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삶은 그대로 시였다. 그는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다정했으며 남녀와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것은 이 시대의 한국인 누구나가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시의 거의 유일한 작자가 신경림 시인이라는 점이다. 첫 시집에서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파장) 라고 노래한 때로부터 이번 유고시집에서 흙먼지에 쌓여 지나온마을/멀리 와 돌아보니 그곳이 복사꽃밭이었다"고추잠자리」라고 자신의 고단한 인생을 돌아보기까지 그는 한결같이 곧은 자세, 낮은 목소리로 우리를 위로했다. 앞으로 이와같은 의미의 국민시인이 다시 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고추잠자리


흙먼지에 쌓여 지나온 마을
멀리 와 돌아보니 그곳이 복사꽃밭이었다

어둑어둑 서쪽 하늘로 달도 기울고
꽃잎 하나 내 어깨에 고추잠자리처럼 붙어 있다 - P10

해 질 녘


꽃 뒤에 숨어 보이지 않던 꽃이 보인다.
길에 가려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인다.

나무와 산과 마을이 서서히 지워지면서
새로 드러나는 모양들.
눈이 부시다,
어두워오는 해 질 녘.

노래가 들린다, 큰 노래에 묻혀 들리지 않던
사람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인다. - P11

당신은 시간을 달리는 사람


복사꽃 살구꽃이 피어 흐드러지고 안개를 뚫고 햇살이 스민다. 나는 먼 나라, 더 먼 나라로 가는 꿈을 꾸면서, 당신과함께 나의 스물에

종일 나는 거리를 헤맨다. 문득 기차를 타고 가다가 산역에서 내리기도 하고. 모차르트를 듣고 트로츠키를 읽는다. 당신의 눈빛에서 꿈을 놓지 않으며, 당신은 나를 내 나이 서른으로 이끌고 가고.

세상은 어둡고 세찬 바람은 멎지 않는다. 나는 집도 없고 길도 없는 사람. 달도 별도 없는 긴 밤에, 빈주먹을 가만히 쥐어보면 문득 내 앞에 나타나는, 당신은 나의 마흔에서 온사람,

조금은 서글퍼서 조금은 아쉬워서, 몇발짝 뒤처져 남을 따르면서, 분노하고 뉘우치고 다시 맹세하다가. 마침내 체념하고 돌아설 때 가만히 내 손을 잡아주는, 당신은 나와 나이 쉰도 예순도 더불어 하면서.
- P12

이제 내 곁에 와서 있다. 내가 지금껏 알지 못한 세상의 기쁨을 알게 하면서, 내가 여태껏 보지 못한 세상의 아픔을 보게 하면서 내 빛과 그늘을 모두 꿰뚫고서, 당신은 시간을달리는 사람.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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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궁금해. 그런데 왜 계속 견뎠어? 차라리 죽음으로 복수하고 싶지 않았어? 신이여, 당신 뜻대로 끝없이 고통받으며 살지 않겠다고. 어느 날 당신의 우연한 변덕으로 일상을되찾고, 그리하여 당신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하는 그런 짓거리는 하지 않겠다고. 그런 마음을 품은 적 없어? 해리아. 왜 계속 노력했니? 몸이 매일 울부짖으며, 이제 그만, 이 끔찍한 생의 순환을 멈춰달라고 외치는데 왜 끝내지 않았어? 버튼! 그래, 왜 버튼을 누르지 않은 거야? 비통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니? 제발 나를 꺼줘! 부디 제발 나를 멈춰줘! 나를 그만 끝내줘! 쉬게 해줘! 무엇 때문에? 미련이 남아서? 그래, 미련은 가장 인간적인 감정이지. 하지만 내가 살아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가장 강렬한 감각은 통증이야. 그렇지 않니? 통증은 모든걸 정지시켜,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하지, 오로지 이 순간,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해. 그래.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통증을 느끼는 거야. 하지만 그건 삶이 아니야. 통증을 인정하는삶? 진심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야? 통증 이후의 삶? 정말 - P285

응. 살고 싶어. 그런데 잘 살고 싶어. 돈 많이 벌고 편안한 집에서 여유 부리며 사는 거 말고. 그럴싸한 옷을 입고 걸어 다니며 웃는 거 말고, 진짜 웃고 싶어. 아프지 않은 몸으로, 건강한 몸으로 살고 싶어. 그렇게 잘 살고 싶어. 내 몸이 쓰레기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싶어. 내 몸에 대한 생각을 그만하고 싶어. 그 시간을 다른 곳에 쓰고 싶어. 외국어를 공부하고, 책을읽고, 영화를 보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누군가 - P286

를 사랑하고, 애틋해하고, 차라리 미워하고 더 원하면서 살고싶어. 비열하게 욕도 하고, 비겁하게 회피도 하고, 추잡하게 매달려도 보고 그렇게 살고 싶어. 그럴 만한 힘이 있었으면 좋겠어. 매일 아침 몸무게를 재며 전날 무엇을 처먹었는지 생각하고, 그래서 오늘 무엇을 먹고 어떤 걸 먹으면 안 되는지 생각하는 짓거리를 그만두고 싶어. 먹고 싶어서 먹었으면서 만족하지도 못하고,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나를 두들겨 패는 걸그만두고 싶어. 그러다 통증이 찾아오면 바닥을 뒹굴며 짐승처럼 끙끙대고, 병원에 기어가서 혈관에 진통제를 놓아달라고비는 짓을 그만하고 싶어. 약에 의존하면서, 의존할 수밖에 없는 몸을 가진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나를 그만 미워하고 싶어. - P287

