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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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에세이

 

 

 

  8. 학교에 대해서

 

 

   책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아무튼 실로 다양한 종류의 책을 불타는 가마에 삽으로 푹푹 퍼 넣듯이 닥치는 대로 허겁지겁 읽었습니다. 책을 한 권 한 권 맛보고 소화해나가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너무 바빠서(미처 소화해내지 못한 것도 많았지만) 그것 이외의 일에 대해 머리를 굴릴 만한 여유는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나로서는 그게 오히려 좋았는지도 모른다고 이따금 생각합니다. 내 주위의 상황을 둘러보고 그곳에 있는 부자연스러움이나 모순이나 기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을 정면으로 따지고 들어갔다면 아마 막다른 곳에 내몰려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와 동시에, 다양한 종류의 책을 샅샅이 읽으면서 시야가 어느 정도 내추럴하게 '상대화'된 것도 십대의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책에 묘사된 온갖 다양한 감정을 거의 나 자신의 것으로서 체험하고, 상상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오고 가면서 온갖 신기한 풍경을 바라보고 온갖 언어를 내 몸속에 통과시키는 것으로 내 시점은 얼마간 복합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즉 현재 내가 서 있는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다른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까지 나름대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가능해진 것입니다.

  어떤 일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아무래도 세계가 부글부글 끓어서 바짝 졸아듭니다. 온몸이 긴장하고 발걸음이 무거워져 자유롭게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시점에서 자신이 선 위치를 바라보게 되면, 바꿔 말해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뭔가 다른 체계에 맡길 수 있게 되면, 세계는 좀 더 입체성과 유연성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건 인간이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자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독서를 통해 그것을 배운 것은 나에게는 큰 수확이었습니다.

만일 책이라는 게 없었다면, 만일 그토록 많은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썰렁하고 뻑뻑한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즉 나에게는 독서라는 행위가 그대로 하나의 큰 학교였습니다. 그것은 나를 위해 설립되고 운영되는 맞춤형 학교고, 거기서 수많은 소중한 것들을 몸으로 배워나갔습니다. 까다로운 학칙도 없고 수치에 의한 평가도 없고 격렬한 순위 경쟁도 없었습니다. 물론 따돌림 같은 것도 없습니다. 나는 커다란 '제도' 안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책을 통해 그러한 나 자신만의 별도의 '제도'를 멋지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머릿속에 그리는 그리는 '개인 회복 공간'은 바로 그런 곳에 가까운 것입니다. 아니, 꼭 독서만은 아닙니다. 현실의 학교 제도에 잘 섞이지 않는 아이라도, 교실에서의 공부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아이라도, 만일 그런 맞춤형 '개인 회복 공간'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에게 맞는 것,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것을 찾아내고 그 가능성을 자신의 공간에서 키워나갈 수만 있다면, 훌륭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도의 벽'을 극복해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마음의 존재 방식='개인으로서의 삶의 방식'을 이해해 주고 평가해 주는 공동체의 혹은 가정의 뒷받침이 필요합니다. [p224~227]

 

 

 

   9. 어떤 인물을 등장시킬까?

 

 

  소설을 쓰려면 무엇이 어찌 됐든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라는 얘기와 동일한 의미에서, 인간을 묘사하려면 사람을 많이 알아야 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알아야 한다고 해도 상대를 이해하거나 분석하는 선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의 겉모습이나 언행의 특징들을 언뜻 눈에 담아두기만 됩니다. 단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솔직히 영 안 맞는 사람도, 가능한 한 가리지 말고 관찰하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자신이 관심을 가질만한 사람, 이해하기 쉬운 사람만 등장시켰다가는 그 소설은 (장기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인데) 폭이 부족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서로 다른 다양한 행동을 취하고, 그런 것이 맞부딪치면서 상황이 굴러가고 얘기가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까 얼른 한 번 보고 '이 인간은 영 마음에 안 드네'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눈을 돌리지 말고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은가' '어떤 식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가' 등의 요점을 머릿속에 담아둡니다. [p236, 237]

 

  소설을 쓰면서 내가 가장 즐겁게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마음만 먹으면 나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애초에 일인칭 '나'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그런 글쓰기 방식을 이십 년쯤 유지했습니다. 단편에서는 이따금 삼인칭을 쓰기도 했지만 장편에 있어서는 줄곧 일인칭 '나'로 밀어붙였습니다. 물론 나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라(레이먼드 챈들러=필립 말로가 아닌 것처럼) 각각의 소설에 따라 '나'의 인물상은 바뀌었지만 그래도 계속 일인칭으로 쓰다 보니 현실의 '나'와 소설 주인공인 '나'의 경계선이 때로는- 쓰는 사람 쪽에서도, 또한 읽는 사람 쪽에서도- 얼마간 불명료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문제가 없었는데,라고 할까, 나 자신이 가공의 '나'를 지렛대의 받침점으로 삼아 소설 세계를 만들어내고 크게 펼쳐가는 것을 하나의 목적으로 삼았는데, 그러다 보니 점점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소설의 분량이 늘어나고 범위가 커지면서 '나'라는 인칭만으로는 약간 비좁고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나(남성형)'와 '나(여성형)'라는 두 종류의 일인칭을 각 장별로 분류해가며 썼는데 그것도 일인칭 기능의 한계를 타개해보려는 시도 중의 하나였습니다.

