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에도 순서가 있듯, 삶도 그럴 것이다. 완벽한 메이크업을 마치고 난 얼굴, 그것을 진짜 내 얼굴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화장으로 한 겹 가리고 나면 내 얼굴에 대하여 스스로 고개 돌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인생이 점점 무서운 속도로 달려드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 내모습을 멀뚱멀뚱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손바닥으로 황망히 얼굴을 가렸다.

성장은, 긍정적 의미로 충만한 단어다. 고통을 통해 정신의 키가 한 뼘 자랐으며 보다 성숙한 인간에의 길에 한발 다가섰다고 믿고싶은 심정은 십분 이해한다. 그렇게라도 자신을 합리화시키면 마음이 좀 편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 P42

후회하지는 않으련다. 혼자 금 밖에 남겨진 자의 절박함과 외로움으로 잠깐 이성을 잃었었다는 핑계는 대지 않겠다. 저지르는 일마다하나하나 의미를 붙이고 자책감에 부르르 몸을 떨고, 실수였다며깊이 반성하고, 자기발전의 주춧돌로 삼고, 그런 것들이 성숙한 인간의 태도라면, 미안하지만, 어른 따위는 영원히 되고 싶지 않다. 성년의 날을 통과했다고 해서 꼭 어른으로 살아야 하는 법은 없을것이다. 나는 차라리 미성년으로 남고 싶다. 책임과 의무, 그런 둔중한 무게의 단어들로부터 슬쩍 비껴나 있는 커다란 아이, 자발적 미성년.
깊은 바다를 유영하는 한 마리 물고기처럼 살면 안 되는 걸까. 이 - P43

단단한 제도의 틈과 틈 사이를 자유롭게 흘러 다니면서? 그러다 다른 물고기나 산호초와 문득 눈이 마주치면, 생긋 한번 웃어주고는이내 제 길을 가는 거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고, 어디에도 미련두지 않고! 물론 그런 삶이 행복할지는 미지수다. 타인의 온기를 그리워하고 소통을 원하고 누군가와 안정적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내안의 질긴 열망은 또 어쩌고? 까딱 잘못했다간 이렇게도 저렇게도할 수 없는 모순과 자가당착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아아, 하지만 예단은 금물!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지금은 그냥 이대로 한번 가보는 거다. 미리 준비하고 예측한다고해서 삶이 어디 호락호락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굴러가주던가. 그리고 내가 원했던 방향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로, 나는 지금 여기 도착해 있지 않은가. 나는 단호하게 와인 색 립스틱을 집어 들어, 입술에 발랐다. 안 어울리면 어떠랴. 내일은 베이지핑크를, 모레는 단풍잎 같은 빨강을 바르면 된다. 아니면 까짓것. 깨끗이 지워버리면된다. - P44

어느 쪽의 내가 이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선택을 하건 기나긴 어제가 드디어끝났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아침 여덟 시. 출근 준비를 모두 마쳤다. 또다시 새날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별 다를 바 없는 하루. 그러나 어제와 다른 하루.
현관 앞에 서서 잠시 주저하다가 굽 없는 갈색 스웨이드 단화에 발을 꿰었다. 이 구두는 오늘 나를 어떤 곳으로 데려다줄까? 그 미지의 시간을 향하여 나는 용감한 척, 걸음을 내디뎠다. - P45

사무용 의자에도 계급이 있다. 그 자명한 진리를 미처 모르던 순진무구의 시절이 가끔은 사무치게 그립다.
우리 회사의 의자는 모두 네 개의 등급으로 나뉜다. 사장실 의자, 이사실 의자, 부장들의 의자, 그리고 과장급 이하 평사원들의 의자. 목 받침이 없으며 우레탄 재질의 팔걸이를 가진 중국산 사무용의자에 앉아 나는 종일을 보낸다. 가끔 외근이 있긴 하지만, 한 달에 사나흘 정도는 마감이라는 명목 아래, 아침 아홉 시부터 자정이 넘을 때까지 엉덩이를 뭉개고 있어야 한다. 전체적으로 따지면 대한민국 사무직 노동자의 평균 노동 시간에 비해 결코 적은 양은 아닐것이다. - P54

-은수야..... 실은 나 오늘 회사 관뒀어.
-헉. 왜?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유희는 누구나 이름을 대면 알만한 중견기업 전산실의 과장이었다.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지구상의 어떤 생물체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한다고 공언하고 다니는 만큼 그녀는 우리 셋 중에 모아놓은 돈도 제일 많고 승진도 제일 빠르며 연봉도 제일 높았다. 그 번듯한 회사를 그만두다니. 어디 더더욱 번듯한 데로 스카우트라도 된 게지.
-나, 뮤지컬배우가 될 거야.
-....................................
저 끝없는 말줄임표야말로 이 순간의 솔직한 심정이다. 뮤지컬 배우라. 멋지다. 멋져. 그렇지만 31세 미혼 여성의 장래희망으로는 좀 너무하지 않은가? 차라리 주부 가요 열창이나 알뜰 주부 선발 대회에서 우승하겠다는 꿈이 현실적일 것 같다. 물론 인정한다. 내 친구 남유희, 노래 잘한다. 댄스도 수준급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노래방이나 나이트클럽에서의 일이었다. ‘가무‘가 특기는 될망정 어떻게 직업이 되겠는가. 십 년 전이면 모를까, 두 달 뒤면 우리는 서른두살이었다. - P72