완벽한 건강이라는 것. 완벽한 몸이라는 것. 내가 살려면 완벽해야 한다는, 그래야 살 자격이 있다는 그런 생각을 멈추고 싶어. 해리아. 내 몸이 새것이었으면 좋겠어. 그럼 이번에는 정말잘 살 거야. 그럴 거야. 왜 나는 새것을 갖지 못하는 거야? 열심히 살았는데, 노력했는데 왜 그런 거야? 내가 주제에 맞지 않게 너무 욕심을 부린 거야? 영직동에 처박혀 살지 않고 그곳을벗어나고 싶어 해서 그런 거야? 곰으로 태어났으면서 곰처럼살기 싫어해서 그런 거야? 그래서 벌을 받은 거야? 이 생각. 생각들. 그래. 나는 이 생각들에 중독됐어. 생각하는 걸 멈출 수없어.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밥을 먹고 아파서 뒹굴고 소리 지르고 깨어나고, 또 약을 먹고 헛것을 보고 몸무게를 재고, 거울 - P287

앞에 선 나를 보는 순간. 그 모든 순간. 매일 매 순간! 나는 언제나 내 몸에 대해서만 생각해. 생각이 멈추지를 않아. 뇌 어딘가 고장 난 것 같아. 매일 내가 한 움큼씩 집어 먹는 약들은사실 생각들이야. 그 약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나비와 같은 날개를 가진, 펄럭거리며 날아다니는 생각들. 나비들은 이미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위장과 자궁, 혈관과 항문까지 번져가고 있어. 어떻게 하면 이것들을 몰아낼 수 있지? 어떻게 해야 해? 또 약을 먹어야 할까. 이 나비들을 죽이는 약 말이야. 그래, 해리아. 나는 그래서 왔어. 나를 새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이 생각들을 멈추고 싶어서. 네가 그랬잖아. 최초의 기억을 찾아내면, 그래서 그 기억의 의미를 알게 되면 사는 것처럼 살 수있다고. 나를 구할 수 있다고. 새것이 될 수 있다고.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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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니 파미르 하이웨이에서 만난 여인들은 누구나 마디나 같았다. 신산한 삶의 파고 같은 건 내보이지 않고, 그저 지나가는 이를 환대할 뿐이었다. 감자 캐는 모습을 찍으려는 나를 보고 일어서서 포즈를 취해주는 바람에 뻣뻣한 자세의 사진만 찍게 만든 랑가르의 할머니도, 어린딸을 옆에 앉혀놓고 밀을 베다 말고 차 한 잔을 내밀던 지제우의 젊은 여인도, 조식에 나온 팬케이크를 잘 먹는 모습을 보고 다음 날 두 배는 많아진 팬케이크를 내밀던 호록의 할머니도. - P33

알리추르 마을의 고도는 3,991미터였다. 알리추르는 ‘알리의 저주‘라는 뜻. 예언자 마호메트의 사위 알리가 이 지역을 여행하는 동안 혹독한 기후와 지독한 바람에 대해 한소리 하셨단다. 그걸 또 좋다고 마을의 이름으로 삼은 이들의 감수성이 남다르다. 이 주변에는 곰도 살고, 아이벡스산다는데 도대체 어디서 뭘 먹고 사는 걸까. 1년 중 151일눈이 오고, 겨울철에 영하 30도까지는 아무렇지 않게 내려가는 곳에서. 나무 한 그루 없이 온통 회색인 이 환경을 이들은 그저 견디고 있는 걸까. 아니, 내가 알지 못하는 삶의기쁨이 분명 이 마을 구석구석에서 빛나고 있을 터였다. 작고, 소소한 환희의 순간이 이들에게도 수시로 찾아올 것이다. 어차피 삶은 거창한 희망 같은 걸로 견디는 건 아니니까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간다운 삶의 기본은 전기와 수도가 아닌가. 전기는 그렇다쳐도 생존을 위해 깨끗한 물만큼은 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나라의 영아사망률이 높은 이유에는 분명 상수도가 - P34

없는 환경도 작용했을 것이다. 잿빛 강에서 물을 길어오는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눈이 시렸다. 마을의 여자와 아이들이 물 긷는 일에 쏟을 시간과 에너지를 생각하면 아깝고 분했다. 파미르 하이웨이를 넘는 내내 ‘여행자라니, 참 한가하군, 자조적인 기분이 들곤 했다. 파미르에서는 모든 것이 부족했고, 덕분에 주어지는 모든 것이 소중했다.
두산베로 향하기 전, 오토바이도 다닐 수 없는 가파른 산길을 세 시간 걸어가야 다다르는 지제우 마을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진흙으로 지은 소박한 집들의 담벼락에는 소똥이 말라가고, 다랑논마다 온 가족이 모여 밀을 베고 있었다. 끝나가는 여름의 햇살이 노랗게 익은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자로 할아버지가 마흔여덟 마리 양과 아홉 마리 소를 키우며 어린 손주들과 함께 살아가는 집이었다. 냇가의정자에 앉아 감자를 섞은 메밀밥으로 저녁을 먹고, 살구나무가지 위로 무수한 별들이 내려앉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침은 소리로 찾아왔다. 장난치는 아이들 웃음소리, 기세 좋게 흘러가는 물소리, 살구 열매를 탐하는 새들의 울음소리,
손녀를 부르는 할머니 음성,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의 결이달랐다. 자로 할아버지가 왜 산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지,
할아버지의 딸이 왜 그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 P35

