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장소

                         김소연
 

  우리가 만난 곳을 생각해
  내가 기대어 한숨을 쉬었던 그 벽에서
  너는 두 손을 모아 균열에 대고 소원을 말했지

  나는 오후 세 시에
  너는 새벽 세 시에

  꽃잎을 먹었어요
  어차피 더럽게 떨어질 꽃잎이라서요
  이렇게 많이 먹었는데 왜 배가 고플까요

  언 귀를 비빌 때마다 우리가 만난 곳을 자주 생각해
  악몽을 피처럼 낭자하게 흘리며 네가 쪽잠을 자던
  알 깨진 가로등 같은 몰골로 내가 마중을 나갔던 골목

  오늘만 좀 재워주세요
  기린과 코끼리와 들쥐 그리고 화분 한 개
  내 짐은 이게 전부예요

  새벽 세 시의 네가
  오후 세 시의 나를

  찾아왔던 날을 자꾸자꾸 생각해
  언 발을 나무처럼 심어두고 싶었지만
  어쩐지 흙에게 미안해져 그만두었어요

  쓰러져 누운 모든 것들이
  이불로 보이던 그 동네를 생각해
  쓰러지며 발열하는 별 하나와 불빛 없는 상점들

  같은 악몽을 사이좋게 꾸던
  같은 소원을 사이좋게 버리던

                                                           시집 [수학자의 아침]중에서


  ˝알 깨진 가로등 같은 몰골˝을 골똘히 생각해본다. 모자라고 헐렁헐렁하고 궁끼있는 몰골, 즉 실패의 냄새가 풀풀한 그런 허접한 몰골이겠지. 내가 좀 그쪽에 가까운 것 같다. 반듯반듯하고는 거리가 먼 패배의 몰골로 ˝쓰러져 누운 모든 것들이/ 이불로 보이던 그 동네˝를 오가며 살았다. 변두리에서 변두리로. ˝우리가 만난 곳을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새벽이면 모퉁이마다 쓰레기 가득한 골목들을 헤집고 출근할 때마다 이 시가 떠올랐다. 실패보다는 슬픔을, 쓸쓸함이 가득한 후줄그레한 내 뒷태를, 아니 내 배후를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벤치마다 쓰레기가 가득한 공원을 가로지르며 ˝언 발을 나무처럼 심어두고˝ 싶었던 시절이 떠올랐다. 시인들은 참, 시는 참.....


  ˝씩씩한 소연아,
  너의 새 시집이 슬픔으로 가득하구나. 내가 슬픔을 말하는 것은 시구의 갈피에 삶의 고독한 정경이 곤두서 있기 때문도 아니고, 이해받지 못하는 어떤 진실들이 망각의 웅덩이를 이루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여전히 네가 일상의 곡절 속에서 낭비된 마음들을 바다와 같은 천 년의 잠으로만 회복하려 한다고 여겨서도 아니다. 내가 슬픔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것. 온갖 감정과 의지의 무변한 저수조가 아득하게 저기 있는데 너는 한 번의 물결을 실천할 때마다 저 온존한 바다를 잠시 잊어야 하는 것이 불안하다는 듯이 특별한 몸짓을 하며 특별한 목소리로 말하지. {해설, 황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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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르는 사람
                   김행숙

  강변에 서 있었네
  얼굴이 바뀐 사람처럼 서 있었네
  우리는 점점 모르는 사람이 되고

  친절해지네
  손님처럼
  여행자처럼
  강변에 서 있었네
  강물이 흐르고
  피부가 약간 얼얼했을 뿐
  숫자로 헤아려지지 않는 표정들이 부드럽게 찢어지고 빠르게 흩어질 때마다
  모르는 얼굴들이 태어났네
  물결처럼, 아는 이름을 부룰 수 없네
  피부가 펄럭거리고

  빗방울을 삼키는 얼굴들
  강변에 서 있었네
  아무도 같은 얼굴로 오래 서 있지 않네

                    시집 [이별의 능력] 중에서



  직장을 옮긴지 한 달이 되었다. 이 일을 시작한지 이제 오 개월차, 어리버리 초보딱지도 떼지 못한채 새로운 곳에서는 뭘해도 어설프기만하다. 손끝이 야무진 베테랑들 사이에서 좌충우돌, 엉거주춤, 걸치적거리며 일을 배우고있다. 유치원생이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뒷꿈치를 들고 따라다니는 모양과 같다. 세상이 인정하든 말든 자기 일에 최고인 고수들이 즐비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요즘이다. 살면서 만나는 모든 이가 스승이요, 도반이다.


  ˝답사에 연륜이 생기면서 나도 모르게 문득 떠오른 경구는‘인생도처유상수‘였다. 하나의 명작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무수한 상수들의 노력이 있었고, 그것의 가치를 밝혀낸 이들도 내가 따라가기 힘든 상수들이었으며, 세상이 알아주든 말든 묵묵히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필부 또한 인생의 상수들이었다.˝[나의 문화유산 답사기6권]
  선배들의 말처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잘하게될까 의심스럽긴하지만 이 일이 주는 재미와 감동은 매일매일 더해간다. ˝숫자로 헤아려지지 않는 표정˝을 이해하려 진땀을 흘리고,˝빗방울을 삼키는 얼굴들˝을 찾아내고, ˝아무도 같은 얼굴˝이 없는 이 곳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날들이다. 바닥에서 바닥으로 옮겨온 거지만 옮겨오길 잘했다싶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들은 모두 바닥에 머문다. 바닥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허공에서 부유할 뿐,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깨달음도 최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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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 창비시선 456
이상국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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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후에 대하여

                             이상국


   나는 나의 뒷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래도 거기까지가 나의 밖이다.