그녀는 벌써 뮤지컬배우 지망생을 위한 아카데미에 등록했으며 곧 재즈댄스와 연기 레슨도 받을 거라고 했다. 나이는 좀 많은 편이지만 타고난 감각이 있고 상대적으로 풍부한 인생 경험도 있으니 이만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지 않겠느냐며 벅찬 희망을 늘어놓았다. 모니터 가득 펼쳐지는 유희의 옹골찬 계획을 나는 멍한 눈길로 좇았다. 재인의 결혼 발표를 들었을 때와는 또 다른, 둔하고 벙벙한 충격이 숨골을 내리눌렀다. 재인과 유희는 미친 게 아니다. 재인은 재인대로, 유희는 유희대로 자기만의 길을 쉼 없이 찾아가고 있는 거다. 오직 나만 조그만 웅덩이의 썩은 물처럼 이 자리에 멈춰 있다는 자괴감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태오에게 ‘좋아요‘라는 답장을 보낸 건, 
유희가 ‘인생에 대한 용기!!‘를 전염시켜주어서일까? - P73

쇼핑과 연애는 경이로울 만큼 흡사하다.
한 개인의 파워를 입증하는 장(場)일뿐더러, 그 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취향을 가진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정서적 안도감을 느낀다.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이 있을 때는 경제력이 받쳐주지 않고, 경제력이 생겼을 때는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을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재화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쇼핑도 연애도 인간을 고뇌하게 한다. 인간 오은수도 지금, 깊은 번뇌에 빠져 있다. 인터넷 즐겨찾기의 맨 위에 등록해놓고 자주 들어가보는 곳은, 자동차 미니쿠퍼의 웹 사이트다. 미니의 앙증맞은 자태를 담은 사진이 모니터 가득 일렁인다. 온몸의 신경세포가 팽팽히 조여든다. 차 옆에는, 열 가지 색깔별로 칸칸이 나누어진 다트판이 놓여 있다. 그중 검정색 칸에 마우스를 올리면, 마술처럼, 자동차가 블랙으로 변한다. 마우스를 조작할 때마다 빨강, 파랑, 노랑. 하양 자동차가 한 대씩 차례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누구도 두대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 참으로 잔인한 아이디어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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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보시다시피 나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다만 이제 스무 살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떡국 몇 그릇 더 먹었다고 세상이훼까닥 바뀔 리 있겠는가. 열일곱이나 스물이나 어디 가서 여자애‘ 소리 듣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소녀 시절도 살아보면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다. 원하면 돈 벌 껀수도 얼마든지 널렸고 급할 땐 좀 치사하지만 울어버리면 된다. 아저씨 시대보다. 할머니 시대보다 솔직히 짱 멋지지 않은가? 그 이름도 찬란한 소.녀. 시. 대! - P95

그녀의 틈새,
눈을 감으면 그녀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어린 꽃잎에 번성하는 목화진딧물의 냄새, 갓 말린 바다 냄새, 처녀 양의 젖으로 만든 치즈 냄새, 혀끝이 열리고 온몸이 아리아리해지는 냄새,
태초의 냄새. 세상의 모든 냄새.
너의, 너 자신의 냄새. - P123

잘못 눌렀습니다. 비밀번호 네자리를 눌러주세요.
그녀의 생일, 너의 생일, 그녀의 집 전화번호 뒷자리, 너의 집전화번호 뒷자리...... 모두모두 그녀가 지정한 숫자가 아니다.
너는 암호를 풀지 못한 채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컴퓨터를 켜려다 그만둔다. 메일은 삼십 분 전에 확인했다. 그녀가 그사이에메일박스를 확인했을 리는 없어 보인다. 아니다. 삼십 분은 충분히 긴 시간 같기도 하다. 너는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녀의부재는 예고 없이 내린 폭설처럼 네 영혼을 지극한 혼돈으로 덮어버렸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악(惡)의 무수한 가능성들 때문에너는 한없이 불안하고 절박하다. - P131

너의 생리대에는 이제 희미한 연갈색 얼룩도 묻어 나오지 않는다. 한껏 부풀어오른 자궁 점막이 떨어져내리고 그 벗겨진 자리에 보드레한 막이 새로 돋을 채비를 할 동안까지도 너는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일주일 동안 너는 한 장의 일러스트도 그리지 못했다. 영어 교재 삽화의 마감 날짜도 지키지못했다. 출판사는 너와의 계약을 파기할 것이다. 당연하다. 계약이란 그런 것이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약속을 어기면 다른한쪽에서 응분의 조치를 취한다. 그녀와 너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으나, 어떤 계약도 맺지 않았다. 그녀가 어디에 있든 너에게 알릴 의무는 애초부터 없었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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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참 오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없을 것 같은 순간이 닥쳐와도 돌아가거나 피해 가는 길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었다. 마지막까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이성을 발휘한다면, 어쩌면 숲속에 숨겨진 지름길을 발견하게 될지도몰랐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참고 기다리며 지키면, 결국은 달콤한 열매를 얻게 된다. 나는 어둠침침한 계단을 한발 한발 걸어 올라갔다. - P17