지 알 것도 같았다.
파미르의 마을을 마음으로 더듬다 보니 지금 여기 수도 두샨베의 풍경이 더 슬프게 다가온다. 이 도시의 어설픈 화려함이, 건물마다 걸린 대통령의 대형 사진이, 규모만 압도적인 건축물들이 서글프다. 국립도서관에서 열린 국제도서전에서는 이 나라 대통령의 자서전을 쌓아놓고 있었다. 중심가에서는 멀쩡해 보이는 보도블록을 교체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두샨베가 마음에 드냐고 묻는 이들은 옷차림에도, 태도에도 자신감이 흘렀다. 쓸쓸한 마음으로 도시를 걷다 돌아오던 길, 숙소 앞에서 어린 소녀와 마주쳤다.
열서넛쯤 되었을까. 어린 소녀는 노인의 얼굴을 한 채 빵이쌓인 수레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파미르 고원어디에선가 양을 치고 꼴을 베던 아이는 아니었을까. 내가기억하고픈 이 나라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 P36

카자흐스탄에 도착해 심카드를 갈아 끼웠지만 알마티를 벗어나니 인터넷이 터지지 않았다. 당연히 사티 마을에서도 디지털 라이프를 기대하지 않았다. 가이드북에 내가예약한 집은 샤워 시설이 없다고 쓰여 있었기에 불편을 각오했다. 사흘 정도 샤워를 못 하면 냄새야 좀 나겠지만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였다. 씻지 않고 15일을 버텼던 엄청난 기록의 소유자가 나였으니(에베레스트 겨울 트레킹을 하던 때의 일이었다). 막상 내가 묵을 자나라의 집에 도착하니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서 와이파이가 터졌고, 화장실에는 우리 집보다 더 좋은 샤워 시설이 있었다. 걷다가돌아와 따뜻한 물에 몸을 씻는 축복을 이 깊은 산골에서 누릴 수 있다니. 생각도 못 한 기쁨이었다. 3년 전만 해도 이마을 어디에도 샤워 시설이 없었단다. 그 3년 사이에 산천이 뒤집혀 이제는 대부분이 샤워 시설을 갖췄다. 그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든, 가축보다도 더 큰 수입원이 된 관광객을 위해서든, 내 눈에는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저개발국의주민들이 자연보호를 명목으로 불편한 삶을 감수해야 한 - P39

다는 의견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그런 삶을 살고 있을 때조차 폭력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내게 중요한 건 문명의혜택을 무조건 거부하는 게 아니라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다.
사티 마을은 콜사이 호수로 향하는 길목에 있다. 해발고도천 5백 미터에 자리한 작은 마을은 관광 시즌이 끝난 후여서 고즈넉했다. 민박집의 창밖으로 풀을 뜯는 말과 양이 보였다. 숙소를 나와 5분쯤 걸어가면 강변이었다. 해가질 무렵이면 마을 끝의 언덕에 올라 책을 읽었다. 그 시간이 너무 완벽해 슬픔이 스며들 정도였다. 천산산맥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따가운 햇살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거친 대지 위의 작은 집들이, 거기 깃든 사람들의 소박한 살림이, 들판에서 풀을 뜯는 가축들이, 나를 위로했다. 지금 이곳에서 이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이 오직 나뿐이라니, 이 작은 마을이 이토록 커다란 충만함을 주다니, 어리둥절했다. 거대한 자연 앞에 서면 나는 늘 작아진다. 우주의 티끌 같은 존재임을 매번 확인한다. 그 자연의 냉혹함에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나를 늘 겸손하게만든다. 어떤 종교적 성소에 들어선 듯 말과 행동을 조심하게 된다. - P40

사티 마을은 짧은 시간에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알마티에서 사티로 오는 도로가 좋아져 여섯 시간씩 걸리던 길이 네 시간이 채 안 걸렸다. 도로가 깔리면 한 마을의 삶은확연히 달라진다. 도로를 따라 온갖 것이 외부에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 거친 파고를 흔들림 없이 감당할 수 있는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사람들이 생겨나면 마을에는 없던 빈부 차도 커진다. 우리가 그랬듯 그들 또한 편리함을 선택함으로써, 지구상 다른이들과 똑같은 욕망을 갖게 됨으로써, 그들이 지녔던 많은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 상실을 나는 안타까워하며 지켜보겠지만, 그로 인한 고통은 온전히 그들이감당해야 할 몫이다. 겨우 며칠 머물다가 모든 편리함을 다갖춘 도시의 삶으로 되돌아갈 내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으니. 그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내가 다녀감으로써 이들 삶에 끼치게 될 부정적인 영향이다.  - P41

부지런히 일하는 여자들의 강인함이, 메마른 대지에서쉼 없이 풀을 뜯던 말과 양 떼와 소들이, 고개를 들면 보이는 설산과 성벽처럼 마을을 두른 민둥산이, 밤이면 불빛 없는 마을을 밝히던 밤하늘의 무성한 별들이, 너무 투명하고깨끗해 내 몸에 고스란히 채워 넣고 싶었던 공기가, 푸른바닷물 한바가지를 그대로 쏟아부은 것 같은 하늘의 색이, 시냇가에 서서 노랗게 물들어 가던 자작나무들이 찾는이 없이도 바라보는 이 없이도 저 홀로 아름다운 마을의 모든 것들이 나는 좋았다. 나는 이제 다시 도시로 돌아가지만 이들의 삶은 이곳에서 그대로 계속될 것이다. 내가 남기고가는 흔적과 함께. 그날따라 그 사실이 마음에 사무쳤다. - P44