  일인칭만을 사용한 장편소설은 『태엽 감는 새』(1994, 1995)가 마지막 작품인 셈입니다. 그런데 분량이 그만큼 길어지자 '나'의 시점으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어서 곳곳에 다양한 소설적 연구를 도입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서술을 끼워 넣고 긴 서간문을 끼워 넣고 ‥‥‥. 아무튼 온갖 화법의 테크닉을 도입해 일인칭 구조적 제한을 돌파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여기까지가 한계다'라고 느끼는 바가 있어서 그다음 『해변의 카프카』 (2002)에서는 반절만 삼인칭으로 대체했습니다. 카프카 소년의 장은 그때까지 해왔던 대로 '나'라는 화자로 이야기하지만 그 이외의 장은 삼인칭입니다. 절충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반절이나마 삼인칭의 목소리를 도입해서 소설 세계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적어도 나 자신은 이 소설을 쓰면서 『태엽 감는 새』의 집필 때보다 기법적인 면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고 느꼈습니다. [p240~242]

 

 

 

   10. 누구를 위해서 쓰는가

 

 

   내가 작가가 되고 정기적으로 책이 출간되는 동안에 한 가지 몸으로 배운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쓰든 결국 어디선가는 나쁜 말을 듣는다'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긴 소설을 쓰면 '너무 길다.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반으로 줄여도 충분하다'라고 하고, 짧은 소설을 쓰면 '내용이 얄팍하다. 엉성하다. 명백히 태만한 티가 난다'라고 합니다. 똑같은 소설을 어떤 곳에서는 '같은 얘기를 되풀이한다. 매너리즘이다. 따분하다'라고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전작이 더 낫다. 새로운 시도가 겉돌고 있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미 이십오 년 전쯤부터 '무라카미는 시대에 뒤떨어진다. 이제 끝났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불평을 늘어놓는 쪽에서야 간단하겠지만 (생각나는 대로 입에 올릴 뿐 구체적인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 말을 듣는 쪽에서는 일일이 진지하게 상대했다가는 우선 몸이 당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절로 '뭐든 상관없어. 어차피 나쁜 말을 들을 거라면 아무튼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자'라고 하게 됩니다.

리키 넬슨이 만년에 발표한 노래 <가든 파티>에는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해줄 수 없다면

   나 혼자 즐기는 수밖에 없지"

  이런 기분, 나도 잘 압니다. 모두를 즐겁게 해주려고 해봐도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오히려 나 자신이 별 의미도 없이 소모될 뿐입니다. 그러느니 모른 척하고 내가 가장 즐길 수 있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만일 평판이 좋지 않더라도, 책이 별로 팔리지 않더라도 '뭐, 어때, 최소한 나 자신이라도 즐거웠으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납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재즈 피아니스트 텔로니어스 멍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할 말은 네가 원하는 대로 연주하면 된다는 거야. 세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런 건 생각할 것 없어. 연주하고 싶은 대로 연주해서 너를 세상에 이해시키면 돼. 설령 십오 년, 이십 년이 걸린다고 해도 말이야."

  물론 나 자신이 즐거우면 그게 결과적으로 뛰어난 예술 작품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말할 것도 없지만, 거기에는 준열한 자기 상대화 작업이 필요합니다. 최소한의 지지자를 확보하는 것도 프로로서 필수 조건입니다.

  ‥‥‥ (중략)

  중요한 것, 교환 불가능한 것은 나와 그 사람이 이어져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어디서 어떤 상태로 이어져 있는지, 세세한 것 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참 저 아래쪽, 어두컴컴한 곳에서 나의 뿌리와 그 사람의 뿌리가 이어져 있다는 감촉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깊고 어두운 곳이라서 잠깐 내려가 상황을 살펴본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라는 시스템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이어졌다고 감지합니다. 양분이 오고 간다고 실감합니다.