 혜미의 아버지는 서울 시내 요지에 다섯 채쯤의 빌딩과열 채쯤의 다세대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혜미가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나는 다른 약속이 있다고 둘러댈까 하다가 그냥 옆자리에 올라탔다. 어차피 출발선이 다른 게임이었다.
내가 조그만 무역회사의 여사무원이 되어 나이 들어가거나, 물간 생선회와 식은 LA갈비찜이 포함된 싸구려 뷔페를 피로연으로 결혼식을 올릴 때, 혜미는 전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밀라노에서 패션 공부를 할 수도 있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오십평짜리 빌라트에 신혼 살림을 차릴 수도 있었다. 나는, 나는 다르다. 나는 혼자 힘으로 이 척박한 세상과 맞서야 했다. 진정으로 강한 여성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 P25

공업용 비닐로 덮인 실내에서는차가운 금속과 덜 마른 페인트의 냄새가 났다. 조심스레 시동을 걸어보았다. 엔진 소리는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대한민국에서 배기량 2,000cc급 자동차의 오너가 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2002년형 진주색 EF 소나타 골드. 그녀는 자신의 새 차가 마음에 들었다. - P42

차장님, 이거 비밀인데요. 권이사랑 선미. 글쎄 그 둘 사이가 심상치 않았대요. 나 참, 회사 땡땡이치고 지금도 같이 있는 거 아닌지 몰라. 그녀는 흥미롭게 눈망울을 반짝였으나 시간 관계상 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브랜든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그녀와 브랜든은 본사의 수석 부사장을 공항으로 영접 나가야 했다. 매끈한 서류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은 우아하고 완벽했다.
은색 렉서스의 옆자리에 올라타면서 그녀는 저 멀리 세워진 자신의 자동차에 홀낏 시선을 주었다. 차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다. 2002년형 EF 소나타, 사 년 연속 부동의 베스트셀러1위, 대한민국 도로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모델이었다.
이제 겨우 천 킬로미터를 주행했을 뿐이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녀는 자신의 새 차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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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가르친다는 것은 예술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를 주는것이 아니다. 대상과 마주해 놀라거나, 슬퍼하거나, 분노하거나,
기뻐하는 감성을 환기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할지 시행착오를 거듭해 왔는데, 이제는 코로나 사태까지 덮쳤다.
대면 수업은 불가능하고 많은 미술관, 영화관도 폐쇄됐다. 학생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작품을 감상한 뒤 소감이나 의견을나눌 수 없게 됐다. 이런 식으로 ‘예술‘을 가르칠 수 있을까? 어느 동료 교수(소설가이기도 하다)가 교육에는 ‘육감‘과 ‘육성‘이필요하다고 역설했는데, 정말이지 그렇다.
그렇긴 하나 나는 D군의 리포트에서 다소 위로를 받았다. D군은 위에 인용한 글을 다음과 같이 이어 나간다. "만약 내일이 세상이 끝나 남은 24시간을 좋아하는 데 써도 된다면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싶다. 그리고 미술관에 가서 르네상스 시대의 정열적인 작품들을 기억 속에 담아 두고 싶다." - P406

"지금 또다시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초인종을 누르고 있다......."
지난 9월 11일 일본 펜클럽에서 발표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긴급 메시지‘는 이 한 문장으로 끝맺고 있다. 얼마나고독하고 두려운 일인가. 나는 난처한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도늘 수심에 차 있던 그의 표정을 떠올린다. 자신이 인터뷰한 수백명의 ‘작은 사람들‘(서민)이 그랬듯, 그 자신이 끝없이 이어지는고난과 고뇌 속에 있는 것이다.
나와 그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두 차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위해 대담을 했다. 첫 번째는 2000년 <파멸의 20세기-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와 서경식>), 두 번째는 알렉시예비치가 노벨상을 수상한 이듬해인 2016년 (<마음의 시대‘작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찾아서>)으로, 이때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피해지를 함께걸었다. - P409

2016년의 대담 때 알렉시예비치는 이야기에 열중하다 그만약 먹는 시간을 놓쳐 고통스러운 듯 대화를 중단하고 휴식을 취했다. 지병을 앓던 그는 몹시 지쳐 있었다. 그런 그의 문을 지금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두드리고 있다. 나는 만년을 나치의 압박과 감시 아래 보내다가 나치 독일의 항복 직전에 고독하게 병사한 여성 예술가 케테 콜비츠를 연상하기도 했다.
알렉시예비치는 2015년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다. 지금은 벨라루스 펜클럽의 회장이자 루카셴코 정권을 비판하다 탄압받고 국외로 피신한 야당 후보자와 시민 단체 대표들이 설립한 ‘조정평의회‘라는 조직의 간부이기도 하다. 9월 9일 발표된 그의 ‘긴급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 P410