작지 않은 이 민박집의 모든 청소와 다림질, 요리를 안젤리카 혼자 해낸다. 가축 여물을 주고, 마당의 잡초를 뽑고, 손님 방에 장작을 때고 하는 일은 남편 시미온의 몫. 저녁식사를 할 때 남편이 아내를 도와 그릇을 옮기거나 서빙을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이 집의 모든 침구류는 흰색이었는데 빳빳하고 뽀송뽀송하다. 그걸 혼자서 빨고, 다리고,
씌운다니 상상만으로 나는 고개가 절레절레. 하루에 도대체 몇 시간 일하냐고 물으니 안젤리카는 "24시간!"이라고 답하며 웃었다. 그런데도 일에 찌든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마음을 다해 손님을 대접한다. 키우는 가축을 돌보는 태도도 다정하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하지만, 돈이 결코 전부가 아닌 사람의 태도다. 자신이 하는 일이 결국 살아 있는 존재를 향한다는 사실을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이의 존엄이 그녀에게 배어 있었다. 그 집을 떠나던 날, 안젤리카는 마당의 포도와 사과, 직접 구운 케이크와 과자를 가득 담아 건넸다. "우리의 첫 한국인 손님이 되어줘서 정말 기뻤어"라는 말과 함께.
이 산골 마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바라는 삶이다. 보람이 있는 노동을 하며, 자연과 격리되지 않은 채, 이웃과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삶. 우리는 - P53

점점 그런 삶에서 멀어지고 있다.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이가 보람이나 긍지가 있는 노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자연을 누리는 여유도, 타인을 챙기는 손길도 모두 돈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일까. 망설이는 사이 꿈꾸는 삶은 또다시미래의 일로 미뤄지고 있다.
- P54

짧은 동네 산책에 비극의 조지아 역사가 고스란히 따라온다.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 사이에낀 조지아는 끝없는 외침을 받았다. 코쉬키는 외침에 대비해 쌓아 올린 방어용 탑이다. 전쟁이 나면 식량을 들고 들어가 버티기 위해 만든 탑이 이제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후 조지아의 청년들 3천여 명이 우크라이나로 달려갔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국제 연대였다. 조지아도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러시아의 다음 목표가 조지아라는 소문도 무성하다. 이 나라의 청년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남의 일로만 여길 수 없었을 것이다. 광주항쟁 유족회에서 세월호 참사의 어머니들을 위해 내걸었던 현수막 글귀처럼.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여행은 결국 자기만의 세계사 교과서를 써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역사는 많은 경우 승리한 자의 시선으로 쓰인일방적인 이야기일 수 있기에. 여행을 통해 우리는 평소 만 - P58

날 수 없었던 이들(패한 자, 소수자들, 경계인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로, 그들의 삶을 듣게 된다. 역사책 안 익명의 존재가 아니라 이름과 목소리와 체온을 지닌 구체적인 인간으로 만나는 시간이다. 그런 경험이 쌓여갈 때마다 자신만의 세계사가 새롭게 쓰인다. 세상이 내게 주입한 지식이 깨져 나간다. 그 자리에 내 시선으로 해석한 세계가 들어선다.
그렇기에 ‘여행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온 생각의 성을 벗어나는 것‘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조지아인의 목소리로 조지아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조금씩 더 조지아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여름의 태양은 날카로웠지만 고도가 높아 바람이 서늘했다. 성수기인데도 트레일은 고즈넉했다. 이 아름다운 코카서스 산맥을 걷는 이들은 우리를 빼면 스무 명 남짓이 전부였다. 몸을 써야만 하는 일이 점점 줄어드는 시대에 이렇게나마 내 몸의 육체성을 확인하는 일은 고되면서도 뿌듯하다. 허벅지의 근육이 끊어질 것처럼 팽팽히 당겨지는 오르막을 오르고, 맨발로 얼음장 같은 계곡물을 건너고, 땀을쏟으며 가쁜 숨을 내뱉는 일. 그런 순간이면 내 몸이 제대로 기능을 해내고 있음에 안도하게 된다.  - P59

나는 왜 또 카미노를 걷겠다고 나선 걸까. 혼자 걸어도안전하니까, 지독한 길치도 화살표만 따라가면 길의 끝에다다르니까, 수많은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으니까, 비용도많이 들지 않으니까. 저마다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 카미노는 언제나 내 안의 가장 선한 얼굴을 만날 수있는 길이었다. 더 겸손하고, 더 강인하고, 더 다정한 나를만날 수 있는 길. 그런 나와 조우하며 걷다 보면 종교가 없는 나에게도 영적인 순간이 종종 찾아왔다. 세상 모든 것에 깃들어 있는 신의 손길을 느끼고, 더 나아가 내 안의 신성을 발견하고, 그 신전에 반짝 불이 들어오는, 그런 경이로운 순간들 말이다. 적어도 카미노를 걷는 동안은 스스로좀 더 영적인 인간이 된 것 같아 하루가 늘 감사함으로 마무리되었다. 나는 이 길이 지닌 평등함도 사랑했다. 이 길에서 우리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불린다. 페레그리노(순례자).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무엇을 이루었고, 또 무엇을 잃었든 간에 이곳에서는 그저 순례자일 뿐. 삶에 필요한 모든것을 배낭 하나에 넣고 먼 길을 고행하듯 가는 순례자. 그래서 이 길을 걷는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다른 자신을 꿈꿀 수 있다. - P68

과거를 넘어서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지금 여기에오로지 집중할 수 있는 길이었다. 거기에 더해 카미노가지넌 천년의 역사성. 그 긴 세월 동안 이 길을 걸어온 사람들을 상상하면 나는 길 위에서 외롭지 않았다. 그들의 사연과눈물과 땀이 내가 걷는 발자국 아래 켜켜이 쌓여 있다고 믿었으니까. 지구 위에 이런 길이 있다는 걸 떠올리는 것만으로 든든했다. 삶이 나에게 불친절해지면 잠시 그리로 가면돼, 그럼 나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어서 돌아올 거야. 내게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도피처 하나가 있는 셈이었다. 쓰라린 사랑이 끝났을 때도, 전셋값 폭등에 내동댕이쳐졌을때도, 나는 삶을 견디고 사랑하기 위해 카미노를 찾아갔다.
카미노는 나에게 은신처이자 학교이며, 병원이고 사원이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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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