  그렇지만 나와 그 사람은 뒷골목을 걷다가 마주치더라도, 지하철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더라도,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앞뒤로 줄을 서 있더라도, 서로의 뿌리가 이어진 것은 (대부분의 경우)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서로 낯선 이들로서 그냥 스쳐 지나가고, 아무것도 모른 채 각자 갈 길을 갈 뿐입니다. 아마 두 번 다시 마주칠 일도 없겠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땅속에서, 일상생활이라는 표층을 뚫고 들어간 곳에서, '소설적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공통의 이야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합니다. 내가 상정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독자입니다. 나는 그런 독자들이 즐겁게 읽어주기를, 뭔가 느껴주기를 희망하면서 매일매일 소설을 씁니다. [p269~272]

 

 

 

     나의 하루는 매일매일 소설 한 권의 삶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요즘은 그 생각이 틀렸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하루가 아니라 내가 만난 이들의 하루하루가 소설이었던 것이다. 그 소설을 읽는데 집중한다. 주인공의 이야기뿐 아니라 주변인들의 사소한 등장 부분도 놓치지 않으려고 작은 눈을 부릅뜨고 매일매일의 소설을 읽는다. 날마다 클라이막스를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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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리지낼리티에 대해서

   그런 나 자신의 체험에 따라 생각한 것인데, 자신만의 오리지널 문체나 화법을 발견하는 데는 우선 출발점으로서 '나에게 무엇을 플러스해간다' 는 것보다 오히려 '나에게 무언가를 마이너스 해간다'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너무도 많은 것들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정보 과다라고 할까 짐이 너무 많다고 할까, 주어진 세세한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자기표현을 좀 해보려고 하면 그런 콘텐츠들이 자꾸 충돌을 일으키고 때로는 엔진의 작동 정지 같은 상황에 빠집니다. 그러니 어떻게도 뛰어볼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우선 필요 없는 콘텐츠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정보 계통을 깨끗하게 해두면 머릿속은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꼭 필요하고 무엇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지, 혹은 전혀 불필요한지를 어떻게 판별해나가면 되는가.

이것도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하자면, 매우 단순한 얘기지만 '그것을 하고 있을 때, 당신은 즐거운가'라는 것이 한 가지 기준이라고 생각합나다. 당신이 뭔가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데 만일 거기서 자연 발생적인 즐거움이나 기쁨을 찾아낼 수 없다면, 그걸 하면서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뭔가 잘못된 것이나 조화롭지 못한 것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때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즐거움을 방해하는 쓸데없는 부품, 부자연스러운 요소를 깨끗이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p106]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얘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야기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자유로움은 멀어져 가고 풋워크는 둔해집니다. 풋워크가 둔해지면 문장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힘이 없는 문장은 사람을 -혹은 자기 자신까지도-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하면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나비처럼 가벼워서 하늘하늘 자유롭습니다. 손바닥을 펼쳐 그 나비를 자유롭게 날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문장도 쭉쭉 커나갑니다. 생각해 보면, 굳이 자기표현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보통으로, 당연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뭔가 표현하기를 원한다. 그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자연스러운 문맥 속에서 우리는 의외로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p110]

   오리지낼리티란 무엇인가, 그것을 말로 정의하기는 몹시 어렵지만 그것이 몰고 오는 심적인 상태를 묘사하고 재현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나는 가능하다면 소설을 쓰는 일로 그러한 '심적인 상태'를 내 안에서 다시 일으켜보고 싶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로 멋진 기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라는 날 속에 또 다른 새로운 날이 생겨난 것 같은, 그런 상쾌한 기분입니다.

그리고 만일 가능하다면 내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그것과 똑같은 기분을 맛보게 하고 싶다. 사람들의 마음의 벽에 새로운 창을 내고 그곳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고 싶다. 그것이 소설을 쓰면서 항상 내가 생각하는 것이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이론 따위는 빼고, 그냥 단순하게. [p114]

5, 자, 뭘 써야 할까?

   각자 '잘하는 분야'를 척척 전면에 내세우면 됩니다. 자신이 잘하는 언어를 무기로 삼아서 자신의 눈에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것을 자신이 쓰기 쉬운 말로 써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세대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도 없고 또한 반대로 묘한 우울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게 삼십오 년 전이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건 소설이 아니다' '이런 건 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선행하는 세대에게서 엄격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런 상황이 어쩐지 부단스러워서 (라고 할까, 귀찮아서) 나는 상당히 오랜 기간 일본을 떠나 외국의 잡음 없는 조용한 곳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소설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혹시 내가 잘못하는 건가라는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고 딱히 불안을 느낀 적도 없습니다. '실제로 나는 이렇게밖에 쓸 수 없는데 뭐, 이렇게 쓰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잖아. 그게 뭐가 나빠?' 하고 모른 척 넘어가버렸습니다. 아직은 불완전할지도 모르지만 나중에는 좀 더 제대로 된 수준 높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쯤에는 시대도 변화를 달성할 것이고 내가 해온 일은 틀리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증명할 것이다,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어째 좀 낯 두꺼운 소리 같습니다만.

