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
여행가 유목하듯 살아오고 있다. 언젠가는앉아서 유목하는 경지에 오르기를 바라며. 스무 해 넘게 여행으로 삶을 이어오며 수많은 길을 걷었다. 길 위에서 그는 아무것도아닌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여행은 언제나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끔했다. 더 선한 사람, 지구와 타인에게 해를덜 끼치는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게 했다. 그 간절함이 지금도 그를 여행으로 이끈다. ‘여행이란 결국 낯선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편협한 세계를 부수는 행위‘라고 믿는 그는 오늘도 기꺼이 길을 나선다. 언제까지 여행할 수 있을까 하는 조금은 무거운마음으로. 지은 책으로는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외로움이 외로움에게>, <삶의 속도, 행복의 방향>공저, <라틴아메리카 춤추듯 걷다>, <이별의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길 위에서 읽는 시>, <여행할 땐, 책>,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등이 있다.
넓디넓은 세상을 걷고 보고 듣고맛보고 느끼며 사는 그녀를 나는‘남희쌤‘이라 부른다. 가볼 꿈조차 꿀 수 없는 곳의 풀과 나무, 동물, 오래된 도시의 색과 냄새, 그네들의 순박한 웃음과 친절⋯⋯여행 끝에 가슴에 남는 사람들이그녀를 다시 길 위에 서게 할 것이다. 마치 끝 모를 바람처럼, "누가 보았을까 부는 바람을 아무도 보지 못했지 저 부는 바람을" ‘남희쌤‘에게선 바람 냄새가 난다. 나도 한바탕 떠났다 돌아온 기분이다.
양희은, 가수
훼손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가치가 있다. 길위에 선 그의 단단한 내면에 동화되다가 수직이 아닌수평의 시선으로 사유하는 그를 보며 경외심마저 느낀다. 행간과 틈새 사이에 끊임없이 내가, 우리가 고개를 내민다. 여행이 몸에 새겨져 어느새 삶이 된 작가를 바라보면서그와 닮은 시선으로 사유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여행을 일상의 탈출이나 삶의 여백이라 여겼던 내 한계까지 돌아보면서, 이 책은 훼손되고 싶지 않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떠오르게 한다. 여행을 마치고 나를 찾아 돌아온 기분이다. 일단 떠나는 수밖에, 그 결심이 나를 지킨다.
박미옥, <형사 박미옥> 저자
미처 예상치 못했다. 집을 짓지 않고 떠도는 삶이 이렇게 길어지리라고는. 찬바람 부는 1월의 인천항에서 중국행배에 오를 때 나는 서른셋이었다. 서른셋은 지닌 재산이 적어 탕진하는 부담도 적은 나이였다. 3년 정도면 전 재산이 사라질 테고, 그 무렵이면 여행도 끝이 나리라 믿었다. 먼지 묻은 배낭을 앞뒤로 메고 낯선 도시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관광안내소로 향했다. 그곳의 직원은 지도에 가볼 만한곳을 표시하고, 예산에 맞는 숙소를 골라줬다. 전화를 걸어 빈방을 확인하고, 예약을 해주기도 했다. 시리아나 레바논처럼 정보가 부족한 나라를 여행할 때면, 먼저 다녀간 여행자들이 방명록에 남긴 정보를 얻기 위해 여행자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던 특정 숙소를 찾아가고는 했다.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는 거리의 사람들에게 수십 번씩 길을 물어야 했다. 여행은 온전히 타인의 친절에 기대는 행위였고, 타인과 소통하는 과정이었다. 그 시절에는 한 번의 여행을 - P8
마치면 한 명의 사람이 남았다. 여행하는 삶을 살아온 지도 어느새 23년 차. 이제 여행은 타인의 친절이 아니라 스마트폰 검색에 기대는 일이 되었다. 쉽고 편리해졌다. 가격 비교 사이트에서 비행기표를고르고, 클릭 몇 번으로 숙소를 예약하고, 구글 리뷰가 좋은 식당을 찾아가면 된다. 큰 용기가 없어도, 외국어를 하지 못해도, 누구나 실패 없는 여행을 하고 돌아온다. 어디서나 쉽게 여행자를 만날 수 있지만 친구를 사귀기는 더 어려워졌다. 쌀독의 낱알만큼 흔해진 여행자는 이제 환영받는 존재도 아니다. 소음과 쓰레기 문제와 주거난을 일으켜 현지인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주범이 되었을 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그곳에서 사귄 친구의 연락처 대신 수백 장의 사진만 남는다. "여행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온 생각의 성을 벗어나는 일이다." -신영복 - P9