여행가 유목하듯 살아오고 있다. 언젠가는앉아서 유목하는 경지에 오르기를 바라며.
스무 해 넘게 여행으로 삶을 이어오며 수많은 길을 걷었다. 길 위에서 그는 아무것도아닌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여행은 언제나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끔했다. 더 선한 사람, 지구와 타인에게 해를덜 끼치는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게 했다.
그 간절함이 지금도 그를 여행으로 이끈다.
‘여행이란 결국 낯선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편협한 세계를 부수는 행위‘라고 믿는 그는 오늘도 기꺼이 길을 나선다. 언제까지 여행할 수 있을까 하는 조금은 무거운마음으로.
지은 책으로는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외로움이 외로움에게>, <삶의 속도, 행복의 방향>공저, <라틴아메리카 춤추듯 걷다>, <이별의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길 위에서 읽는 시>, <여행할 땐, 책>,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등이 있다.

넓디넓은 세상을 걷고 보고 듣고맛보고 느끼며 사는 그녀를 나는‘남희쌤‘이라 부른다.
가볼 꿈조차 꿀 수 없는 곳의 풀과 나무, 동물, 오래된 도시의 색과 냄새,
그네들의 순박한 웃음과 친절⋯⋯여행 끝에 가슴에 남는 사람들이그녀를 다시 길 위에 서게 할 것이다.
마치 끝 모를 바람처럼,
"누가 보았을까 부는 바람을
아무도 보지 못했지 저 부는 바람을"
‘남희쌤‘에게선 바람 냄새가 난다.
나도 한바탕 떠났다 돌아온 기분이다.

양희은, 가수

훼손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가치가 있다.
길위에 선 그의 단단한 내면에 동화되다가 수직이 아닌수평의 시선으로 사유하는 그를 보며 경외심마저 느낀다.
행간과 틈새 사이에 끊임없이 내가, 우리가 고개를 내민다.
여행이 몸에 새겨져 어느새 삶이 된 작가를 바라보면서그와 닮은 시선으로 사유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여행을 일상의 탈출이나 삶의 여백이라 여겼던 내 한계까지 돌아보면서,
이 책은 훼손되고 싶지 않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떠오르게 한다.
여행을 마치고 나를 찾아 돌아온 기분이다.
일단 떠나는 수밖에, 그 결심이 나를 지킨다.

박미옥, <형사 박미옥> 저자

미처 예상치 못했다. 집을 짓지 않고 떠도는 삶이 이렇게 길어지리라고는. 찬바람 부는 1월의 인천항에서 중국행배에 오를 때 나는 서른셋이었다. 서른셋은 지닌 재산이 적어 탕진하는 부담도 적은 나이였다. 3년 정도면 전 재산이 사라질 테고, 그 무렵이면 여행도 끝이 나리라 믿었다. 먼지 묻은 배낭을 앞뒤로 메고 낯선 도시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관광안내소로 향했다. 그곳의 직원은 지도에 가볼 만한곳을 표시하고, 예산에 맞는 숙소를 골라줬다. 전화를 걸어 빈방을 확인하고, 예약을 해주기도 했다. 시리아나 레바논처럼 정보가 부족한 나라를 여행할 때면, 먼저 다녀간 여행자들이 방명록에 남긴 정보를 얻기 위해 여행자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던 특정 숙소를 찾아가고는 했다.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는 거리의 사람들에게 수십 번씩 길을 물어야 했다. 여행은 온전히 타인의 친절에 기대는 행위였고, 타인과 소통하는 과정이었다. 그 시절에는 한 번의 여행을 - P8

마치면 한 명의 사람이 남았다.
여행하는 삶을 살아온 지도 어느새 23년 차. 이제 여행은 타인의 친절이 아니라 스마트폰 검색에 기대는 일이 되었다. 쉽고 편리해졌다. 가격 비교 사이트에서 비행기표를고르고, 클릭 몇 번으로 숙소를 예약하고, 구글 리뷰가 좋은 식당을 찾아가면 된다. 큰 용기가 없어도, 외국어를 하지 못해도, 누구나 실패 없는 여행을 하고 돌아온다. 어디서나 쉽게 여행자를 만날 수 있지만 친구를 사귀기는 더 어려워졌다. 쌀독의 낱알만큼 흔해진 여행자는 이제 환영받는 존재도 아니다. 소음과 쓰레기 문제와 주거난을 일으켜 현지인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주범이 되었을 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그곳에서 사귄 친구의 연락처 대신 수백 장의 사진만 남는다.
"여행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온 생각의 성을 벗어나는 일이다." -신영복 - P9

여전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의 정의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내가 알던 상식과 진리가 무너진다. 걸으면 걸을수록 질문이 생겨나고, 내가 배워온 것들을 의심하게 된다. 거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와 타인이, 나와지구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조금 더 사랑하고아끼게 된다. 여행은 언제나 더 나은 내가 되고 싶게끔 했다. 정말이지 조금 더 선한 사람이 되고 싶고, 지구와 타인에게 해를 덜 끼치는 존재가 되기를 갈망한다. 그 간절함이나를 여행으로 이끈다.