   그것이 현실로 증명되었는지 어떤지, 지금 이렇게 주위를 빙 둘러봐도 나 자신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문학에서는 뭔가 증명되는 일이라고는 영원히 없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거야 어찌 됐든, 삼십오 년 전에도 지금 현재도 내가 하는 일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신념에는 거의 흔들림이 없습니다. 앞으로 삼십오 년쯤 지난 다음이라면 다시 새로운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르지만, 그 전말을 내가 지켜보는 건 연령상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이든 내 대신 잘 지켜봐주십시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세대에게는 새로운 세대만의 소설적 소재가 있고, 그 소재의 형태나 무게로부터 역산逆算해서 그것을 실어 나를 비이클의 형태나 기능이 설정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소재와 비이클의 상관성에서, 그 접면接面의 바람직한 자세에서, 소설적 리얼리티라는 것이 탄생합니다.

   어떤 시대에도 어떤 세대에도 각각 고유의 리얼리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소설가에게는 스토리에 필요한 소재를 꼼꼼히 수집하고 축적하는 작업이 지극히 중요하다는 사실은 아마 어떤 시대에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주위를 주의 깊게 둘러보십시오 - 라는 것이 이번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세계는 따분하고 시시한 듯 보이면서도 실로 수많은 매력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원석이 가득합니다. 소설가란 그것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멋진 것은 그런 게 기본적으로 공짜라는 점입니다. 당신이 올바른 한 쌍의 눈만 갖고 있다면 그런 귀중한 원석은 무엇이든 선택 무제한, 채집 무제한입니다.

이런 멋진 직업, 이거 말고는 별로 없는 거 아닌가요? [p138~140]

6.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든다- 장편소설 쓰기

   초고가 완성되면 잠시 한숨 돌리고(그때그때 다르지만 대개는 일주일쯤 쉽니다) 첫 번째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 내 경우 첫머리부터 아무튼 죄다 북북 고쳐버립니다. 여기서는 상당히 크게, 전체적으로 손을 봅니다. 나는 아무리 긴 소설이라도 복잡한 구성을 가진 소설이라도 처음에 계획을 세우는 일 없이 전개도 결말도 알지 못한 채 되는대로 생각나는 대로 척척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그러는 게 쓰는 동안 단연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쓰다 보면 결과적으로 모순되는 부분,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이 나옵니다. 등장인물의 설정이나 성격이 중간에 홱 바뀌어 버리기도 합니다. 시간 설정이 앞뒤로 오락가락하기도 합니다. 그런 삐걱거리는 부분을 하나하나 조정해서 이치에 맞는 정합적인 이야기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상당한 분량을 통째로 빼버리고 어떤 부분은 늘리고 에피소드를 여기저기에 덧붙이기도 합니다.

『태엽 감는 새』를 썼을 때처럼 '이 부분은 전체적으로 뭔가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몇 개의 장을 통째로 삭제하고 삭제한 것을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다른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만들어 낸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상당히 극단적인 예고, 대개의 경우 삭제한 부분은 삭제된 채 그대로 사라집니다.

   그 고쳐쓰기 작업은 한두 달은 걸립니다. 그것이 끝나면 다시 일주일쯤 쉬었다가 두 번째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 이것도 첫머리부터 쭉쭉 고쳐나갑니다. 단지 이번에는 좀 더 세세한 부분을 살펴보면서 꼼꼼하게 고칩니다. 이를테면 풍경 묘사를 세밀하게 써넣거나 대화의 말투를 조정하기도 합니다. 스토리 전개에 맞지 않은 점은 없는지 점검하고, 한 번 읽어서 알기 어려운 부분은 쉽게 풀어써서 이야기의 흐름을 보다 원활하고 자연스럽게 만듭니다. 대수술이 아니라 세세한 수술을 하나하나 더해가는 작업입니다. 그것이 끝나면 다시 한숨 돌리고 그다음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수술이라기보다 수정에 가까운 작업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소설의 전개에서 어떤 부분의 나사를 단단히 조여야 할지, 어떤 부분의 나사를 조금 헐렁하게 풀어둘지를 결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장편소설은 말 그대로 '긴 이야기'이기 때문에 구석구석까지 나사를 팽팽히 조여버리면 독자는 숨이 막힙니다. 군데군데 문장을 풀어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 쪽의 호흡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체와 세부의 균형을 적절히 유지하는 것. 그런 관점에서 문장의 세밀한 조정을 행합니다. ‥‥‥(중략)

   가능하면 보름에서 한 달쯤 작품을 서랍 속에 넣어두고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립니다. 혹은 잊어버리려고 노력합니다. 그 사이에 여행을 하거나 번역 일을 몰아서 하기도 합니다. 장편소설을 쓸 때는 일하는 시간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공장 등에서의 제작 과정에, 혹은 건축 현장에 '양생養生'이라는 단계가 있습니다. 제품이나 소재를 '재워둔다'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놔두면서 바람을 쐬게 한다, 혹은 내부가 단단히 굳도록 한다는 것이지요.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양생을 확실하게 해주지 않으면 덜 말라서 무른 것, 고르게 배어들지 않은 것이 나오고 맙니다.