여전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의 정의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내가 알던 상식과 진리가 무너진다. 걸으면 걸을수록 질문이 생겨나고, 내가 배워온 것들을 의심하게 된다. 거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와 타인이, 나와지구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조금 더 사랑하고아끼게 된다. 여행은 언제나 더 나은 내가 되고 싶게끔 했다. 정말이지 조금 더 선한 사람이 되고 싶고, 지구와 타인에게 해를 덜 끼치는 존재가 되기를 갈망한다. 그 간절함이나를 여행으로 이끈다.
코비드 역병의 시대는 내 삶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강연과 글쓰기뿐이던 생계 활동에 에어비앤비 호스트, 방과후 글쓰기단, 방과후 산책단이 끼어들었다. 한마디로 ‘N잡러‘로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살아보니 그 어느 것도 절 - P10
대적인 수입이 되지 못하는 대신에, 그 어느 것에도 절대적으로 메이지 않아도 되었다. ‘원하지 않으면 때려치울 수있어. 아니면 말지 뭐‘ 하는 가벼운 마음이랄까. 이제야 나는 ‘빠꾸의 힘‘을 알게 되었다. 그 모든 일 중 끝까지 놓고싶지 않은 일은 가장 어려운 글쓰기다. 마지막 순간까지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읽어주는 사람이 있는 글쓰기를하고 싶다는 욕망. 결국은 타인과 소통하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쉽지 않은 방과후 산책단을 계속 꾸려가는 이유도 결국은 그 열망 때문이다. 꼭 5년 전 봄, 혼자 여행하던 내가 방과후 산책단이라는이름으로 함께하는 여행을 시작했다.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코비드 초기에 지인이 조언했다. "네가 산책하는 걸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봐." 단체 여행이라니!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가족과 여행하는 일도 고난의 행군인데, 처음 보는 사람들을 데리고 여행 - P11
한다고? 수명을 자발적으로 단축하다니! 흰머리 늘어나는 소리가 실시간으로 들릴 것 같았다. 역시나 방과후 산책단과 함께하는 여행은 만만치 않았다.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를 책임져야 하니 어려울수밖에. ‘책임감 제로‘의 삶을 살기 위해 고양이도 입양하지 못하는 사람인데 열 명을 책임지는 일을 하게 되었다. 피를 나눈 남자가 내게 "뭐야, 여행도 하고 돈도 버는 거야? 세상 ‘꿀잡‘이네"라고 했을 때 등짝을 후려치고 싶었다. 산책단은 나에게 여행이 아닌 일이었으니. 그것도 노동 강도가엄청나게 센 해외 출장. 성격도 까칠하고, 고집도 세고, 융통성도 부족한 내가 체력과 취향과 성격이 다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다니려니 매일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그 좌충우돌의 시간 동안 방과후 산책단을 구상했을 때품었던 소망은 더 간절해졌다. 다른 방식으로 여행하고 싶다는 바람,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다니는 게 아니라, 조금 - P12
느슨하고 느리게 하는 여행. 유명한 곳만 찾는 게 아닌, 덜알려진 곳도 찾아가는 여행.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 자연을 존중하는 여행, 한 나라에 최소 열흘 이상 머물며, 여섯 명에서 열 명 미만의 소규모로 다니는 여행. 현지 음식을 먹으며, 현지인이 운영하는 작은 숙소에 머물고, 현지인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여행. 에코백, 도시락통, 수저,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며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하는 여행, 조금 귀찮고 불편해도 지구를 위하는 여행. 어디에 가든 최소한의 흔적만 남기고 돌아오는 조심스러운 여행을 만들고싶었다. 그런 바람으로 꾸린 방과후 산책단은 첫 조지아 트레킹을 시작으로 어느새 열아홉 번의 해외 일정을 마쳤다. 생계를 위해 방과후 산책단을 시작했지만, 보람과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면 지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름다운 것과 마주칠 때 마음 깊이 번져오는 감동을 나눌 수 있는 이가 곁에 있다는 충만함. 내가 준비한 프로그램에 몰입하는 - P13
이들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즐거움. 내가 지키고픈 원칙을 존중해주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 오래도록 인연을 이어가고픈, 결이 맞는 사람을 만나는 기쁨. 여행으로 인한 공감과 만남이 방과후 산책단 안에 있었다. 산책단을 마치고나면 늘 사람이 남았다.