코비드 역병의 시대는 내 삶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강연과 글쓰기뿐이던 생계 활동에 에어비앤비 호스트, 방과후 글쓰기단, 방과후 산책단이 끼어들었다. 한마디로 ‘N잡러‘로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살아보니 그 어느 것도 절 - P10

대적인 수입이 되지 못하는 대신에, 그 어느 것에도 절대적으로 메이지 않아도 되었다. ‘원하지 않으면 때려치울 수있어. 아니면 말지 뭐‘ 하는 가벼운 마음이랄까. 이제야 나는 ‘빠꾸의 힘‘을 알게 되었다. 그 모든 일 중 끝까지 놓고싶지 않은 일은 가장 어려운 글쓰기다. 마지막 순간까지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읽어주는 사람이 있는 글쓰기를하고 싶다는 욕망. 결국은 타인과 소통하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쉽지 않은 방과후 산책단을 계속 꾸려가는 이유도 결국은 그 열망 때문이다.
꼭 5년 전 봄, 혼자 여행하던 내가 방과후 산책단이라는이름으로 함께하는 여행을 시작했다.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코비드 초기에 지인이 조언했다.
"네가 산책하는 걸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봐."
단체 여행이라니!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가족과 여행하는 일도 고난의 행군인데, 처음 보는 사람들을 데리고 여행 - P11

한다고? 수명을 자발적으로 단축하다니! 흰머리 늘어나는 소리가 실시간으로 들릴 것 같았다.
역시나 방과후 산책단과 함께하는 여행은 만만치 않았다.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를 책임져야 하니 어려울수밖에. ‘책임감 제로‘의 삶을 살기 위해 고양이도 입양하지 못하는 사람인데 열 명을 책임지는 일을 하게 되었다. 피를 나눈 남자가 내게 "뭐야, 여행도 하고 돈도 버는 거야? 세상 ‘꿀잡‘이네"라고 했을 때 등짝을 후려치고 싶었다. 산책단은 나에게 여행이 아닌 일이었으니. 그것도 노동 강도가엄청나게 센 해외 출장. 성격도 까칠하고, 고집도 세고, 융통성도 부족한 내가 체력과 취향과 성격이 다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다니려니 매일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그 좌충우돌의 시간 동안 방과후 산책단을 구상했을 때품었던 소망은 더 간절해졌다. 다른 방식으로 여행하고 싶다는 바람,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다니는 게 아니라, 조금 - P12

느슨하고 느리게 하는 여행. 유명한 곳만 찾는 게 아닌, 덜알려진 곳도 찾아가는 여행.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 자연을 존중하는 여행, 한 나라에 최소 열흘 이상 머물며, 여섯 명에서 열 명 미만의 소규모로 다니는 여행. 현지 음식을 먹으며, 현지인이 운영하는 작은 숙소에 머물고, 현지인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여행. 에코백, 도시락통, 수저,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며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하는 여행, 조금 귀찮고 불편해도 지구를 위하는 여행. 어디에 가든 최소한의 흔적만 남기고 돌아오는 조심스러운 여행을 만들고싶었다. 그런 바람으로 꾸린 방과후 산책단은 첫 조지아 트레킹을 시작으로 어느새 열아홉 번의 해외 일정을 마쳤다.
생계를 위해 방과후 산책단을 시작했지만, 보람과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면 지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름다운 것과 마주칠 때 마음 깊이 번져오는 감동을 나눌 수 있는 이가 곁에 있다는 충만함. 내가 준비한 프로그램에 몰입하는 - P13

이들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즐거움. 내가 지키고픈 원칙을 존중해주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 오래도록 인연을 이어가고픈, 결이 맞는 사람을 만나는 기쁨. 여행으로 인한 공감과 만남이 방과후 산책단 안에 있었다. 산책단을 마치고나면 늘 사람이 남았다.

여행하는 삶에 대한 갈망은 여전하지만, 짐을 꾸릴 때마다 묻게 된다. 언제까지 여행할 수 있을까. 갱년기를 맞아삐그덕거리는 몸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앓고 있는 지구를어디서나 체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여행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보다 훨씬 못난 인간이 되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해심은 바닥이고, 무지하면서 편협하기까지한 꼰대가 되지 않았을까. 지금처럼 반성하는 꼰대도 아닌, 구제불능의 꼰대 말이다. 여행을 통해서야 나는 더불어 - P14

살아가는 일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말을 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 눈길이 갔고, 지구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의 목록을늘려갔다. 여행을 함으로써 나는 조금씩 더 다정해졌다. 나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지구에게도.
낯선 이의 호의에 기대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때마다 중얼거린다. 여행하는 삶을 살아오길 잘했어. 포기하지않고 여기까지 오기를 정말 잘했다. 그러니 아직은, 일단떠나는 수밖에.
대만 타이난에서
2025년 봄날에 - P15

생명을 귀히 여겼지만 그 생명을 취해 자신의 생명을유지하는 일에 망설임이 없었다. 지닌 것을 이웃과 나누는일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손님을 환대하는 풍습이 살아 있어 누가 와도 차와 간식을 내놓고는 했다. 큰죄를 짓는 일도 없이, 허망한 욕망에 좌절하는 일도 없이, 어제와 다름없는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었다. 그 땅에서삶은 단순했다. 때에 맞춰 양을 몰고 나가 풀어놓고, 온 가족이 모여 꼴을 벴다. 들판에 살구나 버찌가 여무는 계절이오면 따서 잼을 만들었다. 술 한잔이 생각나면 양동이를 들고 나가 말의 젖을 짜 크므스를 만들고, 매일 먹는 치즈와 요거트는 염소와 양의 젖을 발효시켜 만들었다. 겨울이 오면 쌓아둔 건초를 가축에게 먹이며 봄을 기다렸다. 가축에게 먹일 물과 풀이 있는 한 삶은 풍족하다고 여겼다. 이 삶의 양식을 1년에 석 달만이라도 이어가며 사는 한, 성정이 모질고 강퍅해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이 삶조차 머지않아박물관의 유물로나 남게 될까. 아마도 그렇게 될 것이다. 유목민의 아이들 중 장래 희망이 목동이나 양치기인 아이는 없다고 했으니. 피할 수 없는 신탁처럼 예고된 그 변화를 상상하면 괜히 목이 메었다.  - P25