   그렇게 일단 진득하게 재운 다음에 다시 세세한 부분의 철저한 고쳐 쓰기에 들어갑니다. 진득하게 재운 작품은 나에게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결점도 아주 또렷하게 보입니다. 깊이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이 됩니다. 작품이 '양생'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 머리도 다시 멋지게 '양생'이 된 것입니다.

   양생도 진득하게 했다, 그런 다음에 어느 정도 수정도 마쳤다. 자, 이 단계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것이 제삼자의 의견입니다.

‥‥‥(중략)

   몇 번이나 퇴고를 해야 하느냐,라고 물어도 정확한 횟수까지는 잘 모릅니다. 원고 단계에서 이미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고쳤고, 출판사에 건너가 교정지가 된 다음에도 상대가 지겨워할 만큼 몇 번씩 교정지를 내달라고 합니다. 교정지가 새까맣게 해서 돌려주고, 그렇게 해서 재차 보내준 교정지를 다시 새까맣게 하는 일의 반복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건 끈기가 필요한 작업이지만 나에게는 그리 고통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한 문장을 수없이 다시 읽으면서 여운을 확인하고 말이 순서를 바꾸고 세세한 표현을 변경하는 등의 '망치질'을 나는 태생적으로 좋아합니다. 교정지가 새까매지고 책상에 늘어놓은 열 자루 정도의 HB 연필이 점점 짧아지는 것을 볼 때마다 큰 희열을 느낍니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그런 일이 진짜로 재미있어요. 하염없이 하고도 전혀 질리지 않습니다.

   내가 경애하는 작가 레이먼드 카버도 그런 '망치질'을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작가의 말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편의 단편소설을 써내고 그것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고 쉼표 몇 개를 삭제하고, 그러고는 다시 한번 읽어보고 똑같은 자리에 다시 쉼표를 찍어 넣을 때, 나는 그 단편소설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라고. 그 기분, 나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것과 똑같은 일을 나도 수없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가 한계다. 이 이상 더 고치면 도리어 맛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라는 미묘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는 쉼표를 빼고 넣는 것을 예로 들어 그 포인트를 적확하게 시사한 것입니다.

‥‥‥(중략)

   시간은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매우 소중한 요소입니다. 특히 장편소설에서는 '사전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내 안에서 나와야 할 소설의 싹을 틔우고 통통하게 키워가는 '침묵의 기간'입니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기분을 내 안에 서서히 만들어 갑니다. 그런 사전 작업에 들이는 시간, 그것을 구체적인 형태로 일으켜나가는 기간, 일어선 것을 냉암소에서 진득하게 '양생하는' 기간, 그것을 밖으로 꺼내 자연의 빛을 쏘이고 단단히 굳어져가 는 것을 세세히 검증하고 쿵쾅쿵쾅 망치질을 하는 시간‥‥‥ 그런 과정 하나하나에 충분한 시간을 들였느냐 아니냐는 오로지 작가 본인만이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작업 하나하나에 들인 시간의 퀄리티는 틀림없이 작품의 '납득성'이 되어서 드러납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역력한 차이가 발생합니다. [p152~166]

7. 한없이 개인적이고 피지컬한 업業

   소설가의 기본은 이야기를 하는 것 tell a story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의식의 하부에 스스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속 어두운 밑바닥으로 하강한다는 것입니다. 큼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작가는 좀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큼직한 빌딩을 지으려면 기초가 되는 지하 부분도 깊숙이 파 들어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치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그 지하의 어둠은 더욱더 무겁고 두툼해집니다.

   작가는 그 지하의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 - 즉 소설에 필요한 양분- 을 찾아내 손에 들고 의식의 상부 영역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형태와 의미를 가진 문장으로 전환해나갑니다. 그 어둠 속에는 때로는 위험한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곳에서 서식하는 것은 때때로 다양한 형상을 취하며 사람을 미혹시키려 합니다. 또한 표지판도 지도도 없습니다, 미로 같은 곳도 있습니다. 지하 동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칫 방심하면 길을 잃고 헤매고 맙니다. 그대로 지상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 어둠 속에는 집합적 무의식과 개인적 무의식 등이 뒤섞여 있습니다. 태고와 현대가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해부하는 일 없이 그대로 들고 돌아오는데 어떤 경우에 그 패키지는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 같은 깊은 어둠의 힘에 대항하려면, 그리고 다양한 위험과 일상적으로 마주하려면 반드시 피지컬한 강함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필요한지 수치로 제시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강하지 않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강한 편이 훨씬 더 좋겠지요. 그리고 그 강함이란 타인과 비교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강함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강함을 말합니다. 나는 매일매일 소설을 계속 써나가는 작업을 통해 그것을 조금씩 실감하고 차츰차츰 깨달았습니다. 마음은 가능한 한 강인하지 않으면 안 되고 장기간에 걸쳐 그 마음의 강인함을 유지하려면 그것을 담는 용기인 체력을 증강하고 관리 유지하는 것이 불가결합니다. [p 188~190]