"이제 ‘조정 평의회‘의 간부회에는 나와 생각을 같이하는 벗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모두 옥중에 있거나 국외로 쫓겨났기 때문이다. 오늘은 마지막 한 사람 막심 즈나크가 체포되었다. 처음에는 나라를 탈취하더니 지금은 우리의 가장 좋은 사람들을 강탈해 가고 있다. 그러나 강제로 앗아 간 동료들 대신에다른 몇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들고일어난 것은 ‘조정 평의회‘가 아니다. 나라가 들고일어난 것이다."
러시아와 유럽연합 국가들 사이에 끼인 벨라루스에서는루카셴코 대통령의 강권 정치가 1994년 이래 26년이나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알렉시예비치의 대표작 『체르노빌의 목소리』가 국내 출판을 금지당하는 등 언론·사상의 자유도 제한되었다. - P410

유럽행 비행기가 우랄산맥을 넘어갈 때면 눈 아래로 평탄한 숲의 바다가 펼쳐진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나는 그 숲의 바다가눈앞에 떠오르는 것을 느낀다. 끝없는 고뇌의 수해樹海다. 당장 20세기에 독소(독일-소련)전쟁의 주된 전장이었던 그곳에서는 마을들이 불타고 무수한 사람들이 잔혹하게 학살당했다. 유대인 주민에 대한 학살도 있었다. 역사가 티머시 스나이더 TimothySnyder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해, 북으로는 발트 3국, 남으로는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블러드랜드‘(유혈지대)라 명명했다. 그곳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들, 알렉시예비치의 저작에는 그들의 목소리가 ‘이걸로도 부족한가‘ 하고 말하듯 가득 들어차 있다.
2016년의 대담이 끝나갈 즈음 나는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100년이 걸리더라도 좋은 미래가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고 말합니다. 나는 거기에 경외심을 느낍니다. 이념이나 이상을 단념한 다채 이익이나 욕망만 추구하는 상황이 러시아에서도,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계속되고 있는데, 당신은 무엇을 근거로 미래를믿는지요?"
그는 말을 고르고는 대답했다.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은 갈 길이 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스로에 대한 나의 답입니다. - P412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작은 일을 해 나가며 선한 쪽에 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직히 말해 나는 그의 이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고는 할 수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늘 "선한 쪽에 서려고 하는 사람들이 한국과 벨라루스를 포함한 세계 각지에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지금 만일 그 사람들이 절멸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희망 자체의 절멸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알렉시예비치의 메시지는 끝으로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나는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오랜 관습에 따라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에게 호소하고자 한다. 어째서 당신들은 침묵하는가? 지원의 목소리가 좀체 들려오지 않는다. 작은, 긍지 높은 국민이 짓밟히고 있는 것을 보고도 어째서 침묵하는가? 우리는 지금도 당신들의 형제인데 말이다. 우리 국민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랑합니다.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어째서 당신들은 침묵하는가?"라는 물음은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에게만 던져져 있지 않다. - P413

아. 세계는 얼마나 무자비한가. 나는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연대의 뜻을 전하는 짧은 메일을 보내는 것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라면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 이렇게나 멀리 떨어진 극동의 땅에 무력하나마 당신의 고통에 공감하는 자가 있다. 그것만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F도 연대의 메일을 보내도록 힘을 실었다.
미얀마, 벨라루스, 홍콩....... 손 닿지 않는 세계 곳곳에서, 서로 만날 수도 얼굴을 마주할 수도 없는 곳에서 사람들의 고뇌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 고뇌에 ‘공감compassion‘하는 이는 해결되기 어려운 고뇌를 떠안고, 자신의 심신마저 상처받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감‘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공감‘하게 되는 게 인간이 아닐까. ‘연대‘하려 하는 게 인간이 아닐까. 그런 정신의 기능까지 포기할 때 ‘비인간화‘가 완성되고 ‘전염병‘이 개가를 올릴 것이다. - P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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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된 지 2주 남짓 지났다. 내 마음은 점점 우울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말할 나위 없이 지난해 말 일본과 한국의 선거 결과 때문이다. 일본의 새 정권은 올여름 참의원 선거를 의식해 일시적인 인기몰이 정책을 잇달아 내세우는 한편으로 외교, 안보, 교육 등의 분야에서 극단적인 우경화를 실행하기 시작했다. 극우 이데올로그들이 여봐란듯이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60여 년을 살아온 나는 이 예상외의 장수 덕분에 보고 싶지 않은 꼴을 봐야 하는 처지가 됐다.
내 인생을 20년씩 세 시기로 나눠 보면, 앞의 20년은 일본전후 민주주의의 융성기에 해당하며, 다음 20년은 대학 투쟁의 패배를 거친 탈정치의 시기, 뒤의 20년은 경제성장의 정체와 보수화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바라지는 않지만, 내가 만일 20년을 더 산다면 그것은 대반동의 시기가 될 것이다. 일본은 패전과 맞바꿔 얻은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라는 귀중한 재산을 이 반동기 - P301