고도가 높은 초원은 8월인데도 밤이 되면 기온이 떨어졌다. 저녁을 먹고 나면 유르트의 주인은 난로에 소똥을 넣고 불을 지폈다. 잘 마른 소똥은 냄새도 없이 유르트를 따뜻하게 데웠다. 유목민들의 텐트에서는 모르는 사람들과함께 자야 했다. 낯선 이들과 뒤섞인 채 1년에 한 번 빨요위에 침낭을 덮고 누워 있으면, 새삼 너무 많은 것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끌어안은 양과 말, 내가 놓지 못하는 떠도는 삶에 대한 욕망. 결국 우리는 각자에게 절실한 것을 붙잡고 생을 건너가는 중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꿈도 없는 잠에 빠져들고는 했다.
지금쯤 그 땅에도 봄이 찾아와 초원을 덮었던 눈이 녹기시작했을까. 곧 새 풀이 돋아나고, 그 풀이 자라 초원을 뒤덮고, 바람이 순해지는 6월이 오리라. 여리던 풀빛이 진해지면 유목민들은 다시 양과 말을 끌고 초원으로 나가 유르트를 칠 것이다. 강과 초원에 기대어 목숨을 맡길 것이다. 먼 조상들이 그랬듯이, 아직은 끝나지 않은 삶을 이어갈 것이다. - P26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은 풍경이 달랐다. 푸른 초원이 사라지고,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불모의 땅이 이어졌다. 도로의 왼편으로는 회색의 판지 강이 흐르고, 강 너머는 아프가니스탄이었다. 강물조차 잿빛이라 온통 무채색이었다. 도무지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풍경 사이로 장식도 색채도 없는 사각형의 흰 집이 띄엄띄엄 보였다. 그 너머로 빛나는 설산이 아니었다면 더없이 삭막했을 터였다. 타지키스탄은 국토의 93퍼센트가 산이고, 국토 절반 가까이가고도 3천 미터를 넘는다. 거기에 더해 7천 미터급 봉우리가 네 개. 그냥 ‘세계의 지붕‘이 된 게 아니었다. 저 산맥에깃들어 산다는 눈표범과 마주칠까 싶어 매서운 눈으로 산들을 훑어보고는 했지만, 당연하게도 눈표범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파미르 하이웨이에서 가장 높은 악바이탈 패스는 ‘악‘소리가 날 것 같은 4,655미터의 고도,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쏟아지는 눈발에 산들이 하얗게 묻히고 있었다. 기념사진을 찍는 이들이 8월의 눈을 맞으며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고개를 자전거로 올라오는 청춘들이 보였다. 제 몸으로 세상을 열어가는 그들이 누릴 고통 가득한 환희가 부럽기도했다. 삶은 저지르는 자의 것이라는데 패기 없는 나는 기껏 - P30

다음 생으로 미룰 뿐이었다. 경주에서 이스탄불까지 걸어서 실크로드를 가로지르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은 시절이내게도 있었는데... 겁 많고 소심한 나는 여기까지도 겨우겨우 넘어왔을 뿐이다.
수도 두샨베의 대통령궁 앞에 대형 사진으로 걸고 싶은소녀 마디나를 만난 곳은 무르가브였다. 무르가브에는 컨테이너 상자로 만들어진 시장이 있었다. 파미르를 넘다가사고가 난 화물차들이 버리고 간 컨테이너의 재활용이었다. 옷가게, 채소 가게, 전기용품 가게, 기념품 가게, 핸드폰 가게가 된 컨테이너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삭막하면서도 활기가 느껴지는 기묘한 풍경이었다. 시장 끝 우물가로물을 길어 온 아이들 사진을 찍다가 노란 원피스를 입은 마디나와 눈이 마주쳤다. 한 손에는 물이 든 양동이를, 다른손에는 세 살 남동생 누르블롯의 손을 잡고 걷던 그녀가 서투른 영어로 말했다.
"우리 집에 갈래요?"
그녀를 따라가니 할머니와 어머니, 삼촌까지 달려 나와 우리를 맞았다. 거실로 쓰는 큰방에는 다른 집처럼 이불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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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스트레스를 받고, 낫지 않으니까 스트레스를 받고, 병명을 모르니까 스트레스를 받았다. 치료법을 알 수 없어서 힘들었다. 모든 의사들이 다 괜찮다고 해서 화가 났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고?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해야 마음이 편해지지? 언제쓰러질지 모르고 언제 소리를 지르게 될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방법을 당신들이 말해줘야지. 그래서 찾아온 게 아닌가. 원인을 알고 싶어서, 병명을 찾고 싶어서.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내고 싶어서! - P172

그런데 다들 왜 내게 묻는가. 어디가 문제냐고. 왜 스트레스를 받느냐고. 그게 지금 의사가 할 소리야? 그러나 나는 병원을 박차고 나가지 않았다. 그들에게 매달렸다. 네, 선생님 스트레스가 심해요. 제 날개뼈 아래에 괴물이 살거든요. 그 괴물이매일매일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어요. 형체도 없고 냄새도 없고 소리도 내지 않아요. 하지만 있답니다. 선생님은 저를 믿어주셔야 해요. 그놈은 제 살점을 찢고 고개를 쳐들어 밖으로 나오려고 하고 있어요. 제 몸속을 쪽쪽 빨아먹고, 제 비명에 즐거워하며 몸집을 키우죠, 선생님, 잠재워주세요. 나오지 못하게해주세요. 아니면 차라리 나오게 해주세요. 끄집어내주세요.
나는 또 병원을 바꿨다. 대학병원으로 갔다.
간신히 섬유근육통 진단을 받았다. 정말로 간신히. 왜냐하면 섬유근육통의 전형적인 증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 P172