여행하는 삶에 대한 갈망은 여전하지만, 짐을 꾸릴 때마다 묻게 된다. 언제까지 여행할 수 있을까. 갱년기를 맞아삐그덕거리는 몸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앓고 있는 지구를어디서나 체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여행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보다 훨씬 못난 인간이 되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해심은 바닥이고, 무지하면서 편협하기까지한 꼰대가 되지 않았을까. 지금처럼 반성하는 꼰대도 아닌, 구제불능의 꼰대 말이다. 여행을 통해서야 나는 더불어 - P14
살아가는 일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말을 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 눈길이 갔고, 지구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의 목록을늘려갔다. 여행을 함으로써 나는 조금씩 더 다정해졌다. 나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지구에게도. 낯선 이의 호의에 기대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때마다 중얼거린다. 여행하는 삶을 살아오길 잘했어. 포기하지않고 여기까지 오기를 정말 잘했다. 그러니 아직은, 일단떠나는 수밖에. 대만 타이난에서 2025년 봄날에 - P15
생명을 귀히 여겼지만 그 생명을 취해 자신의 생명을유지하는 일에 망설임이 없었다. 지닌 것을 이웃과 나누는일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손님을 환대하는 풍습이 살아 있어 누가 와도 차와 간식을 내놓고는 했다. 큰죄를 짓는 일도 없이, 허망한 욕망에 좌절하는 일도 없이, 어제와 다름없는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었다. 그 땅에서삶은 단순했다. 때에 맞춰 양을 몰고 나가 풀어놓고, 온 가족이 모여 꼴을 벴다. 들판에 살구나 버찌가 여무는 계절이오면 따서 잼을 만들었다. 술 한잔이 생각나면 양동이를 들고 나가 말의 젖을 짜 크므스를 만들고, 매일 먹는 치즈와 요거트는 염소와 양의 젖을 발효시켜 만들었다. 겨울이 오면 쌓아둔 건초를 가축에게 먹이며 봄을 기다렸다. 가축에게 먹일 물과 풀이 있는 한 삶은 풍족하다고 여겼다. 이 삶의 양식을 1년에 석 달만이라도 이어가며 사는 한, 성정이 모질고 강퍅해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이 삶조차 머지않아박물관의 유물로나 남게 될까. 아마도 그렇게 될 것이다. 유목민의 아이들 중 장래 희망이 목동이나 양치기인 아이는 없다고 했으니. 피할 수 없는 신탁처럼 예고된 그 변화를 상상하면 괜히 목이 메었다. - P25
고도가 높은 초원은 8월인데도 밤이 되면 기온이 떨어졌다. 저녁을 먹고 나면 유르트의 주인은 난로에 소똥을 넣고 불을 지폈다. 잘 마른 소똥은 냄새도 없이 유르트를 따뜻하게 데웠다. 유목민들의 텐트에서는 모르는 사람들과함께 자야 했다. 낯선 이들과 뒤섞인 채 1년에 한 번 빨요위에 침낭을 덮고 누워 있으면, 새삼 너무 많은 것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끌어안은 양과 말, 내가 놓지 못하는 떠도는 삶에 대한 욕망. 