다. 나의 시간과 자연 속으로.

   이건 안 비밀인데 11월 말까지 한국관광공사의 '두루누비'앱에서 이벤트를 하고 있다. 길, 따라 걷기를 완료하면 5000원 온라인 상품권을 지급한다. 한 사람당 3번까지 가능하다니 이건 일석이조. 가을 속을 걸으면서 무거운 몸도 가벼운 정신도 살랑살랑해지면서 완료하면 책 한 권이 생기는 것이다. 아, 참! '해파랑길' 후기 공모도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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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의 넓이 창비시선 459
이문재 지음 / 창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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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울 수 있도록

   오래된 기도 3

                                     이문재

   혼자 울 수 있도록

   그 사람 혼자 울 수 있도록

   멀리서 지켜보기로 한다

   모른 척 다른 데 바라보기로 한다

   혼자 울다 그칠 수 있도록

   그 사람 혼자 울다 웃을 수도 있도록

   나는 여기서 무심한 척

   먼 하늘 올려다보기로 한다

   혼자 울 때

   억울하거나 초라해지지 않도록

   때로 혼자 웃으며

   교만하거나 배타적이지 않도록

   저마다 혼자 울어도

   지금 어디선가 울고 있을 누군가

   어디선가 지금 울음 그쳤을 누군가

   어디에선가 이쪽 하늘을 향해 홀로 서 있을

   그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도록

   그리하여

   혼자 있음이 넓고 깊어질 수 있도록

   짐짓 모른 척하고 곁에 있어주는 생각들

   멀리서 보고 싶어 하는 생각들이

   서로서로 맑고 향기로운 힘이 될 수 있도록

               시집 [혼자의 넓이] 중에서

   늦게까지 이어진 더위 탓인지 갑자기 겨울이 훅~! 들어온 느낌의 아침을 맞는다. 이렇게 쌀쌀해지면 덩달아 쓸쓸해지는 건 유난이 아니라 보편적인 감성이라는 위안을 살며시 가지면서 (그게 뭐 대수라고... 그래도 그런 위안에 슬그머니 편해지는 심리는 대체 뭘까?) 시집의 제목에서도 전체적인 시에서도 대놓고 '혼자'가 많은 문재 시인의 시를 펄럭~펄럭~하다가 떠나온 곳, 화장실에 붙여 둔 [오래된 기도]를 잠깐 생각한다. 벌써 몇 달 전이니 과연 붙어있기는 할까? 싶어지면서 더 먼저 떠나온 곳은 여태 붙어 있던데...로 이어진다. (시 제목도 가물가물~하다. 김사인 시인의 [조용한 일], 윤동주 시인의 [무서운 시간]일 거다. 아마도.) 그리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름을 알고, 몸을 기억하는 분들이 이제는 안 계신다 생각하니 참 허망 타. '흔적'은 뭘까? 이런 기억들도 그분들의 흔적이겠지 싶다. '혼자 울 수 있도록' 타인을 바라보는 것, 이 직업에 적응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런 거리감이 많이 필요하다. 특히 나한테는. 매번 같은 상황에 휘둘릴 때마다 상실에 휘청거리는 어린아이 같은 내가 마음에 안 든다. 그러나 내가 변할 것 같지는 않으니 도망치듯 그런 상황에서 떠나왔는데,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허둥대고 있다니... 쯧~! 사람, 안 변한다.

   "저마다 혼자 울어도// 지금 어디선가 울고 있을 누군가// 어디선가 지금 울음 그쳤을 누군가// 어디에선가 이쪽 하늘을 향해 홀로 서 있을" 그 누군가를 알고 있다. 이런 시를 읽으면 그 누군가에게 "짐짓 모른 척하고 곁에 있어주는 생각들// 멀리서 보고 싶어 하는 생각들이// 서로서로 맑고 향기로운 힘이 될 수 있도록" 들려주고 싶어진다. 어려운 단어 하나 없이도 시는 좋구나. 중의적인 표현들 해석하려 애쓰지 않아도 가만가만 안겨오는 시어들 좋구나. 읽어보고, 읽어보고. 시에서 위안을 얻는 시월, 이 아름다운 시월이 속절없이 가고 있다. 그 누군가들도 이 시월을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차운 날씨에 감기 들지 말고 좋은 시 한 편 같이 읽자. 마음을 도둑맞았다고 억울해하지 말고. 누군가 이미 다 써버렸다고 투덜대지도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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