   자신이 가진 (많든 적든 한정된) 재능을 시간을 들여 조금이라도 높이고 힘찬 것으로 만들어가기를 희망한다면, 내 이론은 나름대로 유효성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지를 최대한 강고하게 할 것, 또한 동시에 그 의지의 본거지인 신체를 최대한 건강하게, 최대한 튼튼하게, 최대한 지장 없는 상태로 유지할 것 -그것은 곧 당신의 삶의 방식 그 자체의 퀄리티를 종합적으로 균형 있게 위로 끌어올리는 일로 이어집니다. 그런 견실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거기서 창출되는 작품의 퀄리티 또한 자연히 높아질 것,이라는 게 나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이 이론은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예술가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삶의 방식의 질을 레벨업 해나갈 것인가. 그 방법은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각자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만의 스토리와 자신만의 문체를 각자 찾아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프란츠 카프카를 예로 들자면, 그는 마흔이라는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남겨진 작품의 이미지로 보면 그야말로 예민하고 육체적으로 허약한 느낌이 들지만, 의외로 몸을 만드는데 진지하게 신경을 썼던 모양입니다. 철저하게 채식을 하고 여름이면 몰다우 강에서 하루 1마일(1,600미터) 씩 수영을 하고 날마다 시간을 들여 체조를 했다고 합니다. 카프카가 진지한 얼굴로 체조에 열중하는 모습, 잠깐 좀 구경해 보고 싶지요?

   나는 살아가고 성장해가는 과정 속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도 나만의 방식을 어떻게든 찾아나갔습니다. 트롤럽 씨는 트롤럽 씨의 방식을 찾아냈고 카프카 씨는 카프카 씨의 방식을 찾아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방식을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모두가 제각각 사정이 다를 것입니다. 모두가 제각각 자기만의 持論지론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 방식이 조금이나마 참고가 된다면 -말을 바꾸자면 그것이 조금이나마 보편성을 가졌다면,이라는 얘기입니다 - 나로서는 물론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p200~202]

   밑줄 긋기를 옮기다 보니 박완서 선생님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밑줄 긋기에 대한 정의를 "독자가 책에 밑줄을 긋는 것은 그게 명문이기 때문이 아니라 읽을 당시의 마음 상태에 와닿기 때문일 것이다." 라고 내려놓으셨다. 그렇다. 오래된 책에서 밑줄의 흔적을 발견하면 그 책을 읽었을 때의 심경이 고스란히 짚어져 오기도 한다. 책은 그렇게 위로를 남기고 당연하다는 듯이 잊힌다. 다시 펴 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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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한 손 창비시선 297
고영민 지음 / 창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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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갈아엎기 전의 봄 흙에게

                           고영민

 

 

  산비알 흙이

  노랗게 말라 있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푸석푸석 들떠 있다

  저 밭의 마른 겉흙이

  올봄 갈아엎어져 속흙이 되는 동안

  낯을 주고 익힌 환한 기억을

  땅속에서 조금씩

  잊는 동안

  축축한 너를,

  캄캄한 너를,

  나는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나

  슬픔이라고 불러야 하나

           시집 [공손한 손] 중에서

 

 

 

   봄이다. 마른 흙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삐죽빼죽한 새싹들은 왕성한 생명력으로 세상 한 귀퉁이를 밀고 나오고 누가 보든 말든 스스로 피어나는 꽃들은 이어달리기를 시작하는 봄, 어느 곳으로라도 바라보기 좋은 계절 봄이다. 벚꽃들이 막 피기 시작하는 꽃구름 동산을 걸어 다른 세계, 내가 아직 갈아엎기 전인 '노랗게 마른' 흙의 세계로 들어간다. '올봄 갈아엎어져 속흙이 되는 동안 낯을 주고 익힌 환한 기억을' 가질 나의 새로운 직장, 개나리색 빌딩으로 출근한 지 딱 40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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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창비시선 374
안현미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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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봄으로 한 여자가 입장한다 맨발이다 일순간 일제히 모든 시선이 여자가 끌고 온 여행가방의 테두리처럼 상처투성이인 그 발에 주목한다 사위는 적막을 껴입은 듯 고요하다 여행가방처럼 먼 길을 끌려다닌 여자의 그림자가 여자를 끌어안고 먼저 쓰러진다 누가 누구의 배후인가 눈물이 고인다 문제를 풀기 위해선 문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눈물도 그와 같다 문제는 뜻밖의 문제가 늘 다시 되풀이된 다는 것