에 거의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과거에서 배우지 않고 또 타자를해칠 것이다. 어떤 계기로 반동을 극복할 때가 온다고 해도 그때까지 막대한 희생과 시간을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이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게 됐다고 했는데, 지난해 말의 한국대선 전에 본 시인 김지하의 모습은 정말 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1970년대의 험악하기 짝이 없던 유신 독재 시대에 일본에서출판된 그의 시집 (일본어판)이 내게 남아 있다. 당시 한국 국내에서는 금서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먼저 출판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나는 그것을 읽고 또 읽었다. 지위도 권력도 없는 젊은이, 재일조선인이라는 피차별 소수자, 정치범의 가족이었던 나는 진정 "타는 목마름으로" 그것을 읽었다.  - P302

거기서 절망속에서도 고개를 쳐들고 싸우는 숭고한 조국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팔레스타인에서, 남아프리카에서, 라틴아메리카에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뒷골목 젊은이들이 부러진 분필로 ‘민주주의‘라고 쓰는 모습을 떠올렸다. 나도 그런 사람들의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나는 거기서 절망의 극점으로서의
‘희망‘을 읽어 내려 한 것이다. 지금도 한국에서, 일본에서, 세계각지에서 버림받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희구하고있다.
지난해 말 ‘시인회의‘라는 단체의 창립 50주년 대회에서 기념 강연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는 「시가 투영하는 동아시아 근현대사」라는 제목으로 이상화, 윤동주, 김지하, 박노해, - P302

최영미, 정희성 등의 시를 소개했다. 나는 1990년대 말 도쿄에서열린 기미가요. 히노마루 법제화 반대 시민 집회에서 김지하의「타는 목마름으로」를 소개한 적이 있다. 일본 사회가 현재에 이르는 우경화의 가파른 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지기 시작한 무렵의일이다. 우리 조선인들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갈망했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우리 재일조선인들에게 가르쳐 준 것은일본의 전후 교육이었다. 그 민주주의는 한국에서는 막대한 희생을 통해 쟁취되었으나, 일본에서는 이렇다 할 저항도 없이 내버려질 상황에 직면했다. 민주주의가 안락사 직전에 놓인 것이다. 이것이 그때 내가 한 이야기의 취지였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일본의 민주주의는 무자각속에 단말마의 위기를 맞았고, 한국은 일찍이 "타는 목마름으로" 노래했던 시인이 자신의 시를 배반하는 무참한 꼴을 드러내고 있다. - P303

1970년대 당시, 그런 암흑 속에서도 인간은 이렇게 빛날 수있다는 걸 느꼈다. 나뿐만이 아니다. 일본인을 포함한 세계 각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감격을 공유하며 한국 민주화 투쟁을 성원했다. 지금 우리는 그토록 빛나던 시인이 이토록 범용하고어리석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오늘날의 암흑이다. 얼핏 보기에는 지난날과 같은 폭력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인간 정신에 대한 실망과 냉소가 만연해 있다. 우리는앞으로 이 냉소의 어둠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 P303

이미 1990년대 초부터 나는 몇 번에 걸쳐 
김지하를 비판한적이 있다. 그는 왜 저 꼴이 되고 만 걸까? 한국의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그들은 쓴웃음을 지으며 ‘김지하‘는 어느 개인의 이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집합명사로, 암흑시대에 함께 싸운 사람들의 정서가 그의 시에 모여 결정체를 이루었기에 책임도 명예도 김지하 개인에게만 돌아갈 수는 없다고 답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떤 시대정신을 투영한 시의 가치는 그것을 쓴 시인 개인의 존재를 넘어선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김지하 개인이 보여 준 천박성 역시 한 시대를 살아온 일군의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김지하라는 개인만이 기인이요 어리석은 자라면 문제는 간단하며, 이렇게 탄식할필요도 없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나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을 앞으로도 계속 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일 것이다. 그것을 통감하는 정초다. - P304

‘유대인‘이라는 존재가 먼저 있었던 게 아니라 반유대주의가 유대인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 「유대인 되기의 강제성과 불가능성에 대해」는 이에 관한 고찰을 담고 있다.
지금도 일반 사람들 대다수가 지닌 유대인에 대한 고정관념을깨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인종‘, ‘민족‘, ‘국민‘, ‘고향‘, ‘조국‘이라는 통념의 ‘강제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도 읽어 봐야 할 고찰이다.
지은이 아메리는 빈대학에서 문학과 철학 학위를 받은 일급지식인으로, 19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벨기에로 탈출했다. 1940년 독일군의 벨기에 점령 뒤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했고 1943년 7월 게슈타포에 붙잡혔다. 1944년 1월에는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강제 노동을 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기 직전, 후퇴하던 독일군이 강요한 ‘죽음의 행진‘에 수인 대다수와 함께 끌려갔다. 부헨발트 수용소를거쳐 1945년 4월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연합군에 의해 마침내해방됐다. 전쟁 중 벨기에에서 연행된 유대인 2만 5,000여 명 중 겨우 615명만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해방된 뒤 그는 알게 됐다. - P317