내가 호소하는 통증의 강도와 느낌은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했다. 그러니 통증을 줄이는 약을 복용해보자고 했다. 그래 결국은 또 진통제였다. 그러나 안심이 됐다. 섬유근육통이라. 신경통보다 훨씬 구체적인 병명이지 않은가. 희망이 생겼고, 기운이 났다. 뭐든 해보자 싶었다. 진짜 끝까지 노력해보자. 그래서 정갈한 식사를 했다. 깨끗한 음식. 엄마가 말하던 그런 음식들. 푸른 잎사귀와 과일, 잡곡밥, 콩, 두부, 등푸른생선과 버섯. 하루에 만 보 이상 걸었고, 명상도 했다. 나비 약도 완전히끊었다. 폭식과 절식을 그만뒀다. 7시간 이상 잤고, 새벽에 일어나 일기를 썼다. 감사한 일에 대해 썼다. 어제 충분히 잤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게 하루가 주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통중이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이었다. - P173

나아졌다. 하루 수십 번 찾아오던 통증이 두어 번으로 줄었고, 8 정도의 강도가 2로 낮아졌다. 내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그래서 안심이 되었는지 태인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나와 함께 있으면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고기나 기름진 음식도 먹지 않았다. 평화로웠다. 화목했다. 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반년. 아니 8개월? 의사가 말했다. "이제 약을 끊어봅시다.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완치였다. 그래! 완전한 회복! 내가 드디어 해낸 것이다.
그리고 어느 새벽, 나는 눈을 떴다. 아팠다. 8 정도의 통증. 아니, 9 정도의 통증. 아니, 10!
나는 소리를 질렀다. - P173

이후로는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이다. 약의 복용량을 늘리고 횟수를 늘리고, 부작용을 겪는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잠을잘 수 없다. 병원을 바꾼다. 다시 검사를 받는다. 결과는 정상이다. 내게는 어떤 문제도 없다. 새로운 약을 시도해본다. 정신과 약이 추가된다. 새로운 의심들도 추가된다. 계속 추가된다. 디스크, 자가면역질환, 과민성대장증후군, 불안장애로 인한 신체화 증상. 운동 부족. 과긴장성 골반저기능장애, 나중에는 꼭 통증만이 문제가 아니게 된다. 잠을 자지 못하자 면역력이 떨어지며 온갖 질병이 따라붙은 것이다. 감기, 몸살, 만성피로, 방광염, 구내염, 질염, 안구건조, 먹는 약이 계속 늘어난다.
20알, 30알, 단약과 재복용을 반복한다.
부작용과 금단 현상을 오간다. 소화불량, 오한, 설사, 두통, 구역감, 탈모, 현기증, 섬망, 심계항진, 근육긴장, 불면증, 과호흡. 환각, 이중 무엇이 부작용이고 무엇이 단약 증상인지 알 수 없어진다. 그래도 딱 하나.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증상이 있다.
폭식.
통증이 올 때마다 함께 밀려오는 역겨운 충동. 식욕. - P174

그래서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사랑을 보존하기 위해서, 두 사람이 영원히 잊지 못할 잔혹한 기억하나를 봉인했다. 그들이 함께하기 위해서는 그래야 했다. 연인을 보며 그때 일을 떠올려서는 안 되었다. 연인이, 그때 일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때문에 그들은그 기억 위에 다른 기억들을 덧씌웠다. 대화, 섹스, 다툼, 여행,
입맞춤, 포옹, 다툼, 화해, 동거....... 사랑에 사랑을 덧씌우며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지켰다.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절대로10월 26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연과 이영은 서로의 약점을 모르게 됐다. 그러니까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불가항력으로 끌려들어가게 되는 찰나. 어느 순간, 함부로 떠오르는 기억. 아니, 기억을 불러들이는 어떤 것들. - P270

돼지 같은 년.

그 순간, 수영장의 모든 아이들이 함께 수치심을 느꼈던 것같다. 아이들은 모두 자신이 가장 볼품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아이들은 다 함께 박지수에게 수치심을 떠넘겼다. 그래.
분명하다. 그래서 박지수가 떠난 것이다. ‘우리‘를 떠나 먼 곳으로 걸어갔다. 25미터 레일 끝으로, 그리고 다시는 ‘우리‘ 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 그날 그 사건 이후, 박지수의 등에 붙어 있던 수많은 말들은 결국 지연이 불러들인 악마들이었다. 친구가 죽든 말든 가만히 서 있던 년. 움직이지도 않던 년, 친구도 아닌 년,
...... 생각하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가 없다.
지연은 단숨에 녹차를 들이켰다.
나는 언제쯤 참을 줄 알게 될까. 소리를 지르지 않는 사람이되고 싶다.
지연은 해가 저무는 풍경을, 도시의 풍경을 응시했다. 기억 - P276

은 계속 떠올랐다. 사고를 당한 후, 전교 1등은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수술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다. 그게 지연이 아는 전부였다. 졸업 후 부모님과 함께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게 되었으니까. 안진의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종종 화를 참을 수 없을 때,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소리를 지르게 될 때, 지연은 계속 그 수영장으로 되돌아갔다.
전교 1등. 친구가 많던 아이. 이영이 예뻐하던 아이, 지수도 그아이를 좋아했지. 마치 공주처럼 대했지. 지켜줘야 하는 사람처럼. 그래. 분명히 그랬다. 심지어 이름도 다르게 불렀다. 어떤 글자 하나를 더 붙여서, 소중하게 불렀어. 그래.
지수는 박해리의 이름을 꼭 이렇게 불렀다.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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