 

   그 봄으로 바퀴 달린 신발을 신은 아이가 등장한다 그 봄의 입구에는 19금(禁) 표시가 붙어 있다 누가 누구를 금지하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봄이 이어진다 봄을 사용하기 위해선 봄 안으로 입장해야 한다 문제는 뜻밖의 문제가 늘 다시 되풀이된다는 것

 

 

 

 

   봄밤

 

 

 

  봄이고 밤이다

  목련이 피어오르는 봄밤이다

 

  노천카페 가로등처럼

  덧니를 지닌 처녀들처럼

  노랑 껌의 민트향처럼

  모든 게 가짜 같은

  도둑도 고양이도 빨간 장화도

  오늘은 모두 봄이다

  오늘은 모두 밤이다

 

  봄이고 밤이다

  마음이 비상착륙하는 봄밤이다

 

  활주로의 빨간 등처럼

  콧수염을 기른 사내들처럼

  눈깔사탕의 불투명처럼

  모든 게 진짜 같은

  연두도 분홍도 현기증도

  오늘은 모두 비상이다

  오늘은 모두 비상이다

 

  사랑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조금씩 이방인이 될 수 있다

  그해 봄밤 미친 여자가 뛰어와 내 그림자를 자신의 것이라 주장했던 것처럼

 

 

 

 

  봄봄

 

 

  그 봄으로 한 여자가 입장한다

 

  망할 놈의 봄비

  망할 놈의 제비

 

  그 봄에 한 여자가 아프다

 

  봄이 두개라면?

  봄이 두부라면?

 

  그 봄에 한 여자가 웃는다

 

  자신이 끌고 다닌 바퀴 달린 가방처럼

  테두리가 사라지고 있는 영혼처럼

 

  다시 테두리로 되풀이되는

  다시 테두리만 되풀이되는

 

 

                       안현미 시집[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중에서

 

 

 

  안현미 시인의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에는 세 편의 봄이 있다. 봄만 있는 것은 아니고 사계절이 뚜렷한데 그중 봄에 관한 시편이 세 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제목에는 세 편이지만 내용 중에는 하나 더 있다.(꼭 정확하지는 않다. 또한 중요하지도 않다)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라는 김수영시인의 『달나라의 장난』에서 차용해온 긴 제목의 시는 이렇다.
 
 

 

  봄이고 밤이다. 목련꽃이 촛불처럼 피는 봄밤이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분리장벽 설치, 중국의 티베트 독립 유혈진압 사태 등 지구 곳곳이 아픈 밤이다. 가장 늦은 통일을 가장 멋진 통일로 이루어내야 할 국가의 새로운 장관은 색깔이 다른 사람들은 눈앞에서 꺼져버리라고 호통치는 시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련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최첨단에서 꽃을 피우는 밤이다. 그리하여 절망할 수 없는 밤이다. 온몸으로 , 온몸으로, 힘을 주라, 힘을 주라, 꾹꾹 눌러쓰는 봄이다.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 아아 봄은 갔다. 그러나 다시 봄은 온다. 와야만 한다. 그리하여 절망할 수 없는 봄이다. 바람이 분다. 비가 온다. 분단과 분쟁의 이 미친 비바람 앞에서도 싸우라, 싸우라, 목련이여 설움이여! 나 자신의 절망이라는 검은 짐승과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 목련이여 설움이여!

 

 

 

 

 

 

   '콩콩두부家' 시절 가게 앞에 목련 두 그루가 있었다. 나무를 본 순간부터 설레었다. 끼니도 거르던 가난한 시절 수원 성곽길을 걸으면 집집마다 꽃등이 내걸리듯 목련이 피어있는 생김새 비슷비슷한 집들이 부러웠다. 혹시라도 나중에 나도 내 집을 갖는다면 목련 한 그루 꼭 심으리라 다짐하던 그 목련이 두 그루라니. 뒷마당 가득한 벚나무보다 두 그루 목련이 우리들 남은 생을 꽃등으로 우뚝 걸릴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역시나 목련은 꽃을 장하게 피워냈다. 저절로 '봄이고 밤이다. 목련이 촛불처럼 피는 봄밤이다'라고 중얼거리고는 했다. 목련을 보면 여전히 그 시절이 오롯이 떠오른다. 긴 생에서 삼 년에 불과한 시간이었는데 뚜렷한 흔적을 남긴 시간이었고 목련이다. 목련이 피어나길 간절하게 기다리던 그 시절 자주 읽던 안현미 시인을 다시 읽었다. 새롭다. 나이를 먹고 생각이 바뀌고 환경이 바뀐다는 건 시를 읽는 시야도 바뀌는 건가 싶다. 그때는 목련이나 봄에 마음을 뺏겼다면 지금은 바퀴달린 가방을 끌고 등장하는 한 여자의 맨발에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가방의 바퀴처럼 테두리가 닳아빠진 여자의 맨발이 이미지로 살아나는 것이다. 봄과 여자는 매번 같이 등장하는데 화들짝 피어나는 봄 앞에 시나브로 스러져가는 여자의 모습이 중첩된다. 시인은 집집마다 등을 켜 놓은 듯 환해지는 목련에도 소멸해가는 아픈 상처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시인의 봄은 찬란한 만큼 아팠던 것이다. 그 여자는 바로 나 자신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하면서, 우리 모두의 모습인 것을 시인은 한 여자의 등장으로 지구의 봄을 완성했다.