"나로 하여금 2년간의 수용소 생활을 견디게 한 바로 그 사람의죽음"을 "그 사람"은 나치 지배하의 오스트리아에서 함께 탈출한 아내였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수기로서 널리 알려진 책으로는 빅토어 프랑클Viktor Frankl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프리모 레비의「이것이 인간인가』가 있다.
아메리, 프랑클, 레비 세 사람은 똑같이 강제수용소를 체험했지만, 문제 의식 면에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 프랑클은 ‘고통받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며, 아우슈비츠가 등장한 이유를 묻기보다는 주어진 극한상황이 인간 정신을 어떻게 고양시키는지를 중시한다. 한편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란 무엇이며, 왜 등장했는가 하는 근원적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 비유하자면 프랑클과 레비 사이에는 ‘임상적‘ 차원과 ‘병리학적‘ 차원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P318

아메리의 책은 이 둘과 크게 다르다. 아메리는 "지겨울 만큼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 그럼에도 여전히 낯설게 남아 있는 것속을 힘겹게 더듬어 나가듯이 책을 썼다고 이야기한다(1966년초판 서문). 그 특징은 희생자인 아메리 자신의 내면세계를 가혹하리만치 철저하게 파고들어 사색하는 점에 있다.
그에 따르면 아우슈비츠에서 ‘정신‘은 무력했다. 그곳에서
"정신과 야만의 만남"이 "순수한 형태로 나타난 결과 "정신은우리를 저버렸다." "정신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데에는 쓸모 - P318

가 있었다."
저항운동을 하다 체포된 아메리는 벨기에 브렌동크 수용소에서 게슈타포의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이 책의 ‘고문‘ 장은 그때의 체험을 반추한 것이다. "몇 개의 육중한 창살문을 지나면끝에는 창 하나 없는 둥근 천장의 방이 있었다. 그곳에는 괴상하게 생긴 철제 도구들이 널려 있었다. 어떤 소리도 바깥으로 새어나갈 수 없었다."
나는 10여 년 전 브렌동크를 찾아가 그 내부를 본 적이 있다. 고문실은 아메리가 묘사한 대로 암울 그 자체로서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눈으로 확인했다고 해서 내가 무엇을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최초의 일격과 함께 일단 세계에 대한 신뢰라 부를 수 있는무언가를 잃게 된다." - P319

아메리는 고문을 성폭행에 비유한다. "아무런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경우, 타자에 의한 육체적 압도는 결국 완전한 실존적 절멸 행위가 된다." "고문당한 자는 두 번 다시 세상을 친숙하게 느낄 수 없다. 절멸의 굴욕은 사라지지 않는다. 부분적으로는첫 일격에 의해, 전체적으로는 고문에 의해 무너진 세계에 대한신뢰는 다시는 회복되지 않는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고문 희생자의 심리를 ‘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고문 희생자가 아메리와 같은 고찰을 남기는 경우는 매우 - P319

드물다. 우선 당사자로서 기억하고 말함으로써 추체험하는 게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성폭행‘의 비유가 시사하듯, 폭력에 완전히 굴복한 체험은 사그라지기 어려운 굴욕감으로 반복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결정적인것은, 설령 이야기해 봤자 일반인들은 알 수가 없으며 그들의 몰이해와 무관심과 맞닥뜨릴 때는 자신이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는체념과 고립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단절의 체험‘이다. 아메리의 책을 관통하는 것은 이 절대적인 고독감이다. 따라서 그가 1978년 자살한 사실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레비는 그9년 뒤에 자살했다). 이런 세상에서 태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쪽이 이상한 게 아닐까. - P320

그러나 고문이 나치의 독점물은 아니다. 그것은 가까운 과거의 한국에서, 일본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자행됐으며, 지금도 근절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안다‘고 할 수는 없을지언정우리는 아메리의 고찰을 거듭 곱씹어야만 한다. 우리가 무엇을모르는지 알기 위해.
「사람은 얼마나 많은 고향을 필요로 하는가」와 「원한, 장을 언급할 지면은 없지만, 특히 후자는 ‘역사 문제‘나 ‘식민 지배 책임‘에 대해 깊이 생각하려 할 때 반드시 읽어야 할 고찰이라는점만 지적해 둔다. 아메리는 결코 안이한 ‘용서‘나 ‘치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 만큼 이 책을 읽는 건 독자에게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대 ㅡ아우슈비츠 이후의 시대ㅡ를 살아가는 우리가 ‘인간‘이고자 할 때 피할 수 없는 고통이다. - P320