   나의 등에는 은유가 없다.

   손으로 악수를 꺼낸다든가

   안면을 집어넣거나 하는 그늘이나

   은신처도 없지만

   나의 등은 나의 오래된 배후다.

   제삿날 절하는 아버지처럼

   구부정하고 쓸쓸한 힘이다.

            시집[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중에서

 

   ˝나의 등은 나의 오래된 배후다.˝
   나도 배후가 있었구나. 끄덕끄덕! (어쩐지 가끔은 배짱두둑해지더라니... )

   내가 나를 믿고, 내 배후를 믿고 살아봐야겠다.

   ˝구부정하고 쓸쓸한 힘˝도 가끔은 절실해지는 때, 나도 배후가 있다니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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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의 넓이 창비시선 459
이문재 지음 / 창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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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업

                 이문재


   한여름 땡볕
   양짓말 삼촌은
   비닐하우스 안에서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홀아비살림 이십년 만에
   적도 부근에서 데려온
   까무잡잡 키 작은 어린 아내
   집 나간지 이태째

   도망치듯
   비닐하우스에서 나와
   장화를 벗으면
   주르륵 물이 흘러나왔다
   삼촌이 흘린 땀이었다

   상추 쪽파 부추 얼갈이
   그해 봄에서 여름까지
   비닐하우스 갈아엎기를 네댓번
   몇년 새 쌓인 빚이
   집채보다 높아졌다

   그해 여름
   폭염주의보가 경보로 바뀐 날
   양짓말 늙은 삼촌은
   비닐하우스에서 나오자마자
   제초제를 병째 들이켰다고 한다
   벌컥벌컥 들이마셨다고 한다

                   시집[혼자의 넓이]중에서





   새벽에 출근하는데 벌써 후끈후끈하다.
   폭염경보의 나날이다.
   그래도 이천십팔년 여름이 더 지독했다는 생각이 바뀌지않는다. 저 사진 속의 날들, 속수무책 쏟아지는 땡볕 아래로 점심 피크타임이 지나면 어김없이 나섰던 그해 여름의 시간이 지금을 견디게한다, 고 생각하는 요 며칠, 이문재시인의 농업을 읽는다. 생각이 많아지게 만드는 시다.
   모자를 눌러써도, 얼음봉지를 목에 둘러도 무차별로 쏟아지는 볕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또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은 뜨거운 물에 담그고 있는듯 장화마저 낭창낭창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하루중에 고작 몇시간을 밭에서 보냈던 내가 농업에 대해 시적 은유와 현실의 행간을 어찌 읽어내야할지 아득하다. 다만 아무리 더워도 해야하는 일들과 그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있다는 것을 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냥 한다. 해야하는 일이니까 하고 그것으로 살아가니까 한다. 거기엔 생각이라는 게 필요없다. 그것이 삶이다.
   뜨거운 불 앞에서 종일 냉면을 삶고 손목뼈가 돌아가도록 마는 친구는 땡볕에서 일하는 현장 사람들을 걱정한다. 뜨거움을 견디는 일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방호복으로 중무장을 갖추고 코로나 방역현장의 일선에 서있는 이들의 숨소리는 어쩔것인가. 그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고 아무리 말해도 부족하기만 하다.

   폭염경보의 세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엄숙하고도 피할 수 없는 진실,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제초제를 병째 들이켰다고 한다/ 벌컥벌컥 들이마셨다고 한다˝ 그런 심정으로 견디는 것이다. 곧 팔월이다. 삼년 전의 여름이 지독했다고 말하는 지금처럼 곧 옛말하게 되리라. 보름쯤 지나면 아침, 저녁 서늘함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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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408
안미옥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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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의 발원

                  안미옥

  한여름에 강으로 가

  언 강을 기억해내는 일을 매일 하고 있다

  강이 얼었더라면, 길이 막혔더라면

  만약으로 이루어진 세계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아주 작은 사람이 더 작은 사람이 된다

  구름은 회색이고 소란스러운 마음

  너의 얼굴은 구름과 같은 색을 하고 있다

  닫힌 입술과 닫힌 눈동자에 갇힌 사람

  다 타버린 자리에도 무언가 남아 있는 것이 있다고

  쭈그리고 앉아 막대기로 바닥을 뒤적일 때

  벗어났다고 생각했다면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한쪽이 끊어진 그네에 온몸으로 매달려 있어도

  네가 네 기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시집 [온]중에서

 

 

 

        

    

  일하다 올려다 본 하늘이 엄청나다. 폭염 속의 하늘이 '저래도 되나'싶게 비현실적으로 투명하고 환한 데다 구름의 조화는 훈훈하고 감동적이다. 불과 이틀 전 형제봉에서 바라본 하늘도 환상이었다. 이 숨 막히는 더위에도 저런 하늘을 볼 수 있다면 또 나름 살만하지 않냐고 스스로 위로를 한다. 날마다 조금씩 부당하고 크고 작은 모멸감에 부대끼면서 자존감은 하락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나만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그럭저럭 살아간다.

  "한여름에 강으로 가/ 언 강을 기억해 내는"일이 필요하다. "만약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다면 삶의 질이 달라질까. "벗어났다고 생각했다면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읽을수록 감칠맛이 더해지는 시집이다. "네가 네 기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시집을 읽는 일, 하루에 한 번이라도 하늘을 바라보는 일,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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