  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았다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냥 살아지니까 살아온 시간이었단 생각이 든다. 살아온 시간이 켜켜이 쌓인 사람들을 만나면서 삶은 사람의 준말일 수도 있다는 시인의 생각에 동의한다.

  비가 내린다. '망할 놈의 봄비'는 아니다. 건조한 세상, 먼지 가득한 세상을 씻어내는 고마운 봄비다. 꽃은 저 홀로 피어나며 자리를 지키고 봄은 속절없이 흘러갈 것이다. '연두도 분홍도 현기증도 오늘은 모두 비상' 인 날들은 계속될 것이다. '다시 테두리로 되풀이되는' 삶을 지켜보는 시선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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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어나더커버 특별판, 양장 합본)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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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여자 --20세기의 봄

          조선희 장편소설 (한겨레출판)

    몽양이 고명자에게

   이건 너무 늦은 충고인 것 같네만 60년 살아본 경험에서 나오는 얘길세.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지. 그중에 어떤 사람은 지나가버리고 어떤 사람은 머무르네. 한때 자기 몸처럼 소중했던 사람이 짧은 인연으로 끝나기도 하고 금석처럼 굳세고 단단할 것 같은 관계가 어이없이 깨지기도 하네. 사람들은 각기 자기만의 인생 사이클이 있게 마련이니까. 저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것인데 남이 어찌할 수 있겠나. 억지로 어찌하려다 보면 집착이 되고 그게 우리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도둑질해가버린다네. 그러니 지나가는 사람은 지나가게 두고 머무는 사람은 머무르게 두게. p661

   1945년 당시 조선에 관한 한 루스벨트는 스탈린보다 무지했고, 미국 정부는 아시아보다 유럽에 관심 있었고, 태평양 사령관 맥아더는 조선보다는 일본에 몰두했으며, 군정 책임자인 하지 중장은 한국엔 처음이었다. 하지는 어느 정파가 자신의 우군인지, 이 난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될 정치 지도자가 누군인지 헷갈렸다. 미 군정이 남로당을 불법화시키는 한편 이승만, 김구 같은 극우로도 복잡한 한국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판단에 도달한 끝에 그 중간 지대의 여운형과 김규식을 자신의 파트너로 찍었을 때 여운형이 암살돼버렸다.

   분할 점령이 영구 분단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분할을 피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들이 주어졌지만 불발의 역사에 그치고 만 것은 남북을 통틀어 그것을 현실화 시킬 능력을 가진 정치 지도자가 없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다만 가장 근접한 인물이라면 그건 여운형이었을 것이다.

   맹목적으로 자신을 정의로, 타인을 불의로 설정하는 지점에서 역사의 비극이 싹튼다.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을 점령한 것은 분단의 시작일 뿐이었다. 분단을 완성한 것은 어리석음과 아집과 독선이었다. 극악한 식민지 상태에서 갓 벗어난 사람들에게 대화와 타협의 매너를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관대함과 현명함의 미덕은 굶주림과 인권유린이 없는 환경에서 훈련되는 것이다. P672

   이월부터 새롭게 출근하는 직장 근처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교차해서 걸려있는 교회가 있다. 처음에는 무슨 외교공관이거나 군부대 사무실이겠거니 지나쳤다. 요란한 극우 표현의 현수막들에 덕분에 교회임을 알게 되었는데 출퇴근마다 앞을 지나면서 [세 여자]를 생각했다. 우리 역사가 잃어버린 세 여자의 삶과, 몽양에 대해, 우리의 근대사에 대해 무지하고 몽매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분단을 완성한 것은 어리석음과 아집과 독선이었다. 극악한 식민지 상태에서 갓 벗어난 사람들에게 대화와 타협의 매너를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관대함과 현명함의 미덕은 굶주림과 인권유린이 없는 환경에서 훈련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음과 아집과 독선의 덫에 갇혀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지나가는 사람은 지나가게 두고 머무는 사람은 머무르게 두"어 야만 할까? 봄 햇살 눈부신 3월 19일이다. 이곳에서 한 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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