프랑코군을 지원하는 나치 독일 공군이 바스크 지방의 작은마을 게르니카에 무차별폭격을 가한 1937년, 아시아에서는 중일전쟁이 시작되어 난징 대학살이 자행됐다. <게르니카> 이후80년, 인류는 제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그리고 수많은 전쟁을 경험했다. 〈게르니카>는 교과서에도 실려 있으나 그것을 그린 피카소의 정신, 그 그림을 울면서 바라본 사람들의 심정에 공감하는 사람은 지금 얼마나 될까.
예술에 전쟁을 막는 힘이 있는지, 악한 권력을 무너뜨릴 힘이 있는지 의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 어떤 악몽의 시대에도관용과 연대, 그리고 공감을 추구하는 인간 정신이 살아 있다는것을 가르쳐 준다.
트럼프와 그 지지자(예컨대 하시모토 도루 전 오사카 시장)라면 <게르니카>를 낙서라고 매도할 것이다. 예술 따위는 ‘엘리트‘의 사치품이라고 큰소리칠 것이다. ‘대중‘은 더 쉽게 와닿는즐거움을 찾는다면서. 그런 생각이야말로 대중 멸시이며, 더없는 반지성이다. 그들의 언동을 보고 나는 원형경기장에 기독교 - P326

도(당시의 피차별 마이너리티)들을 몰아넣어 맹수들의 먹이가 되게 해 놓고 로마 시민들의 볼거리로 제공한 고대 로마의 지배자들을 떠올렸다.
예술에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게르니카>는 아직 잠들수 없다. - P327

윤동주는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 철저히 고립되어있었을 것이며, 주변의 일본인 중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자는 거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창밖에 밤비가속살거려/육첩방房은 남의 나라"(「쉽게 씌어진 시)라는 시구가 더욱 가슴을 저미는 것이다.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하기직전에 질렀다는 마지막 외마디도, 그 의미를 알아들은 일본인은 아무도 없었다.
시인은 자신의 모어로 시를 쓰는 것조차 금지당했다. 증거물로 압수된 미발표 원고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게다가 형사로부터 폭행과 조롱을 당하고 억지 설교를 듣다가 이국의 감옥에서 죽어야만 했다. 그 억울함과 슬픔, 분노는 지금도 많은 조선 민족이 공유하는 바다. 그 감정들은 어째서 아직도 사라지지않는가?  - P332

그것은 가해자들이 책임을 조금도 자각하지 못하고, 과거를 반성하기는커녕 치안유지법이 적법하다고 아무렇지 않게공언하기 때문이다. 치안유지법은 적법하며, 희생자에 대한 조사나 사죄는 필요치 않다는 것은 패전과 포츠담 선언 수락이라는 역사적 사실 자체에 대한 부인을 의미한다. 일본이 조선, 대만 등의 식민지를 포기한 것은 포츠담 선언 수락에 의해서였다.
요컨대 그들은 식민 지배 책임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것이나 마찬가지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진상 규명조차 불철저했던 우리는 치 - P332

안유지법 등에 의한 정치 탄압 문제에는 거의 손도 대지 못한 상태다. 해방 뒤 통일체로서의 조선 민족이 주체가 되어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 추궁을 이어 나갔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민족 분단이 일본의 극우파와 역사수정주의자를 돕는 꼴이 됐다. 통탄스러운 일이다. 이제부터라도 그 작업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상황이 이러한 가운데, 일본에서 배외주의의 창끝은 점점 ‘한국인‘, ‘조선인‘을 향하고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지난 5월23일 나고야의 재일조선인계 신용조합에 한 남성이 난입해, 등유에 적신 천에 불을 붙이고는 등유가 든 기름통과 함께 카운터안쪽으로 던진 사건이 있었다. 종업원이 불을 끈 덕에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조금만 잘못되었어도 대참사로 번졌을 것이다. 경찰에 출두한 용의자(65세)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전부터 한국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라고 진술했다고한다. 헤이트스피치 수준을 한참 벗어난 명백한 ‘테러‘ 사건이다. 더 이상의 확대를 막기 위해 일본 정부는 테러 행위를 엄중히 비난하고 재발 방지에 힘쓸 것을 선언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 P333

국가권력의 횡포 이상으로 개탄스러운 것은 반지성주의가 횡행하고 냉소와 무관심이 만연해 있는 지금 상황이다. 지식인들은 이 위기에 저항할 책무를 지고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지식인다수도 이 증상에 감염되어 자기 역할을 포기하거나 오히려 자진해서 반지성주의 쪽에 가담해 가짜 지식인으로 전락하고 있다.
가토 슈이치가 쓴 「언어와 탱크」라는 글이 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자유화‘ 운동이 일어나자 소련이 군사개입으로 진압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이 사건을 지근거리에서 목격했다. "언어는 아무리 날카로워도, 또 아무리 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되더라도 한 대의 탱크조차 파괴할수 없다. 탱크는 모든 목소리를 침묵시킬 수 있고, 프라하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프라하 거리의 탱크라는 존재 자체를 스스로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언어가 필요하다. (...) 1968년 봄, 가랑비에 젖은 - P339