결국 우리는 각자에게 절실한 것을 붙잡고 생을 건너가는 중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꿈도 없는 잠에 빠져들고는 했다. 지금쯤 그 땅에도 봄이 찾아와 초원을 덮었던 눈이 녹기시작했을까. 곧 새 풀이 돋아나고, 그 풀이 자라 초원을 뒤덮고, 바람이 순해지는 6월이 오리라. 여리던 풀빛이 진해지면 유목민들은 다시 양과 말을 끌고 초원으로 나가 유르트를 칠 것이다. 강과 초원에 기대어 목숨을 맡길 것이다. 먼 조상들이 그랬듯이, 아직은 끝나지 않은 삶을 이어갈 것이다. - P26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은 풍경이 달랐다. 푸른 초원이 사라지고,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불모의 땅이 이어졌다. 도로의 왼편으로는 회색의 판지 강이 흐르고, 강 너머는 아프가니스탄이었다. 강물조차 잿빛이라 온통 무채색이었다. 도무지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풍경 사이로 장식도 색채도 없는 사각형의 흰 집이 띄엄띄엄 보였다. 그 너머로 빛나는 설산이 아니었다면 더없이 삭막했을 터였다. 타지키스탄은 국토의 93퍼센트가 산이고, 국토 절반 가까이가고도 3천 미터를 넘는다. 거기에 더해 7천 미터급 봉우리가 네 개. 그냥 ‘세계의 지붕‘이 된 게 아니었다. 저 산맥에깃들어 산다는 눈표범과 마주칠까 싶어 매서운 눈으로 산들을 훑어보고는 했지만, 당연하게도 눈표범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파미르 하이웨이에서 가장 높은 악바이탈 패스는 ‘악‘소리가 날 것 같은 4,655미터의 고도,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쏟아지는 눈발에 산들이 하얗게 묻히고 있었다. 기념사진을 찍는 이들이 8월의 눈을 맞으며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고개를 자전거로 올라오는 청춘들이 보였다. 제 몸으로 세상을 열어가는 그들이 누릴 고통 가득한 환희가 부럽기도했다. 삶은 저지르는 자의 것이라는데 패기 없는 나는 기껏 - P30
다음 생으로 미룰 뿐이었다. 경주에서 이스탄불까지 걸어서 실크로드를 가로지르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은 시절이내게도 있었는데... 겁 많고 소심한 나는 여기까지도 겨우겨우 넘어왔을 뿐이다. 수도 두샨베의 대통령궁 앞에 대형 사진으로 걸고 싶은소녀 마디나를 만난 곳은 무르가브였다. 무르가브에는 컨테이너 상자로 만들어진 시장이 있었다. 파미르를 넘다가사고가 난 화물차들이 버리고 간 컨테이너의 재활용이었다. 옷가게, 채소 가게, 전기용품 가게, 기념품 가게, 핸드폰 가게가 된 컨테이너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삭막하면서도 활기가 느껴지는 기묘한 풍경이었다. 시장 끝 우물가로물을 길어 온 아이들 사진을 찍다가 노란 원피스를 입은 마디나와 눈이 마주쳤다. 한 손에는 물이 든 양동이를, 다른손에는 세 살 남동생 누르블롯의 손을 잡고 걷던 그녀가 서투른 영어로 말했다. "우리 집에 갈래요?" 그녀를 따라가니 할머니와 어머니, 삼촌까지 달려 나와 우리를 맞았다. 거실로 쓰는 큰방에는 다른 집처럼 이불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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