프라하의 거리에서 마주한 것은 압도적이고 무력한 탱크와 무력하지만 압도적인 언어였다."
그 시기(1960년대 후반) 한국에서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 박정희 정권이 베트남에 파병하고, 이후의 유신 체제를 향해 독재를 강화하고 있었다(1969년 ‘3선 개헌‘).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측근의 손에 사살당했고, 프라하보다 10년 남짓 늦게 한국에도 ‘봄‘이 찾아왔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1980년 광주 5.18 때탄압당했다. ‘탱크‘가 ‘언어‘를 뭉개 버린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 뒤 ‘언어‘가 ‘탱크‘를 압도하는 순간이 거듭찾아왔다. 그 최근의 것이 시민의 평화적 시위로 박근혜 대통령탄핵을 쟁취한 투쟁이다. 한편, 일본에서는 ‘언어‘가 자근자근압살당해 공동화되고 말았다. ‘언어‘에 대한 신뢰가 근본적으로 파괴되어 일본의 정치권력은 ‘탱크‘ 없이도 인민을 통치할 수 있다. 이에 저항하려는 사람들은 ‘언어‘를 재건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문필가, 저널리스트, 교원 등 언어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책임이 무겁다 - P340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미켈란젤로 89년 
생애의 마지막 그리고 미완의 작품이다. 바티칸의 피에타를 비롯한 많은 피에타상은 어머니 마리아가 죽은 아들 예수를 품에 안은 모습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어머니가 등 뒤에서 아들을 껴안고 서 있다. 무덤에서 주검을 끌어내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금도 세계 각지에 존재하는 ‘지옥‘에서 무수한 어머니들이 자식의 주검을 등 뒤에서 껴안고 서 있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이토록 우매하고 무력하다.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데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예술에 무슨 존재 가치가 있을까? 그러나 만약 예술마저 없었다면, 인간에게는 어떤 존재 가치가 있을까....... 무력한 나는 그렇게 중얼거린다. - P358

간단히 답을 얻을 수 없는 깊은 물음(대체로 인간에 관한 물음은 모두 그러하다)에 침잠해 끝없는 문답에 몰두한다. 그 사고과정 자체가 풍요와 기쁨에 차 있다. 그것이 곧 ‘도서관적 시간‘이다. 스마트폰의 검색 기능에 의존하면서 그런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주어지는 ‘해답‘을 따르는 태도는 한 사람의 불행일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평화에 대한 위협이기도 하다. 그것은 만사를 단순하게 유형화해 파악해서는 타자를 한데 묶어 차별하고 적대시하는 자세로 이어진다. 혐오범죄의 온상이며, 전쟁 배양기다. 지배자가 바라는 것이 그런 ‘신민‘이다.
인간 이외의 존재가 책을 쓰고 읽을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기쁨, 자유로운 인격으로 자신을 형성해 가는기쁨이다. 그런 기쁨을 학생들에게 제공하려는 장소가 바로 도서관이다. 그러려면 자유롭고 관대한 ‘도서관적 시간‘을 되찾지않으면 안 된다. ‘신자유주의적 시간‘과 ‘천황제적 시간‘에 대항해서 인간의 시간을 되찾기 위해. - P378

일본에서는 민주적 절차나 인권의 원칙이 ‘비상시 대응‘의 방해가 된다는 본말이 전도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수많은 비리와 부정의 책임을 지고 사임해야 한다는 비판에대해, 코로나 대책에 주력하고 있으므로 정권을 놓을 생각은 없다고 답했다. 재해나 역병까지도 권력의 연명에 이용하려는 너무나도 노골적인 태도 표명이다.
정부가 지급을 검토하고 있는 생활지원금 대상에서 ‘외국인‘을 제외하라고 주장하는 국회의원이 있다. ‘외국인‘도 납세자고 사회의 불가결한 구성원인데도 말이다. 기존의 기초생활수급자도 제외하라고 트위터로 떠드는 ‘작가‘가 있고, 이에 대해10만 건이 넘는 ‘좋아요‘가 달린다. 이런 때는 손쉬운 차별일수 - P394

록 더 많은 지지를 얻는다. 이런 정치,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역병을 능가하는 재앙이다.
역병이나 자연재해는 인간의 생활과 생명을 빼앗지만, 실은인간을 죽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 자신이다. 이익이나 권력에 홀린 인간들에 의해. 그리고 사고가 정지된 채 사태를 방관하는 인간들에 의해. 도쿄 올림픽 1년 연기라는 비합리적이고 위험한 선택이 일본 사회에서 환영받는 듯 보이는 것이 바로 그 좋은예다.
브뤼헐의 <죽음의 승리>는 500년도 더 전에, 인간은 진보하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죽음‘은 승리할 것이고 ‘죽음‘
에는 저항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에는 저항할수 없을지라도, 인간의 ‘불의‘에는 마지막까지 저항할 작정이다. - P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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